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러 교향곡 6번 <비극적> (A minor)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지휘)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연주

1977년 8월 27일 잘츠부르크 실황연주

말러의 교향곡 6번은 여러모로 말러의 아이덴티티를 상징하는 곡으로 남아 있다. 엄격한 절대음악의 형식을 갖추고 있음에도 표제적인 해석이 난무하며, 많은 사람들이 이 곡을 말러의 고뇌에 가득 찬 만년을 예지한 곡으로 생각하고 있다. 4악장 서주의 옥타브를 뛰어넘는 불협화적인 튜바의 선율도 그런 식의 해석이 이루어지고는 했다. 아니, 이루어진다고 생각했다. 한 쪽에 불행과 고뇌의 감정을 통해 나타나는 ‘주관’이 버티고 있다면 다른 한 쪽에는 점점 더 많아지는 증4도와 갈수록 해결이 늦어지는 불협화음들, 그리고 1악장의 반복이라는 엄격한 소나타 형식의 준수로 나타나는 ‘객관’이 깊게 뿌리내리고 있다. 시종일관 약박에 떨어지는 강세와 복잡하면서도 엄격한 옛 대위법의 사용을 보여주는 스케르초 악장마저도 ‘흉한 꼭두각시의 춤’과 같은 해석이 가능하다. 이 곡은 말러가 표제에서 밝힌 것처럼 매우 비극적이지만, 비극의 진행은 매우 엄격한 논리와 원칙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지론을 설파하는 곡으로 볼 수도 있다. 주관과 객관이 이토록 복잡하게 뒤얽힌 곡은 말러의 이전 교향곡에서도 이후 교향곡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그만큼 해석의 폭도 다양하고 넓다. 시종일관 몸부림치는 연주를 들려주는 번스타인과 텐슈테트가 저 쪽에 서 있는가 하면, 찔러도 피 한 방울 흐르지 않을 만큼 냉정한 길렌과 불레즈가 다른 한 쪽에 서 있다. 스펙트럼의 넓이만큼 다양한 연주가 존재해 그것을 다 듣고 일일이 평을 내리는 것이 무색할 지경에 이르렀다. 무색무취한 연주부터 선혈로 악구를 도배한 것처럼 섬뜩한 연주까지 모든 연주가 다 나오고 있다.

카라얀은 70년대 중반에 말러의 교향곡 5번을 시작으로 일련의 말러 연주를 진행했다. 그가 75년에서 77년에 걸쳐 진행한 교향곡 6번의 스튜디오 레코딩은 여러모로 독특한 연주로 남아 있다. 그는 거기서 주관과 객관 사이의 교묘한 실체, 그림자처럼 모호하지만 쉽게 떨쳐버릴 수 없는 허약한 실체를 잡아냈다. 정말 절묘하고 기가 막힌 연주라고 할 수 있지만 다른 연주처럼 모두의 동의를 얻을 수 있는 연주인지에 대한 의문을 남기는 연주였다.

그 스튜디오 녹음을 진행하는 와중에 그는 여러 차례 이 교향곡의 실황 연주를 남겼다. 77년에만 최소 두 종의 실황 연주가 있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이 77년 8월의 잘츠부르크 실황 연주다. 실황 연주에서 그는 자신이 잡아낸 실체를 극단으로 몰고 가는 것 같다. 관현악은 쉽게 흥분하지 않지만 그 타격감만은 엄청나다. 이성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거나 이성적인 논리가 개입된 광기는 더욱 무서운 힘을 발휘한다. 카라얀의 말러 6번은 바로 그 관점을 명확히 들려주고 있다. 1악장 F장조의 2주제는 충분히 관능적이지만 별다른 감정은 보여주지 않는다. 음향은 충분히 감정적이지만 곡을 몰고 가는 지휘자의 손끝은 논리적이고 정교하다. 발전부 현악기의 고음 트레몰로와 피치카토는 그 이상 아름다울 수 없지만 다가가서 만질 수는 없는 아름다움이다. 템포는 다소 빠르지만 휙휙 지나가는 느낌은 주지 않는다. 코다는 일견 지나칠 정도로 즐거워 보이지만 팀파니의 급박한 리듬이 그것을 즐기지 못하게 한다. 1악장에서 유일하게 아쉬운 것은 실황 녹음이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반복을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2악장은 실황 녹음임에도 타악기가 명료하게 들리는 점이 아주 재미있다. 원래 실황 녹음, 특히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대 연주회장의 녹음들은 음향이 아주 날카로워진다는 특징이 있는데, 여기서 타악기는 날카롭지 않으면서도 아주 또렷하게 들린다. 말렛의 사용법까지 철저하게 관리하는 지휘자의 성향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 같다. 이어지는 트리오는 일부러 실내악처럼 정교하게 다듬은 것 같다. 소리는 매력적이지만 관능적이지는 않다. 만약 트리오가 말러의 설명처럼 알마와 아이들의 모습을 묘사한 것이라면, 관능적인 소리가 나오면 오히려 이상한 셈이다. 중요한 것은, 스튜디오 녹음에서 카라얀은 ‘리듬’보다는 ‘음향’에 더 우선권을 주었다면, 이 실황 녹음에서는 ‘음향’보다는 ‘리듬’에 더 우선권을 준다는 사실이다.

