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반일기 / 2017년 11월

음반 2018. 10. 20. 22:35


 2017.11.1 (수)


 칼 뵘 / 브루크너 교향곡 4번 (Decca)


 약간 느릿한 템포. 유려하고 풍성한 소리. 노박판 특유의 검박한 화성. 나쁘지 않은 출발점이나 더 많은 연주를 들어야 한다. 여기에 함몰되지 말라.

 ※ 브루크너 음악에서 방향성을 결정하는 것은 동기발전이 아닌 화성이다. 화성은 차근차근 쌓여가다 정점에서 웅장한 클라이맥스를 이룬다. 하지만 모르고 듣는 입장에서는 지루한 동기 반복과 갑자기 튀어나오는 (물론 아니지만) 주제들로 혼란을 느끼게 될 것이다.



 2017.11.3 (금)


 브릴리언트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에디션 CD 8 (Brilliant)


 한 번 듣고 봉인했던 연주. 페터 담의 드레스덴 호른 연주가 좋다. 켐페는 평범. 오보에 협주곡의 탁월함은 알겠는데, 난 이 곡이 지루하게 느껴진다(2018년 현재는 그렇지 않음). 2008년 어느 날 교향악축제 때 겪었던 끔찍한 기억 때문일까? 코흐/카라얀(DG)으로 들으면 좀 더 나아질까?(실제로 그래서 코흐/카라얀으로 치유함) 클라리넷/파곳의 듀엣 콘체르티노는 이상하리만치 곡이 기억나지 않는다.



 2017.11.5 (일)


 칼 뵘 <발퀴레> 67년 바이로이트 실황 (Philips)


 뵘 반지의 가장 뛰어난 성취. 뵘의 반지를 최고의 반지라 할 수는 없겠으나, 앙상한 가운데 빛나는 강인한 박력은 이 반지 최고의 미덕이다. 배역들은 전성기 끄트머리에 위치한 가수들과 아직 제 역량을 다 발휘하지 못하는 가수들이 섞여 있는데, 다행이 지휘자와 어긋나는 일도, 혼자 튀는 일도 없다. 다만 보탄 역이 테오 아담이 로게를 부르는 순간의 그 허한 가창은 참…….

 ※ 논쟁을 일으키지 않는 바그너는 바그너가 아니다. 바그너를 좋아하는 사람이건 싫어하는 사람이건, 클래식 음악을 듣는 사람은 바그너를 우회할 수 없다. 사이먼 래틀의 말을 빌리자면, '피할 수 없는 괴물'이기 때문이다.



 2017.11.8 (수)


 칼 뵘 <살로메> 70년 함부르크 실황 (Brilliant)


 이 연주는 솔직히 말해 쓰레기다. 뵘의 알슈 연주 중에서도 최하급이다. 왜 뵘을 듣는 이들이 주화입마에 걸리는지 이해가 간다. 이런 형편 없는 연주들을 뵘의 명연이라고 추천하니 안 그럴 수가 있나. 귀네스 존스의 형편없는 가창은 덤이다.



 2017.11.9 (목)


 카잘스 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 1번~3번 (EMI)


 로스트로포비치가 "Rhapsodic"이라 부른 연주. 생각보다 적은 비브라토, 옛 운궁법이 두드러지는 역사적인 연주. 다만 에트빈 피셔의 평균율(EMI)을 들을 때와 같은 애정이 생기지는 않는다. 나의 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의 이상은 슈타커(Mercury)와 장드롱(Philips), 또는 그 두 지점 사이에 위치한 어딘가다.



 2017.11.12 (일)


 카잘스 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 4번~6번 (EMI) / 스토코프스키 스테레오 컬렉션 CD 1, 2, 8 (Sony)


 카잘스의 4번 전주곡 템포는 내가 생각하고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느렸다. 기억이 잘못된 탓일까.

 5~60년대 미국 오케스트라 지휘자들의 파야 애호는 참 독특한 현상이다. 내 취향은 곡도, 연주도 바그너 쪽으로 좀 더 기운다. <잠자는 숲 속의 공주>는 쓰레기같은 피스투라리(Philips)보다는 낫다.



 2017.11.13 (월)


 윌리엄 카펠 RCA 콜렉션 CD 1 (쇼팽 마주르카 발췌) (RCA)


 쇼팽을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마주르카만큼은 좋아한다. 가장 자주 듣는 마주르카 연주가 이것인데, 선곡, 해석, 음색, 루바토 어느 것 하나 모자람이 없다. 카펠은 수식어가 필요치 않은 천재였다.

 ※ 쇼팽은 마주르카를 쓸 때 폴란드 민속음악뿐만 아니라 스카를라티의 자유분방한 건반악기 소나타에도 영향을 받았음이 틀림없다. 자유분방한 마주르카 중 몇 곡을 꼽자면, 우선 Op.7-5 C장조는 언제 들어도 즐겁다. 무슨 일을 해도 즐거웠던 내 20세 무렵의 기억을 되살려주는 곡이다. Op.33-4 B단조는 내가 생각하는 쇼팽 최고의 마주르카다. Op.68-3 F장조에서는 바르톡의 냄새가 난다. 이런 음악을 더 발전시켰더라면 좋았을 텐데…….



 2017.11.14 (화)


 스토코프스키 소니 콜렉션 CD 5 (Sony)


 <카르멘> 모음곡은 프리차이(DG)보다 더 좋다. 스토코프스키는 구린 오케스트라를 맡을수록 능력치가 상승하는 기이한 지휘자였다.



 2017.11.18 (토)


 에셴바흐 쇼팽 전주곡 (DG)


 에셴바흐를 아주 좋아하지만, 이 연주는 너무 소극저기라 호감이 덜하다. 살금살금 다가와 듣는 사람을 설레게 하는 터치와 음색은 그대로지만, 쇼팽 전주곡에는 좀 더 과감한 해석이 필요하다. 그래도 세세한 기호를 세심하게 재현하는 9번은 마음에 들었다.

 ※ 원래 좋아하는 전주곡은 9번과 12번이었는데, 요즘은 2번과 23번에 더 마음이 간다.



 2017.11.19 (일)


 스토코프스키 소니 스테레오 콜렉션 CD 4, 7, 9, 10 (Sony)


 스토코프스키 소니 스테레오 콜렉션 완청. 일단 가장 먼저 거명할 녹음은, 아이브스 연주사에 한 획을 그은 교향곡 4번 연주다. 하지만 들으실 때는 틸슨 토마스/시카고 심포니(Sony)로. 이 연주는 아직 정립이 덜 되었다(특히 3악장).

 시벨리우스는 트럼펫이 마음에 안 드는 것만 빼면 좋은 연주다.

 멘델스존 교향곡 4번/비제 중에서는 비제 교향곡 C장조 쪽이 더 마음에 들었다.

 브람스는 안타깝게도 평범한 연주.



 2017.11.22 (수)


 칼 뵘 <라인의 황금> (Philips)


 한 호흡에 곡을 다 듣게 만드는 뵘의 탁월한 능력은 여전하다. 그러나 좀 더 유장한 흐름이 그립다. 가수들의 수준은 <발퀴레>에서 이미 설명했으니 넘기지만, 미메 역의 볼파르트는 너무 과장된 모습이라 오히려 꺼려진다는 점을 적어둔다.



 2017.11.23 (목)


 브릴리언트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에디션 CD 1 (Brilliant)


 (켐페/드레스덴의 관현악곡)

 <짜라투스투라>는 별로다. 악보를 무시하는 고리타분한 관행이 너무 많다. 13년 전에 녹음한 뵘(DG)보다도 더 고리타분하게 들리면 어쩌라는 말인가.

 <죽음과 변용>은…… 그냥 뵘의 72년 실황(DG)이 그립다.

 <장미의 기사> 모음곡 또한 앞의 둘과 비슷한 수준이다. 켐페는 실황으로만 들어야겠다는 생각이 강해지는 하루였다.


 

 2017.11.25 (토)


 라이너 <세헤라자데> (RCA)


 1악장의 거친 바이올린 고음을 제외하면 모든 것이 완벽한 <세헤라자데>.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랴. (유투브에 올라온 LP 버전을 듣고 생각을 고친다. CD로 리마스터링하면서 본래 색감과 음향을 잃어버리고 왜곡된 중요한 사례 중 하나가 바로 이 연주다.)

 스트라빈스키 <나이팅게일>은 이 곡을 듣게 해준 고마운 연주지만, 좀 더 정교한 새 연주가 필요하다. 이건 너무 낡고 뚱뚱하다.



 2017.11.26 (일)


 브릴리언트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에디션 CD 2 (Brilliant) / 레바인 말러 교향곡 9번 (RCA)


 <틸 오일렌슈피겔>은 그냥저냥. 그런데 성직자 비꼬기 직전에 쉼표 페르마타가 있었던가?

 <돈 후안>도 평범 그 자체.

 <영웅의 생애>에서는 초반에 다른 연주에서 들을 수 없었던, 트럼펫의 낮은 빰빠라 밤- 소리가 들린다. 그런데 그게 전부다.

 말러로 넘어가도록 하자. 레바인은 재능 있는 지휘자다. 박자 내의 강약을 정확하게 딱딱 맞아 떨어지게 하면서 경쾌한 질서를 만들어낸다. 번스타인의 9번(DG)이 왜 무질서하게 들렸는지 이제야 이해가 간다. 박자 내의 강약을 무질서하게 휘저어놓으니 어디가 첫 박이고 어디가 약박인지 알 수가 있나. 레바인의 말러 9번은 연주의 좋고 나쁨을 떠나, 나에게 박자 내 강약 개념의 중요성을 알려준 연주였다.

 (한 마디 더 추가하자면, 레바인은 나에게 깨끗하고 정확한 음정의 중요성도 가르쳐 준 지휘자다. 유투브에서 코플랜드의 <보통 사람들을 위한 팡파르>를 레바인 영상물로 들은 적이 있었는데, 난 그렇게 깨끗하고 정확한 음정을 이전에도 이후에도 들어본 일이 없다.)



 2017.11.27 (월)


 브릴리언트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에디션 CD 18 (Brilliant)


 알슈의 덜 알려진 신비한 음악들. 낭송자가 서사를 진행하는 동안 악기가 음악을 진행하는 멜로드라마는 쇤베르크가 유명하지만, 사실 슈트라우스가 먼저 시도했다. 특히 <이녹 아덴>은 기묘한 얼룩처럼 기억에 남는다.



