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오페라 <살로메> Op.54

카를 발터 뵘 (헤로데스), 아그네스 발챠 (헤로디아스), 힐데가르트 베흐렌스 (살로메),

호세 반 담 (요하난), 비에스와프 오흐만 (나라보트)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지휘) /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1977년 7월 26일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실황연주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오페라 중 첫 걸작이라 할 수 있을 오페라 <살로메>는 당시 금기시되고 있던 오스카 와일드의 희곡을 대본으로 삼았고, 초연의 센세이셔널함은 이미 예정된 것이었다. 오스카 와일드는 성경의 설화를 옮기면서 다른 사람들이 주목하지 않던 부분, 즉 살로메의 섹슈얼리티에 주목했다. 성경의 살로메는 얼음처럼 차갑고 감정 없는 기계처럼 행동하지만, 오스카 와일드가 그려낸 살로메는 관능적이고 에로틱한 충동에 몸부림치는, 정신적으로 미성숙하지만 매력적인 괴물이다. 여기서 그는 세례 요한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고, 그 사랑을 얻지 못하자 그의 목을 얻어낸 후, 그것을 보면서 희열에 빠진다. 헤롯왕은 그 모습을 보고 공포에 질려 병사들에게 그녀를 죽이라 명한다. 슈트라우스는 <살로메>의 독일어 번역본을 읽으면서 오페라를 만들기에 부적당한 부분을 쳐냈고, 여백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악상들을 스케치해나갔다. 이성을 마비시키는 일곱 베일의 춤을 추고 난 후 세례 요한의 차가운 입술에 키스할 수 있도록 은쟁반에 그의 머리를 가져오게 해달라고 간청하는 살로메에게서는 일종의 네크로필리아(시체애호증)적인 성향마저 엿보인다. 그라츠에서 열린 초연에 참석한 인물들은 화려한 진용을 갖추어 이 작곡가가 얼마나 대단한 명성을 가지고 있었는지 말해준다. 히틀러는 나중에 자신이 <살로메> 초연에 참석한 것인지 아닌지 가늠하기 힘든, 모호한 말들을 남겼다.

<장미의 기사>를 제외하면, 카라얀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오페라 연주는 생각만큼 많지 않다. 이 <살로메>의 녹음기록도 EMI에서 진행한 스튜디오 레코딩을 제외한다면 지금 설명할 1977년 잘츠부르크 실황녹음밖에 남아 있지 않다. 그만큼 신중에 신중을 기울였다는 뜻일 텐데(그 덕에 <엘렉트라> 스튜디오 레코딩은 하나도 남기지 못했다) 그렇다면 이 연주는 이전의 연주들과 어떻게 다를까?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곡 중 가장 관능적이라 할 수 있는 이 오페라는 미끄러지듯 흐르는 목관의 C#단조로 시작한다. 카라얀은 빈 필의 소리에서 벨벳 천을 연상시키는 관능성을 최대한 이끌어내는 데 주력한다. 빈 필은 예의 자극적인 소리를 자제하고 뱀처럼 요염한 소리를 뽑아낸다. 나라보트의 비에스와프 오흐만은 딱히 두드러진다고 하기는 힘들지만 그래도 자기 역할에 충실하다. 항상 살로메를 바라보며 그녀의 요구를 결코 거절하지 못하는 역할 말이다. 병사 역할을 맡은 게르트 나인슈테트와 쿠르트 라이들도 안정감 있는 조역 역할에 충실하다. 중요한 것은 살로메 역을 맡은 힐데가르트 베흐렌스인데, 지금까지 카라얀의 ‘변태적인’ 캐스팅을 생각해 보았을 때 베흐렌스의 살로메는 이 관능적인 역할에 아주 잘 어울린다. 그녀는 유혹하는 목소리로 끊임없이 세례 요한을 바란다. 이에 반해 세례 요한 역의 호세 반 담은 영웅적이고 강인한 목소리를 통해 어떠한 세속적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을 ‘예언자’ 역할에 충실하려 노력한다. 그러나 반 담의 목소리는, 신성하다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세속적이다. 신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라기보다는 현세의 영웅을 연상시킨다.

