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절과 통합 : 루비모프 콘서트 (2018.5.12. 土) (Part 2)




 레퍼토리는 패르트의 파르티타, 하이든 피아노 소나타 32번, 시메온 텐 홀트의 <솔로 악마의 춤 IV>, 존 케이지의 프리페어드 피아노를 위한 소품 3개, 그리고 드뷔시의 전주곡 2권이다.

 이렇게 방대한 레퍼토리는 확신과 철저한 연습, 통찰력의 삼위일체가 갖춰지지 않으면 와르르 무너진다. 어쩌면 이 레퍼토리 자체가 루비모프의 거장성을 증명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패르트의 파르티타는 처음 듣는 곡인데 바흐식 대위법에 20세기 양식을 조합한 느낌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바흐, 초기 신빈악파, 초기 바르토크, 카푸스틴을 전부 합친 다음 넷으로 나눈 느낌. 패르트하면 사람들이 동유럽식 미니멀리즘만 생각하지만 원래는 이런 과정을 거쳐 무조음악을 쓰던 사람이다.

 20세기 작곡가의 곡이지만 어찌 보면 바흐 양식에 충실한 첫 곡. 루비모프는 리듬과 다이내믹을 계산하면서, 절제하면서 첫 곡을 풀었다. 처음부터 확 끌리지는 않지만 듣고 있으면 자연스레 몰입하게 된다.

 사실 이런 곡은 치는 사람도 통제력을 발휘하기 어렵다. 대부분의 작곡가가 그렇듯 패르트의 이 곡도 덜 여문 작곡가 특유의 치졸함이 있기 때문이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아직 음악을 어떻게 덜어내야 하는지 잘 모른다.’ 글이고 음악이고 처음 덤벼드는 사람이 저지르는 가장 큰 실수 중 하나가 좋으면 일단 넣어보려고 하는 치기인데 패르트의 곡에서도 그런 느낌이 묻어 나왔다. 하지만 루비모프의 연주는 그 치졸함은 최대한 지우고 풋사과 특유의 풋풋함과 색다름을 잡아냈다.


 두 번째 곡은 하이든의 피아노 소나타 32번. 하이든의 1770년대 작품으로 고전파 작곡가의 작품이지만 아직 바로크 건반 음악의 특징이 깊게 배어있다.

 건반 음악에서 바로크와 고전파 음악의 차이점이 무엇일까. 장식음과 지속음의 차이가 아닐까. 바로크 하프시코드 음악은 트릴을 비롯한 장식음의 시대이며 고전파 포르테피아노 음악은 음의 지속이 가능해지면서 화음의 무게감이 달라졌다. 이 소나타는 그 경계선에 서 있다.

 루비모프가 진가를 드러내는 부분은 여기서부터였다. 그는 개개의 음을 끊어서 이어지지 않게 하면서도(하프시코드식 분절), 그 사이사이에 놓인 화음은 페달을 써가며 뭉쳤다(포르테피아노의 특성). 음악은 이어지되 이어지지 않게 되었다. 분절과 통합이라는 두 가지 방식으로 하프시코드의 특성을 가지되 하프시코드 곡이 아닌 모순을 해결해버린 것이다. 고전파 음악은 포르테피아노로, 드뷔시는 1910년대 피아노로 치는 행보에서 나온 내공이었다.

 루비모프의 하이든에서 특기할 것이 페달링이다. 그는 트릴을 연주할 때마다 오른페달을 써가며 음을 절묘하게 이었다. 음을 끊어야 할 때는 중간 페달로 끊었고, 결정적인 순간마다 왼페달을 기가 막히게 사용했다. 그 페달 사용법을 보고 듣기만 했는데 하이든이 끝났다.


 세 번째 곡은 시메온 텐 홀트의 <솔로 악마의 춤 IV>. 서유럽식 미니멀리즘의 정수를 보여준 작곡가가 존 케이지, 모튼 펠드먼의 방법론을 받아들여 각 파트를 연주자 마음대로 빼고 재배치할 수 있도록 했다. 정교하게 짜인 재료들로 치르는 즉흥연주라 해도 되겠다.

 곡을 들으면서 제목의 의미에 대해 생각했다. 춤은 원을 이루는 회전을 기본으로 한다. 미니멀리즘은 아무리 변화를 추구해도 원래 조립한 재료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결국 원을 이루며 도는 것이다. 하지만 미니멀리즘은 변화를 극단적으로 줄여 효과를 극대화하는 음악. 점 하나를 찍을 때마다 별 하나가 생기고 점 하나를 지울 때마다 별 하나가 사라진다.

