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처럼 음악이 끌릴 때가 있다. 오늘은 그 대상이 메시앙이었다.

 가장 먼저 끌린 것은 <투랑갈릴라 교향곡>. 그 중에서도 5악장 <별의 피의 노래>가 끌렸다.

 별의 피라니. 별빛이 적색편이라도 되었다는 말일까.

 음반을 걸자마자, 엄청난 하중의 음악이 두 귀에 육박해 들어왔다.

 

 밀란 쿤데라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서두에서 영원회귀와, 무거움과 가벼움에 대해 얘기한다.

 

"가장 무거운 짐이 우리를 짓누르고 허리를 휘게 만들어 땅바닥에 깔아 눕힌다. 그런데 유사 이래 모든 연애시에서 여자는 남자 육체의 하중을 갈망했다. 따라서 무거운 짐은 동시에 가장 격렬한 완성에 대한 이미지가 되기도 한다. 짐이 무거우면 무거울수록, 우리 삶이 지상에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우리 삶은 보다 생생하고 진실해진다."

-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pp. 12~13.

 

 쿤데라의 말을 긍정하면, 사랑하는 여자는 사랑하는 남자의 하중을 갈망한다. 이졸데는 트리스탄의 무게를 갈망했고, 파르바티는 시바의 '파괴적인' 무게를 갈망했다. 숨쉴 틈도 없이 빠르게 전개되는 짓누름과 깔림의 애무 속에서, 사랑은 자신의 환희를 창조하기 위해 다른 모든 감정을 파괴해버린다.

 메시앙이 죽기 직전 진행하던 작업 중에는 <투랑갈릴라 교향곡>의 개정 작업이 있었다. 1990년에 탈고한 완성물을 보면, 5악장 메트로놈 지시가 점8분음표 132에서 138로 고쳐진 것을 볼 수 있다. 메시앙은 가뜩이나 빠른 희열과 오르가즘의 속도를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더 끌어올렸다(82세 나이에 그런 결단을 내렸다는 점도 대단하다). 더 빠른 속도는 더 많은 하중을 청자의 귀에 부여한다. 쿤데라의 말처럼, '짐이 무거우면 무거울수록, 우리 삶이 지상에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우리 삶은 보다 생생하고 진실해진다.'

 

* * * 

 

 반복은 회귀를 떠오르게 한다. 음악에서의 반복은 태초의 시원을 궁구하는 우리의 근원적인 욕망의 무의식적인 분출이며, 반복의 대상이 되는 음표를 '프레이즈 중의 하나로 흘러갈 때'와는 완전히 다른 시각으로 관찰하게 만든다.

 

"우리 인생의 매순간이 무한히 반복되어야 한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혔듯 영원성에 못 박힌 꼴이 될 것이다. 이런 발상은 잔혹하다. 영원한 회귀의 세상에서는 몸짓 하나하나가 견딜 수 없는 책임의 짐을 떠맡는다. 바로 그 때문에 니체는 영원 회귀의 사상은 가장 무거운 짐das schwerste Gewicht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p. 12.

 

 <아기예수를 바라보는 20개의 시선> 중 11곡, <성모의 첫 성체배령Premiere Communion de la Vierge>에서 음악은 D음의 영원성과 접속한다. 악절마다 32번씩 반복되는 D음은 쇼팽의 전주곡 마지막을 장식하는 3개의 조종과는 전혀 다른 형태의 무게로, 형이상학적인 영원성의 무게로 귀에 못박힌다.

 태어난 순간부터 초월과 영원성이 예정되어 있는 존재가 짊어진 짐은 얼마나 무거운 것일까. 예수와 니체를 한 문단 안에 묶어 화해시킨 쿤데라의 통찰은 그래서 놀랍다. '영원한 회귀의 세상에서는 몸짓 하나하나가 견딜 수 없는 책임의 짐을 떠맡'으니까.

 

* * *

 

 우주를 헤엄치는 연어를 상상해보자. 지느러미는 진공에 순응하고 꼬리는 진공을 가른다. 연어는 우리가 비가역적인 흐름이라고 상상하는 강의 흐름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 상류로 나아간다. 당연히 우주를 헤엄치는 연어는, 비가역적인 흐름의 으뜸인 시간을 헤엄쳐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메시앙은 <피안의 빛> 마지막 악장 <그리스도, 천국의 빛>에서 바그너적 공간을 무한으로 확대시킨다. 바그너는 <로엔그린> 1막 전주곡에서 상상의 천상을 A장조의 틀 속에서 그려냈는데, 메시앙은 사건의 진행과 시간의 흐름이 분명한 바그너적 공간에서 '시간의 흐름을 지워버린다.' 이제 음악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며, 태초의 순간을 향하여 끊임없이 회귀하는 우주적 연어와 하나가 된다.

 

 "14세기 아프리카의 두 왕국 사이에 벌어진 전쟁 와중에 30만 흑인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처참하게 죽어 갔어도 세상 면모가 바뀌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인생의 잔혹함이나 아름다움 따위는 전혀 염두에 둘 필요가 없는 셈이다.

 이 전쟁이 영원한 회귀를 통해 셀 수 없을 만큼 반복된다면 14세기 아프리카의 두 왕국 사이에 벌어진 전쟁도 뭔가 달라질 수 있을까?

 그렇다. 그 전쟁은 우뚝 솟아올라 영속되는 한 덩어리로 변할 것이고 그 전쟁의 부조리는 치유될 수 없을 것이다."

-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pp. 9~10.

 

 CD 40장에 가까운 방대한 분량의 음악을 작곡한 메시앙의 음악을 통틀어 이 '마지막 순간'만큼 영원회귀에 가까운 곡도 없다. 음악적 연어가 우주적 연어와 합치하는 순간이다. 우리 모두는 태초의 빛이자 천국의 빛을 잠시 떠나온 방랑객이자 망명자에 지나지 않으며, 결국은 빛으로 돌아갈 존재에 불과하다. 비가역적인 시간의 흐름이 제기하는 모순을 뚫고.

 영원한 회귀 앞에서 음악은 '우뚝 솟아올라 영속되는 한 덩어리로' 변한다. 하지만 쿤데라의 문학이 제기하는 '치유될 수 없는 (전쟁의) 부조리'와 달리, 메시앙의 음악에서 부조리는 찾아볼 수 없다. 메시앙의 '영속성'이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는 것, 곧 부조리의 융합이니까.

 

* * * 

 

 메시앙의 <시간의 종말을 위한 4중주>에서 가장 강조되는 색채는 노을빛에 가까운 블루 오렌지다. 낮이 밤에 주도권을 내주기 직전 마지막 황혼을 체감하는 시간, 주황색과 파란색이라는 극단의 두 세계가 화해하는 시간의 색채다. 세상을 아름답게 미화하는 착란의 색채이기도 하다.

 

"두 번째 악장의 어떤 구절들이 여기 돌아온다. 힘으로 가득 찬 천사가 나타나고, 그리고 무엇보다 천사를 덮은 무지개가 나타난다(무지개는 평화와 지혜와 빛을 발산하고 소리를 내는 모든 바이브레이션의 상징이다). 나의 꿈 속에서 나는 정리된 노래와 멜로디를 듣고 색깔과 형태를 본다. 그 후에 일시적인 이러한 단계 후에 나는 비현실을 통과하고 황홀경의 느낌으로 초인적인 소리와 색깔의 선회하는 소용돌이에 빠진다. 이 불의 검, 파랑과 오렌지 색, 용암의 분출, 난폭한 별; 여기에 뒤죽박죽이 있다. 여기에 무지개가 있다."

 

 음악가의 악곡 해설이라기보다는 중세 묵시 예언자의 신비로움을 연상케하는 이 악장의 제목은 악곡 해설 이상으로 의미심장하다. <세상의 종말을 고하는 천사를 위한 무지개의 착란Fouillis d'arcs-en-ciel, pour l'ange qui annonce la fin>.

 이 악장이 7악장이라는 것을 기억하자. 마지막 8악장은 '영원성'에 바쳐져야 하기 때문에, 7악장은 8악장으로 들어가기 전 마지막 단계, 일곱 개의 스펙트럼이 하나의 악장으로 합쳐지는 과정이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색채는 2악장에서도 등장했었던 노을 빛의 블루 오렌지 화음이다. 노을 지는 시간대는 가장 현실적인 비현실의 시간이다. 상상이 영원을 향해 이륙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석양으로 오렌지 빛을 띤 구름은 모든 것을 향수의 매력으로 빛나게 한다. 단두대조차도."

-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p. 10.

 

 종말의 시간을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은 우리가 그것을 비현실로 인지하기 때문이다. 노을빛을 띤 단두대나, 눈을 멀게 하는 섬광을 뿜어내는 코발트 폭탄의 빛에 매료되는 것도 마찬가지 기제일 수 있다. 우리는 우리를 파괴할 정도로 치명적인 아름다움에 매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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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토프 베르트랑

 

 

 

크리스토프 베르트랑. 1981424일 생, 2010917일 자살.

내가 크리스토프 베르트랑의 삶에 대해 아는 것은 이것이 전부다. 그리고 그의 생에 대해 할 얘기도 저것이 전부다. 내가 이 작곡가에 대해 하려는 말은 전부 음악에 관한 것이니까.

난 저번 달까지만 해도 그의 음악을 잘 몰랐다. 부끄럽지만, 얼마 전까지는 그의 존재 자체를 모르고 있었다. 이제 와서야 뒤늦게 그의 음악을 듣고 이런 글을 남기는 것은, 아방가르드 음악을 듣는 사람으로서 이런 글은 남겨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베르트랑은 짧은 생에 어울리게 과작했다. 물론 과작이 누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아쉽기도 하다. 내가 글을 쓰려는 그의 곡은, 그 중 세 개다.

 

첫 번째 곡 <스케일>. 제목 그대로 쉴 새 없이 이어지는 스케일의 연속이 귀를 훑고 지나가는 곡이다. 곡을 들으면서 제일 먼저 떠올린 문장은 본능이 소리를 육화시킨다는 것이었다. 베르트랑은 넘쳐흐르는, 아니 터져 나오는 음향의 세례를 영리하게 소리로 육화시킬 줄 알았다. 그는 젊은 작곡가가 재능과 감각으로 아방가르드 음악의 기교들을 휘저으면 얼마나 기가 막히게 청각을 자극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수시로 등장하는 엇갈리는 인토네이션은 음향의 교란을 극단으로 끌고 가고, 중반부 지속음 사이에서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스케일의 연속은 마치 바다 위에서 피어오르는 섬 같다. 클래식 음악을 듣는 이에게는 걸음마만큼이나 기초적인 스케일이라는 소재로 이런 대곡을 만든 재능이 놀랍다.

 

두 번째 곡 <현기증>. 11개의 섹션으로 이루어진 곡이다. 작곡가가 여기에 피보나치 수열을 도입했다고 하는데, 그건 일단 제쳐놓고 느낌 받은 대로 쓰겠다. 일단 귀에 들어오는 것은 온갖 형태의 지저분한 소리였다. 논 비브라토, 글리산도, 콜 레뇨, 불협화음으로 이루어진 스케일 등등…… 그러나 이것들은 기본 도구다. 베르트랑은 이 소재들을 꼬고 꼬고 또 꼰다. 온갖 지저분한 소리들의 협착이, 반대로 정묘한 형상을 일구어낸다. 12, 23으로, 35, 58, 813으로 꼬여 들어간다. 물론, 작곡가는 어디까지 꼬아야 아름다움이 극대화되는지 알고 있다. 다시 138, 85, 53으로, 32, 21로 풀려나간다. 그 꼬이고 풀려나가는 과정은, 물질계의 단순한 형상이 집합해 복잡한 형상을 이루고 역으로 살펴보면 다시 단순함을 획득하는 피보나치 수열과 같다.

 

마지막 곡 <마나>. 들은 순서대로 썼기 때문에 이게 가장 대단했다 그런 거 없이 그냥 이게 마지막이다. 이 곡은 앞에서 들었던 두 곡의 시원이다. 글을 쓰기 직전에 지인이 기교는 툴박스에 불과하다는 얘기를 해주었는데, 여기서 쓰이는 음악적 기교들은 베르트랑의 환각을 형상화하기 위한 공구에 불과하다. 베르트랑이 이 곡에서 사용하는 아르페지오와 오스티나토 용법이 완전히 새로운 것인가? 꼭 그렇지만은 않다. 그렇다면, 베르트랑의 아르페지오와 오스티나토 용법은 놀라운가? 그런 정도가 아니다. 그는 스물다섯 나이에 선배들의 업적을 완전히 소화했다.

그런데, 중반에 들리는 아코디언에서 그리제이 <파르티엘> 연상한 사람 혹시 있나?

 

한줄 평 : 놀랍다. 역시 세상은 넓고 들을 것은 많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는다.

그런데 드는 의문 : 왜 천재는 요절하지 않으면 요절하려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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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음 선정 1945-2009

음악 2018. 8. 17. 02:58


 전부터 생각하고 있던 거였는데, 아무래도 지금이 아니면 안될 것 같아서 간략하게나마 써본다.

 아방가르드 음악이 많이 들어가기는 하지만, 제 평소 취향을 잘 아시는 분들께서는 '이런 음악도 여기 뽑아?'라는 느낌이 드는 놈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굳이 '아방가르드'가 아니더라도, 반영하고 있는 시대에서 반 걸음이라도 앞서나가는 음악이라면 뽑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본다.

 그래서 여기 뽑힌 음악들을 '아방가르드' 음악이 아닌 '현대'음악이라고 칭한 것이고.




 1945 : 슈트라우스 <메타모르포젠>, 스트라빈스키 <3악장의 교향곡>

 - 첫 빠따부터 공동선정. 처음에는 슈트라우스 단독이었다가, 나중에는 스트라빈스키 단독이었다가, 결국 오늘 마음을 정해 공동 선정으로 가기로 했다. 난 기분 좋은 날에는 <3악장의 교향곡>이 더 좋다가, 기분 나쁜 날에는 <메타모르포젠>이 더 좋아진다. 두 음악은 시대의 분기점인 1945년을 각자의 시각으로 캐치해 담아냈다. 그러므로 같이 뽑지 않을 이유가 없다.


 1946 : 쇤베르크 <바르샤바의 생존자>

 - 이견이 없는 1946년의 현음. 3개의 언어로 분리된 3개의 세계. 그 지옥 속에서 발버둥치는 사람들. 노년까지 거장의 풍모를 잃지 않았던 쇤베르크 후기 역작.


