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의 불안감과 함께 이어지는 3막 1장이 끝나면, 보체크와 마리가 함께 걷는 2장으로 이어진다. 오케스트라는 각각의 옥타브에서 B음을 연주한다. 정묘한 12음 음악이 B음을 감추었다가 드러내기를 반복한다. 두 사람은 서로 달을 쳐다보면서 말한다. "달이 뜰 때는 붉은 색이네요(마리)." "피가 묻은 낫 같아(보체크)." 보체크는 그 말과 함께 무신경한 동작으로 칼을 꺼낸다. 팀파니의 불길한 리듬과 함께 보체크는 마리의 비명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를 찔러 죽인다. 오케스트라는 잠시 불길한 음표를 연주하는 듯 싶더니 이내 잠잠한 풍경을 연주하던 부드러운 음악으로 돌아간다. 보체크는 성급히 그 자리를 뜬다. 그러나 보체크가 자리를 뜨는 순간, 보체크의 광기, 죽은 마리의 원념, 온갖 고통, 집착, 그리고 인간성의 한계에 부딪친 안타까운 비명 소리 같이 부정적인 에너지들이 뭉치고 또 뭉쳐 B음을 중심으로 한 거대한 음향 덩어리를 만들어낸다. 이 음향은 도저히 참을 수 없을 정도로 크게 크레셴도하며 팀파니의 '죽음의 리듬'에 의해 중단, 아니, 더 커지는 계기를 통해 극한에 도달하면서 보체크를 뒤쫓아간다.

마치 영화에서 장면의 급속한 전환을 보는 것처럼, 장면은 호숫가에서 술집으로 넘어간다. 조율이 어긋난 업라이트 피아노의 폴카 소리에 맞추어 가난한 사람들이 술집에서 저녁의 짤막한 여흥을 즐기고 있다. 보체크는 손에 피가 묻은 줄도 모른 채 자리에 앉는다. 하지만 파멸은 이미 문 앞까지 와 있다. 팀파니의 '죽음의 리듬'이 폴카 사이에 끼어드는 것을 듣는 순간, 우리는 보체크의 사회적 생명이 이미 끝나 버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그것은 잦은 학대, 그리고 정신적 고통을 대가로 얻어낸 쥐꼬리만한 봉급일 뿐이지만.

마르가레트는 보체크의 손에 묻은 피를 발견한다. 사람들은 춤을 추다 말고 보체크의 손에 묻은 피를 발견하면서 그를 살인자라고 비난한다. 그에게서 사람고기 냄새가 난다며 그를 비난한다. 이제 보체크는 거대한 음향 덩어리가 자신을 쫓아갔던 그 장소, 자신이 마리를 죽인 그 장소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

호숫가로 돌아온 보체크는 이미 죽어 넘어진 마리를 다시 발견한다. 이 때부터 보체크의 모든 단어는 '칼'과 연관되어 있다. 마리가 대수롭지 않게 언급했을 때부터 그의 머릿속에 강박관념처럼 박혀 있던 '칼(Messer)!' 그는 마리의 목에서 흐르는 피를 보고 붉은 끈이라 말한다. 붉은 끈은 유죄판결을 받은 이의 증표. 보체크는 마리의 죄를 확신하고 있다. 그녀가 자신을 배신하고 간통했다고 확신한다. 미쳐버린 자에게 더 이상 물증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자신이 그렇게 믿고 있다는 것만이 가장 중요할 뿐이다. 아마 보체크는 마리가 간통을 저지르지 않았어도 그것을 확신했을 것이다.

