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그너 <파르지팔>

호세 반 담 (암포르타스), 쿠르트 몰 (구르네만츠), 페터 호프만 (파르지팔),

고트프리트 호르닉 (클링조르), 둔야 베흐초빅 (쿤드리)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지휘)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빈 국립 오페라 합창단, 빈 악우협회 합창단, 잘츠부르크 실내 합창단, 퇼처 소년 합창단

1981년 4월 11일 잘츠부르크 부활절 축제 실황 녹음

바그너의 마지막 작품은 사람들의 평이 많이 엇갈린다. 일종의 매너리즘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바그너가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예술이라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여기에서 새로운 음악의 맹아를 찾기도 한다. 어떤 사람은 이것을 일종의 우회로로 여긴다. 바그너의 다른 작품들이 그렇듯 이 작품 또한 하나의 일치된 결론이 쉽게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음악사적인 위치와는 별개로, 이 작품의 소재는 아주 유명하다.

중세인을 매혹시킨 성배의 전설과 아서왕 이야기를 토대로 볼프람 폰에셴바흐가 쓴 서사시 <파르치발>은 총 16권, 24812행의 대작이며, <장미 이야기>와 함께 중세 서사문학을 대표하는 걸작으로 손꼽힌다. 바그너가 이 <파르치발>을 처음으로 언급한 것은 1845년인데, 그가 작곡에 착수한 시기는 32년 후인 1877년이었다. 작업에 착수하면서 파르치발은 ‘파르지팔’로 이름이 바뀌었다. 그는 젊은 시절에 생각해 둔 구상을 잊지 않고 실행에 옮겼다. 바그너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두 가지였다. 종교적인 관점에 토대를 둔 구원에 대한 자신의 생각과 ‘시간을 초월한 공간의 창출’이 바로 그것이다. 구르네만츠가 순수한 바보인 파르지팔을 잡은 채 ‘이곳에서 시간은 공간으로 변한다’고 말할 때, 두 사람은 시간을 초월한 공간으로의 이동을 마친다. 몬살바트(몬잘바트) 성은 이미 로엔그린의 입을 통해 거론된 적이 있지만, 바그너는 이곳을 ‘구원의 산(Berg des Heils)'으로 여겼다. 분명한 것은 그는 기독교적 구원에 완전히 귀의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하나의 소재로 여겼다는 점이다. 만년의 바그너가 기독교에 깊이 빠져들었다는 증거는 희박하다. 그는 아마 기독교의 상징들을 소재로 사용하고 싶었을 것이다. 설정덕후니까

크게 보면 이 거대한 악극은 1막과 3막이 외벽을 이루고, 2막이 내진內陣을 이루는 아치형 구조로 되어 있다. 이것은 몬살바트 성과 클링조르의 마법 정원이라는 장소를 통해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이 구조에 따라 파르지팔의 성격은 변한다. 아니, 파르지팔의 성격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둘러싼 주위 환경과 그의 행동 패턴이 변한다. 1막에서 파르지팔은 단지 ‘순수한 바보’일 뿐이다. 그러나 2막에서 파르지팔은 ‘순수한 바보’이기 때문에 모든 것을 초월한 통찰력을 갖게 된다. 3막에서 그는 그 순수함을 통해 구원의 도구로서의 사명을 다한다.

카라얀이 순도 높은 소리에 집착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드물지만, 그것이 어떤 연주에서 정점을 이루었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나는 개인적으로 소리에 대한 그의 집착은 70년대 후반과 80년대 초반에 정점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 <파르지팔> 스튜디오 레코딩이 있다.

이 연주는 81년 잘츠부르크 부활절 축제 공연으로, 스튜디오 레코딩을 마친 직후다. 가수들은 스튜디오 레코딩과 적지 않게 겹친다. A♭장조로 시작하는 전주곡은 차갑게 정련된 스튜디로 레코딩과는 달리 다소 부산스럽다. 관현악만 본다면 스튜디오 레코딩이 조금 더 우위로 보인다. 특히 그 ‘소리’라는 측면에 한하여.

