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4년 여름부터 슈트라우스는 현악기 연주자를 위한 추도의 의미가 담긴 곡을 쓰기 시작했다. 슈트라우스는 이 곡에 <메타모르포젠Metamorphosen>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이 제목은 오비디우스의 유명한 <변신 이야기Metamorphoses>를 떠올리게 한다. 신화의 이야기는 그 껍데기를 벗겨놓고 보면 인간의 이야기, 곧 이름만 바꾸면 너 자신의 이야기Mutato nomine, de te fabula narratur가 된다. 티모시 잭슨이 이 곡에 관해 주장하듯 ‘부정적인 변신, 사물을 원초적인 상태로 돌려놓는 해체’인 셈이다. 시대에 초연한 듯, 시대에 영향 받지 않는 듯 보이는 이 영광과 오욕의 작곡가는 <카프리치오>를 쓸 때 그랬듯이 유럽 세계를 휩쓸고 있는 광기와 자신은 무관한 듯 펜을 놀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이 곡은 한 시대를 매장하고 있다. 1933년에서 1945년에 걸친 ‘진정한 20세기’를 매장하는 데 이 곡보다 적절한 곡은 없다. 이 곡은 한 시대의 껍데기를 벗겨내고 얻어낸 진정한 ‘해체’의 음악이다.

작곡가는 괴테의 유명한 문장에서 작곡의 힌트를 얻었다고 한다. 그는 그 문장을 베꼈다. ‘아무도 자신을 알 수 없다. 자신에게서 초연해지라.’ 슈트라우스는 젊었을 적 니체에 탐닉했던 것에서 알 수 있듯이 19세기 후반을 휩쓴 개인주의 철학에 평생 경도되었다. 이제 와서 그 흐름에서 발을 빼기에는 너무나 많은 날들이 지나갔다. 세상 사람들은 어느 누구든지 모든 것을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심지어 자기 자신조차도. 이 곡은 불가지不可知, 불식不識에 대한 음악이다.

슈트라우스가 곡을 쓰고 있는 동안 연합군은 독일의 도시들을 무차별 폭격했다. 마치 독일이 그동안 저지른 죄악에 대한 징벌인양, 폭격은 도시들을 이 세상에서 없던 것처럼 만들 기세였다. 가르미슈에 있는 슈트라우스는 그 사실에 초연할 수 없었다. 잿더미가 되어버린 드레스덴을 포함한 도시의 기억들이 이 곡에 녹아들어 있다. 그것은 슈트라우스가 한 때 독일 음악계를 더 좋게 만들어줄 것이라 생각하며 지지했던 인물, 아돌프 히틀러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히틀러는 항상 자신의 최후가 <신들의 황혼>의 장대한 피날레나 <파르지팔>의 초월적인 피날레가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지만, 그의 마지막 순간에 그를 따라간 것은 어쩌면 참혹한 폐허의 음악인 이 <메타모르포젠>인지도 모른다. 이 음악은 무너지는 바빌론 성읍을 휘감고 도는 마지막 비가, 폐허와 파괴를 상징하는 추도사다.

슈트라우스는 곡에 ‘스물 세 개의 현악기를 위한 습작’이라는 부제를 붙였다. 1945년 4월 12일, 곡을 완성한 날 바다 건너 미대륙에서는 프랭클랜 델러노 루즈벨트가 세상을 떠났다. 참 기묘한 일치지만 넘어가도록 하자.

