드뷔시에게 처음으로 죽음의 선고가 내려진 해는, 기묘하게도 현대 유럽 세계가 죽음의 선고를 최초로 통고받은 해와 일치한다. 벨 에포크 시대를 감싸고 있던 신사적인 분위기는 1차 세계대전의 참호 속에서 비참하게 죽어 썩어갔다. "비행기의 시대에는 그에 어울리는 음악이 필요하다. 아무도 그것을 쓰지 않으니 내가 그것을 써야겠다"라고 시종일관 자신만만해 했던 드뷔시도, 대장 속의 용종이 하루가 다르게 자신을 갉아먹는 것을 느끼면서 비로소 죽음에 대해 깊게 생각한 것은 아닐까.

 1912년의 드뷔시는 현대음악의 첨단을 달리고 있었다. 1권에 비해 더욱 농밀하고 미묘한 전주곡 2권을 출판하고, 동성애적인 함의가 숨겨져 있기는 하지만(물론 이것은 대본을 쓴 단눈치오에게 혐의를 물어야 한다) 충분히 작곡가의 이름값에 걸맞는 신비극 <성 세바스티아누스의 순교>를 완성했으며, 음세포를 극단적으로 쪼개 마치 쉼없이 형식이 유동하는 것 같은 발레용 관현악곡 <유희>를 쓰고 있었다. <유희>는 오랜 세월 자신의 가치를 알아볼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다가 1950년대에 이르러 비로소 드뷔시의 가장 뛰어난 업적 중 하나로 인정받았다. 1912년의 드뷔시는 음악적으로 성취할 수 있는 것을 거의 다 성취한 상태였다.

 그리고 <유희>의 완성 이후로 드뷔시의 작품활동은 침체기에 접어든다. 느리게 작곡하지만 큰 침체기 없이 꾸준히 성취를 거둔 작곡가치고는 이상할 정도의 침체였다. 독주 플루트를 위한 <시링크스>와 우울한 독주곡 <영웅의 자장가>, 그리고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몇 개의 소품을 제외하면, 1912년 이후의 그는 이렇다 할 작품을 남기지 못했다. 낯빛은 점점 검게 변해갔다.

 대장암 수술을 마치고 의사로부터 작곡 활동을 재개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은 드뷔시는 1년 간의 침묵 끝에 작곡을 재개했다. 그 전인 1914년 여름에 유럽은 전화에 휘말렸다. 드뷔시의 가까운 지인들도 전쟁에 참가했고, 대부분이 참호에서 살아돌아오지 못했다. 드뷔시와 절친한 관계였던 출판업자 뒤랑의 조카인 자크 샤를로도 전장에서 불귀의 객이 되었다. 드뷔시는 참혹한 전쟁에 눈을 뜨면서 프랑스 민족주의자가 되었다. 그는 자신의 작품에 '프랑스 작곡가 클로드 드뷔시'라고 서명했다. 그가 작곡을 재개한 후 처음으로 완성한,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백과 흑으로>는 엄숙한 감정이 시종 차가운 분노를 감싸고 있는 걸작이다. 툭툭 튀어나오는 거칠고 날카로운 동기를 부드러운 온음음계가 감싸고 있다. 샤를로에게 헌정한 중간 악장에서 드뷔시는 드물게 루터 코랄을 인용했다. <내 주는 강한 성이요>. 평생 종교에 초연한 입장을 보였던 그로서는 드물게 종교적인 숭고함이 느껴지는 이 곡에서 그는 죽은 자에 대한 진심어린 기도를 올리고 있다. 중간부에서 감정은 회오리치며 산 자의 가슴을 강하게 찌른다. 그러나 곧 부드러운 온음음계가 나타나 그 분노의 감정을 감싸안는다. 마침내 죽은 자의 혼은 평온을 얻고 애도 속에서 빛을 따라간다.