막이 오르면 구르네만츠가 시종들을 깨운다. 그들은 모두 암포르타스 왕의 상처에 대해 걱정한다. 쿤드리가 나타나 약을 건넨다. 기사와 시종들은 거친 용모를 갖춘 그녀를 경계하고 의심한다. 그런데 쿤드리 역을 맡은 베흐초빅은 참 평범해 보인다. 성녀와 창녀라는 양면성을 갖춘 인물이 아니라 극의 진행을 돕는 퍼즐조각처럼 보인다.

카라얀이 기용한 가수들은 극적이라기보다는 기능적이고 조직적이다. 구르네만츠는 가장 지혜롭지만, 결국 자신의 테두리를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그는 신성한 성배 신전의 수호를 위해 인간성을 어느 정도 포기한 사람들을 대표한다. 쿠르트 몰은 이러한 약점이 있는 영웅적 배역에 잘 어울린다. 위엄 있게 주위 사람들을 타이르지만 극의 진행방향을 바꿀 정도로 거대한 존재는 아니다. 암포르타스 역을 맡은 호세 반 담은 고통에 지치고 비감 있는 목소리를 적절하게 들려주고 있다. 파르지팔을 맡은 페터 호프만은 조금 불만인데, 자신이 나중에 어떤 일을 하게 될 지 너무 잘 아는 것처럼 들린다.

장면이 바뀌고 <성 금요일의 음악>에 따라 신전의 전경이 나타날 때 관현악은 차갑고 정련된 소리를 들려준다. 하지만 실황 녹음이라 섬세한 구석구석까지 들려주지 못한다는 것이 많이 아쉽다. 전왕 티투렐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암포르타스는 고통스럽게 자비를 간구한다. 여기서 반 담은 아까 전의 지친 목소리를 떨치고 곧게 뻗어나가는 음성을 들려준다. 위에서 목소리와 함께 성혈이 떨어져 성배에 가득 담긴다. 소년들은 성배와 성혈에 관한 신비, 기독교의 불명료성을 상징하는 가장 큰 신비에 대해 노래한다. 곧 기사들이 이 신성한 노래에 동참한다. <성 금요일의 음악>이 천천히 신전의 주랑을 감싸 안는다. 파르지팔은 암포르타스의 고통을 보고 무언가를 느끼나, 결국 그의 마음은 움직이지 않는다. 구르네만츠는 그런 ‘바보’ 파르지팔을 내쫓는다.

2막의 무대인 클링조르의 성은 거울에 비친 성배의 신전이다. 클링조르는 성을 포기하고 사악한 마법을 손에 넣었다. 클링조르 역을 맡은 호르닉의 목소리는 차갑다. 그는 그 차가운 목소리로 쿤드리를 정교하게 조종한다. 클링조르가 쿤드리를 ‘마녀’라고 부를 때, 목관은 소름끼치는 상승 음계로 옥타브를 뛰어넘는다.

쿤드리는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악업 속에서 끊임없이 몸부림쳐야 한다. 그녀의 선의는 모두를 파멸로 몰아넣는다. 그녀의 악업을 끊어줄 사람은 그녀에게 가장 무관심한 사람이며, 그녀에게 약속된 평온은 곧 죽음이다.

자신에게 달려든 클링조르의 기사들을 모두 무찌른 후, 파르지팔은 꽃의 처녀들에게 둘러싸인다. 역시 미인계는 시대를 불문하고 잘 먹힌다 사막에 피는 꽃밭처럼 거짓되고 덧없는 존재들이 파르지팔에게 사랑을 속삭이며 그를 차지하기 위해 싸운다. 그러나 파르지팔은 그들이 왜 싸우는지를 이해하지 못한다. 쿤드리가 나타나고 처녀들은 물러난다. 쿤드리는 그에게 과거의 기억을 일깨우고, 고통을 이해시키고, 사랑을 줌으로써 그를 순수한 바보 상태에서 깨워 노예로 삼으려 한다. 그러나 쿤드리(또는 클링조르)가 의도한 것과는 정반대로, 파르지팔은 쿤드리의 키스를 받고 비로소 암포르타스의 무서운 고통을 이해하게 된다. 그 고통은 육체적 사랑을 포기한 자들이 공유하는 감정, 즉 구세주의 피흘림을 이해하는 열쇠가 된다. 순수한 바보이기에 도달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초월한 통찰의 경지에 이른 것이다. 쿤드리는 그 앞에서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비웃은 자신의 과거에 대해 말한다. 그 때 그녀의 음성은 옥타브를 뛰어넘는다. 그것은 저주의 웃음이다. 그녀는 눈물을 흘려야 할 때마다 웃게 될 것이다. 그 저주받은 악업에서 벗어나기 위해 끝없이 환생을 거쳐야 한다.