 2017.11.29 (수)


 브릴리언트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에디션 CD 3 (Brilliant)


 (켐페/드레스덴 관현악곡집)

 <메타모르포젠>은 살 떨리게 소름돈는 카라얀(DG) 말고는 도저히 다른 대안을 생각해 낼 수가 없다.

 <알프스 교향곡>은 반대로 대안이 너무 많다. 어째서 드레스덴이 녹음한 <알프스>는 최고의 결과물이 나오지 않는지 참 궁금하다. 뵘(DG), 켐페, 시노폴리(DG), 루이지(Sony) 모두…….



 2017.11.30 (목)


 브릴리언트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에디션 CD 4 (Brilliant)


 (켐페/드레스덴 관현악곡집)

 <돈 키호테>는 토르틀리에 말고 기억나는 게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 토르틀리에가 생각보다 대단하다. 쿠프랭 편곡은 처음 듣는데, 알슈식 관현악 편곡의 교본으로 보아도 될 듯 하다. 알슈는 쿠프랭을 편곡하면서 속으로 얼마나 즐거워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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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반일기 / 2017년 10월

음반 2018. 10. 20. 22:07


 작년 말부터 음반을 들을 때마다 적어나갔던 일기를 올리기로 했다.

 영 못 써먹을 글이지만, 너그럽게 봐주셨으면 합니다.




 2017.10.3 (화)


 리히테르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 / 차이콥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 (DG)


 나의 첫음반. 첫사랑의 법칙은 이 연주도 예외가 아니다. 물론, 라흐마니노프 2번에서는 바사리의 연주(DG)가 더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나도 그게 무슨 뜻인지 잘 안다. 그러나 리히테르의 연주에는 기묘한 불온함이 살아서 꿈틀댄다. 그 불온함은 빛과 어두움의 아름다운 직조로 이루어져 있다. 그것이 사라지지 않는 이상, 리히테르의 연주가 잊힐 일은 없으리라.



 2017.10.4 (수)


 발터 브람스 교향곡 4번 등 / 콜롬비아 심포니 오케스트라 (Sony)


 예전에는 참 좋아했지만, 이제는 올이 풀린 합주력과 거칠고 탁한 소리가 결점으로 다가온다. 발터를 좋아하신다면 뉴욕필 모노 녹음(Sony)을, 파괴력을 원한다면 클라이버 베를린 실황(Memories Excellence)을, 화려한 음향을 원한다면 카라얀을 권하고 싶다.



 2017.10.5 (목)


 카를로스 클라이버 베토벤 교향곡 5번, 7번 (DG)


 나는 이 유명한 연주를 좋아하는 편이지만, 5번 4악장에서 튀어나오는 갑작스럽고 거친 소리는 좋아하지 않는다. 7번은 그런 것이 덜하지만, 그렇다고 더 낫지도 않다.

 ※ 이제는 7번 3악장이 어떤 구조인지 전보다 더 잘 알지만, 여전히 이 악장을 좋아할 수가 없다. 나는 7번 3악장 스케르초의 획일적인 리듬이 싫다.



 2017.10.6 (금)


 칼 뵘 슈베르트 교향곡 9번 <그레이트> (1976년 8월 25일 실황)


 칼 뵘의 경이로운 연주! 진중한 1악장, 억센 2악장, 기가 막힌 분위기를 자아내는 3악장, 그리고 폭발하는 4악장까지! 1악장 주부의 템포가 좀 아쉽기는 하지만, 이 정도 연주도 못하는 경우가 워낙 수두룩하기에 내 마음속 순위에서는 이 잘츠부르크 실황이 항상 수위를 다툰다.



 2017.10.7 (토)


 에머슨 현악 4중주단의 바르톡 현악 4중주 CD 1 (1번/3번/5번) (DG)


 바르톡의 현악 4중주는 버릴 곡이 하나도 없다. 꿈틀대는 반음계가 무조를 향해 천천히 나아가는 1번, 전성기 특유의 난해함을 자랑하는 3번, 완벽한 4번을 넘어 궁형구조의 심화를 이뤄낸 유쾌한 5번을 들었다. 에머슨의 연주는 잘 정리한 경지마냥 깔끔하다. 바르톡을 입문하고 싶다면 이 연주를 반드시 거쳐야만 한다.

 ※ 5번이 4번에 비해 덜 들리는 이유는 더 규모가 크고, 발전이 교묘하며, 동기를 잊어버릴 즈음에야 다시 등장시키기 때문이다. 하지만 5번은 4번 못지않은 걸작이며, 어떤 측면에서는 4번을 뛰어넘었다.



 2017.10.8 (일)


 쿠벨릭/베를린 필 드보르작 교향곡 8번/9번 (DG)


 쿠벨릭을 들을 때마다 항상 느끼는 것은 진리를 추구하는 진지한 이미지(이것이 심하면 연주가 재미없어진다), 응집력이 부족해서 약간 퍼지는 음향, 그리고 체코 음악에서 발휘하는 호방함이다. 이 연주는 호방함 대신 진지함이 두드러져 듣는 재미는 덜마다. 쿠벨릭의 명연은 <장엄 미사> 77년 실황(Orfeo) 같이 진지함이 구도의 경지에 이르렀거나, <타라스 불바>(DG) 같이 한껏 호방해질 때 등장한다. 단, 베를린 필의 소리는 언제나 1급이며, 플루트(제임스 골웨이)의 긴 호흡은 언제 들어도 대단하다.



 2017.10.9 (월)


 토마스 비첨 / 로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멘델스존 교향곡 4번 <이탈리아> (BBC)


 시원시원하게 뻗는 유쾌한 연주! 영국 지휘자 중 가장 탁월한 능력을 갖춘 지휘자답다.



 2017.10.10 (화)


 에밀 길렐스 <서정 소곡집> 20곡 발췌 (DG)


 길렐스 음색의 교본. 음색의 고유함이라는 측면에서 그는 호로비츠와 맞먹는 거장이다. 백 번 정련한 금속의 순수함과 고결함, 눈이 시린 광채와 강건함을 모두 지닌 피아니스트.



 2017.10.11 (수)


 호로비츠 스카를라티 소나타 18곡 발췌 (Sony)


 그는 터치와 페달링에 통달했다. 다만 몇몇 곡은 지루하고, 쳄발로 연주가 낫다는 생각도 든다. 그의 음악성은 차이콥스키의 <둠카>, 라흐마니노프, 스크리아빈 같은 레퍼토리에서 더 빛을 발한다.

 들으면서 항상 생기던 의문 하나 추가. 마지막 세 곡의 배치가 궁금하다. 16번째 곡은 D단조 곡이지만 마지막에 장조로 전환하며 희망을 주면서 끝나며, 17번째 G장조 곡은 밝고 화사하다. 하지만 마지막 18번째 곡은 C단조라는 작은 반전을 주면서 끝난다. 이게 호로비츠가 의도한 배치라면, 그럴 만도 하다.



 2017.10.12 (목)


 루빈슈타인 쇼팽 발라드/스케르초 (RCA)


 붉은 우단빛 음색을 가진 피아니스트 루빈슈타인. 그의 연주가 가진 생명력은 생각보다 훨씬 길다. 다만 이 스튜디오 음반은 이제 추천 1순위라고 하기에는 좀 아쉽다. 쇼팽의 광활한 시상을 거침없이 전개하는 발라드 연주와, 영혼의 빛과 어두움을 전개하는 스케르초 모두 좀더 달콤하면서도 어두운 연주를 찾게 된다. 특히 발라드 3번은 라흐마니노프의 1925년 연주를 들은 후로는 거기에 홀려버려서…….



 2017.10.13 (금)


 리히테르/라인스도르프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 2번 /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열정> (RCA)


 리히테르는 1960년 당시 자기 연주의 평균치 이하를 들려준다. 라인스도르프가 잡은 시카고 심포니의 연주는 솔직히 말해서 너무 구리다. 리히테르와의 합도 잘 맞지 않는다. 피아노는 템포를 죄였다 풀면서 가고 싶은데, 지휘는 쪼으기만 하는 게 대놓고 느껴질 정도다.

 커플링 곡인 <열정>은 옛날부터 고전으로 유명했다. 완성도는 실황이나 스튜디오나 크게 차이나지 않는다.

 ※ 우리를 삶으로부터 초탈하게 만들어주는 <열정> 2악장의 신성함과 심오함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갈기갈기 찢어 바치는 마음의 음악이라 해야 할까. 아니면 음침한 1악장과 격렬한 3악장 사이에 불안하게 자리잡은 먹먹하고 막막한 평화라고 해야 할까. 조용하고 고요하지만 앞뒤에 놓인 심연을 생각하면 코끝이 찡해진다.


 

 2017.10.15 (일)


 카라얀 시벨리우스 교향곡 4번~7번 (60년대 연주) (DG)


 깊은 잔향과 넓은 공간감, 세련된 해석이 일체를 이룬 수연. 힘과 추진력을 원한다면 50년대 연주(EMI)를 찾아야 하지만, 세련미에 있어서는 60년대 DG반을 뛰어넘는 연주를 찾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 시벨리우스 교향곡 4번에는 죽음과 함께 보냈던 시간이 축적되어 있다. 빽빽하게 뭉쳐진 음표들이 암덩어리같은 화음을 만들어 내면, 음울한 음악이 삶의 빛과 어두움을 성찰한다. 악장은 음-양-음-양의 구성을 취한다. 글로켄슈필이 대표하는 환상이 모두 허무였음을 깨닫는 4악장의 결말은 들으면 들을수록 기이하다.



 2017.10.18 (수)


 미트로풀로스의 모차르트 <돈 조반니> (Sony)


 완벽한 연주! 돈 조반니 역의 시에피도 위대하지만, 극명한 차이를 보이는 세 명의 여자 배역이 이 연주의 키포인트다. 복수를 꿈꾸는 고귀한 돈나 안나 역의 그륌머, 애증을 품고 돈 조반니를 추적하는 돈나 엘비라 역의 델라 카사, 그리고 순진하고 앙증맞은 체를리나 역의 슈트라이히까지. 거기에 기민해야 할 때와 관망해야 할 때를 귀신같이 아는 미트로풀로스의 지휘까지. 그야말로 신이 내린 타이밍에 나온 기가 막힌 연주다.