 그러나 드뷔시는 동시에 <백과 흑으로>와는 전혀 다른, 이전에는 한번도 생각하지 않았던 음악을 쓰고 있었다. 그가 평생을 바쳐 애정을 표현했지만 동시에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었던 프랑스의 고전, 라모와 쿠프랭이라는 프랑스 바로크의 거장들을 다시 살펴보기 시작한 것이다. 두 거장의 화려하면서도 유연한 프랑스 기악곡 전통을 통해 드뷔시는 자신이 그렇게도 무시했던 소나타로의 귀환을 시도한다. 물론 드뷔시의 실내악 소나타는 프랑스 바로크적이지도 않고, 독일적이지도 않으며, 소나타 악장이라 불릴만한 것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소나타'라는 이름을 붙인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는 드뷔시가 만년에 계획한 여섯 곡의 실내악곡 중 첫 곡이다. 프롤로그에서 피아노가 느릿하게 딸림화음으로 첼로의 등장을 유도하면, 첼로는 유연하게 피아노와 대화를 주고받는다. 드뷔시 특유의 유연함은 여전하지만 프랑스 기악 전통이 단단하게 뿌리를 박도록 돕는다. 프롤로그의 느릿한 슬픔은 첼로가 기타 주법을 차용한 세레나데에서 죽음의 무곡으로 변한다. 피날레에서 두 악기는 빠른 속도로 끝을 향해 미끄러지듯 달려가는데, 스타카토와 피치카토로 끝맺는 코다는 텅 빈 느낌을 던져준다. 마지막 음이 사라지는 느낌을 그보다 더 강렬하게 전달하는 것은 힘들다.

 첼로 소나타에 이어 드뷔시가 완성한 열두 개의 피아노 연습곡은 후기의 다른 작품보다는 오히려 두 권의 전주곡에서 연관성을 찾아야 할 것이다. 드뷔시가 피아노 음악을 쓰면서 가장 많이 영향을 받았다고 알려진 두 사람, 프랑수아 쿠프랭과 프레데리크 쇼팽 중 누구에게 헌정할까 하고 고민한 이 연습곡은 결국 쇼팽에게 바치는 헌정사가 적힌 채로 출판이 이루어졌다. 드뷔시는 피아노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을 분할해서 크게 두 가지로 나누었다. 기교적인 문제들을 주로 다루는 여섯 곡은 첫 번째 파트에 실렸고, 음악적인 문제들을 주로 다루는 다른 여섯 곡은 두 번째 파트에 실렸다. 체르니의 지리한 어린이용 손가락 연습곡으로 출발하는 첫 번째 곡 <다섯 손가락을 위한>은 <어린이의 세계> 속 <그라두스 아드 파르나숨 박사>를 떠올리게 한다. <3도를 위한>은 전주곡의 <교차하는 3도>를 보충하고 있다. <4도를 위한>은 드뷔시가 화성적 금기를 깨는 데 자주 사용한 4도의 진행을 다루고 있다. <6도를 위한>은 작곡가 본인이 직접 언급했듯이 '전혀 추하지 않다.' <옥타브를 위한>은 왈츠 양식으로 장식한, 화성을 위한 곡이다. <여덟 개의 손가락을 위한>은 첫 곡을 확대해 재구성한 곡이다. <반음계를 위한>은 낡아빠진 반음계를 풍자하면서 거기서 새로운 흐름을 도출한다. 가장 늦게 완성한 <꾸밈음을 위한>은 뱃노래 풍을 취하고 있지만 C.P.E. 바흐가 설정한 꾸밈음에 대한 원칙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만드는 곡이다. <반복음을 위한>은 프랑스 클라브생 음악을 20세기로 옮겨놓은 것 같으면서도 조성적 질서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져 있다. <대비음을 위한>은 색채에 대한 드뷔시의 집념에 가까운 연구가 집약된 곡으로, 전곡을 통틀어 가장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작곡된) 아르페지오를 위한>은 달콤한 선율 속에서 음의 색채를 발산하고 있다. 마지막 <화음을 위한>은 순발력과 탄력이 넘치며 폭넓은 다이나믹을 요구한다.   

