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그너 갈라 콘서트

 (<발퀴레> 1막과 <파르지팔> 3막)

 크리스토퍼 벤트리스(지크문트, 파르지팔), 에밀리 매기(지클린데), 연광철(훈딩, 구르네만츠), 양준모(암포르타스)

 로타 차그로섹(지휘) /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 / 국립합창단, CBS소년소녀합창단

 

 지인을 통해 우연히 알게 된 덕에 신속히 예매를 완료하고 보러 간 공연. 전곡이 아닌 갈라 콘서트라는 것이 조금 아쉽기는 하지만, 전곡 공연이라는 '이상'보다는 비용도 아끼고 간편하게 올릴 수 있으며 관객들도 부담없이 접할 수 있는 갈라 콘서트라는 '현실'을 택한 것도 나쁘지 않아 보인다. 무엇보다 차그로섹과 연광철을 한 무대에서 볼 수 있다는 엄청난 메리트가 나를 예당으로 이끌었다.

 일단 시작하기 전에는 지휘자와 연광철의 역량만 믿고 보는 공연이라는 생각을 했었고 그 생각은 공연이 끝날 때까지 딱히 크게 변하지는 않았다. 벤트리스는 소리 때깔은 나쁘지 않지만 지크문트를 하기에는 성량과 내지르는 파워가 조금 부족하지 않았나 싶다. 특히 울분과 고통에 차 내지르는 '뵐제! 뵐제!'는 소리가 너무 약해 좀 안타까웠다. 오케스트라를 뚫고 나와야 하는 마지막 'Braut und Schwester bist du dem Bruder-so blühe denn, Wälsungen-Blut!'도 오케스트라에 파묻히기는 마찬가지여서 더더욱 안타까웠다(주먹 꽉 쥐고 부르는데 정말 안타깝긴 하더라).

 매기가 21세기의 '핫한' 바그너 소프라노 중 한 명이라는 사실은 알지만, 역시 아쉬운 건 마찬가지였다. 전반의 또렷한 딕션이 후반으로 갈수록 '약간씩 코먹는 듯한' 모습을 보여준 점이 조금 아쉬웠다. 역동적인 모션을 보여준 점은 좋게 생각하지만 그것을 뒷받침하는 '노래'가 되지 않는다면, 그것도 바그너의 <발퀴레>에서 강렬하지 못한 모습을 보여준다면 존재감이 옅어질 수밖에 없다.

 역시 무대의 주역은 훈딩을 노래하는 연광철. 정말 '크라스가 다르다'는 것이 무엇인지 잘 보여주었다. 웬만한 소리가 다 묻혀버리는 3층까지 또렷하고 강렬하게 전달되는 기백있는 음성은 왜 그가 바이로이트를 비롯한 유수의 오페라 극장의 총애를 받는 가수인지 잘 보여주었다. 세세한 감정 변화나 디테일에는 신경쓰지 않고 묵직하게 훈딩이라는 캐릭터를 표현했는데, 애초에 훈딩이라는 캐릭터가 '세세한 감정 변화, 디테일'과는 백만 광년 떨어졌으니 아주 적확한 접근 방식이다. 가장 기억에 남는 대목은 '오늘 밤까지는 당신을 손님으로 대하겠지만 내일 해가 뜨면 당신을 직접 죽일 것'이라 경고하는 'Mein Haus hütet, Wölfing, dich heut'' 이하 부분.

 차그로섹은 오페라 극장에서 닳고 닳은 지휘자답게 능수능란한 완급조절을 보여주었다.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가 '손이 많이 가는' 오케스트라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사람답게 수시로 바쁘게 지시를 내려가며 합주력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배려했다. 다만 지크문트가 노퉁 뽑는 대목에서는 소리가 좀 김이 빠졌는데, 이 부분은 위에서 말한 '완급조절'과 관련되는 부분이므로 2부 <파르지팔>에서 설명하도록 하겠다.

