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러 교향곡 6번 <비극적> (A minor)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지휘)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연주

1977년 8월 27일 잘츠부르크 실황연주

말러의 교향곡 6번은 여러모로 말러의 아이덴티티를 상징하는 곡으로 남아 있다. 엄격한 절대음악의 형식을 갖추고 있음에도 표제적인 해석이 난무하며, 많은 사람들이 이 곡을 말러의 고뇌에 가득 찬 만년을 예지한 곡으로 생각하고 있다. 4악장 서주의 옥타브를 뛰어넘는 불협화적인 튜바의 선율도 그런 식의 해석이 이루어지고는 했다. 아니, 이루어진다고 생각했다. 한 쪽에 불행과 고뇌의 감정을 통해 나타나는 ‘주관’이 버티고 있다면 다른 한 쪽에는 점점 더 많아지는 증4도와 갈수록 해결이 늦어지는 불협화음들, 그리고 1악장의 반복이라는 엄격한 소나타 형식의 준수로 나타나는 ‘객관’이 깊게 뿌리내리고 있다. 시종일관 약박에 떨어지는 강세와 복잡하면서도 엄격한 옛 대위법의 사용을 보여주는 스케르초 악장마저도 ‘흉한 꼭두각시의 춤’과 같은 해석이 가능하다. 이 곡은 말러가 표제에서 밝힌 것처럼 매우 비극적이지만, 비극의 진행은 매우 엄격한 논리와 원칙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지론을 설파하는 곡으로 볼 수도 있다. 주관과 객관이 이토록 복잡하게 뒤얽힌 곡은 말러의 이전 교향곡에서도 이후 교향곡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그만큼 해석의 폭도 다양하고 넓다. 시종일관 몸부림치는 연주를 들려주는 번스타인과 텐슈테트가 저 쪽에 서 있는가 하면, 찔러도 피 한 방울 흐르지 않을 만큼 냉정한 길렌과 불레즈가 다른 한 쪽에 서 있다. 스펙트럼의 넓이만큼 다양한 연주가 존재해 그것을 다 듣고 일일이 평을 내리는 것이 무색할 지경에 이르렀다. 무색무취한 연주부터 선혈로 악구를 도배한 것처럼 섬뜩한 연주까지 모든 연주가 다 나오고 있다.

카라얀은 70년대 중반에 말러의 교향곡 5번을 시작으로 일련의 말러 연주를 진행했다. 그가 75년에서 77년에 걸쳐 진행한 교향곡 6번의 스튜디오 레코딩은 여러모로 독특한 연주로 남아 있다. 그는 거기서 주관과 객관 사이의 교묘한 실체, 그림자처럼 모호하지만 쉽게 떨쳐버릴 수 없는 허약한 실체를 잡아냈다. 정말 절묘하고 기가 막힌 연주라고 할 수 있지만 다른 연주처럼 모두의 동의를 얻을 수 있는 연주인지에 대한 의문을 남기는 연주였다.

그 스튜디오 녹음을 진행하는 와중에 그는 여러 차례 이 교향곡의 실황 연주를 남겼다. 77년에만 최소 두 종의 실황 연주가 있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이 77년 8월의 잘츠부르크 실황 연주다. 실황 연주에서 그는 자신이 잡아낸 실체를 극단으로 몰고 가는 것 같다. 관현악은 쉽게 흥분하지 않지만 그 타격감만은 엄청나다. 이성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거나 이성적인 논리가 개입된 광기는 더욱 무서운 힘을 발휘한다. 카라얀의 말러 6번은 바로 그 관점을 명확히 들려주고 있다. 1악장 F장조의 2주제는 충분히 관능적이지만 별다른 감정은 보여주지 않는다. 음향은 충분히 감정적이지만 곡을 몰고 가는 지휘자의 손끝은 논리적이고 정교하다. 발전부 현악기의 고음 트레몰로와 피치카토는 그 이상 아름다울 수 없지만 다가가서 만질 수는 없는 아름다움이다. 템포는 다소 빠르지만 휙휙 지나가는 느낌은 주지 않는다. 코다는 일견 지나칠 정도로 즐거워 보이지만 팀파니의 급박한 리듬이 그것을 즐기지 못하게 한다. 1악장에서 유일하게 아쉬운 것은 실황 녹음이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반복을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2악장은 실황 녹음임에도 타악기가 명료하게 들리는 점이 아주 재미있다. 원래 실황 녹음, 특히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대 연주회장의 녹음들은 음향이 아주 날카로워진다는 특징이 있는데, 여기서 타악기는 날카롭지 않으면서도 아주 또렷하게 들린다. 말렛의 사용법까지 철저하게 관리하는 지휘자의 성향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 같다. 이어지는 트리오는 일부러 실내악처럼 정교하게 다듬은 것 같다. 소리는 매력적이지만 관능적이지는 않다. 만약 트리오가 말러의 설명처럼 알마와 아이들의 모습을 묘사한 것이라면, 관능적인 소리가 나오면 오히려 이상한 셈이다. 중요한 것은, 스튜디오 녹음에서 카라얀은 ‘리듬’보다는 ‘음향’에 더 우선권을 주었다면, 이 실황 녹음에서는 ‘음향’보다는 ‘리듬’에 더 우선권을 준다는 사실이다.