 1947 : 코플랜드 <클라리넷 협주곡>

 - 솔직히 인정하겠다. 이건 빈집털이가 맞다. 하지만 시대를 풍미한 명 클라리네티스트 베니 굿맨의 역량을 최대한으로 끌어낸 곡은 이 곡뿐이다. 미국의 진보주의자들이 그리는 루즈벨트 시대에 대한 향수를 가장 잘 자극한 작곡가는 아무래도 코플랜드가 아닐까.


 1948 : 메시앙 <투랑갈릴라 교향곡>

 - 이 매머드 같은 작품은 메시앙 역사상 가장 화려한 음향을 자랑한다. 옹드 마르트노의 물결 속에서 듣는 사람을 지고의 사랑에 빠지게 만드는 초월적 대작.


 1949 : 쇤베르크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환상곡>

 - '왜 하필이면 이 곡이냐'고 물을 것 같다. 그런데, 난 불레즈나 슈톡하우젠이 이 시기에 대작을 내놓았어도 이 곡을 꼽았을 것 같다. 이 곡은 바이올린 역사상 가장 어려운 곡 중 하나이며, 수백 년동안 변화와 발전을 거친 바이올린의 역사를 응축한 곡이다. 쇤베르크는 이 곡으로 자신의 마지막 자존심을 지켰다.


 1950 : 쇼스타코비치 <24개의 전주곡과 푸가>, 메시앙 <4개의 리듬 연습곡>

 - 45년에 이은 공동선정인데 공교롭게도 둘 다 피아노곡이다. 쇼스타코비치를 꼽은 이유는, 이 곡이 쇼스타코비치의 모든 곡을 통틀어 가장 매너리즘이 적고 다른 세계로의 모험이 강한 곡이기 때문이다. 노노의 음렬음악을 연상시키는 15번 푸가가 아니었다면 이 곡을 꼽지 않았을 것이다.

 메시앙은 쇼스타코비치와는 달리 큰 고민 없이 꼽았다. 2번 <음가와 강세의 모드>가 아니었다면, 50년대 음렬음악도 존재할 수 없었다.


 1951 : 브리튼 <빌리 버드>

 - 쇼스타코비치에 이어서 브리튼! 근본주의자 분들께서는 눈썹을 꿈틀거리며 노기충천하시겠지만, 잠시만 진정해달라. 곧 음렬음악의 시대가 올 것이니.

 브리튼의 오페라는 냉정한 심리극과 현대음악의 원칙들을 오밀조밀하게 조화하는 법을 잘 안다. 상관을 살해하고 교수형의 위기에 처한 주인공 빌리를 둘러싼 심리극은 시간이 지나도 쫄깃한 맛이 있다.


 1952 : 불레즈 <구조> 1권

 - 이견의 여지가 없는 음렬음악의 걸작. 음악의 쿼크 단위까지 쪼개서 정렬하고 배열하겠다는 클음계의 로베스피에르 불레즈의 냉혹한 천재성이 빛나는 작품.


 1953 : 존 케이지 <피아노를 위한 음악>

 - 불세출의 음악 발명가, 음향 발명가 존 케이지. 케이지는 <피아노를 위한 음악>을 평생 썼지만, 유독 1953년에 많은 곡들이 쏟아져 나왔기 때문에 이 해의 음악으로 선정하게 되었다. 그는 음악에 대한 사고방식을 영원히 바꾸어 버렸다. 나는 그의 음악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그의 음악이 없는 음악사는 완성되지 않기에 그에게 이렇게 자리를 바친다.


 1954 : 제나키스 <메타스타시스>

 - '추계음악'이라는 모토를 내세우고 음향설계에 평생 몰두한 그리스 출신의 이단아 제나키스. 그는 이 곡으로 멋지게 출발했다. 다소 부침이 있기는 했지만, 음향음악의 역사에서 그를 제외할 수는 없다.


 1955 : 불레즈 <주인 없는 망치>

 - 고작 30의 나이에 한 분야에서 정점에 도달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 이 냉정한 천재는 그걸 해냈다. '얼음이 잔 속에서 짤랑거리는 소리'가 난다는 스트라빈스키의 표현처럼, 이 곡에 감돌고 있는 서늘한 큐비즘은 들을 때마다 전율이 인다.


 1956 : 노노 <일 칸토 소스페소>

 - 노동자와 아방가르드 음악을 조합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무의미한 일처럼 느껴진다. 노노는 이 일에 평생을 천착했고, 성공했다는 점에서 특이한 사례다. 그의 음렬음악은 항상 붉은색을 떠올리게 한다. 붉은 깃발, 붉은 피, 그리고 붉은 태양. 난해하지만, 그만한 가치를 보장하는 작품.


 1957 : 슈톡하우젠 <그루펜>

 - 불레즈 <주인 없는 망치>와 함께 50년대 음렬음악의 양대 산맥. 슈톡하우젠은 알프스 산맥의 장엄한 풍광을 만끽하면서 이 곡을 썼다는데, 당연히 곡의 스케일도 알프스 산맥 급이다. 109명의 연주자와 3명의 지휘자를 필요로 할만큼 작곡가의 야심은 컸다.


 1958 : 메시앙 <새의 카탈로그>

 - 전설의 새도감! 난 이 작품을 사랑한다. 메시앙은 새를 가지고 음향의 다큐멘터리를 창조한다. 다른 곡은 몰라도 <개개비>는 꼭 들으시길 바란다. 27시간의 관찰이 30분이라는 시간 속에 농축된, 신과 자연과 새와 흐름의 음악이니.


 1959 : 스트라빈스키 <피아노와 관현악을 위한 무브먼트>

 - 이 곡이 꼽힌 이유는 역시 1959년이 묘하게 대곡 가뭄이 있었던 것도 있다. 이 곡은 스트라빈스키의 12음 음악을 통틀어 가장 어렵고 난해하다. 그는 이 곡에서 음렬음악의 경지에 도달한다. 오브제를 다루듯 냉정하게 작업하던 1920년대 그의 태도가 여기서 되살아난 것 같다.


 1960 : 펜데레츠키 <히로시마 희생자를 위한 애가>

 - 펜데레츠키는 '한곡갑' 이미지가 강하고 실제로도 그런 감이 없지 않지만, 1960년 당시 이 곡이 나왔을 때의 충격은 솔직히 말해서 3.3혁명 급이었다. 다음 해를 장식한 음악과 함께, 음렬음악의 시대를 밀어내버리고 음향음악의 시대를 열어버린 곡.


 1961 : 리게티 <아트모스페르>

 - 현대음악을 다루면서 이 곡이 나오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하다. 위의 곡과 함께 '음렬'의 시대를 지우고 '음향'의 시대를 열어버린 곡.  27개로 나누어진 음향 덩어리가 9분이 넘는 시간 동안 움직이면서 만들어내는 '대기' 그리고 '분위기'를 <2001>의 스타게이트 장면과 함께 감상하시라.


 1962 : 리게티 <아방뛰르>

 - 2년 연속 같은 작곡가가 선정되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아방뛰르>의 스타일은 <아트모스페르>와 극단적으로 다르다. 우아하고 부드러우며 신비스러운 목소리로 유혹하는 <아트모스페르>와는 달리, <아방뛰르>는 소리치고 날뛰며 자지러지게 웃고 꺽꺽거린다. 60년대 리게티 음악은 <아트모스페르> 스타일과 <아방뛰르> 스타일의 융합과 변주였다.


 1963 : 번스타인 <교향곡 3번 카디쉬>

 - 솔직히 이 결정은 많이 아쉬웠다. 번스타인을 반드시 꼽아야겠다는 생각은 있었지만, 난 <치체스터 시편>이나 <미사 브레비스>를 꼽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곡들을 만든 해에는 강력한 명곡들이 버티고 있어 실패. 어쩔 수 없이 들어간 감이 있기는 하지만, 번스타인은 분명 20세기 클래식 역사상 가장 과소평가당한 작곡가다.


 1964 : 메시앙 <그리하여 나는 죽은 자들의 부활을 소망한다>

 - 메시앙의 이 곡만큼 시대를 강렬하게 반영하는 곡도 없다. 그는 자신이 겪은 2차대전의 경험을 여기에 녹였다. 무가치하게 느껴질 정도로 무수히 죽어간 존재들은, 원자폭탄의 빛만큼이나 강렬한 성령의 인도를 받아 새로운 육체를 입고 되살아난다.


 1965 : 리게티 <레퀴엠>

 - '혼 없는 자의 혼노래.' '어둠의 미사.' 앞의 곡과 똑같이 2차대전의 기억이 담긴 곡이지만, 리게티의 <레퀴엠>에서 메시앙의 강렬한 신앙과 부활에 대한 소망은 1도 찾아볼 수 없다. 불길한 시작과 끝을 암시하는 <입당송>과 <라크리모사>, 초월적 음향의 결정체인 <키리에>, 임박한 종말에 대한 강렬한 공포가 위안을 짓누르는 <진노의 날>. 그야말로 완벽한 '레퀴엠'이다.


 1966 : 스트라빈스키 <레퀴엠 칸티클스>

 - 2년 연속 레퀴엠 선정. 스트라빈스키의 마지막 걸작. 노작곡가의 날카로운 감각은 84세라는 나이에도 전혀 죽지 않는다. 투명하고 정묘한 텍스처는 신심의 심지에 서늘한 불꽃을 피워올린다.


 1967 : 카헬 <국립극장>

 - 솔직히 말하자면, 카헬의 가장 유명한 이 '오페라(?)'는 내가 보고 들었던 아방가르드 음악을 통틀어 가장 괴이하고 괴상망측한 음악극이다. 성악가들은 악보에 없는 소리를 질러야 한다. 춤을 춰본 적 없는 사람들이 무용을 담당해야 한다. 막판에는 체조선수까지 나와서 쇼를 한다. 정신줄 놓기 딱 좋은 음악극이지만, 카헬은 슈톡하우젠같은 돌아이가 아니다. 오히려 너무 열정적이고 성실한 성격이었기에 음악극을 극한으로 실험해본 이런 작품이 나온게 아닌가 싶다. 어쨌거나 카헬의 이 문제작은, 그 이후의 음악극이 나아갈 방향을 결정해버렸다.


 1968 : 베리오 <신포니아>

 - 이 곡과 대결한 곡은 리게티의 <현악 4중주 2번>이었다. 한 작곡가의 스타일이 집약된 걸작과 다른 작곡가의 인생작이 대결한 셈인데, 결국 걸작은 인생작을 이기지 못한다는 진리를 알려주는 예시가 되었다. 베리오의 이 곡은 단순한 콜라주 작품이 아니다. 베리오는 음악사의 연표 제시로 만족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천 년의 음악흐름 속에서 따온 주제들은, 작곡가의 풍요로운 아이디어와 구성 속에 스르르 녹아든다. 베리오는 총천연색으로 빛나는 콜라주 속에서 승리의 미소를 짓고 있었으리라.


 1969 : 침머만 <젊은 시인을 위한 레퀴엠>

 - 1969년은 온갖 스타일의 현음이 대폭발한, 다시 오지 못할 현음 최대의 전성기였다. 이 해를 놓고 경쟁한 후보는 모두 쟁쟁한데, 메시앙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현성>, 슈톡하우젠 <슈티뭉>, 제나키스 <시나파이>, 카터 <관현악을 위한 협주곡> 등 걸작들만 모여 있다. 하지만 결국 왕좌를 차지한 것은 이 곡이다. <관객모독>을 떠올리게 하는, 공허하지만 섬뜩한 텍스트의 누적. 텍스트는 사라지지만, 텍스트로 인해 쌓인 감정은 빠져나갈 길이 없다. 20세기를 수놓았던 극단적 이데올로기들의 폭격이 감상자를 강타한다. 다음 해 벌어진 작곡가의 자살은, 마치 이 곡의 결말은 그것밖에 없었다는 섬뜩한 여운을 남긴다.


 1970 : 슈톡하우젠 <만트라>

 - 곡이 난해하냐 아니냐를 떠나, 이곡만큼 사람 정신을 돌게 만드는 곡도 없다. 슈톡하우젠의 돌아이 같은 정신상태는 <그루펜> 같은 음렬음악의 걸작이 아닌, 오히려 <만트라>나 <이노리> 같은 곡들에서 정점을 찍는다.


 1971 : 라이시 <드러밍>

 - 미니멀리즘에 대한 시각이 어떻든 간에, 라이시가 음악사의 흐름을 바꿔버린 사람이라는 점은 인정하고 넘어갈 수밖에 없다. 모험을 좋아하고 도전적인 이 사내는 아프리카 음악 공부를 위해 가나에 갔다가 모기 공습을 받고 말 그대로 훅갈뻔 하지만, 약 먹고 뻗은 상태에서 접신이라도 했는지 이 작품을 턱 내놓는다. 미니멀리즘은 들으면 들을수록 머리가 깨끗이 비워지는 느낌이지만, 이곡만큼은 그 흥겨움과 계산이 전혀 유치하지 않다.


 1972 : 리게티 <시계와 구름>

 - 이 곡이 이 해의 현음으로 꼽혔다는 사실 자체가 아방가르드 음악이 처한 위기를 반영하는 것 같다. 리게티를 비롯한 대부분의 아방가르드 작곡가들은 창작의 위기를 겪고 있었다. 미니멀리즘은 대중성을 등에 업고 강력하게 치고 올라오고 있었으며, 록음악은 빠르게 아방가르드의 스타일을 흡수해나갔다. 내적 갈등도 심각했으니, 리게티 본인의 말처럼 '앞은 벽, 뒤는 과거'가 그들을 가로막고 있었다. 이 곡의 스타일은 대조적인 형상의 융합을 이루지만, 이전에 했던 몸짓을 반복한다는 인상을 버리기 힘들다. 분명 잘 만들어진 곡이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생경하지 않다.' 그래도 위기의 시대를 반영한다는 점에서 이 곡은 매우 중요하다.


 1973 : 쿠르탁 <놀이들>

 - 만약 누군가 '쿠르탁의 곡을 듣고 싶은 데 어떤 곡부터 들어야 하나'라고 물으신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겠다. '아무 곡이든.' 그의 곡은 출발점이나 가이드를 요구하지 않는다. 어떤 이들은 너무 난해하다면서 학을 떼겠지만, 어떤 이들은 언제 들어도 생경한 조합에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음악 본연의 즐거움에 충실한 이 소품 모음집에서도 쿠르탁의 생경함은 빛을 잃지 않는다.


