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향곡 9번 D단조 <합창> Op.125

영어 : Symphony No.9 in D minor, Op.125 "Choral"

 

작곡 시기 : 1790년대부터 '환희에 붙임' 작곡을 구상. 1818년에 초고를 쓴 후, 1822년에 본격적으로 시작해서 1824년 초 완성

작곡 장소 : 빈

초연 : 1824년 5월 7일, 빈의 케른트너토어 극장에서 베토벤 자신의 지휘, 실질적인 지휘는 미하일 움라우프가 했다. 독창은 헨리에테 존탁(소프라노), 카롤리네 웅거(알토), 안톤 하이칭거(테너), 자이베르트(베이스).

출판 : 1826년

헌정자 :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

악기 편성 : 피콜로(4악장), 플루트 2, 오보에 2, 클라리넷 2(B♭, C, A), 바순 2, 콘트라바순(4악장), 호른 4(D, B♭, B♭ Bass, E♭), 트럼펫 2(D, B♭), 트롬본 3(알토, 테너, 베이스. 2악장과 4악장), 팀파니, 트라이앵글(4악장), 심벌즈(4악장), 큰북(4악장), 현악 5부 / 4악장에서 소프라노, 알토, 테너, 바리톤 독창과 혼성 4부 합창 참여(테너는 1과 2로 나뉘는 부분 있음)

 

개설

이 곡에는 「실러의 송가 '환희에 부침'에 의한 끝 악장에 합창을 담고 있다」고 적혀 있다. 따라서 이 곡은 《합창》 또는 《합창 붙음》이라고 불리는 경우가 많다. 당시까지 고전적인 교향곡에는 성악을 전혀 갖지 않았는데 이 곡에서 처음으로 네 사람의 독창자와 혼성 합창단을 이용한 것이다. 또한 제4악장은 실러(1759~1805)의 「환희에 부친다」 송가의 구절을 가사로 사용하고 있다. 베토벤은 본래 이 실러의 송가 전체에 음악을 붙였던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에 드는 부분을 골라 사용하였다.

이 실러의 송가는 프랑스 혁명 직전인 1785년 드레스덴에서 만든 것으로 독창과 합창을 교대로 부르게 되어 있다. 당시 26세의 청년 실러는 독일의 봉건적 정치 형태와 전제적인 군주제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었다. 이 시에서 그는 인류애와 수백만 명의 단결에 의한 인강 해방의 이상을 소리 높여 노래하였다. 실러는 처음에는 이 시에 「자유에 부침」이라는 제목을 붙이려고 했지만, 엄격한 검열 때문에 '자유'를 '환희'로 고쳤다고 한다. 이 송가는 당시 청년이나 지식인 사이에서 널리 사랑받고 있었다.

이후 프랑스 혁명, 나폴레옹의 출현이라는 대사건이 일어나고, 베토벤도 나폴레옹이 옛 전제 군주제를 무너뜨리고 새롭고 민주적인 세계를 만들어나가는 것이라 생각했고, 그에게 호감을 갖기도 했다. 이런 성격의 베토벤이 실러의 송가를 마음에 들어 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베토벤이 이 송가에 관심을 갖게끔 한 사람은 당시 본 대학에서 강의를 했던 젊은 시인으로, 실러 부부와 친분이 있는 루트비히 피체니히(1768~1831)였다. 베토벤은 1792년 빈으로 옮겨오기 한 달 전쯤에 이 피체니히와 친해지게 된다. 그리고 1793년 1월 27일 실러의 아내 샬로테에게 보낸 편지에서, 피체니히는 베토벤이 실러의 「환희」의 각 장에 음악을 붙일 계획을 세웠다고 알리고 있다.