 

 <발퀴레>를 그럭저럭 잘 끝내고 이어진 <파르지팔>.

 그런데 (사실 온라인 공연소개 보고 눈치챘지만) <파르지팔> 3막에 쿤드리가 없다.

 다시 한 번 말하는데 진짜 없었다.

 아니, 아무리 3막에서 쿤드리 대사가 'Dienen, Dienen!'밖에 없다지만 쿤드리를 없애버리면 어떻게 하냐고!

 쿤드리가 말은 안 하지만 파르지팔의 몸을 씻기는 등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는 사실은 <파르지팔>을 완청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데,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극을 완성시키는 존재가 없어져버리니 구르네만츠는 초반 20분 동안 혼잣말만 하는 독백형 캐릭터로 전락해버리고 파르지팔은 분명 머리는 구르네만츠가 씻겨주는데 발은 유령이 씻어주는 미스테리 심리극이 되어버렸다.

 '그냥 지클린데 한 매기를 2부에 갖다 쓰면 안 되는 거였나'라는 생각도 했었는데, 매기가 개런티를 높게 불러서 그냥 빼버렸나 보다. 매기한테 미안한 얘기지만 그렇게 생각을 안 하면 도저히 납득이 안 가. 

 이 대목에서 연광철에게 감탄할 수밖에 없는데, 실종되어버린 쿤드리의 존재감을 벌충이라도 하듯 자기가 1.5인분, 제대로 터뜨릴 때는 2인분의 존재감을 해주며 3막 초반을 자신의 무대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성 금요일의 음악이 울려 퍼지는 대목에서 '풀잎과 꽃잎에까지 미치는 평화의 자비'를 설파하는 연광철의 목소리를 듣고 있으면 '저 목소리로 설교했으면 나라도 지갑 열겠다'라는 이단심판받기 딱 좋을 생각이 무럭무럭 자라났다.

 연광철의 원맨쇼를 돕기 위해 뒤늦게 어기적어기적 나타난 벤트리스는 나름 훌륭하게 파르지팔을 노래했다. 오케스트라를 뚫는 성량은 없지만 소리 자체는 괜찮은 벤트리스에게는 '위안받을 출구 없는 비극적 영웅' 지크문트보다는 '천로역정 끝에 자비심을 깨우친 순수한 바보' 파르지팔이 더 어울려 보인다.

 암포르타스 역할을 맡은 양준모는 훌륭한 암포르타스였다... 연광철만 없었다면. 분명 흠잡을 데 없이 잘 해 줬는데, 앞부분에서 연광철의 존재감이 너무 강력해 어쩔 수가 없었다.

 차그로섹의 진가는 <파르지팔> 마지막 20분에서 드러냈는데, '이런 오케스트라는 초장부터 힘 빼면 앙상블 무너진다'라고 설파하듯 성 금요일의 음악 대목부터 힘을 주어 곡을 고양시키다 티투렐의 장송 음악부터 엔딩까지 모았던 기를 제대로 터뜨렸다. 바그너라는 레퍼토리가 엄청난 체력을 소모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가 1부/2부 합쳐 140분이라는 시간 동안 빵빵 터뜨려 주기에는 체력이 안 된다는 사실도 냉정하게 판단한 후 내린 결과일 것이다. 역시 오페라 극장에서 오래 구른 짬밥은 어디 안 간다.

 

 총평 : 뭐 이렇게 쓰기는 했지만, 국내에서 이 정도 이상의 바그너 공연을 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기에 나름 만족했다. 무엇보다 연광철과 차그로섹을 한 무대에서 볼 수 있었다는 점에 고점을 주고 싶다.

 

 (추가 : 성 금요일 음악 끝나고 장면전환 시 종치는 음향이 뭔가 허전하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까 음이 하나 없었다. 제보를 받은 바에 따르면 토요일 공연 때도 없었다고.)

 

Posted by 여엉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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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처럼 음악이 끌릴 때가 있다. 오늘은 그 대상이 메시앙이었다.