 이 작곡가에게 이런 곡을 작곡할 수 있는 힘이 아직 남아 있었단 말인가? 그는 병고에 시달리는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생동감 넘치는 곡을 썼다. 12개의 연습곡이야말로 드뷔시의 만년 음악 중 가장 이질적인 음악인 동시에, 가장 큰 성과라고 해야 할 것이다.

 연습곡을 완성한 후, 드뷔시는 바로크 작곡가가 아니라면 추구하지 않을 기묘한 편성의 실내악곡을 완성했다. 그 중 두 악기는 드뷔시가 편애하던 악기였지만, 비올라를 넣은 것은 기이한 일이다. 플루트와 비올라와 하프를 위해 작곡한 트리오 소나타는 그렇게 만년의 드뷔시가 작곡한 두 번째 실내악곡이 되었다. 익숙한 편성은 아니지만, 곡을 들으면 작곡가가 무엇을 추구했는지 이해할 수 있다. 플루트의 맑고 청량한 소리에 비올라의 퉁명스러운 유니슨이 끼어든다. 회고적인 느낌을 자아내는 하프는 자신의 가장 큰 장점인 아르페지오를 가지고 농밀한 색채로 가득한 그림에 마지막 방점을 찍는다. 첫 악장인 전원곡(제목 자체가 프랑스 바로크의 기악곡과 성악곡을 통틀어 단골손님인 전원곡 또는 전원극을 환기시킨다)에서 이 특징이 강하게 드러난다면, 간주곡은 좀 더 미묘하고 피날레는 색다른 주법을 요구한다.

 전쟁이 막바지로 치달으면서 참호전은 점점 더 끔찍한 양상을 띄기 시작했다. 탱크가 전략적인 목적으로 처음 등장하고 독가스가 살포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프랑스 젊은이들 셋 중 하나를 소멸시킨 전장은 이제 드뷔시가 사는 파리에서 불과 150km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전쟁이 4년째로 접어든 1917년, 드뷔시는 또다시 실내악곡에 손을 댔다. 이번에는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였다. 이것이 완성되면 그가 계획한 여섯 곡의 실내악곡 중 세 번째 실내악곡이 될 터였다. 원래 드뷔시는 오보에와 호른, 클라브생을 위한 소나타를 쓸 계획이었으나 도중에 계획을 바꾸어 이 바이올린 소나타를 완성했다. 그가 계획을 바꾼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다. 작곡은 1917년 2월에 끝이 났지만, 3악장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손질을 단행하여 4월 14일에 최종적으로 정서를 마쳤다.

 알레그로 비보의 첫 악장은 세 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첫 부분은 피아노가 두 개의 화음을 연주한 후 바이올린이 G단조 화성을 풀어 제시하면서 시작한다. 여전히 우아한 몸짓을 취하지만 그 몸짓에는 힘이 빠져 있다. 아니, 힘은 들어가 있지만 몸이 그 힘을 받쳐주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 환상곡풍의 간주곡 악장은 바이올린의 16분음표가 곧 오스티나토가 되어 곡을 끌고 간다. 두 악기가 하나의 리듬에 매달려 같이 춤을 춘다. 마지막 악장은 앞의 두 악장의 분위기를 쇄신하듯 쾌활함과 약간의 짓궃음을 동원하여 막을 내린다. 이 실내악곡을 쓰고 있을 당시, 드뷔시는 스트라빈스키에게 이런 말을 했다. "정전正典이 침묵하면 새로운 아름다움이 대기를 채워야 한다." 드뷔시가 쓴 것은 아마 옛 전통의 표피를 입은 새로운 아름다움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작곡가의 계획에 따르면, 그는 아직 세 곡의 실내악곡을 더 작곡해야 했다. 그러나 그것을 완성하는 것은 더 이상 작곡가의 몫이 아니었다. 1917년 5월에 바이올린 소나타를 초연한 것은 작곡가의 마지막 불꽃이었다. 

