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토프 베르트랑

 

 

 

크리스토프 베르트랑. 1981424일 생, 2010917일 자살.

내가 크리스토프 베르트랑의 삶에 대해 아는 것은 이것이 전부다. 그리고 그의 생에 대해 할 얘기도 저것이 전부다. 내가 이 작곡가에 대해 하려는 말은 전부 음악에 관한 것이니까.

난 저번 달까지만 해도 그의 음악을 잘 몰랐다. 부끄럽지만, 얼마 전까지는 그의 존재 자체를 모르고 있었다. 이제 와서야 뒤늦게 그의 음악을 듣고 이런 글을 남기는 것은, 아방가르드 음악을 듣는 사람으로서 이런 글은 남겨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베르트랑은 짧은 생에 어울리게 과작했다. 물론 과작이 누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아쉽기도 하다. 내가 글을 쓰려는 그의 곡은, 그 중 세 개다.

 

첫 번째 곡 <스케일>. 제목 그대로 쉴 새 없이 이어지는 스케일의 연속이 귀를 훑고 지나가는 곡이다. 곡을 들으면서 제일 먼저 떠올린 문장은 본능이 소리를 육화시킨다는 것이었다. 베르트랑은 넘쳐흐르는, 아니 터져 나오는 음향의 세례를 영리하게 소리로 육화시킬 줄 알았다. 그는 젊은 작곡가가 재능과 감각으로 아방가르드 음악의 기교들을 휘저으면 얼마나 기가 막히게 청각을 자극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수시로 등장하는 엇갈리는 인토네이션은 음향의 교란을 극단으로 끌고 가고, 중반부 지속음 사이에서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스케일의 연속은 마치 바다 위에서 피어오르는 섬 같다. 클래식 음악을 듣는 이에게는 걸음마만큼이나 기초적인 스케일이라는 소재로 이런 대곡을 만든 재능이 놀랍다.

 

두 번째 곡 <현기증>. 11개의 섹션으로 이루어진 곡이다. 작곡가가 여기에 피보나치 수열을 도입했다고 하는데, 그건 일단 제쳐놓고 느낌 받은 대로 쓰겠다. 일단 귀에 들어오는 것은 온갖 형태의 지저분한 소리였다. 논 비브라토, 글리산도, 콜 레뇨, 불협화음으로 이루어진 스케일 등등…… 그러나 이것들은 기본 도구다. 베르트랑은 이 소재들을 꼬고 꼬고 또 꼰다. 온갖 지저분한 소리들의 협착이, 반대로 정묘한 형상을 일구어낸다. 12, 23으로, 35, 58, 813으로 꼬여 들어간다. 물론, 작곡가는 어디까지 꼬아야 아름다움이 극대화되는지 알고 있다. 다시 138, 85, 53으로, 32, 21로 풀려나간다. 그 꼬이고 풀려나가는 과정은, 물질계의 단순한 형상이 집합해 복잡한 형상을 이루고 역으로 살펴보면 다시 단순함을 획득하는 피보나치 수열과 같다.

 

마지막 곡 <마나>. 들은 순서대로 썼기 때문에 이게 가장 대단했다 그런 거 없이 그냥 이게 마지막이다. 이 곡은 앞에서 들었던 두 곡의 시원이다. 글을 쓰기 직전에 지인이 기교는 툴박스에 불과하다는 얘기를 해주었는데, 여기서 쓰이는 음악적 기교들은 베르트랑의 환각을 형상화하기 위한 공구에 불과하다. 베르트랑이 이 곡에서 사용하는 아르페지오와 오스티나토 용법이 완전히 새로운 것인가? 꼭 그렇지만은 않다. 그렇다면, 베르트랑의 아르페지오와 오스티나토 용법은 놀라운가? 그런 정도가 아니다. 그는 스물다섯 나이에 선배들의 업적을 완전히 소화했다.

그런데, 중반에 들리는 아코디언에서 그리제이 <파르티엘> 연상한 사람 혹시 있나?

 

한줄 평 : 놀랍다. 역시 세상은 넓고 들을 것은 많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는다.

그런데 드는 의문 : 왜 천재는 요절하지 않으면 요절하려 할까.

Posted by 여엉감

현음 선정 1945-2009

음악 2018.08.17 02:58


 전부터 생각하고 있던 거였는데, 아무래도 지금이 아니면 안될 것 같아서 간략하게나마 써본다.

 아방가르드 음악이 많이 들어가기는 하지만, 제 평소 취향을 잘 아시는 분들께서는 '이런 음악도 여기 뽑아?'라는 느낌이 드는 놈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굳이 '아방가르드'가 아니더라도, 반영하고 있는 시대에서 반 걸음이라도 앞서나가는 음악이라면 뽑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본다.

 그래서 여기 뽑힌 음악들을 '아방가르드' 음악이 아닌 '현대'음악이라고 칭한 것이고.




 1945 : 슈트라우스 <메타모르포젠>, 스트라빈스키 <3악장의 교향곡>

 - 첫 빠따부터 공동선정. 처음에는 슈트라우스 단독이었다가, 나중에는 스트라빈스키 단독이었다가, 결국 오늘 마음을 정해 공동 선정으로 가기로 했다. 난 기분 좋은 날에는 <3악장의 교향곡>이 더 좋다가, 기분 나쁜 날에는 <메타모르포젠>이 더 좋아진다. 두 음악은 시대의 분기점인 1945년을 각자의 시각으로 캐치해 담아냈다. 그러므로 같이 뽑지 않을 이유가 없다.


 1946 : 쇤베르크 <바르샤바의 생존자>

 - 이견이 없는 1946년의 현음. 3개의 언어로 분리된 3개의 세계. 그 지옥 속에서 발버둥치는 사람들. 노년까지 거장의 풍모를 잃지 않았던 쇤베르크 후기 역작.


 1947 : 코플랜드 <클라리넷 협주곡>

 - 솔직히 인정하겠다. 이건 빈집털이가 맞다. 하지만 시대를 풍미한 명 클라리네티스트 베니 굿맨의 역량을 최대한으로 끌어낸 곡은 이 곡뿐이다. 미국의 진보주의자들이 그리는 루즈벨트 시대에 대한 향수를 가장 잘 자극한 작곡가는 아무래도 코플랜드가 아닐까.


 1948 : 메시앙 <투랑갈릴라 교향곡>

 - 이 매머드 같은 작품은 메시앙 역사상 가장 화려한 음향을 자랑한다. 옹드 마르트노의 물결 속에서 듣는 사람을 지고의 사랑에 빠지게 만드는 초월적 대작.


