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 (Sonata for Solo Violin, Sz.117)

작곡 시기 : 1944년 완성

바르토크는 바이올리니스트 예후디 메뉴인의 위촉에 답할 작품으로 바이올린 독주곡을 썼다. 피아노가 딸린 바이올린 소나타가 아니라, 바흐의 음악을 생각나게 하는 독주 바이올린 소나타였다.

사실 바이올린 독주곡은 만들기 여간 까다로운 곡이 아니다. 바이올린은 저음역이 없고, 그 때문에 폭넓은 음역을 활용할 수 없다. 잘못 만들어진 바이올린 곡은 깽깽이마냥 끽끽거리는 소리밖에 내지 못한다(일부러 그런 음향을 활용한 작곡가도 적지 않지만 그 음향을 남용하는 작곡가는 아직까지 보지 못했다). 4개 현의 특성을 잘 살리는 음악 만들기도 어렵다. 피치카토를 빼면 동시에 두 개의 이상의 음을 연주할 수 없기 때문에 3중/4중 스톱에서 음들을 분리시켜야 하므로 다성음악도 화성음악도 표현하기가 쉽지 않다. 이 난제들을 뚫고 바이올린 독주곡을 만든 작곡가는 그리 많지 않으며, 바흐의 여섯 곡을 비롯해 바르토크와 힌데미트, 루토스와프스키 정도가 유명할 뿐이다(파가니니의 카프리스는 음악을 떠나 순수하게 기교적인 곡이므로 넘어가도록 하자).

바르토크는 그 난점들을 넘어 새로운 것도 시도했다. 그는 미분음을 딱 세 곡의 음악에서 실험했는데, 작곡 순서대로 나열하자면 바이올린 협주곡 2번(Sz.112), 현악 4중주 6번(Sz.114), 그리고 이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다. 물론 바흐에 대한 경의로 이 작품을 만들었을 것이며 소재에서도 바흐의 냄새가 나지만, 곡은 온전히 바르토크의 작품이다. 곡을 완성했을 때, 바르토크에게는 18개월의 생이 남아 있었다. 그는 1944년 11월 26일에 뉴욕에서 메뉴인이 이 곡을 초연하는 것을 들을 수 있었지만, 이 곡은 그의 처음이자 마지막 현악 독주곡이 되었다.

 

1악장 <샤콘느 템포> (1.Tempo di ciaccona)

헐시 스티븐스는 이 곡이 샤콘느 악장이 아니라 샤콘느 성격의 소나타 악장으로 보고 있다. 이것은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 Op.83의 첫 악장을 보고 사람들이 범하는 실수와 비슷한데, 브람스의 곡은 리트로넬로 형식을 취한 소나타 형식이지 리트로넬로 형식이 아니다. 전체 150마디 중 52마디가 제시부, 38마디가 발전부, 47마디가 재현부, 나머지 14마디가 코다이다. 중심음은 G이며, 처음에 곡은 단조로 시작했다가 마지막에 장조로 바뀌는데, 작곡가는 이 악장에서 반음계법을 자유롭게 구사한다. 음정적으로는 2도, 4도, 7도에 크게 의존하는데, 이것은 마자르 민속음악의 성질과 연관이 있다.

 

2악장 <푸가> (2.Fuga)

푸가 주제는 좁은 반음계(B에서 F# 사이)의 음정들을 사용하며, 매우 자유롭다. 제시부는 4성이며 C-G-C-G 순으로 도입이 이루어지지만, 푸가는 3성이며 변주적 원리는 물론 각종 대위법을 구사한다. 첫 번째 응답을 제외하면 주제의 형태가 변형을 시작하므로 점점 엄격한 대위적인 원칙에서 벗어나는데, 그 때문에 이 곡은 푸가적 환상곡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3악장 <멜로디아> (3.Melodia)

멜로디아는 반음계적인 진행이 주조음을 이룬다. 형식은 단순한 A-B-A 형을 취하지만, 세 번째 부분을 교묘하게 변형시켜 원래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변한다. 악보를 보지 않고서는 첫 부분과 마지막 부분 사이의 연관성을 알기 힘들다. A부분의 주제는 2도와 4도를 많이 사용하며 이 주제를 반음계적으로 굴절시켜 사용한다. 중간 부분에서 현악기는 시종 약음기를 달고 연주한다. 사실 바르토크는 이 악장에 관해 메뉴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악장 전체를 약음기를 달고 연주할 것을 권하기도 했다. 물론 약음기를 달지 않고 연주하는 것에 대해서도 질문했지만.

