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에르-로랑 에마르 피아노 리사이틀 (2024.10.1)

 

베토벤/쇼팽/드뷔시/리게티

 

 

내가 영접하는 에마르의 연주는 이 번이 세 번째다(순수 리사이틀은 2번째 리사이틀).

최고의 피아니스트이며, 대안조차 없는 연주가의 리사이틀을 보러 가는 것은 의무인 동시에 즐거움이다.

이제 이런 연주를 더는 들을 수 없다는 절박감보다는, 한층 더 노숙해진 거장의 연주를 들을 수 있다는 기쁨이 앞서……는 것보다는 그냥 더 늙으시면 이제 리게티 에튀드 못 치실 것 같아서 갔다(진짜다. 에마르옹 벌써 67세시다. 다들 더 늦기 전에 보러 가라).

레퍼토리는 전에도 그랬듯 고전 레퍼토리와 현대 레퍼토리를 절묘하게 섞어놓았다.

1부에는 베토벤의 바가텔과 리게티의 <무지카 리체르카타>를 섞어놓았는데, 차례대로 등장하는 리게티의 곡과는 달리 베토벤의 곡은 연주자의 의도에 따라 재배치되었다.

노쇠에 대한 걱정은 기우였다.

에마르의 피아노 연주는 완벽한 균형미와 우아한 철골을 연상시키는 음색, 그리고 경이롭다 못해 공포스러운 기교의 삼위일체가 여전했다.

그리고 그보다 놀라운 것은, 듣는 관객이 피아니스트의 의도에 따라가고 설복할 수밖에 없는 레퍼토리 배치와 해석이었다.

에마르는 베토벤에서는 베토벤이 얼마나 불협화적이고 현대적인 작곡가인지, 그가 바가텔에 배치해 놓은 불협화적 긴장이 얼마나 현대적인지를 보여주었으며, 반대로 리게티의 <무지카 리체르카타>에서는 (아직 헝가리 시절이지만) 리게티가 얼마나 고전에 경도되어 있는지, 그게 얼마나 많은 고전에 경의를 바치고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어떤 순간에는 잘 빠진 철골, 어떤 순간에는 투명한 유리를 연상시키는 그의 음색을 들으면서 떠오른 것은 (우스운 비유지만) 20세기 후반부 건축의 결정체라고 불리는 퐁피두 센터였다.

음향에 대해 얘기를 해보면, 에마르의 음향은 어떤 상황에서도 고르게 원을 그리면서 퍼져나가는 고유의 음향을 고수한다. 이 음향은 아무리 작아져도, 심지어 피아니시모나 피아니시시모, 그 이하의 음량이어도 연주회장 끝까지 고르게 퍼져나가 관객에게 구조를 입력한다.

(이 컨트롤을 제대로 못 하는 피아니스트는 의외로 적지 않다.)

1부에서 소품의 세계를 펼쳤던 에마르는, 2부에서는 피아노의 극한의 기교로 뛰어든다.

이렇게 현대음악처럼 연주하는 쇼팽이 또 있을까. 이렇게 깨끗하게 들리는 (폴리니 식의 표백제 뿌린 듯한 음향에 과포화된 페달링만 들리는 연주가 아니라) 드뷔시가 또 있을까.

물론 에마르의 핵심은 1부에서도 그랬듯 2부에서도 리게티였다. 첫 곡 <갈람 보롱>부터 마지막 곡 <악마의 계단>까지, 에마르는 연주 불가능소리까지 듣는 리게티의 에튀드를 씹어먹다 못해 가지고 놀았다. 역시 가장 큰 임팩트를 준 두 곡은, 스산하고 비통한 음악으로 시작해서 복잡한 구조가 얽히다가 거대한 몰아침으로 끝나는 <바르샤바의 가을>, 리게티의 피아노 에튀드를 통틀어 가장 어려운 곡으로 꼽히는 <악마의 계단>.

<악마의 계단>은 극악의 연주 못지않게 연주회장을 폭력적으로 채우는 마지막 음향의 음압이 중요한데, 에마르는 우리가 기대했던 대로 다른 피아니스트는 못 일으킬 핵폭풍으로 우리를 경이롭게 해주었다. 음의 연주가 끝나고, 핵폭풍이 서서히 가라앉는 마지막 10초 동안은 아무도 박수를 치지 않을 정도였다.

1부에서도 그랬듯 2부의 배치도 절묘했다. 특히 마지막 두 곡, 드뷔시의 <반음계를 위하여>와 리게티의 <악마의 계단>은 드뷔시와 리게티의 피아노곡을 통틀어 가장 어려운 곡을 배치해서, 이 프로그램에 어울리는 대단원이 무엇인지를 알려주었다.

한 가지 흠이 있다면, 드뷔시의 <반음계를 위하여>를 칠 때 꽤 오래 꺼지지 않았던 핸드폰 벨소리. ‘관객 수준운운하고 싶지는 않지만, 이것만큼은 몰입을 깰 만큼 길어서 언급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참고로 앵콜로는 리게티의 <3개의 바가텔>을 쳤는데, 이 소품은 리게티가 플럭서스 그룹에서 활동하던 1961년에 작곡한 작품으로서, 첫 곡에서는 음을 하나만 치고, 나머지 두 곡은 텅 비어 있다.

그러니까, 첫 곡에서 음을 딱 하나만 치고, 나머지 두 곡은 치려는 척 아무것도 안 한다고.

그 의도를 이해하는 순간, 웃을 수밖에 없었다.

리사이틀을 완성하는 순간이었으니까.

이렇게 연주자의 의도대로, 완벽하게 진행되고 완성된 리사이틀이 또 있었을까?

 

요약 : 감동보다는 경이로움. 그러나 경이로움만으로도 충분히 감동적일 수 있음을 증명한 리사이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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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그너 갈라 콘서트

 (<발퀴레> 1막과 <파르지팔> 3막)

 크리스토퍼 벤트리스(지크문트, 파르지팔), 에밀리 매기(지클린데), 연광철(훈딩, 구르네만츠), 양준모(암포르타스)

 로타 차그로섹(지휘) /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 / 국립합창단, CBS소년소녀합창단

 

 지인을 통해 우연히 알게 된 덕에 신속히 예매를 완료하고 보러 간 공연. 전곡이 아닌 갈라 콘서트라는 것이 조금 아쉽기는 하지만, 전곡 공연이라는 '이상'보다는 비용도 아끼고 간편하게 올릴 수 있으며 관객들도 부담없이 접할 수 있는 갈라 콘서트라는 '현실'을 택한 것도 나쁘지 않아 보인다. 무엇보다 차그로섹과 연광철을 한 무대에서 볼 수 있다는 엄청난 메리트가 나를 예당으로 이끌었다.

 일단 시작하기 전에는 지휘자와 연광철의 역량만 믿고 보는 공연이라는 생각을 했었고 그 생각은 공연이 끝날 때까지 딱히 크게 변하지는 않았다. 벤트리스는 소리 때깔은 나쁘지 않지만 지크문트를 하기에는 성량과 내지르는 파워가 조금 부족하지 않았나 싶다. 특히 울분과 고통에 차 내지르는 '뵐제! 뵐제!'는 소리가 너무 약해 좀 안타까웠다. 오케스트라를 뚫고 나와야 하는 마지막 'Braut und Schwester bist du dem Bruder-so blühe denn, Wälsungen-Blut!'도 오케스트라에 파묻히기는 마찬가지여서 더더욱 안타까웠다(주먹 꽉 쥐고 부르는데 정말 안타깝긴 하더라).

 매기가 21세기의 '핫한' 바그너 소프라노 중 한 명이라는 사실은 알지만, 역시 아쉬운 건 마찬가지였다. 전반의 또렷한 딕션이 후반으로 갈수록 '약간씩 코먹는 듯한' 모습을 보여준 점이 조금 아쉬웠다. 역동적인 모션을 보여준 점은 좋게 생각하지만 그것을 뒷받침하는 '노래'가 되지 않는다면, 그것도 바그너의 <발퀴레>에서 강렬하지 못한 모습을 보여준다면 존재감이 옅어질 수밖에 없다.

 역시 무대의 주역은 훈딩을 노래하는 연광철. 정말 '크라스가 다르다'는 것이 무엇인지 잘 보여주었다. 웬만한 소리가 다 묻혀버리는 3층까지 또렷하고 강렬하게 전달되는 기백있는 음성은 왜 그가 바이로이트를 비롯한 유수의 오페라 극장의 총애를 받는 가수인지 잘 보여주었다. 세세한 감정 변화나 디테일에는 신경쓰지 않고 묵직하게 훈딩이라는 캐릭터를 표현했는데, 애초에 훈딩이라는 캐릭터가 '세세한 감정 변화, 디테일'과는 백만 광년 떨어졌으니 아주 적확한 접근 방식이다. 가장 기억에 남는 대목은 '오늘 밤까지는 당신을 손님으로 대하겠지만 내일 해가 뜨면 당신을 직접 죽일 것'이라 경고하는 'Mein Haus hütet, Wölfing, dich heut'' 이하 부분.