 1949 : 쇤베르크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환상곡>

 - '왜 하필이면 이 곡이냐'고 물을 것 같다. 그런데, 난 불레즈나 슈톡하우젠이 이 시기에 대작을 내놓았어도 이 곡을 꼽았을 것 같다. 이 곡은 바이올린 역사상 가장 어려운 곡 중 하나이며, 수백 년동안 변화와 발전을 거친 바이올린의 역사를 응축한 곡이다. 쇤베르크는 이 곡으로 자신의 마지막 자존심을 지켰다.


 1950 : 쇼스타코비치 <24개의 전주곡과 푸가>, 메시앙 <4개의 리듬 연습곡>

 - 45년에 이은 공동선정인데 공교롭게도 둘 다 피아노곡이다. 쇼스타코비치를 꼽은 이유는, 이 곡이 쇼스타코비치의 모든 곡을 통틀어 가장 매너리즘이 적고 다른 세계로의 모험이 강한 곡이기 때문이다. 노노의 음렬음악을 연상시키는 15번 푸가가 아니었다면 이 곡을 꼽지 않았을 것이다.

 메시앙은 쇼스타코비치와는 달리 큰 고민 없이 꼽았다. 2번 <음가와 강세의 모드>가 아니었다면, 50년대 음렬음악도 존재할 수 없었다.


 1951 : 브리튼 <빌리 버드>

 - 쇼스타코비치에 이어서 브리튼! 근본주의자 분들께서는 눈썹을 꿈틀거리며 노기충천하시겠지만, 잠시만 진정해달라. 곧 음렬음악의 시대가 올 것이니.

 브리튼의 오페라는 냉정한 심리극과 현대음악의 원칙들을 오밀조밀하게 조화하는 법을 잘 안다. 상관을 살해하고 교수형의 위기에 처한 주인공 빌리를 둘러싼 심리극은 시간이 지나도 쫄깃한 맛이 있다.


 1952 : 불레즈 <구조> 1권

 - 이견의 여지가 없는 음렬음악의 걸작. 음악의 쿼크 단위까지 쪼개서 정렬하고 배열하겠다는 클음계의 로베스피에르 불레즈의 냉혹한 천재성이 빛나는 작품.


 1953 : 존 케이지 <피아노를 위한 음악>

 - 불세출의 음악 발명가, 음향 발명가 존 케이지. 케이지는 <피아노를 위한 음악>을 평생 썼지만, 유독 1953년에 많은 곡들이 쏟아져 나왔기 때문에 이 해의 음악으로 선정하게 되었다. 그는 음악에 대한 사고방식을 영원히 바꾸어 버렸다. 나는 그의 음악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그의 음악이 없는 음악사는 완성되지 않기에 그에게 이렇게 자리를 바친다.


 1954 : 제나키스 <메타스타시스>

 - '추계음악'이라는 모토를 내세우고 음향설계에 평생 몰두한 그리스 출신의 이단아 제나키스. 그는 이 곡으로 멋지게 출발했다. 다소 부침이 있기는 했지만, 음향음악의 역사에서 그를 제외할 수는 없다.


 1955 : 불레즈 <주인 없는 망치>

 - 고작 30의 나이에 한 분야에서 정점에 도달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 이 냉정한 천재는 그걸 해냈다. '얼음이 잔 속에서 짤랑거리는 소리'가 난다는 스트라빈스키의 표현처럼, 이 곡에 감돌고 있는 서늘한 큐비즘은 들을 때마다 전율이 인다.


 1956 : 노노 <일 칸토 소스페소>

 - 노동자와 아방가르드 음악을 조합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무의미한 일처럼 느껴진다. 노노는 이 일에 평생을 천착했고, 성공했다는 점에서 특이한 사례다. 그의 음렬음악은 항상 붉은색을 떠올리게 한다. 붉은 깃발, 붉은 피, 그리고 붉은 태양. 난해하지만, 그만한 가치를 보장하는 작품.


 1957 : 슈톡하우젠 <그루펜>

 - 불레즈 <주인 없는 망치>와 함께 50년대 음렬음악의 양대 산맥. 슈톡하우젠은 알프스 산맥의 장엄한 풍광을 만끽하면서 이 곡을 썼다는데, 당연히 곡의 스케일도 알프스 산맥 급이다. 109명의 연주자와 3명의 지휘자를 필요로 할만큼 작곡가의 야심은 컸다.


 1958 : 메시앙 <새의 카탈로그>

 - 전설의 새도감! 난 이 작품을 사랑한다. 메시앙은 새를 가지고 음향의 다큐멘터리를 창조한다. 다른 곡은 몰라도 <개개비>는 꼭 들으시길 바란다. 27시간의 관찰이 30분이라는 시간 속에 농축된, 신과 자연과 새와 흐름의 음악이니.


 1959 : 스트라빈스키 <피아노와 관현악을 위한 무브먼트>

 - 이 곡이 꼽힌 이유는 역시 1959년이 묘하게 대곡 가뭄이 있었던 것도 있다. 이 곡은 스트라빈스키의 12음 음악을 통틀어 가장 어렵고 난해하다. 그는 이 곡에서 음렬음악의 경지에 도달한다. 오브제를 다루듯 냉정하게 작업하던 1920년대 그의 태도가 여기서 되살아난 것 같다.


 1960 : 펜데레츠키 <히로시마 희생자를 위한 애가>

 - 펜데레츠키는 '한곡갑' 이미지가 강하고 실제로도 그런 감이 없지 않지만, 1960년 당시 이 곡이 나왔을 때의 충격은 솔직히 말해서 3.3혁명 급이었다. 다음 해를 장식한 음악과 함께, 음렬음악의 시대를 밀어내버리고 음향음악의 시대를 열어버린 곡.


 1961 : 리게티 <아트모스페르>

 - 현대음악을 다루면서 이 곡이 나오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하다. 위의 곡과 함께 '음렬'의 시대를 지우고 '음향'의 시대를 열어버린 곡.  27개로 나누어진 음향 덩어리가 9분이 넘는 시간 동안 움직이면서 만들어내는 '대기' 그리고 '분위기'를 <2001>의 스타게이트 장면과 함께 감상하시라.


 1962 : 리게티 <아방뛰르>

 - 2년 연속 같은 작곡가가 선정되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아방뛰르>의 스타일은 <아트모스페르>와 극단적으로 다르다. 우아하고 부드러우며 신비스러운 목소리로 유혹하는 <아트모스페르>와는 달리, <아방뛰르>는 소리치고 날뛰며 자지러지게 웃고 꺽꺽거린다. 60년대 리게티 음악은 <아트모스페르> 스타일과 <아방뛰르> 스타일의 융합과 변주였다.


 1963 : 번스타인 <교향곡 3번 카디쉬>

 - 솔직히 이 결정은 많이 아쉬웠다. 번스타인을 반드시 꼽아야겠다는 생각은 있었지만, 난 <치체스터 시편>이나 <미사 브레비스>를 꼽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곡들을 만든 해에는 강력한 명곡들이 버티고 있어 실패. 어쩔 수 없이 들어간 감이 있기는 하지만, 번스타인은 분명 20세기 클래식 역사상 가장 과소평가당한 작곡가다.