 

4악장 프레스토 (4.Presto)

첫 부분은 현악 4중주 4번의 2악장과 연관이 있다. 두 번째 부분은 프리지아 선법의 민요적 선율로 헤미올라의 느낌을 갖는데, 교대로 나오는 3/4-3/8박자 패턴을 작곡가는 3/8 박자 기보로 써 두었다. 나머지 부분은 주로 멜로디인데, 이 세 부분은 코다에서 결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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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 소나타 8번 (Piano Sonata No.8 in B flat major, Op.84)

작곡 시기 : 1939년 착수, 1944년 완성

2차 세계대전이 터지면서, 소비에트 작곡가들은 특수한 형태의 자유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이것은 전쟁 몇 년 전에 소비에트로 귀국한 후 '창살 없는 감옥'을 만끽하던 프로코피예프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다. ‘피아노 소나타 3부작’이라 불리는 6번 A장조(1940년 완성), 7번 B♭장조(1942년 완성), 8번 B♭장조(1944년 완성)는 전쟁 전에 착수해 전쟁 중에 완성했지만, 곡의 비틀린 선율과 강렬한 리듬이 전쟁에 대한 예찬 또는 소비에트에 대한 찬양으로 여겨져 화를 면했다. 그러나 전쟁 후에 만들어진 작품들은 전쟁 때와 같은 행운을 얻지 못했다. 만년의 프로코피예프가 가는 길은 곳곳이 가시밭이었다.

프로코피예프는 단순한 멜로디를 좋아했다. 그의 불협화음과 거친 리듬은 단순한 멜로디와 좋은 대조를 이룬다. 1941년에 쓴 자서전에서, 그는 자신의 작품 특성을 고전적(Classical), 혁신적(Innovation), 토카타적(Toccatatic), 서정적(Lyric), 괴기함(Grotesque)의 다섯 가지로 구분했다. 그는 피아노 소나타라 이름 붙인 독주곡을 40년에 걸쳐 아홉 곡 작곡했는데, 1번 Op.1과 3번 Op.28에서만 단악장 구성이 나타나고 나머지 일곱 곡은 모두 3악장 또는 4악장제를 취했다. 프로코피예프가 직접 한 말, “나는 소나타 형식만큼 완벽하면서도 융통성 있고 내가 목표로 하는 음악구조가 필요한 모든 요소를 포함하고 있는 다른 어떤 형식도 찾을 수가 없다.”라는 말을 통해, 그가 소나타 형식에 얼마나 경도되어 있었는가를 확인할 수 있다.

 

* 1악장과 2악장은 나중에 다루겠습니다.

 

3악장 (3.Vivace 12/8 - Allegro ben marcato 3/4 - Andantino 4/4 - Vivace 12/8)

총 490마디. 론도-소나타 형식. 12/8박자를 취하고 있지만 변박이 매우 심한 피날레 악장. 제시부는 1마디부터 106마디까지. 아르페지오로 제시하는 첫 주제. 9마디부터는 4/4박자로 변하면서 왼손에서 특유의 스타카토 주제를 사용한다. 71마디부터는 다시 12/8박자로 돌아오며 양손이 모두 넓은 음역의 아르페지오를 구사한다. 연속적인 장3화음이 나타나며 조성은 C장조로 전조한다. 85마디부터 106마디까지는 제시부를 마무리 짓는 부분이다. 발전부는 107마디부터 359마디까지 해당하며 곡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 D♭장조, Allegro ben marcato. 앞에서 4박자 계열을 사용하던 것과는 달리 3박자 계열로 바뀌어 극단적인 대비를 보여준다. 두 개의 특징적인 선율을 사용하는데 이 선율이 반복이나 변주를 통해 나타나기도 하며 또 모든 성부에서 자유롭게 나타나기도 한다. 때로는 아무런 규칙도 없이 툭 튀어나와 악장을 자유롭게 만들어준다. D♭장조나 3박자 계열의 리듬은 2악장의 특징과 일치해, 작곡가가 2악장과 이 부분을 하나로 묶으면서 동시에 앞뒤 부분과 대비를 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85마디에서 188마디 사이에 8성부의 두터운 수직적 화성 진행이 보이며(이 부분의 기교는 잔인하게 어렵다), 수시로 딸림음인 A♭음을 두들겨 조성감을 확고히 하고 있다. 344마디부터는 발전부와 재현부를 연결하는 Andantino의 연결구가 나타난다. 조성은 자유로우며 59마디~70마디가 전조되어 진행하는 부분이다. 360마디부터는 재현부. 제시부와 아치형의 대칭을 이룬다. 442마디부터 곡은 ff의 절정으로 치닫는다. 강한 악상과 강세, 그리고 스타카티시모의 3박자가 어울려 최상급의 타격감을 만끽하게 만들어준다. 이 타악기적인 효과와 함께 곡은 원래 조성인 B♭으로 돌아간다. 487마디에서 마지막 구절이 나타나는데, B♭단조로 이조하다가 490마디에서 돌연 강하게 종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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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동규 시인의 시 제목 중 <혼 없는 자의 혼노래>라는 시가 있다. 리게티의 레퀴엠을 한 마디로 표현하라고 한다면, 난 이 시 제목을 들어 '혼 없는 자들의 혼노래'라고 말할 것이다.

