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놓고 한 달이 지나서야 글을 쓰게 되는군요.

 

끝판왕의 위엄.jpg

 

 보통 나는 음반에 대해 이야기할 때 공적인 입장과 사견은 다르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가령 나는 불레즈의 쇤베르크가 매우 뛰어난 연주들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내가 좋아하는 쇤베르크 순위에서 불레즈는 미트로풀로스(왠 밑이냐고 생각하실 분들도 있겠지만, 나는 밑이 연주한 쇤베르크 관현악을 위한 변주곡 Op.31보다 이 곡을 재미있게 요리한 연주를 들어본 일이 없다. 밑은 그 통제가 가능한가 싶은 속도에서도 세 번의 클라이맥스와 200마디가 넘는 코다를 전혀 지루하지 않게 연주한다. 세부적인 카논이 암시에만 그친다는 사소한 결점을 무시한다면, 기가 막히게 재미있는 쇤베르크를 들을 수 있다), 카라얀(단연 가장 과소평가받는 Op.31의 연주 중 하나. 다만 5변주가 조금 아쉽다), 그리고 시노폴리(시노폴리의 12음 음악은 전혀 정신분열적이지 않다)보다 밀린다. 불레즈의 쇤베르크가 뛰어나지 않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다만 쇤베르크라는 레퍼토리는 불레즈가 연주하기에는 너무 '낭만적'인 레퍼토리가 아닌가 하는 사견이 있기 때문이다(차라리 불레즈는 드뷔시나 베베른을 더 잘 하는 것 같다). 쇤베르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성부 간의 우선순위를 두는 것이지 모든 성부를 동등하게 다루는 것이 아니다. 불레즈는 후자에 더 능한 사람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다른 쇤베르크들을 불레즈의 쇤베르크보다 더 자주 듣는다.

 하지만 이 음반은 나의 공적인 입장과 사견이 정확하게 일치할 매우 드문 사례가 될 것이다. 나는 이 연주를 능가할 드뷔시 피아노곡집이 나올지에 대해 굉장히 회의적이며 실제로도 이 연주를 무척이나 좋아한다. 아니, 좋아하는 정도가 아니라 이런 연주는 단연코 바닷가의 모래알만큼이나 많은 드뷔시 피아노곡 연주사에서 제왕의 자리를 차지하는 데 전혀 부족함이 없다. 이런 연주를 듣지 않고 드뷔시를 평가하는 것은 부질 없는 짓이다.

 드뷔시의 피아노곡은 연주가들에게 두 가지 모순점을 부여한다. 하나는 터치와 루바토와 페달링을 활용해서 뛰어난 음색을 만들어야 한다는 점이고, 나머지 하나는 그러면서도 섬세하다 못해 지나칠 정도로 예민한 프레이즈 단위를 절도 있게 지켜야 한다는 점이다. 두 가지 모두 중요하지만, 두 가지의 배합을 조금만, 단 0.1%만 잘못 설정해도 그 연주는 망가져 버린다. 나는 이전 글에서 프랑수아를 높게 평가했지만 자주 듣지는 않는다. 그는 절도 있는 연주를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폴리니의 경우는 더 심각해서 음색이 다 죽어버렸을 뿐만 아니라 선명한 소리를 뽑지도 못한다. 이런 연주를 내놓느니 차라리 드뷔시에 손을 대지 말았어야 했다.

 이 연주는 그 두 가지를 동시에 성취한 몇 안 되는 연주다. 음색은 깊고 짙으며 팔레트의 색감을 드러내지만 터치는 그 누구보다 선명하다. 페달링으로 인해 음색이 터치에서 붕 뜨는 느낌을 주지도 않는다(많은 연주들이 이런 연주를 내놓고는 한다). 이 두 가지 모순을 결합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에리쿠르 이전의 수많은 연주들이 증명했고 에리쿠르 이후의 수많은 연주들이 지금껏 증명하고 있다(루비모프는 무수한 드뷔시 연주들이 거의 지나가지 않은 틈새를 적절히 노려서 성공한 것이지 에리쿠르처럼 압도적인 포스를 보여 성공한 연주가 아니다). 

 에리쿠르의 터치를 짚고 넘어가지 않으면 그의 연주를 평가하는 것은 별 소용이 없을 것이다. 에리쿠르의 저음 연주, 특히 왼손 극저음부에서 손 전체를 약간 비틀어 들어올렸다가 활시위 형태로 팔을 휘두르면서 손가락 옆면으로 건반을 내리찍는 타건은 호로비츠의 망치 타건과는 전혀 다른 음색을 만들어낸다. 보통 그런 타건은 클러스터와 별반 다를 것이 없기 때문에 지저분한 소리가 날 것이라고 생각이 드시겠지만 천만의 말씀. 에리쿠르는 강하면서도 청명한 소리의 전범을 만들어내고 있다.

 해석의 측면은 어떨까. 에리쿠르의 <피아노를 위하여> 사라방드는 무려 6분 46초라는 러닝타임을 자랑한다. 보통 대부분의 연주들이 4분 50초 대에서 5분 초반 대의 러닝타임을 보이는 것을 생각하면 무려 1분이나 더 늘어지는 연주다. 하지만 도저히 지루할 틈이 없다. 에리쿠르는 시간을 잊은 사람처럼 음표 하나하나의 색채를 조심스레 다듬어서 청자 앞에 내놓는다. 청자가 그것을 듣고 감탄하는 사이 곡은 클라이맥스에 도달하고, 어느새 끝나 있다. 

 에리쿠르의 해석이 나를 반하게 만든 또 다른 사례는 <영상> 2집의 2곡인 <황폐한 사원에 걸린 달>인데, 나는 이 곡을 지금까지 예의상 들어야만 하는 곡으로 생각했다. 이 곡이 담고 있는 오리엔탈리즘에 거부감을 느낀 것인지, 아니면 다른 곡과 달리 이 곡에서는 드뷔시 특유의 논리성이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것인지, 아니면 그냥 이 곡이 나와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에리쿠르를 들으면서 이 편견들은 전부 다 날아가버렸다. 곡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내가 들었던 연주들이 문제가 있었던 거였다. 에리쿠르는 '이 곡이 이런 곡이었나?' 싶을 정도로 이 곡의 다채로운 색채감과 짜릿한 순간들을 낱낱이 보여주었다. 곡이 끝날 때까지 들으면서도 감탄사도 생각이 안나 '하...' 만 반복하고 있었던 연주는 내가 지금까지 들은 20종 남짓한 <영상>의 연주들 중 이게 처음이었다.

 그러면 페달링은 어떨까? 밟는 순간, 밟았다가 떼는 순간, 겹쳐 밟는 순간의 구분이 무엇보다 중요한 페달링은 자칫 잘못하면 화장 처음 한 여고생이 그렇듯 가부키 배우같은 떡칠만 남게 된다. 아무리 연습을 한다고 해도 본질적으로는 지저분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 페달링이다. 그런데 에리쿠르는 생각만큼 페달을 많이 밟지 않는다. 그리고 페달을 밟았다는 것을 느끼기가 정말 힘들다. 터치만으로 충분히 음색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페달을 밟으면 음색이 배가 된다. 하지만 왼페달을 밟으면 밟을수록 뿌옇고 탁한 소리밖에 나오지 않는 연주들과 비교하기가 미안해질 정도로 에리쿠르의 터치는 선명함 그 자체다.

 이 음반에 담긴 연주들 중에 중요하지 않은 것이 무엇이 있겠느냐만은(지루한 곡이라고 생각하는 <렌트보다 느리게>마저도 기가 막힌 곡처럼 들리게 하는 연주다. 더 설명이 필요한가?), 딱 하나를 꼽는다면 <판화>의 첫 곡 <탑>을 추천하고 싶다. 음량적인 클라이맥스에 도달하는 순간 왼손이 만드는 그 트레몰로의 괴물 같은 음향을 듣고 있으면, 도대체 왜 이 피아니스트가 그토록 음반 만드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는지 물어보고 싶을 정도다. 만약 이 피아니스트가 조금만 더 외향적이었더라면 드뷔시 연주사 전체가 뒤집어졌을 것이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이 연주의 입수 난이도가 연주의 질에 비례한다는 점이다. 에리쿠르께서는 애시당초 메이저 레이블 같은 곳은 생각하지도 않았고, 황송하게도 듣보 레이블인 kapp record에서 이 보석같은 연주들을 녹음하셨다했다(그래서 이 연주는 60년대 초에 녹음했음에도 모노랄이다). 그 덕에 kapp record는 역사에 이름을 남기게 되었다 Ivory classics에서 에리쿠르 탄생 100주년 기념 한정판으로 CD 전곡반을 냈다(아이보리 본사에서는 아직도 음반을 팔고 있다. 어서 주문하시오.) 이외에도 낙소스 아카이브에서 전주곡집만 뽑아서 음원을 냈고, 드뷔시 유니버셜 에디션에 소품 몇 곡 정도가 들어가 있다. 현재 CD를 구할 수 있는 유일한 주문처는 아이보리 본사 뿐이다(아마존 중고매장에서는 이 음반 초반을 185달러에 판다......). 그야말로 기가 막힌 연주에 범상치 않은 입수 난이도를 자랑하고 있다. 나는 우연찮게도 이 음반을 중고매장에 내놓으신 누군가(그 분께 절이라도 드리고 싶다)와 재고를 알려주신 '누군가'의 도움 덕택에 지금 집에서 이 음반을 잘 듣고 있다(누구신지는 몰라도 정말 감사합니다).

 

 정말 내가 이렇게 자신있게, 아니 간절하게 추천하는 음반이 다시 나올지 의문이다. 보이면 당장 사라. 낙소스 아카이브건 유투브건 보이면 무조건 들어봐라. 듣고 싶으신 분들은 내가 립을 떠서라도 보내드릴 테니 제발 들어라. 그리고 이거 안 듣고서 어디 가서 드뷔시 듣는다고 얘기하지 마라.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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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여엉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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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반을 사면서 생각하던 것이, 단일 곡의 연주가 10종이 넘으면 그 연주들을 비교감상하고 그 결과를 글로 남기겠다는 것이었다. 음반을 워낙 중구난방식으로 사기 때문에 단일 곡이 10종이 넘는 경우는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는데, 이번에 알베르 페르버 드뷔시를 사면서 드뷔시 전주곡 1집이 9.99종10종이 되었기 때문에 비교감상을 시작하게 되었다.

 (전곡 연주가 10종이 아니라 각 곡당 연주가 10종이라는 것은 함정. 두 종의 발췌 연주가 각각 10곡 발췌, 4곡 발췌인데 희한하게 각 곡 당 연주를 세어보면 10종이 된다)

 

 스테인드글라스의 색채를 연상시키는 다채로운 음색의 소유자 발터 기제킹의 드뷔시 연주는 언제나 정평이 나있고 높은 평가를 받아왔다. 음색 계발에 있어서는 코르토, 오보린과 버금간다고 할 수 있는 그의 드뷔시는 선명하고 명쾌하면서도 이런 연주들이 흔히 빠지기 쉬운 딱딱함이나 매너리즘이 없다. 그는 자신의 음색을 최대한으로 선보이기 위해 페달(특히 왼페달)을 절제하고 터치와 핑거링에 심혈을 기울인다. 이해가 가지 않는다면 스테레오 시대 드뷔시 연주를 무작위로 하나 뽑아서 기제킹과 비교해보라. 기제킹에 비해 후대의 연주자들이 얼마나 페달 떡칠이라고 해도 될 만큼 페달을 남용하는지 알게 될 것이다.

 기제킹의 해석은 항상 본질에 충실하다. 2곡 <돛>의 클라이맥스에서 기제킹은 악구가 살짝 엉킬 정도로 성급한 연주를 들려주는데, 실제로 그 부분의 지시어는 Rapide(빠르게)이다. 후대의 연주에서 템포의 왜곡이 가해지는 1곡 <델피의 무희들>이나 10곡 <가라앉은 성당>에서 기제킹은 템포 왜곡 없이 정면승부를 고집하고 보기좋게 성공하는 것을 들을 수 있다. 자신의 해석에 자신이 있었던 기제킹은 어떤 음악학자가 <가라앉은 성당>의 연주가 드뷔시의 피아노 롤 연주와 다르다는 것을 지적하자 "내가 맞고 드뷔시가 틀렸다"고 주장한 것은 물론, 제자들에게 교육을 할 때도 "드뷔시가 이 부분을 잘못 연주했다"고 지적하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

 기제킹의 전주곡 연주는 여러 종이 있지만 가장 뛰어난 것으로는 30년대의 것을 추천하고 싶다. 50년대는 환갑이 다 된 기제킹이 치는 연주라 해석이 점점 굳어간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점은 월터 레그의 개념없는 레코딩으로, 50년대 초 EMI의 음향 장비가 얼마나 막장이었는지를 단적으로 알 수 있는 지표이기도 하다. 솔직히 말해서 50년대 연주는 음질을 포함한 모든 면에서 30년대 연주에 비해 뒤진다. 5번 <아나카프리의 언덕> 마지막 고음부 소리를 난도질해놓은 녹음을 듣고 있자면 어처구니가 없다(50년대 녹음을 SACD로 사 들었는 데도 이 모양. 다른 음반들은 얼마나 막장이기에......).