 가장 먼저 끌린 것은 <투랑갈릴라 교향곡>. 그 중에서도 5악장 <별의 피의 노래>가 끌렸다.

 별의 피라니. 별빛이 적색편이라도 되었다는 말일까.

 음반을 걸자마자, 엄청난 하중의 음악이 두 귀에 육박해 들어왔다.

 

 밀란 쿤데라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서두에서 영원회귀와, 무거움과 가벼움에 대해 얘기한다.

 

"가장 무거운 짐이 우리를 짓누르고 허리를 휘게 만들어 땅바닥에 깔아 눕힌다. 그런데 유사 이래 모든 연애시에서 여자는 남자 육체의 하중을 갈망했다. 따라서 무거운 짐은 동시에 가장 격렬한 완성에 대한 이미지가 되기도 한다. 짐이 무거우면 무거울수록, 우리 삶이 지상에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우리 삶은 보다 생생하고 진실해진다."

-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pp. 12~13.

 

 쿤데라의 말을 긍정하면, 사랑하는 여자는 사랑하는 남자의 하중을 갈망한다. 이졸데는 트리스탄의 무게를 갈망했고, 파르바티는 시바의 '파괴적인' 무게를 갈망했다. 숨쉴 틈도 없이 빠르게 전개되는 짓누름과 깔림의 애무 속에서, 사랑은 자신의 환희를 창조하기 위해 다른 모든 감정을 파괴해버린다.

 메시앙이 죽기 직전 진행하던 작업 중에는 <투랑갈릴라 교향곡>의 개정 작업이 있었다. 1990년에 탈고한 완성물을 보면, 5악장 메트로놈 지시가 점8분음표 132에서 138로 고쳐진 것을 볼 수 있다. 메시앙은 가뜩이나 빠른 희열과 오르가즘의 속도를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더 끌어올렸다(82세 나이에 그런 결단을 내렸다는 점도 대단하다). 더 빠른 속도는 더 많은 하중을 청자의 귀에 부여한다. 쿤데라의 말처럼, '짐이 무거우면 무거울수록, 우리 삶이 지상에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우리 삶은 보다 생생하고 진실해진다.'

 

* * * 

 

 반복은 회귀를 떠오르게 한다. 음악에서의 반복은 태초의 시원을 궁구하는 우리의 근원적인 욕망의 무의식적인 분출이며, 반복의 대상이 되는 음표를 '프레이즈 중의 하나로 흘러갈 때'와는 완전히 다른 시각으로 관찰하게 만든다.

 

"우리 인생의 매순간이 무한히 반복되어야 한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혔듯 영원성에 못 박힌 꼴이 될 것이다. 이런 발상은 잔혹하다. 영원한 회귀의 세상에서는 몸짓 하나하나가 견딜 수 없는 책임의 짐을 떠맡는다. 바로 그 때문에 니체는 영원 회귀의 사상은 가장 무거운 짐das schwerste Gewicht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p. 12.

 

 <아기예수를 바라보는 20개의 시선> 중 11곡, <성모의 첫 성체배령Premiere Communion de la Vierge>에서 음악은 D음의 영원성과 접속한다. 악절마다 32번씩 반복되는 D음은 쇼팽의 전주곡 마지막을 장식하는 3개의 조종과는 전혀 다른 형태의 무게로, 형이상학적인 영원성의 무게로 귀에 못박힌다.

 태어난 순간부터 초월과 영원성이 예정되어 있는 존재가 짊어진 짐은 얼마나 무거운 것일까. 예수와 니체를 한 문단 안에 묶어 화해시킨 쿤데라의 통찰은 그래서 놀랍다. '영원한 회귀의 세상에서는 몸짓 하나하나가 견딜 수 없는 책임의 짐을 떠맡'으니까.