 차그로섹은 오페라 극장에서 닳고 닳은 지휘자답게 능수능란한 완급조절을 보여주었다.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가 '손이 많이 가는' 오케스트라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사람답게 수시로 바쁘게 지시를 내려가며 합주력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배려했다. 다만 지크문트가 노퉁 뽑는 대목에서는 소리가 좀 김이 빠졌는데, 이 부분은 위에서 말한 '완급조절'과 관련되는 부분이므로 2부 <파르지팔>에서 설명하도록 하겠다.

 

 <발퀴레>를 그럭저럭 잘 끝내고 이어진 <파르지팔>.

 그런데 (사실 온라인 공연소개 보고 눈치챘지만) <파르지팔> 3막에 쿤드리가 없다.

 다시 한 번 말하는데 진짜 없었다.

 아니, 아무리 3막에서 쿤드리 대사가 'Dienen, Dienen!'밖에 없다지만 쿤드리를 없애버리면 어떻게 하냐고!

 쿤드리가 말은 안 하지만 파르지팔의 몸을 씻기는 등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는 사실은 <파르지팔>을 완청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데,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극을 완성시키는 존재가 없어져버리니 구르네만츠는 초반 20분 동안 혼잣말만 하는 독백형 캐릭터로 전락해버리고 파르지팔은 분명 머리는 구르네만츠가 씻겨주는데 발은 유령이 씻어주는 미스테리 심리극이 되어버렸다.

 '그냥 지클린데 한 매기를 2부에 갖다 쓰면 안 되는 거였나'라는 생각도 했었는데, 매기가 개런티를 높게 불러서 그냥 빼버렸나 보다. 매기한테 미안한 얘기지만 그렇게 생각을 안 하면 도저히 납득이 안 가. 

 이 대목에서 연광철에게 감탄할 수밖에 없는데, 실종되어버린 쿤드리의 존재감을 벌충이라도 하듯 자기가 1.5인분, 제대로 터뜨릴 때는 2인분의 존재감을 해주며 3막 초반을 자신의 무대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성 금요일의 음악이 울려 퍼지는 대목에서 '풀잎과 꽃잎에까지 미치는 평화의 자비'를 설파하는 연광철의 목소리를 듣고 있으면 '저 목소리로 설교했으면 나라도 지갑 열겠다'라는 이단심판받기 딱 좋을 생각이 무럭무럭 자라났다.

 연광철의 원맨쇼를 돕기 위해 뒤늦게 어기적어기적 나타난 벤트리스는 나름 훌륭하게 파르지팔을 노래했다. 오케스트라를 뚫는 성량은 없지만 소리 자체는 괜찮은 벤트리스에게는 '위안받을 출구 없는 비극적 영웅' 지크문트보다는 '천로역정 끝에 자비심을 깨우친 순수한 바보' 파르지팔이 더 어울려 보인다.

 암포르타스 역할을 맡은 양준모는 훌륭한 암포르타스였다... 연광철만 없었다면. 분명 흠잡을 데 없이 잘 해 줬는데, 앞부분에서 연광철의 존재감이 너무 강력해 어쩔 수가 없었다.

 차그로섹의 진가는 <파르지팔> 마지막 20분에서 드러냈는데, '이런 오케스트라는 초장부터 힘 빼면 앙상블 무너진다'라고 설파하듯 성 금요일의 음악 대목부터 힘을 주어 곡을 고양시키다 티투렐의 장송 음악부터 엔딩까지 모았던 기를 제대로 터뜨렸다. 바그너라는 레퍼토리가 엄청난 체력을 소모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가 1부/2부 합쳐 140분이라는 시간 동안 빵빵 터뜨려 주기에는 체력이 안 된다는 사실도 냉정하게 판단한 후 내린 결과일 것이다. 역시 오페라 극장에서 오래 구른 짬밥은 어디 안 간다.

 

 총평 : 뭐 이렇게 쓰기는 했지만, 국내에서 이 정도 이상의 바그너 공연을 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기에 나름 만족했다. 무엇보다 연광철과 차그로섹을 한 무대에서 볼 수 있었다는 점에 고점을 주고 싶다.

 

 (추가 : 성 금요일 음악 끝나고 장면전환 시 종치는 음향이 뭔가 허전하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까 음이 하나 없었다. 제보를 받은 바에 따르면 토요일 공연 때도 없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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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처럼 음악이 끌릴 때가 있다. 오늘은 그 대상이 메시앙이었다.

 가장 먼저 끌린 것은 <투랑갈릴라 교향곡>. 그 중에서도 5악장 <별의 피의 노래>가 끌렸다.

 별의 피라니. 별빛이 적색편이라도 되었다는 말일까.

 음반을 걸자마자, 엄청난 하중의 음악이 두 귀에 육박해 들어왔다.

 

 밀란 쿤데라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서두에서 영원회귀와, 무거움과 가벼움에 대해 얘기한다.

 

"가장 무거운 짐이 우리를 짓누르고 허리를 휘게 만들어 땅바닥에 깔아 눕힌다. 그런데 유사 이래 모든 연애시에서 여자는 남자 육체의 하중을 갈망했다. 따라서 무거운 짐은 동시에 가장 격렬한 완성에 대한 이미지가 되기도 한다. 짐이 무거우면 무거울수록, 우리 삶이 지상에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우리 삶은 보다 생생하고 진실해진다."

-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pp. 12~13.

 

 쿤데라의 말을 긍정하면, 사랑하는 여자는 사랑하는 남자의 하중을 갈망한다. 이졸데는 트리스탄의 무게를 갈망했고, 파르바티는 시바의 '파괴적인' 무게를 갈망했다. 숨쉴 틈도 없이 빠르게 전개되는 짓누름과 깔림의 애무 속에서, 사랑은 자신의 환희를 창조하기 위해 다른 모든 감정을 파괴해버린다.

 메시앙이 죽기 직전 진행하던 작업 중에는 <투랑갈릴라 교향곡>의 개정 작업이 있었다. 1990년에 탈고한 완성물을 보면, 5악장 메트로놈 지시가 점8분음표 132에서 138로 고쳐진 것을 볼 수 있다. 메시앙은 가뜩이나 빠른 희열과 오르가즘의 속도를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더 끌어올렸다(82세 나이에 그런 결단을 내렸다는 점도 대단하다). 더 빠른 속도는 더 많은 하중을 청자의 귀에 부여한다. 쿤데라의 말처럼, '짐이 무거우면 무거울수록, 우리 삶이 지상에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우리 삶은 보다 생생하고 진실해진다.'

 

* * * 

 

 반복은 회귀를 떠오르게 한다. 음악에서의 반복은 태초의 시원을 궁구하는 우리의 근원적인 욕망의 무의식적인 분출이며, 반복의 대상이 되는 음표를 '프레이즈 중의 하나로 흘러갈 때'와는 완전히 다른 시각으로 관찰하게 만든다.

 

"우리 인생의 매순간이 무한히 반복되어야 한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혔듯 영원성에 못 박힌 꼴이 될 것이다. 이런 발상은 잔혹하다. 영원한 회귀의 세상에서는 몸짓 하나하나가 견딜 수 없는 책임의 짐을 떠맡는다. 바로 그 때문에 니체는 영원 회귀의 사상은 가장 무거운 짐das schwerste Gewicht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p. 12.

 

 <아기예수를 바라보는 20개의 시선> 중 11곡, <성모의 첫 성체배령Premiere Communion de la Vierge>에서 음악은 D음의 영원성과 접속한다. 악절마다 32번씩 반복되는 D음은 쇼팽의 전주곡 마지막을 장식하는 3개의 조종과는 전혀 다른 형태의 무게로, 형이상학적인 영원성의 무게로 귀에 못박힌다.

 태어난 순간부터 초월과 영원성이 예정되어 있는 존재가 짊어진 짐은 얼마나 무거운 것일까. 예수와 니체를 한 문단 안에 묶어 화해시킨 쿤데라의 통찰은 그래서 놀랍다. '영원한 회귀의 세상에서는 몸짓 하나하나가 견딜 수 없는 책임의 짐을 떠맡'으니까.

 

* * *

 

 우주를 헤엄치는 연어를 상상해보자. 지느러미는 진공에 순응하고 꼬리는 진공을 가른다. 연어는 우리가 비가역적인 흐름이라고 상상하는 강의 흐름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 상류로 나아간다. 당연히 우주를 헤엄치는 연어는, 비가역적인 흐름의 으뜸인 시간을 헤엄쳐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메시앙은 <피안의 빛> 마지막 악장 <그리스도, 천국의 빛>에서 바그너적 공간을 무한으로 확대시킨다. 바그너는 <로엔그린> 1막 전주곡에서 상상의 천상을 A장조의 틀 속에서 그려냈는데, 메시앙은 사건의 진행과 시간의 흐름이 분명한 바그너적 공간에서 '시간의 흐름을 지워버린다.' 이제 음악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며, 태초의 순간을 향하여 끊임없이 회귀하는 우주적 연어와 하나가 된다.

