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그너 <파르지팔>

호세 반 담 (암포르타스), 쿠르트 몰 (구르네만츠), 페터 호프만 (파르지팔),

고트프리트 호르닉 (클링조르), 둔야 베흐초빅 (쿤드리)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지휘)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빈 국립 오페라 합창단, 빈 악우협회 합창단, 잘츠부르크 실내 합창단, 퇼처 소년 합창단

1981년 4월 11일 잘츠부르크 부활절 축제 실황 녹음

바그너의 마지막 작품은 사람들의 평이 많이 엇갈린다. 일종의 매너리즘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바그너가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예술이라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여기에서 새로운 음악의 맹아를 찾기도 한다. 어떤 사람은 이것을 일종의 우회로로 여긴다. 바그너의 다른 작품들이 그렇듯 이 작품 또한 하나의 일치된 결론이 쉽게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음악사적인 위치와는 별개로, 이 작품의 소재는 아주 유명하다.

중세인을 매혹시킨 성배의 전설과 아서왕 이야기를 토대로 볼프람 폰에셴바흐가 쓴 서사시 <파르치발>은 총 16권, 24812행의 대작이며, <장미 이야기>와 함께 중세 서사문학을 대표하는 걸작으로 손꼽힌다. 바그너가 이 <파르치발>을 처음으로 언급한 것은 1845년인데, 그가 작곡에 착수한 시기는 32년 후인 1877년이었다. 작업에 착수하면서 파르치발은 ‘파르지팔’로 이름이 바뀌었다. 그는 젊은 시절에 생각해 둔 구상을 잊지 않고 실행에 옮겼다. 바그너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두 가지였다. 종교적인 관점에 토대를 둔 구원에 대한 자신의 생각과 ‘시간을 초월한 공간의 창출’이 바로 그것이다. 구르네만츠가 순수한 바보인 파르지팔을 잡은 채 ‘이곳에서 시간은 공간으로 변한다’고 말할 때, 두 사람은 시간을 초월한 공간으로의 이동을 마친다. 몬살바트(몬잘바트) 성은 이미 로엔그린의 입을 통해 거론된 적이 있지만, 바그너는 이곳을 ‘구원의 산(Berg des Heils)'으로 여겼다. 분명한 것은 그는 기독교적 구원에 완전히 귀의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하나의 소재로 여겼다는 점이다. 만년의 바그너가 기독교에 깊이 빠져들었다는 증거는 희박하다. 그는 아마 기독교의 상징들을 소재로 사용하고 싶었을 것이다. 설정덕후니까

크게 보면 이 거대한 악극은 1막과 3막이 외벽을 이루고, 2막이 내진內陣을 이루는 아치형 구조로 되어 있다. 이것은 몬살바트 성과 클링조르의 마법 정원이라는 장소를 통해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이 구조에 따라 파르지팔의 성격은 변한다. 아니, 파르지팔의 성격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둘러싼 주위 환경과 그의 행동 패턴이 변한다. 1막에서 파르지팔은 단지 ‘순수한 바보’일 뿐이다. 그러나 2막에서 파르지팔은 ‘순수한 바보’이기 때문에 모든 것을 초월한 통찰력을 갖게 된다. 3막에서 그는 그 순수함을 통해 구원의 도구로서의 사명을 다한다.

카라얀이 순도 높은 소리에 집착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드물지만, 그것이 어떤 연주에서 정점을 이루었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나는 개인적으로 소리에 대한 그의 집착은 70년대 후반과 80년대 초반에 정점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 <파르지팔> 스튜디오 레코딩이 있다.

이 연주는 81년 잘츠부르크 부활절 축제 공연으로, 스튜디오 레코딩을 마친 직후다. 가수들은 스튜디오 레코딩과 적지 않게 겹친다. A♭장조로 시작하는 전주곡은 차갑게 정련된 스튜디로 레코딩과는 달리 다소 부산스럽다. 관현악만 본다면 스튜디오 레코딩이 조금 더 우위로 보인다. 특히 그 ‘소리’라는 측면에 한하여.