파르지팔은 모두를 이해하기 위해 개인에 대한 이해를 포기한다. 그는 쿤드리에게 암포르타스에게로 가는 길을 묻는다. 쿤드리는 그를 저주하며 클링조르를 부른다. 클링조르는 성창을 들고 나타나 그에게 그 창을 던진다. 그러나 창은 그의 머리 위에서 멈춰선다. 파르지팔은 성창을 들고 클링조르의 ‘거짓된 호화로움’을 부숴버린다. 정원은 황야로 변하고, 꽃은 시들어 말라비틀어진다. 파르지팔은 쿤드리에게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 잘 알 것이라 말한 후 사라진다.

3막이 오르면 무대는 다시 1막과 같은 공간으로 돌아오지만, 많은 시간이 지나가 있다. 시간은 흘러도 공간은 변하지 않는다. 늙은 구르네만츠는 쿤드리를 발견한다. 그녀에게서 이전의 거친 모습은 사라져 있다. 그녀는 무장을 한 기사를 발견한다. 구르네만츠는 성스러운 곳에 무장을 하고 나타난 기사를 질책한다. 그가 무장을 벗는다. 파르지팔이다. 그는 손에 성창을 들고 있다. 구르네만츠와 파르지팔은 서로 감격하여 그 동안의 일을 묻는다. 파르지팔은 자신의 오랜 방황을, 구르네만츠는 성배의 신전에서 벌어진 쇠락과 죽음의 기미를 얘기해준다.

이제 극은 완전히 성경과 흡사하게 흘러간다. 쿤드리는 파르지팔의 발을 씻기고 향유를 바른다. 세례를 통해 완전히 깨끗해진 파르지팔은 쿤드리에게 세례를 내린다. 이제 성 금요일의 음악은 기적을 상징하는 제례 음악으로 화한다. 파르지팔은 성창을 들고 암포르타스 왕에게로 향한다. 왕의 상처가 치유되면서 모든 것이 제 자리를 찾는다. 죄인의 피로 얼룩진 성창은 그 피를 씻고 구세주의 피로 깨끗해진다. 성창과 성배의 근친관계도 이로 인해 제 자리를 찾는다. 파르지팔은 성배로 나아가 성배를 들어올린다. 이로써 구원이 완료된다. 쿤드리는 비로소 악업의 그물을 벗고 죽음을 맞이한다.

카라얀의 <파르지팔> 실황 녹음이라는 데서 참으로 중요한 기록이지만, 그 칼날 같은 세부 묘사가 살아나지 못한다는 점이 참으로 아쉽다. 가수들 중 호세 반 담이나 쿠르트 몰은 뛰어나지만 쿤드리 역을 맡은 베흐초빅은 잘 만들어진 자동인형 같은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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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오페라 <살로메> Op.54