 2017.10.21 (토)


 칼 뵘의 슈트라우스 <엘렉트라> (DG)


 가수들도 뛰어나지만, 이 연주를 이끌고 구원하는 이는 다름아닌 지휘자다. 칼 뵘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연주사상 가장 거대한 두 이름이다(나머지 하나는 카라얀). 물론 이 연주가 칼 뵘 최고의 알슈 연주는 아니지만, 본능에 따라 두들기는 팀파니 연타만으로도 이 연주는 충분히 위대하다.



 2017.10.22 (일)


 스토코프스키 소니 스테레오 컬렉션 CD 3번과 6번 (Sony)


 음과 색채의 마술사 스토코프스키의 놀라운 소품집. 그리고 굴드와 함께한 베토벤 <황제>. 소품집은 마지막 쇼팽 전주곡 연주의 페르마타가 아주 인상 깊었다. 굴드와 함께한 <황제>는 도입구를 빼면 평범한 편이다.



 2017.10.23 (월)


 프리차이/안다 바르톡 피아노 협주곡 전곡 (DG)


 프리차이는 바르톡을 연주할 때 집중력 200% 향상 버프가 걸린다. 늘 미덥지 못한 결과물만 내놓는 베를린 라디오 심포니 오케스트라는 적어도 이 연주에서만큼은 프리차이의 의도를 정확하게 간파하고 나쁘지 않은 연주를 들려준다. 안다의 피아노는 안정감 있게, 무난히 바르톡의 음악을 연주한다. 다만 피아노와 지휘자, 오케스트라 모두 정해진 허들을 넘을 생각은 별로 없어 보인다. 유달리 얌전떠는 구석이 많다는 얘기다.



 2017.10.24 (화)


 칼 뵘 / 빈 필 베토벤 <전원>, 슈베르트 교향곡 5번 (DG)


 고현의 비브라토를 거의 없애다시피해서 많이 거칠다. 들으면 들을수록 장점은 줄어들고, 단점은 크게 느껴지는 그런 연주. 커플링 된 슈베르트 5번은 차라리 베를린 필 전집(DG)이나 실황 연주를 찾는 게 낫다. 소년의 싱싱한 생동감을 자랑하는 슈베르트 교향곡 2번 실황(Orfeo) 같은 모습을 애초에 스튜디오에서 기대하는 게 무리지만……….



 2017.10.27 (금)


 하스킬/마르케비치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0/24번 (Philips)


 하스킬의 피아노 소리는 여전히 매력 있다. 마르케비치의 지휘는 그냥 거칠다. 피아니스트와 지휘자가 완전히 다른 템포 개념을 가지고 연주를 하는 것 같다. 참고로 이 연주에는 웃기게 들리는 실수가 하나 있는데, 20번 1악장 카덴차가 끝나고 관현악이 복귀할 때 바이올린 주자의 음이탈이 그것이다.



 2017.10.29 (일)


 리히테르/로스트로포비치 베토벤 첼로 소나타 전곡(Philips), 칼 뵘 모차르트 교향곡 35-41번(DG)


 둘 다 이제는 너무나 지겨운 연주다. 틀에 박힌 베첼소 연주, 그리고 환장할 정도로 고리타분한 뵘 모교는 이제 몇 년 동안 들을 일이 없다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낄 정도다. 다만, 장드롱의 첼로 변주곡에는 약간의 흥미가 생겼다.



 2017.10.31 (화)


 칼 뵘 모차르트 목관 협주곡집 (DG)


 아주 길고, 아주아주아주 지루한 연주. 뵘이 지휘하는 현은 좀 앙상하게 들린다. 느린 템포에서도 전혀 흐트러짐 없이 꼿꼿하게 연주하는 관악기 연주자들(물론 스튜디오라서 그렇겠지만)의 실력만큼은 참으로 훌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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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토프 베르트랑

 

 

 

크리스토프 베르트랑. 1981424일 생, 2010917일 자살.

내가 크리스토프 베르트랑의 삶에 대해 아는 것은 이것이 전부다. 그리고 그의 생에 대해 할 얘기도 저것이 전부다. 내가 이 작곡가에 대해 하려는 말은 전부 음악에 관한 것이니까.

난 저번 달까지만 해도 그의 음악을 잘 몰랐다. 부끄럽지만, 얼마 전까지는 그의 존재 자체를 모르고 있었다. 이제 와서야 뒤늦게 그의 음악을 듣고 이런 글을 남기는 것은, 아방가르드 음악을 듣는 사람으로서 이런 글은 남겨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베르트랑은 짧은 생에 어울리게 과작했다. 물론 과작이 누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아쉽기도 하다. 내가 글을 쓰려는 그의 곡은, 그 중 세 개다.

 

첫 번째 곡 <스케일>. 제목 그대로 쉴 새 없이 이어지는 스케일의 연속이 귀를 훑고 지나가는 곡이다. 곡을 들으면서 제일 먼저 떠올린 문장은 본능이 소리를 육화시킨다는 것이었다. 베르트랑은 넘쳐흐르는, 아니 터져 나오는 음향의 세례를 영리하게 소리로 육화시킬 줄 알았다. 그는 젊은 작곡가가 재능과 감각으로 아방가르드 음악의 기교들을 휘저으면 얼마나 기가 막히게 청각을 자극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수시로 등장하는 엇갈리는 인토네이션은 음향의 교란을 극단으로 끌고 가고, 중반부 지속음 사이에서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스케일의 연속은 마치 바다 위에서 피어오르는 섬 같다. 클래식 음악을 듣는 이에게는 걸음마만큼이나 기초적인 스케일이라는 소재로 이런 대곡을 만든 재능이 놀랍다.

 

두 번째 곡 <현기증>. 11개의 섹션으로 이루어진 곡이다. 작곡가가 여기에 피보나치 수열을 도입했다고 하는데, 그건 일단 제쳐놓고 느낌 받은 대로 쓰겠다. 일단 귀에 들어오는 것은 온갖 형태의 지저분한 소리였다. 논 비브라토, 글리산도, 콜 레뇨, 불협화음으로 이루어진 스케일 등등…… 그러나 이것들은 기본 도구다. 베르트랑은 이 소재들을 꼬고 꼬고 또 꼰다. 온갖 지저분한 소리들의 협착이, 반대로 정묘한 형상을 일구어낸다. 12, 23으로, 35, 58, 813으로 꼬여 들어간다. 물론, 작곡가는 어디까지 꼬아야 아름다움이 극대화되는지 알고 있다. 다시 138, 85, 53으로, 32, 21로 풀려나간다. 그 꼬이고 풀려나가는 과정은, 물질계의 단순한 형상이 집합해 복잡한 형상을 이루고 역으로 살펴보면 다시 단순함을 획득하는 피보나치 수열과 같다.

 

마지막 곡 <마나>. 들은 순서대로 썼기 때문에 이게 가장 대단했다 그런 거 없이 그냥 이게 마지막이다. 이 곡은 앞에서 들었던 두 곡의 시원이다. 글을 쓰기 직전에 지인이 기교는 툴박스에 불과하다는 얘기를 해주었는데, 여기서 쓰이는 음악적 기교들은 베르트랑의 환각을 형상화하기 위한 공구에 불과하다. 베르트랑이 이 곡에서 사용하는 아르페지오와 오스티나토 용법이 완전히 새로운 것인가? 꼭 그렇지만은 않다. 그렇다면, 베르트랑의 아르페지오와 오스티나토 용법은 놀라운가? 그런 정도가 아니다. 그는 스물다섯 나이에 선배들의 업적을 완전히 소화했다.

그런데, 중반에 들리는 아코디언에서 그리제이 <파르티엘> 연상한 사람 혹시 있나?

 

한줄 평 : 놀랍다. 역시 세상은 넓고 들을 것은 많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는다.

그런데 드는 의문 : 왜 천재는 요절하지 않으면 요절하려 할까.

Posted by 여엉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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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음 선정 1945-2009

음악 2018. 8. 17. 02:58


 전부터 생각하고 있던 거였는데, 아무래도 지금이 아니면 안될 것 같아서 간략하게나마 써본다.

 아방가르드 음악이 많이 들어가기는 하지만, 제 평소 취향을 잘 아시는 분들께서는 '이런 음악도 여기 뽑아?'라는 느낌이 드는 놈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굳이 '아방가르드'가 아니더라도, 반영하고 있는 시대에서 반 걸음이라도 앞서나가는 음악이라면 뽑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본다.

 그래서 여기 뽑힌 음악들을 '아방가르드' 음악이 아닌 '현대'음악이라고 칭한 것이고.




 1945 : 슈트라우스 <메타모르포젠>, 스트라빈스키 <3악장의 교향곡>

 - 첫 빠따부터 공동선정. 처음에는 슈트라우스 단독이었다가, 나중에는 스트라빈스키 단독이었다가, 결국 오늘 마음을 정해 공동 선정으로 가기로 했다. 난 기분 좋은 날에는 <3악장의 교향곡>이 더 좋다가, 기분 나쁜 날에는 <메타모르포젠>이 더 좋아진다. 두 음악은 시대의 분기점인 1945년을 각자의 시각으로 캐치해 담아냈다. 그러므로 같이 뽑지 않을 이유가 없다.


 1946 : 쇤베르크 <바르샤바의 생존자>

 - 이견이 없는 1946년의 현음. 3개의 언어로 분리된 3개의 세계. 그 지옥 속에서 발버둥치는 사람들. 노년까지 거장의 풍모를 잃지 않았던 쇤베르크 후기 역작.


 1947 : 코플랜드 <클라리넷 협주곡>

 - 솔직히 인정하겠다. 이건 빈집털이가 맞다. 하지만 시대를 풍미한 명 클라리네티스트 베니 굿맨의 역량을 최대한으로 끌어낸 곡은 이 곡뿐이다. 미국의 진보주의자들이 그리는 루즈벨트 시대에 대한 향수를 가장 잘 자극한 작곡가는 아무래도 코플랜드가 아닐까.


 1948 : 메시앙 <투랑갈릴라 교향곡>

 - 이 매머드 같은 작품은 메시앙 역사상 가장 화려한 음향을 자랑한다. 옹드 마르트노의 물결 속에서 듣는 사람을 지고의 사랑에 빠지게 만드는 초월적 대작.


