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에르-로랑 에마르 피아노 리사이틀 (2024.10.1)

 

베토벤/쇼팽/드뷔시/리게티

 

 

내가 영접하는 에마르의 연주는 이 번이 세 번째다(순수 리사이틀은 2번째 리사이틀).

최고의 피아니스트이며, 대안조차 없는 연주가의 리사이틀을 보러 가는 것은 의무인 동시에 즐거움이다.

이제 이런 연주를 더는 들을 수 없다는 절박감보다는, 한층 더 노숙해진 거장의 연주를 들을 수 있다는 기쁨이 앞서……는 것보다는 그냥 더 늙으시면 이제 리게티 에튀드 못 치실 것 같아서 갔다(진짜다. 에마르옹 벌써 67세시다. 다들 더 늦기 전에 보러 가라).

레퍼토리는 전에도 그랬듯 고전 레퍼토리와 현대 레퍼토리를 절묘하게 섞어놓았다.

1부에는 베토벤의 바가텔과 리게티의 <무지카 리체르카타>를 섞어놓았는데, 차례대로 등장하는 리게티의 곡과는 달리 베토벤의 곡은 연주자의 의도에 따라 재배치되었다.

노쇠에 대한 걱정은 기우였다.

에마르의 피아노 연주는 완벽한 균형미와 우아한 철골을 연상시키는 음색, 그리고 경이롭다 못해 공포스러운 기교의 삼위일체가 여전했다.

그리고 그보다 놀라운 것은, 듣는 관객이 피아니스트의 의도에 따라가고 설복할 수밖에 없는 레퍼토리 배치와 해석이었다.

에마르는 베토벤에서는 베토벤이 얼마나 불협화적이고 현대적인 작곡가인지, 그가 바가텔에 배치해 놓은 불협화적 긴장이 얼마나 현대적인지를 보여주었으며, 반대로 리게티의 <무지카 리체르카타>에서는 (아직 헝가리 시절이지만) 리게티가 얼마나 고전에 경도되어 있는지, 그게 얼마나 많은 고전에 경의를 바치고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어떤 순간에는 잘 빠진 철골, 어떤 순간에는 투명한 유리를 연상시키는 그의 음색을 들으면서 떠오른 것은 (우스운 비유지만) 20세기 후반부 건축의 결정체라고 불리는 퐁피두 센터였다.

음향에 대해 얘기를 해보면, 에마르의 음향은 어떤 상황에서도 고르게 원을 그리면서 퍼져나가는 고유의 음향을 고수한다. 이 음향은 아무리 작아져도, 심지어 피아니시모나 피아니시시모, 그 이하의 음량이어도 연주회장 끝까지 고르게 퍼져나가 관객에게 구조를 입력한다.

(이 컨트롤을 제대로 못 하는 피아니스트는 의외로 적지 않다.)

1부에서 소품의 세계를 펼쳤던 에마르는, 2부에서는 피아노의 극한의 기교로 뛰어든다.

이렇게 현대음악처럼 연주하는 쇼팽이 또 있을까. 이렇게 깨끗하게 들리는 (폴리니 식의 표백제 뿌린 듯한 음향에 과포화된 페달링만 들리는 연주가 아니라) 드뷔시가 또 있을까.

물론 에마르의 핵심은 1부에서도 그랬듯 2부에서도 리게티였다. 첫 곡 <갈람 보롱>부터 마지막 곡 <악마의 계단>까지, 에마르는 연주 불가능소리까지 듣는 리게티의 에튀드를 씹어먹다 못해 가지고 놀았다. 역시 가장 큰 임팩트를 준 두 곡은, 스산하고 비통한 음악으로 시작해서 복잡한 구조가 얽히다가 거대한 몰아침으로 끝나는 <바르샤바의 가을>, 리게티의 피아노 에튀드를 통틀어 가장 어려운 곡으로 꼽히는 <악마의 계단>.

<악마의 계단>은 극악의 연주 못지않게 연주회장을 폭력적으로 채우는 마지막 음향의 음압이 중요한데, 에마르는 우리가 기대했던 대로 다른 피아니스트는 못 일으킬 핵폭풍으로 우리를 경이롭게 해주었다. 음의 연주가 끝나고, 핵폭풍이 서서히 가라앉는 마지막 10초 동안은 아무도 박수를 치지 않을 정도였다.

1부에서도 그랬듯 2부의 배치도 절묘했다. 특히 마지막 두 곡, 드뷔시의 <반음계를 위하여>와 리게티의 <악마의 계단>은 드뷔시와 리게티의 피아노곡을 통틀어 가장 어려운 곡을 배치해서, 이 프로그램에 어울리는 대단원이 무엇인지를 알려주었다.