 

 "14세기 아프리카의 두 왕국 사이에 벌어진 전쟁 와중에 30만 흑인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처참하게 죽어 갔어도 세상 면모가 바뀌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인생의 잔혹함이나 아름다움 따위는 전혀 염두에 둘 필요가 없는 셈이다.

 이 전쟁이 영원한 회귀를 통해 셀 수 없을 만큼 반복된다면 14세기 아프리카의 두 왕국 사이에 벌어진 전쟁도 뭔가 달라질 수 있을까?

 그렇다. 그 전쟁은 우뚝 솟아올라 영속되는 한 덩어리로 변할 것이고 그 전쟁의 부조리는 치유될 수 없을 것이다."

-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pp. 9~10.

 

 CD 40장에 가까운 방대한 분량의 음악을 작곡한 메시앙의 음악을 통틀어 이 '마지막 순간'만큼 영원회귀에 가까운 곡도 없다. 음악적 연어가 우주적 연어와 합치하는 순간이다. 우리 모두는 태초의 빛이자 천국의 빛을 잠시 떠나온 방랑객이자 망명자에 지나지 않으며, 결국은 빛으로 돌아갈 존재에 불과하다. 비가역적인 시간의 흐름이 제기하는 모순을 뚫고.

 영원한 회귀 앞에서 음악은 '우뚝 솟아올라 영속되는 한 덩어리로' 변한다. 하지만 쿤데라의 문학이 제기하는 '치유될 수 없는 (전쟁의) 부조리'와 달리, 메시앙의 음악에서 부조리는 찾아볼 수 없다. 메시앙의 '영속성'이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는 것, 곧 부조리의 융합이니까.

 

* * * 

 

 메시앙의 <시간의 종말을 위한 4중주>에서 가장 강조되는 색채는 노을빛에 가까운 블루 오렌지다. 낮이 밤에 주도권을 내주기 직전 마지막 황혼을 체감하는 시간, 주황색과 파란색이라는 극단의 두 세계가 화해하는 시간의 색채다. 세상을 아름답게 미화하는 착란의 색채이기도 하다.

 

"두 번째 악장의 어떤 구절들이 여기 돌아온다. 힘으로 가득 찬 천사가 나타나고, 그리고 무엇보다 천사를 덮은 무지개가 나타난다(무지개는 평화와 지혜와 빛을 발산하고 소리를 내는 모든 바이브레이션의 상징이다). 나의 꿈 속에서 나는 정리된 노래와 멜로디를 듣고 색깔과 형태를 본다. 그 후에 일시적인 이러한 단계 후에 나는 비현실을 통과하고 황홀경의 느낌으로 초인적인 소리와 색깔의 선회하는 소용돌이에 빠진다. 이 불의 검, 파랑과 오렌지 색, 용암의 분출, 난폭한 별; 여기에 뒤죽박죽이 있다. 여기에 무지개가 있다."

 

 음악가의 악곡 해설이라기보다는 중세 묵시 예언자의 신비로움을 연상케하는 이 악장의 제목은 악곡 해설 이상으로 의미심장하다. <세상의 종말을 고하는 천사를 위한 무지개의 착란Fouillis d'arcs-en-ciel, pour l'ange qui annonce la fin>.

 이 악장이 7악장이라는 것을 기억하자. 마지막 8악장은 '영원성'에 바쳐져야 하기 때문에, 7악장은 8악장으로 들어가기 전 마지막 단계, 일곱 개의 스펙트럼이 하나의 악장으로 합쳐지는 과정이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색채는 2악장에서도 등장했었던 노을 빛의 블루 오렌지 화음이다. 노을 지는 시간대는 가장 현실적인 비현실의 시간이다. 상상이 영원을 향해 이륙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석양으로 오렌지 빛을 띤 구름은 모든 것을 향수의 매력으로 빛나게 한다. 단두대조차도."

-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p. 10.

 

 종말의 시간을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은 우리가 그것을 비현실로 인지하기 때문이다. 노을빛을 띤 단두대나, 눈을 멀게 하는 섬광을 뿜어내는 코발트 폭탄의 빛에 매료되는 것도 마찬가지 기제일 수 있다. 우리는 우리를 파괴할 정도로 치명적인 아름다움에 매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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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벌써 보름도 더 지난 이야기지만) 2019년 4월 16일, 피아니스트 외르크 데무스가 세상을 떠났다. 향년 90세.

 이미 장례식도 예전에 끝나고, 추모하던 사람들도 전부 다 일상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항상 굼뜨고 늦는 일개 클래식 음악 덕후가 뒤늦게 그를 추모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한정되어 있다. 고작 그의 음반을 들으면서 글을 몇 자 끼적이는 정도가 그런 일에 해당된다.

 

 데무스에 대해 사람들이 알고 있는 지식은 대개 단편적이다. 명 피아니스트 에트빈 피셔의 제자, 빈의 3총사라 불렸던 데무스/바두라-스코다/굴다의 한 축을 이루는 인물, 정묘한 음색과 엄격한 해석을 고수하는 몇 안 남은 독일 피아니즘의 거장. 이 정도를 기억하면 그래도 데무스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내가 데무스를 추모하기 위해 소개하는 음반은 그가 60년대에 녹음한 드뷔시 전집이다.

 사람들은 데무스의 드뷔시 하면 스튜디오 레코딩이나 실황에서 끼워 녹음한 단편적인 소품 연주만을 기억할 것이다. 그러나 데무스는 이미 60년대 후반에 CD 다섯 장 분량의 드뷔시 전집을 완성한 바 있고, 이 전집의 완성도가 (내가 그토록 높게 평가해온) 30년대의 기제킹 연주나 에리쿠르와 맞먹을 정도로 높기 때문에 이 기회를 빌어 소개하려 한다.

 부디 이 글이, 국내에서 유독 한정된 평가만을 받는 그의 위상 재고에 조금이나마 역할을 하기를 빈다.

 

 수록 순서를 따라 전집을 완청하다 보면, 첫 레퍼토리인 <잊혀진 영상>부터 신선한 충격을 받게 된다.

 사실 드뷔시는 <영상>이라 이름 붙여진 작품집을 3개 만들었다. 1905년에 출판한, '물에 비친 그림자', '라모를 찬양하며', '움직임'이라는 부제가 붙은 3곡이 1집, 1907년에 출판한, '잎새를 스치는 종소리', '황폐한 절에 걸린 달', '황금 물고기'가 2집이다. 그런데 사실, 1894년에 만들고 출판하지 않은 드뷔시의 <영상>이 하나 더 있다.

 'Images Inedites'라 불리는 이 작품집은 번역하면 '출판되지 않은 영상'이며, '잊힌 영상'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각각 'Lent(느리게)', 'Souvenir du Louvre(루브르의 추억)', 'Quelques aspects de "Nous n'irons plus au bois" parce qu'il fait un temps insupportable(날씨가 나빠서 "숲에는 안 갈 거야"에 의한 몇 가지 아이디어)라는 제목을 단 이 곡들은, 드뷔시의 엄격한 자기 평가기준에 따라 출판되지 않고, 대신 2곡은 미세한 수정을 거쳐 <피아노를 위하여>의 2곡 '사라방드'로, 3곡은 전면적인 개정을 거쳐 <판화>의 3곡 '비 오는 정원'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내가 신선한 충격을 받은 부분은 희귀 레퍼토리여서가 아니라, 연주 때문이다. 보석을 가공하듯 섬세하게 직조하는 투명한 음색, 페달 포인트의 단단한 소리는 내가 알고 상상하던 데무스의 음색 그 이상의 것이었다. 특히 1곡에서 데무스의 오른손 고음부는 '혹시 다른 피아노로 연주하나?' 싶을 정도로 색다른 음색을 들려준다.

 <영상>은 동곡의 표준 레퍼토리인 미켈란젤리(DG)에 비하면 조금 더 조심스럽게, 조금 더 부드럽게 연주한다. 그런 점에서 이 연주는 이전의 기제킹이나 에리쿠르, 비슷한 시기의 미켈란젤리보다는 이후의 이스토민(Adda. 구하기 힘든 연주라 나도 유투브로만 들었다)과 비슷하다. '물에 비친 그림자'의 빛나는 E플랫장조 아르페지오, '라모를 찬양하며'의 좀처럼 들뜨지 않는 분위기 조성(적절하게 루바토를 넣어준다), '움직임'의 주요 동기를 유독 딱딱하게 연주하는 특이한 해석, '잎새를 스치는 종소리'의 곡 전체를 한 덩어리로 묶어주는 부드러운 레가토, '황금 물고기'의 전반부 차분한 분위기와 점점 고조되는 후반부의 대비가 모두 마음에 들었다. '황페한 절에 걸린 달'이 조금 아쉽기는 했지만, 어차피 이 곡에서 나를 만족시켰던 연주는 에리쿠르를 제외하면 없었기 때문에 논외.