카를 발터 뵘 (헤로데스), 아그네스 발챠 (헤로디아스), 힐데가르트 베흐렌스 (살로메),

호세 반 담 (요하난), 비에스와프 오흐만 (나라보트)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지휘) /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1977년 7월 26일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실황연주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오페라 중 첫 걸작이라 할 수 있을 오페라 <살로메>는 당시 금기시되고 있던 오스카 와일드의 희곡을 대본으로 삼았고, 초연의 센세이셔널함은 이미 예정된 것이었다. 오스카 와일드는 성경의 설화를 옮기면서 다른 사람들이 주목하지 않던 부분, 즉 살로메의 섹슈얼리티에 주목했다. 성경의 살로메는 얼음처럼 차갑고 감정 없는 기계처럼 행동하지만, 오스카 와일드가 그려낸 살로메는 관능적이고 에로틱한 충동에 몸부림치는, 정신적으로 미성숙하지만 매력적인 괴물이다. 여기서 그는 세례 요한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고, 그 사랑을 얻지 못하자 그의 목을 얻어낸 후, 그것을 보면서 희열에 빠진다. 헤롯왕은 그 모습을 보고 공포에 질려 병사들에게 그녀를 죽이라 명한다. 슈트라우스는 <살로메>의 독일어 번역본을 읽으면서 오페라를 만들기에 부적당한 부분을 쳐냈고, 여백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악상들을 스케치해나갔다. 이성을 마비시키는 일곱 베일의 춤을 추고 난 후 세례 요한의 차가운 입술에 키스할 수 있도록 은쟁반에 그의 머리를 가져오게 해달라고 간청하는 살로메에게서는 일종의 네크로필리아(시체애호증)적인 성향마저 엿보인다. 그라츠에서 열린 초연에 참석한 인물들은 화려한 진용을 갖추어 이 작곡가가 얼마나 대단한 명성을 가지고 있었는지 말해준다. 히틀러는 나중에 자신이 <살로메> 초연에 참석한 것인지 아닌지 가늠하기 힘든, 모호한 말들을 남겼다.

<장미의 기사>를 제외하면, 카라얀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오페라 연주는 생각만큼 많지 않다. 이 <살로메>의 녹음기록도 EMI에서 진행한 스튜디오 레코딩을 제외한다면 지금 설명할 1977년 잘츠부르크 실황녹음밖에 남아 있지 않다. 그만큼 신중에 신중을 기울였다는 뜻일 텐데(그 덕에 <엘렉트라> 스튜디오 레코딩은 하나도 남기지 못했다) 그렇다면 이 연주는 이전의 연주들과 어떻게 다를까?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곡 중 가장 관능적이라 할 수 있는 이 오페라는 미끄러지듯 흐르는 목관의 C#단조로 시작한다. 카라얀은 빈 필의 소리에서 벨벳 천을 연상시키는 관능성을 최대한 이끌어내는 데 주력한다. 빈 필은 예의 자극적인 소리를 자제하고 뱀처럼 요염한 소리를 뽑아낸다. 나라보트의 비에스와프 오흐만은 딱히 두드러진다고 하기는 힘들지만 그래도 자기 역할에 충실하다. 항상 살로메를 바라보며 그녀의 요구를 결코 거절하지 못하는 역할 말이다. 병사 역할을 맡은 게르트 나인슈테트와 쿠르트 라이들도 안정감 있는 조역 역할에 충실하다. 중요한 것은 살로메 역을 맡은 힐데가르트 베흐렌스인데, 지금까지 카라얀의 ‘변태적인’ 캐스팅을 생각해 보았을 때 베흐렌스의 살로메는 이 관능적인 역할에 아주 잘 어울린다. 그녀는 유혹하는 목소리로 끊임없이 세례 요한을 바란다. 이에 반해 세례 요한 역의 호세 반 담은 영웅적이고 강인한 목소리를 통해 어떠한 세속적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을 ‘예언자’ 역할에 충실하려 노력한다. 그러나 반 담의 목소리는, 신성하다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세속적이다. 신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라기보다는 현세의 영웅을 연상시킨다.

세례 요한이 우물에서 나오면 살로메의 동기가 요동친다. 빈 필의 관현악은 요동친다기보다는 능란하게 움직인다. 세례 요한은 참회와 순수를 원하지만, 살로메는 그의 육체적 아름다움에 매혹된다. 여기서 호세 반 담은 제 역할을 아주 잘 해내는데, 그는 살로메를 굳건하게 뿌리친다. 반 담의 영웅적인 목소리가 여기서 빛을 발한다. 하지만 살로메는 포기하지 않고, 마침내 그의 입술을 원한다. 그 모습을 견디다 못한 나라보트는 결국 스스로 자기의 목숨을 끊는다. 요하난도 살로메도 그에게 시선을 돌리지 않는다. 살로메의 시선은 요하난에게, 요하난의 시선은 야훼에게 맞춰져 있다. 요하난은 관능적 유혹을 포기하지 않는 살로메에게 저주를 퍼붓지만, 그의 주위는 이미 살로메의 동기가 완전히 포위하고 있다. 결말은 정해져 있는 것이다.