한 가지 흠이 있다면, 드뷔시의 <반음계를 위하여>를 칠 때 꽤 오래 꺼지지 않았던 핸드폰 벨소리. ‘관객 수준운운하고 싶지는 않지만, 이것만큼은 몰입을 깰 만큼 길어서 언급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참고로 앵콜로는 리게티의 <3개의 바가텔>을 쳤는데, 이 소품은 리게티가 플럭서스 그룹에서 활동하던 1961년에 작곡한 작품으로서, 첫 곡에서는 음을 하나만 치고, 나머지 두 곡은 텅 비어 있다.

그러니까, 첫 곡에서 음을 딱 하나만 치고, 나머지 두 곡은 치려는 척 아무것도 안 한다고.

그 의도를 이해하는 순간, 웃을 수밖에 없었다.

리사이틀을 완성하는 순간이었으니까.

이렇게 연주자의 의도대로, 완벽하게 진행되고 완성된 리사이틀이 또 있었을까?

 

요약 : 감동보다는 경이로움. 그러나 경이로움만으로도 충분히 감동적일 수 있음을 증명한 리사이틀.

Posted by 여엉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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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그너 갈라 콘서트

 (<발퀴레> 1막과 <파르지팔> 3막)

 크리스토퍼 벤트리스(지크문트, 파르지팔), 에밀리 매기(지클린데), 연광철(훈딩, 구르네만츠), 양준모(암포르타스)

 로타 차그로섹(지휘) /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 / 국립합창단, CBS소년소녀합창단

 

 지인을 통해 우연히 알게 된 덕에 신속히 예매를 완료하고 보러 간 공연. 전곡이 아닌 갈라 콘서트라는 것이 조금 아쉽기는 하지만, 전곡 공연이라는 '이상'보다는 비용도 아끼고 간편하게 올릴 수 있으며 관객들도 부담없이 접할 수 있는 갈라 콘서트라는 '현실'을 택한 것도 나쁘지 않아 보인다. 무엇보다 차그로섹과 연광철을 한 무대에서 볼 수 있다는 엄청난 메리트가 나를 예당으로 이끌었다.

 일단 시작하기 전에는 지휘자와 연광철의 역량만 믿고 보는 공연이라는 생각을 했었고 그 생각은 공연이 끝날 때까지 딱히 크게 변하지는 않았다. 벤트리스는 소리 때깔은 나쁘지 않지만 지크문트를 하기에는 성량과 내지르는 파워가 조금 부족하지 않았나 싶다. 특히 울분과 고통에 차 내지르는 '뵐제! 뵐제!'는 소리가 너무 약해 좀 안타까웠다. 오케스트라를 뚫고 나와야 하는 마지막 'Braut und Schwester bist du dem Bruder-so blühe denn, Wälsungen-Blut!'도 오케스트라에 파묻히기는 마찬가지여서 더더욱 안타까웠다(주먹 꽉 쥐고 부르는데 정말 안타깝긴 하더라).

 매기가 21세기의 '핫한' 바그너 소프라노 중 한 명이라는 사실은 알지만, 역시 아쉬운 건 마찬가지였다. 전반의 또렷한 딕션이 후반으로 갈수록 '약간씩 코먹는 듯한' 모습을 보여준 점이 조금 아쉬웠다. 역동적인 모션을 보여준 점은 좋게 생각하지만 그것을 뒷받침하는 '노래'가 되지 않는다면, 그것도 바그너의 <발퀴레>에서 강렬하지 못한 모습을 보여준다면 존재감이 옅어질 수밖에 없다.

 역시 무대의 주역은 훈딩을 노래하는 연광철. 정말 '크라스가 다르다'는 것이 무엇인지 잘 보여주었다. 웬만한 소리가 다 묻혀버리는 3층까지 또렷하고 강렬하게 전달되는 기백있는 음성은 왜 그가 바이로이트를 비롯한 유수의 오페라 극장의 총애를 받는 가수인지 잘 보여주었다. 세세한 감정 변화나 디테일에는 신경쓰지 않고 묵직하게 훈딩이라는 캐릭터를 표현했는데, 애초에 훈딩이라는 캐릭터가 '세세한 감정 변화, 디테일'과는 백만 광년 떨어졌으니 아주 적확한 접근 방식이다. 가장 기억에 남는 대목은 '오늘 밤까지는 당신을 손님으로 대하겠지만 내일 해가 뜨면 당신을 직접 죽일 것'이라 경고하는 'Mein Haus hütet, Wölfing, dich heut'' 이하 부분.