 거기에 아주 크지만 우리가 결코 듣지 못하는 요인(즉 악마) 하나가 개입한다. 바로 연주자의 주관이다. 악보를 보지 않고는 연주자가 어떤 파트를 빼고 몇 번을 반복하는지, 어느 부분을 재배치했는지 알 수 없다. 메타연주라는 말을 써야 할까.

 루비모프의 손가락은 70먹은 노인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비슷한 나이대의 폴리니가 이미 추한 꼴 다 보인 걸 생각하면, 적어도 루비모프는 추한 꼴 안 보이고 은퇴할 수 있겠지라는 희망이 생긴다.


 1부가 끝나자마자 관계자들이 부리나케 프리페어드 피아노를 들여왔다. 이로써 의문 하나 해결. 프리페어드 피아노는 리즈Leads 브랜드였다. 처음 듣는 브랜드다. 비싸려나?

 솔직히 말하자면 난 존 케이지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군대 있을 때 후임이 영화를 비롯한 예술에 관심이 있어서 케이지 얘기를 했는데 <4분 33초>를 두고 ‘너무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곡’이라고 했었다. 난 그 말이 정곡을 찔렀다고 생각한다. 케이지는 너무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서 ‘음악은 음악이다(알반 베르크의 명언)’라는 기본 명제를 자주 흐린다. 다행히 이 곡은 질문보다는 음악이 우선인 곡이다. 케이지는 겉보기에 익숙한 매체를 통해 우리를 낯선 세계로 데려가 낯선 음악을 듣게 한다.

 난 처음에 이 곡이 들려주는 소리를 듣고 (공교롭게도) 베르크 <보체크>에서 들었던 그 피아노 소리를 연상했다. 사실 그것은 내 고정관념과 실제 음향이 충돌하는 과정이었다. 프리페어드 피아노는 피아노라는 매체에서 연상할 수 없는 소리를 연달아 내놓았다. 음향은 공, 탐탐을 거쳐 유사 가믈란의 세계로 들어갔다.

 우리가 피아노라는 매체에 대해 가지고 있는 집착은 무엇일까. 바로 ‘피아노에서는 피아노 소리가 나야 한다’ 아닐까. 이 곡은 그 집착을 산산히 부수는 것을 넘어, 그 집착을 버리게 만드는 곡이다. 하지만 고개가 숙여지는 깨우침은 아니다. 그런 파괴가 피아노에 이물질을 끼우는 행위나, 색다른 음향에 대한 과한 몰입이라는 새로운 집착을 낳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루비모프라는 위대한 전달자 얘기를 하자면, (동어반복해서 미안한데) 솔직히 곡에 너무 몰입해서 연주를 생각할 시간이 적었다는 변명 말고 할 말이 없다. 하지만 사실 그게 위대한 연주 아닐까. 너무 기가 막히게 잘 해서 딴 생각을 못하게 만드는 연기를 본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드디어 마지막, 드뷔시 전주곡 2권.

 드뷔시의 <영상>과 전주곡은 둘 다 1권과 2권으로 나뉜다. 1권이 좀 더 유명하지만 2권은 더 깊고 내밀한 방향으로 들어가며 더 그윽하고 완성도도 더 높다.

 그런 2권에서 루비모프가 어땠나면…… 하, 그냥 존나 쩔었다.

 무슨 말을 써도 표현이 안 된다.

 난 40분 동안 음에 함뿍 젖었다.

 반음계가 적시고, 화음이 적시고, 아르페지오가 적신다.

 아첼레란도로 홀리고, 테누토로 홀리고, 루바토로 홀린다.

 <안개>에서는 몽롱해지고, <고엽>에서는 참담해지다가, <브뤼예르>에서 뭉클했다.

 <라비느 장군>의 괴상망측함부터 <카노프>의 모호함까지, <달빛 받는 테라스>의 정묘한 모네식 대비부터 <불꽃놀이>의 찬연한 음향의 폭발까지.

 모든 게 거기 있는데 말로 설명을 못하게 만든다.

 완벽한 연주라는 말은 쓰면 쓸수록 비루해지지만 루비모프의 드뷔시는 완벽했다. 내가 이 이상의 드뷔시 연주를 콘서트에서 들을 수 있을지 의문이다.

 연주에 대한 얘기는 더 못하겠으니 페달링이나 첨언하겠다. 피아노의 역사에서 템포 루바토를 정점으로 올려놓은 이가 쇼팽이라면, 페달링을 정점에 세운 이들은 드뷔시와 라벨이다. 드뷔시의 곡을 연주하려면 그만큼 차원이 다른 페달링 스킬을 보여주어야 한다.

