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향곡 9번 D단조 <합창> Op.125

영어 : Symphony No.9 in D minor, Op.125 "Choral"

 

작곡 시기 : 1790년대부터 '환희에 붙임' 작곡을 구상. 1818년에 초고를 쓴 후, 1822년에 본격적으로 시작해서 1824년 초 완성

작곡 장소 : 빈

초연 : 1824년 5월 7일, 빈의 케른트너토어 극장에서 베토벤 자신의 지휘, 실질적인 지휘는 미하일 움라우프가 했다. 독창은 헨리에테 존탁(소프라노), 카롤리네 웅거(알토), 안톤 하이칭거(테너), 자이베르트(베이스).

출판 : 1826년

헌정자 :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

악기 편성 : 피콜로(4악장), 플루트 2, 오보에 2, 클라리넷 2(B♭, C, A), 바순 2, 콘트라바순(4악장), 호른 4(D, B♭, B♭ Bass, E♭), 트럼펫 2(D, B♭), 트롬본 3(알토, 테너, 베이스. 2악장과 4악장), 팀파니, 트라이앵글(4악장), 심벌즈(4악장), 큰북(4악장), 현악 5부 / 4악장에서 소프라노, 알토, 테너, 바리톤 독창과 혼성 4부 합창 참여(테너는 1과 2로 나뉘는 부분 있음)

 

개설

이 곡에는 「실러의 송가 '환희에 부침'에 의한 끝 악장에 합창을 담고 있다」고 적혀 있다. 따라서 이 곡은 《합창》 또는 《합창 붙음》이라고 불리는 경우가 많다. 당시까지 고전적인 교향곡에는 성악을 전혀 갖지 않았는데 이 곡에서 처음으로 네 사람의 독창자와 혼성 합창단을 이용한 것이다. 또한 제4악장은 실러(1759~1805)의 「환희에 부친다」 송가의 구절을 가사로 사용하고 있다. 베토벤은 본래 이 실러의 송가 전체에 음악을 붙였던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에 드는 부분을 골라 사용하였다.

이 실러의 송가는 프랑스 혁명 직전인 1785년 드레스덴에서 만든 것으로 독창과 합창을 교대로 부르게 되어 있다. 당시 26세의 청년 실러는 독일의 봉건적 정치 형태와 전제적인 군주제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었다. 이 시에서 그는 인류애와 수백만 명의 단결에 의한 인강 해방의 이상을 소리 높여 노래하였다. 실러는 처음에는 이 시에 「자유에 부침」이라는 제목을 붙이려고 했지만, 엄격한 검열 때문에 '자유'를 '환희'로 고쳤다고 한다. 이 송가는 당시 청년이나 지식인 사이에서 널리 사랑받고 있었다.

이후 프랑스 혁명, 나폴레옹의 출현이라는 대사건이 일어나고, 베토벤도 나폴레옹이 옛 전제 군주제를 무너뜨리고 새롭고 민주적인 세계를 만들어나가는 것이라 생각했고, 그에게 호감을 갖기도 했다. 이런 성격의 베토벤이 실러의 송가를 마음에 들어 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베토벤이 이 송가에 관심을 갖게끔 한 사람은 당시 본 대학에서 강의를 했던 젊은 시인으로, 실러 부부와 친분이 있는 루트비히 피체니히(1768~1831)였다. 베토벤은 1792년 빈으로 옮겨오기 한 달 전쯤에 이 피체니히와 친해지게 된다. 그리고 1793년 1월 27일 실러의 아내 샬로테에게 보낸 편지에서, 피체니히는 베토벤이 실러의 「환희」의 각 장에 음악을 붙일 계획을 세웠다고 알리고 있다.

이에 앞서 《교향곡 제9번》과 매우 밀접한 연관을 지닌 것으로 1790년 9월부터 10월에 걸쳐 작곡한 《레오폴드 2세 대관식을 위한 칸타타》가 있다. 그 마지믹 제4악장의 합창에 「엎드려라, 수백만의 사람들이여」(Stürzet nieder Millionen) 부분이 등장한다. 이와 유사한 가사가 실러의 송가에도 나온다(Ihr stürzt nieder, Millionen?). 이 칸타타는 실러가 아니라 아벨동크의 시를 바탕으로 한 것이지만 이 부분에서의 성악과 관현악 처리에도 《교향곡 제9번》을 연상케 하는 측면이 있다.