 

 50년대를 풍미한 스위스 피아니스트 알베르 페르버의 드뷔시의 가장 큰 장점은 '물 흐르는 듯한 자연스러움'이다. 그러면서도 모노 시대 피아니스트들의 특징인 '고유의 음색'은 어느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기제킹이 강렬한 원색의 대비를 추구하고, 에리쿠르가 일렁이는 안개와 섞여 점묘법처럼 유동하는 음색을 추구한다면 페르버의 음색은 고요하면서도 단단하다. 성향은 많이 다르지만 에트빈 피셔의 소리와 비슷하다고 해야 할까. 

 페르버의 드뷔시는 템포 측면에서 서두르는 법이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늦거나 뒤처진다는 느낌은 전혀 주지 않는다. 어떻게 하면 최대한 느긋하게 몸을 움직이면서도 원하는 순간에 정확한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는가를 줄곧 생각하는 사람 같다. 보통 내공이 아니다. 목소리를 크게 높이는 법도 없이 조곤조곤히 이야기하지만 그의 음반을 플레이어에 건 청자는 자기도 모르게 그의 연주에 집중하게 된다. 그의 음색에는 차분히 집중하고 경청하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 그렇다고 해서 심지가 약한 연주는 아니다. 자기 목소리를 분명히 내야 할 부분에서는 분명하게 소리를 내고 있다. 그 예가 6번 <눈 위의 발자국>. 6번에서 그의 연주는 압도적인 존재감을 발산하지는 않지만 아주 단호하다. 페르버는 자신의 연주를 통해 중용, 중도의 매력을 설파하고 있는 것 같다. 템포가 평균치라고 중용, 중도가 아니다 그런 연주는 대개 이도 저도 아닌 연주이기가 쉽다

 한 마디 덧붙이자면, 페르버가 사용한 피아노는 스타인웨이다. 폴리니도 스타인웨이다 비교체험 극과 극

 

 필립스 듀오 시리즈로 나온 연주들은 몇몇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무난하거나 수준 이하의 연주를 들려주며, 기제킹의 제자 베르너 하스의 60년대 연주도 이 법칙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연주는 한 마디로 '기제킹의 마이너 카피'라는 말이 딱 어울린다. 하스는 스테레오라는 엄청난 강점도 제대로 살리지 못하며, 해석은 기제킹의 노선을 따라가지만 결과물은 기제킹만 못하다. 다이내믹 처리도 대충, f와 p 구분도 대충 하다 보니 물에 물탄듯 술에 술탄듯한 연주가 나온다. 특히 페달의 사용에서 기제킹과 가장 다른 점은, 기제킹이 페달의 사용과 관계없이 특유의 음색을 100% 발휘한다면, 하스는 페달을 사용할 때 소리가 판이하게 달라진다. 그만큼 음색 계발에 무성의했다는 얘기가 된다. 루바토의 사용이 중요한 4번 <소리와 향기는 저녁 대기 속을 떠돌고>는 무뚝뚝하기 짝이 없으며, 5번 <아나카프리의 언덕>의 변덕스러움은 실종된 상태다. 폴리니같은 개막장까지는 아니지만 참 재미없는 연주다.

 

 프랑수아의 연주는 68년의 전곡 레코딩과 61년의 발췌 연주가 있고 둘 다 스튜디오 레코딩이다. 그 외에도 숱한 실황 연주를 남겼지만 일단 가지고 있는 이 두 가지의 연주로 평가를 하도록 하겠다.

 프랑수아의 드뷔시는 '의외로' 왜곡이 거의 없다. 리스트-디에메-코르토로 이어지는 프랑스 피아니즘의 적통을 승계한 마지막 피아니스트답게 프랑수아는 피아노 음악을 터치와 루바토의 예술로 받아들이고 그에 충실한 도취적인 연주들을 남겼다. 하지만 프랑수아는 적어도 '드뷔시에서만큼은' 지나친 루바토가 없어야 한다는 사실을 직관적으로 깨달은 것 같다. 그 덕분인지 61년의 발췌 연주는 아주 마음에 들었다. '신선함 그 자체'라고 평가할 수 있겠다.

 68년의 전곡 연주는 조금 더 변덕스럽지만 절제하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 술 한 잔 걸치고 치는지 악구를 잘못 기억하거나 지나치게 연주에 몰입해 음표를 잘못 누르는(참고로 이 연주 스튜디오 레코딩이다) 경우가 왕왕 보이지만 해석에 있어서 막 나가는 경우는 거의 없다. 무엇보다 두드러지는 것은 페달링의 절제인데, 순수한 터치와 간을 하듯 적당한 루바토의 사용만으로도 포커스를 준 것 마냥 진하게 흐려지는 특유의 음색을 만들어내는 것을 보면 참 신기하다. 특히 4번 <소리와 향기는 저녁 대기 속을 떠돌고>는 정말 유니크한 연주인데 Rubato라는 지시가 붙은 7음 하행 아르페지오 악구를 프랑수아가 어떻게 처리하는지 한 번 들어보라. 진짜 루바토는 이렇게 쳐야 한다고 말하는 것 같다. 5번 <아나카프리의 언덕>을 시작하는 5음음계는 오로지 피아니스트의 음색만 가지고 처리해야 하는 악구인데 프랑수아는 정말 근사한 음색을 들려준다. 리스트 스타일의 7번 <서풍이 본 것>과 기타 속주를 연상케하는 9번 <끊어진 세레나데> 에서 프랑수아는 본인의 똘끼를 억누르지 못하고 분출을 시도하는데, 사실 그렇게 심하지는 않을뿐더러 두 곡 모두 스타일이 그런 해석을 용납하는 곡이라 이해가 간다. 사실 프랑수아의 해석과 제일 엇나가는 곡은 마지막 곡 <민스트렐>. 직접 들어보면 안다(애초에 이 곡은 리듬이 기계적이어야 하는데 프랑수아가 그렇게 칠 리가 없잖아?).

 

 프로코피예프와 스트라빈스키에서 좋은 연주를 들려주던 베로프는 전주곡에서도 재미있는 연주를 들려주고 있다. 생동감 있는 해석, 포인트를 정확히 짚어내는 터치, 좋은 음질로 다른 사람에게 추천하기도 좋은 연주다. 곡마다 본인의 독특한 해석을 첨가하지만 또라이짓은 하지 않는다. 질질 끄는 부분 없이 소리를 잘 만진다는 점도 플러스 요인이다. 플레옐 피아노를 고집하는 베로프의 음색은 프로코피예프에서 들려줬던 신선함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분 최소 프랑스 사람 소리는 들을만하다. 적어도 무늬만 프랑스 사람인 로제나 티보데보다는 훨씬 낫다(둘 다 되도 않는 자기 소리 들려주겠다고 곡을 질질 끌면서 듣는 사람 인내심만 자극하는 연주만 하다가 끝난다). 특이한 점을 찾자면 5곡 <아나카프리의 언덕>. Tres modere로 지정된 첫 5음음계의 템포를 무척 빠르게 가져가며, 첫 f를 ff처럼 연주한다는 것이 여타의 피아니스트들과 다르다. 

 다만 이 연주가 최고냐? 라는 질문에는 선뜻 대답을 하기가 힘들다. 분명히 잘 하는 연주이며 정말 재미있는 연주지만...... 딱 거기까지가 베로프의 한계인 것 같다. 젊은 열정으로 곡을 밀고 나가는 것이 단점은 아니지만, 이 곡에 필요한 기품은 그에 반비례하여 줄어든다는 점은 아쉽다. 지나치게 촐싹댄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10곡 <가라앉은 성당> 초반에 소극적인 연주를 들려주는 것은 분명한 결점이다. 드뷔시가 요구하는 것은 섬세함이지 소극적인 연주가 아니다. 음량이 베로프와 비슷한 루비모프는 베로프보다 훨씬 또렷하고 선명하게 들린다.

 참고로 이 전주곡을 녹음할 때 베로프의 나이는 20세였다.

 

 70년대 이후 모든 드뷔시 연주에 지속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는 미켈란젤리의 연주는 DG의 78년 스튜디오 레코딩과 82년 BBC 실황연주 두 가지를 가지고 있는데, 두 가지 연주의 해석은 크게 차이가 없으므로 같이 묶어서 설명하도록 하겠다. 

 미켈란젤리는 몇몇 예외를 제외하면 고도로 통제된 스튜디오 레코딩에서 자신의 크리스탈같은 음색을 만들어낸 피아니스트로, 그만큼 새장 속의 새처럼 완벽하게 통제된 환경에서만 제 역량을 100% 이상으로 발휘할 수 있었던 피아니스트였다. 대표적인 경우로 나는 71년의 <영상>을 꼽고 싶은데, 특히 1집의 첫 곡 <물에 비친 그림자>를 시작하는 5도는 밑바닥에서부터 천천히 퍼져나가는 일렁임을 소름끼칠 정도로 잘 표현했다. 하지만 78년의 전주곡 녹음은 71년 <영상>의 녹음에서 들려주었던 그 초월적인 음색이 거의 다 날아가버렸다(82년 실황도 마찬가지). 사실 이 정도도 나쁘지는 않지만 <영상>에 비하면 평범하게 들리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미켈란젤리의 해석을 두고 누가 '작곡가는 싫어하지만, 청자는 만족하는 해석'이라는 평을 내렸는데, 나는 거기에 절반만 동의한다. 1번 <델피의 무희들>에서 미켈란젤리는 첫 악구와 두 번째 악구(4마디 가운데 부분이 두 악구의 분기점이다)의 템포를 다르게 잡는데, 악보에는 템포 변경에 관한 지시가 없을뿐더러 caesura(악구를 구분하기 위한 지시기호. // 로 표기한다)나 페르마타 기호도 없다. 이런 해석은 10번 <가라앉은 성당>에서도 나타나는데, 22마디, 물에서 떠오른 성당이 햇빛을 받아 찬란한 색채감을 발산하며 반짝이는 부분에서 미켈란젤리는 돌연 속도를 빠르게 가져간다(프랑수아도 이렇게 연주한다). 그러나 악보에는 역시 아무 것도 없다. 참고로 악보를 그대로 연주한 사람은 기제킹을 포함해 몇 되지 않는다. 그래도 악보에 적힌 섬세한 뉘앙스만으로도 충분히 커버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든다.

 미켈란젤리가 후대의 연주에 끼친 가장 큰 악영향은 바로 템포와 리듬으로, 본인의 음색을 자랑하고자 모든 연주의 템포를 느리게 잡고 연주를 했다. 그 옹고집은 모든 곡에서 변함이 없어서 울렁거리는 느낌을 만들어내야 하는 2번 <돛>이나 타란텔라 리듬의 생동감을 위해 '반드시' 템포를 빠르게 가져가야 하는 5번 <아나카프리의 언덕>도 느려터진 연주로 일관한다. 템포만 느리면 모르겠지만 리듬도 덩달아서 딱딱해져 버렸으니 들으면서 답답함이 느껴질 정도다. 그리고 이 결정은 후대에 심각한 악영향을 끼치게 된다. 미켈란젤리는 개성적인 음색으로 느려진 템포와 왜곡을 어느 정도 커버할 수 있다지만, 역량이 그에 못 미치는 후대 피아니스트들이 미켈란젤리의 해석을 거의 맹목적으로 따라간다는 것이 비극의 단초를 제공한다. 80년대 이후 드뷔시 연주들은 불어터진 라면 면발같은 연주들로 빼곡히 채워지기에 이르며, 기름덩어리가 덕지덕지 붙은 지메르만의 연주에서 정점을 찍은 후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드뷔시가 생동감과 신선함을 추구하고 템포의 왜곡을 어느 누구보다 끔찍히 싫어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지하에서 통곡할 일이다.

 

 피아니스트로서의 리히테르를 높이 평가하고 영감으로 가득한 그의 도전적인 해석을 존경하는 본인이지만 그의 드뷔시 해석만큼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 유명한 헝가리의 리히테르 시리즈에 들어있는 85년의 전주곡 연주는 아집과 독선으로 레퍼토리를 말아먹는 위대한 연주자의 안타까운 모습을 감상할 수 있는데, 모든 곡이 여타 연주에 비해 1분씩 느려져 원래 템포에서 느낄 수 있는 특유의 긴장감이 싹 다 날아가버린다. 음색? 리히테르의 무채색 음색은 팔레트의 색채감을 요구하는 드뷔시와는 상극이다. 리히테르는 자신의 특이한 해석과 강려크한 타건으로 그 단점들을 벌충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 모르지만 악구가 뚝뚝 끊어질 정도로 템포가 느린데 논리적인 전개와 집중성이 남아날 리가 없고 곳곳에서 출몰하는 뜬금없는 해석(9번 <끊어진 세레나데>의 첫 스타카토는 테누토인줄 알았다)은 실소를 자아낸다. 그나마 11번 <푸크의 춤>이 가장 낫다. 개성적인 해석이라는 데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었지만 좋은 드뷔시 연주라는 평가는 빈말이라도 해주기가 힘들다.