 전주곡에는 그런 스킬이 곡마다 깔려 있다. 한 프레이즈를 연주하면서 중간 페달로 한 음만 콕 집어서 끊어내는 스킬이 빈번하다는 얘기다. 이게 말이 쉽지 진짜 엄청나게 힘들다. 검으로 종이를 베어야 한다고 생각해보라. 더군다나 피아노는 음향이 엉키기 쉬운 악기다.

 루비모프의 드뷔시가 완벽하다고 극찬을 하는 이유의 80%가 바로 이 페달링 때문이다. 소름끼치는 순간은 <와인의 문>에서 나왔는데, 이 곡에는 급박한 하강 연음이 있다. 루비모프는 이걸 왼페달로 풍성하게 울리다가 가운데 페달로 칼같이 끊어냈다. 기민함에 놀라고 명쾌함에 놀라다가 마지막으로 음향에 놀라는 순간이었다.

 

 루비모프는 마음에 안 드는 구석이 있었는지, 아니면 더 보여주고 싶은 게 있었는지 앵콜을 무려 두 곡이나 했다. 첫 번째 곡은 쇼팽 뱃노래였는데, 가장 좋아하는 카펠(RCA)의 폭발하는 연주와는 거리가 멀지만 질퍽한 루바토를 남용하지 않으면서 서서히 끌어올리다가 마지막에 카타르시스를 주는 게 장난 아니었다. 다만 잔실수가 조금 있었던 게 아쉬웠다. 두 번째는 슈베르트 즉흥곡 D.899의 2번이었는데 이것도 드뷔시에 필적했다.


 다 쓰고 나니 하이든을 설명할 때 썼던 표현인 ‘분절과 통합’이라는 말을 총평에 덧붙이고 싶다. 루비모프는 시대를 달리할 때마다 매체를 바꿀 정도로 케이스 바이 케이스에 능한 연주자지만 자신의 미학은 타협하지도 양보하지도 않는다. 바로 명쾌한 음향이다.

 루비모프의 아름다움은 명쾌함에서 온다. 칼로 가르듯 끊어내고 풍성하게 부풀린다. 미련을 남기지도 않고 질질 끌지도 않는다. 하지만 폴리니나 아이마르처럼 거세된 아름다움은 아니다. 정묘한 형상 밑에는 따뜻한 피가 흐르는 혈맥이 있다. 만약 명쾌함과 음향 두 가지 중 하나를 희생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면, 루비모프는 명쾌함을 희생하고 음향을 택하리라.

 시대에 따라, 음악에 따라 다른 접근법을 선택하지만(분절), 그 모든 음악은 명쾌한 음향으로 통합되어 있다. 그것이 내가 들은 루비모프의 음악이다.

 끝으로, 감동적인 연주도 모자라 친절하게 사인까지 해주신 마에스트로께 감사를 드립니다.


 한줄 평 : 이보다 더 나은 연주회를 보게 된다면 그거야말로 내 인생의 행운일 것이다.

Posted by 여엉감


 분절과 통합 : 루비모프 콘서트 (2018.5.12. 土) (Part 1)




 지금껏 연주회 평을 여러 번 썼지만, 첫 머리를 이렇게 고민하게 만든 연주회는 처음이다.

할 얘기가 없기 때문이 아니다. 할 얘기는 너무 많다. 다른 사람을 붙잡고 열 시간이고 백 시간이고 떠들 수 있다. 문제는 서두를 어떻게 풀어야 이 소름끼치는 연주에 누를 끼치지 않을지 그 방법이 쉽게 생각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연주회 후평을 둘로 나누기로 했다. 연주회 전에 있었던 일들은 1부, 연주회 자체는 2부로 나누었다. 1부와 2부의 어투도 다르니 참고할 것.


 일단 연주회를 보러 간 목적부터 솔직히 말하겠다. 이번 기회가 아니면 두 번 다시 루비모프를 못 볼 것 같았다. 그는 1944년생. 올해 74세다(검색해보고 나도 놀랐다). 기교의 쇠퇴는 둘째 치고 슬슬 은퇴를 하느냐 마느냐를 고민할 시기 아닌가.

 나는 레퍼토리를 확인하자마자 가는 쪽으로 마음을 굳혔다. 패르트, 하이든, 시메온 텐 홀트, 존 케이지, 드뷔시. 이건 12첩 반상 차려놓고 와서 안 먹으면 네 손해라고 말하는 거나 진배없다. 적금을 깨서라도 가야 하는 연주회건만 가격이 S석 5만원, A석 3만원. 세상에 교통비보다 싼 연주회는 처음 가 본다.