 이제 대사는 셰익스피어의 잔혹한 비극 <맥베스>와 비슷해진다. 맥베스는 씻으면 씻을수록 자신의 손은 물론이고 온 세상의 물이 새빨간 피로 물드는 고통스러운 느낌에서 절대 벗어날 수 없다. 보체크도 마찬가지다. 그는 자신의 몸을 깨끗이 정화하기 위해 물로 뛰어든다. 오케스트라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단지 깨끗하고 조용한 풍경 묘사에 집중할 뿐이다. 의사와 대위가 그 주변을 지나간다. 두 사람은 보체크와 전혀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들 같다. 두 사람은 호수에서 이상한 것이 느껴진다, 호수에서 두려운 것이 느껴진다와 같이 시덥잖은 이야기만 하다가 지나갈 뿐이다. 의사와 대위의 세계, 그리고 보체크와 마리의 세계는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 

 이제 무대와 가수 대신 오케스트라가 활약할 차례가 나타난다. 3막을 이루는 여섯 개의 인벤션 중 다섯 번째 인벤션, 오직 관현악으로 이루어진 인벤션이 나타난다. 작곡가는 이 인벤션을 "이제 무대 위에서 벌어지는 연극적 행동의 바깥으로 나선 작가의 고백……대표자들, 청중들을 향한 인류에의 호소문"이라고 불렀다. 알반 베르크는 이 오페라가 보체크와 마리, 그리고 그 두 사람을 둘러싼 특수한 세계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인류 전체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보편적인 이야기임을 확신하면서 그 두 가지를 잇는 위대한 연결구를 만들었다. 권위에 의한 폭력에 노출된 '보통 사람'의 고통은 모두가 겪었고, 지금도 겪고 있으며, 나중에도 겪을 것이다. 그것을 하나로 묶는 이 D단조의 인벤션이 말러풍의 교향악적 아다지오라는 사실은 참으로 재미있다. 작곡가는 1908~9년에 썼던 소나타 스케치를 여기서 재활용했다.

 극은 여기서 끝나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그러나 극은 마지막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끝난다. 많은 사람들이 전혀 예상치 못했지만 반드시 언급하고 지나가야 할 이야기, 바로 보체크와 마리의 아이 이야기다. 보체크와 마리의 아이는 자기 엄마 아빠가 죽은 줄도 모르고 목마를 타면서 놀고 있다. 하지만 곧 아이들이 달려와 자기 엄마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아이는 순간적으로 굳어버리지만, 계속 말을 타고 있다. 아이들에게 아빠와 엄마는 자기 세계의 거의 전부나 다름 없다. 자기 세계가 무너져 버렸다는 사실을 어떤 아이가 그대로 받아들이고 싶어할까?

 아이들에게 마리의 죽음은 무섭지만 새롭고 흥미로운 '사건'일 뿐이다. 아이들은 그 '사건'을 구경하기 위해 뛰쳐나간다. 마리의 아이만이 여전히 말을 타고 있다. 하지만 아이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곧 다른 아이들을 따라나선다. 다른 아이들이 '사건'이라고만 생각하는 현실을 받아들이기 위해. 아이가 떠나고 흔들거리는 목마의 움직임에 맞추어 G장조의 윤곽이 드러나는 화음이 흔들거리다가 멈춘다. 목마도 움직임을 멈춘다.

 아이는 어떻게 될까? 베르크는 아이에 대한 잔인한 결론을 내렸다. 코다는 오페라의 시작 부분과 이어져 있다고. 아이는 보체크의 인생을 그대로 물려받게 될 것이다. 아니, 어쩌면 다른 결론을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보다 더 비참하게 죽어가거나, 아니면 아버지와 어머니의 기억이 없는 다른 공간으로 떠나거나.

 

 참고자료

- 게오르크 뷔히너 원작, 알반 베르크 편집. 오페라 <보체크> 대본 한국어 번역본.