세례 요한이 우물에서 나오면 살로메의 동기가 요동친다. 빈 필의 관현악은 요동친다기보다는 능란하게 움직인다. 세례 요한은 참회와 순수를 원하지만, 살로메는 그의 육체적 아름다움에 매혹된다. 여기서 호세 반 담은 제 역할을 아주 잘 해내는데, 그는 살로메를 굳건하게 뿌리친다. 반 담의 영웅적인 목소리가 여기서 빛을 발한다. 하지만 살로메는 포기하지 않고, 마침내 그의 입술을 원한다. 그 모습을 견디다 못한 나라보트는 결국 스스로 자기의 목숨을 끊는다. 요하난도 살로메도 그에게 시선을 돌리지 않는다. 살로메의 시선은 요하난에게, 요하난의 시선은 야훼에게 맞춰져 있다. 요하난은 관능적 유혹을 포기하지 않는 살로메에게 저주를 퍼붓지만, 그의 주위는 이미 살로메의 동기가 완전히 포위하고 있다. 결말은 정해져 있는 것이다.

베이스 클라리넷과 바순의 무거운 저음이 끝나면 오보에가 헤롯왕의 동기를 끌고 온다. 헤롯왕과 헤로디아스가 등장한다. 경박하고 불안한 독재자인 헤롯왕과 고압적인 헤로디아스 역할은 각각 카를 발터 뵘과 아그네스 발차가 맡았는데, 둘 다 극을 지배할 정도로 대단한 역량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각자 역할에 충실한 느낌이다(헤롯왕이 좀 더 변태적이었다면 좋지 않았을까?). 관현악처럼, 대부분의 가수들도 자기 역할에 충실한 선에 머무르는 것이다.

우물 밑에서 세례 요한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원래 성경에서는 세례 요한에 대한 헤로디아스의 증오가 가장 큰 파국의 원인이 되지만, 이 극의 중심은 살로메이며, 파국이 벌어지는 가장 큰 원인도 살로메의 소유욕에 맞춰져 있다. 유대인들의 교리적인 논쟁이 지나간 후(이 부분은 <짜라투스투라> 중 교조적인 느낌의 <학문을 위하여> 푸가 부분을 연상케 한다), 헤롯왕은 나사렛 예수에 대해 말하는 나사렛인들의 말을 듣는다. 이어 헤롯왕은 살로메에게 춤을 출 것을 명한다. 살로메는 묻는다. 자신이 춤을 추면 무슨 소원이든 들어줄 것이냐고. 헤롯왕은 그러마고 맹세한다. 일곱 베일의 춤이 시작된다. 연주 효과는 뛰어나지만 음악적인 측면에서는 과장이 지나쳐 높은 평가를 받지 못하는 이 <일곱 베일의 춤>은 항상 논쟁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빈 필이 연주하는 <일곱 베일의 춤>은 그 자체만으로도 화려하다. 카라얀이 지휘하는 슈트라우스 오페라의 가장 큰 장점인 명석함이 여기서 극에 달한다. 그 명석함이란 조였다 풀기를 반복하면서 클라이맥스에 도달하는 것이다. 곡에 대한 빼어난 통찰이 없다면 불가능한 경지다. 칼 뵘의 강공으로 무장한 일도양단의 직선적인 해석과는 정반대 편에 서 있는 셈이다.

춤이 끝나고 살로메는 헤롯왕의 품에 안겨 말한다. 은쟁반에 세례 요한의 머리를 담아 가져와 달라고. 그 순간 극히 불안정한 화성이 곡을 칭칭 옭아맨다. 헤롯왕은 어떻게든 실수를 만회하려고 하지만 살로메는 요지부동이다. 여기서 곡을 이끌어나가는 것은 가수들이 아니라 지휘자와 관현악이다. 가수들은 관현악에 기민하게 맞추어 제 역할을 해 나간다.