 1964 : 메시앙 <그리하여 나는 죽은 자들의 부활을 소망한다>

 - 메시앙의 이 곡만큼 시대를 강렬하게 반영하는 곡도 없다. 그는 자신이 겪은 2차대전의 경험을 여기에 녹였다. 무가치하게 느껴질 정도로 무수히 죽어간 존재들은, 원자폭탄의 빛만큼이나 강렬한 성령의 인도를 받아 새로운 육체를 입고 되살아난다.


 1965 : 리게티 <레퀴엠>

 - '혼 없는 자의 혼노래.' '어둠의 미사.' 앞의 곡과 똑같이 2차대전의 기억이 담긴 곡이지만, 리게티의 <레퀴엠>에서 메시앙의 강렬한 신앙과 부활에 대한 소망은 1도 찾아볼 수 없다. 불길한 시작과 끝을 암시하는 <입당송>과 <라크리모사>, 초월적 음향의 결정체인 <키리에>, 임박한 종말에 대한 강렬한 공포가 위안을 짓누르는 <진노의 날>. 그야말로 완벽한 '레퀴엠'이다.


 1966 : 스트라빈스키 <레퀴엠 칸티클스>

 - 2년 연속 레퀴엠 선정. 스트라빈스키의 마지막 걸작. 노작곡가의 날카로운 감각은 84세라는 나이에도 전혀 죽지 않는다. 투명하고 정묘한 텍스처는 신심의 심지에 서늘한 불꽃을 피워올린다.


 1967 : 카헬 <국립극장>

 - 솔직히 말하자면, 카헬의 가장 유명한 이 '오페라(?)'는 내가 보고 들었던 아방가르드 음악을 통틀어 가장 괴이하고 괴상망측한 음악극이다. 성악가들은 악보에 없는 소리를 질러야 한다. 춤을 춰본 적 없는 사람들이 무용을 담당해야 한다. 막판에는 체조선수까지 나와서 쇼를 한다. 정신줄 놓기 딱 좋은 음악극이지만, 카헬은 슈톡하우젠같은 돌아이가 아니다. 오히려 너무 열정적이고 성실한 성격이었기에 음악극을 극한으로 실험해본 이런 작품이 나온게 아닌가 싶다. 어쨌거나 카헬의 이 문제작은, 그 이후의 음악극이 나아갈 방향을 결정해버렸다.


 1968 : 베리오 <신포니아>

 - 이 곡과 대결한 곡은 리게티의 <현악 4중주 2번>이었다. 한 작곡가의 스타일이 집약된 걸작과 다른 작곡가의 인생작이 대결한 셈인데, 결국 걸작은 인생작을 이기지 못한다는 진리를 알려주는 예시가 되었다. 베리오의 이 곡은 단순한 콜라주 작품이 아니다. 베리오는 음악사의 연표 제시로 만족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천 년의 음악흐름 속에서 따온 주제들은, 작곡가의 풍요로운 아이디어와 구성 속에 스르르 녹아든다. 베리오는 총천연색으로 빛나는 콜라주 속에서 승리의 미소를 짓고 있었으리라.


 1969 : 침머만 <젊은 시인을 위한 레퀴엠>

 - 1969년은 온갖 스타일의 현음이 대폭발한, 다시 오지 못할 현음 최대의 전성기였다. 이 해를 놓고 경쟁한 후보는 모두 쟁쟁한데, 메시앙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현성>, 슈톡하우젠 <슈티뭉>, 제나키스 <시나파이>, 카터 <관현악을 위한 협주곡> 등 걸작들만 모여 있다. 하지만 결국 왕좌를 차지한 것은 이 곡이다. <관객모독>을 떠올리게 하는, 공허하지만 섬뜩한 텍스트의 누적. 텍스트는 사라지지만, 텍스트로 인해 쌓인 감정은 빠져나갈 길이 없다. 20세기를 수놓았던 극단적 이데올로기들의 폭격이 감상자를 강타한다. 다음 해 벌어진 작곡가의 자살은, 마치 이 곡의 결말은 그것밖에 없었다는 섬뜩한 여운을 남긴다.


 1970 : 슈톡하우젠 <만트라>

 - 곡이 난해하냐 아니냐를 떠나, 이곡만큼 사람 정신을 돌게 만드는 곡도 없다. 슈톡하우젠의 돌아이 같은 정신상태는 <그루펜> 같은 음렬음악의 걸작이 아닌, 오히려 <만트라>나 <이노리> 같은 곡들에서 정점을 찍는다.


 1971 : 라이시 <드러밍>

 - 미니멀리즘에 대한 시각이 어떻든 간에, 라이시가 음악사의 흐름을 바꿔버린 사람이라는 점은 인정하고 넘어갈 수밖에 없다. 모험을 좋아하고 도전적인 이 사내는 아프리카 음악 공부를 위해 가나에 갔다가 모기 공습을 받고 말 그대로 훅갈뻔 하지만, 약 먹고 뻗은 상태에서 접신이라도 했는지 이 작품을 턱 내놓는다. 미니멀리즘은 들으면 들을수록 머리가 깨끗이 비워지는 느낌이지만, 이곡만큼은 그 흥겨움과 계산이 전혀 유치하지 않다.


 1972 : 리게티 <시계와 구름>

 - 이 곡이 이 해의 현음으로 꼽혔다는 사실 자체가 아방가르드 음악이 처한 위기를 반영하는 것 같다. 리게티를 비롯한 대부분의 아방가르드 작곡가들은 창작의 위기를 겪고 있었다. 미니멀리즘은 대중성을 등에 업고 강력하게 치고 올라오고 있었으며, 록음악은 빠르게 아방가르드의 스타일을 흡수해나갔다. 내적 갈등도 심각했으니, 리게티 본인의 말처럼 '앞은 벽, 뒤는 과거'가 그들을 가로막고 있었다. 이 곡의 스타일은 대조적인 형상의 융합을 이루지만, 이전에 했던 몸짓을 반복한다는 인상을 버리기 힘들다. 분명 잘 만들어진 곡이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생경하지 않다.' 그래도 위기의 시대를 반영한다는 점에서 이 곡은 매우 중요하다.


 1973 : 쿠르탁 <놀이들>

 - 만약 누군가 '쿠르탁의 곡을 듣고 싶은 데 어떤 곡부터 들어야 하나'라고 물으신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겠다. '아무 곡이든.' 그의 곡은 출발점이나 가이드를 요구하지 않는다. 어떤 이들은 너무 난해하다면서 학을 떼겠지만, 어떤 이들은 언제 들어도 생경한 조합에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음악 본연의 즐거움에 충실한 이 소품 모음집에서도 쿠르탁의 생경함은 빛을 잃지 않는다.