- 알렉스 노스 <나머지는 소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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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여름부터 슈트라우스는 현악기 연주자를 위한 추도의 의미가 담긴 곡을 쓰기 시작했다. 슈트라우스는 이 곡에 <메타모르포젠Metamorphosen>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이 제목은 오비디우스의 유명한 <변신 이야기Metamorphoses>를 떠올리게 한다. 신화의 이야기는 그 껍데기를 벗겨놓고 보면 인간의 이야기, 곧 이름만 바꾸면 너 자신의 이야기Mutato nomine, de te fabula narratur가 된다. 티모시 잭슨이 이 곡에 관해 주장하듯 ‘부정적인 변신, 사물을 원초적인 상태로 돌려놓는 해체’인 셈이다. 시대에 초연한 듯, 시대에 영향 받지 않는 듯 보이는 이 영광과 오욕의 작곡가는 <카프리치오>를 쓸 때 그랬듯이 유럽 세계를 휩쓸고 있는 광기와 자신은 무관한 듯 펜을 놀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이 곡은 한 시대를 매장하고 있다. 1933년에서 1945년에 걸친 ‘진정한 20세기’를 매장하는 데 이 곡보다 적절한 곡은 없다. 이 곡은 한 시대의 껍데기를 벗겨내고 얻어낸 진정한 ‘해체’의 음악이다.

작곡가는 괴테의 유명한 문장에서 작곡의 힌트를 얻었다고 한다. 그는 그 문장을 베꼈다. ‘아무도 자신을 알 수 없다. 자신에게서 초연해지라.’ 슈트라우스는 젊었을 적 니체에 탐닉했던 것에서 알 수 있듯이 19세기 후반을 휩쓴 개인주의 철학에 평생 경도되었다. 이제 와서 그 흐름에서 발을 빼기에는 너무나 많은 날들이 지나갔다. 세상 사람들은 어느 누구든지 모든 것을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심지어 자기 자신조차도. 이 곡은 불가지不可知, 불식不識에 대한 음악이다.

슈트라우스가 곡을 쓰고 있는 동안 연합군은 독일의 도시들을 무차별 폭격했다. 마치 독일이 그동안 저지른 죄악에 대한 징벌인양, 폭격은 도시들을 이 세상에서 없던 것처럼 만들 기세였다. 가르미슈에 있는 슈트라우스는 그 사실에 초연할 수 없었다. 잿더미가 되어버린 드레스덴을 포함한 도시의 기억들이 이 곡에 녹아들어 있다. 그것은 슈트라우스가 한 때 독일 음악계를 더 좋게 만들어줄 것이라 생각하며 지지했던 인물, 아돌프 히틀러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히틀러는 항상 자신의 최후가 <신들의 황혼>의 장대한 피날레나 <파르지팔>의 초월적인 피날레가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지만, 그의 마지막 순간에 그를 따라간 것은 어쩌면 참혹한 폐허의 음악인 이 <메타모르포젠>인지도 모른다. 이 음악은 무너지는 바빌론 성읍을 휘감고 도는 마지막 비가, 폐허와 파괴를 상징하는 추도사다.

슈트라우스는 곡에 ‘스물 세 개의 현악기를 위한 습작’이라는 부제를 붙였다. 1945년 4월 12일, 곡을 완성한 날 바다 건너 미대륙에서는 프랭클랜 델러노 루즈벨트가 세상을 떠났다. 참 기묘한 일치지만 넘어가도록 하자.