결국 헤롯왕은 살로메의 요구에 굴복해 세례 요한의 머리를 내준다. 관현악은 그 순간 무려 열두 개의 달하는 반음계를 포함한 패시지와 일곱 음짜리 화성을 동원하며 극한에 달한 감정 상태를 표현한다. 이 음은 해결을 요구하지만, 해결은 아주 늦게 이루어진다. 그 동안 살로메는 세례 요한의 목이 잘리는 것을 지켜본다.

은쟁반에 담긴 세례 요한의 목이 우물에서 올라온다. 살로메는 그 잘린 목을 들고 사랑의 희열에 빠져든다. 정말로 잘린 목을 사람 앞에 디미는 것 같은 연출과 음악이 아니면 이 오페라는 여기서 휘청거리게 되는데, 이 연주는 여기서도 함정을 잘 피해나간다. 헤롯왕은 파국이 눈앞에 있음을 알고 불을 끄게 한다. 무대 위의 모든 빛이 사라진다. 살로메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세례 요한의 입술에 입을 맞춘다. 이제 살로메의 동기는 달빛 아래 정점에 달한다. 헤롯왕은 돌아서서 그녀를 죽이라 명한다. 병사들이 방패로 살로메를 짓눌러 죽이면서 극은 막을 내린다.

이 연주의 주인공은 단연 지휘자와 오케스트라다. 시종일관 극을 지배하며 곡의 퇴폐적이고 다채로운 색감을 정교하게 뽑아낸다. 가수진 중에서는 주연인 베흐렌스와 세례 요한 역을 맡은 호세 반 담이 제일 두드러지며, 나머지 가수들은 자기 역할에 충실한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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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알프스 교향곡> Op.64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지휘)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연주

1987년 11월 1일 베를린 실황

슈트라우스는 1880년대 후반부터 꾸준히 대규모 관현악곡을 썼다. 이 일련의 관현악곡을 연대순으로 늘어놓으면, <알프스 교향곡>은 그 끝에 위치해 있다. <메타모르포젠>이 있기는 하지만 그 곡은 다른 관현악곡들과 무려 30년이나 떨어져 있기 때문에 일종의 에필로그로 보아도 무방하다.

<알프스 교향곡>은 슈트라우스 관현악곡의 마지막을 장식하듯 충분히 장대하다. 묘사적 표제음악인 이 관현악곡은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22개의 장면을 다루고 있으며, 4관 편성의 금관에 각종 타악기는 물론, 윈드머신이나 썬더머신까지 동원하여 대규모 관현악을 다루는 작곡가의 재능을 과시한다. 그러나 곡의 흐름은 슈트라우스가 자주 보여주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신비스러운 배경에서 곡의 중심이 되는 장소가 출현하고, 음악의 흐름은 즐거운 절정으로 상승한다. 그러나 절정은 결코 길지 않다. 폭풍우가 몰아치고 등산객들은 하산한다. 그리고 곡은 출발점인 신비스러운 밤으로 다시 돌아간다.

1930년대 이래 슈트라우스와 인연을 맺으며 지속적으로 의견을 교환했던 카라얀은 슈트라우스 관현악곡 연주에 있어 독보적인 위치를 구축했지만, 유독 <알프스 교향곡>만은 자주 연주하지 않았다. 슈트라우스처럼, 카라얀도 자신의 장대한 디스코그라피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곡으로 <알프스 교향곡>을 꼽았던 게 아닌가 싶다. 아무튼 1980년에 스튜디오 레코딩을 완성한 후, 카라얀은 이 곡의 실황 녹음을 4종 남겼다. 이 연주는 그 4종의 실황 중 마지막 실황녹음이다. 당시 카라얀은 79세였고 여러모로 지친 기색이 역력한 상태였다. 그런데 이 연주에서는 그 지친 기색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재미있다.

템포는 스튜디오 레코딩보다 약간 느리다. 느리기보다는 여유가 있다고 보는 편이 맞을 것이다. 70년대 이후 카라얀은 음향을 한 덩어리로 만들어 거기에서 특정 악기를 두드러지게 만드는 편을 애호했는데, 그 음향이 일출 장면에서 혼연일체를 이루어 알프스의 준봉을 그려낸다. 그런데 일출 직전에 뜬금없이 북의 타격이 들린다. 사소한 실수로 보인다.