이에 앞서 《교향곡 제9번》과 매우 밀접한 연관을 지닌 것으로 1790년 9월부터 10월에 걸쳐 작곡한 《레오폴드 2세 대관식을 위한 칸타타》가 있다. 그 마지믹 제4악장의 합창에 「엎드려라, 수백만의 사람들이여」(Stürzet nieder Millionen) 부분이 등장한다. 이와 유사한 가사가 실러의 송가에도 나온다(Ihr stürzt nieder, Millionen?). 이 칸타타는 실러가 아니라 아벨동크의 시를 바탕으로 한 것이지만 이 부분에서의 성악과 관현악 처리에도 《교향곡 제9번》을 연상케 하는 측면이 있다.

《교향곡 제9번》 제4악장의 유명한 「환희의 주제」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근원을 찾는 문제는 간단하지 않다. 그러나 거기에는 1794년 또는 1795년 초에 씌어진 가곡 《사랑받지 못하는 이의 탄식》(Seufzer eines Ungeliebter)과 《서로 사랑함》(Gegenliebe)의 부분이 발견된다. 이 가사는 뷔르거(1749~1795)가 쓴 것으로, 사상적으로는 실러의 것과 관계가 없다. 또한 이 선율은 1808년 완성된 《합창 환상곡》 Op.80의 노래 주제로 다시 사용된다.

1812년이 되면 「환희의 주제」를 위한 또다른 스케치가 나타난다. 이것은 3/4박자의 것으로 첫째박에만 선율음을 두고, 둘째박과 셋째박을 쉼표 처리한 것이다. 또한, 1822년에는 4/4박자의 현재의 것과 동일한 선율이 스케치 노트에 등장한다. ’환희의 주제‘는 한 때 열광적인 환희 대신 비장한 느낌의 주제를 쓰려고 한 적이 있지만, 결국 우리가 잘 아는 ’환희의 주제‘가 채택되었고, 쓰려고 했던 주제는 대신 현악 4중주 Op.132 의 마지막 악장에 들어갔다. 이처럼 제4악장의 가사와 주제만 놓고 보더라도 《교향곡 제9번》이 완성되기까지 작곡에 걸린 기간은 매우 길다. 다른 악장의 경우 1809년의 스케치에서 처음으로 현재의 제1악장 첫머리의 복안이 씌어져 있는 것이 발견된다. 1811년과 1812년경에는 《D단조 교향곡》이라는 필적이 있으며, 1812년 5월 말의 편지에는 「지금 3곡의 교향곡을 작곡하고 있으며, 한 곡은 이미 완성하였다」고 적혀 있다. 이 3곡은 교향곡 제7번과 제8번, 그리고 제9번 D단조 교향곡이다.

1815년은 빈 회의가 열린 해이며, 베토벤 개인적으로도 영광의 해라고 할 수 있다. 스케치 노트에서는 현재의 《교향곡 제9번》 제2악장의 스케르초 주제가 발견된다. 또한 1817년 9월경부터 1818년 5월경까지의 스케치 노트에서는 현재의 제1악장의 대체적인 윤곽과 전체의 구상도 발견된다. 1818년에는 교향곡에 옛 조성을 지닌 종교적인 노래를 도입하는 것 때문에 고민하며, 마지막 악장이나 아다지오에 노래를 삽입하기로 한다. 즉, 아다지오에는 그리스의 종교적이며 신비한 가사(Cantique Ecclesiastique)를, 마지막 악장인 알레그로에는 바쿠스의 제전을 배치하려고 한다. 그 무렵 베토벤은 2곡의 교향곡을 쓰려고 계획하고 있었으므로 어느 곡에 성악을 도입하려 했는지 단정할 수는 없다.