 차그로섹은 오페라 극장에서 닳고 닳은 지휘자답게 능수능란한 완급조절을 보여주었다.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가 '손이 많이 가는' 오케스트라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사람답게 수시로 바쁘게 지시를 내려가며 합주력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배려했다. 다만 지크문트가 노퉁 뽑는 대목에서는 소리가 좀 김이 빠졌는데, 이 부분은 위에서 말한 '완급조절'과 관련되는 부분이므로 2부 <파르지팔>에서 설명하도록 하겠다.

 

 <발퀴레>를 그럭저럭 잘 끝내고 이어진 <파르지팔>.

 그런데 (사실 온라인 공연소개 보고 눈치챘지만) <파르지팔> 3막에 쿤드리가 없다.

 다시 한 번 말하는데 진짜 없었다.

 아니, 아무리 3막에서 쿤드리 대사가 'Dienen, Dienen!'밖에 없다지만 쿤드리를 없애버리면 어떻게 하냐고!

 쿤드리가 말은 안 하지만 파르지팔의 몸을 씻기는 등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는 사실은 <파르지팔>을 완청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데,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극을 완성시키는 존재가 없어져버리니 구르네만츠는 초반 20분 동안 혼잣말만 하는 독백형 캐릭터로 전락해버리고 파르지팔은 분명 머리는 구르네만츠가 씻겨주는데 발은 유령이 씻어주는 미스테리 심리극이 되어버렸다.

 '그냥 지클린데 한 매기를 2부에 갖다 쓰면 안 되는 거였나'라는 생각도 했었는데, 매기가 개런티를 높게 불러서 그냥 빼버렸나 보다. 매기한테 미안한 얘기지만 그렇게 생각을 안 하면 도저히 납득이 안 가. 

 이 대목에서 연광철에게 감탄할 수밖에 없는데, 실종되어버린 쿤드리의 존재감을 벌충이라도 하듯 자기가 1.5인분, 제대로 터뜨릴 때는 2인분의 존재감을 해주며 3막 초반을 자신의 무대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성 금요일의 음악이 울려 퍼지는 대목에서 '풀잎과 꽃잎에까지 미치는 평화의 자비'를 설파하는 연광철의 목소리를 듣고 있으면 '저 목소리로 설교했으면 나라도 지갑 열겠다'라는 이단심판받기 딱 좋을 생각이 무럭무럭 자라났다.

 연광철의 원맨쇼를 돕기 위해 뒤늦게 어기적어기적 나타난 벤트리스는 나름 훌륭하게 파르지팔을 노래했다. 오케스트라를 뚫는 성량은 없지만 소리 자체는 괜찮은 벤트리스에게는 '위안받을 출구 없는 비극적 영웅' 지크문트보다는 '천로역정 끝에 자비심을 깨우친 순수한 바보' 파르지팔이 더 어울려 보인다.

 암포르타스 역할을 맡은 양준모는 훌륭한 암포르타스였다... 연광철만 없었다면. 분명 흠잡을 데 없이 잘 해 줬는데, 앞부분에서 연광철의 존재감이 너무 강력해 어쩔 수가 없었다.

 차그로섹의 진가는 <파르지팔> 마지막 20분에서 드러냈는데, '이런 오케스트라는 초장부터 힘 빼면 앙상블 무너진다'라고 설파하듯 성 금요일의 음악 대목부터 힘을 주어 곡을 고양시키다 티투렐의 장송 음악부터 엔딩까지 모았던 기를 제대로 터뜨렸다. 바그너라는 레퍼토리가 엄청난 체력을 소모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가 1부/2부 합쳐 140분이라는 시간 동안 빵빵 터뜨려 주기에는 체력이 안 된다는 사실도 냉정하게 판단한 후 내린 결과일 것이다. 역시 오페라 극장에서 오래 구른 짬밥은 어디 안 간다.

 

 총평 : 뭐 이렇게 쓰기는 했지만, 국내에서 이 정도 이상의 바그너 공연을 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기에 나름 만족했다. 무엇보다 연광철과 차그로섹을 한 무대에서 볼 수 있었다는 점에 고점을 주고 싶다.

 

 (추가 : 성 금요일 음악 끝나고 장면전환 시 종치는 음향이 뭔가 허전하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까 음이 하나 없었다. 제보를 받은 바에 따르면 토요일 공연 때도 없었다고.)