이 연주는 여러모로 대조적인 관점을 보여주는 뵘(DG)-켐페(EMI)의 드레스덴 연주와 비교하는 것이 재미있는데, 지나치게 소박하다 못해 촌스럽게 들리는 뵘이나 켐페의 연주와는 달리 카라얀은 세밀화가로서의 자신의 재능을 맘껏 발산하고 있다. 켐페는 목가적인 호른에 약음기를 적용해 멀리서 울리는 것 같은 효과를 채택했는데, 카라얀은 그 호른이 전면에 나와 들리는 것 같다. 그리고 그 직후 호른의 프레이징을 전면에 끌어내는 것은 켐페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다.

카라얀의 연주는 특정 악기가 두드러지는 부분에서는 템포가 느려지고, 총주 부분에서는 템포가 빨라지는 경향을 찾을 수 있는데, 특히 초반에 숲으로 진입하는 장면이나 폭풍우가 시작하는 부분에서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 실황 녹음이다보니 타악기가 조금 더 두드러지는 것도 특징이다.

정상 장면부터 지휘자는 엄청난 물량 공세를 보여준다. 세부적인 음향까지 치밀하게 다듬는 것은 본인의 스튜디오 녹음이나 비쉬코프보다 조금 처지지만(해적반 실황이라 그렇게 들릴 수도 있다) 그만큼 압도적인 음압을 보여준다. 굳이 비교하자면 하이팅크(LSO)와 꼽을 수 있겠는데, 하이팅크가 좀 더 저돌적이고 직설적이라면 카라얀은 좀 더 관현악을 능수능란하게 다룬다.

정상의 즐거운 비경이 끝나고, 안개가 점점 밀려든다. 이 부분에서 카라얀은 저현과 바순의 프레이징 하나하나를 강조해서(켐페는 이 부분을 그냥 지나친다) 스멀스멀 밀려드는 기분을 잘 표현하고 있다. ‘상승’이 ‘하강’으로 바뀌면서 곡의 주된 테마도 단조로 바뀐다. 불길한 분위기가 대기를 가득 채운다. 오보에의 지속적인 단음이 안개 속에 숨어 보이지 않는 새소리처럼 들려온다. 피콜로의 고음 아포지아투라가 들려오고 팀파니가 멀리서 천둥소리를 낸다. 폭풍우가 밀려온다.

트럼펫의 재등장과 팀파니의 첫 번째 강주에서 카라얀은 템포를 두 배 이상으로 느리게 해 타격감을 끝까지 밀고나간다. 폭풍우 장면이 여러모로 이 연주의 하이라이트인데, 처음에는 템포를 느리게 가져갔다가 관현악 전체의 첫 번째 투티가 있고 난 후에는 템포를 원래대로 회복하고, 두 번째 팀파니 타격 이후에는 아주 빠르게 템포를 가져간다. 실황 녹음인 만큼 조금 더 급박하며, 특히 팀파니와 큰북의 타격감이 아주 일품이다(템포는 다시 원래대로 돌아온다). 금관악기 중에서는 튜바가 두드러지는데, 튜바가 폭풍우 장면을 마무리 짓는 상승 음계를 두 번 연주한다는 사실을 이 연주를 듣고 처음 알았다(켐페는 튜바의 처음 제시를 두드러지지 않게 처리하기 때문이다). 폭풍우가 끝난 순간의 팀파니 처리는 대부분의 연주가 약주로 처리하고, 카라얀도 이 노선을 따르고 있다. 이 부분을 강주로 처리한 연주는 네메 야르비의 실황 연주 말고는 들어본 적이 없다.

폭풍우는 그치고, 현악기는 구름을 뚫고 다시 내리쬐는 햇살을 묘사한다. 멀리서 소박한 호른과 오르간이 들려온다. 한적한 교회당이 있는 시골 마을로 내려온 것이다. 아쉬운 것은 녹음 때문인지 오르간이 아주 불투명하게 들린다는 점이다. 정식 실황 녹음이 아니라 먼 곳에 위치한 악기까지 세밀하게 잡지는 못하는 것 같다.

