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뷔시 / 판화

음악 2013. 7. 23. 21:31

<판화> (Estamps pour piano, L.100)

작곡 시기 : 1903년 7월 완성

초연 : 1904년 1월 9일 파리 국립음악홀에서 리카르도 비네스의 연주로 초연

<피아노를 위하여> 모음곡을 1901년에 완성한 후, 드뷔시는 좀 더 깊은 방향으로 나아가기로 작정했다. 그는 자신에게 형식적인 구체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을 이미 간파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방향을 바꾸려 하지 않았다. 지금까지의 형식이 자신의 몸에 맞지 않는다면, 자신의 몸에 맞는 새로운 옷(형식)을 짜면 된다. 그는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는 바로크 모음곡 형식으로 눈을 돌려 <피아노를 위하여>를 완성했다. 이 모음곡은 나름대로 가치가 있지만 드뷔시의 음악적 성향은 역시 구체적인 형식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렇다면 그에게는 무엇이 필요했을까. 바로 음색과 선율을 자유로이 변환하는 도구가 되어줄 영상이었다. 음악은 전통적인 화성법이나 대위법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작곡가의 상상력에 의해 움직인다.

 그러나 드뷔시가 충동적인 작곡가라는 오해는 하지 말아주길 바란다. 선법적인 색채의 사용과 리듬상의 대위법 사용에서 드뷔시보다 더 섬세한 기술을 제시할 수 있는 작곡가는 없었다. 드뷔시가 자신의 음악적 기술을 활용하게 위해 불러들인 영상은 동양 사원의 불탑, 그라나다의 예측 불가능한 저녁, 그리고 비가 내리는 정원이었다. 이것들은 최소 1~2년에서 최대 10년 전에 작곡가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영상이었다. 그가 오랜 시간 고민한 까닭은 수많은 과거와 현재의 영상 중 어떤 것이 가장 적절한 것인지를 머릿속으로 추려내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1곡 <탑> (1.Pagodes)

 음향의 순수한 공명이라는 점에서 <판화>의 <탑>보다 더 앞서나간 곡은 없다. 이 곡과 비교할만한 이후의 곡들, 가령 <영상> 1집의 <물에 비친 그림자>나 2집의 <잎새를 스치는 종소리>는 이 곡보다 더 노련하기는 할지언정 이처럼 순수한 음향을 확고하게 드러내지는 못한다.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드뷔시의 귀와 눈을 사로잡았던 가믈란 음악은 비로소 여기서 그 진가를 발휘한다. 그러나 이 음악은 가믈란 음계를 차용한 오리엔탈리즘 음악에서 이탈한다. 이 곡은 공과 종과 사람들이 몰려 있는 시정市井의 소리가 어울려 만들어낸 대위법적 음악이다. 작곡가의 주장은 이 사실에 못을 박는다. "팔레스트리나의 대위법조차 자바 음악에서 발견되는 것과 비교하면 어린애 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이 주장은 또 다른 한 가지 사실도 암시하는데, 드뷔시는 자바 음악에서 발견할 수 있는 비평균율적이고 비선율적인 음악을 통해 종래의 선율적 대위법과는 다른, 리듬상의 대위법을 구상했다는 사실이다.

 드뷔시가 서구의 작곡가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한 가지 사실은 그가 이 곡에서 긴장감의 고조와 클라이맥스를 구축했다는 것이리라. 하지만 B와 F#의 드로운 베이스로 시작하는 이 곡에서 종래의 소나타 형식은 자취를 감춘다. 드뷔시가 "똘똘한 어린애들을 위한 것"이라며 경멸한 으뜸화음이나 딸림화음 같은 화성적 구조도 찾아볼 수 없다. 서구인들에게 낯선 정취를 불러들이겠지만, 우리에게는 전혀 낯설지 않은 주제(G-C-D)의 반복에서 첫 번째 5음음계가 나타난다. C-D-F-G-A다. 곧이어 두 번째 5음 음계가 나타난다. D-C-B-A-G의 하행 5음음계다. 11마디부터 아르페지오의 부분적 리듬이 점차 증가하며 세 번째 5음 음계가 나타난다. B-G-F-D-C다. 5음 음계에 의한 주제가 발전하는가 싶더니 어느새 두 성부가 반진행한다. 선율적인 반진행뿐 아니라 리듬적으로도 반진행을 이룬다. 31마디에서 마침내 마지막 5음음계가 나타난다. G-B-C-D-E다. 이어 두 개의 5음음계 주제가 동시에 진행한다. 첫 주제가 꺾이며 반주에 머무는 동안 두 번째 주제는 그 음향을 극대화한다. 이어 주제들을 재현하면서 곡은 포르테의 정점에 이른다. 하지만 도무지 진행 방향을 확인할 수 없다. 드뷔시가 이 곡을 하는 일은 탑을 보여주는 것이지 탑의 어느 부분이 위대하고 어느 부분이 장엄한지를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색채는 눈이 부실 듯 일렁이지만 형태는 흐릿하고 뭉개져 있다. 곡을 처음부터 끝까지 일정한 위치에 멈춰세우는 고정된 주제는 음악적 방향성을 해체해버린다.