곡은 처음부터 구불구불한 반음계를 지나간다.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짓뭉개진 반음계가 짙은 비애감을 더한다. 화성의 바탕은 슈트라우스 특유의 안정감 있는 화음을 취하지만 그 화음을 지나가는 선율은 이보다 더 불안정할 수 없다. 하강 음형과 대위 선율이 점점 얽히며 중간부를 향해 고통스럽게 나아간다. 중간부에서 곡은 계속해서 위안을 주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매 단계마다 지속적으로 위안의 감정은 스르르 빠져나가고 절망에 가득 찬 주제가 다시 밀려온다. 음악은 점점 고음으로 올라가고, 비올라와 첼로는 수많은 망령에게 붙잡힌 채 마지막 희망을 잡으려 몸부림친다. 마침내 두 악기는 다른 악기들을 떨쳐내고 고음의 G음에서 그 희망을 붙잡는 듯 보인다. 그러나 그 희망은 오히려 죽음의 조성인 C단조, 베토벤이 장송 행진곡에서 사용했던 그 조성으로 악기들을 무자비하게 끌고 들어간다. 사실 C단조는 이곡의 바탕이었으며, 우리는 처음부터 거기서 벗어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슈트라우스는 베토벤을 인용한다. 베토벤의 장송행진곡이 들려오는 것으로 보아 슈트라우스는 자신이 생각하는 위대한 인물을 관대 위에 올려놓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 인물은 누구일까? 그가 순진하게 믿어버린 히틀러일까? 아니면 슈트라우스 자신일까? 아니면 추상적인 인물형일까? 아니면 파괴된 독일의 도시들일까? 장송행진곡 선율은 도무지 해답을 던져주지 않는다. 우리는 제3제국이 오래 전에 끝나버린 신들의 망령을 붙잡고 있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 현장 한복판에서 슈트라우스는 관대 위에 안치된 인물을 보고 있다. 베토벤의 장송행진곡 선율이 점점 흩어지고 슈트라우스의 고통스러운 선율도 점점 흩어진다. 그 과정에서도 목을 조르는 듯한 고통스러운 음향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밑바닥에 도달해서도 곡은 계속 밑으로 떨어진다. 거짓 희망을 상징하던 G음, 그리고 곡의 근원인 C음이다. <짜라투스투라>를 시작하는 C음과 G음을 정반대로 내려가는 것이다. 슈트라우스는 <엘렉트라>를 포함한 많은 곡에서 <짜라투스투라>를 연상케 하는 화성과 멜로디를 사용했지만, 그 곡을 원초적인 상태로 되돌려놓은 적은 없었다. 사물을 원형으로 ‘해체’하면서 곡을 끝내는 것이다.

카라얀은 이 곡의 공식 스튜디오 녹음을 세 개 남겼다. 빈 필과 함께한 47년 EMI 녹음은 패전 직후 카라얀의 절박한 심경을 그대로 반영한 음반이지만, 역시 베를린 필과 녹음한 DG의 69년 음반을 빼놓고는 이 곡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 몽롱한 음향 속에서 연주자는 무너져버린 45년의 폐허를 생각하는 것처럼 보인다. 카라얀은 곡에서 해체나 철학에 대해서는 별반 생각하지 않는다. 그가 이 곡을 통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바빌론의 폐허, “무너졌다! 바빌론 성읍이 무너졌다! 자기 음행 때문에 분노의 포도주를 모든 민족에게 마시게 한 바빌론이 무너졌다!(묵시록 14:8)”라고 외치는, 고통스러운 묵시록적 기억이다. 우리는 연주에 대해 도덕적인 판단을 내리기 힘듦을 잘 알고 있다. 카라얀의 목표는 바빌론의 폐허를 우리 눈앞에 생생하게 보여주는 것, 그리고 그 색채를 뼈저리게 재현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이상한 아름다움이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순수한 음향만으로 타인을 압도할 수 있는 유일한 지휘자가 들려주는 이 레코딩에서는 신성한 광기마저 느껴진다.

시노폴리와 드레스덴의 94년 DG 레코딩은 카라얀에 비해 무겁고 둔중해 보인다. 무게추를 저현인 첼로에 두어 색채가 좀 더 칙칙하고 어둡다. 곡에 대해 보편적으로 가질 수 있는 인상을 짚어내는 카라얀과는 달리 시노폴리는 주관적이고 내면적이다. 내면은 격정적으로 요동치고 있는데 외면은 별반 움직임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갑작스러운 외면의 변화는 처음 듣는 사람에게는 뜬금없이 들릴 수 있겠지만 그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납득이 간다. 하지만 그것은 주관적이기에 공통적인 결론을 내릴 수 없다. 결국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셈이다. 시노폴리는 우리에게 그 어떤 것으로도 이해할 수 없는 불가지가 있음을 넌지시 암시한다.