 1974 : 메시앙 <협곡에서 별들에게>

 - 메시앙 그랜드 캐년을 가다! 그는 자연이 억겁의 세월 동안 조각해 낸 형상을 보고 인류의 시원을 더듬어나간다. 신의 시원, 별의 기원, 우주의 태초를 향해 음표들이 헤엄친다. 그들 모두를 감싸안는 것은, 포근한 불협화음의 빛이다.


 1975 : 그리제이 <파르티엘>

 - 이 해의 현음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골리앗을 밀어낸 다윗'이 되겠다. 소품이 대곡을 밀어내버렸다. 음악사적으로 중요한 사건보다는 곡의 완성도를 택한 셈이다. 이 해는 음악사상 기념비적인 '필립 글래스의 <해변의 아인슈타인>이 나온 해'지만, 난 이 곡을 선택했다. 한 개의 음표(E)에서 뽑혀나와 기묘한 형상으로 변형되어가는 배음렬의 환상에 취하다보면 정신줄을 자꾸 놓는다. 그리제이는 분명 더 유명해질 필요가 있는 대작곡가였다.


 1976 : 베리오 <코로>, 시메온 텐 홀트 <칸토 오스티나토>

 - 세 번째 공동선정. 베리오의 중기 걸작인 <코로>는 당당한 작품이지만, 무명에 가까운 이 네덜란드 미니멀리즘 작곡가의 작품은 조심스럽고 신비하며 좀처럼 앞으로 나서려 하지 않는다. 하지만, 한 번 빠져들기 시작하면 이 작곡가의 매력에서 결코 쉬이 헤어나올 수 없을 것이다.


 1977 : 리게티 <르 그랑 마카브르>

 - 이 곡의 음악사적인 영향력이나 위치를 생각한다면 '리게티의 <피델리오>'가 되지 않을까. 이전의 오페라들-헨델과 글루크와 모차르트까지 전부 포함한-을 뛰어넘는 야심작을 쓰겠다고 덤벼든 베토벤의 10년 고행이 <피델리오>라는 '뭔가 2% 아쉬운 문제작'이 되어버렸듯, '안티-안티 오페라'를 쓰겠다고 나선 리게티의 노력도 분명 '대단하기는 한데 애~매한 문제작'을 남겼다. 그렇다고 해서 이 곡을 밀어내버릴 수는 없다. 이 곡을 들을 시간이 안 되신다면, 네크로차르를 대놓고 까는 <영웅> 교향곡 패러디 부분이라도 들어보시라. 빵 터지게 될 테니.


 1978 : 쿠르탁 <안드레스 미하일리에 대한 오마주>

 - 쿠르탁은 서두르는 법이 없다. 다작을 하는 작곡가도 아니다. 하지만 특유의 생경한 분위기와 다이아몬드처럼 응축된 구조를 듣고 있으면 저절로 그의 노력과 노고, 거장다운 풍모에 수긍하게 된다. 10분 내외의 짤막한 음악인 이 곡은 이 해에 만들어진 음악 중에서 적수가 없을 정도로 완성도가 높다. 위에도 말했듯, 쿠르탁의 곡은 어떤 곡을 잡고 시작하든 후회하지 않는다.


 1979 : 제나키스 <플레이아데스>

 - 중년 이후의 제나키스는 타악기를 통해 표현하는 복잡한 리듬 구조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한스 폰 뷜로의 명언인 '태초에 리듬이 있었다'는 명제에 공감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는 타악기가 가진 특유의 제례적 성격에 빠져든다. 이 곡은 타악기와 마림바로 구축하는 성단의 음악이다.


 1980 : 뮈라유 <곤드와나>

 - 그리제이와 함께 스펙트럴리즘의 대가로 거론되는 뮈라유 최고의 작품. 제목처럼 '원시 대륙스러운' 작품이기도 하지만, 그런 단순한 설명만으로는 인공위성에서 바라보는 지구의 모습처럼 여기서 표현되는 무수한 디테일을 놓치기 쉽다. 이 곡은 현미경으로 들여다볼 만한 가치가 있다.


 1981 : 그리제이 <솔로를 위한 이중주>

 - 클라리넷, 트롬본. 두 둔중한 솔로가 만나 듀엣이 되었다. 이 작은 편성의 곡이 어떻게 이 리스트에 들어갈 수 있느냐고 물으신다면, 일단 들어보라. 그리고 클라리넷이 주는 폐관진동의 아름다움과, 트롬본이 선사하는 포지션 변경의 아름다움을 느껴보시라.


 1982 : 글래스 <코야니스카시>

 - 이 곡을 선택한 이유는 다른 게 아니라, 클래식 음악가들이 영화음악으로 얼마나 큰 성공을 거둘 수 있는지를 잘 알려주고 있기 때문이다. 희대의 명장면인 <프루이트 아이고>에 글래스의 음악이 없었다면 그 정도로 유명해질 수 있었을까? <왓치맨>에서 글래스의 음악을 쓰지 않았다면, <왓치맨>이 그렇게 강렬한 인상을 남길 수 있었을까? <인터스텔라>가 <코야니스카시>의 스타일을 가져다쓰지 않았다면, <인터스텔라>가 그렇게 흥행할 수 있었을까? <코야니스카시>의 영향력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크다.


 1983 : 볼프강 림 <투투구리>

 - 노력하는 천재 볼프강 림의 초기 작풍을 대표하는 <투투구리>. 어지간한 오페라 규모의 대작이라 쉽게 듣기는 힘들겠지만, 그 노력을 보상하고도 남는 음향과 형식의 새로움이 있다. 전통의 무게에 짓눌리고도 남을 위치에 있는 작곡가가, 이토록 신선한 명곡을 뽑아낼 수 있다는 점은 그를 항상 주목하게 만든다.


 1984 : 펠드먼 <필립 거스턴을 위하여>

 - 베베른과 미니멀리즘을 잇는 비만 체형의 웜홀 모튼 펠드먼. 그의 작품들은 <비올라 인 마이 라이프> 같은 초중기도 좋지만, <필립 거스턴을 위하여>를 위시한 후기작품들은 안개처럼 스며드는 맛이 있다. 길이는 <파르지팔> 급이지만, 지루함을 느낄 일은 없을 것이다.


 1985 : 리게티 <피아노 협주곡>

 - 솔직히 말하자면, 1985년 현음 음악계는 리게티 혼자 북치고 장구치고 다 해 먹은 해였다. 혼자 <피아노 협주곡>과 <피아노 연습곡 1권>까지 내버렸으니 오죽하겠는가. 둘 다 우열을 가리기 힘든 명곡이지만, 그래도 굳이 고르라면 나는 <피아노 협주곡>을 고르겠다. 하나의 스타일을 완성한 작곡가가, 자신의 스타일을 전부 버리고 맨몸으로 광야에 가 새로운 스타일을 들고 돌아온 경우는, 말러 이후로 볼 수 없던 일이니까.


 1986 : 펠드먼 <크리스티안 볼프를 위하여>

 - 후기 펠드먼의 작품들은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중독성이 있다. 그것은 한 번 빨아들이면 아편처럼 대뇌를 마비시키고 등이 굽는 환상을 불어넣는다. 이 곡 또한 3시간이 넘지만, 역시 지루함을 느낄 일 따위는 없다.


 1987 : 존 애덤스 <중국의 닉슨>

 - 아마 이 작품이 마지막 미니멀리즘 작품이 될 것이다. 다른 부분은 필요없고, 장칭의 아리아 하나만으로도 이 곡은 뽑힐 자격이 있다. 훌륭한 정치극이며, 훌륭한 미니멀리즘 음악극이다.


 1988 : 불레즈 <데리브 2>

 - 불레즈 본인은 인정하지 않았지만, 그의 후기 작품들은 자신이 젊었을 때 설정한 엄격한 원칙들을 조금씩 수정하고 뒤로 물리는 느낌이 든다. 그의 음악을 위해서는 참으로 다행인 일이다. 그러지 않았더라면, 그 천재성이 가혹한 원칙에 질식당했을 수도 있으니까. 그런 '이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가 있었기에 이런 곡이 나올 수 있었으리라.


 1989 : 쿠르탁 <슈테판을 위한 묘비>

 - 여기에 뽑힌 곡들 중, 이렇게 작은 음향으로 사람 감질나게 하는 곡도 없다. 음향은 듣는 이의 숙고를 요구한다. 듣는 이가 조용해지기를 요구한다. 그렇게 침묵의 침묵으로 응시할 때, 음향은 마침내 반응한다. 어둠 속에서 떨어진 물방울에 반응하는 지하의 연못처럼. 그리고 마침내 넘쳐흐르고 폭발한다. 이 곡은 당신의 귀가 얼마나 예리한지를 깨닫게 하는 음악이다.


 1990 : 타케미츠 <네가 전화할 때 나는 너에게로 흐른다>

 - 감성적인 제목에 어울리게, 타케미츠의 이 곡은 아방가르드의 감성을 풍만하게 뿜어낸다. 타케미츠는 시대를 휘어잡는 카리스마는 없었지만, 시대의 요구에 성실하게 응한 거장이었다.


 1991 : 홀리거 <스카르다넬리 사이클>

 - 20세기 아방가르드 작곡가 중, 하인츠 홀리거는 번스타인 못지않게 과소평가 당했다. 사람들은 그가 작곡에서도 오보에만큼이나 탁월한 업적을 쌓았다는 사실을 간과하거나 알지 못한다. 그러나 음렬음악과 음향음악의 원칙들을 숙고한 이 사이클을 들어보라. 그가 얼마나 훌륭한 작곡가인지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무수한 작곡가들 사이에서 잊힌 보석을 발견한 기분이 들 것이다.


 1992 : 메시앙 <피안의 빛>

 - 우리가 늘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는 뉴욕필의 3m이지만, 그 3m 중 정점을 찍었던 메타가 아니었더라면 메시앙의 마지막 걸작은 태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메타는 뉴욕필 150주년 기념 음악을 메시앙에게 위촉했고, 메시앙은 이에 응답해 천국으로 가는 마지막 여정을 그렸다. 바그너 <로엔그린> 전주곡과 같은 달콤함을 내포한 마지막 악장 <그리스도, 천국의 빛>에서 천국의 문은 이미 듣는 이를 향해 열려 있다.


 1993 : 진은숙 <기계적 환상곡>

 - 오랜만의 빈집털이 느낌. 그러나 언석췬 선생님을 꼽지 않을 수 없지 않은가. 이왕 꼽으려면 일찍 꼽아야지. 진은숙의 성악은 늘 <앨리스>를 떠올리게 하는 맛이 있다. 엉터리같고 기묘하게 들리지만, 사실 엄격한 원칙이 잠복하고 있는 곡들.


 1994 : 리게티 <피아노 연습곡 2권>, 쿠르탁 <스텔레>

 - 마지막 공동선정. 리게티의 <피아노 연습곡> 18곡 중 가장 완성도 높은 걸작들은 2권에 다 모여 있다. 어떤 곡이 가장 멋진가에 대해서도 꼽기가 힘든 것이, 디즈니 스타일의 <마법사의 제자>부터 브랑쿠시의 작품을 냉엄하게 재현한 <무한한 원주>까지 다변적이고 다층적인 스타일이 꽉꽉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쿠르탁의 <스텔레>는 동유럽 아방가르드 작곡가였던 그를 세계적인 존재로 세워준 작품으로, 시작 부분 베토벤의 인용이 유명하다.


 1995 : 미하엘 쟈렐 <잠시 동안의 음악>

 - 90년대 음악의 가장 큰 특징은, 특정 스타일이 헤게모니를 쥐지 않는다는 점이다. 당시 37세의 젊은 작곡가가 1995년의 왕좌를 차지하리라고는 어느 누구도 생각지 못했으리라. 그러나 스타일을 떠나, 이 작곡가는 음악을 '너무 잘 썼다.' 음렬에도 속하지 않고 음향에도 속하지 않지만, 훌륭한 음악이다.


 1996 : 라헨만 <성냥팔이 소녀>

 -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라헨만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의 경직성, 도그마에 경도된 태도, 지나치게 엄격한 음악 스타일을 모두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런 것들을 전부 떠나, 이 오페라는 좋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라헨만은 알반 베르크와 침머만의 정신을 계승한다. 냉혹한 대사, 정신없이 빠른 전개, 그리고 강렬한 음악. 모두 <보체크>와 <병사들>을 수놓았던 것들이다. 이 오페라는 전통의 계승이 나쁘지만은 않다는 증거가 될 수 있다.


 1997 : 헨체 <교향곡 9번 '제7의 십자가'>

 - 아방가르드의 주변인으로 평생을 떠돌아야 했던 헨체가 말년에 들고 온 멋진 한 방. 곡을 관통하는 텍스트도 멋지지만, 라헨만과는 조금 다른 노정(바흐-베토벤-바그너-쇤베르크)으로 이어지는 전통의 계승은 음악에 권위를 부여한다.

 (참고로 텍스트 설명을 좀 하자면, 원작은 안나 제거스의 소설 <일곱 번째 십자가>다. 나치 수용소에서 7명이 도망친다. 수용소에서는 7개의 십자가를 만들고, 반드시 놈들을 십자가에 매달겠다 한다. 6명은 탈출에 실패해 매달리지만, 일곱 번째 사람은 탈출에 성공한다. 빈 십자가는 파시즘을 이기는 희망으로 남는다는 내용.)


 1998 : 그리제이 <문턱을 넘기 위한 4개의 가곡>

 - 브람스 <4개의 엄숙한 노래>, 슈트라우스 <4개의 마지막 노래>, 그리고 그리제이의 <문턱을 넘기 위한 4개의 가곡(이하 줄여서 문턱 가곡집)>. 죽음을 앞둔 작곡가가 4개의 가곡을 유언처럼 남기는 것은 숙명일까 우연일까. 그리제이의 마지막 가곡들은 표면이 텅텅 비어 있다. 대홍수를 얘기하는 마지막 곡 <길가메시 서사시>의 음악을 들으면서, 우리는 소멸의 과정과 텅 빈 존재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그리제이는 예감처럼 이 곡을 쓰고 세상을 훌쩍 떴다.


 1999 : 외트뵈시 <제로포인트>

 - 외트뵈시는 온갖 스타일을 버무리고 섞으며 작업하는, 복잡하디 복잡한 작곡 방식을 좋아하는 작곡가다. 당연히 그의 음악 또한 머리가 아프다. 너무 많은 음표, 너무 과한 음향, 너무 복잡한 형식이 그를 멀리하게 만든다. 그래도 이 곡은 아주 마음에 든다. 과격한 데스메탈을 듣는 느낌도 나고.