베이스 클라리넷과 바순의 무거운 저음이 끝나면 오보에가 헤롯왕의 동기를 끌고 온다. 헤롯왕과 헤로디아스가 등장한다. 경박하고 불안한 독재자인 헤롯왕과 고압적인 헤로디아스 역할은 각각 카를 발터 뵘과 아그네스 발차가 맡았는데, 둘 다 극을 지배할 정도로 대단한 역량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각자 역할에 충실한 느낌이다(헤롯왕이 좀 더 변태적이었다면 좋지 않았을까?). 관현악처럼, 대부분의 가수들도 자기 역할에 충실한 선에 머무르는 것이다.

우물 밑에서 세례 요한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원래 성경에서는 세례 요한에 대한 헤로디아스의 증오가 가장 큰 파국의 원인이 되지만, 이 극의 중심은 살로메이며, 파국이 벌어지는 가장 큰 원인도 살로메의 소유욕에 맞춰져 있다. 유대인들의 교리적인 논쟁이 지나간 후(이 부분은 <짜라투스투라> 중 교조적인 느낌의 <학문을 위하여> 푸가 부분을 연상케 한다), 헤롯왕은 나사렛 예수에 대해 말하는 나사렛인들의 말을 듣는다. 이어 헤롯왕은 살로메에게 춤을 출 것을 명한다. 살로메는 묻는다. 자신이 춤을 추면 무슨 소원이든 들어줄 것이냐고. 헤롯왕은 그러마고 맹세한다. 일곱 베일의 춤이 시작된다. 연주 효과는 뛰어나지만 음악적인 측면에서는 과장이 지나쳐 높은 평가를 받지 못하는 이 <일곱 베일의 춤>은 항상 논쟁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빈 필이 연주하는 <일곱 베일의 춤>은 그 자체만으로도 화려하다. 카라얀이 지휘하는 슈트라우스 오페라의 가장 큰 장점인 명석함이 여기서 극에 달한다. 그 명석함이란 조였다 풀기를 반복하면서 클라이맥스에 도달하는 것이다. 곡에 대한 빼어난 통찰이 없다면 불가능한 경지다. 칼 뵘의 강공으로 무장한 일도양단의 직선적인 해석과는 정반대 편에 서 있는 셈이다.

춤이 끝나고 살로메는 헤롯왕의 품에 안겨 말한다. 은쟁반에 세례 요한의 머리를 담아 가져와 달라고. 그 순간 극히 불안정한 화성이 곡을 칭칭 옭아맨다. 헤롯왕은 어떻게든 실수를 만회하려고 하지만 살로메는 요지부동이다. 여기서 곡을 이끌어나가는 것은 가수들이 아니라 지휘자와 관현악이다. 가수들은 관현악에 기민하게 맞추어 제 역할을 해 나간다.

결국 헤롯왕은 살로메의 요구에 굴복해 세례 요한의 머리를 내준다. 관현악은 그 순간 무려 열두 개의 달하는 반음계를 포함한 패시지와 일곱 음짜리 화성을 동원하며 극한에 달한 감정 상태를 표현한다. 이 음은 해결을 요구하지만, 해결은 아주 늦게 이루어진다. 그 동안 살로메는 세례 요한의 목이 잘리는 것을 지켜본다.

