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처럼 음악이 끌릴 때가 있다. 오늘은 그 대상이 메시앙이었다.

 가장 먼저 끌린 것은 <투랑갈릴라 교향곡>. 그 중에서도 5악장 <별의 피의 노래>가 끌렸다.

 별의 피라니. 별빛이 적색편이라도 되었다는 말일까.

 음반을 걸자마자, 엄청난 하중의 음악이 두 귀에 육박해 들어왔다.

 

 밀란 쿤데라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서두에서 영원회귀와, 무거움과 가벼움에 대해 얘기한다.

 

"가장 무거운 짐이 우리를 짓누르고 허리를 휘게 만들어 땅바닥에 깔아 눕힌다. 그런데 유사 이래 모든 연애시에서 여자는 남자 육체의 하중을 갈망했다. 따라서 무거운 짐은 동시에 가장 격렬한 완성에 대한 이미지가 되기도 한다. 짐이 무거우면 무거울수록, 우리 삶이 지상에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우리 삶은 보다 생생하고 진실해진다."

-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pp. 12~13.

 

 쿤데라의 말을 긍정하면, 사랑하는 여자는 사랑하는 남자의 하중을 갈망한다. 이졸데는 트리스탄의 무게를 갈망했고, 파르바티는 시바의 '파괴적인' 무게를 갈망했다. 숨쉴 틈도 없이 빠르게 전개되는 짓누름과 깔림의 애무 속에서, 사랑은 자신의 환희를 창조하기 위해 다른 모든 감정을 파괴해버린다.

 메시앙이 죽기 직전 진행하던 작업 중에는 <투랑갈릴라 교향곡>의 개정 작업이 있었다. 1990년에 탈고한 완성물을 보면, 5악장 메트로놈 지시가 점8분음표 132에서 138로 고쳐진 것을 볼 수 있다. 메시앙은 가뜩이나 빠른 희열과 오르가즘의 속도를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더 끌어올렸다(82세 나이에 그런 결단을 내렸다는 점도 대단하다). 더 빠른 속도는 더 많은 하중을 청자의 귀에 부여한다. 쿤데라의 말처럼, '짐이 무거우면 무거울수록, 우리 삶이 지상에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우리 삶은 보다 생생하고 진실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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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복은 회귀를 떠오르게 한다. 음악에서의 반복은 태초의 시원을 궁구하는 우리의 근원적인 욕망의 무의식적인 분출이며, 반복의 대상이 되는 음표를 '프레이즈 중의 하나로 흘러갈 때'와는 완전히 다른 시각으로 관찰하게 만든다.

 

"우리 인생의 매순간이 무한히 반복되어야 한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혔듯 영원성에 못 박힌 꼴이 될 것이다. 이런 발상은 잔혹하다. 영원한 회귀의 세상에서는 몸짓 하나하나가 견딜 수 없는 책임의 짐을 떠맡는다. 바로 그 때문에 니체는 영원 회귀의 사상은 가장 무거운 짐das schwerste Gewicht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p. 12.

 

 <아기예수를 바라보는 20개의 시선> 중 11곡, <성모의 첫 성체배령Premiere Communion de la Vierge>에서 음악은 D음의 영원성과 접속한다. 악절마다 32번씩 반복되는 D음은 쇼팽의 전주곡 마지막을 장식하는 3개의 조종과는 전혀 다른 형태의 무게로, 형이상학적인 영원성의 무게로 귀에 못박힌다.

 태어난 순간부터 초월과 영원성이 예정되어 있는 존재가 짊어진 짐은 얼마나 무거운 것일까. 예수와 니체를 한 문단 안에 묶어 화해시킨 쿤데라의 통찰은 그래서 놀랍다. '영원한 회귀의 세상에서는 몸짓 하나하나가 견딜 수 없는 책임의 짐을 떠맡'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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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주를 헤엄치는 연어를 상상해보자. 지느러미는 진공에 순응하고 꼬리는 진공을 가른다. 연어는 우리가 비가역적인 흐름이라고 상상하는 강의 흐름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 상류로 나아간다. 당연히 우주를 헤엄치는 연어는, 비가역적인 흐름의 으뜸인 시간을 헤엄쳐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메시앙은 <피안의 빛> 마지막 악장 <그리스도, 천국의 빛>에서 바그너적 공간을 무한으로 확대시킨다. 바그너는 <로엔그린> 1막 전주곡에서 상상의 천상을 A장조의 틀 속에서 그려냈는데, 메시앙은 사건의 진행과 시간의 흐름이 분명한 바그너적 공간에서 '시간의 흐름을 지워버린다.' 이제 음악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며, 태초의 순간을 향하여 끊임없이 회귀하는 우주적 연어와 하나가 된다.