 

 단테의 <신곡>이 <지옥편>이 가장 높은 평가를 받고 <천국편>이 가장 낮은 평가를 받는다는 점을 생각하면 음반에 대해 말할 때도 나쁜 연주를 평하는 것은 쉽고 좋은 연주를 평하는 것은 어렵다는 결론이 나와야 하는데 이 연주는 그런 견해에 대한 반론이 될 수 있겠다. 폴리니의 98년 DG 연주는 가히 내가 들은 최악의 드뷔시 전주곡 1집의 연주이며 이런 연주는 두 번 다시 나와서는 안 되겠지만 나는 도저히 이 연주를 정확히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는다. 그러니 일단 두서없이 설명해보도록 하겠다.

 개성없는 음색으로 타고난 기교에 의존해 먹고 살아가던 폴리니는 <페트루슈카>, 프피소 7번(솔직히 두 곡 모두 바이센과 리히테르한테 떡실신 당하는데 왜 높은 평가를 받는지 이해가 안 된다)과 쇼팽 연습곡(그냥 아쉬케나지 사라. 그게 훨씬 낫다)이 연이어 폭발적인 인기를 얻으면서 DG의 간판 피아니스트로 자리매김했고 그 덕에 지금까지 죽지도 않고 음반이나 내시면서 연명하고 계신다(그래서 틸레만과......?). 그러나 냉정히 평가할 때 폴리니는 20세기 후반을 상징하는 '몰개성'의 아이콘이며 기교가 떨어지기 시작하는 80년대부터 자신의 떨어지는 기교를 페달링으로 만회하려는 수작이나 부리다가 이 드뷔시를 녹음해야 하는 98년에 와서는 아예 곡의 모든 부분에 페달을 떡칠하는 만행을 저지르기에 이른다. 창백하기 짝이 없는 스타인웨이 특유의 음색에(폴리니의 음색이 아니다. 분명히 말하지만 폴리니는 음색이 '없다') 쉬지도 않고 지속적으로 눌러대는 왼페달 덕에 음향은 다 섞여서 지저분하기 짝이 없고 그나마 거의 유일한 장점이던 깔끔한 터치는 집 나가신 지 오래. 이러한 망조의 삼위일체가 모였으니 어떤 연주가 나올지는 안 봐도 비디오 아닌가? 솔직히 위에 있는 연주들 중 호평은 많지 않지만 그래도 위에 있는 모든 연주들이 폴리니보다는 낫다. 포장 뜯고 딱 한 번 들은 후 바로 봉인했지만 이 글은 써야 하기에 다시 꺼내들었고 그 결과 이런 글이 나오고 있다. 솔직한 총평은 '왜 전주곡 2집을 녹음 안 했는지 알겠다'.

 

 미켈란젤리 이후로 드뷔시 전주곡의 해석은 거의 획일화가 완료되었고 새로운 해석이 등장할 가능성은 요원해보인다. 당대 피아노를 들고 나온 쁠라네, 역량도 안 되는 주제에 명함만 거창한 파스칼 로제, 자기 주력 레퍼토리인 Contemporary Music을 제외하면 항상 덜 떨어지는 연주만 들려주는 에마르를 비롯한 몇몇이 음반을 찍었지만 모두 기준 미달이었고 실망만 안겨주었다.

 알렉세이 루비모프의 ECM 연주를 기제킹, 에리쿠르, 굴다와 비교하는 것은 힘들다. 루비모프는 기제킹의 화려한 색채감이나 에리쿠르의 몽환적인 음색, 굴다의 명쾌함을 가지고 있지 않다. 대신 루비모프는 기존의 연주들과 확연한 차이점을 두는 것으로 기대 이상의 대성공을 거두었고 드뷔시 해석의 새로운 활로를 열었다.

 드뷔시는 전주곡에 편집증적일 정도로 섬세한 다이내믹을 부여했다. 10곡 <가라앉은 성당>의 42마디에서 46마디에 작곡가는 p - piu p - pp - piu pp 라는 거지같은 다이내믹을 지정했는데 이를 실제 연주에서 듣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 뿐 아니라 전주곡에서는 ppp가 심심치 않게 등장하며, 7곡 <서풍이 본 것>의 종지는 f < ff > f < sff sec라는 괴랄한 다이내믹을 보여주신다. 대부분의 연주들은 이 다이내믹의 완벽한 재현을 포기하고 대신 음색이나 해석에 심혈을 기울였다. 루비모프는 이 미지의 영역을 개척해 나갔고 멋진 성과를 거두었다.

 루비모프는 전주곡의 이 기상천외한 다이내믹을 놀랍도록 선명하게 재현한다. 누군가 이 연주를 놓고 'ppp와 pp를 구분할 수 있는 연주'라고 했는데, 이 말이야말로 이 연주를 한 마디로 압축한 평이 아닐 수 없다. 특히 루비모프 연주의 이런 강점이 가장 두드러지는 부분은 6번 <눈 위의 발자국>의 종지 부분과 10번 <가라앉은 성당>의 도입부. 정말 음향기기로 피아노의 음량을 조절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섬세한 다이내믹 구분을 들려주고 있다.

 내가 앞에서 쁠라네 얘기를 했는데, 루비모프도 1925년 베흐스타인 피아노를 들고 와서 드뷔시를 연주하고 있다. 하지만 루비모프는 드뷔시 당대의 피아노와 현대 피아노 음색은 별 차이가 없다는 말을 했으며, 피아노는 단지 '그 시대의 분위기를 떠올리게 하기 위한 도구'라는 취지의 말을 남겼다. 실제로 피아노를 제외하면 그의 연주에서 드뷔시의 시대를 생각나게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오히려 이 연주는 템포나 아고긱의 측면에서 '현대'를 자처하는 연주들보다 더 현대적이다. 기존의 연주들을 섬세하게 심사숙고한 후 자신의 취지에 맞는 것들을 골라냈다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하겠지만.

 

 

 에리쿠르와 굴다는 아직 구매하지 않아 감상평을 쓰지 않았다. 듣자마자 반한 연주들이고 언젠가는 꼭 사야겠다고 마음먹고 있으니 머지 않아 감상평을 쓰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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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든에 대한 단상

음악 2014. 5. 31. 23:51

 하이든의 천재성(스비아토슬라프 리히테르가 이에 대해 자주 지적하고는 했다)에 대해 우리가 자주 간과하는 이유는 많다. 그 중 가장 큰 이유는 그가 만들어낸 독창적인 음악 언어가 이미 우리의 기본적인 음악 언어로 편입되었다는 데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고, 두 번째는 그가 예술성과 대중성을 모두 겸비한 얼마 되지 않는 위대한 음악가라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첫 번째 이유 때문에 하이든은 '18세기 고전 형식을 만든 작곡가'라는 형식적이고 교과서적이며 바지사장의 냄새가 나는 자리에 앉아 있을 뿐이며, 두 번째 이유는 더 심각한 악영향을 끼쳐 거대하고 심각하고 장엄하고 권위적이며 압도적인 음악을 즐겨 찾는 이들이 그가 하찮은 작곡가(실제로 그는 전혀 하찮은 작곡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라는 편견을 가지도록 만드는 동시에 그를 '고전음악을 처음 들을 때나 거쳐가는 관문' 정도로 하대하도록 만들고 있다. 그런 편견과 몰이해, 그리고 하대는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우선 두 번째 이유에서 발생한 오해부터 뒤집어 보자. 하이든은 대중성과 예술성을 모두 추구한 작곡가가 맞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고전음악을 처음 듣는 초심자부터 고전음악에 능통한 전문가까지 모두들 그의 음악이 뛰어나다는 점을 인지할 수 있다. 그의 주제들은 귀에 익숙해지기 쉬운 만큼 정교한 솜씨로 재단이 이루어져 음악학자들도 그 경이적인 재단 솜씨와 위트에 놀라고는 한다. 특히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끼워 넣는 재치는 그의 트레이드마크였다. 86번 교향곡 마지막 악장에서 드러나는 기가 막힌 전조, 마지막 교향곡 <런던>의 마지막 악장에서 보여주는 고도의 대위법적 기교(첫 악장의 주제를 역행으로 뒤집어 사용하고 있다. 이런 작곡 방식은 버르토크도 사용한 바가 있다), 화성적 전개와는 전혀 상관 없는 C♭음을 전면에 돌출시키는, 감상자의 뒤통수를 후려치는 99번 교향곡 첫 악장(베토벤이 나중에 이런 방법을 자신의 교향곡 8번 마지막 악장에 적용한다), 하나의 주제를 놓고 형태를 계속 바꾸어가며 마치 주제가 주제의 꼬리를 무는 것 마냥 다음 변화를 기대하게 만드는 88번 교향곡 첫 악장 등...... 유명한 교향곡들만 대충 살펴봐도 이 정도다. 그는 독특한 리듬, 기괴한 화성, 심각하고 무거운 정서를 삽입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위대한 음악을 만들 수 있었다. 그런 개방성과 유연함이 오히려 지금에 와서는 마이너스 요인이 되고 있다는 점은 참으로 이상하다.

 이제 첫 번째 이유에서 발생한 오해에 대한 반론도 제기해야 할 것이다. 하이든의 형식이 18세기 고전 음악과 이후의 음악에 대한 기본적인 음악 언어가 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그의 음악 언어가 보편적인 음악 언어라는 가장 확실한 증거일 것이다. 보편적인 언어는 무엇보다 기본 형태가 쉽고 단순하지만 수많은 형식으로 변화가 가능할 만큼 유연하고 창조적이어야 한다. 하이든의 음악 언어, 특히 소나타 형식은 이 조건을 훌륭하게 만족시키고 있다. 고무찱흙처럼 다른 모양으로 변형이 가능한 단순하고 작은 형태의 주제, 주요부와의 정서 대비를 주는 서주, 발전부를 배제한 소나타 형식을 주로 사용하는 느린 악장, 긴장을 풀고 편안함을 유도하지만 톡톡 튀는 구석이 꼭 한 군데씩은 숨어 있는 미뉴엣, 그리고 듣기만 해도 시원스러운 마지막 악장들. 이 형식은 교향곡과 현악4중주뿐 아니라, 피아노 소나타와 3중주, 협주곡을 포함한 거의 모든 기악곡 양식에 도입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만큼 그 기본 양식은 비록 수많은 작곡가들이 각자 자신의 방식으로 그 양식을 도입하고 적용하면서 모습이 바뀌어 갔지만 어쨌거나 몇 가지 기본 틀만은 절대 변하지 않았다. 이렇게 신축성과 내구성이 좋은 형식을 오래도록 구축하는 것이 성공했기 때문에 프로코피예프가 하이든을 그토록 좋아했는지도 모른다(그는 체레프닌 클래스에 머무르던 시절, 하이든의 음악을 연구한 성과를 바탕으로 자신의 교향곡 1번을 작곡했다).

 하이든의 음악은 단순하고 간결하고 명쾌한 만큼 위대하다. 그의 악보 위에는 꼭 필요한 구성 요소들만 놓여 있기 때문에, 도무지 그의 음악에서 음표 하나를 더하거나 뺀다는 것을 생각할 수 없다. 리게티도 하이든 음악의 그러한 특징을 통찰했는지는 몰라도, 자신의 음악에서 덜어내야 할 부분을 고심할 때마다 옆에 하이든의 음악을 놓고 그 단순성과 간결성을 참고했다고 하지 않은가. 

 

 "이 위대한 천재는 단 하나의 주제를 풍부한 변화로 발전시켜 끌어나갈 수 있다. 그렇기에 한 악상에서 다른 악상으로 계속해서 옮겨 다니는 창작력 빈곤한 여느 작곡가들과는 진정 다르다."

 - 1787년. 6개의 <파리> 교향곡을 들은 한 평론가가 기록한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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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의 카탈로그> (Catalogue d'oiseaux) 4권 (4e Libre)

7악장 <개개비> (7.La Rousserolle effarvatte (Acrocephalus scirpaceus))

(27시간 동안의 풍광을 30분에 걸쳐 묘사하는 4권 7악장 <개개비>. <새의 카탈로그>를 통틀어 단일 악장 중에서는 가장 긴 악장으로, 무려 752마디에 달하는 대곡이다. 주로 사용하는 선법은 4선법으로, 음계는 C-D♭-D-F-F#-G-A♭-B-C이며, 4음을 옮겼다. 곡의 배경이 되는 지역은 오를레앙 남쪽, 루아르 에셰르 지역에 있는 솔로뉴의 호수다. 사실적인 묘사가 두드러지며, 저속 카메라로 촬영한 다큐멘터리 같은 느낌을 준다. 그러나 작곡가의 저속 카메라는 영상에 비치는 것 이상의 묘사를 해낸다. 특히 그런 장점이 가장 잘 드러나는 장면은 일출과 일몰 장면인데, 조옮김이 제한된 선법을 총동원해 온갖 선명한 색채로 음의 화폭을 휘감는다. 또한 디기탈리스와 수련을 묘사하는 부분에서는 <투랑갈릴라 교향곡>에서 사용했던 꽃의 테마를 재활용하고 있다. 주연(…)인 개개비와 해오라기를 비롯해 총 19종의 새가 등장한다.)

* 아래의 글은 곡의 진행 과정에 대한 메시앙 자신의 설명이다.

AM 0 (자정의 호수에 대한 긴 묘사 - 개구리 떼의 굉음 - 해오라기)

(늦은 밤 드넓게 펼쳐진 차가운 호수 위로 해오라기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진다.)