《교향곡 제9번》 제4악장의 유명한 「환희의 주제」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근원을 찾는 문제는 간단하지 않다. 그러나 거기에는 1794년 또는 1795년 초에 씌어진 가곡 《사랑받지 못하는 이의 탄식》(Seufzer eines Ungeliebter)과 《서로 사랑함》(Gegenliebe)의 부분이 발견된다. 이 가사는 뷔르거(1749~1795)가 쓴 것으로, 사상적으로는 실러의 것과 관계가 없다. 또한 이 선율은 1808년 완성된 《합창 환상곡》 Op.80의 노래 주제로 다시 사용된다.

1812년이 되면 「환희의 주제」를 위한 또다른 스케치가 나타난다. 이것은 3/4박자의 것으로 첫째박에만 선율음을 두고, 둘째박과 셋째박을 쉼표 처리한 것이다. 또한, 1822년에는 4/4박자의 현재의 것과 동일한 선율이 스케치 노트에 등장한다. ’환희의 주제‘는 한 때 열광적인 환희 대신 비장한 느낌의 주제를 쓰려고 한 적이 있지만, 결국 우리가 잘 아는 ’환희의 주제‘가 채택되었고, 쓰려고 했던 주제는 대신 현악 4중주 Op.132 의 마지막 악장에 들어갔다. 이처럼 제4악장의 가사와 주제만 놓고 보더라도 《교향곡 제9번》이 완성되기까지 작곡에 걸린 기간은 매우 길다. 다른 악장의 경우 1809년의 스케치에서 처음으로 현재의 제1악장 첫머리의 복안이 씌어져 있는 것이 발견된다. 1811년과 1812년경에는 《D단조 교향곡》이라는 필적이 있으며, 1812년 5월 말의 편지에는 「지금 3곡의 교향곡을 작곡하고 있으며, 한 곡은 이미 완성하였다」고 적혀 있다. 이 3곡은 교향곡 제7번과 제8번, 그리고 제9번 D단조 교향곡이다.

1815년은 빈 회의가 열린 해이며, 베토벤 개인적으로도 영광의 해라고 할 수 있다. 스케치 노트에서는 현재의 《교향곡 제9번》 제2악장의 스케르초 주제가 발견된다. 또한 1817년 9월경부터 1818년 5월경까지의 스케치 노트에서는 현재의 제1악장의 대체적인 윤곽과 전체의 구상도 발견된다. 1818년에는 교향곡에 옛 조성을 지닌 종교적인 노래를 도입하는 것 때문에 고민하며, 마지막 악장이나 아다지오에 노래를 삽입하기로 한다. 즉, 아다지오에는 그리스의 종교적이며 신비한 가사(Cantique Ecclesiastique)를, 마지막 악장인 알레그로에는 바쿠스의 제전을 배치하려고 한다. 그 무렵 베토벤은 2곡의 교향곡을 쓰려고 계획하고 있었으므로 어느 곡에 성악을 도입하려 했는지 단정할 수는 없다.

이 1817년부터 1818년까지 베토벤은 개인적으로 행복하지 못한 상태였다. 귓병에 대해서는 완전히 체념 상태였으며, 몸도 좋지 않아 기관지와 장 때문에 고생하고 있었다. 더구나 베토벤을 둘러싼 빈의 음악계는 심원한 음악을 반기지 않는 분위기였으며, 정치적으로도 메테르니히의 철권보수 반동체제를 확립하여 자유주의가 승리하기를 기대하던 시민들을 억압하는 방향으로 나가고 있었다. 베토벤은 이런 상황을 참을 수 없었다. 또한 조카인 카를을 돌봐야 하는 문제도 있었다. 점점 불량해지는 카를에 대해 피붙이로서의 애정을 쏟으며, 품행이 좋지 않은 카를의 어머니와 카를의 양육을 둘러싸고 재판까지 벌이는 사태에 이르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베토벤의 창작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것은 당연하였으며, 작품 하나를 완성하는 데 의외로 시간이 많이 걸렸다. 그 가운데 남모르게 진척시키고 있었던 것이 《교향곡 제9번》의 1악장이었다. 이 악장의 커다란 스케일과 투쟁적 특성, 고투하는 모습은 당시 베토벤이 겪던 어려움을 이해할 때만 납득할 수 있을 것이다.