 1918년 3월, 독일군은 대공세를 취하여 파리 근교 100km까지 치고 들어왔다. 독일군의 대포는 파리 시내를 맹폭격했다. 폭격기들이 하늘에서 파리에 폭탄을 퍼부었다. 아수라장 속에서 어떤 사람들은 경고를 외쳤고, 어떤 사람들은 폭탄의 희생자들을 운구하거나 후송했고, 어떤 사람들은 애국적인 노래를 불러제꼈다. 폭격이 소강상태에 접어들 때마다 사람들은 창문 밖으로 "프랑스 만세!"를 외쳤다. 드뷔시는 자신의 고향 파리에 폭탄이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56세의 생애를 마쳤고, 그의 죽음은 전쟁에 휘말려 거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드뷔시의 죽음은 일견 자신의 고향 히포레기우스가 함락되는 가운데 숨을 거둔 아우구스티누스의 죽음과 비슷해 보인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의 유해는 비록 피난민들에게 운구되었을지언정 많은 사람들이 함께한 반면, 포탄이 떨어지는 파리 시내에서 드뷔시의 관을 운구해 장례식장까지 따라간 조문객은 불과 20여명에 지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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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바그너 이전의 음악과 바그너의 음악이 어떻게 다른가에 대해 거의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바그너가 음악에 어떤 혁신을 가져왔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이해한다고 말할지라도 거의 피상적인 것만을 읊조릴 뿐이다. 바그너가 음악에 혁신을 가져왔다는 사실을 망각하게 만드는 첫 번째 이유는 그가 그 혁신의 결과물을 충분히 누리고 살다 갈 정도로 오래 살았기 때문이다. 두 번째 이유는 그의 음악체계가 하나의 스타일로 자리 잡을 정도로 확고한 동시에 무수한 추종자들을 낳을 정도로 흡인력이 강했기 때문이다(그 추종자 중에 아돌프 히틀러가 있었다는 사실은 바그너의 비극인 동시에 음악 전체에 있어 크나큰 비극이다). 분명 만년의 영광과 추종자들의 숲은 그의 음악성을 바로 보는 데 있어 큰 장애가 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바그너의 음악이 치명적인 상처를 입은 것은 아니었다. 바그너의 음악에 가장 치명적인 상처를 입힌 일은 1933년 이후에 찾아왔으며, 12년 동안 그의 음악에는 지울 수 없는 낙인이 찍혔다. 생전의 그는 그런 일이 벌어질 것을 예상하고 자신의 음악이 그런 식으로 악용되는 것에 대해 경계했지만, 죽은 후의 일을 막을 수 있는 능력은 없었다.

많은 작곡가들이 한 번 이상은 바그너를 참고하고 그의 음악의 영향을 받았지만, 바그너 자신의 음악은 자신을 흡수한 작곡가들과 완벽한 차이를 보인다. 똑같은 반음계법을 사용하고 똑같은 이명동음정을 사용해도 바그너의 음악은 항상 다른 음악과 다른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는 무엇보다 음악적 동기의 발전에서 여타의 작곡가들을 능가하는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한정된 라이트모티프와 운용이 좁은 세계관을 가지고도 하나의 거대한 세계를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바그너가 가져온 혁신은 무엇일까? 물론 트리스탄 코드로 대표되는 반음계법과 라이트모티프에 의한 전개를 들 수 있다. 하지만 슈베르트와 쇼팽의 음악도 충분히 조성의 기초를 뒤흔들 정도로 대담한 반음계법을 구사하고 있으며, 주제의 유기적인 전개라는 관점에서 베토벤의 후기 음악은 놀라울 정도의 성취를 구축했다. 그렇다면 바그너가 이전의 음악가들과 다른 혁신은 어떻게 구축된 것일까?