 

* * *

 

 우주를 헤엄치는 연어를 상상해보자. 지느러미는 진공에 순응하고 꼬리는 진공을 가른다. 연어는 우리가 비가역적인 흐름이라고 상상하는 강의 흐름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 상류로 나아간다. 당연히 우주를 헤엄치는 연어는, 비가역적인 흐름의 으뜸인 시간을 헤엄쳐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메시앙은 <피안의 빛> 마지막 악장 <그리스도, 천국의 빛>에서 바그너적 공간을 무한으로 확대시킨다. 바그너는 <로엔그린> 1막 전주곡에서 상상의 천상을 A장조의 틀 속에서 그려냈는데, 메시앙은 사건의 진행과 시간의 흐름이 분명한 바그너적 공간에서 '시간의 흐름을 지워버린다.' 이제 음악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며, 태초의 순간을 향하여 끊임없이 회귀하는 우주적 연어와 하나가 된다.

 

 "14세기 아프리카의 두 왕국 사이에 벌어진 전쟁 와중에 30만 흑인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처참하게 죽어 갔어도 세상 면모가 바뀌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인생의 잔혹함이나 아름다움 따위는 전혀 염두에 둘 필요가 없는 셈이다.

 이 전쟁이 영원한 회귀를 통해 셀 수 없을 만큼 반복된다면 14세기 아프리카의 두 왕국 사이에 벌어진 전쟁도 뭔가 달라질 수 있을까?

 그렇다. 그 전쟁은 우뚝 솟아올라 영속되는 한 덩어리로 변할 것이고 그 전쟁의 부조리는 치유될 수 없을 것이다."

-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pp. 9~10.

 

 CD 40장에 가까운 방대한 분량의 음악을 작곡한 메시앙의 음악을 통틀어 이 '마지막 순간'만큼 영원회귀에 가까운 곡도 없다. 음악적 연어가 우주적 연어와 합치하는 순간이다. 우리 모두는 태초의 빛이자 천국의 빛을 잠시 떠나온 방랑객이자 망명자에 지나지 않으며, 결국은 빛으로 돌아갈 존재에 불과하다. 비가역적인 시간의 흐름이 제기하는 모순을 뚫고.

 영원한 회귀 앞에서 음악은 '우뚝 솟아올라 영속되는 한 덩어리로' 변한다. 하지만 쿤데라의 문학이 제기하는 '치유될 수 없는 (전쟁의) 부조리'와 달리, 메시앙의 음악에서 부조리는 찾아볼 수 없다. 메시앙의 '영속성'이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는 것, 곧 부조리의 융합이니까.

 

* * * 

 

 메시앙의 <시간의 종말을 위한 4중주>에서 가장 강조되는 색채는 노을빛에 가까운 블루 오렌지다. 낮이 밤에 주도권을 내주기 직전 마지막 황혼을 체감하는 시간, 주황색과 파란색이라는 극단의 두 세계가 화해하는 시간의 색채다. 세상을 아름답게 미화하는 착란의 색채이기도 하다.

 

"두 번째 악장의 어떤 구절들이 여기 돌아온다. 힘으로 가득 찬 천사가 나타나고, 그리고 무엇보다 천사를 덮은 무지개가 나타난다(무지개는 평화와 지혜와 빛을 발산하고 소리를 내는 모든 바이브레이션의 상징이다). 나의 꿈 속에서 나는 정리된 노래와 멜로디를 듣고 색깔과 형태를 본다. 그 후에 일시적인 이러한 단계 후에 나는 비현실을 통과하고 황홀경의 느낌으로 초인적인 소리와 색깔의 선회하는 소용돌이에 빠진다. 이 불의 검, 파랑과 오렌지 색, 용암의 분출, 난폭한 별; 여기에 뒤죽박죽이 있다. 여기에 무지개가 있다."

 

 음악가의 악곡 해설이라기보다는 중세 묵시 예언자의 신비로움을 연상케하는 이 악장의 제목은 악곡 해설 이상으로 의미심장하다. <세상의 종말을 고하는 천사를 위한 무지개의 착란Fouillis d'arcs-en-ciel, pour l'ange qui annonce la fin>.