 가는 날 비 예보가 있어서 걱정이 되었지만 다행히 통영은 흐리기만 할뿐 비가 내리지는 않았다. 와 봐야 몇 방울 뿌리고 마는 수준. 통영은 관광하기 참 좋은 도시지만 여기 온 목적은 관광이 아니니 후딱 버스 잡아타고 음악홀로 향했다. 그래도 버스 안에서 주마간산으로나마 체감해서 다행이야.

 해안선을 따라 부드럽게 휘어진 도시를 뒤로 하고 음악홀 도착한 게 1시. 음악홀은 미륵도와 한산도 사이라는 천혜의 절경에 자리 잡았다. 사실 시간이 많이 남아서 기다리지 말고 관광이나 할 걸 하는 생각도 했지만, 아마 그랬으면 루비모프의 귀한 사인을 못 받았겠지.

 양 옆으로 해안선을 낀 카페에서 차 한 잔 마시면서 시간을 죽이고 있는데 관계자분과 함께 남은 귀밑머리가 허연 노인이 들어온다. 자세히 보니 바로 여러분이 생각하는 그 분 맞다. 연주회를 앞둔 연주자에게 사인을 받는 것이 무례한 행동일 수도 있어 고민하다가 어느 아주머니가 양해를 구한 후 사진을 찍고 차 대접을 하는 것을 보고 용기 내어 다가갔다.

 솔직히 무협지에서 눈빛만 마주쳐도 격의 차이를 느끼니 마니가 다 개소리인줄 알았는데 이번에 그게 사실인 줄 알겠드라. 눈을 정면으로 마주치는데 진짜 포스가 장난이 아니야. 포스에 눌린 탓인지 영어 울렁증이 도져서 하고 싶은 말의 반도 못 했다. 그래도 무사히 사인 받고 악수까지 했으니 다행. 마에스트로 죄송합니다.

 루비모프는 카페에 앉아 앞으로 있을 연주를 복기하는지 아니면 보는 사람까지 차분해지는 바다를 관망하는지 그저 관조만 하더라. 정신 차려보니 시간은 다가오고 난 30분 전부터 객석에 앉아 기다렸다. 레퍼토리 중에 프리페어드 피아노를 사용하는 존 케이지 곡이 있던데 덩그러니 스타인웨이만 놓여 있어서 어떻게 해결하나 의문이 들긴 했다.

 드디어 5시. 노인이 무대 위로 걸어 나왔다.


 일단 1부 끝. 인증 겸 자랑으로 사인 올려 봄. 



Posted by 여엉감

 2017년 9월 13일

 키릴 페트렌코 / 이고르 래빗 / 바이에른 슈타츠오퍼 오케스트라

 예술의 전당


 무슨 기이한 연이라도 닿은 것인지, 갑자기 연주 당일 지인의 주선(?)으로 연주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이 자리를 빌어 그 분께 감사드립니다.)

 1부 곡목은 라흐마니노프의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광시곡>. 라흐마니노프의 후기 수작이지만, 아쉽게도 난 이 곡을 많이 들어보지 않았다. 내가 완청한 이 곡의 유일한 연주는 카펠/라이너/필라델피아(RCA)인데, 연주자 이름만 들어도 도저히 비교 대상으로 삼을 수 없는 연주다. 곡을 익히기 위한 임시방편이라면 모를까…….

 1부 곡목에서 단연 두드러진 것은 피아니스트였다. 러시아 태생으로 독일에서 활동하는 이고르 래빗은 자신의 태생을 증명이라도 하듯, 같은 곡 안에서도 ‘정말 같은 피아니스트가 맞나?’ 싶을 정도로 카멜레온 같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다른 피아니스트에 비교를 해 본다면, 데무스나 바두라스코다 같은 소리로 곡을 진행하던 피아니스트가 갑자기 호로비츠나 리히터의 인상을 드러낸다는 편이 사실에 근사한 비유일 것이다.

 그의 장점은 독일 피아니즘과 러시아 피아니즘의 혼융에만 그치지 않았다. 동글동글 뭉치면서도 밝고 은은한 고유의 음색, 절제된 페달링, 과장 없이 충분히 대범한 해석도 마음에 들었다.