AM 3 (개개비의 긴 독주 - 밤의 장엄 - 늪지의 곤충소리 - 밤의 장엄 - 짙게 깔리는 늪지의 잡음 - 외딴 개구리 - 늪지의 곤충소리(글리산도) - 외딴 개구리 - 밤의 장엄)

(호숫가 갈대 줄기들 사이에 숨은 개개비가 길게 독주를 시작한다. 개개비의 순수하고 맑은 음색이 잦아들면 곤충의 울음소리를 비롯한 다양한 소리들이 퍼져 나와 호수를 한바탕 뒤흔들어 놓는다. 곧 정적이 뒤를 잇는다.)

AM 6 ((일출) 장밋빛, 담자색, 오렌지 빛으로 점차 변화하는 호수 - 검은티티새와 붉은등때까지의 대위법 - 변화하는 호수 - 검은티티새와 붉은등때까치의 대위법 - 변화하는 호수 - 상딱새 - 변화하는 호수 - 검은티티새 - 변화하는 호수 - 검은티티새와 붉은등때까지의 대위법 - 변화하는 호수 - 검은티티새와 붉은등때까지의 대위법)

(해가 떠오른다. 호수의 색은 장밋빛에서 담자색, 오렌지색으로 서서히 변화한다. 검은티티새 한 마리와 붉은등때까치 한 마리가 함께 노래한다. 상딱새도 아침햇살 속에서 노래에 가세한다.)

AM 8 (노란 붓꽃 - 꿩 - 검은머리쑥새 - 청딱따구리 - 검은머리쑥새 - 찌르레기 - 꿩 - 박새 - 청딱따구리 - 검은턱할미새 - 노란 붓꽃)

(만개한 붓꽃들을 배경으로 꿩, 검은머리쑥새, 청딱다구리가 모습을 드러내어 지저귄다. 찌르레기, 박새, 할미새도 가세한다.)

PM 0 (메뚜기개개비)

(메뚜기개개비의 긴 트릴.)

PM 5 (개개비 - 사초솔새 - 자줏빛 디기탈리스꽃 - 개개비 - 사초솔새 - 자줏빛 디기탈리스꽃 - 큰개개비 - 사초솔새 - 개개비 - 외딴 개구리 - 붉은부리갈매기 - 물닭 - 수련 - 개개비 두 마리의 긴 대위법 - 사초솔새 - 개개비 두 마리의 대위법 - 개개비 - 사초솔새 - 개개비 두 마리의 대위법)

(개개비가 다시 등장한다. 개개비의 울음소리는 사초솔새의 트릴, 트레몰로와 섞인다. 큰개개비도 호수의 수련, 디기탈리스꽃들을 배경으로 노래를 시작한다. 붉은부리갈매기의 소리가 늦은 오후의 평화를 더할 무렵, 물닭 한 마리가 꼬꼬 울음 소리를 토해낸다. 물닭이 사라지면 개개비 두 마리의 이중창이 길게 이어진다.)

PM 6 (노란 붓꽃 - 메뚜기개개비 - 물닭 - 종달새 - 개구리 떼의 굉음 - 종달새 - 종달새에 대한 개구리 떼의 응창 - 흰눈썹뜸부기)

(노란 붓꽃 위에서 메뚜기개개비가 다시 한 번 높은 음력의 트릴을 선보인다. 종달새도 하늘 높이 솟아올라 지저귀며, 호수 속 개구리들이 이에 응창한다. 우렁찬 개구리 울음이 잦아들 무렵,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흰눈썹뜸부기가 호수 위로 퍼덕거리며 날아올라 울음을 토하다 저무는 서쪽으로 사라진다.)

PM 9 ((일몰) 붉은 빛, 오렌지 빛, 바이올렛 빛으로 점차 변화하는 호수 - 해오라기 - 변화하는 호수 - 해오라기 - 변화하는 호수 - 해오라기 - 잠자는 태양 - 나이팅게일 - 바이올렛 빛 어둠 속 일몰에의 회상)

(호수는 다시 붉은 빛, 오렌지 빛, 바이올렛 빛으로 점차 가라앉는다. 낙조가 완전히 꺼지고 저녁이 찾아오면 다시 해오라기가 길게 목을 뽑아 호수 전체가 울릴 정도로 거대한 울음소리를 토해낸다. 바이올렛 빛 저녁 속에서 별들이 하나씩 뜨기 시작한다.)

AM 0 (밤의 장엄 - 나이팅게일 - 밤의 장엄 - 나이팅게일 - 해오라기 - 나이팅게일 - 짙게 깔리는 늪지의 잡음 - 늪지의 곤충소리 - 일몰에의 회상 - 외딴 개구리 - 밤의 장엄)

(호수의 고요함 속에서 나이팅게일의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울음소리는 점점 날카롭고 세차게 변한다. 이에 반응해 인근 늪의 곤충과 개구리 떼의 소리가 다시 한 번 호수를 흔들어 놓는다.)

AM 3 (개개비의 긴 독주 - 개구리 떼의 굉음 - 새벽의 호수에 대한 긴 묘사 - 해오라기)

(서늘한 새벽의 호수는 안개를 피워 올린다. 개개비와 개구리 떼의 울음소리, 해오라기의 독주로 끝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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첼로 소나타 (Cello Sonata in D minor, L.135)

작곡 시기 : 1915년 완성

(왜 작곡가는 만년에 프랑스 고전 형식에 관심을 보였던 것일까? 그것은 전쟁과 관련이 있는가? 그는 왜 곡에 ‘프랑스 작곡가 끌로드 드뷔시’라고 서명했는가? 정치적인 경향과는 별개로, 전쟁은 드뷔시에게 지금까지 추구하던 음악에서 벗어나 프랑스의 고전에 눈뜨게 만들어준다. 그 고전은 륄리에게서 태동해 샤르팡티에를 거쳐 라모와 쿠프랭에게서 활짝 꽃을 피운, 위대한 프랑스(Le grand France)의 시대였다. 프랑스 바로크와 전기 고전파 시대에 유행하던 악장 구성, 느린 악장-빠른 악장-빠른 악장의 구도를 채택한 것만 보아도 그가 이 소나타를 통해 추구한 이상이 이 시대임을 짐작할 수 있다. 첫 악장인 프롤로그가 가장 짧으며, 2악장과 3악장은 연이어 연주하도록 지시하고 있다.)

1악장 (1.Prologue. Lent, sostenuto e molto risoluto 4/4)

(51마디) (소나타 형식의 외피를 입었다고는 하지만 일반적인 소나타 형식과는 거리가 멀다. 1주제와 2주제를 잇는 연결구는 없으며, 1주제와 2주제도 모두 같은 조성(D단조)을 채택하고 있다.

피아노의 3마디 주제 제시에 이어 첼로가 등장하는데, 피아노가 좁은 음역 내에서 순차진행하는 것과는 반대로 첼로는 자유분방하고 폭넓은 도약 진행을 하고 있어 두 악기의 특성을 강하게 대비시키고 있다. 드뷔시는 두 악기가 연주하는 주선율에 약간의 변화를 주기는 했지만, D, B♭, G음이라는 공통음을 부여해 두 선율의 연관성을 강하게 인식시킨다. 화성적인 면에서 드뷔시는 선율에 에올리안 선법을 적용해 색채감을 깊게 부여하고 있지만, 대체적으로 전통적인 화성법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2주제의 음형은 곡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데, 이 주제에서도 화성은 거의 변함이 없다. 이탈리아 6도의 사용과 화음의 병진행을 제외하면 줄곧 D단조에 머무르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첼로의 8~9마디 리듬인데, 8마디의 리듬을 역행으로 9마디에 이용하고 있어 완벽한 대칭을 이룬다. 이 아이디어는 메시앙의 ‘역행 불가능한 리듬’과 매우 흡사하다. 선율은 13마디의 온음음계를 거쳐 잠시 F장조에 머무르며 장조 선법의 밝은 색채감을 한껏 드러낸다. 하지만 다음 마디에서는 다시 D단조가 기다리고 있고, D단조의 7음(C#)을 강조하면서 해결의 기미를 보이지 않은 채 그대로 넘어간다. 그 다음에 기다리고 있는 것은 5도 병진행과 장/단 화음의 교체로 이루어지는 3화음의 병진행이며, V-IV-I로 2주제를 마무리짓는다.

발전부는 템포의 변화에 걸맞게 점점 역동적인 변화를 보이고 있으며, 2주제 첼로의 B♭-C-D-E 온음계 음형을 활용하고 있다. 작곡가는 여기에 간간이 C음 대신 C#음을 섞어 선법적인 색채감을 살리는 것도 잊지 않는다. 발전부의 첫 다섯 마디는 첼로의 주도로 곡을 진행하지만, 그 이후에는 첼로의 오스티나토와 피아노의 32분음표가 어우러지면서 피아노가 곡의 주도권을 잡는다. 동기의 활용을 보면 17마디에서는 1마디 피아노 주제의 단편과 5마디 첼로 주제의 단편을 섞고 있으며, 20마디부터 마지막까지 활용하는 음형은 2주제 첼로 음형의 단편을 활용하고 있다. 화성적으로는 D단조에서 C장조로 조성이 이동한 후, 화음의 병진행을 중심으로 이동하다가 마지막에는 C장조의 V-I로 마무리한다.

재현부에서는 1주제와 2주제를 확대, 또는 변형하여 재사용하고 있다. 1주제는 제시부보다 3마디가 늘어난 10마디이며, 첫 음형을 제시부와는 달리 첼로가 완전 5도 위에서 제시한다. 첼로 파트도 제시부와는 다르게 셋잇단음표의 사용으로 리듬을 변형하고 있으며, 두 마디의 연결구를 부여해 1주제와 2주제를 유연하게 잇고 있다. 이 또한 제시부와 다른 점이다.

재현부의 2주제는 제시부의 8마디와는 달리 6마디로 2마디를 축소했다. 마지막 두 마디의 템포를 Lento로 늦추어 코데타를 예비하고 있으며, 첫 부분과 동일한 템포를 사용해 템포 측면에서 처음과 끝을 똑같은 분위기로 만든다는 특징이 있다.

코데타에서는 주로 1주제를 사용하고 있으며, 50마디에서 비로소 F#음이 등장해 피카르디 종지를 이루며 ppp의 고음 하모닉스로 곡을 마무리짓는다.)

 

2악장 (2.Serenade. Moderement anime 4/4)

(64마디) (첼로의 피치카토가 기타 반주를 생각나게 하는 세레나데 악장은 음울하면서도 역동적인 곡으로, 쉴 새 없이 표변하는 드뷔시 음악의 특징을 잘 담고 있다. 전체적으로 A-B-A'의 3부 구성을 취하고 있다.

첼로가 먼저 퉁명스러운 반음계를 제시하고, 곧이어 완전 4도와 증 4도의 도약 진행을 선보인다. 첼로가 4도를 선보일 때 피아노는 첼로의 반음계를 모방한다. 화음은 불완전 3화음, 완전 5도의 병진행, 4도, 2도의 부가화음을 사용하면서 기묘한 느낌을 준다. 앞의 반음계적/4도 진행과, 8마디부터 등장하는 온음음계의 진행은 교대로 등장하면서 드뷔시 특유의 변덕스러운 음악을 만들어낸다.

중간부는 템포를 Vivace로 바꾸고, 박자로 3/8로 바꾸어 첫 부분의 음산함을 벗고 율동적인 곡조를 노래한다. 조성도 곧 A장조로 바뀐다. 37마디부터 첼로는 반음계적 진행을 위주로 움직이며, 화음은 3도 관계의 진행을 보인다. 39마디 첫 화음까지는 C장조를 중심으로 한 온음음계 V9로 진행하다가 두 번째 화음부터 40마디까지는 반음계로 바뀌는데, 여기서 반진행을 사용해 다시 한 번 온음음계와 반음계의 선명한 대비를 주고 있다. 중간부가 막바지에 접어들면 첼로는 증5도를 중심으로 움직이면서 종잡을 수 없는 2악장 특유의 분위기에 방점을 찍는다.

첫 부분으로 곡이 복귀하면 길이가 대폭 짧아져 고작 10마디만이 주어지며, 그 중에 절반은 사실상 코데타로 보아야 한다. 그러나 첫 부분의 중요한 동기들은 빠짐없이 사용하고 있다. 56마디는 첫 부분의 5마디 이후의 변형이자 반복인데, 첫 부분에서 선율적인 진행을 취하던 부분을 여기에서는 두터운 화성(9화음)을 붙인 병진행으로 바꾸어 사용하고 있다. 58마디에서 피아노는 두 개의 온음음계를 동시에 사용하는데, 상성에서는 하나의 온음음계를 사용하고 있고, 중성과 왼손은 두 개의 온음음계를 섞어 사용하고 있다. 이 두 개의 온음음계는 정확히 반음 차이로 엇갈린다.

코데타는 D단조의 V 페달 포인트가 깔리는 가운데 피아노가 E♭-F♭-D♭-E♭을 사용하면서 끝을 맺는다. 이 때 D단조의 V는 3악장의 I로 이어진다.)