사물을 ‘해체’한다는 관점에서 볼 때 파비오 루이지와 드레스덴의 07년 소니 레코딩과 비교할 대상은 찾기 힘들다. 루이지는 무거운 느낌의 시노폴리에 비해 훨씬 가볍고 산뜻한 음향을 들려주며, 악기의 음향을 넓게 퍼뜨려 몽롱한 상태로 끌고 가는 카라얀과는 달리 개개의 악기군이 하나처럼 들리는 선명한 음향으로 일관한다. 그런데 그 선명하고 산뜻한 음향은 아름다움이 아니라 오히려 해체의 미학을 설파하는 것 같다. 포정해우庖丁解牛라는 말이 있다. 포정이라는 도축업자가 소를 해체하는 것이 아주 자연스러워 살점을 전혀 상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루이지는 이 곡을 너무도 자연스럽게 해체해 듣는 사람이 저절로 감탄하게 된다. 그러나 곡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필수적인 비감은 조금 부족하다는 비판도 성립할 수 있다. 감동을 받기 위한 연주가 아니라 감탄하기 위한 연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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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뷔시 / 판화

음악 2013. 7. 23. 21:31

<판화> (Estamps pour piano, L.100)

작곡 시기 : 1903년 7월 완성

초연 : 1904년 1월 9일 파리 국립음악홀에서 리카르도 비네스의 연주로 초연

<피아노를 위하여> 모음곡을 1901년에 완성한 후, 드뷔시는 좀 더 깊은 방향으로 나아가기로 작정했다. 그는 자신에게 형식적인 구체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을 이미 간파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방향을 바꾸려 하지 않았다. 지금까지의 형식이 자신의 몸에 맞지 않는다면, 자신의 몸에 맞는 새로운 옷(형식)을 짜면 된다. 그는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는 바로크 모음곡 형식으로 눈을 돌려 <피아노를 위하여>를 완성했다. 이 모음곡은 나름대로 가치가 있지만 드뷔시의 음악적 성향은 역시 구체적인 형식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렇다면 그에게는 무엇이 필요했을까. 바로 음색과 선율을 자유로이 변환하는 도구가 되어줄 영상이었다. 음악은 전통적인 화성법이나 대위법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작곡가의 상상력에 의해 움직인다.

 그러나 드뷔시가 충동적인 작곡가라는 오해는 하지 말아주길 바란다. 선법적인 색채의 사용과 리듬상의 대위법 사용에서 드뷔시보다 더 섬세한 기술을 제시할 수 있는 작곡가는 없었다. 드뷔시가 자신의 음악적 기술을 활용하게 위해 불러들인 영상은 동양 사원의 불탑, 그라나다의 예측 불가능한 저녁, 그리고 비가 내리는 정원이었다. 이것들은 최소 1~2년에서 최대 10년 전에 작곡가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영상이었다. 그가 오랜 시간 고민한 까닭은 수많은 과거와 현재의 영상 중 어떤 것이 가장 적절한 것인지를 머릿속으로 추려내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1곡 <탑> (1.Pagodes)