 이 악장이 7악장이라는 것을 기억하자. 마지막 8악장은 '영원성'에 바쳐져야 하기 때문에, 7악장은 8악장으로 들어가기 전 마지막 단계, 일곱 개의 스펙트럼이 하나의 악장으로 합쳐지는 과정이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색채는 2악장에서도 등장했었던 노을 빛의 블루 오렌지 화음이다. 노을 지는 시간대는 가장 현실적인 비현실의 시간이다. 상상이 영원을 향해 이륙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석양으로 오렌지 빛을 띤 구름은 모든 것을 향수의 매력으로 빛나게 한다. 단두대조차도."

-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p. 10.

 

 종말의 시간을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은 우리가 그것을 비현실로 인지하기 때문이다. 노을빛을 띤 단두대나, 눈을 멀게 하는 섬광을 뿜어내는 코발트 폭탄의 빛에 매료되는 것도 마찬가지 기제일 수 있다. 우리는 우리를 파괴할 정도로 치명적인 아름다움에 매료된다.

 

Posted by 여엉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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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벌써 보름도 더 지난 이야기지만) 2019년 4월 16일, 피아니스트 외르크 데무스가 세상을 떠났다. 향년 90세.

 이미 장례식도 예전에 끝나고, 추모하던 사람들도 전부 다 일상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항상 굼뜨고 늦는 일개 클래식 음악 덕후가 뒤늦게 그를 추모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한정되어 있다. 고작 그의 음반을 들으면서 글을 몇 자 끼적이는 정도가 그런 일에 해당된다.

 

 데무스에 대해 사람들이 알고 있는 지식은 대개 단편적이다. 명 피아니스트 에트빈 피셔의 제자, 빈의 3총사라 불렸던 데무스/바두라-스코다/굴다의 한 축을 이루는 인물, 정묘한 음색과 엄격한 해석을 고수하는 몇 안 남은 독일 피아니즘의 거장. 이 정도를 기억하면 그래도 데무스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내가 데무스를 추모하기 위해 소개하는 음반은 그가 60년대에 녹음한 드뷔시 전집이다.

 사람들은 데무스의 드뷔시 하면 스튜디오 레코딩이나 실황에서 끼워 녹음한 단편적인 소품 연주만을 기억할 것이다. 그러나 데무스는 이미 60년대 후반에 CD 다섯 장 분량의 드뷔시 전집을 완성한 바 있고, 이 전집의 완성도가 (내가 그토록 높게 평가해온) 30년대의 기제킹 연주나 에리쿠르와 맞먹을 정도로 높기 때문에 이 기회를 빌어 소개하려 한다.

 부디 이 글이, 국내에서 유독 한정된 평가만을 받는 그의 위상 재고에 조금이나마 역할을 하기를 빈다.

 

 수록 순서를 따라 전집을 완청하다 보면, 첫 레퍼토리인 <잊혀진 영상>부터 신선한 충격을 받게 된다.

 사실 드뷔시는 <영상>이라 이름 붙여진 작품집을 3개 만들었다. 1905년에 출판한, '물에 비친 그림자', '라모를 찬양하며', '움직임'이라는 부제가 붙은 3곡이 1집, 1907년에 출판한, '잎새를 스치는 종소리', '황폐한 절에 걸린 달', '황금 물고기'가 2집이다. 그런데 사실, 1894년에 만들고 출판하지 않은 드뷔시의 <영상>이 하나 더 있다.