드뷔시는 이 곡에서 주저함 없이 포르테를 사용하고 있으며, 중간 페달과 오른 페달의 사용은 거의 필수적이라고 해야 한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 곡에서 크게 요구하는 것은 바로 선명한 음향과 정확한 리듬이다.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과는 달리, 불투명한 음향과 루바토는 오히려 이 곡을 크게 해칠 것이다. 선명한 음향을 위한 충분한 음량도 필요하다.

 

 2곡 <그라나다의 밤> (2.La soiree dans Grenade)

 본인도 스페인의 위대한 작곡가였던 마누엘 데 파야가 스페인을 표현한 가장 뛰어난 피아노곡으로 바로 이 <그라나다의 밤>을 꼽았다는 사실은 재미있다. 파야는 '안달루시아의 분위기를 이 곡보다 더 잘 표현한 것은 없다'며 이 독특한 분위기의 피아노곡을 격찬했다. 그러나 정작 드뷔시는 스페인에 가본 적이 한 번도 없으며, 다만 삽화를 통해 스페인의 풍경을 접했을 뿐이다. 게다가 그는 곡에 스페인 음악을 하나도 쓰지 않았다. 그는 분위기와 미세한 음의 조직으로 스페인의 본질을 잡아냈다.

 어떻게 잡아냈을까? 드뷔시는 스페인 음악가들의 복잡하면서도 느릿한 선율과 하바네라 리듬 사용, 그리고 둘째 박의 독특한 리듬 처리를 간파했다. 그는 스페인 음악을 차용하는 대신 스페인 음악가가 되어 스페인 음악보다 더 스페인 음악다운 음악을 만들어낸 것이다. 이 곡에서 수시로 등장하는 하바네라 음악을 사용하는 데 있어서도 그는 한결같이 변덕스럽다. 갑자기 빨라졌다가 느려진다. 이것도 스페인 음악의 본질을 정확하게 간파한 드뷔시의 통찰력이 빛을 발한 부분이다.

 C페달 포인트가 지중해 너머 탕헤르를 바라보는 그라나다의 전경과 거친 주위 풍경을 그리고, 오른손 옥타브는 한 옥타브씩 올라가며 관능적인 바다 너머의 음계를 불러들인다. 이것이 첫 주제다. 느릿한 하바네라 리듬 너머로 악사의 기타 연주가 들린다. 음계는 7음음계에서 온음음계로 변하며 루바토 지시에 따라 새로운 동기가 나타난다. 곧 하바네라 리듬의 열기와 함께 곡은 A장조의 두 번째 주제로 들어간다. 경과구에 이어 다시 하바네라 리듬에 따라 두 번째 주제군이 등장한다. 음악은 점점 복잡해진다. 이어 곡은 경과구를 재현하고, 하바네라 리듬은 점점 멀어진다. 그런데 갑자기 캐스터네츠의 빠른 리듬이 곡을 흔들어 놓는다. 이어 북아프리카 풍의 첫 주제를 다시 재현하며 곡은 밤의 흐릿한 풍경과 관능적인 향기 속으로 서서히 사라진다.

 

3곡 <비 오는 정원> (3.Jardins sous la pluie)

 아시아와 스페인이라는 부루마블 음악적 지도의 탐색을 끝마친 드뷔시의 최종 목적지는 자신의 나라인 프랑스다. 드뷔시는 마지막 곡의 소재로 프랑스의 유명한 돌림노래를 선택했다. 아이들은 놀이를 방해하는 폭풍우를 피해 집으로 들어가 어머니의 자장가를 듣는다. 하지만 폭풍우는 아이들이 잠들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그리고 어머니의 노래는 아이들에게 평온함을 가져다준다. 마침내 폭풍우가 그치고 햇살이 나뭇잎 위의 물방울을 비출 때, 아이들은 다시 해방되어 마음껏 뛰어놀기 위해 밖으로 나간다.

 시작 부분의 단조 선법과 급박한 리듬은 폭우가 쏟아지는 바깥 풍경을 묘사한다. 단조의 경과구가 나타나기도 하지만 주된 음계는 단조 선법이다. 56마디의 경과구부터 온음음계가 나타나고 곧이어 반음계도 나타나 극적인 대비를 이룬다. G음의 트릴이 따라붙는다. 경과구를 지나 곡은 부드러운 두 번째 주제에 돌입한다. 하지만 이 주제도 첫 번째 주제의 복귀에 의해 방해를 받는다. 이어 경과구가 다시 등장하고, 다시 첫 번째 주제가 B단조로 나타난다. 이어 경과구가 폭발하며 감7화음으로 하강하는데, 이 하강 음계는 5음음계와 매우 유사하다. 다시 두 번째 주제가 단편으로, 곧 주제 전체로 나타나다가 베이스에서 첫째 주제가 나타난다. 서로 평행선을 달리던 두 주제의 길고 복잡한 흐름은 B장조의 트릴로 시작하는 코다 속으로 빨려들어간다. 비가 그치고, 햇살은 밝게 빛나고, 정원의 풀들은 싱그러운 물방울을 머리에 얹고 있다.   

Posted by 여엉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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