 2000 : 루카 프란체스코니 <코발트 스칼렛>

 - 이탈리아 출신의 젊은 아방가르드 작곡가는 이 작품으로 서유럽 음악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두 가지 색채가 이루는 황혼은 때로는 아름답게, 때로는 격렬하게 섞이고 부딪치고 침강하면서 파편을 흩뿌린다. 이런 음악이 앞으로도 많이 나왔으면 한다.


 2001 : 볼프강 림 <아스트랄리스>

 - 오랜만에 리스트를 다시 장식하는 성실한 천재 볼프강 림. 40년 전 리게티가 그랬던 것처럼, 림은 우주가 던져주는 신비한 유혹의 힘을 음악으로 풀고 싶어한다. 그는 그 빛과 어둠의 세계, 성간과 암흑물질의 세계를 향해 손을 뻗는다.


 2002 : 베리오 <세쿠엔차>

 - 노장 작곡가의 초장기 프로젝트 1탄. 1958년 플루트에서 시작한 베리오의 여정은 2002년 첼로로 끝을 맺는다. 12음 음표로 기똥차게 시작하는 플루트, 유명 광대의 묘사극인 트롬본, 바그너 <트리스탄>의 오마주인 오보에, 바흐 파르티타의 오마주인 바이올린 등등... 방대한 스타일, 기교에 대한 경의, 독주악기에 대한 애정. 무엇 하나 빼놓을 수 없는 악곡들이다. 베리오는 이탈리아가 낳은 최고의 아방가르드 작곡가였다.


 2003 : 슈톡하우젠 <빛>

 - 노장 작곡가의 초장기 프로젝트 2탄. 참고로 이 오페라는 이름(+전설의 헬리콥터)만 유명하고 내용이 뭔지는 모르는 사람들이 많은데, 우주적 창조성을 상징하는 미카엘, 미카엘의 대립자인 루시퍼, 인간성을 상징하는 에바가 7개의 요일에 위치한 7개의 공간(각기 상징하는 행성이 있음)에서 서로 엮이고 대립하는 내용이다. 슈톡하우젠의 정신세계를 상징하는 곡답게 중2병이 굉장히 강하다(원래 오페라 제목도 독일어 Licht가 아닌 일본어 '히카리'로 하려 했다고). 어쨌거나 이 전무후무할 정도로 무모한 프로젝트를 완성시킨 희대의 돌아이에게 박수를.


 2004 :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하스 <첼로 협주곡>

 - '스펙트럴리즘'하면 그리제이나 뮈라유, 비비에 같은 프랑스 작곡가들만을 떠올리기 쉽지만, 0.5세대 늦게 스펙트럴리즘에 심취해 자기 나름대로 거장이 된 이가 있으니 바로 오스트리아의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하스다. 20세기 작곡가들이 이상할 정도로 집착한 첼로 협주곡을 그 또한 남겼는데, 거칠고 부드러운 모든 음향이 듣는 사람을 취하게 만든다.


 2005 : 호세 마누엘 로페스-로페스 <피아노 협주곡>

 - 2년 연속 협주곡 선정. 아방가르드 음악으로서는 드물게, 이 곡에서는 이베리아 반도의 정열이 살아서 넘실댄다. 수십만 개의 자갈을 뒤집어놓는 파도 소리와 함께 스페인 아방가르드의 흥취에 빠져 보자. 환경이 장르마저 변질시킨 기묘한 음악.


 2006 : 사리아호 <시몬의 수난>

 - 프랑스 여류 철학자 시몬 베유의 일대기를 다룬 이 곡은 그녀의 열정과 고통, 기쁨과 슬픔을 담담하게 따라가고 있다. 아민 말루프가 쓴 텍스트도 빛이 나지만, 사리아호는 그녀의 일생 하나하나를 격하게 공감하면서 곡을 쓴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런 퀄리티가 나오기 힘들 테니까.


 2007 : 진은숙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 진은숙의 스타일에 대한 얘기는 일단 제쳐놓고 곡이 차지하고 있는 위치에 대해서 얘기를 하자면, 이 곡은 '오페라 극장을 폭파하라'는 불레즈의 말에 대놓고 반기를 드는 곡이다. 오페라의 수명은 그녀로 인해 연장될 것이다. 곡의 어디를 파 보든지간에 생동감과 에너지가 넘친다. <거울 나라의 앨리스>가 빨리 완성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2008 : 올가 노이비르트 <로스트 하이웨이 모음곡>

 - 솔직히 이 선정은 꼼수를 썼다. 영화음악 <로스트 하이웨이>를 완성한 해는 2003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난 이 곡을 단독으로 뽑아 얘기하고 싶었다. 노이비르트는 단호한 인간이다. 극단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어쩌면 그 점이 데이비드 린치와 의기투합하기에 딱 좋았는지도 모른다. 이 곡은 난해한 음악을 쓰는 아방가르드 작곡가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안겨주었다. 그리고 데이비드 린치의 가장 난해한 영화를 더 난해하게 만들어 주었다. 둘의 결합은 리게티와 큐브릭의 결합만큼이나 완벽했던가? 알 수 없다. 그러나 이런 협업이 우리의 세계를 풍요롭게 만들어준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2009 :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하스 <여름밤의 꿈>

 - 노리고 한 선정은 아니지만, 마지막으로 선정하는 곡은 지금 이 글을 쓰는 시간대, 여름밤의 향취에 잘 어울리는 곡이 되었다. 슈만을 연상케하는 꿈결같은 분위기, 가물거리는 음향, 밝게 빛나는 금관의 광휘는 이 작곡가의 감성과 감각이 어디까지 뻗어있는지를 잘 드러내준다. 그는 의심할 여지가 없는 현세대 최고의 스펙트럴리스트다.




 이렇게 64년에 걸친 현음 리스트를 작성해 보았다. 하지만 이 리스트에 들어가지 않은 음악 중, 내가 꼭 소개하고 싶은 음악 하나를 스페셜로 얘기해 보려 한다. 이런 음악은 단독으로 설명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스페셜 현음 : 베르나르드 파르메자니 <자연의 소리들> (1975)

 - 베르나르드 파르메자니. 아마 이름조차 들어본 적 없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이탈리아어로는 Bernard Parmegiani라고 쓴다. 중요한 건 이게 아니라, 이 작곡가의 음악을 듣고 내가 겪은 충격이다. 전자음악을 작곡하는 이 작곡가가 남긴 유산은 어지간한 아방가르드 음악가 정도는 가볍게 씹어먹고도 남을 정도다. 이 작곡가가 포착한 음향의 진폭은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다. 작곡가가 탐구하는 음향이 자극 아닌 것이 없고 새로움 아닌 것이 없으며 경이 아닌 것이 없다. 이 곡은 마치 규방 안에서 자신을 찾아주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아름다운 여인같다. 장르를 막론하고, 우리가 음악을 찾는 이유는 이런 보석들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 아닐까.

Posted by 여엉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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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든에 대한 단상

음악 2014. 5. 31. 23:51

 하이든의 천재성(스비아토슬라프 리히테르가 이에 대해 자주 지적하고는 했다)에 대해 우리가 자주 간과하는 이유는 많다. 그 중 가장 큰 이유는 그가 만들어낸 독창적인 음악 언어가 이미 우리의 기본적인 음악 언어로 편입되었다는 데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고, 두 번째는 그가 예술성과 대중성을 모두 겸비한 얼마 되지 않는 위대한 음악가라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첫 번째 이유 때문에 하이든은 '18세기 고전 형식을 만든 작곡가'라는 형식적이고 교과서적이며 바지사장의 냄새가 나는 자리에 앉아 있을 뿐이며, 두 번째 이유는 더 심각한 악영향을 끼쳐 거대하고 심각하고 장엄하고 권위적이며 압도적인 음악을 즐겨 찾는 이들이 그가 하찮은 작곡가(실제로 그는 전혀 하찮은 작곡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라는 편견을 가지도록 만드는 동시에 그를 '고전음악을 처음 들을 때나 거쳐가는 관문' 정도로 하대하도록 만들고 있다. 그런 편견과 몰이해, 그리고 하대는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우선 두 번째 이유에서 발생한 오해부터 뒤집어 보자. 하이든은 대중성과 예술성을 모두 추구한 작곡가가 맞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고전음악을 처음 듣는 초심자부터 고전음악에 능통한 전문가까지 모두들 그의 음악이 뛰어나다는 점을 인지할 수 있다. 그의 주제들은 귀에 익숙해지기 쉬운 만큼 정교한 솜씨로 재단이 이루어져 음악학자들도 그 경이적인 재단 솜씨와 위트에 놀라고는 한다. 특히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끼워 넣는 재치는 그의 트레이드마크였다. 86번 교향곡 마지막 악장에서 드러나는 기가 막힌 전조, 마지막 교향곡 <런던>의 마지막 악장에서 보여주는 고도의 대위법적 기교(첫 악장의 주제를 역행으로 뒤집어 사용하고 있다. 이런 작곡 방식은 버르토크도 사용한 바가 있다), 화성적 전개와는 전혀 상관 없는 C♭음을 전면에 돌출시키는, 감상자의 뒤통수를 후려치는 99번 교향곡 첫 악장(베토벤이 나중에 이런 방법을 자신의 교향곡 8번 마지막 악장에 적용한다), 하나의 주제를 놓고 형태를 계속 바꾸어가며 마치 주제가 주제의 꼬리를 무는 것 마냥 다음 변화를 기대하게 만드는 88번 교향곡 첫 악장 등...... 유명한 교향곡들만 대충 살펴봐도 이 정도다. 그는 독특한 리듬, 기괴한 화성, 심각하고 무거운 정서를 삽입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위대한 음악을 만들 수 있었다. 그런 개방성과 유연함이 오히려 지금에 와서는 마이너스 요인이 되고 있다는 점은 참으로 이상하다.

 이제 첫 번째 이유에서 발생한 오해에 대한 반론도 제기해야 할 것이다. 하이든의 형식이 18세기 고전 음악과 이후의 음악에 대한 기본적인 음악 언어가 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그의 음악 언어가 보편적인 음악 언어라는 가장 확실한 증거일 것이다. 보편적인 언어는 무엇보다 기본 형태가 쉽고 단순하지만 수많은 형식으로 변화가 가능할 만큼 유연하고 창조적이어야 한다. 하이든의 음악 언어, 특히 소나타 형식은 이 조건을 훌륭하게 만족시키고 있다. 고무찱흙처럼 다른 모양으로 변형이 가능한 단순하고 작은 형태의 주제, 주요부와의 정서 대비를 주는 서주, 발전부를 배제한 소나타 형식을 주로 사용하는 느린 악장, 긴장을 풀고 편안함을 유도하지만 톡톡 튀는 구석이 꼭 한 군데씩은 숨어 있는 미뉴엣, 그리고 듣기만 해도 시원스러운 마지막 악장들. 이 형식은 교향곡과 현악4중주뿐 아니라, 피아노 소나타와 3중주, 협주곡을 포함한 거의 모든 기악곡 양식에 도입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만큼 그 기본 양식은 비록 수많은 작곡가들이 각자 자신의 방식으로 그 양식을 도입하고 적용하면서 모습이 바뀌어 갔지만 어쨌거나 몇 가지 기본 틀만은 절대 변하지 않았다. 이렇게 신축성과 내구성이 좋은 형식을 오래도록 구축하는 것이 성공했기 때문에 프로코피예프가 하이든을 그토록 좋아했는지도 모른다(그는 체레프닌 클래스에 머무르던 시절, 하이든의 음악을 연구한 성과를 바탕으로 자신의 교향곡 1번을 작곡했다).

 하이든의 음악은 단순하고 간결하고 명쾌한 만큼 위대하다. 그의 악보 위에는 꼭 필요한 구성 요소들만 놓여 있기 때문에, 도무지 그의 음악에서 음표 하나를 더하거나 뺀다는 것을 생각할 수 없다. 리게티도 하이든 음악의 그러한 특징을 통찰했는지는 몰라도, 자신의 음악에서 덜어내야 할 부분을 고심할 때마다 옆에 하이든의 음악을 놓고 그 단순성과 간결성을 참고했다고 하지 않은가. 

 

 "이 위대한 천재는 단 하나의 주제를 풍부한 변화로 발전시켜 끌어나갈 수 있다. 그렇기에 한 악상에서 다른 악상으로 계속해서 옮겨 다니는 창작력 빈곤한 여느 작곡가들과는 진정 다르다."

 - 1787년. 6개의 <파리> 교향곡을 들은 한 평론가가 기록한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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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의 카탈로그> (Catalogue d'oiseaux) 4권 (4e Libre)

7악장 <개개비> (7.La Rousserolle effarvatte (Acrocephalus scirpaceus))

(27시간 동안의 풍광을 30분에 걸쳐 묘사하는 4권 7악장 <개개비>. <새의 카탈로그>를 통틀어 단일 악장 중에서는 가장 긴 악장으로, 무려 752마디에 달하는 대곡이다. 주로 사용하는 선법은 4선법으로, 음계는 C-D♭-D-F-F#-G-A♭-B-C이며, 4음을 옮겼다. 곡의 배경이 되는 지역은 오를레앙 남쪽, 루아르 에셰르 지역에 있는 솔로뉴의 호수다. 사실적인 묘사가 두드러지며, 저속 카메라로 촬영한 다큐멘터리 같은 느낌을 준다. 그러나 작곡가의 저속 카메라는 영상에 비치는 것 이상의 묘사를 해낸다. 특히 그런 장점이 가장 잘 드러나는 장면은 일출과 일몰 장면인데, 조옮김이 제한된 선법을 총동원해 온갖 선명한 색채로 음의 화폭을 휘감는다. 또한 디기탈리스와 수련을 묘사하는 부분에서는 <투랑갈릴라 교향곡>에서 사용했던 꽃의 테마를 재활용하고 있다. 주연(…)인 개개비와 해오라기를 비롯해 총 19종의 새가 등장한다.)

* 아래의 글은 곡의 진행 과정에 대한 메시앙 자신의 설명이다.

AM 0 (자정의 호수에 대한 긴 묘사 - 개구리 떼의 굉음 - 해오라기)

(늦은 밤 드넓게 펼쳐진 차가운 호수 위로 해오라기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진다.)