 <보헤미아의 춤>, <슬라브 발라드>, <스티리아 타란텔라>, <낭만적인 왈츠>, <마주르카>, <앨범 페이지>는 꿈 꾸는 듯, 비에 젖은 정원을 감상하는 듯 이 세상에서 조금 이격된 느낌을 주는 소품들. 연주는 짤막하게 잘라 말하겠다. 완벽하다. 부연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쓸데없는 부연을 덧다는 것만큼 이 연주들에게 누가 되는 짓도 없다.

 

 <베르가마스크 모음곡>은 워낙 많은 피아니스트들이 쳐서 경쟁 상대도 많은데, 데무스는 '전주곡'의 압도적인 첫 연타부터 다른 연주들의 반발을 잠재운다. 에트빈 피셔를 위시한 독일 피아니스트들의 강점인 '단단한 포르테'는 데무스도 예외가 아닌데, 신기한 점은 그런 '단단한 포르테'가 감성과 음향의 예술인 드뷔시와 적절하게 잘 어울린다는 점이다. 이 연주는 데무스가 얼마나 음색, 루바토, 페달링에 관심이 많고 다채로운 스킬을 개발해왔는지에 대한 좋은 실례다. '미뉴엣'은 살짝 느릿하면서도 선명하지만, '달빛'은 뛰어난 연주임에도 완벽하다고 하기에는 2% 아쉽다. 그래도 '파스피에'는 마지막을 멋지게 마무리짓는다. 아쉬운 부분도 없지 않지만 네 손가락 안에 들어갈 연주다(에리쿠르, 카펠(!), 기제킹 다음 자리ㅋ).

 <장난감 상자>는 관현악 버전만 알고 있었는데 사실은 피아노 버전이 원곡이다. 데무스는 전주곡과 에필로그를 뺀 4곡을 발췌해 연주했는데 귀엽고 흥겨우면서도 신비로운 만년 드뷔시의 특유의 감성을 놓치지 않는다. 곡 중에서는 2곡 '바타유'가 제일 마음에 들었다.

 <녹턴>과 <가면>은 곡의 완성도와 긴장감이 조금 떨어지는 곡들이라 연주가가 커버해야 하는 부분이 많은데, 데무스는 곡의 단점을 가릴 정도로 훌륭한 음색을 가지고 있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내 연주 취향은 <녹턴>보다는 <가면>의 은근한 연주가 더 마음에 들었다.

 <기쁨의 섬>은 연주시간이 5분을 넘기 힘든 짧은 곡이지만 단독으로 설명해야 할 정도로 중요한 곡인데, 드뷔시의 피아노 음악 형식이 집약된 곡이기 때문이다. 데무스는 처음에는 덤덤하게 치는 것 같지만 다른 곡에서 그렇듯 점점 온도를 올려가며 비등점에 근접해간다. 하지만 조금 더 자신의 감정을 풀어놓았으면 어땠을까 싶다. 참고로 마지막 처리가 독특하니 일청을 권한다(들을 수 있다면ㅋ).

 

 <어린이의 세계>는 교본인 미켈란젤리(DG)와 어쩔 수 없는 비교를 당하게 되는데, 첫 곡 '그라두스 아드 파르나숨 박사'는 <기쁨의 섬>처럼 마지막 처리가 독특하다. '어린 양치기'는 판본이 궁금해지는 연주이며, 마지막 '골리워크의 케이크워크'는 말 그대로 '확 깬다.'

 <피아노를 위하여>의 '전주곡'은 친구 굴다를 생각나게 하는 연주. 굴다가 드뷔시에서 전주곡 말고도 자기 이름을 내게 깊게 각인시킨 레퍼토리가 <피아노를 위하여>였는데, 데무스는 그 굴다와 비교해도 모자라지 않는 연주였다. '사라방드'는 뛰어난 연주지만, '7분에 육박한 느린 연주임에도 존재감이 압도적인' 에리쿠르가 너무 대단하다. 그래서 더 아쉬웠다. '토카타'는 여타 연주와는 드물게, 속도감이 아닌 색채감으로 승부를 보는 연주였다.

 지금까지 에리쿠르와 비교하면서 데무스를 비교 열위로 보는 경우가 많았는데, <판화>는 다르다. 첫 곡 '탑'의 기묘한 색배합은 에리쿠르와 동급, 어쩌면 그 이상이며, 이렇게 화려한 음의 팔레트를 보유한 피아니스트가 있었나 싶을 정도로 다채롭게 곡을 채색한다. '어떻게 사람이 이런 소리를 내지'라는 생각이 들 정도. '그라나다의 밤'은 첫 곡에서 끌어올린 긴장감과 정서를 하나도 놓치지 않고 그대로 색다른 것으로 만들어 듣는 사람을 마지막 곡 '비 오는 정원'으로 이끈다.

 페달링 많이 쓰는 드뷔시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데무스의 <꿈>은 몇 안 되는 예외다. <작은 흑인>은 신선하며, <하이든 예찬>은 톡톡 튀는 터치가 일품이다. <렌트보다 느리게>는 어떤 연주로 들어도 재미가 없어서 데무스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영웅의 자장가>는 '아 이 곡은 원래 음울한 곡이지'라는 생각 말고는 드는 게 없었다ㅋ. <스케치북에서>는 좋은 연주지만 이미 에리쿠르의 섬뜩한 연주를 들은 후라 다른 어떤 연주를 들어도 성에 차지 않는 것 같다.

 

 앞의 연주들이 음의 색채감에 치우치는 연주가 많다면, <전주곡> 1권부터는 분석적인 연주가 두드러진다. 데무스는 첫 곡 '델피의 무희들'부터 특유의 시간이 멈춘 듯한 분위기를 잘 잡아나간다. '돛'은 클라이막스 이후 화음 처리가 독특하며, '들을 스치는 바람'은 반대로 클라이막스 화음이 두드러진다. '아나카프리의 언덕'은 미켈란젤리(DG) 이후 경향이 보이지 않아 마음에 드는데, 끝부분 템포가 기이할 정도로 느리다. '눈 위의 발자국'은 페달링이 두드러지며, '서풍이 불 때'의 속도감과 루바토는 곡의 성격과 잘 맞아떨어진다. 스타일은 기제킹과 리히터, 미켈란젤리의 세 극단의 중간점에 위치해 있다. 반대로 '아마빛 머리의 소녀'는 순수하게 음의 아름다움에 탐닉하는 연주다. 1권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가라앉은 성당'은 프레이즈의 분절을 아주 적절하게 이용하며, 페달링을 적절하게 이용한 거대한 울림이 인상적이다(다른 어떤 연주도 데무스같은 울림을 못 만들었다). '민스트렐'은 안정적인 마무리를 들려준다.

 

 <전주곡> 2권 연주도 1권과 크게 다르지 않다. '안개'와 '고엽'은 다소 차분하고 특징없는 연주를 들려주나, 데무스의 개성은 '비노의 문'부터 발휘가 된다. 첫 동기 리듬 처리가 정말 독특하다. '요정은 뛰어난 무용수'의 두 번째 동기는 아주 느릿하게 나오는데, 이게 의외로 잘 어울린다. '히스가 무성한 황야' 특유의 낙천적인 아름다움이나 '달빛이 비치는 테라스'의 신비로운 사색은 잘 살려내지만, '괴짜 라빈 장군'이나 '옹딘' 특유의 날카로운 리듬은 좀 뭉특하게 들린다. 하지만 '피크위크 경에 대한 경의'는 데무스의 뚝심이 잘 어울리는 특이사례. '카노프'는 여타 연주와는 색다른 소리를 들려주며, 마지막 '불꽃놀이'는 중반 곳곳에서 등장하는 루바토가 인상적이다.

 

 두 곡의 아라베스크는 멋진 소품에 어울리는 멋진 연주다.

 

 <연습곡>은 1권과 2권을 나누어 배치했다. 여타 뛰어난 연주들이 그렇듯, 데무스도 '소리'와 '해석' 그리고 '기교'를 잡기 위해 노력하는 연주를 들려준다. '다섯 손가락을 위하여'는 에리쿠르의 '소리'와는 달리 '리듬'이 두드러진다. '3도'는 만족스러운 연주이며, '4도'는 템포가 아주 변화무쌍하다(주요 동기를 처음에 느리게, 나중에 빠르게 제시한다). '옥타브'는 연습곡 연주를 통틀어 다이내믹이 가장 큰 연주를 들려주며, '여덟 손가락'은 매끄럽게 쏙 빠져나가는 느낌을 잘 살린다.

