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토벤 교향곡 7번 A장조 Op.92

영어 : Symphony No.7 in A major, Op.92

 

작곡 시기 : 1811년 가을 착수, 1812년 5월 13일 완성

작곡 장소 : 빈

초연 : 비공개 초연은 1813년 4월 20일에 루돌프 대공의 사택에서 이루어짐. 공개 초연은 1813년 12월 8일 빈 대학 강당에서 열린 전쟁 부상병을 위한 자선 연주회에서 베토벤 자신의 지휘로 이루어짐.

출판 : 1816년

헌정자 : 모리츠 폰 프리스 백작

악기 편성 : 플루트 2, 오보에 2, 클라리넷 2, 파곳 2, 호른 2, 트럼펫 2, 팀파니, 현악 5부

 

개설

이 곡의 단편적인 스케치는 1806년경의 노트에서 발견할 수 있다. 바로 현악4중주곡 《라주모프스키》나 《교향곡 제4번》과 같은 시기이다. 그러나 베토벤이 그 주제의 단편을 과연 교향곡에 사용하려 했는지는 알 수 없다. 어쨌든 본격적으로 작곡하기 시작한 것은 1811년 가을부터이며 이듬해 5월 13일 완성했다. 현재 베를린의 므로시아 국립 도서관에 있는 자필 악보의 표지에 <7 Symphonie 1812 … 13 ten>이라고 적혀있는데, 몇 월인지는 파손 때문에 알 수 없지만 5월 13일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어쨌든 교향곡 7번은 《교향곡 제6번》과 3년의 시간적 거리가 있다.

이 3년 사이에 베토벤은 여러 가지로 어려움을 겪게 된다. 먼저 가장 커다란 타격은 전쟁에 의한 난리였다. 1809년 4월 9일 오스트리아와 프랑스는 전쟁 상태에 들어가며 5월 12일 나폴레옹 군대가 빈을 침입한다. 이 때문에 베토벤의 후원자들은 빈에서 도피하며, 베토벤은 재정적인 후원도 받지 못한 채 정신적으로도 안정되지 못한 상태에서 창작도 생각만큼 순조롭게 이루어지지 못했다. 앓고 있던 귀를 포성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지하실에서 귀에 배게를 대고 있었던 적도 있었다. 1809년 10월에 전쟁이 끝나고, 11월에 프랑스군은 퇴각한다. 이 기간 동안 베토벤은 여러 가지 좋지 않은 일을 겪게 된다. 게다가 건강 상태도 좋지 않았다. 귀족들이 빈으로 돌아온 것은 이듬해 1월이었다. 얼마 후 이 시기의 심경을 반영한 피아노 소나타 《고별》이 작곡되었다.

이 피아노 소나타 작곡을 계기로, 아울러 전쟁이 끝나면서 베토벤의 창작력은 서서히 회복되면서 이전의 공백 기간을 메워나갔다. 그리고 기분도 차분해지고 건강 상태도 얼마간 좋아지며, 다시 연금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1)

1809년 무렵부터 베토벤은 테레제 마르파티라는 대지주의 딸과 알게 된다. 작곡가는 《고별》 직전에 쓴 Op.78의 소나타를 헌정한 브룬스비크 백작의 딸 테레제와는 다른 이 테레제에 대해 특별한 감정을 품게 되었다. 베토벤으로서는 테레제와의 결혼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 시기의 현악4중주곡 E♭장조 Op.74 《하프》에 나타나는 밝은 악상은 테레제라는 여인의 존재와 무관하지 않다. 1810년 4월에는 테레제를 위해 썼다는 소품 《엘리제를 위하여》를 작곡하며, 5월에는 테레제를 위한 Op.83의 두 가곡, 즉 첫 곡 <슬픔과 기쁨>과 둘째 곡 <그리움>이 작곡된다. 그 외에 군악대용 음악을 쓴 것을 보면 베토벤은 한편으로는 사회정서를 반영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테레제에 대한 기분을 어떻게든 음악으로 나타내고 싶어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6월의 《에그몬트》를 위한 음악은 이런 두 가지 측면을 연결하는 음악으로도 볼 수 있다. 그러나 18세의 테레제는 40세를 맞은 베토벤의 연정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으며, 거의 일방적인 테레제에 대한 베토벤의 사랑은 결국 1810년 여름을 지나면서 없었던 것이나 다름없게 되어버린다. 그 해 여름에 작곡한 현악4중주곡 Op.95 《세리오소》의 내면적이고 극적인 성격은 어쩌면 베토벤 내면의 반영일지도 모른다. 