 

3악장 (3.Finale. Anime, leger et nerveux 2/4)

(123마디) (빠르고 경쾌하게 움직이는 피날레 악장. 첼로의 고음역과 피치카토를 조심스럽게 사용해 가볍고 산뜻한 느낌을 준다. 1악장과 구조가 유사하지만 좀 더 많은 반복으로 약간 더 단순하다.

제시부는 1악장과 마찬가지로 연결구가 없지만, D단조를 사용하는 1주제와는 달리 2주제는 D장조를 사용하고 있다. 1주제는 14마디로, 7마디+7마디로 나눠지는데, 화음은 I에서 시작하여 병진행한다. 첼로는 1악장의 도약 진행 요소를 가져와 사용하고 있다. 화성적으로 1주제의 후반부는 1주제의 전반부를 반복하고 있다.

2주제는 8마디로 이루어져 있으며, 다시 4마디로 쪼개진다. 조성은 D장조이며 선율은 E에올리안 선법을 쓰고 있다.

발전부는 62마디에 달하는데, 주로 부분 부분을 반복하는 구성을 취하고 있다. 선율은 F리디안 선법으로 곧 변하며, 화음은 F#단조의 7화음 연속 진행을 보인다. 29마디부터 첼로는 완전 4도 위에서 이제까지의 음형을 변형, 반복한다. 37마디부터는 1주제에서 유래한 선율을 사용하는데, C장조로 전조하며 음형을 축소하고 있다. 45마디부터는 4마디 단위의 구성을 취하고 있으며, 이 4마디는 a-b-a'의 구성을 취한다. 발전부 속에 3부 형식이 들어있는 셈이다. 이후 2주제의 발전(리듬이 변한다)을 거쳐 재현부로 가는 연결구적 귀절로 들어간다. 여기에서는 5도의 도약이 두드러진다.

재현부는 다시 원래 조성인 D단조로 돌아온다. 드뷔시는 재현부에서 주제에 변화를 거의 주지 않는다. 2주제를 트릴로 연주하는 것을 제외하면 주제는 거의 원형 그대로 다시 등장한다.

112마디부터 시작하는 코데타는 반복적인 화음 진행을 보이며, 갑작스러운 sff-ff로 끝을 맺는다. 특유의 퉁명스러운 피치카토를 그대로 유지한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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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들어 르네상스 음악가들의 음반을 자주 듣고 있다.

 질 뱅슈아와 기욤 뒤페이의 세대, 요하네스 오케햄의 세대, 그리고 조스캥 드 프레의 세대는 각각 순수 대위법 음악의 위대한 이상을 구축하고 있으며, 동시에 교회가 문화의 중심이던 시대의 음악을 완성하고 있다.

 우선 기욤 뒤페이의 음악은 음악성과 동시에 텍스트의 운율을 기가 막히게 잘 살리고 있다.

 뛰어난 음악가였으며 동시에 재테크에도 음악 못지않게 뛰어난 재능을 지녀 만년을 부유하게 살았던 뒤페이는 15세기의 수많은 음악가들 중 음악의 선율 못지않게 시적 운율의 중요성을 강조한 가장 중요한 음악가로 보아야 한다. 운율의 중요성을 음악가가 파악하고 있다는 말은, 음악가가 인간의 구강 구조를 꿰뚫고 있다는 말과 같다. 양성 모음, 음성 모음, 원순 모음, 구개음, 파열음, 반치음, 유성음 등 구강 구조의 변화에 따라 목울대에서 솟아나는 인간의 음성은 무한히 달라지며 그 배열을 조합한 언어도 무한히 달라진다. 음악가, 특히 성악 음악가는 이 무한한 변화를 모두 꿰뚫고 있어야 한다. 뒤페이는 이 분야에서 가히 독보적이었다. 그것이 그를 이토록 오래 살아남게 한 첫째 이유로 볼 수 있지 않을까.

 뒤페이의 또 다른 위대함은 대조적인 양식을 스펀지처럼 흡수하는 대범함에 있다.

 현대 클래식 음악과는 달리, 당시 영국의 음악 양식은 다른 나라에 적지 않은 영향을 지속적으로 끼치고 있었다. 당시 존 던스터블의 주도로 풍성한 성과를 거두던 영국의 음악은 대륙의 음악가들에게 이전까지 불협화음으로 여겨지던 3도와 6도 화음의 폭넓은 수용을 가능케 했다. 또한 상성과 테노르(테너)가 짝을 이루는 3성부 수법도 이들의 유산이었다. 뒤페이 또한 영국 음악이 가져다주는 풍요로움을 몸소 체험한 세대였다. 전통적인 음악가들은 모두 전통의 고수자였다는 생각은 무지에서 비롯한 편견일 뿐이다.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절대로 살아남지 못한다. 뒤페이는 당시 주류로 받아들여지던 프랑스/플레미쉬 음악과 이탈리아 음악에 능통했을 뿐 아니라 영국과 부르고뉴 음악, 그리고 후배인 요하네스 오케햄의 음악까지 알고 있었다. 그의 음악은 다양한 음악 언어를 조합한 코스모폴리탄적 음악이며, 당시 영국 음악의 유유히 흐르는 부드러움, 프랑스 음악의 당당한 품격, 이탈리아 음악의 약동적인 흐름을 모두 거둬들인 후 자신만의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내고 있다.

 요하네스 오케햄의 음악을 들을 때마다 느낄 수 있는 가장 큰 특징은 그의 자신감이다.

 오케햄은 뛰어난 베이스 가수였으며, 스스로 가수 시절의 경험을 살려 성악가의 능력을 속속들이 파악한 곡을 작곡했다. 성악가로 활동한 작곡가가 직접 곡을 쓴다는 사실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싶다면, 쇼팽과 리스트를 머릿속에 떠올려보라. 악기에 대한 이디엄이 있다는 것은 거부할 수 없는 메리트임을 알게 될 것이다.

 그는 자신이 일류 가수였다는 경험을 살려 사람 목소리에 대한 탁월한 이해도와 발성의 영역을 확장한 성악곡들을 남겼다. 그의 레퀴엠은 서양 음악사상 최초의 레퀴엠으로 알려져 있다(뒤페이 또한 레퀴엠을 작곡했다고 하나 현재 악보를 확인할 수 없다). 북프랑스에서 태어났고, 상업과 공업으로 번영하던 플랑드르와 접한 지역에서 평생을 살았던(그는 이탈리아에 가본 적이 없다) 오케햄은 '회중이 회당에 모여 부르는 음악'이 아닌, '전문 가수가 회당에서 부르는 음악'을 만들었다. 그가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그의 뛰어난 성악 기교는 그런 음악을 쓰도록 만들었다. 또는 시대가 그것을 원했을 수도 있다. 오케햄의 음악은 전문 성악 훈련을 받지 않은 사람들이 부르기에 결코 쉽지 않다. 오케햄은 자신의 음악을 통해 훈련받은 가수들이 불러야 하는 전문적인 음악의 등장을 알렸다. 그리고 그것을 표현하는 오케햄의 근원에는 그의 강한 자신감이 머무르고 있다.

 오케햄의 시대가 지나고 조스캥 드 프레의 시대가 왔을 때 권력자들은 자신의 위선을 자랑하기 위해, 또는 마지못해 예술가들에게 경의를 표해야 할(또는 그러는 척 해야 할) 정도로 예술가들의 입지가 단단해져 있었다. 이것은 회화에서는 조토 이후로, 음악에서는 마쇼 이후로, 문학에서는 단테 이후로 지속적으로 자신들의 입지를 보장할 것을 요구한 예술가들의 유무형의 행동이 서서히 사회 전반으로 퍼져나갔음을 증명하는 예시가 될 것이다. 음악사상 가장 위대한 음악가들의 반열에 놓여야 할 조스캥 드 프레는 이러한 사회적 변화와 예술가들의 굳건해진 입지를 활용해 자신의 음악이 전 유럽으로 퍼질 수 있도록 했으며, 동시대의 어떤 음악가도 자신의 위치를 위협할 수 없도록 자신의 위치를 굳건히 했다. 그러나 조스캥이 만든 음악은 그러한 일화를 초월할 정도로 위대한 것이었다.

 그의 음악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옛 프레스코화처럼 강렬한 원색을 사용하는 초기 모테트들이 그의 진정한 음악일까? 아니면 모방과 변형 기법을 숨쉬듯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후기 미사들에서 그의 진정한 음악을 찾아야 할까? 조스캥은 르네상스 시대에 살았던 음악가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다양하고 풍부하며 역동적인 음악들을, 그것도 쉬지 않고 지속적으로 만들어냈다. 이런 천재성을 우리가 다시 찾으려면 적어도 2~300년은 더 기다려야 한다. 

 조스캥은 거기에 그치지 않고 아예 새로운 형식을 창조하는 데 성공한다. 조스캥 최후의 걸작 중 하나로 꼽히는 <미사 혀야 말하라(미사 빵제 링구아. Missa Pange lingua)>는 정선율이 고정되어 있는 일반적인 미사에서 벗어나 선율을 네 성부 전체에 걸쳐 자유로이 사용하고 있다. 선율은 전체적으로, 또는 부분적으로 사용하기도 하며, 선율에서 파생한 악구들이 모방적 처리의 동기가 되기도 하고, 호모포니를 통한 강조로 나타나기도 한다. 일명 패러프레이즈 미사의 시발점인 셈이다.

 그러나 조스캥의 음악을 말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역시 소탈하면서도 그의 기발한 착상이 빛나는 샹송일 것이다. 조스캥의 샹송에서 모든 성부는 동등하게 다루어진다. 이전의 음악과는 달리 한 성부를 빼놓을 경우 음악 전체가 무너져 내린다. 그리고 모방과 호모포니가 그 성부들을 끈끈하게 잇는다. 이토록 유기적인 음악을 만든 음악가는 결코 흔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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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개의 엄숙한 노래> (Vier ernste Gesange, Op.121)

작곡 시기 : 1896년 5월 완성

작곡 장소 : 빈

(브람스의 가장 위대한 마지막 가곡은 클라라의 죽음을 전후한 1896년 5월에 만들어졌다(곡을 출판한 날짜는 브람스의 63세 생일인 1896년 5월 7일이다).1) 브람스는 이 곡을 클라라에게 들려주고 싶어 했지만, 클라라는 이 곡을 듣지 못한 채 1896년 5월 20일에 7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장지로 가는 기차도 제대로 잡지 못할 정도로 큰 충격을 받은 브람스는 클라라의 장례식이 끝난 후에야 장지에 도착한다. 클라라의 죽음은 평행선을 두고 이어져오던 두 선 중 하나가 완전히 지워진 것과 같았다. 평행선의 한쪽 선이 없어지면 다른 선도 더 이상 평행선으로 존재할 수 없다. 당시 브람스의 간에는 종양이 자라고 있었다. 이 네 개의 가곡은 클라라를 위한, 그리고 브람스 자신을 위한 마지막 가곡인 셈이다.

브람스는 마지막 네 개 가곡의 텍스트를 모두 성서에서 찾았다. 그는 자주 성서를 인용해 성악곡을 만들었고, 그때마다 수준 높은 텍스트의 사용과 음악성을 보여주었다. 이 가곡집에서 그는 이전의 음악을 한 차원 뛰어넘는다. 그가 발췌한 텍스트와 음악은 여러모로 다른 가곡보다는 그의 걸작 《독일 레퀴엠》을 떠올리게 한다. 두 음악은 본질적으로 같은 주제를 공유하고 있다. 모든 인간이 결코 피할 수 없는 숙명인 죽음 앞에서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고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브람스는 《독일 레퀴엠》에서도 그랬듯이 단지 죽음의 고통과 어두움만을 말하고 있지 않다. 마지막 곡에서 그는 죽은 이들의 평안과 남겨진 이들에 대한 위로와 사랑을 말한다. 죽음을 초극하는 ‘사랑’이건, 아니면 죽음과 초연한 ‘사랑’이건 죽음 속에서 ‘사랑’을 노래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이 가곡의 위대함은 그 어려운 목표를 극히 브람스다운 방식으로, 짙은 음영을 보이면서도 인간에 대한 믿음을 결코 잃지 않는 그만의 방식으로 해냈다는 점에 있다.)

 

Denn se gehet dem Menschen wie dem Vieh

(Prediger Salomo 3:19~22)

Denn es gehet dem Menschen wie dem Vieh.

wie dies stirbt, so stribt er auch:

und haben alle einerlei Odem:

und der Menschen hat nicht mehr denn das Vieh:

denn es ist alles ietel.

Es fährt alles an einen Ort:

es ist alles von Staub gemacht, und wird wieder zu Staub.

Wer weiß, ob der Geist des Menschen aufwärts fahre.

und der Odem des Viehes? unterwärts, unter die Erde fahre?

Darum sahe ich, das nicht besser ist.

denn daß der Mensch fröhlich sei in seier Arbeit:

denn das ist sein Teil.

Denn wer will ihn dahin bringen,

daß er sehe, was nach ihm geschehen wird?