병마와 육체적 피로, 마음의 아픔과 같은 악조건에 둘러싸인 베토벤에게 1818년 영국으로부터 최신식 브로드우드 피아노가 기증되었고, 이를 계기로 베토벤의 피아노 음악에 대한 의욕이 다시 타오르게 된다. 또한 그해 가을에는 마음에 들지 않는 빈을 벗어나 이전부터 있었던 초청을 받아들여 런던의 필하모니 협회에서 교향곡을 초연하려는 계획도 진척시키고 있었다(그러나 이것은 실현되지 못했다). 또한 이 시기에는 《장엄 미사》(미사 솔렘니스)의 작곡에도 본격적으로 착수하였다. 이처럼 1818년 초여름에 베토벤은 창작의 힘을 되찾았다. 그리고 런던 필하모니 협회로부터 두 곡의 교향곡을 작곡해달라는 의뢰도 받는다. 앞서 말한 두 곡의 교향곡 작곡 계획은 이와 연관된 것이다. 베토벤은 한 곡은 기악만으로, 다른 한 곡은 성악을 함께 사용한 곡을 쓰려고 했다. 그러나 구체적인 사항은 알려져 있지 않다.

《장엄 미사》는 원래 루돌프 대공의 대주교 취임을 위한 곡이었으며, 예정보다 2년 정도 늦어진 1822년에 완성되었다. 베토벤은 자신의 마음을 충족시키는 평화와 세계의 안녕을 기원하면서 이 곡을 열심히 썼으며, 피아노 소나타로 기분을 전환하는 것 외에는 다른 대곡에 눈을 돌리지 않았다. 이렇게 대곡 미사가 완성되자 중단했던 교향곡 작곡에도 눈을 돌릴 수 있게 되었다. 런던에 있던 제자 리스에게 새로운 교향곡의 작곡료 등에 대해 필하모니 협회와 다시 이야기를 진척시키라는 편지를 쓰기도 했다. 그 결과 런던의 이 협회는 1822년 11월 작곡료를 결정하였고 베토벤도 이것을 받아들인다.

베토벤은 그때까지 구상하고 있던 《D단조 교향곡》을 협회를 위해 진행시키기로 하고 기악만 사용한 교향곡으로 작업하게 된다. 그러나 합창을 덧붙인다는 아이디어도 버린 것은 아니어서, 또다른 「독일 교향곡」이라는 작품에 합창을 삽입할 예정이었다. 이것은 당시 민족 의식의 고양이라는 흐름에서 독일인으로서의 자각에 입각하여 계획된 것으로, 그 마지막 악장에 실러의 「환희의 부침」에 토대를 두고 전체의 클라이맥스를 구축하려는 구상을 정리하고 있었다. D단조 교향곡 제3악장은 바덴의 자연 속에서 작곡되었다. 이 악장에 안정되고 따스한 분위기가 감도는 것은 바로 그런 환경 탓이었다.

베토벤은 이 두 교향곡을 함께 작곡할 예정이었으나 결국 아이디어를 하나로 합쳐 하나의 교향곡을 쓰기로 계획을 바꾸게 된다. 현재의 《교향곡 제9번》은 이렇게 탄생하게 되었다.

전곡은 1824년 2월에 완성되며, 역사적인 초연은 빈의 케른트너토어의 궁정극장에서 이루어졌다. 곡이 끝났을 때, 완전히 귀가 들리지 않았던 베토벤은 알토 독창자가 알려주어 간신히 청중의 박수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는 에피소드가 전해진다.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이 연주회에서 돌아온 수입은 예상 외로 적었다고 한다.

이 《교향곡 제9번》은 확실히 베토벤의 위대한 산물이다. 베토벤은 《장엄 미사》에서 자신의 내적인 평안과 외적인 평화를 기원하였고, 마지막 곡 <아뉴스 데이>에서는 내적인 평안은 확실하였지만 외적인 평화에 대해서는 스케치나 초고에 나타나 있지 않다. 그것을 보충하는, 또는 완결짓는 것이 바로 이 교향곡이다. 모든 인류가 함께 실현시켜야 할 평화를 이상주의적으로 노래한 것이다. 또한 베토벤의 신념이었던 「고뇌를 통한 환희」라는 말은 그대로 이 교향곡 작곡 과정에서도, 그리고 곡 자체의 진취적인 자세에서도 확실히 부각되어 있다. 오스트리아를 지배하고 있던 불온한 반동정치도 베토벤에 의해 불멸의 예술 작품으로 귀결되었다.

