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동규 시인의 시 제목 중 <혼 없는 자의 혼노래>라는 시가 있다. 리게티의 레퀴엠을 한 마디로 표현하라고 한다면, 난 이 시 제목을 들어 '혼 없는 자들의 혼노래'라고 말할 것이다.

 2차대전의 참혹한 포로 생활 속에서 죽음을 위기를 맞고, 대부분의 가족을 강제수용소에서 잃은 리게티의 삶과 음악에는 항상 '삶과 죽음 사이의 기막힌 우연'이 그림자처럼 따라붙었다. 그런 그가 진혼미사곡 작곡에 도전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마음을 먹은 시기에 비해 완성은 다소 늦었다.

 첫 번째로 착수한 것은 음악원 재학 중인 1949년, 두 번째는 음악원에 출강하면서 본격적으로 작곡에 착수한 1953년이었다. 그러나 두 차례의 시도는 모두 구상에 그쳤다. 어쩌면 그 당시의 그는 아이디어는 충만했지만 그 아이디어를 구체화할 '방법'이 아직 머릿속에 들어있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현악 4중주 1번과 <무지카 리체르카타>를 통해 알 수 있듯, 당시의 리게티는 아직 고전적인 형식에 기댄 후에야 작곡하는 것이 가능했다. 당시 그는 12음기법도 잘 몰랐다고 하니, 만약 이 시기에 레퀴엠을 완성했다면 그 형태는 지금 우리가 듣는 레퀴엠과는 완전히 달랐을 것이다.

 세 번째로 진혼미사곡을 착수한 해는 헝가리에 짧은 해빙이 찾아온 1956년. 이 해의 리게티는 한스 옐리넥의 <12음기법 입문>을 구해서 보고, 라디오로 스트라빈스키와 쇤베르크, 베르크 등의 20세기 음악을 접하면서 자신의 음악성을 키워나간다. 실제로 1956년의 음악적 해빙은 리게티가 서구 아방가르드 사조를 빠르게 흡수할 수 있는 기반을 이룬다. 그러나 이 세 번째 도전에서도 리게티는 레퀴엠을 완성하지 못한다. 대신 그가 쓴 곡이 바로 12음 기법 공부를 반영한 반음계적 환상곡이다.

 1956년 9월, 헝가리의 민중들은 억압에서 벗어나 자유의 가을을 쟁취하기 위해 일어난다. 그들은 실제로 짧은 가을을 쟁취했지만, 그 다음에 닥쳐온 겨울은 너무도 길고 엄혹했다. 소련군은 탱크를 끌고와 민중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했고, 짧은 해빙 기간 동안 정부의 수반이었던 임레 라지는 끌려가 처형당했다. 헝가리가 소련군의 탱크 아래 짓밟힌 후, 수많은 헝가리인이 살아남기 위해, 또는 자유를 얻기 위해 서방으로 탈출했다. 리게티 부부도 친구인 쿠르탁 부부와 함께 서방으로 피신할 계획을 세운다. 리게티 부부은 이를 실천해 마침내 빈으로 탈출했으나, 쿠르탁 부부는 불과 1주일이라는 기간 사이에 국경이 폐쇄되는 바람에 결국 탈출하지 못하고 헝가리로 돌아간다.

 서방에 도착한 리게티는 쾰른과 다름슈타트 등지에서 서구의 사조를 빠르게 흡수해나간다. 최초의 급진적인 곡 <비전>을 거쳐 전자음악 <분절>, 관현악곡 <환영>이 만들어지며, 마침내 1961년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아트모스페르>가 완성되기에 이른다. 연구자들은 그의 <아트모스페르>에서 장례식 음악 분위기 비슷한 것을 찾아낼 수 있다고 한다. 그 말이 맞다. 그는 의식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언젠가 진혼미사곡을 완성할 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1963년, 스웨덴의 스톡홀름 라디오 방송국이 리게티에게 성악곡 작품을 위촉하면서 마침내 작곡가는 첫 시도 이후 14년이 흘러서야 비로소 진혼미사곡 작곡을 시작한다. 어린시절 꿈꾸던 막연한 죽음에 대한 환상, 2차대전의 참혹한 악몽과 그 이후 공산 헝가리 정권 치하에서 겪었던 불안이 그의 입에서 '혼 없는 자들의 혼노래'가 흘러나오도록 도운 셈이다.

 리게티는 천천히, 신중하게, 복잡하게 작곡하는 사람이다. 2년의 작곡 기간 동안 그는 성부를 수없이 빼고 더하고, 음표를 빼고 고치고, 리듬을 분할했다가 다시 합치기를 반복하면서 자신이 원하는 형태(그의 곡을 '구조'라고 부르기는 힘들기에)가 나올 때까지 수정에 수정을 거듭했다. 작곡은 1965년 초에 끝났다. 그리고 그 해 3월, 미하일 길렌의 지휘 아래 스웨덴 교향악단과 방송 합창단의 연주로 이 성악곡은 초연을 치르기에 이른다.