사람에게 임하는 일은 짐승에게도 임하나니

(전도서 3:19~22)

사람에게 일어나는 일이 짐승에게도 일어나니

짐승이 죽는 것 같이 사람도 죽느니라

그리고 모든 것은 하나의 호흡을 가지고 있으니

사람도 짐승보다 더 한 것이 없다

모든 것은 허무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한곳으로 가는데

모든 것은 먼지로부터 만들어 졌고

또 다시 먼지로 돌아간다

누가 아는가, 사람의 영혼이 위로 올라가는지,

그리고 동물의 호흡이 땅 밑으로 가는지를?

그래서 나는 사람들이 자신을 일을 할 때

기뻐하는 것 보다 더 나은 것이 없는 것을 보았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신의 일이기 때문이다

누가 그들에게 일어나는 일을 보려고

다시 그들을 데려 오겠는가?

1곡 <사람에게 임하는 일은 짐승에게도 임하나니>

(1.Denn es gehet dem Menschen. Andante 4/4 - Allegro 3/4) (D minor)

(「전도서」의 냉혹한 구절은 사람이 짐승과 조금도 다르지 않음을, 과장 없이 있는 그대로 고한다. 인간의 고통과는 상관없이 자연은 어제와 똑같은 법칙을 반복할 뿐이며, 그 섭리는 오늘도 변함없이 나아간다. 그 섭리는 피할 수 없는 것이다. 다만 인간은 주어진 조건에서도 최선을 다해 살아갈 뿐이다. 흔히 말하는 인사를 다하고(盡人事) 천명을 기다린다(待天命)는 말이 바로 「전도서」의 이 후반부 구절과 일치한다. 「전도서」의 저자 솔로몬 왕은 모든 형태의 환락과 부귀영화를 누렸지만, 만년에 그의 빛나는 생애와는 전혀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이 글을 남겼다. 그는 자신의 손에서 왕국이 정점에 도달했고, 동시에 몰락의 시작을 맞이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특유의 경이적인 통찰력으로 인간의 심리를 꿰뚫어 본 이 글을 남긴 것이다.

곡은 감화음이 주를 이루며 어둡고 허무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안단테에서 알레그로의 템포 변화는 극단적인 감정 변화를 나타낸다. 첫 도입 부분에서 저음은 D-E-F-E-D-A 오스티나토 진행과 B♭ 페달 포인트로 시종 무거운 느낌을 불어넣는다. 성악 선율이라기보다는 연극에서의 독백과 흡사한 첫 선율 ‘Denn es gehet dem Menschen……'은 《독일 레퀴엠》 2악장의 첫 선율인 ’Denn alles Fleisch es ist……'와 흡사하다. 두 곡 모두 인간 육체의 덧없음을 노래한다는 점에서 유사한 내용을 가지고 있다. 특히 8마디의 ‘dies stirbt(이 죽음)’에서는 G#-D의 증4도와 F-C#의 감4도 진행을 사용해 극도로 불안한 느낌을 강조하고 있다.2) 안단테 파트는 ‘denn es ist alles eitel(모든 것은 헛되다)’라는 구절로 끝을 맺는데, 이 중 ‘alles(모든 것)’에서 피아노는 sf, 성악은 감5도로 강조하면서 알레그로로 들어간다. 알레그로에서는 피아노의 감7화음이 빠르게 움직이며 ‘es färht alles an einen Ort, es ist alles von Staub gemacht(모든 것은 먼지로부터 만들어졌으니)’라는 가사에 이르러 성악 선율이 상승하는 동안 피아노는 하행하는 반진행을 이루고, 다음 구절인 ‘und wird wieder zu Straub(또 다시 먼지로 돌아간다)’에서 성악과 피아노는 모두 바닥으로 떨어진다. 이 구절에서 브람스는 무성음인 [t]와 [p]에 감7화음을 적용하여 텍스트와 음악을 결합하고 있다.

이제부터 브람스는 텍스트를 객관적으로 서술하던 태도에서 벗어나 개인적인 감정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Wer weiß(누가 아는가)’에 이어 나오는 피아노는 4분음표에 스타카토가 붙어 딱딱하고 강한 느낌을 자아낸다. 성악의 강세는 모두 강박에 붙어있는데 피아노의 음표는 모두 약박에 배치되어 감정의 골을 드러내고 있다. 이어 곡은 C#단조로 전조, 짤막한 피아노의 독주가 이어진 후 성악과 피아노의 발화와 응답이 한 동안 이어지다가 C#음이 다시 D단조로 들어가면서 첫 부분이 돌아온다. 첫 부분의 재현은 채 10마디가 되지 않으며, 82마디부터는 다시 Allegro의 빠른 두 번째 파트가 나타나는데 이번에는 스트레토 기법을 사용하여 발화와 응답이 점점 겹치기 시작하면서 둘은 서서히 얽힌다. 그런 극적인 상태에서 곡은 코다에 진입한다. 90마디부터 곡은 9/4박자로 변하고, 트릴이 셋잇단음표와 함께 곡의 마지막까지 함께 한다. 이 음형은 점점 디미누엔도한다. 성악 선율은 점점 음가가 길어지면서 길게 늘어져 흩어지는 느낌을 준다. 곡의 시작이 그렇듯 마지막 화음도 3음을 생략해 공허한 느낌을 더하는데, 돌연 강렬한 D단조 화음을 찍으면서 끝을 맺는다.)

Ich wandte mich und sahe an alle

(Prediger Salomo 4:1~3)

Ich wandte mich und sahe an alle,

die Unrecht leiden unter der Sonne;

und siehe, da waren Tränen derer,

die Unrecht litten und hatten keinen Tröster;

und die ihnen Unrecht täten, waren zu mächtig,

daß sie keinen Tröster haben konneten.

Da lobte ich die Toten, die schon gestorben waren,

mehr als die Lebendigen, die besser als alle beide,

und des Bösen nicht inne wird,

das unter der Sonne geschieht.

나는 모든 학대를 보았다

(전도서 4:1~3)

나는 또 태양 아래에서 자행되는 모든 억압을 보았다.

보라, 억압받는 이들의 눈물을!

그러나 그들에게는 위로해 줄 사람이 없다.

그 억압자들의 손에서 폭력이 쏟아진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위로해 줄 사람이 없다.

그래서 나는 이미 오래전에 죽은 고인들이

아직 살아 있는 사람들보다 더 행복하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이 둘보다 더 행복하기로는 아직 태어나지 않아 태양 아래에서 자행되는

악한 일을 보지 않은 이라고 말하였다.

2곡 <나는 모든 학대를 보았다> (2.Ich wandte mich und sahe na alle. Andante 3/4) (G minor)

(첫 번째 곡이 고통에 대해 말하고 있다면 두 번째 곡은 불합리와 불평등에 대해 말하고 있다. 권력자들은 권력을 남용하고, 피지배자는 그 권력 밑에서 신음한다. 이 모순으로 인한 고통보다는 차라리 죽음이 낫다는 비참한 외침이 이 곡의 주된 내용을 이루고 있다.

피아노는 왼손의 동기에 오른손이 따라가는 형태를 취하며, 성악 선율도 역시 그 뒤를 따라간다. 주로 3도로 하강하는 이 동기는 브람스의 ‘죽음의 동기’라 불리는데, 브람스는 이런 형태의 동기를 그의 가곡 <들판의 적막>(Feldeinsamkeit) Op.86-2에서 먼저 사용한 적이 있다. 이 곡의 내용도 죽음의 명상에 관한 것이다. 이후 가사는 ‘Unrecht leiden unter der Sonne(태양 아래에서 자행되는 모든 억압)'에 대해 노래하고, 특히 ’leiden(고통받다)‘를 sf로 강조하고 있다. 이 부분은 감7화음으로 채색되어 있다.

15마디부터는 E♭장조의 느낌이 나는 화성을 사용하는데, 그렇다고 해서 조성이 E♭장조로 이동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오히려 “고통 받으며 사는 사람보다는 오히려 죽은 사람이 더 행복하다”는 결론을 강조하기 위한 음악적 장치로 보아야 한다. 즉 비유를 위한 음악적 암시인 셈이다. 이것은 17마디에서 ‘Siehe(보라!)’는 명령형 문장이 sf, 증1도 화음과 함께 나타나는 것으로 확실해진다. 우리는 음악이 표현하는 고통과 학대를 텍스트의 지시에 따라 보고 듣는다. 이어지는 21마디의 Tränen derer(그들의 눈물)에서도 이탈음이 등장하여 위의 표현과 비슷한 효과를 낳는다. 23마디부터 곡은 극적인 정점에 도달하는데, 가사 ‘die Unrecht litten und hatten keinen Tröster und die ihnen Unrecht täten, waren zumächtig(그러나 그들에게는 위로해줄 사람이 없고, 그 억압자들의 손에서는 폭력이 쏟아진다)이 전하는 울분을 극대화하기 위해 반음계 화성, 성악 파트의 음정 도약과 피아노의 헤미올라3) 리듬, 급격한 전조(E♭ major-A minor-G minor)가 합쳐져 전에 없이 참혹한 감정을 여과 없이 그대로 분출한다.

2박자의 쉼표 이후 36마디부터 다시 죽음의 동기가 등장한다. 음량은 pp로 작아지는데, 그에 반비례하여 긴장감은 두 배로 높아진다. 이 부분에서 성악가와 피아노는 결코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다. 그러나 텍스트와 음악이 전하고자 하는 감정은 똑똑히 들려온다. 너무나 참혹한 상황을 접했을 때는 오히려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것처럼, 이런 상황에서 이렇게 낮은 목소리는 오히려 긴장감을 극대화한다.

61마디부터 곡은 코다로 진입하고, 주 조성인 G단조와 같은 으뜸음을 쓰는 G장조로 ‘und des Bösen nicht inne wird, das unter der Sonne geschieh(태양 아래에서 자행되는 악한 일을 보지 않은)’에 대해 말하며 차분하면서도 우울하게 ‘차라리 죽음이 낫다’는 사실을 고한다. 음가도 그 우울함에 맞추어 두 배 늘어난 4분음표의 리듬을 사용하여 점점 사라지듯 노래를 마무리 짓는다.)

O Tod, wie bitter bist du

(Jesus Sirach 41:1~2)

O tod, wie bitter bist du,

wenn an dich degenkt ein Mensch,

der gute Tage und genug hat und ohne Sorgen lebet:

und dem wohl essen mag!

O Tod, wie wohl tust du dem Dürftigen,

der da schwach und alt ist,

der in allen Sorgen steckt,

und nichts Bessers zu hoffen noch zu erwarten hat.

죽음이여, 고통스러운 죽음이여

(집회서 41:1~2)

오 죽음아, 얼마나 괴로운 일인가!

자기 재산으로 편히 사는 인간에게,

아무 걱정도 없고 만사가 잘 풀리며 아직 음식을 즐길

기력이 남아 있는 인간에게 너를 기억하는 것이.

오 죽음아, 얼마나 좋은가!

너의 판결이 궁핍하고 기력이 쇠잔하며

나이를 많이 먹고 만사에 걱정 많은 인간에게,

반항적이고 참을성을 잃은 자에게.

3곡 <죽음이여, 고통스러운 죽음이여> (3.O Tod, wie bitter bist du. Grave 3/2-4/2) (E minor)

(가톨릭 구약 집회서 41장에서 텍스트를 취한 세 번째 곡은 보통 사람들, 편안한 삶을 사는 이들에게 닥쳐오는 죽음의 고통스러움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동시에 삶에 지친 자들에게 죽음이 위로가 될 수도 있다는 내용도 담고 있다.

곡의 빠르기말은 Grave, 전주와 후주가 없는 통절 가곡형식인 이 곡은 매우 느린 템포로, 피아노의 전주 없이 성악이 바로 등장한다. 이런 단도직입적인 개시 때문에 사람들은 첫 대사 ‘O Tod, wie bitter bist du(오 죽음아, 얼마나 괴로운 일인가)에 집중하게 된다. 이 대사 또한 노래라기보다는 오히려 연극의 독백처럼 들리는데, 빈사 상태에 빠진 사람이 고통에 겨워 몸부림치는 단말마를 연상시킨다. 3마디의 C-C# 증8도 상행과 낮은 음역에서 갑작스럽게 높은 음역으로의 상승은 이 곡의 난이도를 높인다.

6마디부터 리듬은 2박자 계열의 리듬에서 1박자 계열의 리듬으로 줄어드는데, 이것은 행복한 삶을 영위하는 이들에게 죽음이 얼마나 큰 고통인지를 설명해준다. 그리고 다시 ‘O Tod……'의 대사가 나오면서 첫 부분은 끝난다.

18마디부터 조성은 E장조로 바뀌고, 삶에 지치고 고통 받는 자들에게 죽음이 위로가 될 수 있음을 말한다. 조성은 장조로 바뀌었지만 분위기는 위로가 아닌 우울함을 담고 있다. 텍스트는 역설적으로 죽음이 위로가 될 정도로 삶이 막막하고 팍팍하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첫 부분에서 3도 하행하는 ‘O Tod'와는 달리, 이 부분에서는 ’O Tod'가 6도 상승한다. 이 우울함은 27~28마디의 ‘und nicht Bessers', 'zu hoffen noch zu erwärten hat’에서 현실에 대한 한숨과 절규로 방향을 튼다.

이후 곡은 점점 고요해지며 분위기를 차분하게 가라앉히면서 마지막 곡의 등장을 유도한다.