 'Images Inedites'라 불리는 이 작품집은 번역하면 '출판되지 않은 영상'이며, '잊힌 영상'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각각 'Lent(느리게)', 'Souvenir du Louvre(루브르의 추억)', 'Quelques aspects de "Nous n'irons plus au bois" parce qu'il fait un temps insupportable(날씨가 나빠서 "숲에는 안 갈 거야"에 의한 몇 가지 아이디어)라는 제목을 단 이 곡들은, 드뷔시의 엄격한 자기 평가기준에 따라 출판되지 않고, 대신 2곡은 미세한 수정을 거쳐 <피아노를 위하여>의 2곡 '사라방드'로, 3곡은 전면적인 개정을 거쳐 <판화>의 3곡 '비 오는 정원'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내가 신선한 충격을 받은 부분은 희귀 레퍼토리여서가 아니라, 연주 때문이다. 보석을 가공하듯 섬세하게 직조하는 투명한 음색, 페달 포인트의 단단한 소리는 내가 알고 상상하던 데무스의 음색 그 이상의 것이었다. 특히 1곡에서 데무스의 오른손 고음부는 '혹시 다른 피아노로 연주하나?' 싶을 정도로 색다른 음색을 들려준다.

 <영상>은 동곡의 표준 레퍼토리인 미켈란젤리(DG)에 비하면 조금 더 조심스럽게, 조금 더 부드럽게 연주한다. 그런 점에서 이 연주는 이전의 기제킹이나 에리쿠르, 비슷한 시기의 미켈란젤리보다는 이후의 이스토민(Adda. 구하기 힘든 연주라 나도 유투브로만 들었다)과 비슷하다. '물에 비친 그림자'의 빛나는 E플랫장조 아르페지오, '라모를 찬양하며'의 좀처럼 들뜨지 않는 분위기 조성(적절하게 루바토를 넣어준다), '움직임'의 주요 동기를 유독 딱딱하게 연주하는 특이한 해석, '잎새를 스치는 종소리'의 곡 전체를 한 덩어리로 묶어주는 부드러운 레가토, '황금 물고기'의 전반부 차분한 분위기와 점점 고조되는 후반부의 대비가 모두 마음에 들었다. '황페한 절에 걸린 달'이 조금 아쉽기는 했지만, 어차피 이 곡에서 나를 만족시켰던 연주는 에리쿠르를 제외하면 없었기 때문에 논외.

 <보헤미아의 춤>, <슬라브 발라드>, <스티리아 타란텔라>, <낭만적인 왈츠>, <마주르카>, <앨범 페이지>는 꿈 꾸는 듯, 비에 젖은 정원을 감상하는 듯 이 세상에서 조금 이격된 느낌을 주는 소품들. 연주는 짤막하게 잘라 말하겠다. 완벽하다. 부연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쓸데없는 부연을 덧다는 것만큼 이 연주들에게 누가 되는 짓도 없다.

 

 <베르가마스크 모음곡>은 워낙 많은 피아니스트들이 쳐서 경쟁 상대도 많은데, 데무스는 '전주곡'의 압도적인 첫 연타부터 다른 연주들의 반발을 잠재운다. 에트빈 피셔를 위시한 독일 피아니스트들의 강점인 '단단한 포르테'는 데무스도 예외가 아닌데, 신기한 점은 그런 '단단한 포르테'가 감성과 음향의 예술인 드뷔시와 적절하게 잘 어울린다는 점이다. 이 연주는 데무스가 얼마나 음색, 루바토, 페달링에 관심이 많고 다채로운 스킬을 개발해왔는지에 대한 좋은 실례다. '미뉴엣'은 살짝 느릿하면서도 선명하지만, '달빛'은 뛰어난 연주임에도 완벽하다고 하기에는 2% 아쉽다. 그래도 '파스피에'는 마지막을 멋지게 마무리짓는다. 아쉬운 부분도 없지 않지만 네 손가락 안에 들어갈 연주다(에리쿠르, 카펠(!), 기제킹 다음 자리ㅋ).

 <장난감 상자>는 관현악 버전만 알고 있었는데 사실은 피아노 버전이 원곡이다. 데무스는 전주곡과 에필로그를 뺀 4곡을 발췌해 연주했는데 귀엽고 흥겨우면서도 신비로운 만년 드뷔시의 특유의 감성을 놓치지 않는다. 곡 중에서는 2곡 '바타유'가 제일 마음에 들었다.