 

Posted by 여엉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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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처럼 음악이 끌릴 때가 있다. 오늘은 그 대상이 메시앙이었다.

 가장 먼저 끌린 것은 <투랑갈릴라 교향곡>. 그 중에서도 5악장 <별의 피의 노래>가 끌렸다.

 별의 피라니. 별빛이 적색편이라도 되었다는 말일까.

 음반을 걸자마자, 엄청난 하중의 음악이 두 귀에 육박해 들어왔다.

 

 밀란 쿤데라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서두에서 영원회귀와, 무거움과 가벼움에 대해 얘기한다.

 

"가장 무거운 짐이 우리를 짓누르고 허리를 휘게 만들어 땅바닥에 깔아 눕힌다. 그런데 유사 이래 모든 연애시에서 여자는 남자 육체의 하중을 갈망했다. 따라서 무거운 짐은 동시에 가장 격렬한 완성에 대한 이미지가 되기도 한다. 짐이 무거우면 무거울수록, 우리 삶이 지상에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우리 삶은 보다 생생하고 진실해진다."

-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pp. 12~13.

 

 쿤데라의 말을 긍정하면, 사랑하는 여자는 사랑하는 남자의 하중을 갈망한다. 이졸데는 트리스탄의 무게를 갈망했고, 파르바티는 시바의 '파괴적인' 무게를 갈망했다. 숨쉴 틈도 없이 빠르게 전개되는 짓누름과 깔림의 애무 속에서, 사랑은 자신의 환희를 창조하기 위해 다른 모든 감정을 파괴해버린다.

 메시앙이 죽기 직전 진행하던 작업 중에는 <투랑갈릴라 교향곡>의 개정 작업이 있었다. 1990년에 탈고한 완성물을 보면, 5악장 메트로놈 지시가 점8분음표 132에서 138로 고쳐진 것을 볼 수 있다. 메시앙은 가뜩이나 빠른 희열과 오르가즘의 속도를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더 끌어올렸다(82세 나이에 그런 결단을 내렸다는 점도 대단하다). 더 빠른 속도는 더 많은 하중을 청자의 귀에 부여한다. 쿤데라의 말처럼, '짐이 무거우면 무거울수록, 우리 삶이 지상에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우리 삶은 보다 생생하고 진실해진다.'

 

* * * 

 

 반복은 회귀를 떠오르게 한다. 음악에서의 반복은 태초의 시원을 궁구하는 우리의 근원적인 욕망의 무의식적인 분출이며, 반복의 대상이 되는 음표를 '프레이즈 중의 하나로 흘러갈 때'와는 완전히 다른 시각으로 관찰하게 만든다.

 

"우리 인생의 매순간이 무한히 반복되어야 한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혔듯 영원성에 못 박힌 꼴이 될 것이다. 이런 발상은 잔혹하다. 영원한 회귀의 세상에서는 몸짓 하나하나가 견딜 수 없는 책임의 짐을 떠맡는다. 바로 그 때문에 니체는 영원 회귀의 사상은 가장 무거운 짐das schwerste Gewicht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p. 12.

 

 <아기예수를 바라보는 20개의 시선> 중 11곡, <성모의 첫 성체배령Premiere Communion de la Vierge>에서 음악은 D음의 영원성과 접속한다. 악절마다 32번씩 반복되는 D음은 쇼팽의 전주곡 마지막을 장식하는 3개의 조종과는 전혀 다른 형태의 무게로, 형이상학적인 영원성의 무게로 귀에 못박힌다.

 태어난 순간부터 초월과 영원성이 예정되어 있는 존재가 짊어진 짐은 얼마나 무거운 것일까. 예수와 니체를 한 문단 안에 묶어 화해시킨 쿤데라의 통찰은 그래서 놀랍다. '영원한 회귀의 세상에서는 몸짓 하나하나가 견딜 수 없는 책임의 짐을 떠맡'으니까.

 

* * *

 

 우주를 헤엄치는 연어를 상상해보자. 지느러미는 진공에 순응하고 꼬리는 진공을 가른다. 연어는 우리가 비가역적인 흐름이라고 상상하는 강의 흐름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 상류로 나아간다. 당연히 우주를 헤엄치는 연어는, 비가역적인 흐름의 으뜸인 시간을 헤엄쳐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메시앙은 <피안의 빛> 마지막 악장 <그리스도, 천국의 빛>에서 바그너적 공간을 무한으로 확대시킨다. 바그너는 <로엔그린> 1막 전주곡에서 상상의 천상을 A장조의 틀 속에서 그려냈는데, 메시앙은 사건의 진행과 시간의 흐름이 분명한 바그너적 공간에서 '시간의 흐름을 지워버린다.' 이제 음악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며, 태초의 순간을 향하여 끊임없이 회귀하는 우주적 연어와 하나가 된다.