1811년에 나폴레옹은 절정을 과시하고 있었으나 베토벤은 테레제 폰 브룬스비크로부터 그녀의 상반신 초상화를 선물받고 실연의 아픈 마음을 달래고 있었다. 베토벤은 그것을 보물처럼 여겨 방에 걸어놓고 평생 소중하게 여겼다. 이 해에는 건강도 좋지 않아 테레제와 그의 남동생이자 베토벤과도 친했던 프란츠와 함께 이탈리아를 여행할 예정이었다.

1811년 여름, 베토벤은 휴양을 위해 경치가 좋은 온천지 테플리츠에 간다. 그 곳에서 아말리에 제바르트라는 가수와 재회하여 친절한 대접을 받게 된다. 이 때문인지는 몰라도 이곳이 마음에 들어 이듬해에도 다시 방문하여 제바르트의 신세를 지게 된다.

실연 후 조금은 투쟁적으로 변모해 있던 베토벤의 기분은 테플리츠에서의 생활로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이런 즐겁고 밝은 기분이 작품에 반영되고 있다고 추측할 수 있다. 그는 이전의 스케치를 다시 끄집어내어 작곡을 시작한다. 《교향곡 제7번》도 예외는 아니었다. 실제로 1811~1812년에는 거의 밝은 장조 곡 위주의 작곡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이렇게 나온 곡은 또한 당연히 낭만적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교향곡 제7번》은 디오니소스적인 즐거움을 지니고 있다. 동시에 이 곡에는 강한 의지나 음악에 의한 주장의 관철이라는 요소도 존재한다.

실제로 베토벤은 이 교향곡의 4악장을 가리켜 "나는 인류를 위해 좋은 술을 빚는 바쿠스(디오니소스)이며, 그렇게 빚어진 술로 세상의 풍파에 시달린 사람들을 취하게 하고 싶다."고 했다. 이 교향곡의 특성을 설명하는 말로 이보다 나은 것은 없다. 베토벤은 이 교향곡을 통해 리듬의 모든 것을 남김없이 드러낸다. 리듬이 단순한 음악의 요소로 참여하지 않고, 교묘한 전개와 화려한 관현악법에 의해 몇 배나 위력이 증폭된다. 느린 악장은 하나도 없으며, 모든 악장이 리드미컬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큰 규모에 어울리는 광란의 축제는 특히 1악장과 4악장에서 빛을 발하는 데, 이 때문에 리스트는 '리듬의 화신', 바그너는 '무도의 성화'라는 말을 이 교향곡에 붙였다. 광란에 가까운 축전적 성향은 때로 로맹 롤랑이 지적한 '낭비의 즐거움'으로까지 이어지는데, 지나치게 즐거움을 강조한 몇몇 연주들에서 이 측면을 엿볼 수 있다. 다만 이 교향곡은 조성적인 측면에서는 이전의 교향곡들보다 보수적이며(교향곡 6번의 1악장 발전부가 일반적인 전조에서 얼마나 멀어지는지 생각해 보자), 네 개의 악장은 각기 원조를 확고한 구심점으로 삼고 있다. 1813년 12월 전쟁 교향곡 <웰링턴의 승리> Op.91와 함께 초연했을 때 환영받았으며, 특히 2악장은 앵콜 요청이 있었을 정도로 사랑받았다. 애국적인 연주회 레퍼토리와는 별개로, 2악장이 큰 환영을 받았다는 사실이 재미있다. 