4악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고뇌를 통한 환희」라는 주제를 놓고 볼 때, 앞의 세 개의 악장은 제4악장의 전제로 놓여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마지막 악장에서 음악적으로나 내용적으로 앞의 세 개의 악장을 총괄하는 새로운 방법이 사용되고 있다. 아울러 제1악장의 기대감을 불러일으키는 공허한 시작 방법, 충실하고 장대한 코다, 제2악장 스케르초에서의 소나타 형식과 푸가토를 혼용하는 대규모의 구성법, 제3악장의 두 개의 주제를 지닌 변주곡이면서도 자유롭게 정돈된 방법, 그리고 마지막 악장에서의 변주에 기반을 둔 자유로운 형식, 이 모든 것은 그때까지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런 여러 가지 특징은 후대 작곡가들에게 끊임없이 큰 영향을 주었다. 악기 편성에서도 종래의 교향곡보다 수준이 높으며, 타악기 종류도 늘어나 있다.

9번 교향곡의 위대한 점 중 하나는, 이토록 오랫동안의 구상을 거쳐 만들어진 곡이 하나의 실로 짠 직물처럼 완벽한 자기완결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이 말은 1악장부터 3악장까지는 들어맞지만, 4악장까지 꼭 들어맞는 것은 아니다. 4악장에 구조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베르디도 4악장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었다. 반면 바그너는 4악장을 가장 위대한 음악으로 보았다. 4악장이 가장 위대한 음악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4악장의 축인 <환희의 주제>가 가장 위대한 주제인 것은 여심의 여지가 없다.

초연 이후, 곡은 빠르게 사람들의 기억에서 지워지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1830년대에 이 곡을 지속적으로 연주한 도시가 있었으니 바로 파리. 이윽고 18세기 중반에 이르러 바그너를 비롯한 지휘자들이 이 곡을 자주 연주하면서 이 곡은 오케스트라의 정규 레퍼토리로 자리 잡는다. 확실히 이 곡의 난이도는 그렇게 쉽지 않다. 그렇기에 레퍼토리로 자리 잡는데 오랜 세월이 걸린 것이다. 지휘자들은 이 곡이 강조하는 주제를 보강한다는 차원에서 편성을 계속 추가했다. 더블링은 필수적인 관례로 자리 잡았다. 20세기 중반에 들어 이 곡은 나치의 선전용 음악과 같은 수준으로 떨어지는 비극을 맞이했다. 그러나 이후의 사람들은 이 곡의 비극적인 오용을 지워내고 원래의 위치에 올려놓기 위해 애를 썼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을 때 번스타인이 이 곡의 가사를 <환희>에서 <자유>로 바꿔 연주한 것은 그 노력의 일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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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악장의 주제에 관한 논쟁은 학자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멜로디 위에 리듬을 새긴 이 주제는 전통적으로 메트로놈 소리에서 힌트를 얻은 것이라고 하는데, 밑의 사실들을 조합하다 보면 정말 그런 것인지조차 의심이 간다.

 이 메트로놈은 요한 네포무크 멜첼(1772~1838)이 고안한 것이라고 한다. 멜첼과 그의 동생 레오나르트 멜첼(1783~1855)은 1812년 초쯤에 베토벤과 친하게 지내기 시작했을 것이다. 형 요한은 《전쟁 교향곡》을 베토벤에게 위촉하여 큰 돈을 벌었던 인물이다(베토벤을 위해 보청기를 만든 것은 동생 멜첼이었다). 그가 베토벤과 친하게 지내게 된 것은 크로노미터라는 장치를 만들면서부터이다. 1813년 10월 13일 빈의 한 신문에 이 크로노미터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멜첼 씨는 기계와 음악에 대한 풍부한 지식을 지닌 것으로 유명하다.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여행에서 유명한 작곡가나 음악학교에서 많은 사람들이 노력을 기울였지만 결함이 있는 것으로 판명된 기계를 개선하여 많은 사람이 쓸 수 있도록 자신의 재능을 발휘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멜첼 씨는 문제를 해결하기 시작했으며, 최근 전시되었던 견본으로 빈의 작곡가들을 만족시켰다. 이것은 곧 국내의 여러 작곡가들의 주의를 끌게 될 것이다. 이 견본은 작곡가 살리에리, 베토벤, 비글, 기로베츠, 훔멜이 다양한 테스트를 했다. 궁정 악장 살리에리는 우선 하이든의 《천지창조》에서 이 크로노미터를 사용해보았다. 그리고 악보의 다양한 단계에 따라 다양한 템포를 맞출 수 있었다. 베토벤은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템포가 자주 잘못 이해되고 있는 것에 대해 유감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이 발명품으로 인해 자신이 생각하는 템포로 화려한 악곡 연주를 할 수 있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했다.」