 

 <연습곡> 2권의 연주들은 1권보다 더 뛰어나다(개인적으로 <전주곡>과 <연습곡>을 통틀어 <연습곡> 2권이 가장 마음에 든다). 첫 타석을 장식하는 '반음계'의 연주는 최상급이다. 데무스는 '낡아빠진 반음계적 진행의 연출을 통해 새 시대를 예고하는 신선하고 자극적인 연습곡(슈미츠)'이라 일컬어지는 이 곡의 특성을 잘 이해하고 있다. '꾸밈음'의 연주도 뛰어나며, '반복음' 특유의, 마치 자크 타티의 <플레이타임> 같은 묘하게 차갑고 퉁명스러운 느낌도 잘 살려낸다. '대비음'의 급진적인 정중동에 대한 데무스의 해석은 정말 특이하다. '아르페지오'의 극에 달한 아름다움을 거쳐 리듬의 활기가 가득한 '화음'으로 끝마치는 여정을 듣고 있으면, 데무스가 우리에게 남긴 유산이 절대 적지 않음을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Requiescat In Pace, Maestro Demus (1928.12.2~2019.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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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3.1 (금)


 프레빈/LSO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8번 (EMI)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8번은 승리의 개가인 7번과 쇼스타코비치식 풍자의 걸작인 9번 사이에서 불안한 입지를 가진 작품이다. 곡은 처음부터 끝까지 염세와 불길함의 냄새를 풍긴다. 금관의 폭격은 희망을 잿더미로 만들어버리며, 현악기는 60분 내내 비명을 지르거나 침묵해버린다. 5악장 마지막에 목관이 가녀린 희망을 이어나가려 하지만, 그 최후의 노력은 아무 의미없는 죽음이 되어, 아무도 모르게 잊힌다.

 학살 장면이나 전장의 참상을 스냅샷(공교롭게도 이 단어에는 '총을 난사하는 행위'라는 뜻이 담겨 있다)으로 찍어 고발하는 듯한 무궁동의 3악장을 제외하면, 나는 이 교향곡을 언급하는 것을 거의 본 일이 없다. 적어도 형식상으로는 엉성한 7번보다 더 잘 만들어졌음에도 말이다.

 프레빈의 8번은 내가 므라빈스키 다음으로 좋아하는 연주다. 그는 쇼스타코비치의 부인할 수 없는 권위자가 된 므라빈스키와는 다르게, 이 우울하고 염세적인 작품을 '듣기 쉽게' 만드는 것으로 성공을 거두었다. '듣게 쉽게' 만들었다고 해서 프레빈이 이 곡을 아무 의미 없는, 아무 생각 없는 키치로 타락시켰다는 얘기가 아니다. 그는 포인트를 정확하게 잡아 쇼스타코비치를 공략해나간다. 다이내믹의 극한을 자랑하는 1악장 중반부에서는 그야말로 폭탄을 터뜨린다. 3악장의 리듬감은 므라빈스키와는 다른 의미로 훌륭하다. 무엇보다, 그의 손에서 잡힌 런던 심포니의 음향은 같은 오케스트라의 연주들 중 최상급이다.

 프레빈의 쇼스타코비치는 시카고 심포니와 함께 한 4번(EMI)도 훌륭한데, 다른 박스에 묶여 나온 8번과는 달리 이놈은 구하기 쉽지 않다는 단점이 있다. 워너에서 프레빈의 쇼스타코비치를 전부 묶어 박스로 냈으면 한다. 뭐, 지금 세태를 봤을 때 언젠가는 전집에 전부 들어가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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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2.3 (일)



 체자레 시에피 / 56년 잘츠부르크 가곡 리사이틀 (56.7.27) (Orfeo)


 시에피라는 위대한 가수의 위대한 역량을 아낌없이 체감 가능한 명연. 프랑스어/독일어/이태리어라는 3개 국어 프로그램을, 그것도 륄리에서 라벨까지 300년에 걸친 방대한 레퍼토리로 짜면서도 완벽한 리사이틀이 가능한 존재를 도대체 뭐라고 불러야 할까. 선악이 깃든 기품있는 목소리에 매끄러움에서 박력 사이를 마음대로 오고가는 호흡조절과 가창, 감정표현, 거기다 레퍼토리에 걸맞게 콘서트홀을 끓어오르게 만드는 완급조절까지 완벽하다.

 스타트를 끊는 륄리의 <아마디스>와 <알세스트>의 아리아부터 시작해 슈만과 브람스의 가곡, 모차르트의 콘서트 아리아, 보이토(<메피스토펠레>), 베르디(<시칠리아 섬의 저녁기도>와 <시몬 보카네그라>), 로시니(<세빌리아의 이발사>와 <알제리의 이탈리아 여인>)의 아리아를 거쳐 마지막 안토니오 카를로스 고메스의 곡까지 방대한 곡들을 떡 주무르듯 주무르지만, 이 리사이틀의 압권은 단연 라벨의 <둘시네의 돈키호테>. 이태리 사람이라는 게 믿겨지지 않는 완벽한 프랑스어 발음을 자랑하며 혀가 꼬일 것 같은 이 난곡을 너무 쉽게 풀어낸다. 시에피의 프랑스어 발음은 특히 r와 un에서 초강세를 보이는데, 특히 두 발음을 동시에 들을 수 있는 2곡 <회고적인 노래> 중 'D’un rayon du ciel bénissez ma lame' 단락은 그야말로 절창. 3곡 <권주가>의 알딸딸한 사이키델릭 분위기도 완벽하게 소화해낸다. 왜 시에피가 위대한 가수인지, 그리고 위대한 가수가 어떻게 무대를 가리지 않고 빛을 발하는지를 잘 알고 싶다면 반드시 들어야 할 음반.



 2019.2.14 (목)


 미트로풀로스 슈만 2번/프로코피예프 5번 (54.8.21) (Orfeo)


 혼란한 합주력, 삐긋삐긋하는 음정, 가끔 이상해지는 다이내믹. 이 모든 단점에도 불구하고 이 연주가 프로코피예프 5번 역사상 가장 무서운 연주인 이유는 단 하나, 지휘자의 존재감 때문일 것이다. 프로코피예프의 곡은 곡에 내재한 '신랄함'을 얼마나 잘 살리느냐에 생명이 달렸는데, 이 연주는 그 측면에서 완벽하다. 실내악 규모로 줄어들었다가 갑자기 사정없이 폭발하는 다이내믹 또한 이 연주를 더 예측불허로 만들어준다. 그 모든 것은 불세출의 지휘자 미트로풀로스의 공이다.

 커플링된 슈만 2번은 프로코피예프의 곡과 닮은 점이 많은데, 피아노의 어법으로 관현악 작곡을 생각한 탓에 '매끄럽지 못한' 부분이 많다는 점, 그리고 관현악 특유의 다이내믹을 잘 살리는 대신 그냥 쿵쾅거리는 것으로 때우려는 부분이 많다는 점이다. 하지만 그 때문에 사람들이 슈만과 프로코피예프의 보석같은 아이디어를 거들떠보지 않는 것은 아쉽다. 후대 작곡가들에게 전범이 될 정도로 기묘한 슈만의 싱커페이션과 화성진행, 그리고 프로코피예프의 간결한 그로테스크함은 이 교향곡들에서도 잘 살아 있다.



 2019.2.16 (토)


 박하우스/뵘 브람스 2번/모차르트 27번 피아노 협주곡 (Decca)


 피아노와 반주 둘 다 하품 나오는 할아버지의 연주. 박하우스가 '건반의 사자왕'이었던 시절은 모노 시절이지, 다 죽어가는 7~80대가 아니다. 나는 모노 시대 박하우스의 기개를 엿볼 수 있는 연주로 37년 슈만의 환상곡(EMI)을 추천하겠다. 뵘의 반주도 같이 하품 나오기는 마찬가지. 비슷한 시기 바그너와 슈트라우스 반주를 생각하면 힘을 숨겨도 너무 많이 숨긴다(65년 로엔그린(Orfeo)과 엘렉트라(Orfeo) 실황을 비교해 볼 것). 브피협 2번의 내 선택은 어쩔 수 없이 길렐스/라이너/CSO(RCA) 쪽으로 기운다. 스튜디오 레코딩 중에서 고를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니까.


 텔덱 리게티 프로젝트 CD 3 (Teldec)


 텔덱에서 내놓은 다섯 장의 리게티 프로젝트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3번 CD다. 3번의 수록곡은 첼로 협주곡-<시계와 구름>-바이올린 협주곡-<피리, 북, 깽깽이Síppal, dobbal, nádihegedűvel>로 되어 있는데, 이 배치는 리게티의 음악 노정인 아방가르드 시기(첼로 협주곡)-모색기(<시계와 구름>)-아방가르드 탈피(신조성 음악?)기(바이올린 협주곡과 <피리, 북, 깽깽이>)를 압축해서 보여줄 뿐만 아니라, 기악(현악 협주곡)-성악(아카펠라 합창곡)-기악(현악 협주곡)-성악(독창+앙상블)곡의 배치로 묘한 균형감까지 준다. 난 이렇게 음악의 발전과정을 논리적으로 보여주는 배치를 좋아한다. 순수하게 기량만을 평가하자면, <시계와 구름>을 노래한 카펠라 암스테르담의 솜씨가 가장 좋았다고 평하겠다. 코러스 마스터인 Daniel Reuss에게도 감사를 표한다.