 1949 : 쇤베르크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환상곡>

 - '왜 하필이면 이 곡이냐'고 물을 것 같다. 그런데, 난 불레즈나 슈톡하우젠이 이 시기에 대작을 내놓았어도 이 곡을 꼽았을 것 같다. 이 곡은 바이올린 역사상 가장 어려운 곡 중 하나이며, 수백 년동안 변화와 발전을 거친 바이올린의 역사를 응축한 곡이다. 쇤베르크는 이 곡으로 자신의 마지막 자존심을 지켰다.


 1950 : 쇼스타코비치 <24개의 전주곡과 푸가>, 메시앙 <4개의 리듬 연습곡>

 - 45년에 이은 공동선정인데 공교롭게도 둘 다 피아노곡이다. 쇼스타코비치를 꼽은 이유는, 이 곡이 쇼스타코비치의 모든 곡을 통틀어 가장 매너리즘이 적고 다른 세계로의 모험이 강한 곡이기 때문이다. 노노의 음렬음악을 연상시키는 15번 푸가가 아니었다면 이 곡을 꼽지 않았을 것이다.

 메시앙은 쇼스타코비치와는 달리 큰 고민 없이 꼽았다. 2번 <음가와 강세의 모드>가 아니었다면, 50년대 음렬음악도 존재할 수 없었다.


 1951 : 브리튼 <빌리 버드>

 - 쇼스타코비치에 이어서 브리튼! 근본주의자 분들께서는 눈썹을 꿈틀거리며 노기충천하시겠지만, 잠시만 진정해달라. 곧 음렬음악의 시대가 올 것이니.

 브리튼의 오페라는 냉정한 심리극과 현대음악의 원칙들을 오밀조밀하게 조화하는 법을 잘 안다. 상관을 살해하고 교수형의 위기에 처한 주인공 빌리를 둘러싼 심리극은 시간이 지나도 쫄깃한 맛이 있다.


 1952 : 불레즈 <구조> 1권

 - 이견의 여지가 없는 음렬음악의 걸작. 음악의 쿼크 단위까지 쪼개서 정렬하고 배열하겠다는 클음계의 로베스피에르 불레즈의 냉혹한 천재성이 빛나는 작품.


 1953 : 존 케이지 <피아노를 위한 음악>

 - 불세출의 음악 발명가, 음향 발명가 존 케이지. 케이지는 <피아노를 위한 음악>을 평생 썼지만, 유독 1953년에 많은 곡들이 쏟아져 나왔기 때문에 이 해의 음악으로 선정하게 되었다. 그는 음악에 대한 사고방식을 영원히 바꾸어 버렸다. 나는 그의 음악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그의 음악이 없는 음악사는 완성되지 않기에 그에게 이렇게 자리를 바친다.


 1954 : 제나키스 <메타스타시스>

 - '추계음악'이라는 모토를 내세우고 음향설계에 평생 몰두한 그리스 출신의 이단아 제나키스. 그는 이 곡으로 멋지게 출발했다. 다소 부침이 있기는 했지만, 음향음악의 역사에서 그를 제외할 수는 없다.


 1955 : 불레즈 <주인 없는 망치>

 - 고작 30의 나이에 한 분야에서 정점에 도달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 이 냉정한 천재는 그걸 해냈다. '얼음이 잔 속에서 짤랑거리는 소리'가 난다는 스트라빈스키의 표현처럼, 이 곡에 감돌고 있는 서늘한 큐비즘은 들을 때마다 전율이 인다.


 1956 : 노노 <일 칸토 소스페소>

 - 노동자와 아방가르드 음악을 조합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무의미한 일처럼 느껴진다. 노노는 이 일에 평생을 천착했고, 성공했다는 점에서 특이한 사례다. 그의 음렬음악은 항상 붉은색을 떠올리게 한다. 붉은 깃발, 붉은 피, 그리고 붉은 태양. 난해하지만, 그만한 가치를 보장하는 작품.


 1957 : 슈톡하우젠 <그루펜>

 - 불레즈 <주인 없는 망치>와 함께 50년대 음렬음악의 양대 산맥. 슈톡하우젠은 알프스 산맥의 장엄한 풍광을 만끽하면서 이 곡을 썼다는데, 당연히 곡의 스케일도 알프스 산맥 급이다. 109명의 연주자와 3명의 지휘자를 필요로 할만큼 작곡가의 야심은 컸다.


 1958 : 메시앙 <새의 카탈로그>

 - 전설의 새도감! 난 이 작품을 사랑한다. 메시앙은 새를 가지고 음향의 다큐멘터리를 창조한다. 다른 곡은 몰라도 <개개비>는 꼭 들으시길 바란다. 27시간의 관찰이 30분이라는 시간 속에 농축된, 신과 자연과 새와 흐름의 음악이니.


 1959 : 스트라빈스키 <피아노와 관현악을 위한 무브먼트>

 - 이 곡이 꼽힌 이유는 역시 1959년이 묘하게 대곡 가뭄이 있었던 것도 있다. 이 곡은 스트라빈스키의 12음 음악을 통틀어 가장 어렵고 난해하다. 그는 이 곡에서 음렬음악의 경지에 도달한다. 오브제를 다루듯 냉정하게 작업하던 1920년대 그의 태도가 여기서 되살아난 것 같다.


 1960 : 펜데레츠키 <히로시마 희생자를 위한 애가>

 - 펜데레츠키는 '한곡갑' 이미지가 강하고 실제로도 그런 감이 없지 않지만, 1960년 당시 이 곡이 나왔을 때의 충격은 솔직히 말해서 3.3혁명 급이었다. 다음 해를 장식한 음악과 함께, 음렬음악의 시대를 밀어내버리고 음향음악의 시대를 열어버린 곡.


 1961 : 리게티 <아트모스페르>

 - 현대음악을 다루면서 이 곡이 나오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하다. 위의 곡과 함께 '음렬'의 시대를 지우고 '음향'의 시대를 열어버린 곡.  27개로 나누어진 음향 덩어리가 9분이 넘는 시간 동안 움직이면서 만들어내는 '대기' 그리고 '분위기'를 <2001>의 스타게이트 장면과 함께 감상하시라.


 1962 : 리게티 <아방뛰르>

 - 2년 연속 같은 작곡가가 선정되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아방뛰르>의 스타일은 <아트모스페르>와 극단적으로 다르다. 우아하고 부드러우며 신비스러운 목소리로 유혹하는 <아트모스페르>와는 달리, <아방뛰르>는 소리치고 날뛰며 자지러지게 웃고 꺽꺽거린다. 60년대 리게티 음악은 <아트모스페르> 스타일과 <아방뛰르> 스타일의 융합과 변주였다.


 1963 : 번스타인 <교향곡 3번 카디쉬>

 - 솔직히 이 결정은 많이 아쉬웠다. 번스타인을 반드시 꼽아야겠다는 생각은 있었지만, 난 <치체스터 시편>이나 <미사 브레비스>를 꼽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곡들을 만든 해에는 강력한 명곡들이 버티고 있어 실패. 어쩔 수 없이 들어간 감이 있기는 하지만, 번스타인은 분명 20세기 클래식 역사상 가장 과소평가당한 작곡가다.


 1964 : 메시앙 <그리하여 나는 죽은 자들의 부활을 소망한다>

 - 메시앙의 이 곡만큼 시대를 강렬하게 반영하는 곡도 없다. 그는 자신이 겪은 2차대전의 경험을 여기에 녹였다. 무가치하게 느껴질 정도로 무수히 죽어간 존재들은, 원자폭탄의 빛만큼이나 강렬한 성령의 인도를 받아 새로운 육체를 입고 되살아난다.


 1965 : 리게티 <레퀴엠>

 - '혼 없는 자의 혼노래.' '어둠의 미사.' 앞의 곡과 똑같이 2차대전의 기억이 담긴 곡이지만, 리게티의 <레퀴엠>에서 메시앙의 강렬한 신앙과 부활에 대한 소망은 1도 찾아볼 수 없다. 불길한 시작과 끝을 암시하는 <입당송>과 <라크리모사>, 초월적 음향의 결정체인 <키리에>, 임박한 종말에 대한 강렬한 공포가 위안을 짓누르는 <진노의 날>. 그야말로 완벽한 '레퀴엠'이다.


 1966 : 스트라빈스키 <레퀴엠 칸티클스>

 - 2년 연속 레퀴엠 선정. 스트라빈스키의 마지막 걸작. 노작곡가의 날카로운 감각은 84세라는 나이에도 전혀 죽지 않는다. 투명하고 정묘한 텍스처는 신심의 심지에 서늘한 불꽃을 피워올린다.


 1967 : 카헬 <국립극장>

 - 솔직히 말하자면, 카헬의 가장 유명한 이 '오페라(?)'는 내가 보고 들었던 아방가르드 음악을 통틀어 가장 괴이하고 괴상망측한 음악극이다. 성악가들은 악보에 없는 소리를 질러야 한다. 춤을 춰본 적 없는 사람들이 무용을 담당해야 한다. 막판에는 체조선수까지 나와서 쇼를 한다. 정신줄 놓기 딱 좋은 음악극이지만, 카헬은 슈톡하우젠같은 돌아이가 아니다. 오히려 너무 열정적이고 성실한 성격이었기에 음악극을 극한으로 실험해본 이런 작품이 나온게 아닌가 싶다. 어쨌거나 카헬의 이 문제작은, 그 이후의 음악극이 나아갈 방향을 결정해버렸다.


 1968 : 베리오 <신포니아>

 - 이 곡과 대결한 곡은 리게티의 <현악 4중주 2번>이었다. 한 작곡가의 스타일이 집약된 걸작과 다른 작곡가의 인생작이 대결한 셈인데, 결국 걸작은 인생작을 이기지 못한다는 진리를 알려주는 예시가 되었다. 베리오의 이 곡은 단순한 콜라주 작품이 아니다. 베리오는 음악사의 연표 제시로 만족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천 년의 음악흐름 속에서 따온 주제들은, 작곡가의 풍요로운 아이디어와 구성 속에 스르르 녹아든다. 베리오는 총천연색으로 빛나는 콜라주 속에서 승리의 미소를 짓고 있었으리라.