이때의 크로노미터는 아직 메트로놈이라고 불리지 않았으며, 기계적인 메트로놈과는 달랐다. 메트로놈의 실제 발명자는 네덜란드의 기사 빙켈이라고 한다. 멜첼은 1815년 암스테르담에서 빙켈의 제품을 알게 되었고 그 아이디어를 그대로 빌려 파리에서 그것을 모델로 한 장치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1816년 파리에서 메트로놈이라는 이름으로 이 제품에 대한 특허를 취득하였다. 멜첼이 빈에 돌아온 것은 이듬해인 1817년이다.

노테봄의 「제1베토베니아나」에 의하면, 멜첼은 1815년이라는 연대를 메트로놈에 새겨넣었다고 한다. 하지만 메트로놈에 대한 소식이 빈에 전해진 것은 1816년 가을로 추정된다. 멜첼은 파리에 메트로놈 공장을 세워 대량생산을 하게 되고, 1817년 초에 영국, 프랑스, 미국에서 널리 인기를 끌게 된다. 그러나 멜첼이 목표로 삼았던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는 그리 큰 실적을 올리지 못했다.

그런데 쉰틀러는 그의 저서 「베토벤」에서 크로노미터와 메트로놈을 혼동하는 실수를 저질러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1812년 봄 베토벤, 기계 제조업자 멜첼, 브룬스비크 백작, 슈테판 폰 브로이닝 등의 여러 사람이 송별 식사를 위해 모였다. 베토벤은 린츠에 있는 동생 요한을 방문하게 되었고, 거기에서 《교향곡 제8번》을 작곡한 후에 보헤미아의 휴양지로 가려했다. 멜첼은 그 유명한 자동식 메트로놈으로 돈을 벌기 위해 영국으로 갈 예정이었으나, 그 계획을 연기하였다. 이 기계 사업가가 발명한 박자 측정기 메트로놈은 이미 살리에리, 베토벤, 비글 등 유명한 음악가들이 그 효과를 인정하고 대중들에게 추천을 할 만큼 진보한 것이었다. 베토벤은 기지를 발휘하여, 풍자하듯이 그 기계를 "지휘자가 필요없는 물건"이라고 말하며 카논을 즉흥적으로 작곡, 연주하였다. 그것을 곧 친구들도 노래하였다.」 