 1974 : 메시앙 <협곡에서 별들에게>

 - 메시앙 그랜드 캐년을 가다! 그는 자연이 억겁의 세월 동안 조각해 낸 형상을 보고 인류의 시원을 더듬어나간다. 신의 시원, 별의 기원, 우주의 태초를 향해 음표들이 헤엄친다. 그들 모두를 감싸안는 것은, 포근한 불협화음의 빛이다.


 1975 : 그리제이 <파르티엘>

 - 이 해의 현음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골리앗을 밀어낸 다윗'이 되겠다. 소품이 대곡을 밀어내버렸다. 음악사적으로 중요한 사건보다는 곡의 완성도를 택한 셈이다. 이 해는 음악사상 기념비적인 '필립 글래스의 <해변의 아인슈타인>이 나온 해'지만, 난 이 곡을 선택했다. 한 개의 음표(E)에서 뽑혀나와 기묘한 형상으로 변형되어가는 배음렬의 환상에 취하다보면 정신줄을 자꾸 놓는다. 그리제이는 분명 더 유명해질 필요가 있는 대작곡가였다.


 1976 : 베리오 <코로>, 시메온 텐 홀트 <칸토 오스티나토>

 - 세 번째 공동선정. 베리오의 중기 걸작인 <코로>는 당당한 작품이지만, 무명에 가까운 이 네덜란드 미니멀리즘 작곡가의 작품은 조심스럽고 신비하며 좀처럼 앞으로 나서려 하지 않는다. 하지만, 한 번 빠져들기 시작하면 이 작곡가의 매력에서 결코 쉬이 헤어나올 수 없을 것이다.


 1977 : 리게티 <르 그랑 마카브르>

 - 이 곡의 음악사적인 영향력이나 위치를 생각한다면 '리게티의 <피델리오>'가 되지 않을까. 이전의 오페라들-헨델과 글루크와 모차르트까지 전부 포함한-을 뛰어넘는 야심작을 쓰겠다고 덤벼든 베토벤의 10년 고행이 <피델리오>라는 '뭔가 2% 아쉬운 문제작'이 되어버렸듯, '안티-안티 오페라'를 쓰겠다고 나선 리게티의 노력도 분명 '대단하기는 한데 애~매한 문제작'을 남겼다. 그렇다고 해서 이 곡을 밀어내버릴 수는 없다. 이 곡을 들을 시간이 안 되신다면, 네크로차르를 대놓고 까는 <영웅> 교향곡 패러디 부분이라도 들어보시라. 빵 터지게 될 테니.


 1978 : 쿠르탁 <안드레스 미하일리에 대한 오마주>

 - 쿠르탁은 서두르는 법이 없다. 다작을 하는 작곡가도 아니다. 하지만 특유의 생경한 분위기와 다이아몬드처럼 응축된 구조를 듣고 있으면 저절로 그의 노력과 노고, 거장다운 풍모에 수긍하게 된다. 10분 내외의 짤막한 음악인 이 곡은 이 해에 만들어진 음악 중에서 적수가 없을 정도로 완성도가 높다. 위에도 말했듯, 쿠르탁의 곡은 어떤 곡을 잡고 시작하든 후회하지 않는다.


 1979 : 제나키스 <플레이아데스>

 - 중년 이후의 제나키스는 타악기를 통해 표현하는 복잡한 리듬 구조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한스 폰 뷜로의 명언인 '태초에 리듬이 있었다'는 명제에 공감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는 타악기가 가진 특유의 제례적 성격에 빠져든다. 이 곡은 타악기와 마림바로 구축하는 성단의 음악이다.


 1980 : 뮈라유 <곤드와나>

 - 그리제이와 함께 스펙트럴리즘의 대가로 거론되는 뮈라유 최고의 작품. 제목처럼 '원시 대륙스러운' 작품이기도 하지만, 그런 단순한 설명만으로는 인공위성에서 바라보는 지구의 모습처럼 여기서 표현되는 무수한 디테일을 놓치기 쉽다. 이 곡은 현미경으로 들여다볼 만한 가치가 있다.


 1981 : 그리제이 <솔로를 위한 이중주>

 - 클라리넷, 트롬본. 두 둔중한 솔로가 만나 듀엣이 되었다. 이 작은 편성의 곡이 어떻게 이 리스트에 들어갈 수 있느냐고 물으신다면, 일단 들어보라. 그리고 클라리넷이 주는 폐관진동의 아름다움과, 트롬본이 선사하는 포지션 변경의 아름다움을 느껴보시라.


 1982 : 글래스 <코야니스카시>

 - 이 곡을 선택한 이유는 다른 게 아니라, 클래식 음악가들이 영화음악으로 얼마나 큰 성공을 거둘 수 있는지를 잘 알려주고 있기 때문이다. 희대의 명장면인 <프루이트 아이고>에 글래스의 음악이 없었다면 그 정도로 유명해질 수 있었을까? <왓치맨>에서 글래스의 음악을 쓰지 않았다면, <왓치맨>이 그렇게 강렬한 인상을 남길 수 있었을까? <인터스텔라>가 <코야니스카시>의 스타일을 가져다쓰지 않았다면, <인터스텔라>가 그렇게 흥행할 수 있었을까? <코야니스카시>의 영향력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크다.


 1983 : 볼프강 림 <투투구리>

 - 노력하는 천재 볼프강 림의 초기 작풍을 대표하는 <투투구리>. 어지간한 오페라 규모의 대작이라 쉽게 듣기는 힘들겠지만, 그 노력을 보상하고도 남는 음향과 형식의 새로움이 있다. 전통의 무게에 짓눌리고도 남을 위치에 있는 작곡가가, 이토록 신선한 명곡을 뽑아낼 수 있다는 점은 그를 항상 주목하게 만든다.


 1984 : 펠드먼 <필립 거스턴을 위하여>

 - 베베른과 미니멀리즘을 잇는 비만 체형의 웜홀 모튼 펠드먼. 그의 작품들은 <비올라 인 마이 라이프> 같은 초중기도 좋지만, <필립 거스턴을 위하여>를 위시한 후기작품들은 안개처럼 스며드는 맛이 있다. 길이는 <파르지팔> 급이지만, 지루함을 느낄 일은 없을 것이다.


 1985 : 리게티 <피아노 협주곡>

 - 솔직히 말하자면, 1985년 현음 음악계는 리게티 혼자 북치고 장구치고 다 해 먹은 해였다. 혼자 <피아노 협주곡>과 <피아노 연습곡 1권>까지 내버렸으니 오죽하겠는가. 둘 다 우열을 가리기 힘든 명곡이지만, 그래도 굳이 고르라면 나는 <피아노 협주곡>을 고르겠다. 하나의 스타일을 완성한 작곡가가, 자신의 스타일을 전부 버리고 맨몸으로 광야에 가 새로운 스타일을 들고 돌아온 경우는, 말러 이후로 볼 수 없던 일이니까.