마지막 하산길의 템포는 아주 느긋하다. 현악기의 프레이징은 눈치채기 힘들게 서서히 장조에서 단조로 바뀐다. 신비스러운 정적이 다시 밤을 몰고 온다. 처음 곡을 열었던 B♭음의 페달 포인트 위에서 곡은 B♭단조에 안착하며 끝난다.

이 연주에서 유일하게 불만인 점은 매우 탁한 해상도다. 그것만 없다면 만족스럽게 감상할 수 있는 실황 녹음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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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향곡 9번 D단조 <합창> Op.125

영어 : Symphony No.9 in D minor, Op.125 "Choral"

 

작곡 시기 : 1790년대부터 '환희에 붙임' 작곡을 구상. 1818년에 초고를 쓴 후, 1822년에 본격적으로 시작해서 1824년 초 완성

작곡 장소 : 빈

초연 : 1824년 5월 7일, 빈의 케른트너토어 극장에서 베토벤 자신의 지휘, 실질적인 지휘는 미하일 움라우프가 했다. 독창은 헨리에테 존탁(소프라노), 카롤리네 웅거(알토), 안톤 하이칭거(테너), 자이베르트(베이스).

출판 : 1826년

헌정자 :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

악기 편성 : 피콜로(4악장), 플루트 2, 오보에 2, 클라리넷 2(B♭, C, A), 바순 2, 콘트라바순(4악장), 호른 4(D, B♭, B♭ Bass, E♭), 트럼펫 2(D, B♭), 트롬본 3(알토, 테너, 베이스. 2악장과 4악장), 팀파니, 트라이앵글(4악장), 심벌즈(4악장), 큰북(4악장), 현악 5부 / 4악장에서 소프라노, 알토, 테너, 바리톤 독창과 혼성 4부 합창 참여(테너는 1과 2로 나뉘는 부분 있음)

 

개설

이 곡에는 「실러의 송가 '환희에 부침'에 의한 끝 악장에 합창을 담고 있다」고 적혀 있다. 따라서 이 곡은 《합창》 또는 《합창 붙음》이라고 불리는 경우가 많다. 당시까지 고전적인 교향곡에는 성악을 전혀 갖지 않았는데 이 곡에서 처음으로 네 사람의 독창자와 혼성 합창단을 이용한 것이다. 또한 제4악장은 실러(1759~1805)의 「환희에 부친다」 송가의 구절을 가사로 사용하고 있다. 베토벤은 본래 이 실러의 송가 전체에 음악을 붙였던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에 드는 부분을 골라 사용하였다.

이 실러의 송가는 프랑스 혁명 직전인 1785년 드레스덴에서 만든 것으로 독창과 합창을 교대로 부르게 되어 있다. 당시 26세의 청년 실러는 독일의 봉건적 정치 형태와 전제적인 군주제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었다. 이 시에서 그는 인류애와 수백만 명의 단결에 의한 인강 해방의 이상을 소리 높여 노래하였다. 실러는 처음에는 이 시에 「자유에 부침」이라는 제목을 붙이려고 했지만, 엄격한 검열 때문에 '자유'를 '환희'로 고쳤다고 한다. 이 송가는 당시 청년이나 지식인 사이에서 널리 사랑받고 있었다.

이후 프랑스 혁명, 나폴레옹의 출현이라는 대사건이 일어나고, 베토벤도 나폴레옹이 옛 전제 군주제를 무너뜨리고 새롭고 민주적인 세계를 만들어나가는 것이라 생각했고, 그에게 호감을 갖기도 했다. 이런 성격의 베토벤이 실러의 송가를 마음에 들어 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베토벤이 이 송가에 관심을 갖게끔 한 사람은 당시 본 대학에서 강의를 했던 젊은 시인으로, 실러 부부와 친분이 있는 루트비히 피체니히(1768~1831)였다. 베토벤은 1792년 빈으로 옮겨오기 한 달 전쯤에 이 피체니히와 친해지게 된다. 그리고 1793년 1월 27일 실러의 아내 샬로테에게 보낸 편지에서, 피체니히는 베토벤이 실러의 「환희」의 각 장에 음악을 붙일 계획을 세웠다고 알리고 있다.