 1969 : 침머만 <젊은 시인을 위한 레퀴엠>

 - 1969년은 온갖 스타일의 현음이 대폭발한, 다시 오지 못할 현음 최대의 전성기였다. 이 해를 놓고 경쟁한 후보는 모두 쟁쟁한데, 메시앙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현성>, 슈톡하우젠 <슈티뭉>, 제나키스 <시나파이>, 카터 <관현악을 위한 협주곡> 등 걸작들만 모여 있다. 하지만 결국 왕좌를 차지한 것은 이 곡이다. <관객모독>을 떠올리게 하는, 공허하지만 섬뜩한 텍스트의 누적. 텍스트는 사라지지만, 텍스트로 인해 쌓인 감정은 빠져나갈 길이 없다. 20세기를 수놓았던 극단적 이데올로기들의 폭격이 감상자를 강타한다. 다음 해 벌어진 작곡가의 자살은, 마치 이 곡의 결말은 그것밖에 없었다는 섬뜩한 여운을 남긴다.


 1970 : 슈톡하우젠 <만트라>

 - 곡이 난해하냐 아니냐를 떠나, 이곡만큼 사람 정신을 돌게 만드는 곡도 없다. 슈톡하우젠의 돌아이 같은 정신상태는 <그루펜> 같은 음렬음악의 걸작이 아닌, 오히려 <만트라>나 <이노리> 같은 곡들에서 정점을 찍는다.


 1971 : 라이시 <드러밍>

 - 미니멀리즘에 대한 시각이 어떻든 간에, 라이시가 음악사의 흐름을 바꿔버린 사람이라는 점은 인정하고 넘어갈 수밖에 없다. 모험을 좋아하고 도전적인 이 사내는 아프리카 음악 공부를 위해 가나에 갔다가 모기 공습을 받고 말 그대로 훅갈뻔 하지만, 약 먹고 뻗은 상태에서 접신이라도 했는지 이 작품을 턱 내놓는다. 미니멀리즘은 들으면 들을수록 머리가 깨끗이 비워지는 느낌이지만, 이곡만큼은 그 흥겨움과 계산이 전혀 유치하지 않다.


 1972 : 리게티 <시계와 구름>

 - 이 곡이 이 해의 현음으로 꼽혔다는 사실 자체가 아방가르드 음악이 처한 위기를 반영하는 것 같다. 리게티를 비롯한 대부분의 아방가르드 작곡가들은 창작의 위기를 겪고 있었다. 미니멀리즘은 대중성을 등에 업고 강력하게 치고 올라오고 있었으며, 록음악은 빠르게 아방가르드의 스타일을 흡수해나갔다. 내적 갈등도 심각했으니, 리게티 본인의 말처럼 '앞은 벽, 뒤는 과거'가 그들을 가로막고 있었다. 이 곡의 스타일은 대조적인 형상의 융합을 이루지만, 이전에 했던 몸짓을 반복한다는 인상을 버리기 힘들다. 분명 잘 만들어진 곡이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생경하지 않다.' 그래도 위기의 시대를 반영한다는 점에서 이 곡은 매우 중요하다.


 1973 : 쿠르탁 <놀이들>

 - 만약 누군가 '쿠르탁의 곡을 듣고 싶은 데 어떤 곡부터 들어야 하나'라고 물으신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겠다. '아무 곡이든.' 그의 곡은 출발점이나 가이드를 요구하지 않는다. 어떤 이들은 너무 난해하다면서 학을 떼겠지만, 어떤 이들은 언제 들어도 생경한 조합에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음악 본연의 즐거움에 충실한 이 소품 모음집에서도 쿠르탁의 생경함은 빛을 잃지 않는다.


 1974 : 메시앙 <협곡에서 별들에게>

 - 메시앙 그랜드 캐년을 가다! 그는 자연이 억겁의 세월 동안 조각해 낸 형상을 보고 인류의 시원을 더듬어나간다. 신의 시원, 별의 기원, 우주의 태초를 향해 음표들이 헤엄친다. 그들 모두를 감싸안는 것은, 포근한 불협화음의 빛이다.


 1975 : 그리제이 <파르티엘>

 - 이 해의 현음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골리앗을 밀어낸 다윗'이 되겠다. 소품이 대곡을 밀어내버렸다. 음악사적으로 중요한 사건보다는 곡의 완성도를 택한 셈이다. 이 해는 음악사상 기념비적인 '필립 글래스의 <해변의 아인슈타인>이 나온 해'지만, 난 이 곡을 선택했다. 한 개의 음표(E)에서 뽑혀나와 기묘한 형상으로 변형되어가는 배음렬의 환상에 취하다보면 정신줄을 자꾸 놓는다. 그리제이는 분명 더 유명해질 필요가 있는 대작곡가였다.


 1976 : 베리오 <코로>, 시메온 텐 홀트 <칸토 오스티나토>

 - 세 번째 공동선정. 베리오의 중기 걸작인 <코로>는 당당한 작품이지만, 무명에 가까운 이 네덜란드 미니멀리즘 작곡가의 작품은 조심스럽고 신비하며 좀처럼 앞으로 나서려 하지 않는다. 하지만, 한 번 빠져들기 시작하면 이 작곡가의 매력에서 결코 쉬이 헤어나올 수 없을 것이다.


 1977 : 리게티 <르 그랑 마카브르>

 - 이 곡의 음악사적인 영향력이나 위치를 생각한다면 '리게티의 <피델리오>'가 되지 않을까. 이전의 오페라들-헨델과 글루크와 모차르트까지 전부 포함한-을 뛰어넘는 야심작을 쓰겠다고 덤벼든 베토벤의 10년 고행이 <피델리오>라는 '뭔가 2% 아쉬운 문제작'이 되어버렸듯, '안티-안티 오페라'를 쓰겠다고 나선 리게티의 노력도 분명 '대단하기는 한데 애~매한 문제작'을 남겼다. 그렇다고 해서 이 곡을 밀어내버릴 수는 없다. 이 곡을 들을 시간이 안 되신다면, 네크로차르를 대놓고 까는 <영웅> 교향곡 패러디 부분이라도 들어보시라. 빵 터지게 될 테니.


 1978 : 쿠르탁 <안드레스 미하일리에 대한 오마주>

 - 쿠르탁은 서두르는 법이 없다. 다작을 하는 작곡가도 아니다. 하지만 특유의 생경한 분위기와 다이아몬드처럼 응축된 구조를 듣고 있으면 저절로 그의 노력과 노고, 거장다운 풍모에 수긍하게 된다. 10분 내외의 짤막한 음악인 이 곡은 이 해에 만들어진 음악 중에서 적수가 없을 정도로 완성도가 높다. 위에도 말했듯, 쿠르탁의 곡은 어떤 곡을 잡고 시작하든 후회하지 않는다.


 1979 : 제나키스 <플레이아데스>

 - 중년 이후의 제나키스는 타악기를 통해 표현하는 복잡한 리듬 구조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한스 폰 뷜로의 명언인 '태초에 리듬이 있었다'는 명제에 공감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는 타악기가 가진 특유의 제례적 성격에 빠져든다. 이 곡은 타악기와 마림바로 구축하는 성단의 음악이다.


 1980 : 뮈라유 <곤드와나>

 - 그리제이와 함께 스펙트럴리즘의 대가로 거론되는 뮈라유 최고의 작품. 제목처럼 '원시 대륙스러운' 작품이기도 하지만, 그런 단순한 설명만으로는 인공위성에서 바라보는 지구의 모습처럼 여기서 표현되는 무수한 디테일을 놓치기 쉽다. 이 곡은 현미경으로 들여다볼 만한 가치가 있다.


 1981 : 그리제이 <솔로를 위한 이중주>

 - 클라리넷, 트롬본. 두 둔중한 솔로가 만나 듀엣이 되었다. 이 작은 편성의 곡이 어떻게 이 리스트에 들어갈 수 있느냐고 물으신다면, 일단 들어보라. 그리고 클라리넷이 주는 폐관진동의 아름다움과, 트롬본이 선사하는 포지션 변경의 아름다움을 느껴보시라.


 1982 : 글래스 <코야니스카시>

 - 이 곡을 선택한 이유는 다른 게 아니라, 클래식 음악가들이 영화음악으로 얼마나 큰 성공을 거둘 수 있는지를 잘 알려주고 있기 때문이다. 희대의 명장면인 <프루이트 아이고>에 글래스의 음악이 없었다면 그 정도로 유명해질 수 있었을까? <왓치맨>에서 글래스의 음악을 쓰지 않았다면, <왓치맨>이 그렇게 강렬한 인상을 남길 수 있었을까? <인터스텔라>가 <코야니스카시>의 스타일을 가져다쓰지 않았다면, <인터스텔라>가 그렇게 흥행할 수 있었을까? <코야니스카시>의 영향력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크다.


 1983 : 볼프강 림 <투투구리>

 - 노력하는 천재 볼프강 림의 초기 작풍을 대표하는 <투투구리>. 어지간한 오페라 규모의 대작이라 쉽게 듣기는 힘들겠지만, 그 노력을 보상하고도 남는 음향과 형식의 새로움이 있다. 전통의 무게에 짓눌리고도 남을 위치에 있는 작곡가가, 이토록 신선한 명곡을 뽑아낼 수 있다는 점은 그를 항상 주목하게 만든다.


 1984 : 펠드먼 <필립 거스턴을 위하여>

 - 베베른과 미니멀리즘을 잇는 비만 체형의 웜홀 모튼 펠드먼. 그의 작품들은 <비올라 인 마이 라이프> 같은 초중기도 좋지만, <필립 거스턴을 위하여>를 위시한 후기작품들은 안개처럼 스며드는 맛이 있다. 길이는 <파르지팔> 급이지만, 지루함을 느낄 일은 없을 것이다.


 1985 : 리게티 <피아노 협주곡>

 - 솔직히 말하자면, 1985년 현음 음악계는 리게티 혼자 북치고 장구치고 다 해 먹은 해였다. 혼자 <피아노 협주곡>과 <피아노 연습곡 1권>까지 내버렸으니 오죽하겠는가. 둘 다 우열을 가리기 힘든 명곡이지만, 그래도 굳이 고르라면 나는 <피아노 협주곡>을 고르겠다. 하나의 스타일을 완성한 작곡가가, 자신의 스타일을 전부 버리고 맨몸으로 광야에 가 새로운 스타일을 들고 돌아온 경우는, 말러 이후로 볼 수 없던 일이니까.