AM 3 (개개비의 긴 독주 - 밤의 장엄 - 늪지의 곤충소리 - 밤의 장엄 - 짙게 깔리는 늪지의 잡음 - 외딴 개구리 - 늪지의 곤충소리(글리산도) - 외딴 개구리 - 밤의 장엄)

(호숫가 갈대 줄기들 사이에 숨은 개개비가 길게 독주를 시작한다. 개개비의 순수하고 맑은 음색이 잦아들면 곤충의 울음소리를 비롯한 다양한 소리들이 퍼져 나와 호수를 한바탕 뒤흔들어 놓는다. 곧 정적이 뒤를 잇는다.)

AM 6 ((일출) 장밋빛, 담자색, 오렌지 빛으로 점차 변화하는 호수 - 검은티티새와 붉은등때까지의 대위법 - 변화하는 호수 - 검은티티새와 붉은등때까치의 대위법 - 변화하는 호수 - 상딱새 - 변화하는 호수 - 검은티티새 - 변화하는 호수 - 검은티티새와 붉은등때까지의 대위법 - 변화하는 호수 - 검은티티새와 붉은등때까지의 대위법)

(해가 떠오른다. 호수의 색은 장밋빛에서 담자색, 오렌지색으로 서서히 변화한다. 검은티티새 한 마리와 붉은등때까치 한 마리가 함께 노래한다. 상딱새도 아침햇살 속에서 노래에 가세한다.)

AM 8 (노란 붓꽃 - 꿩 - 검은머리쑥새 - 청딱따구리 - 검은머리쑥새 - 찌르레기 - 꿩 - 박새 - 청딱따구리 - 검은턱할미새 - 노란 붓꽃)

(만개한 붓꽃들을 배경으로 꿩, 검은머리쑥새, 청딱다구리가 모습을 드러내어 지저귄다. 찌르레기, 박새, 할미새도 가세한다.)

PM 0 (메뚜기개개비)

(메뚜기개개비의 긴 트릴.)

PM 5 (개개비 - 사초솔새 - 자줏빛 디기탈리스꽃 - 개개비 - 사초솔새 - 자줏빛 디기탈리스꽃 - 큰개개비 - 사초솔새 - 개개비 - 외딴 개구리 - 붉은부리갈매기 - 물닭 - 수련 - 개개비 두 마리의 긴 대위법 - 사초솔새 - 개개비 두 마리의 대위법 - 개개비 - 사초솔새 - 개개비 두 마리의 대위법)

(개개비가 다시 등장한다. 개개비의 울음소리는 사초솔새의 트릴, 트레몰로와 섞인다. 큰개개비도 호수의 수련, 디기탈리스꽃들을 배경으로 노래를 시작한다. 붉은부리갈매기의 소리가 늦은 오후의 평화를 더할 무렵, 물닭 한 마리가 꼬꼬 울음 소리를 토해낸다. 물닭이 사라지면 개개비 두 마리의 이중창이 길게 이어진다.)

PM 6 (노란 붓꽃 - 메뚜기개개비 - 물닭 - 종달새 - 개구리 떼의 굉음 - 종달새 - 종달새에 대한 개구리 떼의 응창 - 흰눈썹뜸부기)

(노란 붓꽃 위에서 메뚜기개개비가 다시 한 번 높은 음력의 트릴을 선보인다. 종달새도 하늘 높이 솟아올라 지저귀며, 호수 속 개구리들이 이에 응창한다. 우렁찬 개구리 울음이 잦아들 무렵,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흰눈썹뜸부기가 호수 위로 퍼덕거리며 날아올라 울음을 토하다 저무는 서쪽으로 사라진다.)

PM 9 ((일몰) 붉은 빛, 오렌지 빛, 바이올렛 빛으로 점차 변화하는 호수 - 해오라기 - 변화하는 호수 - 해오라기 - 변화하는 호수 - 해오라기 - 잠자는 태양 - 나이팅게일 - 바이올렛 빛 어둠 속 일몰에의 회상)

(호수는 다시 붉은 빛, 오렌지 빛, 바이올렛 빛으로 점차 가라앉는다. 낙조가 완전히 꺼지고 저녁이 찾아오면 다시 해오라기가 길게 목을 뽑아 호수 전체가 울릴 정도로 거대한 울음소리를 토해낸다. 바이올렛 빛 저녁 속에서 별들이 하나씩 뜨기 시작한다.)

AM 0 (밤의 장엄 - 나이팅게일 - 밤의 장엄 - 나이팅게일 - 해오라기 - 나이팅게일 - 짙게 깔리는 늪지의 잡음 - 늪지의 곤충소리 - 일몰에의 회상 - 외딴 개구리 - 밤의 장엄)

(호수의 고요함 속에서 나이팅게일의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울음소리는 점점 날카롭고 세차게 변한다. 이에 반응해 인근 늪의 곤충과 개구리 떼의 소리가 다시 한 번 호수를 흔들어 놓는다.)

AM 3 (개개비의 긴 독주 - 개구리 떼의 굉음 - 새벽의 호수에 대한 긴 묘사 - 해오라기)

(서늘한 새벽의 호수는 안개를 피워 올린다. 개개비와 개구리 떼의 울음소리, 해오라기의 독주로 끝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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첼로 소나타 (Cello Sonata in D minor, L.135)

작곡 시기 : 1915년 완성

(왜 작곡가는 만년에 프랑스 고전 형식에 관심을 보였던 것일까? 그것은 전쟁과 관련이 있는가? 그는 왜 곡에 ‘프랑스 작곡가 끌로드 드뷔시’라고 서명했는가? 정치적인 경향과는 별개로, 전쟁은 드뷔시에게 지금까지 추구하던 음악에서 벗어나 프랑스의 고전에 눈뜨게 만들어준다. 그 고전은 륄리에게서 태동해 샤르팡티에를 거쳐 라모와 쿠프랭에게서 활짝 꽃을 피운, 위대한 프랑스(Le grand France)의 시대였다. 프랑스 바로크와 전기 고전파 시대에 유행하던 악장 구성, 느린 악장-빠른 악장-빠른 악장의 구도를 채택한 것만 보아도 그가 이 소나타를 통해 추구한 이상이 이 시대임을 짐작할 수 있다. 첫 악장인 프롤로그가 가장 짧으며, 2악장과 3악장은 연이어 연주하도록 지시하고 있다.)

1악장 (1.Prologue. Lent, sostenuto e molto risoluto 4/4)

(51마디) (소나타 형식의 외피를 입었다고는 하지만 일반적인 소나타 형식과는 거리가 멀다. 1주제와 2주제를 잇는 연결구는 없으며, 1주제와 2주제도 모두 같은 조성(D단조)을 채택하고 있다.

피아노의 3마디 주제 제시에 이어 첼로가 등장하는데, 피아노가 좁은 음역 내에서 순차진행하는 것과는 반대로 첼로는 자유분방하고 폭넓은 도약 진행을 하고 있어 두 악기의 특성을 강하게 대비시키고 있다. 드뷔시는 두 악기가 연주하는 주선율에 약간의 변화를 주기는 했지만, D, B♭, G음이라는 공통음을 부여해 두 선율의 연관성을 강하게 인식시킨다. 화성적인 면에서 드뷔시는 선율에 에올리안 선법을 적용해 색채감을 깊게 부여하고 있지만, 대체적으로 전통적인 화성법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2주제의 음형은 곡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데, 이 주제에서도 화성은 거의 변함이 없다. 이탈리아 6도의 사용과 화음의 병진행을 제외하면 줄곧 D단조에 머무르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첼로의 8~9마디 리듬인데, 8마디의 리듬을 역행으로 9마디에 이용하고 있어 완벽한 대칭을 이룬다. 이 아이디어는 메시앙의 ‘역행 불가능한 리듬’과 매우 흡사하다. 선율은 13마디의 온음음계를 거쳐 잠시 F장조에 머무르며 장조 선법의 밝은 색채감을 한껏 드러낸다. 하지만 다음 마디에서는 다시 D단조가 기다리고 있고, D단조의 7음(C#)을 강조하면서 해결의 기미를 보이지 않은 채 그대로 넘어간다. 그 다음에 기다리고 있는 것은 5도 병진행과 장/단 화음의 교체로 이루어지는 3화음의 병진행이며, V-IV-I로 2주제를 마무리짓는다.

발전부는 템포의 변화에 걸맞게 점점 역동적인 변화를 보이고 있으며, 2주제 첼로의 B♭-C-D-E 온음계 음형을 활용하고 있다. 작곡가는 여기에 간간이 C음 대신 C#음을 섞어 선법적인 색채감을 살리는 것도 잊지 않는다. 발전부의 첫 다섯 마디는 첼로의 주도로 곡을 진행하지만, 그 이후에는 첼로의 오스티나토와 피아노의 32분음표가 어우러지면서 피아노가 곡의 주도권을 잡는다. 동기의 활용을 보면 17마디에서는 1마디 피아노 주제의 단편과 5마디 첼로 주제의 단편을 섞고 있으며, 20마디부터 마지막까지 활용하는 음형은 2주제 첼로 음형의 단편을 활용하고 있다. 화성적으로는 D단조에서 C장조로 조성이 이동한 후, 화음의 병진행을 중심으로 이동하다가 마지막에는 C장조의 V-I로 마무리한다.

재현부에서는 1주제와 2주제를 확대, 또는 변형하여 재사용하고 있다. 1주제는 제시부보다 3마디가 늘어난 10마디이며, 첫 음형을 제시부와는 달리 첼로가 완전 5도 위에서 제시한다. 첼로 파트도 제시부와는 다르게 셋잇단음표의 사용으로 리듬을 변형하고 있으며, 두 마디의 연결구를 부여해 1주제와 2주제를 유연하게 잇고 있다. 이 또한 제시부와 다른 점이다.

재현부의 2주제는 제시부의 8마디와는 달리 6마디로 2마디를 축소했다. 마지막 두 마디의 템포를 Lento로 늦추어 코데타를 예비하고 있으며, 첫 부분과 동일한 템포를 사용해 템포 측면에서 처음과 끝을 똑같은 분위기로 만든다는 특징이 있다.

코데타에서는 주로 1주제를 사용하고 있으며, 50마디에서 비로소 F#음이 등장해 피카르디 종지를 이루며 ppp의 고음 하모닉스로 곡을 마무리짓는다.)

 

2악장 (2.Serenade. Moderement anime 4/4)

(64마디) (첼로의 피치카토가 기타 반주를 생각나게 하는 세레나데 악장은 음울하면서도 역동적인 곡으로, 쉴 새 없이 표변하는 드뷔시 음악의 특징을 잘 담고 있다. 전체적으로 A-B-A'의 3부 구성을 취하고 있다.

첼로가 먼저 퉁명스러운 반음계를 제시하고, 곧이어 완전 4도와 증 4도의 도약 진행을 선보인다. 첼로가 4도를 선보일 때 피아노는 첼로의 반음계를 모방한다. 화음은 불완전 3화음, 완전 5도의 병진행, 4도, 2도의 부가화음을 사용하면서 기묘한 느낌을 준다. 앞의 반음계적/4도 진행과, 8마디부터 등장하는 온음음계의 진행은 교대로 등장하면서 드뷔시 특유의 변덕스러운 음악을 만들어낸다.

중간부는 템포를 Vivace로 바꾸고, 박자로 3/8로 바꾸어 첫 부분의 음산함을 벗고 율동적인 곡조를 노래한다. 조성도 곧 A장조로 바뀐다. 37마디부터 첼로는 반음계적 진행을 위주로 움직이며, 화음은 3도 관계의 진행을 보인다. 39마디 첫 화음까지는 C장조를 중심으로 한 온음음계 V9로 진행하다가 두 번째 화음부터 40마디까지는 반음계로 바뀌는데, 여기서 반진행을 사용해 다시 한 번 온음음계와 반음계의 선명한 대비를 주고 있다. 중간부가 막바지에 접어들면 첼로는 증5도를 중심으로 움직이면서 종잡을 수 없는 2악장 특유의 분위기에 방점을 찍는다.

첫 부분으로 곡이 복귀하면 길이가 대폭 짧아져 고작 10마디만이 주어지며, 그 중에 절반은 사실상 코데타로 보아야 한다. 그러나 첫 부분의 중요한 동기들은 빠짐없이 사용하고 있다. 56마디는 첫 부분의 5마디 이후의 변형이자 반복인데, 첫 부분에서 선율적인 진행을 취하던 부분을 여기에서는 두터운 화성(9화음)을 붙인 병진행으로 바꾸어 사용하고 있다. 58마디에서 피아노는 두 개의 온음음계를 동시에 사용하는데, 상성에서는 하나의 온음음계를 사용하고 있고, 중성과 왼손은 두 개의 온음음계를 섞어 사용하고 있다. 이 두 개의 온음음계는 정확히 반음 차이로 엇갈린다.

코데타는 D단조의 V 페달 포인트가 깔리는 가운데 피아노가 E♭-F♭-D♭-E♭을 사용하면서 끝을 맺는다. 이 때 D단조의 V는 3악장의 I로 이어진다.)

 

3악장 (3.Finale. Anime, leger et nerveux 2/4)

(123마디) (빠르고 경쾌하게 움직이는 피날레 악장. 첼로의 고음역과 피치카토를 조심스럽게 사용해 가볍고 산뜻한 느낌을 준다. 1악장과 구조가 유사하지만 좀 더 많은 반복으로 약간 더 단순하다.

제시부는 1악장과 마찬가지로 연결구가 없지만, D단조를 사용하는 1주제와는 달리 2주제는 D장조를 사용하고 있다. 1주제는 14마디로, 7마디+7마디로 나눠지는데, 화음은 I에서 시작하여 병진행한다. 첼로는 1악장의 도약 진행 요소를 가져와 사용하고 있다. 화성적으로 1주제의 후반부는 1주제의 전반부를 반복하고 있다.

2주제는 8마디로 이루어져 있으며, 다시 4마디로 쪼개진다. 조성은 D장조이며 선율은 E에올리안 선법을 쓰고 있다.

발전부는 62마디에 달하는데, 주로 부분 부분을 반복하는 구성을 취하고 있다. 선율은 F리디안 선법으로 곧 변하며, 화음은 F#단조의 7화음 연속 진행을 보인다. 29마디부터 첼로는 완전 4도 위에서 이제까지의 음형을 변형, 반복한다. 37마디부터는 1주제에서 유래한 선율을 사용하는데, C장조로 전조하며 음형을 축소하고 있다. 45마디부터는 4마디 단위의 구성을 취하고 있으며, 이 4마디는 a-b-a'의 구성을 취한다. 발전부 속에 3부 형식이 들어있는 셈이다. 이후 2주제의 발전(리듬이 변한다)을 거쳐 재현부로 가는 연결구적 귀절로 들어간다. 여기에서는 5도의 도약이 두드러진다.