 이 곡의 성악 성부는 무자비하기로 악명이 높다. 소프라노와 메조 소프라노인 두 독창자는 격렬함과 부드러움을 모두 자유자재로 소화할 수 있어야 하며, 최소 120명을 요구하는 20성부의 합창단 역시 아주 어렵고 까다로운 악보를 소화해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 <진노의 날> 악장의 급변하는 템포와 음역은 보통 실력이 아니고서는 무난하게 처리하기는 커녕 악보를 따라가는 것조차 힘이 들 것이다. 관현악은 현악기와 2관 편성에 다양한 타악기와 첼레스타, 쳄발로, 하프로 이루어져 있으며, 성악 성부보다는 비교적 간결하며 주로 성악 성부를 돕거나 더 복잡한 흐름을 만들어내는 역할을 맡는다. 특히 기악 성부는 항상 성악 성부와 함께 등장하며 성악 성부의 복잡한 인토네이션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버팀목 역할을 맡는다는 점에서 아주 중요하다.

 리게티는 진혼미사곡의 대본들 중 많은 부분을 쳐 버리고 <입당송>, <키리에>, 그리고 <부속가> 부분만 남겼다. <부속가> 부분 중에서도 <진노의 날>을 <De Die Judicii Sequentia(심판의 날에 대한 부속가)>로 고쳐 쓰고, 거기서 또 마지막 6개 행을 떼어 마지막 곡인 <라크리모사>에 붙였다. 리게티는 <라크리모사>를 통해 곡이 완결된다고 보았기에 다른 곡을 더 작곡하지 않았다. 

 성악의 최저음역에서 어둡고 깊은 슬픔을 표현하듯 시작하는 <입당송>은 아주 조용하지만 음울하고 비참한 모습으로 일관한다. 음역대가 천천히 상승하면서 곡도 서서히 밝아지며, 마지막에는 영원과 평온을 갈구하는 조용한 기도로 끝이 난다. 이 영원함을 갈구하는 평온은 이 곡의 다음 곡인 <영원한 빛(Lux aeterna)>의 아이디어와 연관성이 있다.  

 <키리에>는 다섯 파트의 합창단이 각기 맡은 성부에서 다성음악을 연주하는데, 개개의 성부는 점점 분화하면서 꼬이고 얽혀 나중에는 20성부까지 분화한다. 이 악장 또한 조용히 시작했다가 음계가 상승하면서 갑작스럽게 극단적으로 밝은 빛을 끌고 오는데, 이것이 <입당송>과 이 곡의 가장 큰 차이점이다. 하지만 이 곡에는 클라이맥스도 없고 악구도 없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음향면들이 존재할 뿐이다. 음량은 중간에 커졌다가 작아지기를 반복하지만 그것이 클라이맥스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유일하게 지속되는 것은 오직 하나, 반음 단위로 중첩된 3도 음정들이 변화하며 만들어내는 거대한 음향 덩어리다. 아마 <아트모스페르>를 성악곡화한다면 이 <키리에>와 같으리라.

 곡의 중심인 (편의상) <진노의 날>은 <키리에>와는 극단적인 대비를 이루는 거칠고 격렬한 곡이다. <키리에>에서 클라이맥스가 하나도 없었다면 <진노의 날>은 곡 전체가 클라이맥스를 이루고 있다. 세상을 멸망시킬 처절한 신의 분노 속에서 두려워하는 듯 떨고 있는 듯 조용히 중얼중얼거리다가 갑자기 소리를 질러대는 합창단, 가혹할 정도로 넓은 독창자의 도약 음정, 무템포(Senza Tempo)의 사용으로 급변하는 속도의 대비, 거칠게 돌진했다가 갑자기 부드럽게 쓰다듬는 음색의 대비 등으로 일관되게 극단적인 형태를 취한다. 특히 이 악장의 대 클라이막스에서는 합창단이 마치 바벨탑 직후의 세상처럼 정신없이 언어를 남발하는 광경을 들을 수 있다.

 <진노의 날>이 지나간 후 등장하는 마지막 곡 <라크리모사>에서 위협적이고 거친 물결은 모두 빠져나가고, 오직 두 명의 독창자와 소수의 관현악만이 남아 시간과 거리를 두고 <진노의 날>을 회고한다. 에필로그 격인 이 곡은 불협화음에서 협화음으로, 동적인 진행에서 정적인 진행으로, 심판에서 이별로 이어지는 또 하나의 대비를 이룬다.  

Posted by 여엉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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