 2차대전의 참혹한 포로 생활 속에서 죽음을 위기를 맞고, 대부분의 가족을 강제수용소에서 잃은 리게티의 삶과 음악에는 항상 '삶과 죽음 사이의 기막힌 우연'이 그림자처럼 따라붙었다. 그런 그가 진혼미사곡 작곡에 도전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마음을 먹은 시기에 비해 완성은 다소 늦었다.

 첫 번째로 착수한 것은 음악원 재학 중인 1949년, 두 번째는 음악원에 출강하면서 본격적으로 작곡에 착수한 1953년이었다. 그러나 두 차례의 시도는 모두 구상에 그쳤다. 어쩌면 그 당시의 그는 아이디어는 충만했지만 그 아이디어를 구체화할 '방법'이 아직 머릿속에 들어있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현악 4중주 1번과 <무지카 리체르카타>를 통해 알 수 있듯, 당시의 리게티는 아직 고전적인 형식에 기댄 후에야 작곡하는 것이 가능했다. 당시 그는 12음기법도 잘 몰랐다고 하니, 만약 이 시기에 레퀴엠을 완성했다면 그 형태는 지금 우리가 듣는 레퀴엠과는 완전히 달랐을 것이다.

 세 번째로 진혼미사곡을 착수한 해는 헝가리에 짧은 해빙이 찾아온 1956년. 이 해의 리게티는 한스 옐리넥의 <12음기법 입문>을 구해서 보고, 라디오로 스트라빈스키와 쇤베르크, 베르크 등의 20세기 음악을 접하면서 자신의 음악성을 키워나간다. 실제로 1956년의 음악적 해빙은 리게티가 서구 아방가르드 사조를 빠르게 흡수할 수 있는 기반을 이룬다. 그러나 이 세 번째 도전에서도 리게티는 레퀴엠을 완성하지 못한다. 대신 그가 쓴 곡이 바로 12음 기법 공부를 반영한 반음계적 환상곡이다.

 1956년 9월, 헝가리의 민중들은 억압에서 벗어나 자유의 가을을 쟁취하기 위해 일어난다. 그들은 실제로 짧은 가을을 쟁취했지만, 그 다음에 닥쳐온 겨울은 너무도 길고 엄혹했다. 소련군은 탱크를 끌고와 민중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했고, 짧은 해빙 기간 동안 정부의 수반이었던 임레 라지는 끌려가 처형당했다. 헝가리가 소련군의 탱크 아래 짓밟힌 후, 수많은 헝가리인이 살아남기 위해, 또는 자유를 얻기 위해 서방으로 탈출했다. 리게티 부부도 친구인 쿠르탁 부부와 함께 서방으로 피신할 계획을 세운다. 리게티 부부은 이를 실천해 마침내 빈으로 탈출했으나, 쿠르탁 부부는 불과 1주일이라는 기간 사이에 국경이 폐쇄되는 바람에 결국 탈출하지 못하고 헝가리로 돌아간다.

 서방에 도착한 리게티는 쾰른과 다름슈타트 등지에서 서구의 사조를 빠르게 흡수해나간다. 최초의 급진적인 곡 <비전>을 거쳐 전자음악 <분절>, 관현악곡 <환영>이 만들어지며, 마침내 1961년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아트모스페르>가 완성되기에 이른다. 연구자들은 그의 <아트모스페르>에서 장례식 음악 분위기 비슷한 것을 찾아낼 수 있다고 한다. 그 말이 맞다. 그는 의식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언젠가 진혼미사곡을 완성할 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1963년, 스웨덴의 스톡홀름 라디오 방송국이 리게티에게 성악곡 작품을 위촉하면서 마침내 작곡가는 첫 시도 이후 14년이 흘러서야 비로소 진혼미사곡 작곡을 시작한다. 어린시절 꿈꾸던 막연한 죽음에 대한 환상, 2차대전의 참혹한 악몽과 그 이후 공산 헝가리 정권 치하에서 겪었던 불안이 그의 입에서 '혼 없는 자들의 혼노래'가 흘러나오도록 도운 셈이다.

 리게티는 천천히, 신중하게, 복잡하게 작곡하는 사람이다. 2년의 작곡 기간 동안 그는 성부를 수없이 빼고 더하고, 음표를 빼고 고치고, 리듬을 분할했다가 다시 합치기를 반복하면서 자신이 원하는 형태(그의 곡을 '구조'라고 부르기는 힘들기에)가 나올 때까지 수정에 수정을 거듭했다. 작곡은 1965년 초에 끝났다. 그리고 그 해 3월, 미하일 길렌의 지휘 아래 스웨덴 교향악단과 방송 합창단의 연주로 이 성악곡은 초연을 치르기에 이른다.