참고로 이 곡은 네 개의 가곡 중에서도 특히 어려운 곡으로 꼽히는데, 갑작스러운 리듬의 변화, 음정의 도약, 긴 호흡, 무거운 텍스트의 표현과 감정 처리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일류 성악가들도 결코 좋은 연주를 만들어내기 쉽지 않다.)

Wenn ich mit Menschen und mit Engelzunge reget

(St. Pauli an die Corinther I, Kor.13:1~3, 12~13)

Wenn ich mit Menschen und mit Engelzunge redet,

und hätte der Liebe nicht,

so wär' ich ein tönard Erz, oder eine klingende Schelle.

Und wenn ich weisssagen könnte

Und wüßte alle Geheimnisse und alle Erkenntnis,

und hätte allen Glauben, also daß ich versetzte,

und hätte der Lieber nicht,

so wäre ich nichts.

Und wenn ich alle meine Habe den Arme gäbe,

und liebe meinen Leib brennen;

und hätte meinen Leib nicht,

so wäre mir nichts nütze.

Wir sehen jetzt durch einen

Spigel in einem dunken Worte;

Dann aber von Angesicht zu Angesichte.

Jetzt erkenne ich's Stückweise,

dann aber wird ich's erkennen,

gleich wie ich erkennet bin.

Nun aber bleibet Glaube, Hoffnung, Liebe, diese drei;

Aber die Liebe ist die Größeste unter ihnen.

내가 인간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코린토 첫째 서간 13:1~3, 12~13)

내가 인간의 여러 언어와 천사의 언어로 말한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요란한 징이나 꽹과리 소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고

모든 신비와 지식을 깨닫고

산을 옮길 수 있는 큰 믿음이 있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가 모든 재산을 나누어 주고

내 몸까지 자랑스레 넘겨준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어렴풋이 보이지만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볼 것입니다.

내가 지금은 부분적으로 알지만

그때에는 하느님께서 나를 온전히 아시듯

나도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믿음과 희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계속됩니다.

그 가운데에서 으뜸은 사랑입니다.

4곡 <내가 인간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4.Wenn ich mit Menschen und mit Engelzunge reget. Andante con moto 4/4) (E♭ major)

(이 가곡은 앞의 세 곡과는 다른 목적에서 만들어졌다. 1892년 1월, 브람스의 친구인 엘리자베트 폰 헤르초겐베르크가 심장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작곡가는 그녀를 추모하기 위한 의미에서 이 곡을 만들었다.

이 가곡집은 어둡고 비참한 이야기만을 하고 있지 않다. 브람스는 사도 바울의 감동적인 고백으로 유명한 코린트서의 구절로 이 가곡집을 끝맺고 있다. 이 마지막 가곡은 고통을 초월한 곳에 있는 아가페적인 사랑이다. 고통을 겪지 않아본 이는 진정한 사랑에 대해 말할 자격이 없다. 첫 곡에서 세 번째 곡까지 인간의 쓰고 우울한 감정들을 모두 맛본 후에라야 마지막 곡에서 사랑을 논할 자격이 주어지는 것이다.

성악이 등장하기 전의 전주는 작곡가의 첼로 소나타 2번의 기교와 비슷하다. 작곡가는 첼로로 트럼펫의 소리와 비슷한 음향을 구사하는데, 역시 여기서도 작곡가는 피아노로 팡파르 소리와 비슷한 음향을 추구한다. ‘Liebe nicht(사랑이 없으면)’을 긴 음가로 처리, 버금딸림화음으로 불완전 종지를 하고 있으며, ‘Klingende Schelle', 'tönende Erz'에서는 피아노를 8분음표로 교차하여 등장하도록 하여 타악기적인 효과를 더하고 있다.

48마디부터는 B장조로 중간부가 등장한다. 박자도 3/4박자로 바뀐다. A파트의 수직적인 화음과는 대조적으로 셋잇단음표의 아르페지오 음형으로 바뀌어 차분한 분위기가 주를 이룬다. 특히 48-49, 62-63 마디에서는 성악 선율과 피아노 선율이 서로 3도 병행으로 노래하며, 56마디부터는 피아노 베이스가 F#음을, 60마디부터는 B를 페달 포인트로 사용하여 이전의 삶에 대해 생각하는 느낌을 준다. 또 68마디부터는 헤미올라 리듬을 사용, 앞으로 전진하는 느낌을 준다.

72마디부터는 상승하는 선율과 cresc., poco a poco piu moto를 써서 A부분의 축소 부분인 A' 부분을 준비하는데 이 부분에서 쓰이는 화성은 비화성음에 의한 전조를 사용하여 후기 낭만주의의 영향을 드러낸다. 마지막 A' 파트에서 가사는 Glaube(믿음), Hoffnung(소망), Liebe(사랑)에 대해 이야기하며 특히 이 중에서 Liebe(사랑)를 가장 높은 음역에서, 가장 긴 음가로 표현해 믿음, 소망, 사랑 중 사랑이 가장 중요하다는 텍스트를 강조하면서 끝을 맺는다.)  

 

1) 다만, 마지막 곡은 1892년에 따로 만들어 둔 것이다.

2) 증4도는 말러 교향곡 7번의 중심 모티프 음정 간격이며, 감4도는 리스트가 <단테 소나타>에서 사용한 주요 모티프의 음정 간격이다. 둘 다 불협화적이고 어두우며 기이한 느낌을 준다.

3) 헤미올라(Hemiola) : 그리스어로 ‘하나 반’을 뜻하는 헤미올리스(ἡμιόλιος. Hemiolis)에서 온 단어. 15세기부터 음악이론에서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 단어에는 두 가지 뜻이 있는데, 첫째는 완전 5도를 가리키는 말로 현의 비율이 3:2일 때 이 음정을 얻을 수 있다고 해서 이러한 명칭이 붙었다. 그러나 주로 사용하는 뜻은 바로 지금부터 설명할 두 번째 뜻이다. 바로 3박자 리듬에서 등장하는 2박자 리듬을 가리키는 말로, 3개의 음표를 여섯 개로 쪼갠 후 이것을 둘로 합하여 사용하는 리듬이다. 예시를 들면 4분음표 3개가 있을 때 이를 각각 반으로 쪼개 8분음표 여섯 개를 만든 후, 8분음표를 세 개씩 합하면 헤미올라 리듬이 된다. 즉 ‘1+1+1’을 재조합해 ‘1.5+1.5’로 만든다는 뜻이다. 그러나 기보법은 3박자로 써야 하기 때문에 앞에는 점4분음표를 놓고, 뒤의 8분음표와 4분음표는 이음줄로 잇는 것이 보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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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무나 참혹한 사고가 터졌다. 그 사고가 왜 터졌는지를 생각하기도 전에 사회의 병든 모습이 낱낱이 드러났다. 사고 이후 사회의 시계가 멈춰버린 것 같다. 음악 듣는 것도 무력하게 느껴져서 며칠 동안 음악을 듣지도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음악이 바로 이 곡이었다. 어둡고 비통하지만 어둡고 비통한 곳에만 머무르지 않는, 큰 슬픔을 온 몸으로 이겨내는 이 곡을 듣고 그 곡에 대해 쓰는 일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부끄럽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쓰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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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올린 협주곡 1번 (Violin Concerto No.1 in A minor, Op.77(Op.99))

작곡 시기 : 1947년 7월 21일 착수, 1948년 3월 24일 완성

작곡 장소 : 모스크바

헌정자 : 바이올리니스트 다비드 오이스트라흐

악기 편성 : 독주 바이올린, 피콜로(제3 플루트와 겸함), 플루트 2, 오보에 2, 잉글리시 호른(제3 오보에와 겸함), 클라리넷 2, 베이스 클라리넷(제3 클라리넷과 겸함), 파곳 2, 콘트라파곳(제3 파곳과 겸함), 호른 4, 튜바, 팀파니, 탬버린, 탐탐, 실로폰, 첼레스타, 하프 2, 현악 5부

(이 협주곡은 즈다노프 비판이 한창 진행되고 있을 때 만든 곡이다. 쇼스타코비치는 살아남기 위해 자존심이고 뭐고 다 집어치운 채 일단 바닥에 납작 엎드려야 했다. 그는 낮에는 가혹한 인격살인과 협박이 그럴듯한 정치용어에 포장된 채 쏟아지는 위원회에 출석하고, 밤에는 집에 돌아와 이 곡을 썼다. 곡에서는 어떠한 외부적인 압력의 흔적도 느껴지지 않지만(협주곡의 형식은 고전적인 형식과 현대성을 아주 잘 결합했다는 평을 받는다. 이것은 어쩌면 소비에트의 당이, 독재자가 원한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모범답안인지도 모른다), 곡의 모든 주제는 어둠 속에서 달빛을 받은 칼날처럼 번뜩이고 있다. 쇼스타코비치는 곡을 완성하고도, 자신의 평판(과 목숨)이 나락으로 떨어질까 두려워해 이 곡의 출판을 미루었다. 곡의 출판은 스탈린이 죽고 교향곡 10번이 성공을 거둔 후에 비로소 이루어졌다. 작품번호가 두 개인 까닭이 바로 그것이다(Op.77은 완성 시기에 맞춘 작품 번호이며, Op.99는 출판 시기에 맞춘 작품 번호이다. 처음에는 Op.99로 출판했으나 나중에 Op.77로 바꾸었다). 쇼스타코비치는 곡을 완성하자마자 오이스트라흐에게 맡겼지만, 초연까지는 8년이 걸렸다. 곡을 초연한 바이올리니스트 다비드 오이스트라흐에게 헌정했다.

곡은 트럼펫과 트롬본 없이 진행한다. 트럼펫은 쇼스타코비치가 당을 위해 작곡한 공허한 선전용 음악에서 즐거운 팡파레를 맡곤 했다. 작곡가는 이 곡에서 그런 허세를 부리지 않는다. 1악장과 3악장은 각기 고통스러운 녹턴과 파사칼리아, 2악장과 4악장은 교활한 풍자와 칼날 위에 선 사람들의 아찔한 춤을 그리는 스케르초와 부를레스케다. 이토록 소름끼치는 풍자를 기악 음악으로 실현한 작곡가는 쇼스타코비치 말고는 없다. 쇼스타코비치도 이렇게 잘 벼려진 풍자 음악은 두 번 다시 만들지 못했다(이후의 풍자음악은 너무 노골적이거나 너무 어둡다). 그는 짓누르면 짓누를수록 더욱 강해지는 작곡가였지만, 결국 공포가 작곡가의 개인적인 의지를 눌러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1악장 (1.Nocturne. Moderato 4/4) (A minor)

(음울하고 고통스러운 녹턴 악장은 견디기 힘들 정도로 아주 길게 이어진다. 그러나 녹턴 악장은 동시에 부드러운 패시지도 담고 있다. 독주 바이올린을 반주하는 악기군은 완전히 둘로 갈라져 교대를 하듯 독주악기를 반주한다. 주로 악장의 분위기 조성을 맡는 것은 현악기군이며, 관악기군은 주로 보조 역할을 맡는다. 마지막 부분에서 바이올린은 약음기를 사용하고, 현악기군과 하프의 꺼질 듯한 반주와 함께 조용히 끝을 맺는다. 이 조용한 종지는 2악장의 개시가 던져주는 신선한 충격을 배가한다.)

2악장 (2.Scherzo. Allegro 3/8 - Trio 2/4) (D flat major)

(쇼스타코비치는 이 악장에서 처음으로 자신의 음악적 서명 DSCH(D-Es-C-H/D-E♭-C-B)를 사용하고 있다. 이 서명은 이후 현악 4중주 8번과 교향곡 10번에서도 나타난다. 플루트와 독주 바이올린으로 시작하는 첫 주제는 공허하고 낙관적인 선전용 미소를 띠고 있다. 그러나 그 공허한 미소는 어느 누가 보아도 줄에 매달린 꼭두각시의 웃음이다. 영혼 없는 인형의 춤 뒤에서 꼭두각시를 조종하는 ‘이면’은 트리오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트리오 주제는 즐거움과 기쁨을 나타내지만, 쇼스타코비치의 교묘한 가공은 그 주제에 기묘한 광기를 불어넣는다. 곡은 다시 스케르초로 돌아오지만, 이제 꼭두각시는 자기가 억지로 웃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 즐거워 웃는지도 구분하지 못한다. 미칠 것 같지만 동시에 미친 듯 즐겁기 때문이다. 어떤 작가도 이러한 상황을 쇼스타코비치만큼 잘 말할 수 없을 것이다. 특정한 조성이 없다고 할 정도로 변화무쌍한 스케르초 악장의 전조는 이 느낌을 증폭시킨다.)