3악장은 베를린 필의 현악기가 주인공이다. 굳이 첨언하자면 전체적으로 분위기가 약간 가라앉아 있다. 그 음향은 내면의 탐구보다는 온화한 조화에 가깝다. 바이올린부터 베이스까지 모든 현이 한 덩어리가 되어 움직인다. 카라얀은 4악장을 ‘완전한 파멸’의 종착으로 본 것 같다. 파멸이나 해체는 그 전의 완벽한 균형과 조화가 있을 때 더욱 대비된다. 카라얀은 3악장을 4악장과 완전히 대비되는 악장으로 본 것이다. 그래서 그는 3악장에 아다지오를 놓은 것 같다. 협화음은 불협화음으로 인해 더욱 아름다워지니까. 베를린 필의 현악기군을 듣고 싶으면 어느새 소방울의 존재는 잊어버리게 된다. 소박함을 아름다움이 대체하는 셈이다.

나는 항상 4악장의 C단조 서주를 들으면서 말러가 ‘해체’를 이런 식으로 음악화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진다. 조성이 극단적으로 이완되며, 불협화음은 포화상태에 이른다. 간간이 들려오는 협화음은 불협화음을 더 끔찍하게 들리게 만든다. 카라얀은 이 ‘해체’를 슬프게 여기나, 거기에 동요해 울부짖지는 않는다. 튜바에 묻혀 잘 들리지 않는 약음기 단 트럼펫의 약주를 끝까지 또렷하게 가져가는 것을 보면 더 그렇게 느껴진다. 주요부가 시작되면 템포는 알레그로 모데라토로 시작해 곧 알레그로 에네르지코로 옮겨지는데, 카라얀은 처음부터 흥분하지 않고 이 지시를 따라간다. 이렇게 하면 긴장감이 흐트러질 수 있다는 단점이 있는데 그는 교활하게 관현악을 컨트롤 해 이 난점을 피해간다. D장조의 2주제는 1악장과는 달리 엔딩과 관련성이 없는데, 여기서 그는 최대한 밝게 연주한다. 곡이 어떻게 진행될지를 안다면 이 부분이 참 특별하게 들린다. 이어서 곡은 첫 번째 해머 타격으로 나아간다. 타악기는 무서운 타격감을 들려주지만 해머의 소리는 아쉽게도 페스티벌 홀의 구조를 반영하듯 퍼져서 잘 들리지 않는다. 이어서 등장하는 채찍(대부분의 연주는 이를 싸리채 비슷한 타악기로 대체한다)은 아주 고압적으로 들린다. 이제 파국을 막을 방법은 없다. 두 번째 타격이 이어지고 투쟁의 형태는 한층 더 참혹해진다. 재현부는 서주를 거의 그대로 가져오면서 2주제와 1주제의 순서까지 바꾸어 연주한다. 이토록 정교하게 이루어지는 파멸이 있었던가? 2주제의 클라이맥스는 이상할 정도로 강렬하며, 그 다음부터는 눈이 핑핑 돌 정도로 현란하게 움직인다. 1주제는 제시부와 마찬가지로 연주하는데, 막바지의 호른의 트릴이 두드러지는 점이 아주 재미있다. 곡은 1악장과 비슷한 희망의 몸짓으로 옮겨가려고 무진 애를 쓰지만, 애당초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곡은 아주 천천히 고통스러운 해체의 과정을 겪는다. 마지막 타격이 떨어지고 곡은 완전한 파멸로 끝을 맺는다. 여기서 무엇 때문인지(실수인 것 같다) 고현이 다른 악기보다 약간 먼저 튀어나온다는 옥의 티가 있다.