 1986 : 펠드먼 <크리스티안 볼프를 위하여>

 - 후기 펠드먼의 작품들은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중독성이 있다. 그것은 한 번 빨아들이면 아편처럼 대뇌를 마비시키고 등이 굽는 환상을 불어넣는다. 이 곡 또한 3시간이 넘지만, 역시 지루함을 느낄 일 따위는 없다.


 1987 : 존 애덤스 <중국의 닉슨>

 - 아마 이 작품이 마지막 미니멀리즘 작품이 될 것이다. 다른 부분은 필요없고, 장칭의 아리아 하나만으로도 이 곡은 뽑힐 자격이 있다. 훌륭한 정치극이며, 훌륭한 미니멀리즘 음악극이다.


 1988 : 불레즈 <데리브 2>

 - 불레즈 본인은 인정하지 않았지만, 그의 후기 작품들은 자신이 젊었을 때 설정한 엄격한 원칙들을 조금씩 수정하고 뒤로 물리는 느낌이 든다. 그의 음악을 위해서는 참으로 다행인 일이다. 그러지 않았더라면, 그 천재성이 가혹한 원칙에 질식당했을 수도 있으니까. 그런 '이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가 있었기에 이런 곡이 나올 수 있었으리라.


 1989 : 쿠르탁 <슈테판을 위한 묘비>

 - 여기에 뽑힌 곡들 중, 이렇게 작은 음향으로 사람 감질나게 하는 곡도 없다. 음향은 듣는 이의 숙고를 요구한다. 듣는 이가 조용해지기를 요구한다. 그렇게 침묵의 침묵으로 응시할 때, 음향은 마침내 반응한다. 어둠 속에서 떨어진 물방울에 반응하는 지하의 연못처럼. 그리고 마침내 넘쳐흐르고 폭발한다. 이 곡은 당신의 귀가 얼마나 예리한지를 깨닫게 하는 음악이다.


 1990 : 타케미츠 <네가 전화할 때 나는 너에게로 흐른다>

 - 감성적인 제목에 어울리게, 타케미츠의 이 곡은 아방가르드의 감성을 풍만하게 뿜어낸다. 타케미츠는 시대를 휘어잡는 카리스마는 없었지만, 시대의 요구에 성실하게 응한 거장이었다.


 1991 : 홀리거 <스카르다넬리 사이클>

 - 20세기 아방가르드 작곡가 중, 하인츠 홀리거는 번스타인 못지않게 과소평가 당했다. 사람들은 그가 작곡에서도 오보에만큼이나 탁월한 업적을 쌓았다는 사실을 간과하거나 알지 못한다. 그러나 음렬음악과 음향음악의 원칙들을 숙고한 이 사이클을 들어보라. 그가 얼마나 훌륭한 작곡가인지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무수한 작곡가들 사이에서 잊힌 보석을 발견한 기분이 들 것이다.


 1992 : 메시앙 <피안의 빛>

 - 우리가 늘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는 뉴욕필의 3m이지만, 그 3m 중 정점을 찍었던 메타가 아니었더라면 메시앙의 마지막 걸작은 태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메타는 뉴욕필 150주년 기념 음악을 메시앙에게 위촉했고, 메시앙은 이에 응답해 천국으로 가는 마지막 여정을 그렸다. 바그너 <로엔그린> 전주곡과 같은 달콤함을 내포한 마지막 악장 <그리스도, 천국의 빛>에서 천국의 문은 이미 듣는 이를 향해 열려 있다.


 1993 : 진은숙 <기계적 환상곡>

 - 오랜만의 빈집털이 느낌. 그러나 언석췬 선생님을 꼽지 않을 수 없지 않은가. 이왕 꼽으려면 일찍 꼽아야지. 진은숙의 성악은 늘 <앨리스>를 떠올리게 하는 맛이 있다. 엉터리같고 기묘하게 들리지만, 사실 엄격한 원칙이 잠복하고 있는 곡들.


 1994 : 리게티 <피아노 연습곡 2권>, 쿠르탁 <스텔레>

 - 마지막 공동선정. 리게티의 <피아노 연습곡> 18곡 중 가장 완성도 높은 걸작들은 2권에 다 모여 있다. 어떤 곡이 가장 멋진가에 대해서도 꼽기가 힘든 것이, 디즈니 스타일의 <마법사의 제자>부터 브랑쿠시의 작품을 냉엄하게 재현한 <무한한 원주>까지 다변적이고 다층적인 스타일이 꽉꽉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쿠르탁의 <스텔레>는 동유럽 아방가르드 작곡가였던 그를 세계적인 존재로 세워준 작품으로, 시작 부분 베토벤의 인용이 유명하다.


 1995 : 미하엘 쟈렐 <잠시 동안의 음악>

 - 90년대 음악의 가장 큰 특징은, 특정 스타일이 헤게모니를 쥐지 않는다는 점이다. 당시 37세의 젊은 작곡가가 1995년의 왕좌를 차지하리라고는 어느 누구도 생각지 못했으리라. 그러나 스타일을 떠나, 이 작곡가는 음악을 '너무 잘 썼다.' 음렬에도 속하지 않고 음향에도 속하지 않지만, 훌륭한 음악이다.


 1996 : 라헨만 <성냥팔이 소녀>

 -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라헨만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의 경직성, 도그마에 경도된 태도, 지나치게 엄격한 음악 스타일을 모두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런 것들을 전부 떠나, 이 오페라는 좋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라헨만은 알반 베르크와 침머만의 정신을 계승한다. 냉혹한 대사, 정신없이 빠른 전개, 그리고 강렬한 음악. 모두 <보체크>와 <병사들>을 수놓았던 것들이다. 이 오페라는 전통의 계승이 나쁘지만은 않다는 증거가 될 수 있다.


 1997 : 헨체 <교향곡 9번 '제7의 십자가'>

 - 아방가르드의 주변인으로 평생을 떠돌아야 했던 헨체가 말년에 들고 온 멋진 한 방. 곡을 관통하는 텍스트도 멋지지만, 라헨만과는 조금 다른 노정(바흐-베토벤-바그너-쇤베르크)으로 이어지는 전통의 계승은 음악에 권위를 부여한다.

 (참고로 텍스트 설명을 좀 하자면, 원작은 안나 제거스의 소설 <일곱 번째 십자가>다. 나치 수용소에서 7명이 도망친다. 수용소에서는 7개의 십자가를 만들고, 반드시 놈들을 십자가에 매달겠다 한다. 6명은 탈출에 실패해 매달리지만, 일곱 번째 사람은 탈출에 성공한다. 빈 십자가는 파시즘을 이기는 희망으로 남는다는 내용.)