 

1악장 (1.Poco sostenuto 4/4 - Vivace 6/8) (A major)

서주가 있는 소나타 형식. 단순한 주제에 강세와 다이내믹을 주어 생명력을 획득한 Poco sostenuto의 서주(1마디-62마디). 서주 주제는 본질적으로 주요부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f로 장려하게 시작하고, pp에 의한 음계의 상승이 있은 후 ff로 폭발한다. 첫 번째 폭발이 끝나고 오보에와 클라리넷, 바순의 삽입구가 찾아와 관현악 전체를 안정시킨다. 그리고 다시 ff로 폭발. 50마디가 지나면서 이 폭발마저 잦아들면 서주 전체가 잦아들고 주요부로 넘어갈 채비를 한다. 53마디부터는 단일음인 E음의 지속음 위에서 주요부 도입부를 불러들인다. 여기서부터 음형은 반으로 축소되고 또 다시 축소된다.

주요부인 비바체는 우선 플루트를 비롯한 목관이 악장의 기본 6박자 리듬을 제시하고, 이어 1주제를 제시한다. 1주제는 89마디에 이르러 폭발한다. 여기서 악기들은 대체로 리듬을 간직하는 부분, 16분음표의 경과구, 화성을 공급하는 목관악기로 나누어져 각자의 역할을 담당한다. 112마디부터는 짧은 경과구가 이루어져 있으며 119마디부터 시작하는 2주제는 1주제와 대비를 이룬다기보다는 오히려 종속적인 역을 맡고 있는 것처럼 들린다. 이는 130마디부터 시작하는 경과적 버금 주제와 143마디부터 시작하는 1주제 파생 경과구에 의해 점차 소종결구로 이어진다. 152마디부터 시작하는 소종결구는 딸림조 위에 1주제가 나타나고, 현악기가 E장조의 장음계를 ff로 상행하면서 제시부를 마친다.

발전부는 제시부의 소종결구와 같이 음형이 "E"에서 "G"까지의 반음계 사이에서 움직이는데, C장조로 조바꿈한 뒤 2마디씩 카논 형식을 취하고 있다(185마디). 이후 조성들 사이를 두루 거친 후 254마디에서 트럼펫이 주도하는 엄청난 클라이맥스가 있다. poco a poco cresc.와 ff로 장려하게 절정을 이루면서 발전부는 끝난다. 참고로 발전부에서 100마디가 넘게 리듬이 원형의 지배를 받는 교향곡은 이 곡이 유일하다.

재현부는 275마디의 현악기군 암시에 의해 278마디부터 1바이올린으로 재현하는데, 299~300마디의 늘임 부분에 의해 다시 1주제를 경쾌하게 재현한다. 331마디부터는 2주제의 재현으로 이는 제시부와 동일하다. 다만 소나타 형식의 전통에 의하여 A장조로 되돌고 있다. 코다는 391마디부터로 393마디부터는 1, 2바이올린이 번갈아서 연주하는 바소 오스티나토로 최후의 종점으로 곡을 이끌고 있다. 이후 401마디부터 현악기의 낮은 음과 바이올린의 표정 풍부한 가락이 크레셴도 되면서 ff의 투티를 이루고 끝을 맺는다. 이 악장에서 쓰인 코다 바소 오스티나토는 같은 교향곡의 피날레 악장과 9번 교향곡의 1악장에서 다시 쓰인다. 악장의 대부분을 동일한 리듬이 지배한다는 점에서, 이 악장을 리듬이 주도하는 교향곡으로 보는 것도 무리 없이 받아들일 수 있다.

 

2악장 (2.Allegretto 2/3) (A minor)

3부 형식. 교향곡 7번에는 느린 악장이 하나도 없다. 알레그레토 악장이 사실상 느린 악장 역할을 맡고 있는데, 엄밀히 말하자면 알레그레토는 '느린' 템포가 아니다. 그렇다면 알레그레토 지시는 과연 타당한 것일까? 대부분의 지휘자들은 지시에 상관하지 않고 연주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 작곡가의 뜻을 왜곡하는 것이 아니냐고 물을지 모르지만, 베토벤의 메트로놈 템포 지시에 관한 설득력 있는 일화가 하나 있다. 베토벤은 작곡을 하던 중 악보를 잃어버려 기억에 의존해 악보를 다시 작성했는데, 후일 잃어버렸던 악보를 되찾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두 악보의 메트로놈 템포가 일치하는 부분이 하나도 없는 것이 아닌가. 잠시 이 상황을 황당해 하던 베토벤은 곧 "제 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런 악보 따위는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다"고 독설을 내뱉었다 한다.