이에 앞서 《교향곡 제9번》과 매우 밀접한 연관을 지닌 것으로 1790년 9월부터 10월에 걸쳐 작곡한 《레오폴드 2세 대관식을 위한 칸타타》가 있다. 그 마지믹 제4악장의 합창에 「엎드려라, 수백만의 사람들이여」(Stürzet nieder Millionen) 부분이 등장한다. 이와 유사한 가사가 실러의 송가에도 나온다(Ihr stürzt nieder, Millionen?). 이 칸타타는 실러가 아니라 아벨동크의 시를 바탕으로 한 것이지만 이 부분에서의 성악과 관현악 처리에도 《교향곡 제9번》을 연상케 하는 측면이 있다.

《교향곡 제9번》 제4악장의 유명한 「환희의 주제」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근원을 찾는 문제는 간단하지 않다. 그러나 거기에는 1794년 또는 1795년 초에 씌어진 가곡 《사랑받지 못하는 이의 탄식》(Seufzer eines Ungeliebter)과 《서로 사랑함》(Gegenliebe)의 부분이 발견된다. 이 가사는 뷔르거(1749~1795)가 쓴 것으로, 사상적으로는 실러의 것과 관계가 없다. 또한 이 선율은 1808년 완성된 《합창 환상곡》 Op.80의 노래 주제로 다시 사용된다.

1812년이 되면 「환희의 주제」를 위한 또다른 스케치가 나타난다. 이것은 3/4박자의 것으로 첫째박에만 선율음을 두고, 둘째박과 셋째박을 쉼표 처리한 것이다. 또한, 1822년에는 4/4박자의 현재의 것과 동일한 선율이 스케치 노트에 등장한다. ’환희의 주제‘는 한 때 열광적인 환희 대신 비장한 느낌의 주제를 쓰려고 한 적이 있지만, 결국 우리가 잘 아는 ’환희의 주제‘가 채택되었고, 쓰려고 했던 주제는 대신 현악 4중주 Op.132 의 마지막 악장에 들어갔다. 이처럼 제4악장의 가사와 주제만 놓고 보더라도 《교향곡 제9번》이 완성되기까지 작곡에 걸린 기간은 매우 길다. 다른 악장의 경우 1809년의 스케치에서 처음으로 현재의 제1악장 첫머리의 복안이 씌어져 있는 것이 발견된다. 1811년과 1812년경에는 《D단조 교향곡》이라는 필적이 있으며, 1812년 5월 말의 편지에는 「지금 3곡의 교향곡을 작곡하고 있으며, 한 곡은 이미 완성하였다」고 적혀 있다. 이 3곡은 교향곡 제7번과 제8번, 그리고 제9번 D단조 교향곡이다.

1815년은 빈 회의가 열린 해이며, 베토벤 개인적으로도 영광의 해라고 할 수 있다. 스케치 노트에서는 현재의 《교향곡 제9번》 제2악장의 스케르초 주제가 발견된다. 또한 1817년 9월경부터 1818년 5월경까지의 스케치 노트에서는 현재의 제1악장의 대체적인 윤곽과 전체의 구상도 발견된다. 1818년에는 교향곡에 옛 조성을 지닌 종교적인 노래를 도입하는 것 때문에 고민하며, 마지막 악장이나 아다지오에 노래를 삽입하기로 한다. 즉, 아다지오에는 그리스의 종교적이며 신비한 가사(Cantique Ecclesiastique)를, 마지막 악장인 알레그로에는 바쿠스의 제전을 배치하려고 한다. 그 무렵 베토벤은 2곡의 교향곡을 쓰려고 계획하고 있었으므로 어느 곡에 성악을 도입하려 했는지 단정할 수는 없다.