 1998 : 그리제이 <문턱을 넘기 위한 4개의 가곡>

 - 브람스 <4개의 엄숙한 노래>, 슈트라우스 <4개의 마지막 노래>, 그리고 그리제이의 <문턱을 넘기 위한 4개의 가곡(이하 줄여서 문턱 가곡집)>. 죽음을 앞둔 작곡가가 4개의 가곡을 유언처럼 남기는 것은 숙명일까 우연일까. 그리제이의 마지막 가곡들은 표면이 텅텅 비어 있다. 대홍수를 얘기하는 마지막 곡 <길가메시 서사시>의 음악을 들으면서, 우리는 소멸의 과정과 텅 빈 존재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그리제이는 예감처럼 이 곡을 쓰고 세상을 훌쩍 떴다.


 1999 : 외트뵈시 <제로포인트>

 - 외트뵈시는 온갖 스타일을 버무리고 섞으며 작업하는, 복잡하디 복잡한 작곡 방식을 좋아하는 작곡가다. 당연히 그의 음악 또한 머리가 아프다. 너무 많은 음표, 너무 과한 음향, 너무 복잡한 형식이 그를 멀리하게 만든다. 그래도 이 곡은 아주 마음에 든다. 과격한 데스메탈을 듣는 느낌도 나고.


 2000 : 루카 프란체스코니 <코발트 스칼렛>

 - 이탈리아 출신의 젊은 아방가르드 작곡가는 이 작품으로 서유럽 음악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두 가지 색채가 이루는 황혼은 때로는 아름답게, 때로는 격렬하게 섞이고 부딪치고 침강하면서 파편을 흩뿌린다. 이런 음악이 앞으로도 많이 나왔으면 한다.


 2001 : 볼프강 림 <아스트랄리스>

 - 오랜만에 리스트를 다시 장식하는 성실한 천재 볼프강 림. 40년 전 리게티가 그랬던 것처럼, 림은 우주가 던져주는 신비한 유혹의 힘을 음악으로 풀고 싶어한다. 그는 그 빛과 어둠의 세계, 성간과 암흑물질의 세계를 향해 손을 뻗는다.


 2002 : 베리오 <세쿠엔차>

 - 노장 작곡가의 초장기 프로젝트 1탄. 1958년 플루트에서 시작한 베리오의 여정은 2002년 첼로로 끝을 맺는다. 12음 음표로 기똥차게 시작하는 플루트, 유명 광대의 묘사극인 트롬본, 바그너 <트리스탄>의 오마주인 오보에, 바흐 파르티타의 오마주인 바이올린 등등... 방대한 스타일, 기교에 대한 경의, 독주악기에 대한 애정. 무엇 하나 빼놓을 수 없는 악곡들이다. 베리오는 이탈리아가 낳은 최고의 아방가르드 작곡가였다.


 2003 : 슈톡하우젠 <빛>

 - 노장 작곡가의 초장기 프로젝트 2탄. 참고로 이 오페라는 이름(+전설의 헬리콥터)만 유명하고 내용이 뭔지는 모르는 사람들이 많은데, 우주적 창조성을 상징하는 미카엘, 미카엘의 대립자인 루시퍼, 인간성을 상징하는 에바가 7개의 요일에 위치한 7개의 공간(각기 상징하는 행성이 있음)에서 서로 엮이고 대립하는 내용이다. 슈톡하우젠의 정신세계를 상징하는 곡답게 중2병이 굉장히 강하다(원래 오페라 제목도 독일어 Licht가 아닌 일본어 '히카리'로 하려 했다고). 어쨌거나 이 전무후무할 정도로 무모한 프로젝트를 완성시킨 희대의 돌아이에게 박수를.


 2004 :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하스 <첼로 협주곡>

 - '스펙트럴리즘'하면 그리제이나 뮈라유, 비비에 같은 프랑스 작곡가들만을 떠올리기 쉽지만, 0.5세대 늦게 스펙트럴리즘에 심취해 자기 나름대로 거장이 된 이가 있으니 바로 오스트리아의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하스다. 20세기 작곡가들이 이상할 정도로 집착한 첼로 협주곡을 그 또한 남겼는데, 거칠고 부드러운 모든 음향이 듣는 사람을 취하게 만든다.


 2005 : 호세 마누엘 로페스-로페스 <피아노 협주곡>

 - 2년 연속 협주곡 선정. 아방가르드 음악으로서는 드물게, 이 곡에서는 이베리아 반도의 정열이 살아서 넘실댄다. 수십만 개의 자갈을 뒤집어놓는 파도 소리와 함께 스페인 아방가르드의 흥취에 빠져 보자. 환경이 장르마저 변질시킨 기묘한 음악.


 2006 : 사리아호 <시몬의 수난>

 - 프랑스 여류 철학자 시몬 베유의 일대기를 다룬 이 곡은 그녀의 열정과 고통, 기쁨과 슬픔을 담담하게 따라가고 있다. 아민 말루프가 쓴 텍스트도 빛이 나지만, 사리아호는 그녀의 일생 하나하나를 격하게 공감하면서 곡을 쓴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런 퀄리티가 나오기 힘들 테니까.


 2007 : 진은숙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 진은숙의 스타일에 대한 얘기는 일단 제쳐놓고 곡이 차지하고 있는 위치에 대해서 얘기를 하자면, 이 곡은 '오페라 극장을 폭파하라'는 불레즈의 말에 대놓고 반기를 드는 곡이다. 오페라의 수명은 그녀로 인해 연장될 것이다. 곡의 어디를 파 보든지간에 생동감과 에너지가 넘친다. <거울 나라의 앨리스>가 빨리 완성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2008 : 올가 노이비르트 <로스트 하이웨이 모음곡>

 - 솔직히 이 선정은 꼼수를 썼다. 영화음악 <로스트 하이웨이>를 완성한 해는 2003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난 이 곡을 단독으로 뽑아 얘기하고 싶었다. 노이비르트는 단호한 인간이다. 극단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어쩌면 그 점이 데이비드 린치와 의기투합하기에 딱 좋았는지도 모른다. 이 곡은 난해한 음악을 쓰는 아방가르드 작곡가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안겨주었다. 그리고 데이비드 린치의 가장 난해한 영화를 더 난해하게 만들어 주었다. 둘의 결합은 리게티와 큐브릭의 결합만큼이나 완벽했던가? 알 수 없다. 그러나 이런 협업이 우리의 세계를 풍요롭게 만들어준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2009 :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하스 <여름밤의 꿈>

 - 노리고 한 선정은 아니지만, 마지막으로 선정하는 곡은 지금 이 글을 쓰는 시간대, 여름밤의 향취에 잘 어울리는 곡이 되었다. 슈만을 연상케하는 꿈결같은 분위기, 가물거리는 음향, 밝게 빛나는 금관의 광휘는 이 작곡가의 감성과 감각이 어디까지 뻗어있는지를 잘 드러내준다. 그는 의심할 여지가 없는 현세대 최고의 스펙트럴리스트다.