 1986 : 펠드먼 <크리스티안 볼프를 위하여>

 - 후기 펠드먼의 작품들은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중독성이 있다. 그것은 한 번 빨아들이면 아편처럼 대뇌를 마비시키고 등이 굽는 환상을 불어넣는다. 이 곡 또한 3시간이 넘지만, 역시 지루함을 느낄 일 따위는 없다.


 1987 : 존 애덤스 <중국의 닉슨>

 - 아마 이 작품이 마지막 미니멀리즘 작품이 될 것이다. 다른 부분은 필요없고, 장칭의 아리아 하나만으로도 이 곡은 뽑힐 자격이 있다. 훌륭한 정치극이며, 훌륭한 미니멀리즘 음악극이다.


 1988 : 불레즈 <데리브 2>

 - 불레즈 본인은 인정하지 않았지만, 그의 후기 작품들은 자신이 젊었을 때 설정한 엄격한 원칙들을 조금씩 수정하고 뒤로 물리는 느낌이 든다. 그의 음악을 위해서는 참으로 다행인 일이다. 그러지 않았더라면, 그 천재성이 가혹한 원칙에 질식당했을 수도 있으니까. 그런 '이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가 있었기에 이런 곡이 나올 수 있었으리라.


 1989 : 쿠르탁 <슈테판을 위한 묘비>

 - 여기에 뽑힌 곡들 중, 이렇게 작은 음향으로 사람 감질나게 하는 곡도 없다. 음향은 듣는 이의 숙고를 요구한다. 듣는 이가 조용해지기를 요구한다. 그렇게 침묵의 침묵으로 응시할 때, 음향은 마침내 반응한다. 어둠 속에서 떨어진 물방울에 반응하는 지하의 연못처럼. 그리고 마침내 넘쳐흐르고 폭발한다. 이 곡은 당신의 귀가 얼마나 예리한지를 깨닫게 하는 음악이다.


 1990 : 타케미츠 <네가 전화할 때 나는 너에게로 흐른다>

 - 감성적인 제목에 어울리게, 타케미츠의 이 곡은 아방가르드의 감성을 풍만하게 뿜어낸다. 타케미츠는 시대를 휘어잡는 카리스마는 없었지만, 시대의 요구에 성실하게 응한 거장이었다.


 1991 : 홀리거 <스카르다넬리 사이클>

 - 20세기 아방가르드 작곡가 중, 하인츠 홀리거는 번스타인 못지않게 과소평가 당했다. 사람들은 그가 작곡에서도 오보에만큼이나 탁월한 업적을 쌓았다는 사실을 간과하거나 알지 못한다. 그러나 음렬음악과 음향음악의 원칙들을 숙고한 이 사이클을 들어보라. 그가 얼마나 훌륭한 작곡가인지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무수한 작곡가들 사이에서 잊힌 보석을 발견한 기분이 들 것이다.


 1992 : 메시앙 <피안의 빛>

 - 우리가 늘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는 뉴욕필의 3m이지만, 그 3m 중 정점을 찍었던 메타가 아니었더라면 메시앙의 마지막 걸작은 태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메타는 뉴욕필 150주년 기념 음악을 메시앙에게 위촉했고, 메시앙은 이에 응답해 천국으로 가는 마지막 여정을 그렸다. 바그너 <로엔그린> 전주곡과 같은 달콤함을 내포한 마지막 악장 <그리스도, 천국의 빛>에서 천국의 문은 이미 듣는 이를 향해 열려 있다.


 1993 : 진은숙 <기계적 환상곡>

 - 오랜만의 빈집털이 느낌. 그러나 언석췬 선생님을 꼽지 않을 수 없지 않은가. 이왕 꼽으려면 일찍 꼽아야지. 진은숙의 성악은 늘 <앨리스>를 떠올리게 하는 맛이 있다. 엉터리같고 기묘하게 들리지만, 사실 엄격한 원칙이 잠복하고 있는 곡들.


 1994 : 리게티 <피아노 연습곡 2권>, 쿠르탁 <스텔레>

 - 마지막 공동선정. 리게티의 <피아노 연습곡> 18곡 중 가장 완성도 높은 걸작들은 2권에 다 모여 있다. 어떤 곡이 가장 멋진가에 대해서도 꼽기가 힘든 것이, 디즈니 스타일의 <마법사의 제자>부터 브랑쿠시의 작품을 냉엄하게 재현한 <무한한 원주>까지 다변적이고 다층적인 스타일이 꽉꽉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쿠르탁의 <스텔레>는 동유럽 아방가르드 작곡가였던 그를 세계적인 존재로 세워준 작품으로, 시작 부분 베토벤의 인용이 유명하다.


 1995 : 미하엘 쟈렐 <잠시 동안의 음악>

 - 90년대 음악의 가장 큰 특징은, 특정 스타일이 헤게모니를 쥐지 않는다는 점이다. 당시 37세의 젊은 작곡가가 1995년의 왕좌를 차지하리라고는 어느 누구도 생각지 못했으리라. 그러나 스타일을 떠나, 이 작곡가는 음악을 '너무 잘 썼다.' 음렬에도 속하지 않고 음향에도 속하지 않지만, 훌륭한 음악이다.


 1996 : 라헨만 <성냥팔이 소녀>

 -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라헨만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의 경직성, 도그마에 경도된 태도, 지나치게 엄격한 음악 스타일을 모두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런 것들을 전부 떠나, 이 오페라는 좋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라헨만은 알반 베르크와 침머만의 정신을 계승한다. 냉혹한 대사, 정신없이 빠른 전개, 그리고 강렬한 음악. 모두 <보체크>와 <병사들>을 수놓았던 것들이다. 이 오페라는 전통의 계승이 나쁘지만은 않다는 증거가 될 수 있다.


 1997 : 헨체 <교향곡 9번 '제7의 십자가'>

 - 아방가르드의 주변인으로 평생을 떠돌아야 했던 헨체가 말년에 들고 온 멋진 한 방. 곡을 관통하는 텍스트도 멋지지만, 라헨만과는 조금 다른 노정(바흐-베토벤-바그너-쇤베르크)으로 이어지는 전통의 계승은 음악에 권위를 부여한다.

 (참고로 텍스트 설명을 좀 하자면, 원작은 안나 제거스의 소설 <일곱 번째 십자가>다. 나치 수용소에서 7명이 도망친다. 수용소에서는 7개의 십자가를 만들고, 반드시 놈들을 십자가에 매달겠다 한다. 6명은 탈출에 실패해 매달리지만, 일곱 번째 사람은 탈출에 성공한다. 빈 십자가는 파시즘을 이기는 희망으로 남는다는 내용.)


 1998 : 그리제이 <문턱을 넘기 위한 4개의 가곡>

 - 브람스 <4개의 엄숙한 노래>, 슈트라우스 <4개의 마지막 노래>, 그리고 그리제이의 <문턱을 넘기 위한 4개의 가곡(이하 줄여서 문턱 가곡집)>. 죽음을 앞둔 작곡가가 4개의 가곡을 유언처럼 남기는 것은 숙명일까 우연일까. 그리제이의 마지막 가곡들은 표면이 텅텅 비어 있다. 대홍수를 얘기하는 마지막 곡 <길가메시 서사시>의 음악을 들으면서, 우리는 소멸의 과정과 텅 빈 존재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그리제이는 예감처럼 이 곡을 쓰고 세상을 훌쩍 떴다.


 1999 : 외트뵈시 <제로포인트>

 - 외트뵈시는 온갖 스타일을 버무리고 섞으며 작업하는, 복잡하디 복잡한 작곡 방식을 좋아하는 작곡가다. 당연히 그의 음악 또한 머리가 아프다. 너무 많은 음표, 너무 과한 음향, 너무 복잡한 형식이 그를 멀리하게 만든다. 그래도 이 곡은 아주 마음에 든다. 과격한 데스메탈을 듣는 느낌도 나고.


 2000 : 루카 프란체스코니 <코발트 스칼렛>

 - 이탈리아 출신의 젊은 아방가르드 작곡가는 이 작품으로 서유럽 음악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두 가지 색채가 이루는 황혼은 때로는 아름답게, 때로는 격렬하게 섞이고 부딪치고 침강하면서 파편을 흩뿌린다. 이런 음악이 앞으로도 많이 나왔으면 한다.


 2001 : 볼프강 림 <아스트랄리스>

 - 오랜만에 리스트를 다시 장식하는 성실한 천재 볼프강 림. 40년 전 리게티가 그랬던 것처럼, 림은 우주가 던져주는 신비한 유혹의 힘을 음악으로 풀고 싶어한다. 그는 그 빛과 어둠의 세계, 성간과 암흑물질의 세계를 향해 손을 뻗는다.


 2002 : 베리오 <세쿠엔차>

 - 노장 작곡가의 초장기 프로젝트 1탄. 1958년 플루트에서 시작한 베리오의 여정은 2002년 첼로로 끝을 맺는다. 12음 음표로 기똥차게 시작하는 플루트, 유명 광대의 묘사극인 트롬본, 바그너 <트리스탄>의 오마주인 오보에, 바흐 파르티타의 오마주인 바이올린 등등... 방대한 스타일, 기교에 대한 경의, 독주악기에 대한 애정. 무엇 하나 빼놓을 수 없는 악곡들이다. 베리오는 이탈리아가 낳은 최고의 아방가르드 작곡가였다.


 2003 : 슈톡하우젠 <빛>

 - 노장 작곡가의 초장기 프로젝트 2탄. 참고로 이 오페라는 이름(+전설의 헬리콥터)만 유명하고 내용이 뭔지는 모르는 사람들이 많은데, 우주적 창조성을 상징하는 미카엘, 미카엘의 대립자인 루시퍼, 인간성을 상징하는 에바가 7개의 요일에 위치한 7개의 공간(각기 상징하는 행성이 있음)에서 서로 엮이고 대립하는 내용이다. 슈톡하우젠의 정신세계를 상징하는 곡답게 중2병이 굉장히 강하다(원래 오페라 제목도 독일어 Licht가 아닌 일본어 '히카리'로 하려 했다고). 어쨌거나 이 전무후무할 정도로 무모한 프로젝트를 완성시킨 희대의 돌아이에게 박수를.