쉰틀러는 이 책에 그 카논 악보를 실었는데, 이 카논에서 《교향곡 제8번》의 알레그레토 스케르찬도가 만들어졌다고 서술하고 있다. 이 카논은 킨스키—할름 작품 목록 WoO 162에 해당하며 《교향곡 제8번》의 제2악장을 해설할 때 자주 인용되는 유명한 것이다. 이것은 《타타타 카논》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이 카논에 「타타타 사랑하는 멜첼 씨, 안녕, 안녕히 가십시오. 시대의 마법사, 위대한 메트로놈……」이라는 가사가 붙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몇 가지 문제점이 있다. 우선 저녁모임이 1812년 봄이었는지 의심스럽다. 왜냐하면 1810년 3월부터 1813년 2월까지 브룬스비크 백작은 빈에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백작이 그 자리에 없었던 것은 그렇다고 해도 당시 멜첼의 메트로놈이 유명해졌다는 것도 이상하다. 그리고 1820년 베토벤의 회화장에 의하면, 쉰틀러가 《교향곡 제8번》 제2악장 동기에 의한 카논의 오리지널 악보를 발견하지 못했으니 그것을 자신을 위해 써달라고 베토벤에게 부탁했다고 한다. 또한 1824년에 《타타타 카논》을 노래했던 즐거운 저녁은 1817년 말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멜첼은 1817년 말이 되어서야 빈에 돌아와 메트로놈을 선전하였다. 식사를 한 것이 1812년 봄이라면 당시 노래한 카논가사는 현재 남아 있는 것과는 다른 것이며 메트로놈이라는 이름도 아니었을 것이다. 1817년 말에 노래한 카논은 현재의 가사와 같은 카논으로 보이지만 이 연도도 쉰틀러가 적은 것이기 때문에 확실치는 않다. 단, 쉰틀러가 자신은 소프라노를 노래하고, 멜첼이 베이스를 노래했다고 적고 있으므로 멜첼이 빈에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 또한 현재 남아있는 이 카논 악보에는 메트로놈 속도로 8분음표가 72라고 적혀 있다. 노테봄에 의하면, 이것은 쉰틀러가 《교향곡 제8번》 제2악장을 보고 적은 것으로 보이며 베토벤 자신이 기록한 것은 아니다.

노테봄은 이 카논이 1812년 여름에 즉흥적으로 작곡된 것이며 교향곡 제8번 제2악장의 스케치 연대와는 모순이 없다고 말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 카논이 제2악장에 이용된 것으로 생각할 수는 없다. 1812년 봄에 이 저녁모임이 실제로 있었는지 확실치 않으며, 그때 베토벤이 이미 이 악장을 갖고 있었지만 그것을 쓰는 것을 중단했을 수도 있다. 이렇게 해서 카논과 제2악장의 관계는 미궁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위의 사실에서 도출할 수 있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1812년에 이미 크로노미터라는 이름의 박자를 재는 기계가 있었다.

 2) 베토벤은 1812년에 교향곡 8번 2악장을 착상, 완성했다.

 3) 크로노미터가 멜첼에 의해 개량되어, 메트로놈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것은 1815년이다.

 4) 멜첼은 1817년 말에야 빈으로 돌아와 메트로놈을 선전했으나 많이 팔리지는 않았다.

 5) 쉰틀러는 1812년 저녁모임에서 베토벤이 메트로놈을 보고 카논을 작곡했으며, 이 카논에서 교향곡 8번 2악장이 유래했다고 말한다.

 6) 그러나 1812년에 위와 같은 저녁모임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히 알 수 없다. 카논을 노래한 것은 1817년이라고 하는데, 사실 이것조차 확실치 않다.

 7) 만약 1812년에 저녁모임이 있었다면, 지금 전해지는 형태의 카논과는 달랐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1812년에는 멜첼이 빈에 없었고, 또 그 당시에는 '메트로놈'이라는 단어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진실은 미궁 속에 만악의 근원인 쉰틀러를 죽여야 합니다 아 이미 죽었지

 

 노테봄의 주장을 전용한다면, 카논의 작곡은 교향곡 8번과 비슷한 시기에 이루어진 것이 맞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교향곡 8번 2악장과 카논이 연관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섣부른 행동이다. 물론 교향곡을 쓰다 중단하고 카논을 작곡한 후, 다시 마음을 바꾸어 교향곡을 완성했을 수도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카논과 메트로놈의 연관성은 너무 희박해서 제쳐놓지 않고서는 판단이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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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향곡 8번 F장조 Op.93

영어 : Symphony No.8 in F major, Op.93

 

작곡 시기 : 1812년 여름에서 10월 사이

작곡 장소 : 테플리츠

초연 : 비공개 초연은 1813년 4월 20일 루돌프 대공의 사택에서 이루어지며, 공개 초연은 1814년 2월 27일 빈 레두텐잘에서 베토벤의 지휘로 이루어짐.