이 1817년부터 1818년까지 베토벤은 개인적으로 행복하지 못한 상태였다. 귓병에 대해서는 완전히 체념 상태였으며, 몸도 좋지 않아 기관지와 장 때문에 고생하고 있었다. 더구나 베토벤을 둘러싼 빈의 음악계는 심원한 음악을 반기지 않는 분위기였으며, 정치적으로도 메테르니히의 철권보수 반동체제를 확립하여 자유주의가 승리하기를 기대하던 시민들을 억압하는 방향으로 나가고 있었다. 베토벤은 이런 상황을 참을 수 없었다. 또한 조카인 카를을 돌봐야 하는 문제도 있었다. 점점 불량해지는 카를에 대해 피붙이로서의 애정을 쏟으며, 품행이 좋지 않은 카를의 어머니와 카를의 양육을 둘러싸고 재판까지 벌이는 사태에 이르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베토벤의 창작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것은 당연하였으며, 작품 하나를 완성하는 데 의외로 시간이 많이 걸렸다. 그 가운데 남모르게 진척시키고 있었던 것이 《교향곡 제9번》의 1악장이었다. 이 악장의 커다란 스케일과 투쟁적 특성, 고투하는 모습은 당시 베토벤이 겪던 어려움을 이해할 때만 납득할 수 있을 것이다.

병마와 육체적 피로, 마음의 아픔과 같은 악조건에 둘러싸인 베토벤에게 1818년 영국으로부터 최신식 브로드우드 피아노가 기증되었고, 이를 계기로 베토벤의 피아노 음악에 대한 의욕이 다시 타오르게 된다. 또한 그해 가을에는 마음에 들지 않는 빈을 벗어나 이전부터 있었던 초청을 받아들여 런던의 필하모니 협회에서 교향곡을 초연하려는 계획도 진척시키고 있었다(그러나 이것은 실현되지 못했다). 또한 이 시기에는 《장엄 미사》(미사 솔렘니스)의 작곡에도 본격적으로 착수하였다. 이처럼 1818년 초여름에 베토벤은 창작의 힘을 되찾았다. 그리고 런던 필하모니 협회로부터 두 곡의 교향곡을 작곡해달라는 의뢰도 받는다. 앞서 말한 두 곡의 교향곡 작곡 계획은 이와 연관된 것이다. 베토벤은 한 곡은 기악만으로, 다른 한 곡은 성악을 함께 사용한 곡을 쓰려고 했다. 그러나 구체적인 사항은 알려져 있지 않다.

《장엄 미사》는 원래 루돌프 대공의 대주교 취임을 위한 곡이었으며, 예정보다 2년 정도 늦어진 1822년에 완성되었다. 베토벤은 자신의 마음을 충족시키는 평화와 세계의 안녕을 기원하면서 이 곡을 열심히 썼으며, 피아노 소나타로 기분을 전환하는 것 외에는 다른 대곡에 눈을 돌리지 않았다. 이렇게 대곡 미사가 완성되자 중단했던 교향곡 작곡에도 눈을 돌릴 수 있게 되었다. 런던에 있던 제자 리스에게 새로운 교향곡의 작곡료 등에 대해 필하모니 협회와 다시 이야기를 진척시키라는 편지를 쓰기도 했다. 그 결과 런던의 이 협회는 1822년 11월 작곡료를 결정하였고 베토벤도 이것을 받아들인다.

베토벤은 그때까지 구상하고 있던 《D단조 교향곡》을 협회를 위해 진행시키기로 하고 기악만 사용한 교향곡으로 작업하게 된다. 그러나 합창을 덧붙인다는 아이디어도 버린 것은 아니어서, 또다른 「독일 교향곡」이라는 작품에 합창을 삽입할 예정이었다. 이것은 당시 민족 의식의 고양이라는 흐름에서 독일인으로서의 자각에 입각하여 계획된 것으로, 그 마지막 악장에 실러의 「환희의 부침」에 토대를 두고 전체의 클라이맥스를 구축하려는 구상을 정리하고 있었다. D단조 교향곡 제3악장은 바덴의 자연 속에서 작곡되었다. 이 악장에 안정되고 따스한 분위기가 감도는 것은 바로 그런 환경 탓이었다.

베토벤은 이 두 교향곡을 함께 작곡할 예정이었으나 결국 아이디어를 하나로 합쳐 하나의 교향곡을 쓰기로 계획을 바꾸게 된다. 현재의 《교향곡 제9번》은 이렇게 탄생하게 되었다.