 2004 :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하스 <첼로 협주곡>

 - '스펙트럴리즘'하면 그리제이나 뮈라유, 비비에 같은 프랑스 작곡가들만을 떠올리기 쉽지만, 0.5세대 늦게 스펙트럴리즘에 심취해 자기 나름대로 거장이 된 이가 있으니 바로 오스트리아의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하스다. 20세기 작곡가들이 이상할 정도로 집착한 첼로 협주곡을 그 또한 남겼는데, 거칠고 부드러운 모든 음향이 듣는 사람을 취하게 만든다.


 2005 : 호세 마누엘 로페스-로페스 <피아노 협주곡>

 - 2년 연속 협주곡 선정. 아방가르드 음악으로서는 드물게, 이 곡에서는 이베리아 반도의 정열이 살아서 넘실댄다. 수십만 개의 자갈을 뒤집어놓는 파도 소리와 함께 스페인 아방가르드의 흥취에 빠져 보자. 환경이 장르마저 변질시킨 기묘한 음악.


 2006 : 사리아호 <시몬의 수난>

 - 프랑스 여류 철학자 시몬 베유의 일대기를 다룬 이 곡은 그녀의 열정과 고통, 기쁨과 슬픔을 담담하게 따라가고 있다. 아민 말루프가 쓴 텍스트도 빛이 나지만, 사리아호는 그녀의 일생 하나하나를 격하게 공감하면서 곡을 쓴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런 퀄리티가 나오기 힘들 테니까.


 2007 : 진은숙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 진은숙의 스타일에 대한 얘기는 일단 제쳐놓고 곡이 차지하고 있는 위치에 대해서 얘기를 하자면, 이 곡은 '오페라 극장을 폭파하라'는 불레즈의 말에 대놓고 반기를 드는 곡이다. 오페라의 수명은 그녀로 인해 연장될 것이다. 곡의 어디를 파 보든지간에 생동감과 에너지가 넘친다. <거울 나라의 앨리스>가 빨리 완성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2008 : 올가 노이비르트 <로스트 하이웨이 모음곡>

 - 솔직히 이 선정은 꼼수를 썼다. 영화음악 <로스트 하이웨이>를 완성한 해는 2003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난 이 곡을 단독으로 뽑아 얘기하고 싶었다. 노이비르트는 단호한 인간이다. 극단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어쩌면 그 점이 데이비드 린치와 의기투합하기에 딱 좋았는지도 모른다. 이 곡은 난해한 음악을 쓰는 아방가르드 작곡가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안겨주었다. 그리고 데이비드 린치의 가장 난해한 영화를 더 난해하게 만들어 주었다. 둘의 결합은 리게티와 큐브릭의 결합만큼이나 완벽했던가? 알 수 없다. 그러나 이런 협업이 우리의 세계를 풍요롭게 만들어준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2009 :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하스 <여름밤의 꿈>

 - 노리고 한 선정은 아니지만, 마지막으로 선정하는 곡은 지금 이 글을 쓰는 시간대, 여름밤의 향취에 잘 어울리는 곡이 되었다. 슈만을 연상케하는 꿈결같은 분위기, 가물거리는 음향, 밝게 빛나는 금관의 광휘는 이 작곡가의 감성과 감각이 어디까지 뻗어있는지를 잘 드러내준다. 그는 의심할 여지가 없는 현세대 최고의 스펙트럴리스트다.




 이렇게 64년에 걸친 현음 리스트를 작성해 보았다. 하지만 이 리스트에 들어가지 않은 음악 중, 내가 꼭 소개하고 싶은 음악 하나를 스페셜로 얘기해 보려 한다. 이런 음악은 단독으로 설명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스페셜 현음 : 베르나르드 파르메자니 <자연의 소리들> (1975)

 - 베르나르드 파르메자니. 아마 이름조차 들어본 적 없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이탈리아어로는 Bernard Parmegiani라고 쓴다. 중요한 건 이게 아니라, 이 작곡가의 음악을 듣고 내가 겪은 충격이다. 전자음악을 작곡하는 이 작곡가가 남긴 유산은 어지간한 아방가르드 음악가 정도는 가볍게 씹어먹고도 남을 정도다. 이 작곡가가 포착한 음향의 진폭은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다. 작곡가가 탐구하는 음향이 자극 아닌 것이 없고 새로움 아닌 것이 없으며 경이 아닌 것이 없다. 이 곡은 마치 규방 안에서 자신을 찾아주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아름다운 여인같다. 장르를 막론하고, 우리가 음악을 찾는 이유는 이런 보석들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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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절과 통합 : 루비모프 콘서트 (2018.5.12. 土) (Part 2)




 레퍼토리는 패르트의 파르티타, 하이든 피아노 소나타 32번, 시메온 텐 홀트의 <솔로 악마의 춤 IV>, 존 케이지의 프리페어드 피아노를 위한 소품 3개, 그리고 드뷔시의 전주곡 2권이다.

 이렇게 방대한 레퍼토리는 확신과 철저한 연습, 통찰력의 삼위일체가 갖춰지지 않으면 와르르 무너진다. 어쩌면 이 레퍼토리 자체가 루비모프의 거장성을 증명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패르트의 파르티타는 처음 듣는 곡인데 바흐식 대위법에 20세기 양식을 조합한 느낌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바흐, 초기 신빈악파, 초기 바르토크, 카푸스틴을 전부 합친 다음 넷으로 나눈 느낌. 패르트하면 사람들이 동유럽식 미니멀리즘만 생각하지만 원래는 이런 과정을 거쳐 무조음악을 쓰던 사람이다.

 20세기 작곡가의 곡이지만 어찌 보면 바흐 양식에 충실한 첫 곡. 루비모프는 리듬과 다이내믹을 계산하면서, 절제하면서 첫 곡을 풀었다. 처음부터 확 끌리지는 않지만 듣고 있으면 자연스레 몰입하게 된다.

 사실 이런 곡은 치는 사람도 통제력을 발휘하기 어렵다. 대부분의 작곡가가 그렇듯 패르트의 이 곡도 덜 여문 작곡가 특유의 치졸함이 있기 때문이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아직 음악을 어떻게 덜어내야 하는지 잘 모른다.’ 글이고 음악이고 처음 덤벼드는 사람이 저지르는 가장 큰 실수 중 하나가 좋으면 일단 넣어보려고 하는 치기인데 패르트의 곡에서도 그런 느낌이 묻어 나왔다. 하지만 루비모프의 연주는 그 치졸함은 최대한 지우고 풋사과 특유의 풋풋함과 색다름을 잡아냈다.


 두 번째 곡은 하이든의 피아노 소나타 32번. 하이든의 1770년대 작품으로 고전파 작곡가의 작품이지만 아직 바로크 건반 음악의 특징이 깊게 배어있다.

 건반 음악에서 바로크와 고전파 음악의 차이점이 무엇일까. 장식음과 지속음의 차이가 아닐까. 바로크 하프시코드 음악은 트릴을 비롯한 장식음의 시대이며 고전파 포르테피아노 음악은 음의 지속이 가능해지면서 화음의 무게감이 달라졌다. 이 소나타는 그 경계선에 서 있다.

 루비모프가 진가를 드러내는 부분은 여기서부터였다. 그는 개개의 음을 끊어서 이어지지 않게 하면서도(하프시코드식 분절), 그 사이사이에 놓인 화음은 페달을 써가며 뭉쳤다(포르테피아노의 특성). 음악은 이어지되 이어지지 않게 되었다. 분절과 통합이라는 두 가지 방식으로 하프시코드의 특성을 가지되 하프시코드 곡이 아닌 모순을 해결해버린 것이다. 고전파 음악은 포르테피아노로, 드뷔시는 1910년대 피아노로 치는 행보에서 나온 내공이었다.

 루비모프의 하이든에서 특기할 것이 페달링이다. 그는 트릴을 연주할 때마다 오른페달을 써가며 음을 절묘하게 이었다. 음을 끊어야 할 때는 중간 페달로 끊었고, 결정적인 순간마다 왼페달을 기가 막히게 사용했다. 그 페달 사용법을 보고 듣기만 했는데 하이든이 끝났다.


 세 번째 곡은 시메온 텐 홀트의 <솔로 악마의 춤 IV>. 서유럽식 미니멀리즘의 정수를 보여준 작곡가가 존 케이지, 모튼 펠드먼의 방법론을 받아들여 각 파트를 연주자 마음대로 빼고 재배치할 수 있도록 했다. 정교하게 짜인 재료들로 치르는 즉흥연주라 해도 되겠다.

 곡을 들으면서 제목의 의미에 대해 생각했다. 춤은 원을 이루는 회전을 기본으로 한다. 미니멀리즘은 아무리 변화를 추구해도 원래 조립한 재료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결국 원을 이루며 도는 것이다. 하지만 미니멀리즘은 변화를 극단적으로 줄여 효과를 극대화하는 음악. 점 하나를 찍을 때마다 별 하나가 생기고 점 하나를 지울 때마다 별 하나가 사라진다.

 거기에 아주 크지만 우리가 결코 듣지 못하는 요인(즉 악마) 하나가 개입한다. 바로 연주자의 주관이다. 악보를 보지 않고는 연주자가 어떤 파트를 빼고 몇 번을 반복하는지, 어느 부분을 재배치했는지 알 수 없다. 메타연주라는 말을 써야 할까.

 루비모프의 손가락은 70먹은 노인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비슷한 나이대의 폴리니가 이미 추한 꼴 다 보인 걸 생각하면, 적어도 루비모프는 추한 꼴 안 보이고 은퇴할 수 있겠지라는 희망이 생긴다.


 1부가 끝나자마자 관계자들이 부리나케 프리페어드 피아노를 들여왔다. 이로써 의문 하나 해결. 프리페어드 피아노는 리즈Leads 브랜드였다. 처음 듣는 브랜드다. 비싸려나?

 솔직히 말하자면 난 존 케이지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군대 있을 때 후임이 영화를 비롯한 예술에 관심이 있어서 케이지 얘기를 했는데 <4분 33초>를 두고 ‘너무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곡’이라고 했었다. 난 그 말이 정곡을 찔렀다고 생각한다. 케이지는 너무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서 ‘음악은 음악이다(알반 베르크의 명언)’라는 기본 명제를 자주 흐린다. 다행히 이 곡은 질문보다는 음악이 우선인 곡이다. 케이지는 겉보기에 익숙한 매체를 통해 우리를 낯선 세계로 데려가 낯선 음악을 듣게 한다.