여러모로 3악장과 4악장을 중요하게 다루는 녹음이다. 3악장에서는 베를린 필의 현악기군이 가장 두드러지며, 4악장에서는 곡의 진행 방향에 대한 카라얀의 통찰이 돋보인다. 실황 녹음이기 때문에 벌어지는 사소한 결점이나 실수들은 덮어도 좋을 대단한 연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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쇤베르크 <정화된 밤> Op.4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지휘)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연주

1973년 11월 1일 도쿄 NHK홀 실황연주

19세기 말, 세기말을 맞이한 유럽의 문학계는 너나 할 것 없이 상징주의에 파고들었다. 보들레르가 시집 <파리의 우울>을 발표한 이후 말라르메나 발레리 같은 프랑스의 시인들이 상징주의의 깃발을 높이 들었고, 유럽 문학계의 절반 가까이가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았다. 벨기에의 모리스 마테를링크나 오스트리아의 리하르트 데멜도 예외가 아니었다.

상징주의자들에게 있어 언어는 통상적인 의미를 거부하고 작가 개인의 의미를 담는 그릇이었다. 일반인들이 쓰는 “안개”와 말라르메가 사용하는 “안개”는 음절만 같을 뿐 완전히 다른 의미를 담고 있는 경우가 적지 않다. 언어가 담고 있는 의미는 굴절되거나 혹은 왜곡되며, 실제 의미를 은폐하는 경우도 있다. 이 경향은 모든 작가들이 개인적인 문학 언어를 찾아나서는 20세기 문학의 지표를 형성했다.

세기말의 빈에서 음악적 토양을 형성한 쇤베르크도 이들 상징주의자들의 문학에 깊이 빠져들었다. 그는 내면적이고 사변적인 문학의 안내를 받아 좀 더 불협화적인 세계로 들어갔다. 그는 단계적으로, 하지만 멈추지 않고 지속적으로 굴절된 화성의 세계로 들어갔으며, 마침내 새로운 행성계에 완전히 발을 들여놓게 된다. 그 도정에 위치한 곡 중 가장 유명한 것이 바로 <정화된 밤>이다.

21세기에 이 곡을 듣는 사람은 이 곡이 왜 초연을 오랫동안 거부당했으며, 초연 당시 강한 스캔들을 일으켰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화성은 계속 헤매지만 결국 주화음이라는 지표에 단단히 안착하게 되며, 특히 안개가 걷히고 달이 온전하게 드러나는 D장조 파트의 관능적인 연가戀歌는 가슴을 저미게 한다. 그러나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이것도 충분히 급진적인 음악 언어였다. 어쩌면 쇤베르크는 스캔들을 타고난 사내였는지도 모른다.

이 곡을 대표하는 특징 중 하나는 표제음악적 해석과 절대음악적 해석이 둘 다 가능하다는 점이다. 쇤베르크는 초연을 치른 후 데멜의 시를 삽입했으며, 일부 학자들은 이 음악이 <트리스탄과 이졸데>나 말러, 슈트라우스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절대음악이라는 평을 내렸다. 그러나 데멜의 시는 이 음악의 흐름과 완벽하게 맞아 떨어지며, 그것만으로도 이 곡은 중의적인 해석이 가능하다.

쇤베르크는 418마디나 되는 큰 규모의 이 곡을 아주 짧은 기간에 썼다. 그는 여러 번 6중주의 작곡이 아주 쉽고 빠르다는 말을 밝혀(그는 1934년 1월 프린스턴에서 강연하는 도중 “현악 6중주의 작곡은 6~7주면 가능하다“는 말을 했다) 이 곡을 아주 쉽고 빠르게 썼음을 암시하고 있다. 그는 이 곡을 현악 오케스트라를 위해 편곡했는데, 1917년에 편곡하고 1943년에 편곡을 수정했다. 카라얀은 주로 1943년 버전을 사용해 연주를 진행했으며, 따라서 이 연주도 1943년 버전으로 보인다.