재현부는 다시 원래 조성인 D단조로 돌아온다. 드뷔시는 재현부에서 주제에 변화를 거의 주지 않는다. 2주제를 트릴로 연주하는 것을 제외하면 주제는 거의 원형 그대로 다시 등장한다.

112마디부터 시작하는 코데타는 반복적인 화음 진행을 보이며, 갑작스러운 sff-ff로 끝을 맺는다. 특유의 퉁명스러운 피치카토를 그대로 유지한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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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개의 엄숙한 노래> (Vier ernste Gesange, Op.121)

작곡 시기 : 1896년 5월 완성

작곡 장소 : 빈

(브람스의 가장 위대한 마지막 가곡은 클라라의 죽음을 전후한 1896년 5월에 만들어졌다(곡을 출판한 날짜는 브람스의 63세 생일인 1896년 5월 7일이다).1) 브람스는 이 곡을 클라라에게 들려주고 싶어 했지만, 클라라는 이 곡을 듣지 못한 채 1896년 5월 20일에 7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장지로 가는 기차도 제대로 잡지 못할 정도로 큰 충격을 받은 브람스는 클라라의 장례식이 끝난 후에야 장지에 도착한다. 클라라의 죽음은 평행선을 두고 이어져오던 두 선 중 하나가 완전히 지워진 것과 같았다. 평행선의 한쪽 선이 없어지면 다른 선도 더 이상 평행선으로 존재할 수 없다. 당시 브람스의 간에는 종양이 자라고 있었다. 이 네 개의 가곡은 클라라를 위한, 그리고 브람스 자신을 위한 마지막 가곡인 셈이다.

브람스는 마지막 네 개 가곡의 텍스트를 모두 성서에서 찾았다. 그는 자주 성서를 인용해 성악곡을 만들었고, 그때마다 수준 높은 텍스트의 사용과 음악성을 보여주었다. 이 가곡집에서 그는 이전의 음악을 한 차원 뛰어넘는다. 그가 발췌한 텍스트와 음악은 여러모로 다른 가곡보다는 그의 걸작 《독일 레퀴엠》을 떠올리게 한다. 두 음악은 본질적으로 같은 주제를 공유하고 있다. 모든 인간이 결코 피할 수 없는 숙명인 죽음 앞에서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고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브람스는 《독일 레퀴엠》에서도 그랬듯이 단지 죽음의 고통과 어두움만을 말하고 있지 않다. 마지막 곡에서 그는 죽은 이들의 평안과 남겨진 이들에 대한 위로와 사랑을 말한다. 죽음을 초극하는 ‘사랑’이건, 아니면 죽음과 초연한 ‘사랑’이건 죽음 속에서 ‘사랑’을 노래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이 가곡의 위대함은 그 어려운 목표를 극히 브람스다운 방식으로, 짙은 음영을 보이면서도 인간에 대한 믿음을 결코 잃지 않는 그만의 방식으로 해냈다는 점에 있다.)

 

Denn se gehet dem Menschen wie dem Vieh

(Prediger Salomo 3:19~22)

Denn es gehet dem Menschen wie dem Vieh.

wie dies stirbt, so stribt er auch:

und haben alle einerlei Odem:

und der Menschen hat nicht mehr denn das Vieh:

denn es ist alles ietel.

Es fährt alles an einen Ort:

es ist alles von Staub gemacht, und wird wieder zu Staub.

Wer weiß, ob der Geist des Menschen aufwärts fahre.

und der Odem des Viehes? unterwärts, unter die Erde fahre?

Darum sahe ich, das nicht besser ist.

denn daß der Mensch fröhlich sei in seier Arbeit:

denn das ist sein Teil.

Denn wer will ihn dahin bringen,

daß er sehe, was nach ihm geschehen wird?

사람에게 임하는 일은 짐승에게도 임하나니

(전도서 3:19~22)

사람에게 일어나는 일이 짐승에게도 일어나니

짐승이 죽는 것 같이 사람도 죽느니라

그리고 모든 것은 하나의 호흡을 가지고 있으니

사람도 짐승보다 더 한 것이 없다

모든 것은 허무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한곳으로 가는데

모든 것은 먼지로부터 만들어 졌고

또 다시 먼지로 돌아간다

누가 아는가, 사람의 영혼이 위로 올라가는지,

그리고 동물의 호흡이 땅 밑으로 가는지를?

그래서 나는 사람들이 자신을 일을 할 때

기뻐하는 것 보다 더 나은 것이 없는 것을 보았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신의 일이기 때문이다

누가 그들에게 일어나는 일을 보려고

다시 그들을 데려 오겠는가?

1곡 <사람에게 임하는 일은 짐승에게도 임하나니>

(1.Denn es gehet dem Menschen. Andante 4/4 - Allegro 3/4) (D minor)

(「전도서」의 냉혹한 구절은 사람이 짐승과 조금도 다르지 않음을, 과장 없이 있는 그대로 고한다. 인간의 고통과는 상관없이 자연은 어제와 똑같은 법칙을 반복할 뿐이며, 그 섭리는 오늘도 변함없이 나아간다. 그 섭리는 피할 수 없는 것이다. 다만 인간은 주어진 조건에서도 최선을 다해 살아갈 뿐이다. 흔히 말하는 인사를 다하고(盡人事) 천명을 기다린다(待天命)는 말이 바로 「전도서」의 이 후반부 구절과 일치한다. 「전도서」의 저자 솔로몬 왕은 모든 형태의 환락과 부귀영화를 누렸지만, 만년에 그의 빛나는 생애와는 전혀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이 글을 남겼다. 그는 자신의 손에서 왕국이 정점에 도달했고, 동시에 몰락의 시작을 맞이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특유의 경이적인 통찰력으로 인간의 심리를 꿰뚫어 본 이 글을 남긴 것이다.

곡은 감화음이 주를 이루며 어둡고 허무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안단테에서 알레그로의 템포 변화는 극단적인 감정 변화를 나타낸다. 첫 도입 부분에서 저음은 D-E-F-E-D-A 오스티나토 진행과 B♭ 페달 포인트로 시종 무거운 느낌을 불어넣는다. 성악 선율이라기보다는 연극에서의 독백과 흡사한 첫 선율 ‘Denn es gehet dem Menschen……'은 《독일 레퀴엠》 2악장의 첫 선율인 ’Denn alles Fleisch es ist……'와 흡사하다. 두 곡 모두 인간 육체의 덧없음을 노래한다는 점에서 유사한 내용을 가지고 있다. 특히 8마디의 ‘dies stirbt(이 죽음)’에서는 G#-D의 증4도와 F-C#의 감4도 진행을 사용해 극도로 불안한 느낌을 강조하고 있다.2) 안단테 파트는 ‘denn es ist alles eitel(모든 것은 헛되다)’라는 구절로 끝을 맺는데, 이 중 ‘alles(모든 것)’에서 피아노는 sf, 성악은 감5도로 강조하면서 알레그로로 들어간다. 알레그로에서는 피아노의 감7화음이 빠르게 움직이며 ‘es färht alles an einen Ort, es ist alles von Staub gemacht(모든 것은 먼지로부터 만들어졌으니)’라는 가사에 이르러 성악 선율이 상승하는 동안 피아노는 하행하는 반진행을 이루고, 다음 구절인 ‘und wird wieder zu Straub(또 다시 먼지로 돌아간다)’에서 성악과 피아노는 모두 바닥으로 떨어진다. 이 구절에서 브람스는 무성음인 [t]와 [p]에 감7화음을 적용하여 텍스트와 음악을 결합하고 있다.

이제부터 브람스는 텍스트를 객관적으로 서술하던 태도에서 벗어나 개인적인 감정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Wer weiß(누가 아는가)’에 이어 나오는 피아노는 4분음표에 스타카토가 붙어 딱딱하고 강한 느낌을 자아낸다. 성악의 강세는 모두 강박에 붙어있는데 피아노의 음표는 모두 약박에 배치되어 감정의 골을 드러내고 있다. 이어 곡은 C#단조로 전조, 짤막한 피아노의 독주가 이어진 후 성악과 피아노의 발화와 응답이 한 동안 이어지다가 C#음이 다시 D단조로 들어가면서 첫 부분이 돌아온다. 첫 부분의 재현은 채 10마디가 되지 않으며, 82마디부터는 다시 Allegro의 빠른 두 번째 파트가 나타나는데 이번에는 스트레토 기법을 사용하여 발화와 응답이 점점 겹치기 시작하면서 둘은 서서히 얽힌다. 그런 극적인 상태에서 곡은 코다에 진입한다. 90마디부터 곡은 9/4박자로 변하고, 트릴이 셋잇단음표와 함께 곡의 마지막까지 함께 한다. 이 음형은 점점 디미누엔도한다. 성악 선율은 점점 음가가 길어지면서 길게 늘어져 흩어지는 느낌을 준다. 곡의 시작이 그렇듯 마지막 화음도 3음을 생략해 공허한 느낌을 더하는데, 돌연 강렬한 D단조 화음을 찍으면서 끝을 맺는다.)

Ich wandte mich und sahe an alle

(Prediger Salomo 4:1~3)

Ich wandte mich und sahe an alle,

die Unrecht leiden unter der Sonne;

und siehe, da waren Tränen derer,

die Unrecht litten und hatten keinen Tröster;

und die ihnen Unrecht täten, waren zu mächtig,

daß sie keinen Tröster haben konneten.

Da lobte ich die Toten, die schon gestorben waren,

mehr als die Lebendigen, die besser als alle beide,

und des Bösen nicht inne wird,

das unter der Sonne geschieht.

나는 모든 학대를 보았다

(전도서 4:1~3)

나는 또 태양 아래에서 자행되는 모든 억압을 보았다.

보라, 억압받는 이들의 눈물을!

그러나 그들에게는 위로해 줄 사람이 없다.

그 억압자들의 손에서 폭력이 쏟아진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위로해 줄 사람이 없다.

그래서 나는 이미 오래전에 죽은 고인들이

아직 살아 있는 사람들보다 더 행복하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이 둘보다 더 행복하기로는 아직 태어나지 않아 태양 아래에서 자행되는

악한 일을 보지 않은 이라고 말하였다.

2곡 <나는 모든 학대를 보았다> (2.Ich wandte mich und sahe na alle. Andante 3/4) (G minor)

(첫 번째 곡이 고통에 대해 말하고 있다면 두 번째 곡은 불합리와 불평등에 대해 말하고 있다. 권력자들은 권력을 남용하고, 피지배자는 그 권력 밑에서 신음한다. 이 모순으로 인한 고통보다는 차라리 죽음이 낫다는 비참한 외침이 이 곡의 주된 내용을 이루고 있다.

피아노는 왼손의 동기에 오른손이 따라가는 형태를 취하며, 성악 선율도 역시 그 뒤를 따라간다. 주로 3도로 하강하는 이 동기는 브람스의 ‘죽음의 동기’라 불리는데, 브람스는 이런 형태의 동기를 그의 가곡 <들판의 적막>(Feldeinsamkeit) Op.86-2에서 먼저 사용한 적이 있다. 이 곡의 내용도 죽음의 명상에 관한 것이다. 이후 가사는 ‘Unrecht leiden unter der Sonne(태양 아래에서 자행되는 모든 억압)'에 대해 노래하고, 특히 ’leiden(고통받다)‘를 sf로 강조하고 있다. 이 부분은 감7화음으로 채색되어 있다.

15마디부터는 E♭장조의 느낌이 나는 화성을 사용하는데, 그렇다고 해서 조성이 E♭장조로 이동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오히려 “고통 받으며 사는 사람보다는 오히려 죽은 사람이 더 행복하다”는 결론을 강조하기 위한 음악적 장치로 보아야 한다. 즉 비유를 위한 음악적 암시인 셈이다. 이것은 17마디에서 ‘Siehe(보라!)’는 명령형 문장이 sf, 증1도 화음과 함께 나타나는 것으로 확실해진다. 우리는 음악이 표현하는 고통과 학대를 텍스트의 지시에 따라 보고 듣는다. 이어지는 21마디의 Tränen derer(그들의 눈물)에서도 이탈음이 등장하여 위의 표현과 비슷한 효과를 낳는다. 23마디부터 곡은 극적인 정점에 도달하는데, 가사 ‘die Unrecht litten und hatten keinen Tröster und die ihnen Unrecht täten, waren zumächtig(그러나 그들에게는 위로해줄 사람이 없고, 그 억압자들의 손에서는 폭력이 쏟아진다)이 전하는 울분을 극대화하기 위해 반음계 화성, 성악 파트의 음정 도약과 피아노의 헤미올라3) 리듬, 급격한 전조(E♭ major-A minor-G minor)가 합쳐져 전에 없이 참혹한 감정을 여과 없이 그대로 분출한다.

2박자의 쉼표 이후 36마디부터 다시 죽음의 동기가 등장한다. 음량은 pp로 작아지는데, 그에 반비례하여 긴장감은 두 배로 높아진다. 이 부분에서 성악가와 피아노는 결코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다. 그러나 텍스트와 음악이 전하고자 하는 감정은 똑똑히 들려온다. 너무나 참혹한 상황을 접했을 때는 오히려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것처럼, 이런 상황에서 이렇게 낮은 목소리는 오히려 긴장감을 극대화한다.

61마디부터 곡은 코다로 진입하고, 주 조성인 G단조와 같은 으뜸음을 쓰는 G장조로 ‘und des Bösen nicht inne wird, das unter der Sonne geschieh(태양 아래에서 자행되는 악한 일을 보지 않은)’에 대해 말하며 차분하면서도 우울하게 ‘차라리 죽음이 낫다’는 사실을 고한다. 음가도 그 우울함에 맞추어 두 배 늘어난 4분음표의 리듬을 사용하여 점점 사라지듯 노래를 마무리 짓는다.)

O Tod, wie bitter bist du

(Jesus Sirach 41:1~2)

O tod, wie bitter bist du,

wenn an dich degenkt ein Mensch,

der gute Tage und genug hat und ohne Sorgen lebet:

und dem wohl essen mag!

O Tod, wie wohl tust du dem Dürftigen,

der da schwach und alt ist,

der in allen Sorgen steckt,

und nichts Bessers zu hoffen noch zu erwarten hat.

죽음이여, 고통스러운 죽음이여

(집회서 41:1~2)

오 죽음아, 얼마나 괴로운 일인가!

자기 재산으로 편히 사는 인간에게,

아무 걱정도 없고 만사가 잘 풀리며 아직 음식을 즐길

기력이 남아 있는 인간에게 너를 기억하는 것이.