이 1817년부터 1818년까지 베토벤은 개인적으로 행복하지 못한 상태였다. 귓병에 대해서는 완전히 체념 상태였으며, 몸도 좋지 않아 기관지와 장 때문에 고생하고 있었다. 더구나 베토벤을 둘러싼 빈의 음악계는 심원한 음악을 반기지 않는 분위기였으며, 정치적으로도 메테르니히의 철권보수 반동체제를 확립하여 자유주의가 승리하기를 기대하던 시민들을 억압하는 방향으로 나가고 있었다. 베토벤은 이런 상황을 참을 수 없었다. 또한 조카인 카를을 돌봐야 하는 문제도 있었다. 점점 불량해지는 카를에 대해 피붙이로서의 애정을 쏟으며, 품행이 좋지 않은 카를의 어머니와 카를의 양육을 둘러싸고 재판까지 벌이는 사태에 이르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베토벤의 창작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것은 당연하였으며, 작품 하나를 완성하는 데 의외로 시간이 많이 걸렸다. 그 가운데 남모르게 진척시키고 있었던 것이 《교향곡 제9번》의 1악장이었다. 이 악장의 커다란 스케일과 투쟁적 특성, 고투하는 모습은 당시 베토벤이 겪던 어려움을 이해할 때만 납득할 수 있을 것이다.

병마와 육체적 피로, 마음의 아픔과 같은 악조건에 둘러싸인 베토벤에게 1818년 영국으로부터 최신식 브로드우드 피아노가 기증되었고, 이를 계기로 베토벤의 피아노 음악에 대한 의욕이 다시 타오르게 된다. 또한 그해 가을에는 마음에 들지 않는 빈을 벗어나 이전부터 있었던 초청을 받아들여 런던의 필하모니 협회에서 교향곡을 초연하려는 계획도 진척시키고 있었다(그러나 이것은 실현되지 못했다). 또한 이 시기에는 《장엄 미사》(미사 솔렘니스)의 작곡에도 본격적으로 착수하였다. 이처럼 1818년 초여름에 베토벤은 창작의 힘을 되찾았다. 그리고 런던 필하모니 협회로부터 두 곡의 교향곡을 작곡해달라는 의뢰도 받는다. 앞서 말한 두 곡의 교향곡 작곡 계획은 이와 연관된 것이다. 베토벤은 한 곡은 기악만으로, 다른 한 곡은 성악을 함께 사용한 곡을 쓰려고 했다. 그러나 구체적인 사항은 알려져 있지 않다.

《장엄 미사》는 원래 루돌프 대공의 대주교 취임을 위한 곡이었으며, 예정보다 2년 정도 늦어진 1822년에 완성되었다. 베토벤은 자신의 마음을 충족시키는 평화와 세계의 안녕을 기원하면서 이 곡을 열심히 썼으며, 피아노 소나타로 기분을 전환하는 것 외에는 다른 대곡에 눈을 돌리지 않았다. 이렇게 대곡 미사가 완성되자 중단했던 교향곡 작곡에도 눈을 돌릴 수 있게 되었다. 런던에 있던 제자 리스에게 새로운 교향곡의 작곡료 등에 대해 필하모니 협회와 다시 이야기를 진척시키라는 편지를 쓰기도 했다. 그 결과 런던의 이 협회는 1822년 11월 작곡료를 결정하였고 베토벤도 이것을 받아들인다.

베토벤은 그때까지 구상하고 있던 《D단조 교향곡》을 협회를 위해 진행시키기로 하고 기악만 사용한 교향곡으로 작업하게 된다. 그러나 합창을 덧붙인다는 아이디어도 버린 것은 아니어서, 또다른 「독일 교향곡」이라는 작품에 합창을 삽입할 예정이었다. 이것은 당시 민족 의식의 고양이라는 흐름에서 독일인으로서의 자각에 입각하여 계획된 것으로, 그 마지막 악장에 실러의 「환희의 부침」에 토대를 두고 전체의 클라이맥스를 구축하려는 구상을 정리하고 있었다. D단조 교향곡 제3악장은 바덴의 자연 속에서 작곡되었다. 이 악장에 안정되고 따스한 분위기가 감도는 것은 바로 그런 환경 탓이었다.

베토벤은 이 두 교향곡을 함께 작곡할 예정이었으나 결국 아이디어를 하나로 합쳐 하나의 교향곡을 쓰기로 계획을 바꾸게 된다. 현재의 《교향곡 제9번》은 이렇게 탄생하게 되었다.

