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알프스 교향곡> Op.64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지휘)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연주

1987년 11월 1일 베를린 실황

슈트라우스는 1880년대 후반부터 꾸준히 대규모 관현악곡을 썼다. 이 일련의 관현악곡을 연대순으로 늘어놓으면, <알프스 교향곡>은 그 끝에 위치해 있다. <메타모르포젠>이 있기는 하지만 그 곡은 다른 관현악곡들과 무려 30년이나 떨어져 있기 때문에 일종의 에필로그로 보아도 무방하다.

<알프스 교향곡>은 슈트라우스 관현악곡의 마지막을 장식하듯 충분히 장대하다. 묘사적 표제음악인 이 관현악곡은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22개의 장면을 다루고 있으며, 4관 편성의 금관에 각종 타악기는 물론, 윈드머신이나 썬더머신까지 동원하여 대규모 관현악을 다루는 작곡가의 재능을 과시한다. 그러나 곡의 흐름은 슈트라우스가 자주 보여주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신비스러운 배경에서 곡의 중심이 되는 장소가 출현하고, 음악의 흐름은 즐거운 절정으로 상승한다. 그러나 절정은 결코 길지 않다. 폭풍우가 몰아치고 등산객들은 하산한다. 그리고 곡은 출발점인 신비스러운 밤으로 다시 돌아간다.

1930년대 이래 슈트라우스와 인연을 맺으며 지속적으로 의견을 교환했던 카라얀은 슈트라우스 관현악곡 연주에 있어 독보적인 위치를 구축했지만, 유독 <알프스 교향곡>만은 자주 연주하지 않았다. 슈트라우스처럼, 카라얀도 자신의 장대한 디스코그라피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곡으로 <알프스 교향곡>을 꼽았던 게 아닌가 싶다. 아무튼 1980년에 스튜디오 레코딩을 완성한 후, 카라얀은 이 곡의 실황 녹음을 4종 남겼다. 이 연주는 그 4종의 실황 중 마지막 실황녹음이다. 당시 카라얀은 79세였고 여러모로 지친 기색이 역력한 상태였다. 그런데 이 연주에서는 그 지친 기색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재미있다.

템포는 스튜디오 레코딩보다 약간 느리다. 느리기보다는 여유가 있다고 보는 편이 맞을 것이다. 70년대 이후 카라얀은 음향을 한 덩어리로 만들어 거기에서 특정 악기를 두드러지게 만드는 편을 애호했는데, 그 음향이 일출 장면에서 혼연일체를 이루어 알프스의 준봉을 그려낸다. 그런데 일출 직전에 뜬금없이 북의 타격이 들린다. 사소한 실수로 보인다.

이 연주는 여러모로 대조적인 관점을 보여주는 뵘(DG)-켐페(EMI)의 드레스덴 연주와 비교하는 것이 재미있는데, 지나치게 소박하다 못해 촌스럽게 들리는 뵘이나 켐페의 연주와는 달리 카라얀은 세밀화가로서의 자신의 재능을 맘껏 발산하고 있다. 켐페는 목가적인 호른에 약음기를 적용해 멀리서 울리는 것 같은 효과를 채택했는데, 카라얀은 그 호른이 전면에 나와 들리는 것 같다. 그리고 그 직후 호른의 프레이징을 전면에 끌어내는 것은 켐페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다.

카라얀의 연주는 특정 악기가 두드러지는 부분에서는 템포가 느려지고, 총주 부분에서는 템포가 빨라지는 경향을 찾을 수 있는데, 특히 초반에 숲으로 진입하는 장면이나 폭풍우가 시작하는 부분에서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 실황 녹음이다보니 타악기가 조금 더 두드러지는 것도 특징이다.

정상 장면부터 지휘자는 엄청난 물량 공세를 보여준다. 세부적인 음향까지 치밀하게 다듬는 것은 본인의 스튜디오 녹음이나 비쉬코프보다 조금 처지지만(해적반 실황이라 그렇게 들릴 수도 있다) 그만큼 압도적인 음압을 보여준다. 굳이 비교하자면 하이팅크(LSO)와 꼽을 수 있겠는데, 하이팅크가 좀 더 저돌적이고 직설적이라면 카라얀은 좀 더 관현악을 능수능란하게 다룬다.

정상의 즐거운 비경이 끝나고, 안개가 점점 밀려든다. 이 부분에서 카라얀은 저현과 바순의 프레이징 하나하나를 강조해서(켐페는 이 부분을 그냥 지나친다) 스멀스멀 밀려드는 기분을 잘 표현하고 있다. ‘상승’이 ‘하강’으로 바뀌면서 곡의 주된 테마도 단조로 바뀐다. 불길한 분위기가 대기를 가득 채운다. 오보에의 지속적인 단음이 안개 속에 숨어 보이지 않는 새소리처럼 들려온다. 피콜로의 고음 아포지아투라가 들려오고 팀파니가 멀리서 천둥소리를 낸다. 폭풍우가 밀려온다.

트럼펫의 재등장과 팀파니의 첫 번째 강주에서 카라얀은 템포를 두 배 이상으로 느리게 해 타격감을 끝까지 밀고나간다. 폭풍우 장면이 여러모로 이 연주의 하이라이트인데, 처음에는 템포를 느리게 가져갔다가 관현악 전체의 첫 번째 투티가 있고 난 후에는 템포를 원래대로 회복하고, 두 번째 팀파니 타격 이후에는 아주 빠르게 템포를 가져간다. 실황 녹음인 만큼 조금 더 급박하며, 특히 팀파니와 큰북의 타격감이 아주 일품이다(템포는 다시 원래대로 돌아온다). 금관악기 중에서는 튜바가 두드러지는데, 튜바가 폭풍우 장면을 마무리 짓는 상승 음계를 두 번 연주한다는 사실을 이 연주를 듣고 처음 알았다(켐페는 튜바의 처음 제시를 두드러지지 않게 처리하기 때문이다). 폭풍우가 끝난 순간의 팀파니 처리는 대부분의 연주가 약주로 처리하고, 카라얀도 이 노선을 따르고 있다. 이 부분을 강주로 처리한 연주는 네메 야르비의 실황 연주 말고는 들어본 적이 없다.

폭풍우는 그치고, 현악기는 구름을 뚫고 다시 내리쬐는 햇살을 묘사한다. 멀리서 소박한 호른과 오르간이 들려온다. 한적한 교회당이 있는 시골 마을로 내려온 것이다. 아쉬운 것은 녹음 때문인지 오르간이 아주 불투명하게 들린다는 점이다. 정식 실황 녹음이 아니라 먼 곳에 위치한 악기까지 세밀하게 잡지는 못하는 것 같다.

마지막 하산길의 템포는 아주 느긋하다. 현악기의 프레이징은 눈치채기 힘들게 서서히 장조에서 단조로 바뀐다. 신비스러운 정적이 다시 밤을 몰고 온다. 처음 곡을 열었던 B♭음의 페달 포인트 위에서 곡은 B♭단조에 안착하며 끝난다.

이 연주에서 유일하게 불만인 점은 매우 탁한 해상도다. 그것만 없다면 만족스럽게 감상할 수 있는 실황 녹음이라고 생각한다.

 

Posted by 여엉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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