 음향의 순수한 공명이라는 점에서 <판화>의 <탑>보다 더 앞서나간 곡은 없다. 이 곡과 비교할만한 이후의 곡들, 가령 <영상> 1집의 <물에 비친 그림자>나 2집의 <잎새를 스치는 종소리>는 이 곡보다 더 노련하기는 할지언정 이처럼 순수한 음향을 확고하게 드러내지는 못한다.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드뷔시의 귀와 눈을 사로잡았던 가믈란 음악은 비로소 여기서 그 진가를 발휘한다. 그러나 이 음악은 가믈란 음계를 차용한 오리엔탈리즘 음악에서 이탈한다. 이 곡은 공과 종과 사람들이 몰려 있는 시정市井의 소리가 어울려 만들어낸 대위법적 음악이다. 작곡가의 주장은 이 사실에 못을 박는다. "팔레스트리나의 대위법조차 자바 음악에서 발견되는 것과 비교하면 어린애 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이 주장은 또 다른 한 가지 사실도 암시하는데, 드뷔시는 자바 음악에서 발견할 수 있는 비평균율적이고 비선율적인 음악을 통해 종래의 선율적 대위법과는 다른, 리듬상의 대위법을 구상했다는 사실이다.

 드뷔시가 서구의 작곡가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한 가지 사실은 그가 이 곡에서 긴장감의 고조와 클라이맥스를 구축했다는 것이리라. 하지만 B와 F#의 드로운 베이스로 시작하는 이 곡에서 종래의 소나타 형식은 자취를 감춘다. 드뷔시가 "똘똘한 어린애들을 위한 것"이라며 경멸한 으뜸화음이나 딸림화음 같은 화성적 구조도 찾아볼 수 없다. 서구인들에게 낯선 정취를 불러들이겠지만, 우리에게는 전혀 낯설지 않은 주제(G-C-D)의 반복에서 첫 번째 5음음계가 나타난다. C-D-F-G-A다. 곧이어 두 번째 5음 음계가 나타난다. D-C-B-A-G의 하행 5음음계다. 11마디부터 아르페지오의 부분적 리듬이 점차 증가하며 세 번째 5음 음계가 나타난다. B-G-F-D-C다. 5음 음계에 의한 주제가 발전하는가 싶더니 어느새 두 성부가 반진행한다. 선율적인 반진행뿐 아니라 리듬적으로도 반진행을 이룬다. 31마디에서 마침내 마지막 5음음계가 나타난다. G-B-C-D-E다. 이어 두 개의 5음음계 주제가 동시에 진행한다. 첫 주제가 꺾이며 반주에 머무는 동안 두 번째 주제는 그 음향을 극대화한다. 이어 주제들을 재현하면서 곡은 포르테의 정점에 이른다. 하지만 도무지 진행 방향을 확인할 수 없다. 드뷔시가 이 곡을 하는 일은 탑을 보여주는 것이지 탑의 어느 부분이 위대하고 어느 부분이 장엄한지를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색채는 눈이 부실 듯 일렁이지만 형태는 흐릿하고 뭉개져 있다. 곡을 처음부터 끝까지 일정한 위치에 멈춰세우는 고정된 주제는 음악적 방향성을 해체해버린다.

드뷔시는 이 곡에서 주저함 없이 포르테를 사용하고 있으며, 중간 페달과 오른 페달의 사용은 거의 필수적이라고 해야 한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 곡에서 크게 요구하는 것은 바로 선명한 음향과 정확한 리듬이다.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과는 달리, 불투명한 음향과 루바토는 오히려 이 곡을 크게 해칠 것이다. 선명한 음향을 위한 충분한 음량도 필요하다.

 

 2곡 <그라나다의 밤> (2.La soiree dans Grenade)

 본인도 스페인의 위대한 작곡가였던 마누엘 데 파야가 스페인을 표현한 가장 뛰어난 피아노곡으로 바로 이 <그라나다의 밤>을 꼽았다는 사실은 재미있다. 파야는 '안달루시아의 분위기를 이 곡보다 더 잘 표현한 것은 없다'며 이 독특한 분위기의 피아노곡을 격찬했다. 그러나 정작 드뷔시는 스페인에 가본 적이 한 번도 없으며, 다만 삽화를 통해 스페인의 풍경을 접했을 뿐이다. 게다가 그는 곡에 스페인 음악을 하나도 쓰지 않았다. 그는 분위기와 미세한 음의 조직으로 스페인의 본질을 잡아냈다.