전곡은 1824년 2월에 완성되며, 역사적인 초연은 빈의 케른트너토어의 궁정극장에서 이루어졌다. 곡이 끝났을 때, 완전히 귀가 들리지 않았던 베토벤은 알토 독창자가 알려주어 간신히 청중의 박수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는 에피소드가 전해진다.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이 연주회에서 돌아온 수입은 예상 외로 적었다고 한다.

이 《교향곡 제9번》은 확실히 베토벤의 위대한 산물이다. 베토벤은 《장엄 미사》에서 자신의 내적인 평안과 외적인 평화를 기원하였고, 마지막 곡 <아뉴스 데이>에서는 내적인 평안은 확실하였지만 외적인 평화에 대해서는 스케치나 초고에 나타나 있지 않다. 그것을 보충하는, 또는 완결짓는 것이 바로 이 교향곡이다. 모든 인류가 함께 실현시켜야 할 평화를 이상주의적으로 노래한 것이다. 또한 베토벤의 신념이었던 「고뇌를 통한 환희」라는 말은 그대로 이 교향곡 작곡 과정에서도, 그리고 곡 자체의 진취적인 자세에서도 확실히 부각되어 있다. 오스트리아를 지배하고 있던 불온한 반동정치도 베토벤에 의해 불멸의 예술 작품으로 귀결되었다.

4악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고뇌를 통한 환희」라는 주제를 놓고 볼 때, 앞의 세 개의 악장은 제4악장의 전제로 놓여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마지막 악장에서 음악적으로나 내용적으로 앞의 세 개의 악장을 총괄하는 새로운 방법이 사용되고 있다. 아울러 제1악장의 기대감을 불러일으키는 공허한 시작 방법, 충실하고 장대한 코다, 제2악장 스케르초에서의 소나타 형식과 푸가토를 혼용하는 대규모의 구성법, 제3악장의 두 개의 주제를 지닌 변주곡이면서도 자유롭게 정돈된 방법, 그리고 마지막 악장에서의 변주에 기반을 둔 자유로운 형식, 이 모든 것은 그때까지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런 여러 가지 특징은 후대 작곡가들에게 끊임없이 큰 영향을 주었다. 악기 편성에서도 종래의 교향곡보다 수준이 높으며, 타악기 종류도 늘어나 있다.

9번 교향곡의 위대한 점 중 하나는, 이토록 오랫동안의 구상을 거쳐 만들어진 곡이 하나의 실로 짠 직물처럼 완벽한 자기완결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이 말은 1악장부터 3악장까지는 들어맞지만, 4악장까지 꼭 들어맞는 것은 아니다. 4악장에 구조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베르디도 4악장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었다. 반면 바그너는 4악장을 가장 위대한 음악으로 보았다. 4악장이 가장 위대한 음악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4악장의 축인 <환희의 주제>가 가장 위대한 주제인 것은 여심의 여지가 없다.

초연 이후, 곡은 빠르게 사람들의 기억에서 지워지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1830년대에 이 곡을 지속적으로 연주한 도시가 있었으니 바로 파리. 이윽고 18세기 중반에 이르러 바그너를 비롯한 지휘자들이 이 곡을 자주 연주하면서 이 곡은 오케스트라의 정규 레퍼토리로 자리 잡는다. 확실히 이 곡의 난이도는 그렇게 쉽지 않다. 그렇기에 레퍼토리로 자리 잡는데 오랜 세월이 걸린 것이다. 지휘자들은 이 곡이 강조하는 주제를 보강한다는 차원에서 편성을 계속 추가했다. 더블링은 필수적인 관례로 자리 잡았다. 20세기 중반에 들어 이 곡은 나치의 선전용 음악과 같은 수준으로 떨어지는 비극을 맞이했다. 그러나 이후의 사람들은 이 곡의 비극적인 오용을 지워내고 원래의 위치에 올려놓기 위해 애를 썼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을 때 번스타인이 이 곡의 가사를 <환희>에서 <자유>로 바꿔 연주한 것은 그 노력의 일환이다.

 

 

Posted by 여엉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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