 마커스 클린코 프랑스 하프 음악집 (EMI)


 사람이 너무 오래 긴장하면 고장이 난다. 바깥을 오래 돌아다니면, 그것만으로도 긴장하고 피곤하게 된다. 여기저기 돌아다녀서 피곤한 김에 긴장도 풀 겸 별 생각없이 틀었다. 긴장을 풀기에는 하프 독주가 딱이니까. 마커스 클린코는 릴리 라스킨에게 수학했다는 이력이 돋보이지만, '그 이상'이 없는 '재능만 있는 일개 한량'이다. 그리고 이런 한량의 연주가 그렇듯, 전혀 대단한 구석이 없다. 자신이 음악에 미치지 않으면 절대 남을 미치게 만들 수 없다.



 2019.2.17 (일)


 뮌쉬/BSO 생상스 교향곡 3번 <오르간>, 드뷔시 <바다>, 이베르 <기항지> (RCA)


 십수 번을 들었던 음반인데 글을 쓰는 것은 처음이다. 생상스는 오르간과 오케스트라 황금비율을 맞추기 위해 관객석 1/3을 들어내고 거기에 오케스트라를 앉혀 녹음했다는 전설적인 일화가 남은 연주다. 이런 노력이 이후의 레퍼런스인 바렌보임(DG), 카라얀(DG) 음향 실험의 선구가 되었음은 물론이다. 연주는 듣기 괜찮은데 소리가 약간 거칠고, 동시기 스테레오 레코딩이 그렇듯 최강주에서 음향이 과포화된다. <바다>는 경이로운 뮌쉬 본인의 67년 실황(Altus)에 비하면 많이 모자라다. 안정되지 못한 금관 테크닉도 그렇고, 3악장 막판의 트럼펫 패시지(초판 이후 일관되게 삭제되었지만 연주가들이 기어이 복구시킨 부분)는 매가리가 없다. 가장 뛰어난 연주는 역시 이베르의 <기항지>. 부점 리듬이 난무하는 이 곡을 뮌쉬는 능수능란하게 연주한다. 플루트 연주자가 죽어나는 소리가 들릴 정도.


 폴리니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11, 12, 21번 (DG)


 97년 빈 무지크페라인 홀 실황연주. 클래식 음악 처음 팔 때는 참 좋은 연주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들으면 당최 뭐가 좋았는지 이해를 할 수 없는 연주. 폴리니는 페달링 테크닉의 절반이라도 음향 계발에 힘을 썼으면 더 평가가 높아지지 않았을까 싶다.


 길렐스/아마데우스 sq. 브람스 피아노 4중주 1번 外 (DG)


 제대로 된 피아노의 음색을 듣기 위해 길렐스를 틀었다. 브람스 피아노 4중주 1번의 레퍼런스. 피아노와 현악기 모두 선 굵은 연주로 일관한다. 커플링된 4곡의 발라드 Op.10도 훌륭한 연주. 살인(그것도 존속살인)한 사람의 심리 상태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1번과, 침잠한 감정들이 어물거리면서 아련함과 불길한 색채를 번갈아 암시하는 4번이 인상적이다.



 2019.2.18 (월)


 훔부르크 로시니 <이발사> CD 2 (Naxos)


 연주의 내용보다 낙소스가 내지에 저지른 만행을 좀 쓰고 넘어가야겠다. 리브레토가 CD 2 10번 트랙까지밖에 인쇄가 되어 있지 않아서(1막 로지나/피가로 듀엣 "Dunque io son"과 바르톨로 아리아 "A un dottor della mia sorte" 사이 레치타티보) 그 후의 내용이 없다. 이러면 호평을 하고 싶어도 못한다. <이발사>는 음반마다 빠지거나 들어간 내용도 많고 애드립도 많은 오페라라서 리브레토가 필수인데 이딴 짓을 해놓았으니 이 따위로 음반을 만드는 낙소스는 욕을 먹어도 싸다.


 스턴/로즈 오먼디/필리 브바협/이중협 (Sony)


 난 스턴을 좋아하지 않는다. 특유의 톤은 존중해야 한다는 의견에는 동의하지만, 40도 되기 전에 테크닉 측면에서 맛이 가 버린 사람을 고평가하기는 힘들다. 오먼디/필라델피아와 녹음한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은 39세 때인 1959년에 녹음했는데, 테크닉은 맛이 갔는데 특유의 톤만 악착같이 살리려고 하다 보니 김 빠진 콜라를 졸여서 콜라청을 만든 다음에 억지로 멕이는 느낌이다. 1악장 22분이 66분같다. 이중 협주곡은 첼로를 켜는 레너드 로즈 때문에 참고 들었다. 로즈는 훌륭하지만 스턴은 그저 그랬다. 그래도 바이올린 협주곡만큼은 아니어서 다행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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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1.1 (화)


 카를 리히터 오르간곡집 (DG) CD 3


 2~3년 전부터 내게는 새로운 습관이 하나 만들어졌다. 새해 첫 날 하루를 바흐의 전주곡과 푸가 F장조 BWV 540으로 시작하는 것이다. 한 해의 시작은 비처럼, 바람처럼, 별처럼, 햇살처럼 충만한 곡과 함께 하는 기쁨이 있어야 한다. 올 한 해도 충만한 하루, 충만한 하루가 되기를 바라며 이 곡을 듣는 기억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다. 이 블로그를 찾아오시는 분들 모두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2019.1.4 (금)


 훔부르크 로시니 <세빌리아의 이발사> CD 1 (Naxos)


 오디오를 버전업하고 이 음반을 처음으로 틀었다. 역시 오디오를 버전업하면 들었던 음반이라도 다시 한 번 돌려봐야 한다. 허접한 오케스트라는 여전하지만, 성악가들이 빚어내는 앙상블이 만만치 않은 연주.



 2019.1.14 (월)


 뵘 베토벤 교향곡 5번/6번 <전원> (1975년 8월 15일 잘츠부르크 실황)


 고집이 세고 깐깐한 노인의 연주. 15분이나 되는 <전원> 2악장은 느려도 너무 느려 참기 힘들다. 과연 내가 나이를 먹는다고 이런 연주를 찾게 될지는 의문.



 2019.1.17 (목)


 요제프 크립스 슈베르트 교향곡 9번 <그레이트>/LSO (Decca)


 스테레오 초기의 야심찬 녹음. 쭉 뻗는 템포, 쨍쨍한 현악기, 칼칼한 금관악기 모두 마음에 드는데 목관악기가 아쉽다. 특히 바람 빠지는 소리만 나는 플루트는 정말…….


 메타/빈 필 말러 교향곡 2번 <부활> (Decca)


 메타는 내가 아는 메이저 지휘자 중 음을 가장 거칠게 다루는 편에 속한다. 최고의 음향을 지향하는 빈 필과 함께 할 때도 그런 그의 천성은 예외가 아니다. 다행인 것은 만년 연주들처럼 음이 날리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는 것. 빈 필과 데카를 총동원한 물량 공세만큼은 기가 막힌다.


 헝가리의 리히테르 CD 1 (BMC)


 페렌치크와 협연한 경이로운 슈만 피아노 협주곡. 이 곡을 생각할 때는 항상 리히테르의 템포로 머릿속에서 자동재생되는 것이 이제는 버릇이 되었다. 브람스의 Op.118 두 곡은 No.1보다는 No.6쪽이 더 취향이다. 리히테르는 6번 특유의 염세적 낙원을 정말 잘 살린다. <평균율> 발췌 연주 중에서는 2번과 20번이 가장 인상에 남는다. 리히테르의 <평균율>은 장조 곡보다는 단조 곡을 더 잘한다. <프랑스 모음곡>은 인상이 흐릿한 연주.



 2019.1.24 (목)


 코간 브람스/차이콥스키 바이올린 협주곡 (Melodiya)


 전설적인 몽퇴/보스턴 심포니와의 브람스 협주곡 실황. 악장마다 박수가 터지는 연주회는 이것이 처음이다. 코간의 바이올린은 돌로 찍는 것 같은 압박감이 장난이 아니다. 왜 이 연주자의 미국 데뷔가 충격으로 받아들여졌는지 충분히 느낄 수 있다. D에서 2옥타브 위의 E#(F) 중음을 단번에 찍어버리는 첫 프레이즈부터 코간은 안전장치 없는 야수를 보는 느낌이다. 요하임이 '나처럼 손가락이 큰 사람 아니면 제대로 연주 못한다'라고 경고한 곡, 평범한 연주가들에게는 손가락이 찢어질 것 같은 이 난곡 중의 난곡을 그는 아무 거리낌없이 마구 해치운다. 하지만 반주는 좀 김이 빠진다. 요즘 들어 몽퇴는 듣는 것마다 실망하고 기대치가 낮아지는 지휘자 중 한 명이다. 담백한 연주에 치중해 오케스트라의 소리에 무신경한 그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오케스트라는 빈 아니면 베를린인데, 문제는 그가 잡은 대부분의 오케스트라들이 음향에 심혈을 기울여야 하는 영미권 오케스트라는 것. 어떤 오디오로 돌려듣던 끽끽거리는 현악과 빽빽거리는 금관은 짜증이 난다. 특히 현악기가 강주로 유니즌을 연주하는 대목에서는 귀를 틀어막고 싶어진다.