오 죽음아, 얼마나 좋은가!

너의 판결이 궁핍하고 기력이 쇠잔하며

나이를 많이 먹고 만사에 걱정 많은 인간에게,

반항적이고 참을성을 잃은 자에게.

3곡 <죽음이여, 고통스러운 죽음이여> (3.O Tod, wie bitter bist du. Grave 3/2-4/2) (E minor)

(가톨릭 구약 집회서 41장에서 텍스트를 취한 세 번째 곡은 보통 사람들, 편안한 삶을 사는 이들에게 닥쳐오는 죽음의 고통스러움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동시에 삶에 지친 자들에게 죽음이 위로가 될 수도 있다는 내용도 담고 있다.

곡의 빠르기말은 Grave, 전주와 후주가 없는 통절 가곡형식인 이 곡은 매우 느린 템포로, 피아노의 전주 없이 성악이 바로 등장한다. 이런 단도직입적인 개시 때문에 사람들은 첫 대사 ‘O Tod, wie bitter bist du(오 죽음아, 얼마나 괴로운 일인가)에 집중하게 된다. 이 대사 또한 노래라기보다는 오히려 연극의 독백처럼 들리는데, 빈사 상태에 빠진 사람이 고통에 겨워 몸부림치는 단말마를 연상시킨다. 3마디의 C-C# 증8도 상행과 낮은 음역에서 갑작스럽게 높은 음역으로의 상승은 이 곡의 난이도를 높인다.

6마디부터 리듬은 2박자 계열의 리듬에서 1박자 계열의 리듬으로 줄어드는데, 이것은 행복한 삶을 영위하는 이들에게 죽음이 얼마나 큰 고통인지를 설명해준다. 그리고 다시 ‘O Tod……'의 대사가 나오면서 첫 부분은 끝난다.

18마디부터 조성은 E장조로 바뀌고, 삶에 지치고 고통 받는 자들에게 죽음이 위로가 될 수 있음을 말한다. 조성은 장조로 바뀌었지만 분위기는 위로가 아닌 우울함을 담고 있다. 텍스트는 역설적으로 죽음이 위로가 될 정도로 삶이 막막하고 팍팍하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첫 부분에서 3도 하행하는 ‘O Tod'와는 달리, 이 부분에서는 ’O Tod'가 6도 상승한다. 이 우울함은 27~28마디의 ‘und nicht Bessers', 'zu hoffen noch zu erwärten hat’에서 현실에 대한 한숨과 절규로 방향을 튼다.

이후 곡은 점점 고요해지며 분위기를 차분하게 가라앉히면서 마지막 곡의 등장을 유도한다.

참고로 이 곡은 네 개의 가곡 중에서도 특히 어려운 곡으로 꼽히는데, 갑작스러운 리듬의 변화, 음정의 도약, 긴 호흡, 무거운 텍스트의 표현과 감정 처리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일류 성악가들도 결코 좋은 연주를 만들어내기 쉽지 않다.)

Wenn ich mit Menschen und mit Engelzunge reget

(St. Pauli an die Corinther I, Kor.13:1~3, 12~13)

Wenn ich mit Menschen und mit Engelzunge redet,

und hätte der Liebe nicht,

so wär' ich ein tönard Erz, oder eine klingende Schelle.

Und wenn ich weisssagen könnte

Und wüßte alle Geheimnisse und alle Erkenntnis,

und hätte allen Glauben, also daß ich versetzte,

und hätte der Lieber nicht,

so wäre ich nichts.

Und wenn ich alle meine Habe den Arme gäbe,

und liebe meinen Leib brennen;

und hätte meinen Leib nicht,

so wäre mir nichts nütze.

Wir sehen jetzt durch einen

Spigel in einem dunken Worte;

Dann aber von Angesicht zu Angesichte.

Jetzt erkenne ich's Stückweise,

dann aber wird ich's erkennen,

gleich wie ich erkennet bin.

Nun aber bleibet Glaube, Hoffnung, Liebe, diese drei;

Aber die Liebe ist die Größeste unter ihnen.

내가 인간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코린토 첫째 서간 13:1~3, 12~13)

내가 인간의 여러 언어와 천사의 언어로 말한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요란한 징이나 꽹과리 소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고

모든 신비와 지식을 깨닫고

산을 옮길 수 있는 큰 믿음이 있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가 모든 재산을 나누어 주고

내 몸까지 자랑스레 넘겨준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어렴풋이 보이지만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볼 것입니다.

내가 지금은 부분적으로 알지만

그때에는 하느님께서 나를 온전히 아시듯

나도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믿음과 희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계속됩니다.

그 가운데에서 으뜸은 사랑입니다.

4곡 <내가 인간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4.Wenn ich mit Menschen und mit Engelzunge reget. Andante con moto 4/4) (E♭ major)

(이 가곡은 앞의 세 곡과는 다른 목적에서 만들어졌다. 1892년 1월, 브람스의 친구인 엘리자베트 폰 헤르초겐베르크가 심장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작곡가는 그녀를 추모하기 위한 의미에서 이 곡을 만들었다.

이 가곡집은 어둡고 비참한 이야기만을 하고 있지 않다. 브람스는 사도 바울의 감동적인 고백으로 유명한 코린트서의 구절로 이 가곡집을 끝맺고 있다. 이 마지막 가곡은 고통을 초월한 곳에 있는 아가페적인 사랑이다. 고통을 겪지 않아본 이는 진정한 사랑에 대해 말할 자격이 없다. 첫 곡에서 세 번째 곡까지 인간의 쓰고 우울한 감정들을 모두 맛본 후에라야 마지막 곡에서 사랑을 논할 자격이 주어지는 것이다.

성악이 등장하기 전의 전주는 작곡가의 첼로 소나타 2번의 기교와 비슷하다. 작곡가는 첼로로 트럼펫의 소리와 비슷한 음향을 구사하는데, 역시 여기서도 작곡가는 피아노로 팡파르 소리와 비슷한 음향을 추구한다. ‘Liebe nicht(사랑이 없으면)’을 긴 음가로 처리, 버금딸림화음으로 불완전 종지를 하고 있으며, ‘Klingende Schelle', 'tönende Erz'에서는 피아노를 8분음표로 교차하여 등장하도록 하여 타악기적인 효과를 더하고 있다.

48마디부터는 B장조로 중간부가 등장한다. 박자도 3/4박자로 바뀐다. A파트의 수직적인 화음과는 대조적으로 셋잇단음표의 아르페지오 음형으로 바뀌어 차분한 분위기가 주를 이룬다. 특히 48-49, 62-63 마디에서는 성악 선율과 피아노 선율이 서로 3도 병행으로 노래하며, 56마디부터는 피아노 베이스가 F#음을, 60마디부터는 B를 페달 포인트로 사용하여 이전의 삶에 대해 생각하는 느낌을 준다. 또 68마디부터는 헤미올라 리듬을 사용, 앞으로 전진하는 느낌을 준다.

72마디부터는 상승하는 선율과 cresc., poco a poco piu moto를 써서 A부분의 축소 부분인 A' 부분을 준비하는데 이 부분에서 쓰이는 화성은 비화성음에 의한 전조를 사용하여 후기 낭만주의의 영향을 드러낸다. 마지막 A' 파트에서 가사는 Glaube(믿음), Hoffnung(소망), Liebe(사랑)에 대해 이야기하며 특히 이 중에서 Liebe(사랑)를 가장 높은 음역에서, 가장 긴 음가로 표현해 믿음, 소망, 사랑 중 사랑이 가장 중요하다는 텍스트를 강조하면서 끝을 맺는다.)  

 

1) 다만, 마지막 곡은 1892년에 따로 만들어 둔 것이다.

2) 증4도는 말러 교향곡 7번의 중심 모티프 음정 간격이며, 감4도는 리스트가 <단테 소나타>에서 사용한 주요 모티프의 음정 간격이다. 둘 다 불협화적이고 어두우며 기이한 느낌을 준다.

3) 헤미올라(Hemiola) : 그리스어로 ‘하나 반’을 뜻하는 헤미올리스(ἡμιόλιος. Hemiolis)에서 온 단어. 15세기부터 음악이론에서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 단어에는 두 가지 뜻이 있는데, 첫째는 완전 5도를 가리키는 말로 현의 비율이 3:2일 때 이 음정을 얻을 수 있다고 해서 이러한 명칭이 붙었다. 그러나 주로 사용하는 뜻은 바로 지금부터 설명할 두 번째 뜻이다. 바로 3박자 리듬에서 등장하는 2박자 리듬을 가리키는 말로, 3개의 음표를 여섯 개로 쪼갠 후 이것을 둘로 합하여 사용하는 리듬이다. 예시를 들면 4분음표 3개가 있을 때 이를 각각 반으로 쪼개 8분음표 여섯 개를 만든 후, 8분음표를 세 개씩 합하면 헤미올라 리듬이 된다. 즉 ‘1+1+1’을 재조합해 ‘1.5+1.5’로 만든다는 뜻이다. 그러나 기보법은 3박자로 써야 하기 때문에 앞에는 점4분음표를 놓고, 뒤의 8분음표와 4분음표는 이음줄로 잇는 것이 보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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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무나 참혹한 사고가 터졌다. 그 사고가 왜 터졌는지를 생각하기도 전에 사회의 병든 모습이 낱낱이 드러났다. 사고 이후 사회의 시계가 멈춰버린 것 같다. 음악 듣는 것도 무력하게 느껴져서 며칠 동안 음악을 듣지도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음악이 바로 이 곡이었다. 어둡고 비통하지만 어둡고 비통한 곳에만 머무르지 않는, 큰 슬픔을 온 몸으로 이겨내는 이 곡을 듣고 그 곡에 대해 쓰는 일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부끄럽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쓰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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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올린 협주곡 1번 (Violin Concerto No.1 in A minor, Op.77(Op.99))

작곡 시기 : 1947년 7월 21일 착수, 1948년 3월 24일 완성

작곡 장소 : 모스크바

헌정자 : 바이올리니스트 다비드 오이스트라흐

악기 편성 : 독주 바이올린, 피콜로(제3 플루트와 겸함), 플루트 2, 오보에 2, 잉글리시 호른(제3 오보에와 겸함), 클라리넷 2, 베이스 클라리넷(제3 클라리넷과 겸함), 파곳 2, 콘트라파곳(제3 파곳과 겸함), 호른 4, 튜바, 팀파니, 탬버린, 탐탐, 실로폰, 첼레스타, 하프 2, 현악 5부

(이 협주곡은 즈다노프 비판이 한창 진행되고 있을 때 만든 곡이다. 쇼스타코비치는 살아남기 위해 자존심이고 뭐고 다 집어치운 채 일단 바닥에 납작 엎드려야 했다. 그는 낮에는 가혹한 인격살인과 협박이 그럴듯한 정치용어에 포장된 채 쏟아지는 위원회에 출석하고, 밤에는 집에 돌아와 이 곡을 썼다. 곡에서는 어떠한 외부적인 압력의 흔적도 느껴지지 않지만(협주곡의 형식은 고전적인 형식과 현대성을 아주 잘 결합했다는 평을 받는다. 이것은 어쩌면 소비에트의 당이, 독재자가 원한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모범답안인지도 모른다), 곡의 모든 주제는 어둠 속에서 달빛을 받은 칼날처럼 번뜩이고 있다. 쇼스타코비치는 곡을 완성하고도, 자신의 평판(과 목숨)이 나락으로 떨어질까 두려워해 이 곡의 출판을 미루었다. 곡의 출판은 스탈린이 죽고 교향곡 10번이 성공을 거둔 후에 비로소 이루어졌다. 작품번호가 두 개인 까닭이 바로 그것이다(Op.77은 완성 시기에 맞춘 작품 번호이며, Op.99는 출판 시기에 맞춘 작품 번호이다. 처음에는 Op.99로 출판했으나 나중에 Op.77로 바꾸었다). 쇼스타코비치는 곡을 완성하자마자 오이스트라흐에게 맡겼지만, 초연까지는 8년이 걸렸다. 곡을 초연한 바이올리니스트 다비드 오이스트라흐에게 헌정했다.

곡은 트럼펫과 트롬본 없이 진행한다. 트럼펫은 쇼스타코비치가 당을 위해 작곡한 공허한 선전용 음악에서 즐거운 팡파레를 맡곤 했다. 작곡가는 이 곡에서 그런 허세를 부리지 않는다. 1악장과 3악장은 각기 고통스러운 녹턴과 파사칼리아, 2악장과 4악장은 교활한 풍자와 칼날 위에 선 사람들의 아찔한 춤을 그리는 스케르초와 부를레스케다. 이토록 소름끼치는 풍자를 기악 음악으로 실현한 작곡가는 쇼스타코비치 말고는 없다. 쇼스타코비치도 이렇게 잘 벼려진 풍자 음악은 두 번 다시 만들지 못했다(이후의 풍자음악은 너무 노골적이거나 너무 어둡다). 그는 짓누르면 짓누를수록 더욱 강해지는 작곡가였지만, 결국 공포가 작곡가의 개인적인 의지를 눌러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1악장 (1.Nocturne. Moderato 4/4) (A minor)

(음울하고 고통스러운 녹턴 악장은 견디기 힘들 정도로 아주 길게 이어진다. 그러나 녹턴 악장은 동시에 부드러운 패시지도 담고 있다. 독주 바이올린을 반주하는 악기군은 완전히 둘로 갈라져 교대를 하듯 독주악기를 반주한다. 주로 악장의 분위기 조성을 맡는 것은 현악기군이며, 관악기군은 주로 보조 역할을 맡는다. 마지막 부분에서 바이올린은 약음기를 사용하고, 현악기군과 하프의 꺼질 듯한 반주와 함께 조용히 끝을 맺는다. 이 조용한 종지는 2악장의 개시가 던져주는 신선한 충격을 배가한다.)