 

 "14세기 아프리카의 두 왕국 사이에 벌어진 전쟁 와중에 30만 흑인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처참하게 죽어 갔어도 세상 면모가 바뀌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인생의 잔혹함이나 아름다움 따위는 전혀 염두에 둘 필요가 없는 셈이다.

 이 전쟁이 영원한 회귀를 통해 셀 수 없을 만큼 반복된다면 14세기 아프리카의 두 왕국 사이에 벌어진 전쟁도 뭔가 달라질 수 있을까?

 그렇다. 그 전쟁은 우뚝 솟아올라 영속되는 한 덩어리로 변할 것이고 그 전쟁의 부조리는 치유될 수 없을 것이다."

-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pp. 9~10.

 

 CD 40장에 가까운 방대한 분량의 음악을 작곡한 메시앙의 음악을 통틀어 이 '마지막 순간'만큼 영원회귀에 가까운 곡도 없다. 음악적 연어가 우주적 연어와 합치하는 순간이다. 우리 모두는 태초의 빛이자 천국의 빛을 잠시 떠나온 방랑객이자 망명자에 지나지 않으며, 결국은 빛으로 돌아갈 존재에 불과하다. 비가역적인 시간의 흐름이 제기하는 모순을 뚫고.

 영원한 회귀 앞에서 음악은 '우뚝 솟아올라 영속되는 한 덩어리로' 변한다. 하지만 쿤데라의 문학이 제기하는 '치유될 수 없는 (전쟁의) 부조리'와 달리, 메시앙의 음악에서 부조리는 찾아볼 수 없다. 메시앙의 '영속성'이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는 것, 곧 부조리의 융합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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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시앙의 <시간의 종말을 위한 4중주>에서 가장 강조되는 색채는 노을빛에 가까운 블루 오렌지다. 낮이 밤에 주도권을 내주기 직전 마지막 황혼을 체감하는 시간, 주황색과 파란색이라는 극단의 두 세계가 화해하는 시간의 색채다. 세상을 아름답게 미화하는 착란의 색채이기도 하다.

 

"두 번째 악장의 어떤 구절들이 여기 돌아온다. 힘으로 가득 찬 천사가 나타나고, 그리고 무엇보다 천사를 덮은 무지개가 나타난다(무지개는 평화와 지혜와 빛을 발산하고 소리를 내는 모든 바이브레이션의 상징이다). 나의 꿈 속에서 나는 정리된 노래와 멜로디를 듣고 색깔과 형태를 본다. 그 후에 일시적인 이러한 단계 후에 나는 비현실을 통과하고 황홀경의 느낌으로 초인적인 소리와 색깔의 선회하는 소용돌이에 빠진다. 이 불의 검, 파랑과 오렌지 색, 용암의 분출, 난폭한 별; 여기에 뒤죽박죽이 있다. 여기에 무지개가 있다."

 

 음악가의 악곡 해설이라기보다는 중세 묵시 예언자의 신비로움을 연상케하는 이 악장의 제목은 악곡 해설 이상으로 의미심장하다. <세상의 종말을 고하는 천사를 위한 무지개의 착란Fouillis d'arcs-en-ciel, pour l'ange qui annonce la fin>.

 이 악장이 7악장이라는 것을 기억하자. 마지막 8악장은 '영원성'에 바쳐져야 하기 때문에, 7악장은 8악장으로 들어가기 전 마지막 단계, 일곱 개의 스펙트럼이 하나의 악장으로 합쳐지는 과정이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색채는 2악장에서도 등장했었던 노을 빛의 블루 오렌지 화음이다. 노을 지는 시간대는 가장 현실적인 비현실의 시간이다. 상상이 영원을 향해 이륙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석양으로 오렌지 빛을 띤 구름은 모든 것을 향수의 매력으로 빛나게 한다. 단두대조차도."

-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p. 10.

 

 종말의 시간을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은 우리가 그것을 비현실로 인지하기 때문이다. 노을빛을 띤 단두대나, 눈을 멀게 하는 섬광을 뿜어내는 코발트 폭탄의 빛에 매료되는 것도 마찬가지 기제일 수 있다. 우리는 우리를 파괴할 정도로 치명적인 아름다움에 매료된다.

 

Posted by 여엉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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