 이렇게 64년에 걸친 현음 리스트를 작성해 보았다. 하지만 이 리스트에 들어가지 않은 음악 중, 내가 꼭 소개하고 싶은 음악 하나를 스페셜로 얘기해 보려 한다. 이런 음악은 단독으로 설명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스페셜 현음 : 베르나르드 파르메자니 <자연의 소리들> (1975)

 - 베르나르드 파르메자니. 아마 이름조차 들어본 적 없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이탈리아어로는 Bernard Parmegiani라고 쓴다. 중요한 건 이게 아니라, 이 작곡가의 음악을 듣고 내가 겪은 충격이다. 전자음악을 작곡하는 이 작곡가가 남긴 유산은 어지간한 아방가르드 음악가 정도는 가볍게 씹어먹고도 남을 정도다. 이 작곡가가 포착한 음향의 진폭은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다. 작곡가가 탐구하는 음향이 자극 아닌 것이 없고 새로움 아닌 것이 없으며 경이 아닌 것이 없다. 이 곡은 마치 규방 안에서 자신을 찾아주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아름다운 여인같다. 장르를 막론하고, 우리가 음악을 찾는 이유는 이런 보석들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 아닐까.

Posted by 여엉감


 분절과 통합 : 루비모프 콘서트 (2018.5.12. 土) (Part 2)




 레퍼토리는 패르트의 파르티타, 하이든 피아노 소나타 32번, 시메온 텐 홀트의 <솔로 악마의 춤 IV>, 존 케이지의 프리페어드 피아노를 위한 소품 3개, 그리고 드뷔시의 전주곡 2권이다.

 이렇게 방대한 레퍼토리는 확신과 철저한 연습, 통찰력의 삼위일체가 갖춰지지 않으면 와르르 무너진다. 어쩌면 이 레퍼토리 자체가 루비모프의 거장성을 증명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패르트의 파르티타는 처음 듣는 곡인데 바흐식 대위법에 20세기 양식을 조합한 느낌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바흐, 초기 신빈악파, 초기 바르토크, 카푸스틴을 전부 합친 다음 넷으로 나눈 느낌. 패르트하면 사람들이 동유럽식 미니멀리즘만 생각하지만 원래는 이런 과정을 거쳐 무조음악을 쓰던 사람이다.

 20세기 작곡가의 곡이지만 어찌 보면 바흐 양식에 충실한 첫 곡. 루비모프는 리듬과 다이내믹을 계산하면서, 절제하면서 첫 곡을 풀었다. 처음부터 확 끌리지는 않지만 듣고 있으면 자연스레 몰입하게 된다.

 사실 이런 곡은 치는 사람도 통제력을 발휘하기 어렵다. 대부분의 작곡가가 그렇듯 패르트의 이 곡도 덜 여문 작곡가 특유의 치졸함이 있기 때문이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아직 음악을 어떻게 덜어내야 하는지 잘 모른다.’ 글이고 음악이고 처음 덤벼드는 사람이 저지르는 가장 큰 실수 중 하나가 좋으면 일단 넣어보려고 하는 치기인데 패르트의 곡에서도 그런 느낌이 묻어 나왔다. 하지만 루비모프의 연주는 그 치졸함은 최대한 지우고 풋사과 특유의 풋풋함과 색다름을 잡아냈다.


 두 번째 곡은 하이든의 피아노 소나타 32번. 하이든의 1770년대 작품으로 고전파 작곡가의 작품이지만 아직 바로크 건반 음악의 특징이 깊게 배어있다.

 건반 음악에서 바로크와 고전파 음악의 차이점이 무엇일까. 장식음과 지속음의 차이가 아닐까. 바로크 하프시코드 음악은 트릴을 비롯한 장식음의 시대이며 고전파 포르테피아노 음악은 음의 지속이 가능해지면서 화음의 무게감이 달라졌다. 이 소나타는 그 경계선에 서 있다.

 루비모프가 진가를 드러내는 부분은 여기서부터였다. 그는 개개의 음을 끊어서 이어지지 않게 하면서도(하프시코드식 분절), 그 사이사이에 놓인 화음은 페달을 써가며 뭉쳤다(포르테피아노의 특성). 음악은 이어지되 이어지지 않게 되었다. 분절과 통합이라는 두 가지 방식으로 하프시코드의 특성을 가지되 하프시코드 곡이 아닌 모순을 해결해버린 것이다. 고전파 음악은 포르테피아노로, 드뷔시는 1910년대 피아노로 치는 행보에서 나온 내공이었다.

 루비모프의 하이든에서 특기할 것이 페달링이다. 그는 트릴을 연주할 때마다 오른페달을 써가며 음을 절묘하게 이었다. 음을 끊어야 할 때는 중간 페달로 끊었고, 결정적인 순간마다 왼페달을 기가 막히게 사용했다. 그 페달 사용법을 보고 듣기만 했는데 하이든이 끝났다.


 세 번째 곡은 시메온 텐 홀트의 <솔로 악마의 춤 IV>. 서유럽식 미니멀리즘의 정수를 보여준 작곡가가 존 케이지, 모튼 펠드먼의 방법론을 받아들여 각 파트를 연주자 마음대로 빼고 재배치할 수 있도록 했다. 정교하게 짜인 재료들로 치르는 즉흥연주라 해도 되겠다.

 곡을 들으면서 제목의 의미에 대해 생각했다. 춤은 원을 이루는 회전을 기본으로 한다. 미니멀리즘은 아무리 변화를 추구해도 원래 조립한 재료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결국 원을 이루며 도는 것이다. 하지만 미니멀리즘은 변화를 극단적으로 줄여 효과를 극대화하는 음악. 점 하나를 찍을 때마다 별 하나가 생기고 점 하나를 지울 때마다 별 하나가 사라진다.

 거기에 아주 크지만 우리가 결코 듣지 못하는 요인(즉 악마) 하나가 개입한다. 바로 연주자의 주관이다. 악보를 보지 않고는 연주자가 어떤 파트를 빼고 몇 번을 반복하는지, 어느 부분을 재배치했는지 알 수 없다. 메타연주라는 말을 써야 할까.

 루비모프의 손가락은 70먹은 노인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비슷한 나이대의 폴리니가 이미 추한 꼴 다 보인 걸 생각하면, 적어도 루비모프는 추한 꼴 안 보이고 은퇴할 수 있겠지라는 희망이 생긴다.


 1부가 끝나자마자 관계자들이 부리나케 프리페어드 피아노를 들여왔다. 이로써 의문 하나 해결. 프리페어드 피아노는 리즈Leads 브랜드였다. 처음 듣는 브랜드다. 비싸려나?

