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그너 갈라 콘서트

 (<발퀴레> 1막과 <파르지팔> 3막)

 크리스토퍼 벤트리스(지크문트, 파르지팔), 에밀리 매기(지클린데), 연광철(훈딩, 구르네만츠), 양준모(암포르타스)

 로타 차그로섹(지휘) /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 / 국립합창단, CBS소년소녀합창단

 

 지인을 통해 우연히 알게 된 덕에 신속히 예매를 완료하고 보러 간 공연. 전곡이 아닌 갈라 콘서트라는 것이 조금 아쉽기는 하지만, 전곡 공연이라는 '이상'보다는 비용도 아끼고 간편하게 올릴 수 있으며 관객들도 부담없이 접할 수 있는 갈라 콘서트라는 '현실'을 택한 것도 나쁘지 않아 보인다. 무엇보다 차그로섹과 연광철을 한 무대에서 볼 수 있다는 엄청난 메리트가 나를 예당으로 이끌었다.

 일단 시작하기 전에는 지휘자와 연광철의 역량만 믿고 보는 공연이라는 생각을 했었고 그 생각은 공연이 끝날 때까지 딱히 크게 변하지는 않았다. 벤트리스는 소리 때깔은 나쁘지 않지만 지크문트를 하기에는 성량과 내지르는 파워가 조금 부족하지 않았나 싶다. 특히 울분과 고통에 차 내지르는 '뵐제! 뵐제!'는 소리가 너무 약해 좀 안타까웠다. 오케스트라를 뚫고 나와야 하는 마지막 'Braut und Schwester bist du dem Bruder-so blühe denn, Wälsungen-Blut!'도 오케스트라에 파묻히기는 마찬가지여서 더더욱 안타까웠다(주먹 꽉 쥐고 부르는데 정말 안타깝긴 하더라).

 매기가 21세기의 '핫한' 바그너 소프라노 중 한 명이라는 사실은 알지만, 역시 아쉬운 건 마찬가지였다. 전반의 또렷한 딕션이 후반으로 갈수록 '약간씩 코먹는 듯한' 모습을 보여준 점이 조금 아쉬웠다. 역동적인 모션을 보여준 점은 좋게 생각하지만 그것을 뒷받침하는 '노래'가 되지 않는다면, 그것도 바그너의 <발퀴레>에서 강렬하지 못한 모습을 보여준다면 존재감이 옅어질 수밖에 없다.

 역시 무대의 주역은 훈딩을 노래하는 연광철. 정말 '크라스가 다르다'는 것이 무엇인지 잘 보여주었다. 웬만한 소리가 다 묻혀버리는 3층까지 또렷하고 강렬하게 전달되는 기백있는 음성은 왜 그가 바이로이트를 비롯한 유수의 오페라 극장의 총애를 받는 가수인지 잘 보여주었다. 세세한 감정 변화나 디테일에는 신경쓰지 않고 묵직하게 훈딩이라는 캐릭터를 표현했는데, 애초에 훈딩이라는 캐릭터가 '세세한 감정 변화, 디테일'과는 백만 광년 떨어졌으니 아주 적확한 접근 방식이다. 가장 기억에 남는 대목은 '오늘 밤까지는 당신을 손님으로 대하겠지만 내일 해가 뜨면 당신을 직접 죽일 것'이라 경고하는 'Mein Haus hütet, Wölfing, dich heut'' 이하 부분.

 차그로섹은 오페라 극장에서 닳고 닳은 지휘자답게 능수능란한 완급조절을 보여주었다.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가 '손이 많이 가는' 오케스트라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사람답게 수시로 바쁘게 지시를 내려가며 합주력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배려했다. 다만 지크문트가 노퉁 뽑는 대목에서는 소리가 좀 김이 빠졌는데, 이 부분은 위에서 말한 '완급조절'과 관련되는 부분이므로 2부 <파르지팔>에서 설명하도록 하겠다.