막이 오르면 구르네만츠가 시종들을 깨운다. 그들은 모두 암포르타스 왕의 상처에 대해 걱정한다. 쿤드리가 나타나 약을 건넨다. 기사와 시종들은 거친 용모를 갖춘 그녀를 경계하고 의심한다. 그런데 쿤드리 역을 맡은 베흐초빅은 참 평범해 보인다. 성녀와 창녀라는 양면성을 갖춘 인물이 아니라 극의 진행을 돕는 퍼즐조각처럼 보인다.

카라얀이 기용한 가수들은 극적이라기보다는 기능적이고 조직적이다. 구르네만츠는 가장 지혜롭지만, 결국 자신의 테두리를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그는 신성한 성배 신전의 수호를 위해 인간성을 어느 정도 포기한 사람들을 대표한다. 쿠르트 몰은 이러한 약점이 있는 영웅적 배역에 잘 어울린다. 위엄 있게 주위 사람들을 타이르지만 극의 진행방향을 바꿀 정도로 거대한 존재는 아니다. 암포르타스 역을 맡은 호세 반 담은 고통에 지치고 비감 있는 목소리를 적절하게 들려주고 있다. 파르지팔을 맡은 페터 호프만은 조금 불만인데, 자신이 나중에 어떤 일을 하게 될 지 너무 잘 아는 것처럼 들린다.

장면이 바뀌고 <성 금요일의 음악>에 따라 신전의 전경이 나타날 때 관현악은 차갑고 정련된 소리를 들려준다. 하지만 실황 녹음이라 섬세한 구석구석까지 들려주지 못한다는 것이 많이 아쉽다. 전왕 티투렐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암포르타스는 고통스럽게 자비를 간구한다. 여기서 반 담은 아까 전의 지친 목소리를 떨치고 곧게 뻗어나가는 음성을 들려준다. 위에서 목소리와 함께 성혈이 떨어져 성배에 가득 담긴다. 소년들은 성배와 성혈에 관한 신비, 기독교의 불명료성을 상징하는 가장 큰 신비에 대해 노래한다. 곧 기사들이 이 신성한 노래에 동참한다. <성 금요일의 음악>이 천천히 신전의 주랑을 감싸 안는다. 파르지팔은 암포르타스의 고통을 보고 무언가를 느끼나, 결국 그의 마음은 움직이지 않는다. 구르네만츠는 그런 ‘바보’ 파르지팔을 내쫓는다.

2막의 무대인 클링조르의 성은 거울에 비친 성배의 신전이다. 클링조르는 성을 포기하고 사악한 마법을 손에 넣었다. 클링조르 역을 맡은 호르닉의 목소리는 차갑다. 그는 그 차가운 목소리로 쿤드리를 정교하게 조종한다. 클링조르가 쿤드리를 ‘마녀’라고 부를 때, 목관은 소름끼치는 상승 음계로 옥타브를 뛰어넘는다.

쿤드리는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악업 속에서 끊임없이 몸부림쳐야 한다. 그녀의 선의는 모두를 파멸로 몰아넣는다. 그녀의 악업을 끊어줄 사람은 그녀에게 가장 무관심한 사람이며, 그녀에게 약속된 평온은 곧 죽음이다.