 솔직히 말하자면 난 존 케이지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군대 있을 때 후임이 영화를 비롯한 예술에 관심이 있어서 케이지 얘기를 했는데 <4분 33초>를 두고 ‘너무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곡’이라고 했었다. 난 그 말이 정곡을 찔렀다고 생각한다. 케이지는 너무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서 ‘음악은 음악이다(알반 베르크의 명언)’라는 기본 명제를 자주 흐린다. 다행히 이 곡은 질문보다는 음악이 우선인 곡이다. 케이지는 겉보기에 익숙한 매체를 통해 우리를 낯선 세계로 데려가 낯선 음악을 듣게 한다.

 난 처음에 이 곡이 들려주는 소리를 듣고 (공교롭게도) 베르크 <보체크>에서 들었던 그 피아노 소리를 연상했다. 사실 그것은 내 고정관념과 실제 음향이 충돌하는 과정이었다. 프리페어드 피아노는 피아노라는 매체에서 연상할 수 없는 소리를 연달아 내놓았다. 음향은 공, 탐탐을 거쳐 유사 가믈란의 세계로 들어갔다.

 우리가 피아노라는 매체에 대해 가지고 있는 집착은 무엇일까. 바로 ‘피아노에서는 피아노 소리가 나야 한다’ 아닐까. 이 곡은 그 집착을 산산히 부수는 것을 넘어, 그 집착을 버리게 만드는 곡이다. 하지만 고개가 숙여지는 깨우침은 아니다. 그런 파괴가 피아노에 이물질을 끼우는 행위나, 색다른 음향에 대한 과한 몰입이라는 새로운 집착을 낳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루비모프라는 위대한 전달자 얘기를 하자면, (동어반복해서 미안한데) 솔직히 곡에 너무 몰입해서 연주를 생각할 시간이 적었다는 변명 말고 할 말이 없다. 하지만 사실 그게 위대한 연주 아닐까. 너무 기가 막히게 잘 해서 딴 생각을 못하게 만드는 연기를 본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드디어 마지막, 드뷔시 전주곡 2권.

 드뷔시의 <영상>과 전주곡은 둘 다 1권과 2권으로 나뉜다. 1권이 좀 더 유명하지만 2권은 더 깊고 내밀한 방향으로 들어가며 더 그윽하고 완성도도 더 높다.

 그런 2권에서 루비모프가 어땠나면…… 하, 그냥 존나 쩔었다.

 무슨 말을 써도 표현이 안 된다.

 난 40분 동안 음에 함뿍 젖었다.

 반음계가 적시고, 화음이 적시고, 아르페지오가 적신다.

 아첼레란도로 홀리고, 테누토로 홀리고, 루바토로 홀린다.

 <안개>에서는 몽롱해지고, <고엽>에서는 참담해지다가, <브뤼예르>에서 뭉클했다.

 <라비느 장군>의 괴상망측함부터 <카노프>의 모호함까지, <달빛 받는 테라스>의 정묘한 모네식 대비부터 <불꽃놀이>의 찬연한 음향의 폭발까지.

 모든 게 거기 있는데 말로 설명을 못하게 만든다.

 완벽한 연주라는 말은 쓰면 쓸수록 비루해지지만 루비모프의 드뷔시는 완벽했다. 내가 이 이상의 드뷔시 연주를 콘서트에서 들을 수 있을지 의문이다.

 연주에 대한 얘기는 더 못하겠으니 페달링이나 첨언하겠다. 피아노의 역사에서 템포 루바토를 정점으로 올려놓은 이가 쇼팽이라면, 페달링을 정점에 세운 이들은 드뷔시와 라벨이다. 드뷔시의 곡을 연주하려면 그만큼 차원이 다른 페달링 스킬을 보여주어야 한다.

 전주곡에는 그런 스킬이 곡마다 깔려 있다. 한 프레이즈를 연주하면서 중간 페달로 한 음만 콕 집어서 끊어내는 스킬이 빈번하다는 얘기다. 이게 말이 쉽지 진짜 엄청나게 힘들다. 검으로 종이를 베어야 한다고 생각해보라. 더군다나 피아노는 음향이 엉키기 쉬운 악기다.

 루비모프의 드뷔시가 완벽하다고 극찬을 하는 이유의 80%가 바로 이 페달링 때문이다. 소름끼치는 순간은 <와인의 문>에서 나왔는데, 이 곡에는 급박한 하강 연음이 있다. 루비모프는 이걸 왼페달로 풍성하게 울리다가 가운데 페달로 칼같이 끊어냈다. 기민함에 놀라고 명쾌함에 놀라다가 마지막으로 음향에 놀라는 순간이었다.

 

 루비모프는 마음에 안 드는 구석이 있었는지, 아니면 더 보여주고 싶은 게 있었는지 앵콜을 무려 두 곡이나 했다. 첫 번째 곡은 쇼팽 뱃노래였는데, 가장 좋아하는 카펠(RCA)의 폭발하는 연주와는 거리가 멀지만 질퍽한 루바토를 남용하지 않으면서 서서히 끌어올리다가 마지막에 카타르시스를 주는 게 장난 아니었다. 다만 잔실수가 조금 있었던 게 아쉬웠다. 두 번째는 슈베르트 즉흥곡 D.899의 2번이었는데 이것도 드뷔시에 필적했다.


 다 쓰고 나니 하이든을 설명할 때 썼던 표현인 ‘분절과 통합’이라는 말을 총평에 덧붙이고 싶다. 루비모프는 시대를 달리할 때마다 매체를 바꿀 정도로 케이스 바이 케이스에 능한 연주자지만 자신의 미학은 타협하지도 양보하지도 않는다. 바로 명쾌한 음향이다.

 루비모프의 아름다움은 명쾌함에서 온다. 칼로 가르듯 끊어내고 풍성하게 부풀린다. 미련을 남기지도 않고 질질 끌지도 않는다. 하지만 폴리니나 아이마르처럼 거세된 아름다움은 아니다. 정묘한 형상 밑에는 따뜻한 피가 흐르는 혈맥이 있다. 만약 명쾌함과 음향 두 가지 중 하나를 희생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면, 루비모프는 명쾌함을 희생하고 음향을 택하리라.

 시대에 따라, 음악에 따라 다른 접근법을 선택하지만(분절), 그 모든 음악은 명쾌한 음향으로 통합되어 있다. 그것이 내가 들은 루비모프의 음악이다.

 끝으로, 감동적인 연주도 모자라 친절하게 사인까지 해주신 마에스트로께 감사를 드립니다.


 한줄 평 : 이보다 더 나은 연주회를 보게 된다면 그거야말로 내 인생의 행운일 것이다.

Posted by 여엉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