 다만 오케스트라는 피아노가 100% 활약할 수 있도록 도와주지 않았다. 오케스트라는 피아노의 소리가 들려야 할 타이밍에 피아노 소리를 묻어버리고, 피아노 소리가 자리 잡을 공간을 주지 않았다. 2부를 위한 악기 배치(잠시 후에 설명하겠다) 때문에 그런 결과가 나온 것 같지만, 래빗의 피아노 소리를 제대로 들을 수 없다는 점은 많이 아쉬웠다.

 래빗은 앵콜곡으로 쇼스타코비치의 발스-스케르초를 연주했다. 달지 않으면서도 맛있는 소르베 같은 곡이었고, 연주도 충분히 훌륭했다.


 1부에서 가장 빛난 이가 래빗이었다면, 2부에서 가장 빛난 이는 단연 페트렌코였다.

 나는 오늘 그의 비팅을 보면서 왜 베를린 필의 단원들이 그를 선택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기민하면서도 힘찬 지휘로 막대한 에너지를 오케스트라에 부여했고, 수시로 오케스트라에 지시를 내리면서 단원들을 통제했다.

 페트렌코의 연주 설계 중 가장 두드러진 부분은 현악기의 배치였다. 중앙에 첼로를 놓고, 1바이올린 뒤에 베이스를 두며 첼로-비올라-2바이올린 순으로 악기군을 배치한 그의 설계는 크게 두 부분에서 빛을 발했다. 

 첫 번째는 1악장. 현악기 배치는 후반에 진입하는 순간부터 위력을 발휘했다. 바로 제2트리오 부분, 1바이올린의 아르코와 베이스의 피치카토가 엇갈리는 부분에서 지휘자와 오케스트라는 대비가 무엇인지 잘 보여주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의 현악기 배치는, 현악기만으로 연주하는 4악장에서 가장 빛을 발했다. 지휘자의 설계는 오케스트라 특유의 퍽퍽한 소리마저 이겨내고 멋진 풍광을 선사했다.

 그러나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는 법. 페트렌코와 바이에른 슈타츠오퍼는 악기군 사이의 대비를 얻어낸 대신에 정묘한 밸런스를 어느 정도 희생해야 했다. 특히 악기군이 투티를 연주할 때마다 위태롭게 뒤엉키는 음색은 대비를 주기 위해 무엇을 대가로 치러야 했는가를 똑똑히 보여주었다.

 위에서도 말했듯 바이에른 슈타츠오퍼는 퍽퍽한 소리로 일관하는 경향이 강했다(특히 현악기). 더군다나 페트렌코의 기민한 지휘에 잘 따라오지 못하는 안습한 모습까지 보여주었다. 1악장을 연주하는 베이스에서 그것을 똑똑히 들을 수 있었는데, 연주자도 아쉬웠던 실수를 허공에 다시 해보는 깨알 같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관악기로 시선을 돌려보면, 오늘 가장 뛰어난 연주를 해주었던 호른 수석이 있었다. 3악장의 ‘호른 협주곡’을 위시해 곳곳에서 또렷하고 분명한 소리와 안정된 지속음으로 오케스트라를 받쳐주었을 뿐 아니라, 대놓고 어려운 약음 패시지에서 연이어 놀라운 연주를 해냈다(나는 개인적으로 호른의 어려운 약음 패시지들을 강주보다 더 귀기울여 듣는다. 그만큼 호른에게 잔인한 구간이기 때문이다).

 트럼펫 수석 또한 정말 잘했지만…… 안타깝게도 삑사리를 두 번 냈다는 점이 아쉬웠다. 5번의 1악장은 시작의 C#음을 비롯해 트럼페터의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음이 유독 많은데, 트럼펫 수석은 시작은 잘 풀어갔지만 1악장 막판에 삑사리를 냈다. 그리고 2악장 막바지 부분에서도 한 번 더…… 전체적으로 참 잘했지만, 운이 따라주지 않았던 두 번의 실수가 아쉬웠다.

 그밖에 기억나는 주자들은 소극적으로 일관했던 오보에 수석(자기도 답답했는지 1부 끝나자마자 리드 뽑아서 체크해보더라)과 잘못 치고 나서 가죽 상태 확인해보던 팀파니 주자.


 오늘 연주를 세 문장으로 압축하면 다음과 같다.

 1) ‘기재奇才’라는 표현이 잘 어울리는 이고르 래빗.

 2) 어떻게 베를린 필 상임이 될 수 있었던 것인지를 증명한 페트렌코.

 3) 그럭저럭 잘 하는데 죽어도 일류는 못 될 바이에른 슈타츠오퍼 오케스트라.


 더 압축해 볼까? ‘돈값은 하고도 남지만 7만원어치는 아니었던 연주.’

Posted by 여엉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