3악장 (3.Passacaglia. Andante 3/4 - Cadenza) (F minor)

(3악장의 작곡 시기는 즈다노프 비판이 행해지던 시기와 일치한다. 20세기 작곡가들은 엄격한 파사칼리아 형식을 통해 강압적이고 거대한 수레바퀴와, 그 수레바퀴에 짓눌린 사람들을 묘사했다. <보체크>에서 의사의 실험대상으로 전락한 보체크를 묘사하는 데 파사칼리아를 사용한 데서 그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알반 베르크를 존경했던 쇼스타코비치는 자신의 협주곡에서 파사칼리아를 사용한다. 파사칼리아를 곡에 굳이 집어넣은 의도는 베르크와 같았으리라. 스탈린의 대숙청 시기, 강제수용소로 끌려간 많은 사람들은 다시는 빛을 보지 못했다. 그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다 기억하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그들이 당했던 일이 어떤 것인가를 알리는 데는 역시 음악이 유용하게 쓰일 수 있다. 그 안에 담긴 뜻을 이해하기 위해 음악을 알아야만 하는 기악곡은 더욱 그렇다(성악곡은 드러내고자 하는 바를 너무 직접적으로 묘사하고 언급한다. 사실 그것이 성악곡의 가장 큰 위력이기도 하지만). 파사칼리아가 서서히 막을 내리면 절규와도 같은 독주 바이올린의 카덴차가 이어진다. 앞부분인 파사칼리아가 고전적인 형식인 것처럼, 이 카덴차 부분도 바흐의 무반주 바이올린 독주곡들을 연상시킨다. 카덴차는 앞의 악장들을 회고하면서 점점 분위기를 격렬하게 만들고, 그 분위기는 바로 4악장으로 이어진다.)

4악장 (4.Burlesque. Allegro con brio 2/4) (A minor)

(이 악장은 스케르초 악장의 연장인 동시에, 절규와도 같은 앞의 카덴차를 잘라버리면서 나타난다. 물론 그 절규를 잘라버리는 것은 팀파니의 강압적인 리듬이다. 팀파니의 호위를 받으며 나타나는 부를레스케 주제는 그 폭압적인 성격이 지나쳐 오히려 장난치는 것처럼 들린다. 주제가 끝나면 목관과 독주 바이올린이 어우러지는 광대의 춤이 이어진다. 독주 바이올린은 그 틈바구니에서 아슬아슬하게 춤을 춘다. 결국 코다에서 모든 주제들은 발작하는 것처럼 튀어나오고, 폭넓은 다이내믹(mf-f-ff, p-cresc.-ff)은 들뜬 분위기를 돋우면서 파국을 재촉한다. 결국 부를레스케의 등장을 장식했던 강압적인 팀파니가 그 모든 주제들을 묻어버리면서 곡은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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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곡의 피아노 소품 (6 Piano Pieces, Op.118)

작곡 시기 : 1893년 완성

출판 : 1893년

(이 곡집의 6곡은 1893년 여름에 바트 이슐에서 완성하였다고 전해지는데, 그 이전에 작곡한 곡도 섞여 있다고 한다. 브람스는 1893년 여름에 Op.118과 Op.119의 10곡의 소품을 완성한 것부터 순서대로 클라라 슈만에게 보냈는데, 그 보낸 순서는 다음과 같다, 먼저 5월에 Op.119의 제1곡, 6월에 Op.119의 제2, 3곡, 7월 2일에 Op.119의 제4곡, 8월에 Op.118의 제1, 2, 3, 6곡, 9월에 Op.118의 제4, 5곡. 그리고 브람스는 바트 이슐에서 이 곡들을 클라라 슈만의 제자인 여류 피아니스트 이로나 아이벤슈츠와 칼베르에게 연주해 들려준다. 확신하지만 않았지만, 칼베크는 이것들 중 몇 개는 브람스가 바트 이슐에 오기 이전에 완전히 완성했다고 추정하고 있다.

이 아이벤슈츠는 Op.118의 제3, 5곡을 1894년 1월 22일에 런던의 세인트 제임스 연주홀에서 초연하였다. Op.118의 전6곡을 정리하여 처음으로 소개한 것도 아이벤슈츠였다(1894년 3월 7일, 런던의 세인트 제임스 연주홀). 이 6곡의 악보는 1893년 11월에 짐로크에서 처음 출판한다.)

1곡 <간주곡> (No.1 Intermezzo in A minor. Allegro non assai, ma molto appassionato 2/2)

(만년에 접어든 브람스 특유의 쓸쓸함이 담긴 곡이지만, 남성적인 호방함도 충분히 담고 있다. 쇼팽의 전주곡 스케일을 한아름 크게 담은 느낌의 곡이기도 하다. 이 곡은 3부 형식을 취하면서도 형식감이 크게 두드러지지 않는데, 단숨에 쓴 인상을 주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단순한 3음 하행 음형을 기본적인 동기로 하여 전체가 짜여져 있고, 마지막에는 극히 효과적으로 이 동기의 확대를 꾀한다. 곡의 처음에 a단조의 버금딸림조의 딸림7이 나오므로, 조성적으로 불안한 느낌이 있다. 또한 이 곡에서는 프리지아 2도(음계의 반음 내린 제2도음)의 사용이 눈에 띄며, 이것으로 특유의 안타까운 느낌을 강하게 나타낸다.)

2곡 <간주곡> (No.2 Intermezzo in A major. Andante teneramente 3/4)

(브람스가 쓴 「가사 없는 노래」라고도 할 수 있는 곡인데, 주제를 다루는 대위법적 기교가 놀라울 정도로 뛰어나다. 첫머리의 동기는 제31마디 이하에서 저성부에 대위법적으로 놓여지고, 이어서 제35마디 이하에서 전회한다. 중간부는 f#단조로 시작하는데, 거기서 오른손은 모방을 이루며 F#장조로 돌아간 후에도 동일한 모방이 있다. 이후 다시 f#단조가 되면, 이번에는 전회의 모방이 이루어진다. 어쨌든 그런 기교에도 불구하고 부드럽고 친밀해지기 쉬운 곡으로, 노작이라는 평가를 받아 마땅한 곡이며, 브람스의 만년 피아노곡 중에서도 널리 사랑받는 편에 속한다.)

3곡 <발라드> (No.3 Ballade in G minor. Allegro energico 2/2)

(이것도 만년의 피아노곡 중에서 널리 사랑받고 있는 것 중의 하나이다. 그 이유로는 중간부의 B장조 선율의 아름다움이 큰 역할을 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리고 드물게도, 이 중간부에서는 제1부의 선율이 한 번 그대로 나온다. 브람스의 곡에서 이런 일은 거의 없다. 곡은 발라드라고 이름 붙여져 있지만, Op.10 <에드워드 발라드> 이외의 곡과 마찬가지로 어떤 특정한 이야기에 의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야기풍의 극적인 힘은 충분히 보여주고 있다. 곡은 5마디 단위의 프레이즈를 많이 가지고 있는 것도 특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중간부가 C장조의 딸림7을 독일6화음(증6도 음정에 3도와 5도 음정을 삽입한 화음)으로 의미를 바꾸어 B장조로 들어가는 것도 재미있다.)

4곡 <간주곡> (No.4 Intermezzo in F minor. Allegretto un poco agitato 2/4)

(경쾌하면서도 왠지 쓸쓸함이 느껴진다. 이 곡에서는 오른손과 왼손이 거의 항상 카논으로 진행하는 것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곡은 낭만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내면서 F장조로 조용히 끝난다.)

5곡 <로만체> (No.5 Romanze in F major. Andante 6/4)

(바로크 시대, 또는 그 이전의 서법을 연상케 하는 고풍스런 느낌의 로망스. 3부 형식을 취하며, 그 제1부는 4마디 주제에 기초한 변주곡과 비슷하다. 주제는 기본위치의 화음을 많이 사용하며, 중간부에서 8도로 중복하여 주선율을 배치하고, 상성부는 하행풍으로 이 주선율에 대위법을 이룬다.

이어지는 제9마디 이하에서 이 두 가지는 전회한다. 중간부(알레그레토 그라치오소 D장조 2/2박자)도 8마디 단위의 변주처럼 쓰여 있다.

그리고 저성부가 오스티나토풍으로 되어 있는 것도 눈에 띄는 특징라고 할 수 있다. 제3부는 제1부의 단축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마지막에 전회 종지한다.)

6곡 <간주곡> (No.6 Intermezzo in E flat minor. Andante, Largo e mesto 3/8)

(이 곡은 원래 교향곡 제5번의 느린 악장으로 생각했던 것이라 한다. 어쨌든 만년에 접어든 브람스의 심정을 잘 전해주는 곡으로, 애처롭고 쓸쓸하다. 단 3개의 음(G♭/F/E♭)을 느리게 움직이는 동기로 이런 음악이 만들어졌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G♭장조의 중간부는 약간 생기를 되찾아오지만, 역시 제1부의 동기가 모습을 감추고 있으며 내면의 그림자가 그대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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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 소곡집> 1집 (Lyric Pieces Book.1, Op.12)

작곡 시기 : 1866년에서 1867년(?)

출판 : 1867년

(“이 열 권 의 서정 소품집은 삶의 밀접한 단편입니다”. 그리그는 1901년 페터스 출판사의 편집장인 앙리 힌리쉔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적은 바 있다. 1867년부터 1901년 사이에 작곡, 출판한 10권 66곡의 피아노 소품, 즉 서정 소품집이라 불리는 일련의 소품 사이클은 멘델스존과 슈만, 쇼팽이 추구한 피아노 음악의 시적, 함축적 전통을 훌륭하게 이은 낭만주의시대 피아노 소품집의 걸작으로 꼽힌다. 하지만 그리그는 낭만주의 음악의 단순한 승계자는 아니었다. 그의 작품집은 항상 민속음악의 요소를 폭넓게 끌어들였다는 점에서 주목받는데, 이 작품집도 거기에 포함할 수 있다. 1집을 출판할 때 23세였던 청년 작곡가는 마지막 10집을 완성할 때 즈음에는 58세의 원숙한 나이가 되어 있었다. 1집은 주로 코펜하겐에서 청년작곡가로 활동하기 시작했을 무렵의 작품들이 모여 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처음부터 하나의 곡집에 수록할 의도로 작곡된 것들만 들어간 것이 아니라 과거 코펜하겐 시기의 작품도 포함했다. 출판도 이 제1집만은 코펜하겐의 출판사에서 이루어졌다.)

1곡 <아리에타> (No.1 "Arietta" in E flat major. Poco andante e sostenuto 2/4)

(A(1-12)-A'(18-22)-코데타(23). 멘델스존과 매우 닮은 첫 곡 <아리에타>. 겨우 23마디로 이루어진 편안한 소품이다. 부드러운 내성의 반주 화음이 이 곡의 분위기를 아주 잘 말해준다. 이 곡의 선율이 제10집의 마지막 곡 <회상>에서 리듬을 바꾸어 다시 등장한다.)

2곡 <왈츠> (No.2 "Vals" in A minor. Allegro moderato 3/4)

(A(1-36)-B(37-52)-A(53-70)-코다(71-79)로 이루어져 있다. 2곡과 4곡은 민속적인 단순함을 끌어들여 높게 평가받는다. 당시 중부 유럽 음악에 심취해 있던 작곡가는 친구인 리카르드 노르드락으로부터 북유럽의 민속음악의 다양성과 풍부함을 소개받는다. 작곡가는 “눈 앞 에 안개가 끼며 갑자기 내가 가야 할 길을 깨닫게 되었다”라고 회상한 바 있다. 원래 이 곡은 1866년 크리스마스를 위해 작곡한 곡에서 전용한 것이다. 앞뒤가 a단조이고 중간부가 같은으뜸음조인 A장조이다. 노르웨이적인 정서가 감도는 왈츠.)

3곡 <파수꾼의 노래> (No.3 "Vektersang" in E major. Molto andante e semplice 2/2)

(페터스판 악보에는 「셰익스피어의 『맥베스』에서 영감을 얻어」라는 설명이 붙어 있는 것으로 보아 『맥베스』에 나오는 인물인 「야경꾼의 노래」를 토대로 작곡했다고 볼 수 있지만, 다른 설도 있다. 앞뒤에 안정된 리듬의 음악이 나오고, 「밤의 정령들」이라고 표기한 중간부를 삽입했다.)

4곡 <요정의 춤> (No.4 "Alfedans" in E minor. Molto allegro e sempre staccato 3/4)

(가볍고 활달하게 건반 위를 달리는 노르웨이 요정을 표현한 음악이다. 연주 시간이 채 1분이 되지 않는 짧고 간결하며 상쾌한 곡이다.)

5곡 <민요> (No.5 "Folkevise" in F sharp minor. Con moto 3/4)

(많은 연구가들이 쇼팽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지적하는 곡이다. 쇼팽의 마주르카 노르웨이판이라고 볼 수 있는 소박한 춤곡풍 음악이다.)

6곡 <노르웨이 멜로디> (No.6 "Norsk" in D major. Presto marcato 3/4)

(《서정 소곡집》 시리즈에 앞서 단독으로 출판한 소품이다. 노르웨이의 민속 춤곡인 도약춤곡(Springar)을 명쾌한 피아노 연주로 처리한 작품이다.)

7곡 <음악수첩> (No.7 "Albumblad" in E minor. Allegretto e dolce 2/4)

(오른손에 이어 왼손으로 매우 부드러운 선율을 연주하는 소박한 소품이다. 같은 제목의 곡이 제4집에도 나온다.)

8곡 <조국의 노래> (No.8 "Fedrelandssang" in E flat major. Meastoso 4/4)

(결연한 도입부를 가진 당당한 찬가풍의 피아노 음악이지만 끝은 매우 짧고 간결하다.)

 

Posted by 여엉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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