 

 "14세기 아프리카의 두 왕국 사이에 벌어진 전쟁 와중에 30만 흑인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처참하게 죽어 갔어도 세상 면모가 바뀌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인생의 잔혹함이나 아름다움 따위는 전혀 염두에 둘 필요가 없는 셈이다.

 이 전쟁이 영원한 회귀를 통해 셀 수 없을 만큼 반복된다면 14세기 아프리카의 두 왕국 사이에 벌어진 전쟁도 뭔가 달라질 수 있을까?

 그렇다. 그 전쟁은 우뚝 솟아올라 영속되는 한 덩어리로 변할 것이고 그 전쟁의 부조리는 치유될 수 없을 것이다."

-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pp. 9~10.

 

 CD 40장에 가까운 방대한 분량의 음악을 작곡한 메시앙의 음악을 통틀어 이 '마지막 순간'만큼 영원회귀에 가까운 곡도 없다. 음악적 연어가 우주적 연어와 합치하는 순간이다. 우리 모두는 태초의 빛이자 천국의 빛을 잠시 떠나온 방랑객이자 망명자에 지나지 않으며, 결국은 빛으로 돌아갈 존재에 불과하다. 비가역적인 시간의 흐름이 제기하는 모순을 뚫고.

 영원한 회귀 앞에서 음악은 '우뚝 솟아올라 영속되는 한 덩어리로' 변한다. 하지만 쿤데라의 문학이 제기하는 '치유될 수 없는 (전쟁의) 부조리'와 달리, 메시앙의 음악에서 부조리는 찾아볼 수 없다. 메시앙의 '영속성'이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는 것, 곧 부조리의 융합이니까.

 

* * * 

 

 메시앙의 <시간의 종말을 위한 4중주>에서 가장 강조되는 색채는 노을빛에 가까운 블루 오렌지다. 낮이 밤에 주도권을 내주기 직전 마지막 황혼을 체감하는 시간, 주황색과 파란색이라는 극단의 두 세계가 화해하는 시간의 색채다. 세상을 아름답게 미화하는 착란의 색채이기도 하다.

 

"두 번째 악장의 어떤 구절들이 여기 돌아온다. 힘으로 가득 찬 천사가 나타나고, 그리고 무엇보다 천사를 덮은 무지개가 나타난다(무지개는 평화와 지혜와 빛을 발산하고 소리를 내는 모든 바이브레이션의 상징이다). 나의 꿈 속에서 나는 정리된 노래와 멜로디를 듣고 색깔과 형태를 본다. 그 후에 일시적인 이러한 단계 후에 나는 비현실을 통과하고 황홀경의 느낌으로 초인적인 소리와 색깔의 선회하는 소용돌이에 빠진다. 이 불의 검, 파랑과 오렌지 색, 용암의 분출, 난폭한 별; 여기에 뒤죽박죽이 있다. 여기에 무지개가 있다."

 

 음악가의 악곡 해설이라기보다는 중세 묵시 예언자의 신비로움을 연상케하는 이 악장의 제목은 악곡 해설 이상으로 의미심장하다. <세상의 종말을 고하는 천사를 위한 무지개의 착란Fouillis d'arcs-en-ciel, pour l'ange qui annonce la fin>.

 이 악장이 7악장이라는 것을 기억하자. 마지막 8악장은 '영원성'에 바쳐져야 하기 때문에, 7악장은 8악장으로 들어가기 전 마지막 단계, 일곱 개의 스펙트럼이 하나의 악장으로 합쳐지는 과정이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색채는 2악장에서도 등장했었던 노을 빛의 블루 오렌지 화음이다. 노을 지는 시간대는 가장 현실적인 비현실의 시간이다. 상상이 영원을 향해 이륙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석양으로 오렌지 빛을 띤 구름은 모든 것을 향수의 매력으로 빛나게 한다. 단두대조차도."

-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p. 10.

 

 종말의 시간을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은 우리가 그것을 비현실로 인지하기 때문이다. 노을빛을 띤 단두대나, 눈을 멀게 하는 섬광을 뿜어내는 코발트 폭탄의 빛에 매료되는 것도 마찬가지 기제일 수 있다. 우리는 우리를 파괴할 정도로 치명적인 아름다움에 매료된다.

 

Posted by 여엉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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