곡은 차가운 달밤에 산책하는 두 남녀의 모습을 그리는 D단조의 하행 선율로 시작한다. 불길한 도약음이 여자가 자신의 죄를 고해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지휘자는 현을 고르게 가다듬으며 세밀하게 음향을 조정한다. 여성의 납처럼 무거운 마음은 E♭단조로 나타난다. 지휘자는 구조적인 부분을 밝히는 대신 음향으로 승부수를 던진다. 음향은 차갑지만 몽환적이다.

마침내 여자를 용서하는 남성의 다정함이 D장조의 아다지오로 나타난다. 이 부분은 굉장히 독특한데, 스튜디오 녹음과 비교하면 더욱 재미있다. 스튜디오 녹음에서 지휘자는 숲 속을 걷는 두 사람의 몽환적인 분위기를 더하지만, 여기서는 반대로 음향을 아주 선명하게 가져간다. 구름이 걷히고 달빛이 내리쬐는 장면이 그대로 만져질 듯하다. 하모닉스와 약음의 사용으로 곡은 서서히 절정으로 치닫는다. 바이올린과 첼로의 이중주가 남자와 여자가 서로를 좀 더 잘 이해하게 되었음을 암시한다. 마침내 둘은 달빛 아래서 하나가 된다.

카라얀이 현악을 어떻게 다루는지 이해하는 데 있어 필수적인 기록이며(차이코프스키와 드보르작의 현악 세레나데도 있지만), 연주도 아주 훌륭하다. 여러모로 스튜디오 녹음과 다른 점을 보여주어 흥미로우며, 구조적인 뼈대를 제외한 모든 것을 깎아내어 앙상할 정도로 본질에 집착하는 불레즈(Sony)의 녹음과 비교하는 것도 재미있는 경험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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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그너 <파르지팔>

호세 반 담 (암포르타스), 쿠르트 몰 (구르네만츠), 페터 호프만 (파르지팔),

고트프리트 호르닉 (클링조르), 둔야 베흐초빅 (쿤드리)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지휘)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빈 국립 오페라 합창단, 빈 악우협회 합창단, 잘츠부르크 실내 합창단, 퇼처 소년 합창단

1981년 4월 11일 잘츠부르크 부활절 축제 실황 녹음

바그너의 마지막 작품은 사람들의 평이 많이 엇갈린다. 일종의 매너리즘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바그너가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예술이라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여기에서 새로운 음악의 맹아를 찾기도 한다. 어떤 사람은 이것을 일종의 우회로로 여긴다. 바그너의 다른 작품들이 그렇듯 이 작품 또한 하나의 일치된 결론이 쉽게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음악사적인 위치와는 별개로, 이 작품의 소재는 아주 유명하다.

중세인을 매혹시킨 성배의 전설과 아서왕 이야기를 토대로 볼프람 폰에셴바흐가 쓴 서사시 <파르치발>은 총 16권, 24812행의 대작이며, <장미 이야기>와 함께 중세 서사문학을 대표하는 걸작으로 손꼽힌다. 바그너가 이 <파르치발>을 처음으로 언급한 것은 1845년인데, 그가 작곡에 착수한 시기는 32년 후인 1877년이었다. 작업에 착수하면서 파르치발은 ‘파르지팔’로 이름이 바뀌었다. 그는 젊은 시절에 생각해 둔 구상을 잊지 않고 실행에 옮겼다. 바그너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두 가지였다. 종교적인 관점에 토대를 둔 구원에 대한 자신의 생각과 ‘시간을 초월한 공간의 창출’이 바로 그것이다. 구르네만츠가 순수한 바보인 파르지팔을 잡은 채 ‘이곳에서 시간은 공간으로 변한다’고 말할 때, 두 사람은 시간을 초월한 공간으로의 이동을 마친다. 몬살바트(몬잘바트) 성은 이미 로엔그린의 입을 통해 거론된 적이 있지만, 바그너는 이곳을 ‘구원의 산(Berg des Heils)'으로 여겼다. 분명한 것은 그는 기독교적 구원에 완전히 귀의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하나의 소재로 여겼다는 점이다. 만년의 바그너가 기독교에 깊이 빠져들었다는 증거는 희박하다. 그는 아마 기독교의 상징들을 소재로 사용하고 싶었을 것이다. 설정덕후니까

크게 보면 이 거대한 악극은 1막과 3막이 외벽을 이루고, 2막이 내진內陣을 이루는 아치형 구조로 되어 있다. 이것은 몬살바트 성과 클링조르의 마법 정원이라는 장소를 통해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이 구조에 따라 파르지팔의 성격은 변한다. 아니, 파르지팔의 성격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둘러싼 주위 환경과 그의 행동 패턴이 변한다. 1막에서 파르지팔은 단지 ‘순수한 바보’일 뿐이다. 그러나 2막에서 파르지팔은 ‘순수한 바보’이기 때문에 모든 것을 초월한 통찰력을 갖게 된다. 3막에서 그는 그 순수함을 통해 구원의 도구로서의 사명을 다한다.