자신에게 달려든 클링조르의 기사들을 모두 무찌른 후, 파르지팔은 꽃의 처녀들에게 둘러싸인다. 역시 미인계는 시대를 불문하고 잘 먹힌다 사막에 피는 꽃밭처럼 거짓되고 덧없는 존재들이 파르지팔에게 사랑을 속삭이며 그를 차지하기 위해 싸운다. 그러나 파르지팔은 그들이 왜 싸우는지를 이해하지 못한다. 쿤드리가 나타나고 처녀들은 물러난다. 쿤드리는 그에게 과거의 기억을 일깨우고, 고통을 이해시키고, 사랑을 줌으로써 그를 순수한 바보 상태에서 깨워 노예로 삼으려 한다. 그러나 쿤드리(또는 클링조르)가 의도한 것과는 정반대로, 파르지팔은 쿤드리의 키스를 받고 비로소 암포르타스의 무서운 고통을 이해하게 된다. 그 고통은 육체적 사랑을 포기한 자들이 공유하는 감정, 즉 구세주의 피흘림을 이해하는 열쇠가 된다. 순수한 바보이기에 도달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초월한 통찰의 경지에 이른 것이다. 쿤드리는 그 앞에서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비웃은 자신의 과거에 대해 말한다. 그 때 그녀의 음성은 옥타브를 뛰어넘는다. 그것은 저주의 웃음이다. 그녀는 눈물을 흘려야 할 때마다 웃게 될 것이다. 그 저주받은 악업에서 벗어나기 위해 끝없이 환생을 거쳐야 한다.

파르지팔은 모두를 이해하기 위해 개인에 대한 이해를 포기한다. 그는 쿤드리에게 암포르타스에게로 가는 길을 묻는다. 쿤드리는 그를 저주하며 클링조르를 부른다. 클링조르는 성창을 들고 나타나 그에게 그 창을 던진다. 그러나 창은 그의 머리 위에서 멈춰선다. 파르지팔은 성창을 들고 클링조르의 ‘거짓된 호화로움’을 부숴버린다. 정원은 황야로 변하고, 꽃은 시들어 말라비틀어진다. 파르지팔은 쿤드리에게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 잘 알 것이라 말한 후 사라진다.

3막이 오르면 무대는 다시 1막과 같은 공간으로 돌아오지만, 많은 시간이 지나가 있다. 시간은 흘러도 공간은 변하지 않는다. 늙은 구르네만츠는 쿤드리를 발견한다. 그녀에게서 이전의 거친 모습은 사라져 있다. 그녀는 무장을 한 기사를 발견한다. 구르네만츠는 성스러운 곳에 무장을 하고 나타난 기사를 질책한다. 그가 무장을 벗는다. 파르지팔이다. 그는 손에 성창을 들고 있다. 구르네만츠와 파르지팔은 서로 감격하여 그 동안의 일을 묻는다. 파르지팔은 자신의 오랜 방황을, 구르네만츠는 성배의 신전에서 벌어진 쇠락과 죽음의 기미를 얘기해준다.

이제 극은 완전히 성경과 흡사하게 흘러간다. 쿤드리는 파르지팔의 발을 씻기고 향유를 바른다. 세례를 통해 완전히 깨끗해진 파르지팔은 쿤드리에게 세례를 내린다. 이제 성 금요일의 음악은 기적을 상징하는 제례 음악으로 화한다. 파르지팔은 성창을 들고 암포르타스 왕에게로 향한다. 왕의 상처가 치유되면서 모든 것이 제 자리를 찾는다. 죄인의 피로 얼룩진 성창은 그 피를 씻고 구세주의 피로 깨끗해진다. 성창과 성배의 근친관계도 이로 인해 제 자리를 찾는다. 파르지팔은 성배로 나아가 성배를 들어올린다. 이로써 구원이 완료된다. 쿤드리는 비로소 악업의 그물을 벗고 죽음을 맞이한다.

카라얀의 <파르지팔> 실황 녹음이라는 데서 참으로 중요한 기록이지만, 그 칼날 같은 세부 묘사가 살아나지 못한다는 점이 참으로 아쉽다. 가수들 중 호세 반 담이나 쿠르트 몰은 뛰어나지만 쿤드리 역을 맡은 베흐초빅은 잘 만들어진 자동인형 같은 느낌이다.

 

Posted by 여엉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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