 어떻게 잡아냈을까? 드뷔시는 스페인 음악가들의 복잡하면서도 느릿한 선율과 하바네라 리듬 사용, 그리고 둘째 박의 독특한 리듬 처리를 간파했다. 그는 스페인 음악을 차용하는 대신 스페인 음악가가 되어 스페인 음악보다 더 스페인 음악다운 음악을 만들어낸 것이다. 이 곡에서 수시로 등장하는 하바네라 음악을 사용하는 데 있어서도 그는 한결같이 변덕스럽다. 갑자기 빨라졌다가 느려진다. 이것도 스페인 음악의 본질을 정확하게 간파한 드뷔시의 통찰력이 빛을 발한 부분이다.

 C페달 포인트가 지중해 너머 탕헤르를 바라보는 그라나다의 전경과 거친 주위 풍경을 그리고, 오른손 옥타브는 한 옥타브씩 올라가며 관능적인 바다 너머의 음계를 불러들인다. 이것이 첫 주제다. 느릿한 하바네라 리듬 너머로 악사의 기타 연주가 들린다. 음계는 7음음계에서 온음음계로 변하며 루바토 지시에 따라 새로운 동기가 나타난다. 곧 하바네라 리듬의 열기와 함께 곡은 A장조의 두 번째 주제로 들어간다. 경과구에 이어 다시 하바네라 리듬에 따라 두 번째 주제군이 등장한다. 음악은 점점 복잡해진다. 이어 곡은 경과구를 재현하고, 하바네라 리듬은 점점 멀어진다. 그런데 갑자기 캐스터네츠의 빠른 리듬이 곡을 흔들어 놓는다. 이어 북아프리카 풍의 첫 주제를 다시 재현하며 곡은 밤의 흐릿한 풍경과 관능적인 향기 속으로 서서히 사라진다.

 

3곡 <비 오는 정원> (3.Jardins sous la pluie)

 아시아와 스페인이라는 부루마블 음악적 지도의 탐색을 끝마친 드뷔시의 최종 목적지는 자신의 나라인 프랑스다. 드뷔시는 마지막 곡의 소재로 프랑스의 유명한 돌림노래를 선택했다. 아이들은 놀이를 방해하는 폭풍우를 피해 집으로 들어가 어머니의 자장가를 듣는다. 하지만 폭풍우는 아이들이 잠들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그리고 어머니의 노래는 아이들에게 평온함을 가져다준다. 마침내 폭풍우가 그치고 햇살이 나뭇잎 위의 물방울을 비출 때, 아이들은 다시 해방되어 마음껏 뛰어놀기 위해 밖으로 나간다.

 시작 부분의 단조 선법과 급박한 리듬은 폭우가 쏟아지는 바깥 풍경을 묘사한다. 단조의 경과구가 나타나기도 하지만 주된 음계는 단조 선법이다. 56마디의 경과구부터 온음음계가 나타나고 곧이어 반음계도 나타나 극적인 대비를 이룬다. G음의 트릴이 따라붙는다. 경과구를 지나 곡은 부드러운 두 번째 주제에 돌입한다. 하지만 이 주제도 첫 번째 주제의 복귀에 의해 방해를 받는다. 이어 경과구가 다시 등장하고, 다시 첫 번째 주제가 B단조로 나타난다. 이어 경과구가 폭발하며 감7화음으로 하강하는데, 이 하강 음계는 5음음계와 매우 유사하다. 다시 두 번째 주제가 단편으로, 곧 주제 전체로 나타나다가 베이스에서 첫째 주제가 나타난다. 서로 평행선을 달리던 두 주제의 길고 복잡한 흐름은 B장조의 트릴로 시작하는 코다 속으로 빨려들어간다. 비가 그치고, 햇살은 밝게 빛나고, 정원의 풀들은 싱그러운 물방울을 머리에 얹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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