바그너의 음악에서 화성은 더 이상 조속한 해결을 요구하지 않는다. 딸림화음은 또 다른 딸림화음으로 대체되고, 그 딸림화음을 또 다른 딸림화음이 대체한다. 해결은 이루어지지만, 아주 늦게 등장한다. 과거에는 비상사태로 여겨졌던 것을 바그너는 정상 상태로 간주한 것이다. 과격하다고 여겨졌던 흐름이 오래도록 지속되면 어느 누구도 그것을 과격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법이다. 작곡가는 그 사이에 화성의 법칙들을 충분히 망가뜨려 놓는다. 해결은 상대적인 시간의 차이지만, 아주 늦게 이루어지는 해결은 ‘영원히 해결이 이루어지지 않아도 된다’라는 사고방식을 불러왔다. 바그너가 죽은 지 불과 6년 후에 말러와 슈트라우스는 교향곡 1번과 <돈 후안>으로 이 경향을 개인적인 음악의 공간으로 불러왔으며, 이것은 머지않아 찾아올 쇤베르크의 화성 혁명을 예고하고 있었다.

바그너의 동기 발전 수법은 대담한 동시에 섬세하다. 우리는 주로 바그너의 대담성과 무자비한 금관의 포효에 대해 생각하지만, 바그너는 동시에 섬세한 세밀화가로서의 재능을 갖추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토록 장면 하나하나를 생생하게 살려내고, 인물들에게 뚜렷한 성격의 차이를 부여하는 작곡가는 매우 드물었다. 그는 과거를 바라보는 인물부터 맹목에 사로잡힌 인물까지 모든 인물을 그려낼 줄 알았고, 한 인물에게 여러 속성을 부여하는 것을 즐겼다. 한 사람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대조적인 두 성격을 머릿속에 집어넣는 작업은 결코 쉽지 않지만 그는 그 일을 나름대로 멋지게 해냈다. 우리는 쿤드리의 내면에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 자라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한 세기 전의 라모가 그랬던 것처럼, 바그너 또한 진보주의자와 반동주의자의 속성을 모두 갖추고 있었다. 그는 스스로 베토벤을 존경한다고 했으며 동시에 그것을 글로 표현했지만, 그는 그가 생각하는 것보다 베토벤에게서 훨씬 멀리 떨어져 있다. 그는 자신의 모순된 인격을 음악에 전혀 반영하지 않았고, 그렇기 때문에 그의 음악극은 자신의 성향과 동떨어진 도덕을 노래한다. 그러나 음악의 구조만으로도 그의 음악극은 충분히 혁신적이다. 스크리아빈 정도만이 그와 비교가 가능할 것이다.

바그너가 바라보았던 ‘기능화성의 황혼’은 이제 시대에 뒤처지는가? 그럴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대답하기 전에, 모든 시대의 음악은 언제나 한 번씩 낡은 것으로 치부된 적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음악이 한 번씩 망각의 모래톱 속에 파묻혔다가 누군가의 손에 의해 다시 구원을 받을 때, 시간의 흐름에 상관없이 그 음악은 빛을 발한다. 비록 거기에 이끼가 끼고 테두리가 닳아 둥글어졌다 할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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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알프스 교향곡> Op.64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지휘)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연주

1981년 12월 31일 질베스터 콘체르트 실황

 

스튜디오 레코딩과 정확히 1년의 차이가 있는, 질베스터(31일) 콘체르트 실황 녹음이다. 스튜디오 녹음과 이 실황 녹음의 차이는 생각보다 크다. 지휘자와 연주자가 같음에도 말이다. 

 카라얀 <알프스 교향곡>의 가장 큰 특징은 무엇일까?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소리의 조탁'을 들 것이다. 더 이상 다듬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세련되게 다듬어진 현악기, 압도적인 공세를 자랑하는 금관악기의 포효, 차갑고 깨끗한 소리를 들려주는 목관악기, 정확한 음량을 유지하는 타악기를 갖춘 카라얀과 베를린 필은 소리 자체에 대한 원대한 이상을 실현시켰다. 그것은 1980년의 스튜디오 녹음으로 충분히 달성해냈다. 거기서는 어떠한 잡음도 찾아볼 수 없고, 일말의 주저함도 엿볼 수 없다. 구름 한 점 없는 공간에서 시야를 방해하는 티끌 하나 보이지 않는 가운데 우뚝 솟은 마터호른을 조망하는 것 같다. 마치 신이, 그 '순간'을 위해 미리 비로 티끌을 모두 씻어낸 후 구름까지 걷어내 진공과 비슷한 대기를 만들어준 것 같다.