출판/판본 : 1817년

악기 편성 : 플루트 2, 오보에 2, 클라리넷(B♭) 2, 파곳 2, 호른(F, B♭) 2, 트럼펫(F) 2, 팀파니, 현악 5부

 

개설

이 곡을 구상한 것은 1811년이지만 본격적으로 작곡을 시작한 것은 《교향곡 제7번》을 완성한 7월부터로, 테플리츠에 머무르면서 활기차게 작업을 진척시켰다. 당시 베토벤은 두 번째로 테플리츠에 체류하는 것이었기에 한층 그 곳에 친숙해 있었다. 이렇게 완성한 이 교향곡은 밝고 명랑하며 베토벤의 작품으로서는 드물게 장중하지 않으므로 낭만적인 경향을 띠고 있기도 하다. 곡을 완성한 것은 1812년 10월, 동생 요한의 결혼으로 린츠에 갔을 때의 일이다. 당시 여러 가지 불쾌한 일도 있었다고 하는데, 다행히 곡은 거의 마무리되어 있었다.1)

이 곡은 밝고 명랑하다는 점에서 《교향곡 제7번》과 비슷하지만, 그 곡과 같은 힘이나 열기, 심각함은 없다. 그 때문에 이 《교향곡 제8번》은 지금까지의 교향곡보다 창작력이 후퇴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베토벤은 이 작품에서 지금까지 없던 것을 추구하여, 교향곡의 새로운 형식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이것을 위해 단도직입적으로 간결하게 쓰는 방법을 선택했다.

베커는 교향곡 7번과 8번을 비교하면서 '교향곡 제7번은 높은 봉우리로 올라가는 등반을 나타내고, 교향곡 제8번은 그 봉우리로부터 내려오는 데서 생겨나는 행복한 기분을 나타낸다.'고 표현했다. 교향곡 7번의 외향성, 치밀하면서도 활력이 넘치는 리듬, 큰 형식과 교향곡 8번은 소소한 고전성, 미묘한 관현악법을 비교한다면 베커의 주장은 일견 타당해 보인다.

그러나 내가 보는 베토벤의 교향곡 8번은 귀스타브 플로베르가 집필한 《통상관념사전》의 교향곡 버전이다. 베토벤은 지금까지의 고전 교향곡을 대각선에서, 살짝 비뚤게 바라본다. 여기서 당연하게 다루어지는 것은 하나도 없다. 화성은 실험을 계속하며(1악장의 비올라 패시지), 악구들은 때로 초보적인 수준으로 되풀이되다가 갑자기 예상치도 못한 방식으로 돌변한다. 이전의 낡아빠진 음악 양식들을 비꼬고 있으며(때로는 자기 자신도 조롱의 대상이 된다), 오케스트레이션은 황당할 정도로 혁신적이다. 느린 악장은 하나도 없다. 놀라운 것은 이 모든 것이 아주 전통적인 악기 편성과 양식 속에서 진행된다는 점이다. 고전의 옷을 입고 있지만, 머리로는 혁신을 진행하는 것이다. 고전을 가장한 대담한 진보라 할 수 있다. 물론 겉으로는 유쾌한 음악적 농담으로 치장한 모습이지만 말이다.

베토벤 자신은 이 교향곡을 "작은 교향곡 F장조"라 불렀다. 초연은 1814년 2월 27일, 교향곡 7번 및 전쟁 교향곡 <웰링턴의 승리> Op.91와 함께 있었다. 앞의 두 곡이 반응이 좋아서였는지 모르지만, 8번 교향곡도 호평을 받았다. 뒤에 언급하겠지만, 통상적인 관현악 편성을 사용하면서도 악기 사용법이 참신하다. 특히 팀파니는 악장에 따라 달라지는 음정 때문에 통상적인 두 벌(F-C) 대신 F-C-F의 세 벌을 갖추는 경우가 많다. 

 

1악장 (1.Allegro vivace e con brio 3/4) (F major)