3악장은 베를린 필의 현악기가 주인공이다. 굳이 첨언하자면 전체적으로 분위기가 약간 가라앉아 있다. 그 음향은 내면의 탐구보다는 온화한 조화에 가깝다. 바이올린부터 베이스까지 모든 현이 한 덩어리가 되어 움직인다. 카라얀은 4악장을 ‘완전한 파멸’의 종착으로 본 것 같다. 파멸이나 해체는 그 전의 완벽한 균형과 조화가 있을 때 더욱 대비된다. 카라얀은 3악장을 4악장과 완전히 대비되는 악장으로 본 것이다. 그래서 그는 3악장에 아다지오를 놓은 것 같다. 협화음은 불협화음으로 인해 더욱 아름다워지니까. 베를린 필의 현악기군을 듣고 싶으면 어느새 소방울의 존재는 잊어버리게 된다. 소박함을 아름다움이 대체하는 셈이다.

나는 항상 4악장의 C단조 서주를 들으면서 말러가 ‘해체’를 이런 식으로 음악화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진다. 조성이 극단적으로 이완되며, 불협화음은 포화상태에 이른다. 간간이 들려오는 협화음은 불협화음을 더 끔찍하게 들리게 만든다. 카라얀은 이 ‘해체’를 슬프게 여기나, 거기에 동요해 울부짖지는 않는다. 튜바에 묻혀 잘 들리지 않는 약음기 단 트럼펫의 약주를 끝까지 또렷하게 가져가는 것을 보면 더 그렇게 느껴진다. 주요부가 시작되면 템포는 알레그로 모데라토로 시작해 곧 알레그로 에네르지코로 옮겨지는데, 카라얀은 처음부터 흥분하지 않고 이 지시를 따라간다. 이렇게 하면 긴장감이 흐트러질 수 있다는 단점이 있는데 그는 교활하게 관현악을 컨트롤 해 이 난점을 피해간다. D장조의 2주제는 1악장과는 달리 엔딩과 관련성이 없는데, 여기서 그는 최대한 밝게 연주한다. 곡이 어떻게 진행될지를 안다면 이 부분이 참 특별하게 들린다. 이어서 곡은 첫 번째 해머 타격으로 나아간다. 타악기는 무서운 타격감을 들려주지만 해머의 소리는 아쉽게도 페스티벌 홀의 구조를 반영하듯 퍼져서 잘 들리지 않는다. 이어서 등장하는 채찍(대부분의 연주는 이를 싸리채 비슷한 타악기로 대체한다)은 아주 고압적으로 들린다. 이제 파국을 막을 방법은 없다. 두 번째 타격이 이어지고 투쟁의 형태는 한층 더 참혹해진다. 재현부는 서주를 거의 그대로 가져오면서 2주제와 1주제의 순서까지 바꾸어 연주한다. 이토록 정교하게 이루어지는 파멸이 있었던가? 2주제의 클라이맥스는 이상할 정도로 강렬하며, 그 다음부터는 눈이 핑핑 돌 정도로 현란하게 움직인다. 1주제는 제시부와 마찬가지로 연주하는데, 막바지의 호른의 트릴이 두드러지는 점이 아주 재미있다. 곡은 1악장과 비슷한 희망의 몸짓으로 옮겨가려고 무진 애를 쓰지만, 애당초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곡은 아주 천천히 고통스러운 해체의 과정을 겪는다. 마지막 타격이 떨어지고 곡은 완전한 파멸로 끝을 맺는다. 여기서 무엇 때문인지(실수인 것 같다) 고현이 다른 악기보다 약간 먼저 튀어나온다는 옥의 티가 있다.

여러모로 3악장과 4악장을 중요하게 다루는 녹음이다. 3악장에서는 베를린 필의 현악기군이 가장 두드러지며, 4악장에서는 곡의 진행 방향에 대한 카라얀의 통찰이 돋보인다. 실황 녹음이기 때문에 벌어지는 사소한 결점이나 실수들은 덮어도 좋을 대단한 연주다.

Posted by 여엉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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