 실베스트리/콩세르바투아와의 차이콥스키 협주곡 녹음은 의외로 실베스트리의 반주력이 마음에 들었다. 왜 EMI가 이 지휘자를 반주 지휘자로 삼았는지 이해가 간다.



 2019.1.25 (금)


 베르글룬드/본머스 심포니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7번 <레닌그라드> (EMI)


 속도전의 진수를 들려주는 예르비(Chandos)와 함께 가장 좋아하는 <레닌그라드> 연주. 이런 비유가 적절할지 모르지만 정말 '외인부대 특유의 처절함'을 제대로 자아내는 연주다. 적지에 고립되어 양질의 화력지원을 기대할 수 없고, 물량전도 힘들며, 소모전은 더더욱 힘든 외인부대가 연이어 기적을 연출한다. 73분의 분투 끝에 터지는 마지막 한 방의 카타르시스가 엄청나다. 다만 역량이 부족해 지루하게 들리는 3악장이 조금 아쉽다.

 * 난 이 곡과 '배부른 소리'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처절함 없는 <레닌그라드>는 내게 큰 의미를 주지 않는다.


 디터 체흘린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8/14/23 (Berlin Classics)


 좋은 의미로도 나쁜 의미로도 뵈젠도르퍼스러운 연주. 중음역대의 특이한 소리를 잘 살린다는 장점을 갖추었지만, '터치와 페달링이 특출나지 않으면 음향이 지저분해지는' 뵈젠도르퍼의 단점도 갖추었다. 해석은 상당히 고집스러워서 약간 답답하다. 가끔 듣기에는 나쁘지 않지만 자주 들으라고 하면 못 들을 연주.



 2019.1.28 (월)


 슈리히트/콩세르바투아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 (Testament)


 슈리히트/콩세르바투아 베토벤 교향곡 9번의 스테레오판(EMI 전집에 들어 있는 연주는 모노 버전). 베토벤 9번을 통틀어 가장 매혹적인 사파. 초장부터 강렬하게 알싸한 현악기 소리로 조진다. 프랑스 오케스트라의 상대적으로 가볍게 들리는 현악기, 비브라토 특이한(이 당시 프랑스 호른은 피스톤 호른이었다) 관악기 소리와 독일 지휘자의 기묘한 조합이 이런 미친 시너지를 내는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뭐 지금이야 이런 소리는 듣고 싶어도 들을 수 없는 소리가 되었지만(앙드레 말로, 바렌보임 개ㅅ… 아닙니다).



(참고 사진으로 피스톤 호른을 올려본다. 셀마Selmer 사 제작품. 저 피스톤이 보이는가?)



 아드 리비툼 sq. 라벨, 포레 현악 4중주 (Naxos)


 '비단 위에 채색한 그림'. 곡도 연주도 이 비유에 잘 들어맞는 연주들. 운필은 자유롭고 농담은 선명하며 악상은 자유로이 뛰어다닌다. 색채는 부드럽게 스며들고 피치카토는 살포시 현을 튕긴다. 흔히 드뷔시와 커플링하는 라벨 현악 4중주를 그의 스승이자 음악적 연관성이 깊은 포레와 커플링한 것도 이채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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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반일기 / 2018년 12월

음반 2018. 12. 30. 16:17


 2018.12.11 (화)


 베토벤 현악 4중주 12번 린지(Universial) vs 아르테미스(Erato)


 린지 : 결정 장애 없음. 부다페스트(Sony)의 고철 긁는 소리보다는 낫지만 다소 거칠다. 비브라토 적음. 1악장 7:30, 2악장 18:54로 느긋한 시간대를 잡았다. 다만 이것은 시간대에 한정되는 얘기일 뿐이다. 용암이 느긋하게 흐른다고 해서 용암이 차분하다고 얘기할 사람은 없으리라고 본다. 가장 마음에 드는 연주를 해내는 부분은 4악장이다. 역시 린지는 돌진할 때 가장 아름답다.

 아르테미스 : 21세기 운지법(거트현 느낌). 비브라토가 적은 것은 린지와 비슷하나 운지법의 차이로 인해 린지보다 훨씬 부드럽고 유쾌하게 느껴진다. 린지가 박력 있게 느껴질 정도. 1악장 6:42, 2악장 14:55로 다소 빠르다. 참고로 1악장의 첫 유니즌을 아르페지오처럼 다룬다.



 2018.12.18 (화)


 베르티니 <대지의 노래> (EMI)


 <대지의 노래>의 연주기준은 생각보다 간단하게 정리할 수 있다. 겉으로 배어나오는 공허한 환락을 얼마나 잘 살리느냐, 그리고 속에 깊이 배인 죽음의 정서를 얼마나 잘 살리느냐에 달려 있다. 물론 말이 쉽다는 얘기지 이것을 성공시키는 연주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데, 기이하게도 그 기준을 가장 잘 충족하는 연주는 두 성악가가 거의 모든 것을 주관하는 크립스 64년 실황(DG)이다. 베르티니는 아슬아슬하게 손익분기점을 넘겼다. 다시 말하자면, 이보다 못하면 연주로서의 가치가 없다는 얘기다. 가수는 두 명 모두 그저 그렇고 지휘자가 모든 난관을 도맡아 통과한다. 크립스와 정반대였기에 손익분기점을 통과한 연주.



 2018.12.20 (목)


 라이너의 버르토크 (RCA)

 톡케협 - 걸작, 절창, 명연. 어떤 찬사를 다 붙여도 모자라다.

 현타첼 - 톡케협에 비해 2% 모자라다. 리듬을 좀 더 유연하게 다루었으면 좋았을 텐데.

 헝가리 스케치 - 흥겨움. 곡도 연주도.


 로제스트벤스키 숏9 외 (Brilliant)

 교향곡 9번 - 숨겨진 걸작. 신랄한 유쾌함을 극한으로 표출하는 지휘자와 오케스트라의 재주가 놀랍다.

 미켈란젤로 가곡집 - 처음 듣는 곡. 네스테렌코 목소리만큼 어두운 곡. 그러나 그 와중에 피어오르는 밤의 이미지들이 기묘한 인상을 남긴다. …… 라고 생각했는데 마지막 곡에 작은 반전이 있다. 꼭 끝까지 들어보시길!


 기제킹 드뷔시 CD 4 (EMI)

 퍄! 이 한 글자면 모든 것이 가능하지 않을까. 드뷔시 연주는 해석이 아닌 음향으로 풀어내야 한다. 요즘 나오는 드뷔시 연주들이 실패를 거듭하는 이유도 음향이 아닌 해석에 지나치게 몰두하기 때문은 아닐까.



 2018.12.21 (금)


 뒤트와 라벨 관현악곡집 CD 1 (Decca)


 그럭저럭 괜찮은 라벨 연주. 하지만 스튜디오에서 음향을 너무 많이 만졌다. 뒤트와를 둘러싼 데카의 이런 장난질은 <1812년 서곡> (Decca)에서의 신시사이저 음향 삽입으로 정점을 찍는다.



 2018.12.30 (일)


 바일 하이든 교향곡집 CD 5 (Sony) (교향곡 85-87)


 나는 하이든을 좋아한다. 한 해의 끝을 하이든으로 끝내는 것은 보람찬 일이다. 담백한 주제의 풍성한 변형, 언제나 핵심만을 남기는 간결한 서법, 그리고 놀라운 자기완결성은 그를 반복해서 듣게 만드는 놀라움이자 원동력이다. <파리> 교향곡의 완성도는 <런던> 교향곡 못지않게 뛰어나면서도 조금 더 순수하고 풋풋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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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반일기 / 2018년 11월

음반 2018. 12. 30. 16:02


 2018.11.2 (금)


 <전람회의 그림> 호로비츠 51년 라이브 (RCA)


 피아노 버전 <전람회>의 워너비. 호로비츠의 편곡은 신의 한 수였다. 난 피아노 버전은 이 연주로, 관현악 버전은 테미르카노프 실황(예당)으로 듣는다. 다만 <비들로>에서 자의적인 스타카토와 마르카토는 흉하게 들린다. 아마 이 연주의 몇 안 되는 흠일 것이다.

 (전부터 생각하던 것이지만, 전람회는 천재적인 아이디어에 비해 피아노의 이디엄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작곡가의 역량이 참 아쉬운 곡이다.)



 2018.11.5 (월)


 트레차코프 숏바협 1 (예당)


 애절하다 못해 통곡하는 비브라토가 인상적인 연주. 오이스트라흐가 숏바협의 표준을 제시했다면, 트레차코프는 가장 감정적인 숏바협을 들려준다.


 에트빈 피셔 평균율 2권 CD 1 (Naxos)


 미스터치, 신비한 음색, 소박한 해석. '최초' 이상의 가치가 있는 연주.



 2018.11.11 (일)


 로린 마젤 시벨리우스 교향곡 2번/3번 (Decca)


 '열렬한 해석' 못지않게 '황홀한 소리'도 잘 끌어내는 연주. 1악장 첫머리 목관을 현악으로 살짝 덮어 두터운 질감을 최대한으로 끌어내는 감각은 젊은 마젤이 아니면 그 누구도 해내지 못할 경지다.