 <녹턴>과 <가면>은 곡의 완성도와 긴장감이 조금 떨어지는 곡들이라 연주가가 커버해야 하는 부분이 많은데, 데무스는 곡의 단점을 가릴 정도로 훌륭한 음색을 가지고 있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내 연주 취향은 <녹턴>보다는 <가면>의 은근한 연주가 더 마음에 들었다.

 <기쁨의 섬>은 연주시간이 5분을 넘기 힘든 짧은 곡이지만 단독으로 설명해야 할 정도로 중요한 곡인데, 드뷔시의 피아노 음악 형식이 집약된 곡이기 때문이다. 데무스는 처음에는 덤덤하게 치는 것 같지만 다른 곡에서 그렇듯 점점 온도를 올려가며 비등점에 근접해간다. 하지만 조금 더 자신의 감정을 풀어놓았으면 어땠을까 싶다. 참고로 마지막 처리가 독특하니 일청을 권한다(들을 수 있다면ㅋ).

 

 <어린이의 세계>는 교본인 미켈란젤리(DG)와 어쩔 수 없는 비교를 당하게 되는데, 첫 곡 '그라두스 아드 파르나숨 박사'는 <기쁨의 섬>처럼 마지막 처리가 독특하다. '어린 양치기'는 판본이 궁금해지는 연주이며, 마지막 '골리워크의 케이크워크'는 말 그대로 '확 깬다.'

 <피아노를 위하여>의 '전주곡'은 친구 굴다를 생각나게 하는 연주. 굴다가 드뷔시에서 전주곡 말고도 자기 이름을 내게 깊게 각인시킨 레퍼토리가 <피아노를 위하여>였는데, 데무스는 그 굴다와 비교해도 모자라지 않는 연주였다. '사라방드'는 뛰어난 연주지만, '7분에 육박한 느린 연주임에도 존재감이 압도적인' 에리쿠르가 너무 대단하다. 그래서 더 아쉬웠다. '토카타'는 여타 연주와는 드물게, 속도감이 아닌 색채감으로 승부를 보는 연주였다.

 지금까지 에리쿠르와 비교하면서 데무스를 비교 열위로 보는 경우가 많았는데, <판화>는 다르다. 첫 곡 '탑'의 기묘한 색배합은 에리쿠르와 동급, 어쩌면 그 이상이며, 이렇게 화려한 음의 팔레트를 보유한 피아니스트가 있었나 싶을 정도로 다채롭게 곡을 채색한다. '어떻게 사람이 이런 소리를 내지'라는 생각이 들 정도. '그라나다의 밤'은 첫 곡에서 끌어올린 긴장감과 정서를 하나도 놓치지 않고 그대로 색다른 것으로 만들어 듣는 사람을 마지막 곡 '비 오는 정원'으로 이끈다.

 페달링 많이 쓰는 드뷔시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데무스의 <꿈>은 몇 안 되는 예외다. <작은 흑인>은 신선하며, <하이든 예찬>은 톡톡 튀는 터치가 일품이다. <렌트보다 느리게>는 어떤 연주로 들어도 재미가 없어서 데무스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영웅의 자장가>는 '아 이 곡은 원래 음울한 곡이지'라는 생각 말고는 드는 게 없었다ㅋ. <스케치북에서>는 좋은 연주지만 이미 에리쿠르의 섬뜩한 연주를 들은 후라 다른 어떤 연주를 들어도 성에 차지 않는 것 같다.