 그러나 위에서 말했듯이 카라얀의 스튜디오 녹음과 실황 녹음의 차이는 생각보다 크다. 카라얀이 오랜 시간 집중한 브루크너 교향곡 연주에서 이 점은 매우 두드러지는데, 심한 경우에는 다른 사람의 연주인 것 같다. <알프스 교향곡>도 다르지 않다.

 이 연주는 스튜디오 녹음에 비해 금관이 더 톡 쏘는 음향을 들려준다는 점에서 차별화를 두고 있다. 타악기는 팀파니보다는 심벌즈와 탐탐의 소리가 더 두드러진다. 전체적으로 날카로운 인상을 주기 때문에 오히려 일년 내내 대기가 불안정한 알프스 산악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것 같다. 실제로 알프스의 맑은 날씨를 쉽게 볼 수 없다는 점을 생각하면 재미있다. 물론 폭풍우 속의 알프스를 실감나게 묘사하는 미트로폴로스/뉴욕 필(Music&Arts)에 비한다면 훨씬 깔끔하지만 말이다.

 87년 실황 녹음과 비교한다면, 87년 실황은 좀 더 느릿한 대신 강력한 음향을 발산하는 데 비해 이 연주는 오히려 악기간의 밸런스가 87년보다 더 잘 잡혀있다(87년에서 잘 들리지 않는 오르간 소리를 다소 선명하게 잡아준다). 그리고 좀 더 빠르다. 허나 ff이상으로 음량이 올라가면 목관악기가 잘 들리지 않는다는 점은 불만이다. 대신 81년 연주는 87년에 비해 모든 면에서 박력이 있다.

 그러나 이 연주가 강경 일변도라고 생각하는 것은 큰 오류다. 카라얀은 음악의 긴장을 죄였다 풀면서 클라이맥스를 절묘하게 구축하는데, 폭풍우가 그친 후 하산하면서 목가적인 풍경으로 접어드는 호른과 오르간은 모든 긴장이 풀리고 이제 마무리가 남았음을 알려준다. 지나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다.

 무엇보다 이 연주의 가장 큰 장점은 실황 녹음에서 카라얀이 어떤 모습을 보여주는지 잘 알려준다는 데에 있다. 스튜디오 녹음에서의 카라얀은 순도 높은 소리를 다른 것보다 위에 두기 위해 애를 쓴다. 초 단위로 프레이징을 계산하고, 악기의 배치를 수없이 연구하고, 더 좋은 음향 장비와 기술을 손에 넣기 위해 사력을 다한다. 그 결과가 80년의 <파르지팔> 스튜디오 레코딩에서 들을 수 있는, 반향을 깨끗이 지워버리는 음향이다. 진동이라고는 전혀 느낄 수 없는 그 음향은 도저히 음반 재생 장비에서 흘러나온다고 믿기 어렵다. 카라얀의 가장 놀라운 성과인 이 음향은 동시에 수많은 논란의 대상이 되어왔고 지금도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아마 앞으로도 논란의 대상이 될 것이다.

 그러나 콘서트 홀에서의 카라얀은 음향을 다른 것들보다 위에 두기 위해 굳이 애쓰지 않는다. 이런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이 실황 연주에서의 카라얀은 아주 직관적으로 음악을 끌고 나간다. 박진감과 섬세함을 모두 갖추는 것은 매우 어렵다. 하지만 이 곡은 그 두 가지의 통합을 요구한다. 카라얀은 그 일을 아주 잘 해냈다. 이것만으로도 이 연주는 위대한 연주이기에 모자람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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