곡은 처음부터 구불구불한 반음계를 지나간다.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짓뭉개진 반음계가 짙은 비애감을 더한다. 화성의 바탕은 슈트라우스 특유의 안정감 있는 화음을 취하지만 그 화음을 지나가는 선율은 이보다 더 불안정할 수 없다. 하강 음형과 대위 선율이 점점 얽히며 중간부를 향해 고통스럽게 나아간다. 중간부에서 곡은 계속해서 위안을 주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매 단계마다 지속적으로 위안의 감정은 스르르 빠져나가고 절망에 가득 찬 주제가 다시 밀려온다. 음악은 점점 고음으로 올라가고, 비올라와 첼로는 수많은 망령에게 붙잡힌 채 마지막 희망을 잡으려 몸부림친다. 마침내 두 악기는 다른 악기들을 떨쳐내고 고음의 G음에서 그 희망을 붙잡는 듯 보인다. 그러나 그 희망은 오히려 죽음의 조성인 C단조, 베토벤이 장송 행진곡에서 사용했던 그 조성으로 악기들을 무자비하게 끌고 들어간다. 사실 C단조는 이곡의 바탕이었으며, 우리는 처음부터 거기서 벗어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슈트라우스는 베토벤을 인용한다. 베토벤의 장송행진곡이 들려오는 것으로 보아 슈트라우스는 자신이 생각하는 위대한 인물을 관대 위에 올려놓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 인물은 누구일까? 그가 순진하게 믿어버린 히틀러일까? 아니면 슈트라우스 자신일까? 아니면 추상적인 인물형일까? 아니면 파괴된 독일의 도시들일까? 장송행진곡 선율은 도무지 해답을 던져주지 않는다. 우리는 제3제국이 오래 전에 끝나버린 신들의 망령을 붙잡고 있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 현장 한복판에서 슈트라우스는 관대 위에 안치된 인물을 보고 있다. 베토벤의 장송행진곡 선율이 점점 흩어지고 슈트라우스의 고통스러운 선율도 점점 흩어진다. 그 과정에서도 목을 조르는 듯한 고통스러운 음향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밑바닥에 도달해서도 곡은 계속 밑으로 떨어진다. 거짓 희망을 상징하던 G음, 그리고 곡의 근원인 C음이다. <짜라투스투라>를 시작하는 C음과 G음을 정반대로 내려가는 것이다. 슈트라우스는 <엘렉트라>를 포함한 많은 곡에서 <짜라투스투라>를 연상케 하는 화성과 멜로디를 사용했지만, 그 곡을 원초적인 상태로 되돌려놓은 적은 없었다. 사물을 원형으로 ‘해체’하면서 곡을 끝내는 것이다.

카라얀은 이 곡의 공식 스튜디오 녹음을 세 개 남겼다. 빈 필과 함께한 47년 EMI 녹음은 패전 직후 카라얀의 절박한 심경을 그대로 반영한 음반이지만, 역시 베를린 필과 녹음한 DG의 69년 음반을 빼놓고는 이 곡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 몽롱한 음향 속에서 연주자는 무너져버린 45년의 폐허를 생각하는 것처럼 보인다. 카라얀은 곡에서 해체나 철학에 대해서는 별반 생각하지 않는다. 그가 이 곡을 통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바빌론의 폐허, “무너졌다! 바빌론 성읍이 무너졌다! 자기 음행 때문에 분노의 포도주를 모든 민족에게 마시게 한 바빌론이 무너졌다!(묵시록 14:8)”라고 외치는, 고통스러운 묵시록적 기억이다. 우리는 연주에 대해 도덕적인 판단을 내리기 힘듦을 잘 알고 있다. 카라얀의 목표는 바빌론의 폐허를 우리 눈앞에 생생하게 보여주는 것, 그리고 그 색채를 뼈저리게 재현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이상한 아름다움이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순수한 음향만으로 타인을 압도할 수 있는 유일한 지휘자가 들려주는 이 레코딩에서는 신성한 광기마저 느껴진다.

시노폴리와 드레스덴의 94년 DG 레코딩은 카라얀에 비해 무겁고 둔중해 보인다. 무게추를 저현인 첼로에 두어 색채가 좀 더 칙칙하고 어둡다. 곡에 대해 보편적으로 가질 수 있는 인상을 짚어내는 카라얀과는 달리 시노폴리는 주관적이고 내면적이다. 내면은 격정적으로 요동치고 있는데 외면은 별반 움직임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갑작스러운 외면의 변화는 처음 듣는 사람에게는 뜬금없이 들릴 수 있겠지만 그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납득이 간다. 하지만 그것은 주관적이기에 공통적인 결론을 내릴 수 없다. 결국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셈이다. 시노폴리는 우리에게 그 어떤 것으로도 이해할 수 없는 불가지가 있음을 넌지시 암시한다.

사물을 ‘해체’한다는 관점에서 볼 때 파비오 루이지와 드레스덴의 07년 소니 레코딩과 비교할 대상은 찾기 힘들다. 루이지는 무거운 느낌의 시노폴리에 비해 훨씬 가볍고 산뜻한 음향을 들려주며, 악기의 음향을 넓게 퍼뜨려 몽롱한 상태로 끌고 가는 카라얀과는 달리 개개의 악기군이 하나처럼 들리는 선명한 음향으로 일관한다. 그런데 그 선명하고 산뜻한 음향은 아름다움이 아니라 오히려 해체의 미학을 설파하는 것 같다. 포정해우庖丁解牛라는 말이 있다. 포정이라는 도축업자가 소를 해체하는 것이 아주 자연스러워 살점을 전혀 상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루이지는 이 곡을 너무도 자연스럽게 해체해 듣는 사람이 저절로 감탄하게 된다. 그러나 곡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필수적인 비감은 조금 부족하다는 비판도 성립할 수 있다. 감동을 받기 위한 연주가 아니라 감탄하기 위한 연주다.

 

Posted by 여엉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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