 

 앞의 연주들이 음의 색채감에 치우치는 연주가 많다면, <전주곡> 1권부터는 분석적인 연주가 두드러진다. 데무스는 첫 곡 '델피의 무희들'부터 특유의 시간이 멈춘 듯한 분위기를 잘 잡아나간다. '돛'은 클라이막스 이후 화음 처리가 독특하며, '들을 스치는 바람'은 반대로 클라이막스 화음이 두드러진다. '아나카프리의 언덕'은 미켈란젤리(DG) 이후 경향이 보이지 않아 마음에 드는데, 끝부분 템포가 기이할 정도로 느리다. '눈 위의 발자국'은 페달링이 두드러지며, '서풍이 불 때'의 속도감과 루바토는 곡의 성격과 잘 맞아떨어진다. 스타일은 기제킹과 리히터, 미켈란젤리의 세 극단의 중간점에 위치해 있다. 반대로 '아마빛 머리의 소녀'는 순수하게 음의 아름다움에 탐닉하는 연주다. 1권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가라앉은 성당'은 프레이즈의 분절을 아주 적절하게 이용하며, 페달링을 적절하게 이용한 거대한 울림이 인상적이다(다른 어떤 연주도 데무스같은 울림을 못 만들었다). '민스트렐'은 안정적인 마무리를 들려준다.

 

 <전주곡> 2권 연주도 1권과 크게 다르지 않다. '안개'와 '고엽'은 다소 차분하고 특징없는 연주를 들려주나, 데무스의 개성은 '비노의 문'부터 발휘가 된다. 첫 동기 리듬 처리가 정말 독특하다. '요정은 뛰어난 무용수'의 두 번째 동기는 아주 느릿하게 나오는데, 이게 의외로 잘 어울린다. '히스가 무성한 황야' 특유의 낙천적인 아름다움이나 '달빛이 비치는 테라스'의 신비로운 사색은 잘 살려내지만, '괴짜 라빈 장군'이나 '옹딘' 특유의 날카로운 리듬은 좀 뭉특하게 들린다. 하지만 '피크위크 경에 대한 경의'는 데무스의 뚝심이 잘 어울리는 특이사례. '카노프'는 여타 연주와는 색다른 소리를 들려주며, 마지막 '불꽃놀이'는 중반 곳곳에서 등장하는 루바토가 인상적이다.

 

 두 곡의 아라베스크는 멋진 소품에 어울리는 멋진 연주다.

 

 <연습곡>은 1권과 2권을 나누어 배치했다. 여타 뛰어난 연주들이 그렇듯, 데무스도 '소리'와 '해석' 그리고 '기교'를 잡기 위해 노력하는 연주를 들려준다. '다섯 손가락을 위하여'는 에리쿠르의 '소리'와는 달리 '리듬'이 두드러진다. '3도'는 만족스러운 연주이며, '4도'는 템포가 아주 변화무쌍하다(주요 동기를 처음에 느리게, 나중에 빠르게 제시한다). '옥타브'는 연습곡 연주를 통틀어 다이내믹이 가장 큰 연주를 들려주며, '여덟 손가락'은 매끄럽게 쏙 빠져나가는 느낌을 잘 살린다.

 

 <연습곡> 2권의 연주들은 1권보다 더 뛰어나다(개인적으로 <전주곡>과 <연습곡>을 통틀어 <연습곡> 2권이 가장 마음에 든다). 첫 타석을 장식하는 '반음계'의 연주는 최상급이다. 데무스는 '낡아빠진 반음계적 진행의 연출을 통해 새 시대를 예고하는 신선하고 자극적인 연습곡(슈미츠)'이라 일컬어지는 이 곡의 특성을 잘 이해하고 있다. '꾸밈음'의 연주도 뛰어나며, '반복음' 특유의, 마치 자크 타티의 <플레이타임> 같은 묘하게 차갑고 퉁명스러운 느낌도 잘 살려낸다. '대비음'의 급진적인 정중동에 대한 데무스의 해석은 정말 특이하다. '아르페지오'의 극에 달한 아름다움을 거쳐 리듬의 활기가 가득한 '화음'으로 끝마치는 여정을 듣고 있으면, 데무스가 우리에게 남긴 유산이 절대 적지 않음을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Requiescat In Pace, Maestro Demus (1928.12.2~2019.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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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여엉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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