전곡은 1824년 2월에 완성되며, 역사적인 초연은 빈의 케른트너토어의 궁정극장에서 이루어졌다. 곡이 끝났을 때, 완전히 귀가 들리지 않았던 베토벤은 알토 독창자가 알려주어 간신히 청중의 박수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는 에피소드가 전해진다.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이 연주회에서 돌아온 수입은 예상 외로 적었다고 한다.

이 《교향곡 제9번》은 확실히 베토벤의 위대한 산물이다. 베토벤은 《장엄 미사》에서 자신의 내적인 평안과 외적인 평화를 기원하였고, 마지막 곡 <아뉴스 데이>에서는 내적인 평안은 확실하였지만 외적인 평화에 대해서는 스케치나 초고에 나타나 있지 않다. 그것을 보충하는, 또는 완결짓는 것이 바로 이 교향곡이다. 모든 인류가 함께 실현시켜야 할 평화를 이상주의적으로 노래한 것이다. 또한 베토벤의 신념이었던 「고뇌를 통한 환희」라는 말은 그대로 이 교향곡 작곡 과정에서도, 그리고 곡 자체의 진취적인 자세에서도 확실히 부각되어 있다. 오스트리아를 지배하고 있던 불온한 반동정치도 베토벤에 의해 불멸의 예술 작품으로 귀결되었다.

4악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고뇌를 통한 환희」라는 주제를 놓고 볼 때, 앞의 세 개의 악장은 제4악장의 전제로 놓여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마지막 악장에서 음악적으로나 내용적으로 앞의 세 개의 악장을 총괄하는 새로운 방법이 사용되고 있다. 아울러 제1악장의 기대감을 불러일으키는 공허한 시작 방법, 충실하고 장대한 코다, 제2악장 스케르초에서의 소나타 형식과 푸가토를 혼용하는 대규모의 구성법, 제3악장의 두 개의 주제를 지닌 변주곡이면서도 자유롭게 정돈된 방법, 그리고 마지막 악장에서의 변주에 기반을 둔 자유로운 형식, 이 모든 것은 그때까지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런 여러 가지 특징은 후대 작곡가들에게 끊임없이 큰 영향을 주었다. 악기 편성에서도 종래의 교향곡보다 수준이 높으며, 타악기 종류도 늘어나 있다.

9번 교향곡의 위대한 점 중 하나는, 이토록 오랫동안의 구상을 거쳐 만들어진 곡이 하나의 실로 짠 직물처럼 완벽한 자기완결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이 말은 1악장부터 3악장까지는 들어맞지만, 4악장까지 꼭 들어맞는 것은 아니다. 4악장에 구조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베르디도 4악장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었다. 반면 바그너는 4악장을 가장 위대한 음악으로 보았다. 4악장이 가장 위대한 음악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4악장의 축인 <환희의 주제>가 가장 위대한 주제인 것은 여심의 여지가 없다.

초연 이후, 곡은 빠르게 사람들의 기억에서 지워지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1830년대에 이 곡을 지속적으로 연주한 도시가 있었으니 바로 파리. 이윽고 18세기 중반에 이르러 바그너를 비롯한 지휘자들이 이 곡을 자주 연주하면서 이 곡은 오케스트라의 정규 레퍼토리로 자리 잡는다. 확실히 이 곡의 난이도는 그렇게 쉽지 않다. 그렇기에 레퍼토리로 자리 잡는데 오랜 세월이 걸린 것이다. 지휘자들은 이 곡이 강조하는 주제를 보강한다는 차원에서 편성을 계속 추가했다. 더블링은 필수적인 관례로 자리 잡았다. 20세기 중반에 들어 이 곡은 나치의 선전용 음악과 같은 수준으로 떨어지는 비극을 맞이했다. 그러나 이후의 사람들은 이 곡의 비극적인 오용을 지워내고 원래의 위치에 올려놓기 위해 애를 썼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을 때 번스타인이 이 곡의 가사를 <환희>에서 <자유>로 바꿔 연주한 것은 그 노력의 일환이다.

 

 

Posted by 여엉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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