 (내가 시벨리우스 연주에서 바라는 것은 단 하나다. 차가운 극한의 땅을 찬란한 오로라로 물들이는 것. 나는 '냉정하고 차가운 연주'랍시고 무감동하고 무가치하게 시벨리우스를 다루는 연주들을 전혀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 연주들을 좋아하라고 강요하는 것은 시벨리우스에 대한 모독이다.)



 2018.11.25 (일)


 카라얀 브루크너 9번 76년 실황 (DG)


 지북…… 아니, 지복의 브루크너 9번. 3악장 클리아맥스에서 기어이 터져버리는 삑사리는 몇 번을 들어도 너무 통탄스럽다. 그러나 어쩌랴. 수정할 수 없는 결론인 것을.



 2018.11.27 (화)


 요훔 <카르미나 부라나> (DG)


 <카르미나 부라나>의 규범. 야노비츠의 고음(High D)도 디스카우의 발성도 놀랍지만, 피를 끓게 만드는 광포함이 없다. 역시 내 선택은,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케겔(Berlin Classics) 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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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반일기 / 2018년 10월

음반 2018. 10. 21. 00:38


 2018.10.4 (목)


 히긴보톰 헨델 <메시아> (Naxos)


 고악기 연주를 통틀어 가장 이색적인 존재. 트레블과 아이들의 파격적인 기용으로 바늘 하나 들어갈 틈 없던 <메시아> 판에서 한 자리를 차지한 저그 같은 놈. 다만 성악가들이 좀 약하고, <할렐루야> 합창에서 발음이 심하게 뭉개지는 게 단점이다.



 2018.10.5 (금)


 카라얀 베토벤 교향곡 5번/6번 <전원> 70년대 (DG)


 5번보다 <전원>이 낫다. 난 예전부터 카라얀의 <전원>이 훌륭한 연주라고 생각해왔고, 지금도 그 생각은 바뀌지 않고 있다.



 2018.10.6 (토)


 카라얀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 (70년대) (DG)


 카라얀의 베토벤 교향곡 9번을 스튜디오 음반만 놓고 본다면, 50년대가 가장 뛰어나다고 본다. 70년대는 50년대에 비해 경직되어 있다. 50>70>60>80 순으로 좋은 듯.


 므라빈스키 차이콥스키 교향곡 4번-6번 (DG) (다시 들음)

 

 어쩌다 보니 다시 들었다. 저번보다 부정적인 생각이 더 강해졌다. 차콥 교향곡에는 너무 많은 명연이 있어서 이것을 최고로 꼽기는 미안하다. 다만 스튜디오 음반 중에서 Top 10 안에 속하기는 할듯. 참고로 이게 내 첫 차콥 교향곡 음반이다. 생각해보니, 4번 1악장은 클라이맥스가 악장 끝이 아닌 중반부 끝부분에 있어서 이 클라이맥스의 긴장감을 코다까지 가져가는 게 중요한데, 므라빈스키는 거기서 너무 무심하고 무정한게 아닌가 싶다. 4번 3악장도 너무 소극적이다.



 2018.10.7 (일)


 발터 베토벤 교향곡 4번/6번 <전원> (Sony)


 4번은 너무 구려서 언급할 가치가 없으니 <전원>만 언급하도록 하겠다. 발터의 <전원>이 아직도 생명력을 가진 이유는 무엇일까? 발터만의 독특한 해석도 있겠지만, 역시 후진 오케스트라와 과거의 신경질적인 성향을 버린 지휘자의 만남이기에 이런 놀라운 결과물이 나올 수 있었던 것 같다. 5악장 현 트레몰로의 디미누엔도 후 크레셴도는 지금 들어도 놀랍다.



 2018.10.13 (토)


 번스타인 말러 교향곡 9번 베를린 필 (DG)


 거칠고 난삽한 말러 9번. 그래도 85년 콘체르트허바우 실황(DG)보다는 이게 낫다. 악장 별로 따져보면 3악장이 제일 낫고 4악장이 제일 못한데, 4악장 클라이맥스 직전에서 연주 안 하는 트롬본은 아직도 미스테리(반유대주의 음모론이 또……). 아무리 생각해도, 4악장은 프레이즈 하나하나를 억지로 잡아 늘린 느낌이 심하다. 비브라토를 줄여 건조한 음향 때문일까. 그러면 뚝뚝 끊어지는 느낌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2018.10.14 (일)


 베르너 하스 드뷔시 피아노곡집 1집 (Philips)


 기제킹의 제자이자, 기제킹의 하위호환이자, 기제킹의 열화판인 베르너 하스의 드뷔시 연주. 색감이 풍성하지 않아 지루하고 단조롭다. 똑같은 색의 물감만을 쓴다고 해도 수묵화처럼 농담을 다채롭게 구사하여 음색의 지루함을 탈피하는 연주가 없는 것은 아닌데(대표적인 예가 헨케만스의 드뷔시) 이건 그것도 아니다. 비추.



 2018.10.15 (월)


 박하우스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30~32번 (Decca)


 이 음반도 '첫 음반의 함정'에 제대로 걸려든 사례. 난 아직도 32번 2악장만큼은 박하우스의 연주에서 헤어나오기가 힘들다. 하지만 그거 하나 듣자고 다른 악장들을 듣기에는 좀 지루하다.



 2018.10.17 (수)


 굴다/뵘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9번/브람스 교향곡 1번 (Orfeo)


 멋진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연주와 뵘 최고의 브람스 교향곡 1번. 59년 베를린 필(DG) 연주보다 더 날렵하고 강렬하며 장쾌하다. 다만 이 연주가 최고의 브람스 교향곡 1번 연주는 아니다.


 

 2018.10.19 (금)


 카라얀 <짜라투스투라> 70년대 (DG)


 <짜라투스투라>의 표준. 정수리에 대못을 박는 충격과 공포의 서주, 슈트라우스의 원래 의도였던 서주 16분음표의 복원, 완벽한 연출 구도, 푸가토에서 끝까지 볼끝이 살아 있는 박력 넘치는 음향, 슈발베의 최상급 독주 바이올린 등등…… 흠 잡을 데가 없는 완벽한 스튜디오 레코딩 중 하나다.



 2018.10.21 (일)


 아르농쿠르 심포니 컬렉션 CD 1 (Teldec)


 (하이든 교향곡 94, 104번, 베토벤 교향곡 1번)

 아르농쿠르의 미덕 중 하나는, 비브라토를 쓰지 않으면서도 나오는 신선하고 상쾌한 소리다. 개인적으로는 그의 모차르트보다 하이든을 더 좋아하는데, 94번 <놀람>은 민첩하며, 104번 <런던>은 상대적으로 느릿하고 장엄하다. 특히 1악장은 꽤 느린데, 아르농쿠르가 중시하는 것은 빠르기만 한 템포가 아니다. 그가 중시하는 것은 음향이다.

 ※ <놀람> 2악장의 플루트를 듣가가 든 생각. 20세기 플루트 연주는 크게 세 시기로 나뉘는 것 같다. 첫째는 오렐 니콜레를 비롯한 50년대 스타일, 두 번째는 골웨이로 대표되는 60~70년대 스타일, 그리고 파위로 대표되는 현대다. 50년대 스타일은 휘이이- 하는 바람 빠지는 소리가 강하게 들린다. 60~70년대 스타일은 요사스러운 비브라토가 두드러진다. 난 예전 플루트보다는 현대 플루트 소리가 더 청아하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플루트만큼은 파위로 대표되는 현대가 더 마음에 든다.


 

 2018.10.24 (수)


 리히테르 라흐마니노프 전주곡/회화적 연습곡 (Alto)


 56세 때인 1971년 전주곡은 내가 라흐마니노프 전주곡을 생각할 때 바이센베르크(RCA)와 함께 가장 먼저 떠올리는 연주들이다. 69세 때인 1984년에 녹음한 회화적 연습곡은 터치의 단단함과 명도가 덜하기는 해도 좋은 연주다.



 2018.10.25 (목)


 뵘 브루크너 8번 69년 실황 (Testament)


 약간 성급하다 싶을 정도로 빠른 템포, 몽케 트럼펫의 되바라진 소리 극대화, 어두운 저현과 밝은 호른의 극단적 대비, 강렬함을 넘어 폭력적인 강주. 하지만 너무 빠른 2악장이 아쉽다. 2악장이 딱 30초만 길었어도 별 다섯 개를 주었을 것이다.



 2018.10.27 (토)


 클렘페러 <독일 레퀴엠> (EMI)


 옛 스타일의 조합을 체현한 오케스트라 소리, 언제나 탁월한 디스카우의 발성, 두텁고 중후한 소리를 만드는 현악기 양날개 배치, 일부러 의도한 어두운 음향의 결합. 물론 클럼페러의 <독일 레퀴엠> 연주는 이것보다 56년 실황(ICA)이 더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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