2악장 (2.Scherzo. Allegro 3/8 - Trio 2/4) (D flat major)

(쇼스타코비치는 이 악장에서 처음으로 자신의 음악적 서명 DSCH(D-Es-C-H/D-E♭-C-B)를 사용하고 있다. 이 서명은 이후 현악 4중주 8번과 교향곡 10번에서도 나타난다. 플루트와 독주 바이올린으로 시작하는 첫 주제는 공허하고 낙관적인 선전용 미소를 띠고 있다. 그러나 그 공허한 미소는 어느 누가 보아도 줄에 매달린 꼭두각시의 웃음이다. 영혼 없는 인형의 춤 뒤에서 꼭두각시를 조종하는 ‘이면’은 트리오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트리오 주제는 즐거움과 기쁨을 나타내지만, 쇼스타코비치의 교묘한 가공은 그 주제에 기묘한 광기를 불어넣는다. 곡은 다시 스케르초로 돌아오지만, 이제 꼭두각시는 자기가 억지로 웃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 즐거워 웃는지도 구분하지 못한다. 미칠 것 같지만 동시에 미친 듯 즐겁기 때문이다. 어떤 작가도 이러한 상황을 쇼스타코비치만큼 잘 말할 수 없을 것이다. 특정한 조성이 없다고 할 정도로 변화무쌍한 스케르초 악장의 전조는 이 느낌을 증폭시킨다.)

3악장 (3.Passacaglia. Andante 3/4 - Cadenza) (F minor)

(3악장의 작곡 시기는 즈다노프 비판이 행해지던 시기와 일치한다. 20세기 작곡가들은 엄격한 파사칼리아 형식을 통해 강압적이고 거대한 수레바퀴와, 그 수레바퀴에 짓눌린 사람들을 묘사했다. <보체크>에서 의사의 실험대상으로 전락한 보체크를 묘사하는 데 파사칼리아를 사용한 데서 그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알반 베르크를 존경했던 쇼스타코비치는 자신의 협주곡에서 파사칼리아를 사용한다. 파사칼리아를 곡에 굳이 집어넣은 의도는 베르크와 같았으리라. 스탈린의 대숙청 시기, 강제수용소로 끌려간 많은 사람들은 다시는 빛을 보지 못했다. 그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다 기억하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그들이 당했던 일이 어떤 것인가를 알리는 데는 역시 음악이 유용하게 쓰일 수 있다. 그 안에 담긴 뜻을 이해하기 위해 음악을 알아야만 하는 기악곡은 더욱 그렇다(성악곡은 드러내고자 하는 바를 너무 직접적으로 묘사하고 언급한다. 사실 그것이 성악곡의 가장 큰 위력이기도 하지만). 파사칼리아가 서서히 막을 내리면 절규와도 같은 독주 바이올린의 카덴차가 이어진다. 앞부분인 파사칼리아가 고전적인 형식인 것처럼, 이 카덴차 부분도 바흐의 무반주 바이올린 독주곡들을 연상시킨다. 카덴차는 앞의 악장들을 회고하면서 점점 분위기를 격렬하게 만들고, 그 분위기는 바로 4악장으로 이어진다.)

4악장 (4.Burlesque. Allegro con brio 2/4) (A minor)

(이 악장은 스케르초 악장의 연장인 동시에, 절규와도 같은 앞의 카덴차를 잘라버리면서 나타난다. 물론 그 절규를 잘라버리는 것은 팀파니의 강압적인 리듬이다. 팀파니의 호위를 받으며 나타나는 부를레스케 주제는 그 폭압적인 성격이 지나쳐 오히려 장난치는 것처럼 들린다. 주제가 끝나면 목관과 독주 바이올린이 어우러지는 광대의 춤이 이어진다. 독주 바이올린은 그 틈바구니에서 아슬아슬하게 춤을 춘다. 결국 코다에서 모든 주제들은 발작하는 것처럼 튀어나오고, 폭넓은 다이내믹(mf-f-ff, p-cresc.-ff)은 들뜬 분위기를 돋우면서 파국을 재촉한다. 결국 부를레스케의 등장을 장식했던 강압적인 팀파니가 그 모든 주제들을 묻어버리면서 곡은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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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곡의 피아노 소품 (6 Piano Pieces, Op.118)

작곡 시기 : 1893년 완성

출판 : 1893년

(이 곡집의 6곡은 1893년 여름에 바트 이슐에서 완성하였다고 전해지는데, 그 이전에 작곡한 곡도 섞여 있다고 한다. 브람스는 1893년 여름에 Op.118과 Op.119의 10곡의 소품을 완성한 것부터 순서대로 클라라 슈만에게 보냈는데, 그 보낸 순서는 다음과 같다, 먼저 5월에 Op.119의 제1곡, 6월에 Op.119의 제2, 3곡, 7월 2일에 Op.119의 제4곡, 8월에 Op.118의 제1, 2, 3, 6곡, 9월에 Op.118의 제4, 5곡. 그리고 브람스는 바트 이슐에서 이 곡들을 클라라 슈만의 제자인 여류 피아니스트 이로나 아이벤슈츠와 칼베르에게 연주해 들려준다. 확신하지만 않았지만, 칼베크는 이것들 중 몇 개는 브람스가 바트 이슐에 오기 이전에 완전히 완성했다고 추정하고 있다.

이 아이벤슈츠는 Op.118의 제3, 5곡을 1894년 1월 22일에 런던의 세인트 제임스 연주홀에서 초연하였다. Op.118의 전6곡을 정리하여 처음으로 소개한 것도 아이벤슈츠였다(1894년 3월 7일, 런던의 세인트 제임스 연주홀). 이 6곡의 악보는 1893년 11월에 짐로크에서 처음 출판한다.)

1곡 <간주곡> (No.1 Intermezzo in A minor. Allegro non assai, ma molto appassionato 2/2)

(만년에 접어든 브람스 특유의 쓸쓸함이 담긴 곡이지만, 남성적인 호방함도 충분히 담고 있다. 쇼팽의 전주곡 스케일을 한아름 크게 담은 느낌의 곡이기도 하다. 이 곡은 3부 형식을 취하면서도 형식감이 크게 두드러지지 않는데, 단숨에 쓴 인상을 주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단순한 3음 하행 음형을 기본적인 동기로 하여 전체가 짜여져 있고, 마지막에는 극히 효과적으로 이 동기의 확대를 꾀한다. 곡의 처음에 a단조의 버금딸림조의 딸림7이 나오므로, 조성적으로 불안한 느낌이 있다. 또한 이 곡에서는 프리지아 2도(음계의 반음 내린 제2도음)의 사용이 눈에 띄며, 이것으로 특유의 안타까운 느낌을 강하게 나타낸다.)

2곡 <간주곡> (No.2 Intermezzo in A major. Andante teneramente 3/4)

(브람스가 쓴 「가사 없는 노래」라고도 할 수 있는 곡인데, 주제를 다루는 대위법적 기교가 놀라울 정도로 뛰어나다. 첫머리의 동기는 제31마디 이하에서 저성부에 대위법적으로 놓여지고, 이어서 제35마디 이하에서 전회한다. 중간부는 f#단조로 시작하는데, 거기서 오른손은 모방을 이루며 F#장조로 돌아간 후에도 동일한 모방이 있다. 이후 다시 f#단조가 되면, 이번에는 전회의 모방이 이루어진다. 어쨌든 그런 기교에도 불구하고 부드럽고 친밀해지기 쉬운 곡으로, 노작이라는 평가를 받아 마땅한 곡이며, 브람스의 만년 피아노곡 중에서도 널리 사랑받는 편에 속한다.)

3곡 <발라드> (No.3 Ballade in G minor. Allegro energico 2/2)

(이것도 만년의 피아노곡 중에서 널리 사랑받고 있는 것 중의 하나이다. 그 이유로는 중간부의 B장조 선율의 아름다움이 큰 역할을 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리고 드물게도, 이 중간부에서는 제1부의 선율이 한 번 그대로 나온다. 브람스의 곡에서 이런 일은 거의 없다. 곡은 발라드라고 이름 붙여져 있지만, Op.10 <에드워드 발라드> 이외의 곡과 마찬가지로 어떤 특정한 이야기에 의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야기풍의 극적인 힘은 충분히 보여주고 있다. 곡은 5마디 단위의 프레이즈를 많이 가지고 있는 것도 특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중간부가 C장조의 딸림7을 독일6화음(증6도 음정에 3도와 5도 음정을 삽입한 화음)으로 의미를 바꾸어 B장조로 들어가는 것도 재미있다.)

4곡 <간주곡> (No.4 Intermezzo in F minor. Allegretto un poco agitato 2/4)

(경쾌하면서도 왠지 쓸쓸함이 느껴진다. 이 곡에서는 오른손과 왼손이 거의 항상 카논으로 진행하는 것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곡은 낭만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내면서 F장조로 조용히 끝난다.)

5곡 <로만체> (No.5 Romanze in F major. Andante 6/4)

(바로크 시대, 또는 그 이전의 서법을 연상케 하는 고풍스런 느낌의 로망스. 3부 형식을 취하며, 그 제1부는 4마디 주제에 기초한 변주곡과 비슷하다. 주제는 기본위치의 화음을 많이 사용하며, 중간부에서 8도로 중복하여 주선율을 배치하고, 상성부는 하행풍으로 이 주선율에 대위법을 이룬다.

이어지는 제9마디 이하에서 이 두 가지는 전회한다. 중간부(알레그레토 그라치오소 D장조 2/2박자)도 8마디 단위의 변주처럼 쓰여 있다.

그리고 저성부가 오스티나토풍으로 되어 있는 것도 눈에 띄는 특징라고 할 수 있다. 제3부는 제1부의 단축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마지막에 전회 종지한다.)

6곡 <간주곡> (No.6 Intermezzo in E flat minor. Andante, Largo e mesto 3/8)

(이 곡은 원래 교향곡 제5번의 느린 악장으로 생각했던 것이라 한다. 어쨌든 만년에 접어든 브람스의 심정을 잘 전해주는 곡으로, 애처롭고 쓸쓸하다. 단 3개의 음(G♭/F/E♭)을 느리게 움직이는 동기로 이런 음악이 만들어졌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G♭장조의 중간부는 약간 생기를 되찾아오지만, 역시 제1부의 동기가 모습을 감추고 있으며 내면의 그림자가 그대로 남아 있다.)

Posted by 여엉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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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 소곡집> 1집 (Lyric Pieces Book.1, Op.12)

작곡 시기 : 1866년에서 1867년(?)

출판 : 1867년

(“이 열 권 의 서정 소품집은 삶의 밀접한 단편입니다”. 그리그는 1901년 페터스 출판사의 편집장인 앙리 힌리쉔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적은 바 있다. 1867년부터 1901년 사이에 작곡, 출판한 10권 66곡의 피아노 소품, 즉 서정 소품집이라 불리는 일련의 소품 사이클은 멘델스존과 슈만, 쇼팽이 추구한 피아노 음악의 시적, 함축적 전통을 훌륭하게 이은 낭만주의시대 피아노 소품집의 걸작으로 꼽힌다. 하지만 그리그는 낭만주의 음악의 단순한 승계자는 아니었다. 그의 작품집은 항상 민속음악의 요소를 폭넓게 끌어들였다는 점에서 주목받는데, 이 작품집도 거기에 포함할 수 있다. 1집을 출판할 때 23세였던 청년 작곡가는 마지막 10집을 완성할 때 즈음에는 58세의 원숙한 나이가 되어 있었다. 1집은 주로 코펜하겐에서 청년작곡가로 활동하기 시작했을 무렵의 작품들이 모여 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처음부터 하나의 곡집에 수록할 의도로 작곡된 것들만 들어간 것이 아니라 과거 코펜하겐 시기의 작품도 포함했다. 출판도 이 제1집만은 코펜하겐의 출판사에서 이루어졌다.)

1곡 <아리에타> (No.1 "Arietta" in E flat major. Poco andante e sostenuto 2/4)

(A(1-12)-A'(18-22)-코데타(23). 멘델스존과 매우 닮은 첫 곡 <아리에타>. 겨우 23마디로 이루어진 편안한 소품이다. 부드러운 내성의 반주 화음이 이 곡의 분위기를 아주 잘 말해준다. 이 곡의 선율이 제10집의 마지막 곡 <회상>에서 리듬을 바꾸어 다시 등장한다.)

2곡 <왈츠> (No.2 "Vals" in A minor. Allegro moderato 3/4)

(A(1-36)-B(37-52)-A(53-70)-코다(71-79)로 이루어져 있다. 2곡과 4곡은 민속적인 단순함을 끌어들여 높게 평가받는다. 당시 중부 유럽 음악에 심취해 있던 작곡가는 친구인 리카르드 노르드락으로부터 북유럽의 민속음악의 다양성과 풍부함을 소개받는다. 작곡가는 “눈 앞 에 안개가 끼며 갑자기 내가 가야 할 길을 깨닫게 되었다”라고 회상한 바 있다. 원래 이 곡은 1866년 크리스마스를 위해 작곡한 곡에서 전용한 것이다. 앞뒤가 a단조이고 중간부가 같은으뜸음조인 A장조이다. 노르웨이적인 정서가 감도는 왈츠.)

3곡 <파수꾼의 노래> (No.3 "Vektersang" in E major. Molto andante e semplice 2/2)

(페터스판 악보에는 「셰익스피어의 『맥베스』에서 영감을 얻어」라는 설명이 붙어 있는 것으로 보아 『맥베스』에 나오는 인물인 「야경꾼의 노래」를 토대로 작곡했다고 볼 수 있지만, 다른 설도 있다. 앞뒤에 안정된 리듬의 음악이 나오고, 「밤의 정령들」이라고 표기한 중간부를 삽입했다.)

4곡 <요정의 춤> (No.4 "Alfedans" in E minor. Molto allegro e sempre staccato 3/4)

(가볍고 활달하게 건반 위를 달리는 노르웨이 요정을 표현한 음악이다. 연주 시간이 채 1분이 되지 않는 짧고 간결하며 상쾌한 곡이다.)

5곡 <민요> (No.5 "Folkevise" in F sharp minor. Con moto 3/4)

(많은 연구가들이 쇼팽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지적하는 곡이다. 쇼팽의 마주르카 노르웨이판이라고 볼 수 있는 소박한 춤곡풍 음악이다.)

6곡 <노르웨이 멜로디> (No.6 "Norsk" in D major. Presto marcato 3/4)

(《서정 소곡집》 시리즈에 앞서 단독으로 출판한 소품이다. 노르웨이의 민속 춤곡인 도약춤곡(Springar)을 명쾌한 피아노 연주로 처리한 작품이다.)

7곡 <음악수첩> (No.7 "Albumblad" in E minor. Allegretto e dolce 2/4)

(오른손에 이어 왼손으로 매우 부드러운 선율을 연주하는 소박한 소품이다. 같은 제목의 곡이 제4집에도 나온다.)

8곡 <조국의 노래> (No.8 "Fedrelandssang" in E flat major. Meastoso 4/4)

(결연한 도입부를 가진 당당한 찬가풍의 피아노 음악이지만 끝은 매우 짧고 간결하다.)

 

Posted by 여엉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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