알레그레토 악장은 다른 악장에 비해 비교적 일찍 작곡했다. 연구자들은 <라주모프스키> 4중주와 비슷한 시기에 이 악장을 만들었을 것이라 추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교향곡 7번은 처음부터 일관된 계획 하에 만들어진 교향곡이 아닌 셈이다.

니체는 아폴론의 정연한 꿈이 디오니소스의 흐릿한 현실과 만나는 순간 비극이 태어났다는 말을 남겼다. 베토벤의 교향곡 중 유달리 디오니소스적 경향이 두드러지는 교향곡이 이 곡이지만, 그 밑바닥에는 아폴론적인 경향이 여전히 굳게 버티고 있다. 중간 악장은 다른 악장들과 확연한 대조를 이루고 있지만, 디오니소스적 경향이 두드러지는 가운데 아폴론적 경향이 스며드는 것은 여전하다. 다만 그 경향이 희극에서 비극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니체가 정의한 '비극의 탄생'은 의도한 바는 아니겠지만 이 악장에 아주 잘 들어맞는다.

현악기 위주로 연주하는 1주제는 대위선율을 수반해 리드미컬하지만 독특한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 이와 달리 A장조의 2주제는 (2/4박자) 목관악기가 주가 된다. 클라리넷이 온기를 불러오고, 패시지의 음역이 높아지는 순간 고음역 전문 목관악기인 플루트가 패시지를 이어나간다. 3부에서는 1부의 변주와 함께 푸가토도 두고 있다. 1주제로 마치는데, 마지막 현의 선율을 맨 처음에는 피치카토로 했다가 나중에 아르코(피치카토 상태에서 다시 활로 현을 그어야 할 때 쓰는 지시어)로 바꾸었다. 지휘자마자 아르코를 사용하느냐, 피치카토를 사용하느냐가 갈린다.  

 

3악장 (3.Presto 3/4 - Assai meno presto) (F major / D major)

스케츠로 악장인 3악장은 특이하게 F장조로 시작한다. 스케츠로 동기의 전반부는 앞꾸밈음이 붙어있고, 후반부는 4분음표 스타카토로 이루어져 있다. 트리오로 D장조를 채택해 굉장히 이례적인데, 엄격한 건축물의 위엄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치장해 놓은 꽃 장식을 연상케 한다. 밝고 따스하며 민요적인 분위기가 느껴진다고 하는데, 사실 트리오 선율은 오스트리아 지방의 순례의 노래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 스케츠로와 트리오가 번갈아 두 번씩 등장하는 것은 교향곡 4번과 같다. 전체적으로 강약의 대비나 휴지, 스타카토를 교묘하게 사용하고 있다.

 

4악장 (4.Allegro con brio 2/4) (A major)

fff의 폭발적인 코다를 자랑하는 마지막 악장. 1주제를 제시하기 전에 주요 리듬을 제시한 후 휴지를 가진다. 날뛰는 악장임을 감안해 호흡을 고르라는 작곡가의 배려인지도 모르겠다. A장조의 1주제는 빠르고 능동적인데, 러시아 민요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베토벤은 《라주모프스키》 현악 4중주를 작곡하기 이전에 러시아 민요집을 갖고 있었으니, 아마 그 민요집에 있던 곡을 사용한 것이리라. 2주제도 약동적이고 유머러스하다. 발전부는 주로 1주제의 전개로 이루어지고, 재현부는 B♭장조로 1주제를 재현하고 곧 F장조로 바뀌어 2주제를 첼로로 재현한다. 이어지는 코다는 바소 오스티나토, 동기의 종합 등에 의한 각종 효과들로 엄청나게 장대해지는데, 모아진 힘이 두 번의 fff로 폭발하고 ff로 마친다.

 

 

각주

1) 빈의 귀족들은 1809년 베토벤에게 종신 연금을 주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그 직후 전쟁이 일어나 베토벤은 제대로 연금을 받지 못했다. 연금을 제대로 다시 지급받기 시작한 것은 1811년이 되어서였다.

Posted by 여엉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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