은쟁반에 담긴 세례 요한의 목이 우물에서 올라온다. 살로메는 그 잘린 목을 들고 사랑의 희열에 빠져든다. 정말로 잘린 목을 사람 앞에 디미는 것 같은 연출과 음악이 아니면 이 오페라는 여기서 휘청거리게 되는데, 이 연주는 여기서도 함정을 잘 피해나간다. 헤롯왕은 파국이 눈앞에 있음을 알고 불을 끄게 한다. 무대 위의 모든 빛이 사라진다. 살로메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세례 요한의 입술에 입을 맞춘다. 이제 살로메의 동기는 달빛 아래 정점에 달한다. 헤롯왕은 돌아서서 그녀를 죽이라 명한다. 병사들이 방패로 살로메를 짓눌러 죽이면서 극은 막을 내린다.

이 연주의 주인공은 단연 지휘자와 오케스트라다. 시종일관 극을 지배하며 곡의 퇴폐적이고 다채로운 색감을 정교하게 뽑아낸다. 가수진 중에서는 주연인 베흐렌스와 세례 요한 역을 맡은 호세 반 담이 제일 두드러지며, 나머지 가수들은 자기 역할에 충실한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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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알프스 교향곡> Op.64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지휘) /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연주

1987년 11월 1일 베를린 실황

슈트라우스는 1880년대 후반부터 꾸준히 대규모 관현악곡을 썼다. 이 일련의 관현악곡을 연대순으로 늘어놓으면, <알프스 교향곡>은 그 끝에 위치해 있다. <메타모르포젠>이 있기는 하지만 그 곡은 다른 관현악곡들과 무려 30년이나 떨어져 있기 때문에 일종의 에필로그로 보아도 무방하다.

<알프스 교향곡>은 슈트라우스 관현악곡의 마지막을 장식하듯 충분히 장대하다. 묘사적 표제음악인 이 관현악곡은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22개의 장면을 다루고 있으며, 4관 편성의 금관에 각종 타악기는 물론, 윈드머신이나 썬더머신까지 동원하여 대규모 관현악을 다루는 작곡가의 재능을 과시한다. 그러나 곡의 흐름은 슈트라우스가 자주 보여주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신비스러운 배경에서 곡의 중심이 되는 장소가 출현하고, 음악의 흐름은 즐거운 절정으로 상승한다. 그러나 절정은 결코 길지 않다. 폭풍우가 몰아치고 등산객들은 하산한다. 그리고 곡은 출발점인 신비스러운 밤으로 다시 돌아간다.

1930년대 이래 슈트라우스와 인연을 맺으며 지속적으로 의견을 교환했던 카라얀은 슈트라우스 관현악곡 연주에 있어 독보적인 위치를 구축했지만, 유독 <알프스 교향곡>만은 자주 연주하지 않았다. 슈트라우스처럼, 카라얀도 자신의 장대한 디스코그라피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곡으로 <알프스 교향곡>을 꼽았던 게 아닌가 싶다. 아무튼 1980년에 스튜디오 레코딩을 완성한 후, 카라얀은 이 곡의 실황 녹음을 4종 남겼다. 이 연주는 그 4종의 실황 중 마지막 실황녹음이다. 당시 카라얀은 79세였고 여러모로 지친 기색이 역력한 상태였다. 그런데 이 연주에서는 그 지친 기색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재미있다.

템포는 스튜디오 레코딩보다 약간 느리다. 느리기보다는 여유가 있다고 보는 편이 맞을 것이다. 70년대 이후 카라얀은 음향을 한 덩어리로 만들어 거기에서 특정 악기를 두드러지게 만드는 편을 애호했는데, 그 음향이 일출 장면에서 혼연일체를 이루어 알프스의 준봉을 그려낸다. 그런데 일출 직전에 뜬금없이 북의 타격이 들린다. 사소한 실수로 보인다.

이 연주는 여러모로 대조적인 관점을 보여주는 뵘(DG)-켐페(EMI)의 드레스덴 연주와 비교하는 것이 재미있는데, 지나치게 소박하다 못해 촌스럽게 들리는 뵘이나 켐페의 연주와는 달리 카라얀은 세밀화가로서의 자신의 재능을 맘껏 발산하고 있다. 켐페는 목가적인 호른에 약음기를 적용해 멀리서 울리는 것 같은 효과를 채택했는데, 카라얀은 그 호른이 전면에 나와 들리는 것 같다. 그리고 그 직후 호른의 프레이징을 전면에 끌어내는 것은 켐페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다.