 

 <발퀴레>를 그럭저럭 잘 끝내고 이어진 <파르지팔>.

 그런데 (사실 온라인 공연소개 보고 눈치챘지만) <파르지팔> 3막에 쿤드리가 없다.

 다시 한 번 말하는데 진짜 없었다.

 아니, 아무리 3막에서 쿤드리 대사가 'Dienen, Dienen!'밖에 없다지만 쿤드리를 없애버리면 어떻게 하냐고!

 쿤드리가 말은 안 하지만 파르지팔의 몸을 씻기는 등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는 사실은 <파르지팔>을 완청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데,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극을 완성시키는 존재가 없어져버리니 구르네만츠는 초반 20분 동안 혼잣말만 하는 독백형 캐릭터로 전락해버리고 파르지팔은 분명 머리는 구르네만츠가 씻겨주는데 발은 유령이 씻어주는 미스테리 심리극이 되어버렸다.

 '그냥 지클린데 한 매기를 2부에 갖다 쓰면 안 되는 거였나'라는 생각도 했었는데, 매기가 개런티를 높게 불러서 그냥 빼버렸나 보다. 매기한테 미안한 얘기지만 그렇게 생각을 안 하면 도저히 납득이 안 가. 

 이 대목에서 연광철에게 감탄할 수밖에 없는데, 실종되어버린 쿤드리의 존재감을 벌충이라도 하듯 자기가 1.5인분, 제대로 터뜨릴 때는 2인분의 존재감을 해주며 3막 초반을 자신의 무대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성 금요일의 음악이 울려 퍼지는 대목에서 '풀잎과 꽃잎에까지 미치는 평화의 자비'를 설파하는 연광철의 목소리를 듣고 있으면 '저 목소리로 설교했으면 나라도 지갑 열겠다'라는 이단심판받기 딱 좋을 생각이 무럭무럭 자라났다.

 연광철의 원맨쇼를 돕기 위해 뒤늦게 어기적어기적 나타난 벤트리스는 나름 훌륭하게 파르지팔을 노래했다. 오케스트라를 뚫는 성량은 없지만 소리 자체는 괜찮은 벤트리스에게는 '위안받을 출구 없는 비극적 영웅' 지크문트보다는 '천로역정 끝에 자비심을 깨우친 순수한 바보' 파르지팔이 더 어울려 보인다.

 암포르타스 역할을 맡은 양준모는 훌륭한 암포르타스였다... 연광철만 없었다면. 분명 흠잡을 데 없이 잘 해 줬는데, 앞부분에서 연광철의 존재감이 너무 강력해 어쩔 수가 없었다.

 차그로섹의 진가는 <파르지팔> 마지막 20분에서 드러냈는데, '이런 오케스트라는 초장부터 힘 빼면 앙상블 무너진다'라고 설파하듯 성 금요일의 음악 대목부터 힘을 주어 곡을 고양시키다 티투렐의 장송 음악부터 엔딩까지 모았던 기를 제대로 터뜨렸다. 바그너라는 레퍼토리가 엄청난 체력을 소모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가 1부/2부 합쳐 140분이라는 시간 동안 빵빵 터뜨려 주기에는 체력이 안 된다는 사실도 냉정하게 판단한 후 내린 결과일 것이다. 역시 오페라 극장에서 오래 구른 짬밥은 어디 안 간다.

 

 총평 : 뭐 이렇게 쓰기는 했지만, 국내에서 이 정도 이상의 바그너 공연을 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기에 나름 만족했다. 무엇보다 연광철과 차그로섹을 한 무대에서 볼 수 있었다는 점에 고점을 주고 싶다.

 

 (추가 : 성 금요일 음악 끝나고 장면전환 시 종치는 음향이 뭔가 허전하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까 음이 하나 없었다. 제보를 받은 바에 따르면 토요일 공연 때도 없었다고.)

 

Posted by 여엉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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