카라얀이 순도 높은 소리에 집착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드물지만, 그것이 어떤 연주에서 정점을 이루었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나는 개인적으로 소리에 대한 그의 집착은 70년대 후반과 80년대 초반에 정점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 <파르지팔> 스튜디오 레코딩이 있다.

이 연주는 81년 잘츠부르크 부활절 축제 공연으로, 스튜디오 레코딩을 마친 직후다. 가수들은 스튜디오 레코딩과 적지 않게 겹친다. A♭장조로 시작하는 전주곡은 차갑게 정련된 스튜디로 레코딩과는 달리 다소 부산스럽다. 관현악만 본다면 스튜디오 레코딩이 조금 더 우위로 보인다. 특히 그 ‘소리’라는 측면에 한하여.

막이 오르면 구르네만츠가 시종들을 깨운다. 그들은 모두 암포르타스 왕의 상처에 대해 걱정한다. 쿤드리가 나타나 약을 건넨다. 기사와 시종들은 거친 용모를 갖춘 그녀를 경계하고 의심한다. 그런데 쿤드리 역을 맡은 베흐초빅은 참 평범해 보인다. 성녀와 창녀라는 양면성을 갖춘 인물이 아니라 극의 진행을 돕는 퍼즐조각처럼 보인다.

카라얀이 기용한 가수들은 극적이라기보다는 기능적이고 조직적이다. 구르네만츠는 가장 지혜롭지만, 결국 자신의 테두리를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그는 신성한 성배 신전의 수호를 위해 인간성을 어느 정도 포기한 사람들을 대표한다. 쿠르트 몰은 이러한 약점이 있는 영웅적 배역에 잘 어울린다. 위엄 있게 주위 사람들을 타이르지만 극의 진행방향을 바꿀 정도로 거대한 존재는 아니다. 암포르타스 역을 맡은 호세 반 담은 고통에 지치고 비감 있는 목소리를 적절하게 들려주고 있다. 파르지팔을 맡은 페터 호프만은 조금 불만인데, 자신이 나중에 어떤 일을 하게 될 지 너무 잘 아는 것처럼 들린다.

장면이 바뀌고 <성 금요일의 음악>에 따라 신전의 전경이 나타날 때 관현악은 차갑고 정련된 소리를 들려준다. 하지만 실황 녹음이라 섬세한 구석구석까지 들려주지 못한다는 것이 많이 아쉽다. 전왕 티투렐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암포르타스는 고통스럽게 자비를 간구한다. 여기서 반 담은 아까 전의 지친 목소리를 떨치고 곧게 뻗어나가는 음성을 들려준다. 위에서 목소리와 함께 성혈이 떨어져 성배에 가득 담긴다. 소년들은 성배와 성혈에 관한 신비, 기독교의 불명료성을 상징하는 가장 큰 신비에 대해 노래한다. 곧 기사들이 이 신성한 노래에 동참한다. <성 금요일의 음악>이 천천히 신전의 주랑을 감싸 안는다. 파르지팔은 암포르타스의 고통을 보고 무언가를 느끼나, 결국 그의 마음은 움직이지 않는다. 구르네만츠는 그런 ‘바보’ 파르지팔을 내쫓는다.

2막의 무대인 클링조르의 성은 거울에 비친 성배의 신전이다. 클링조르는 성을 포기하고 사악한 마법을 손에 넣었다. 클링조르 역을 맡은 호르닉의 목소리는 차갑다. 그는 그 차가운 목소리로 쿤드리를 정교하게 조종한다. 클링조르가 쿤드리를 ‘마녀’라고 부를 때, 목관은 소름끼치는 상승 음계로 옥타브를 뛰어넘는다.

쿤드리는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악업 속에서 끊임없이 몸부림쳐야 한다. 그녀의 선의는 모두를 파멸로 몰아넣는다. 그녀의 악업을 끊어줄 사람은 그녀에게 가장 무관심한 사람이며, 그녀에게 약속된 평온은 곧 죽음이다.