카라얀의 연주는 특정 악기가 두드러지는 부분에서는 템포가 느려지고, 총주 부분에서는 템포가 빨라지는 경향을 찾을 수 있는데, 특히 초반에 숲으로 진입하는 장면이나 폭풍우가 시작하는 부분에서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 실황 녹음이다보니 타악기가 조금 더 두드러지는 것도 특징이다.

정상 장면부터 지휘자는 엄청난 물량 공세를 보여준다. 세부적인 음향까지 치밀하게 다듬는 것은 본인의 스튜디오 녹음이나 비쉬코프보다 조금 처지지만(해적반 실황이라 그렇게 들릴 수도 있다) 그만큼 압도적인 음압을 보여준다. 굳이 비교하자면 하이팅크(LSO)와 꼽을 수 있겠는데, 하이팅크가 좀 더 저돌적이고 직설적이라면 카라얀은 좀 더 관현악을 능수능란하게 다룬다.

정상의 즐거운 비경이 끝나고, 안개가 점점 밀려든다. 이 부분에서 카라얀은 저현과 바순의 프레이징 하나하나를 강조해서(켐페는 이 부분을 그냥 지나친다) 스멀스멀 밀려드는 기분을 잘 표현하고 있다. ‘상승’이 ‘하강’으로 바뀌면서 곡의 주된 테마도 단조로 바뀐다. 불길한 분위기가 대기를 가득 채운다. 오보에의 지속적인 단음이 안개 속에 숨어 보이지 않는 새소리처럼 들려온다. 피콜로의 고음 아포지아투라가 들려오고 팀파니가 멀리서 천둥소리를 낸다. 폭풍우가 밀려온다.

트럼펫의 재등장과 팀파니의 첫 번째 강주에서 카라얀은 템포를 두 배 이상으로 느리게 해 타격감을 끝까지 밀고나간다. 폭풍우 장면이 여러모로 이 연주의 하이라이트인데, 처음에는 템포를 느리게 가져갔다가 관현악 전체의 첫 번째 투티가 있고 난 후에는 템포를 원래대로 회복하고, 두 번째 팀파니 타격 이후에는 아주 빠르게 템포를 가져간다. 실황 녹음인 만큼 조금 더 급박하며, 특히 팀파니와 큰북의 타격감이 아주 일품이다(템포는 다시 원래대로 돌아온다). 금관악기 중에서는 튜바가 두드러지는데, 튜바가 폭풍우 장면을 마무리 짓는 상승 음계를 두 번 연주한다는 사실을 이 연주를 듣고 처음 알았다(켐페는 튜바의 처음 제시를 두드러지지 않게 처리하기 때문이다). 폭풍우가 끝난 순간의 팀파니 처리는 대부분의 연주가 약주로 처리하고, 카라얀도 이 노선을 따르고 있다. 이 부분을 강주로 처리한 연주는 네메 야르비의 실황 연주 말고는 들어본 적이 없다.

폭풍우는 그치고, 현악기는 구름을 뚫고 다시 내리쬐는 햇살을 묘사한다. 멀리서 소박한 호른과 오르간이 들려온다. 한적한 교회당이 있는 시골 마을로 내려온 것이다. 아쉬운 것은 녹음 때문인지 오르간이 아주 불투명하게 들린다는 점이다. 정식 실황 녹음이 아니라 먼 곳에 위치한 악기까지 세밀하게 잡지는 못하는 것 같다.

마지막 하산길의 템포는 아주 느긋하다. 현악기의 프레이징은 눈치채기 힘들게 서서히 장조에서 단조로 바뀐다. 신비스러운 정적이 다시 밤을 몰고 온다. 처음 곡을 열었던 B♭음의 페달 포인트 위에서 곡은 B♭단조에 안착하며 끝난다.

이 연주에서 유일하게 불만인 점은 매우 탁한 해상도다. 그것만 없다면 만족스럽게 감상할 수 있는 실황 녹음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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