소나타 형식. 이 악장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포르티시시모(fff)라는 '무지막지한' 다이내믹이 두 번이나 등장하는 악장이다. 시작은 가볍고 즐거운 1주제를 바이올린이 갑자기 등장시키며 시작한다. 주제의 후반부는 우아하게 꾸며져 있으며, 점차 리듬이 세분화되면서 F, A♭, D의 화음으로 마친다. 효과적인 한 마디 반의 휴지(Generalpause) 후에 파곳 반주 위에서 2주제를 바이올린으로 연주한다. 흐르는 듯 들리는 이 주제는 1주제 후반부 동기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어 저현이 감7 분산화음을 연주하고, 관현악 전체로 힘을 얻으면서 제시부를 마무리한다. 발전부는 1주제를 사용하고 있으며 재치 있고 유머가 있는데, 감7화음을 매개로 자유로운 조바꿈을 보인다. 재현부에서는 목관악기가 재현하는 2주제가 C장조로 나온다는 점이 독특하며(제시부에서는 원조의 버금딸림조, 재현부에서는 딸림조), 이어지는 코다는 리듬과 휴지로 교묘한 클라이맥스를 이루어낸다. 원래 코다는 34마디가 더 짧았는데, 프로테시시모를 거쳐 마지막 정점에 이르는 부분이 빠져 있었다. 이 부분을 추가하면서 베토벤은 교향곡 특유의 느낌을 완성했다. 마지막으로 1주제의 동기를 제시할 때 강박에 지속적인 sf가 등장하는 부분이 있는데 전혀 불쾌한 느낌이 들지 않는다. 마지막 악구도 대가의 솜씨로 능숙하게 마무리하는데 아무렇지도 않은 듯 p로 마무리하는지라 오히려 청자들을 당황하게 만든다.

 

2악장 (2.Allegretto scherzando 2/4) (B♭ major)

발전부가 없는 소나타 형식. 시계추의 똑딱거리는 리듬으로 일관하는 소나타 형식의 스케츠로 풍 악장. 멜첼이 베토벤을 위해 발명한 크로노미터를 보고 작곡했다는 "타타타 카논(WoO 162)"과 2악장은 어느 정도의 연관성이 있는지 알 수 없다. 목관이 스타카토로 연주하는 이 리듬 위에서 1바이올린이 역시 스타카토로 1주제를 연주하며 바로 첼로가 잇는다. 부주제는 아주 빠른 움직임을 보이는 64분음표로 되어 있다. 2악장의 주제와 멜첼의 메트로놈, 그리고 "타타타 카논"에 관한 문제는 다른 포스팅에서 설명하도록 하겠다.

 

3악장 (3.Tempo di Menuetto 3/4) (F major)

3부 형식. 교향곡 1번과 2번, 4번의 미뉴엣 악장은 스케르초의 성격이 강한 데 반해, 이 악장은 미뉴엣이라 불려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아마 스케츠로풍인 2악장과의 대비를 위해 미뉴엣을 쓴 것으로 보인다. 매우 풍자적인 목적이 강한 악장이다. 옛 형식에 과장된 분위기를 집어넣어 고리타분한 음악가들을 비꼬려는 의도가 숨어 있다. 약박을 강조하는 박절, 엇리듬이 두드러진다. 약박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어떤 악절들은 위악적으로 들리기까지 한다. 트리오는 대조적으로 목가적인 호른의 2중주를 강조하며 현의 분산화음이 붙고, 클라리넷과 바순이 가세한다.

 

4악장 (4.Allegro vivace 2/2) (F major)

소나타 형식. 경우에 따라서는 자유로운 론도 형식(A-B-A'-A-B-A'-A'-B-A-코다)으로 보는 것도 가능하겠지만, 1주제가 주도권을 쥔 소나타 형식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Allegro vivace라고 되어 있지만, 거의 Presto에 가깝게 연주하는 것이 좋다. 발전부와 코다가 아주 충실하며, 오케스트레이션에서 바순과 팀파니의 독특한 활용법이 눈에 띄는 악장이다(특히 코다의 팀파니 사용법이 매우 독특하다). 주제 선율은 2악장의 주요 주제와 비슷한 느낌을 던진다. 이것이 ppp까지 작아진 후, 엉뚱한 C#음이 돌출되고는 곧바로 ff로 폭발한다. 셋잇단음의 적절한 사용과 복합 리듬에 의한 클라이맥스 효과도 아주 일품이다. 코다도 독특한데, 화성이 극도로 이완된 으뜸조 패시지를 계속 연주하며 '도대체 이 교향곡 언제 끝나는 거야?'라는 의문을 유발케 한다. 이 코다가 유치하게 들린다는 사실은 어린아이도 다 안다. 베토벤은 이로서 자기 자신을 패러디하고 있다. 

 

 

각주

1) 메이너드 솔로몬에 의하면, 베토벤은 요한이 결혼을 하지 못하게 방해했다고 한다. 하지만 결국 결혼식은 예정대로 치러졌다.

 

 

Posted by 여엉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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