자신에게 달려든 클링조르의 기사들을 모두 무찌른 후, 파르지팔은 꽃의 처녀들에게 둘러싸인다. 역시 미인계는 시대를 불문하고 잘 먹힌다 사막에 피는 꽃밭처럼 거짓되고 덧없는 존재들이 파르지팔에게 사랑을 속삭이며 그를 차지하기 위해 싸운다. 그러나 파르지팔은 그들이 왜 싸우는지를 이해하지 못한다. 쿤드리가 나타나고 처녀들은 물러난다. 쿤드리는 그에게 과거의 기억을 일깨우고, 고통을 이해시키고, 사랑을 줌으로써 그를 순수한 바보 상태에서 깨워 노예로 삼으려 한다. 그러나 쿤드리(또는 클링조르)가 의도한 것과는 정반대로, 파르지팔은 쿤드리의 키스를 받고 비로소 암포르타스의 무서운 고통을 이해하게 된다. 그 고통은 육체적 사랑을 포기한 자들이 공유하는 감정, 즉 구세주의 피흘림을 이해하는 열쇠가 된다. 순수한 바보이기에 도달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초월한 통찰의 경지에 이른 것이다. 쿤드리는 그 앞에서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비웃은 자신의 과거에 대해 말한다. 그 때 그녀의 음성은 옥타브를 뛰어넘는다. 그것은 저주의 웃음이다. 그녀는 눈물을 흘려야 할 때마다 웃게 될 것이다. 그 저주받은 악업에서 벗어나기 위해 끝없이 환생을 거쳐야 한다.

파르지팔은 모두를 이해하기 위해 개인에 대한 이해를 포기한다. 그는 쿤드리에게 암포르타스에게로 가는 길을 묻는다. 쿤드리는 그를 저주하며 클링조르를 부른다. 클링조르는 성창을 들고 나타나 그에게 그 창을 던진다. 그러나 창은 그의 머리 위에서 멈춰선다. 파르지팔은 성창을 들고 클링조르의 ‘거짓된 호화로움’을 부숴버린다. 정원은 황야로 변하고, 꽃은 시들어 말라비틀어진다. 파르지팔은 쿤드리에게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 잘 알 것이라 말한 후 사라진다.

3막이 오르면 무대는 다시 1막과 같은 공간으로 돌아오지만, 많은 시간이 지나가 있다. 시간은 흘러도 공간은 변하지 않는다. 늙은 구르네만츠는 쿤드리를 발견한다. 그녀에게서 이전의 거친 모습은 사라져 있다. 그녀는 무장을 한 기사를 발견한다. 구르네만츠는 성스러운 곳에 무장을 하고 나타난 기사를 질책한다. 그가 무장을 벗는다. 파르지팔이다. 그는 손에 성창을 들고 있다. 구르네만츠와 파르지팔은 서로 감격하여 그 동안의 일을 묻는다. 파르지팔은 자신의 오랜 방황을, 구르네만츠는 성배의 신전에서 벌어진 쇠락과 죽음의 기미를 얘기해준다.

이제 극은 완전히 성경과 흡사하게 흘러간다. 쿤드리는 파르지팔의 발을 씻기고 향유를 바른다. 세례를 통해 완전히 깨끗해진 파르지팔은 쿤드리에게 세례를 내린다. 이제 성 금요일의 음악은 기적을 상징하는 제례 음악으로 화한다. 파르지팔은 성창을 들고 암포르타스 왕에게로 향한다. 왕의 상처가 치유되면서 모든 것이 제 자리를 찾는다. 죄인의 피로 얼룩진 성창은 그 피를 씻고 구세주의 피로 깨끗해진다. 성창과 성배의 근친관계도 이로 인해 제 자리를 찾는다. 파르지팔은 성배로 나아가 성배를 들어올린다. 이로써 구원이 완료된다. 쿤드리는 비로소 악업의 그물을 벗고 죽음을 맞이한다.

카라얀의 <파르지팔> 실황 녹음이라는 데서 참으로 중요한 기록이지만, 그 칼날 같은 세부 묘사가 살아나지 못한다는 점이 참으로 아쉽다. 가수들 중 호세 반 담이나 쿠르트 몰은 뛰어나지만 쿤드리 역을 맡은 베흐초빅은 잘 만들어진 자동인형 같은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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