 이 곡의 성악 성부는 무자비하기로 악명이 높다. 소프라노와 메조 소프라노인 두 독창자는 격렬함과 부드러움을 모두 자유자재로 소화할 수 있어야 하며, 최소 120명을 요구하는 20성부의 합창단 역시 아주 어렵고 까다로운 악보를 소화해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 <진노의 날> 악장의 급변하는 템포와 음역은 보통 실력이 아니고서는 무난하게 처리하기는 커녕 악보를 따라가는 것조차 힘이 들 것이다. 관현악은 현악기와 2관 편성에 다양한 타악기와 첼레스타, 쳄발로, 하프로 이루어져 있으며, 성악 성부보다는 비교적 간결하며 주로 성악 성부를 돕거나 더 복잡한 흐름을 만들어내는 역할을 맡는다. 특히 기악 성부는 항상 성악 성부와 함께 등장하며 성악 성부의 복잡한 인토네이션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버팀목 역할을 맡는다는 점에서 아주 중요하다.

 리게티는 진혼미사곡의 대본들 중 많은 부분을 쳐 버리고 <입당송>, <키리에>, 그리고 <부속가> 부분만 남겼다. <부속가> 부분 중에서도 <진노의 날>을 <De Die Judicii Sequentia(심판의 날에 대한 부속가)>로 고쳐 쓰고, 거기서 또 마지막 6개 행을 떼어 마지막 곡인 <라크리모사>에 붙였다. 리게티는 <라크리모사>를 통해 곡이 완결된다고 보았기에 다른 곡을 더 작곡하지 않았다. 

 성악의 최저음역에서 어둡고 깊은 슬픔을 표현하듯 시작하는 <입당송>은 아주 조용하지만 음울하고 비참한 모습으로 일관한다. 음역대가 천천히 상승하면서 곡도 서서히 밝아지며, 마지막에는 영원과 평온을 갈구하는 조용한 기도로 끝이 난다. 이 영원함을 갈구하는 평온은 이 곡의 다음 곡인 <영원한 빛(Lux aeterna)>의 아이디어와 연관성이 있다.  

 <키리에>는 다섯 파트의 합창단이 각기 맡은 성부에서 다성음악을 연주하는데, 개개의 성부는 점점 분화하면서 꼬이고 얽혀 나중에는 20성부까지 분화한다. 이 악장 또한 조용히 시작했다가 음계가 상승하면서 갑작스럽게 극단적으로 밝은 빛을 끌고 오는데, 이것이 <입당송>과 이 곡의 가장 큰 차이점이다. 하지만 이 곡에는 클라이맥스도 없고 악구도 없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음향면들이 존재할 뿐이다. 음량은 중간에 커졌다가 작아지기를 반복하지만 그것이 클라이맥스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유일하게 지속되는 것은 오직 하나, 반음 단위로 중첩된 3도 음정들이 변화하며 만들어내는 거대한 음향 덩어리다. 아마 <아트모스페르>를 성악곡화한다면 이 <키리에>와 같으리라.

 곡의 중심인 (편의상) <진노의 날>은 <키리에>와는 극단적인 대비를 이루는 거칠고 격렬한 곡이다. <키리에>에서 클라이맥스가 하나도 없었다면 <진노의 날>은 곡 전체가 클라이맥스를 이루고 있다. 세상을 멸망시킬 처절한 신의 분노 속에서 두려워하는 듯 떨고 있는 듯 조용히 중얼중얼거리다가 갑자기 소리를 질러대는 합창단, 가혹할 정도로 넓은 독창자의 도약 음정, 무템포(Senza Tempo)의 사용으로 급변하는 속도의 대비, 거칠게 돌진했다가 갑자기 부드럽게 쓰다듬는 음색의 대비 등으로 일관되게 극단적인 형태를 취한다. 특히 이 악장의 대 클라이막스에서는 합창단이 마치 바벨탑 직후의 세상처럼 정신없이 언어를 남발하는 광경을 들을 수 있다.

 <진노의 날>이 지나간 후 등장하는 마지막 곡 <라크리모사>에서 위협적이고 거친 물결은 모두 빠져나가고, 오직 두 명의 독창자와 소수의 관현악만이 남아 시간과 거리를 두고 <진노의 날>을 회고한다. 에필로그 격인 이 곡은 불협화음에서 협화음으로, 동적인 진행에서 정적인 진행으로, 심판에서 이별로 이어지는 또 하나의 대비를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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