 난 처음에 이 곡이 들려주는 소리를 듣고 (공교롭게도) 베르크 <보체크>에서 들었던 그 피아노 소리를 연상했다. 사실 그것은 내 고정관념과 실제 음향이 충돌하는 과정이었다. 프리페어드 피아노는 피아노라는 매체에서 연상할 수 없는 소리를 연달아 내놓았다. 음향은 공, 탐탐을 거쳐 유사 가믈란의 세계로 들어갔다.

 우리가 피아노라는 매체에 대해 가지고 있는 집착은 무엇일까. 바로 ‘피아노에서는 피아노 소리가 나야 한다’ 아닐까. 이 곡은 그 집착을 산산히 부수는 것을 넘어, 그 집착을 버리게 만드는 곡이다. 하지만 고개가 숙여지는 깨우침은 아니다. 그런 파괴가 피아노에 이물질을 끼우는 행위나, 색다른 음향에 대한 과한 몰입이라는 새로운 집착을 낳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루비모프라는 위대한 전달자 얘기를 하자면, (동어반복해서 미안한데) 솔직히 곡에 너무 몰입해서 연주를 생각할 시간이 적었다는 변명 말고 할 말이 없다. 하지만 사실 그게 위대한 연주 아닐까. 너무 기가 막히게 잘 해서 딴 생각을 못하게 만드는 연기를 본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드디어 마지막, 드뷔시 전주곡 2권.

 드뷔시의 <영상>과 전주곡은 둘 다 1권과 2권으로 나뉜다. 1권이 좀 더 유명하지만 2권은 더 깊고 내밀한 방향으로 들어가며 더 그윽하고 완성도도 더 높다.

 그런 2권에서 루비모프가 어땠나면…… 하, 그냥 존나 쩔었다.

 무슨 말을 써도 표현이 안 된다.

 난 40분 동안 음에 함뿍 젖었다.

 반음계가 적시고, 화음이 적시고, 아르페지오가 적신다.

 아첼레란도로 홀리고, 테누토로 홀리고, 루바토로 홀린다.

 <안개>에서는 몽롱해지고, <고엽>에서는 참담해지다가, <브뤼예르>에서 뭉클했다.

 <라비느 장군>의 괴상망측함부터 <카노프>의 모호함까지, <달빛 받는 테라스>의 정묘한 모네식 대비부터 <불꽃놀이>의 찬연한 음향의 폭발까지.

 모든 게 거기 있는데 말로 설명을 못하게 만든다.

 완벽한 연주라는 말은 쓰면 쓸수록 비루해지지만 루비모프의 드뷔시는 완벽했다. 내가 이 이상의 드뷔시 연주를 콘서트에서 들을 수 있을지 의문이다.

 연주에 대한 얘기는 더 못하겠으니 페달링이나 첨언하겠다. 피아노의 역사에서 템포 루바토를 정점으로 올려놓은 이가 쇼팽이라면, 페달링을 정점에 세운 이들은 드뷔시와 라벨이다. 드뷔시의 곡을 연주하려면 그만큼 차원이 다른 페달링 스킬을 보여주어야 한다.

 전주곡에는 그런 스킬이 곡마다 깔려 있다. 한 프레이즈를 연주하면서 중간 페달로 한 음만 콕 집어서 끊어내는 스킬이 빈번하다는 얘기다. 이게 말이 쉽지 진짜 엄청나게 힘들다. 검으로 종이를 베어야 한다고 생각해보라. 더군다나 피아노는 음향이 엉키기 쉬운 악기다.

 루비모프의 드뷔시가 완벽하다고 극찬을 하는 이유의 80%가 바로 이 페달링 때문이다. 소름끼치는 순간은 <와인의 문>에서 나왔는데, 이 곡에는 급박한 하강 연음이 있다. 루비모프는 이걸 왼페달로 풍성하게 울리다가 가운데 페달로 칼같이 끊어냈다. 기민함에 놀라고 명쾌함에 놀라다가 마지막으로 음향에 놀라는 순간이었다.

 

 루비모프는 마음에 안 드는 구석이 있었는지, 아니면 더 보여주고 싶은 게 있었는지 앵콜을 무려 두 곡이나 했다. 첫 번째 곡은 쇼팽 뱃노래였는데, 가장 좋아하는 카펠(RCA)의 폭발하는 연주와는 거리가 멀지만 질퍽한 루바토를 남용하지 않으면서 서서히 끌어올리다가 마지막에 카타르시스를 주는 게 장난 아니었다. 다만 잔실수가 조금 있었던 게 아쉬웠다. 두 번째는 슈베르트 즉흥곡 D.899의 2번이었는데 이것도 드뷔시에 필적했다.


 다 쓰고 나니 하이든을 설명할 때 썼던 표현인 ‘분절과 통합’이라는 말을 총평에 덧붙이고 싶다. 루비모프는 시대를 달리할 때마다 매체를 바꿀 정도로 케이스 바이 케이스에 능한 연주자지만 자신의 미학은 타협하지도 양보하지도 않는다. 바로 명쾌한 음향이다.

 루비모프의 아름다움은 명쾌함에서 온다. 칼로 가르듯 끊어내고 풍성하게 부풀린다. 미련을 남기지도 않고 질질 끌지도 않는다. 하지만 폴리니나 아이마르처럼 거세된 아름다움은 아니다. 정묘한 형상 밑에는 따뜻한 피가 흐르는 혈맥이 있다. 만약 명쾌함과 음향 두 가지 중 하나를 희생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면, 루비모프는 명쾌함을 희생하고 음향을 택하리라.

 시대에 따라, 음악에 따라 다른 접근법을 선택하지만(분절), 그 모든 음악은 명쾌한 음향으로 통합되어 있다. 그것이 내가 들은 루비모프의 음악이다.

 끝으로, 감동적인 연주도 모자라 친절하게 사인까지 해주신 마에스트로께 감사를 드립니다.


 한줄 평 : 이보다 더 나은 연주회를 보게 된다면 그거야말로 내 인생의 행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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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절과 통합 : 루비모프 콘서트 (2018.5.12. 土) (Part 1)




 지금껏 연주회 평을 여러 번 썼지만, 첫 머리를 이렇게 고민하게 만든 연주회는 처음이다.

할 얘기가 없기 때문이 아니다. 할 얘기는 너무 많다. 다른 사람을 붙잡고 열 시간이고 백 시간이고 떠들 수 있다. 문제는 서두를 어떻게 풀어야 이 소름끼치는 연주에 누를 끼치지 않을지 그 방법이 쉽게 생각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연주회 후평을 둘로 나누기로 했다. 연주회 전에 있었던 일들은 1부, 연주회 자체는 2부로 나누었다. 1부와 2부의 어투도 다르니 참고할 것.


 일단 연주회를 보러 간 목적부터 솔직히 말하겠다. 이번 기회가 아니면 두 번 다시 루비모프를 못 볼 것 같았다. 그는 1944년생. 올해 74세다(검색해보고 나도 놀랐다). 기교의 쇠퇴는 둘째 치고 슬슬 은퇴를 하느냐 마느냐를 고민할 시기 아닌가.

 나는 레퍼토리를 확인하자마자 가는 쪽으로 마음을 굳혔다. 패르트, 하이든, 시메온 텐 홀트, 존 케이지, 드뷔시. 이건 12첩 반상 차려놓고 와서 안 먹으면 네 손해라고 말하는 거나 진배없다. 적금을 깨서라도 가야 하는 연주회건만 가격이 S석 5만원, A석 3만원. 세상에 교통비보다 싼 연주회는 처음 가 본다.

 가는 날 비 예보가 있어서 걱정이 되었지만 다행히 통영은 흐리기만 할뿐 비가 내리지는 않았다. 와 봐야 몇 방울 뿌리고 마는 수준. 통영은 관광하기 참 좋은 도시지만 여기 온 목적은 관광이 아니니 후딱 버스 잡아타고 음악홀로 향했다. 그래도 버스 안에서 주마간산으로나마 체감해서 다행이야.

 해안선을 따라 부드럽게 휘어진 도시를 뒤로 하고 음악홀 도착한 게 1시. 음악홀은 미륵도와 한산도 사이라는 천혜의 절경에 자리 잡았다. 사실 시간이 많이 남아서 기다리지 말고 관광이나 할 걸 하는 생각도 했지만, 아마 그랬으면 루비모프의 귀한 사인을 못 받았겠지.

 양 옆으로 해안선을 낀 카페에서 차 한 잔 마시면서 시간을 죽이고 있는데 관계자분과 함께 남은 귀밑머리가 허연 노인이 들어온다. 자세히 보니 바로 여러분이 생각하는 그 분 맞다. 연주회를 앞둔 연주자에게 사인을 받는 것이 무례한 행동일 수도 있어 고민하다가 어느 아주머니가 양해를 구한 후 사진을 찍고 차 대접을 하는 것을 보고 용기 내어 다가갔다.

 솔직히 무협지에서 눈빛만 마주쳐도 격의 차이를 느끼니 마니가 다 개소리인줄 알았는데 이번에 그게 사실인 줄 알겠드라. 눈을 정면으로 마주치는데 진짜 포스가 장난이 아니야. 포스에 눌린 탓인지 영어 울렁증이 도져서 하고 싶은 말의 반도 못 했다. 그래도 무사히 사인 받고 악수까지 했으니 다행. 마에스트로 죄송합니다.

 루비모프는 카페에 앉아 앞으로 있을 연주를 복기하는지 아니면 보는 사람까지 차분해지는 바다를 관망하는지 그저 관조만 하더라. 정신 차려보니 시간은 다가오고 난 30분 전부터 객석에 앉아 기다렸다. 레퍼토리 중에 프리페어드 피아노를 사용하는 존 케이지 곡이 있던데 덩그러니 스타인웨이만 놓여 있어서 어떻게 해결하나 의문이 들긴 했다.

 드디어 5시. 노인이 무대 위로 걸어 나왔다.


 일단 1부 끝. 인증 겸 자랑으로 사인 올려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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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년 9월 13일

 키릴 페트렌코 / 이고르 래빗 / 바이에른 슈타츠오퍼 오케스트라

 예술의 전당


 무슨 기이한 연이라도 닿은 것인지, 갑자기 연주 당일 지인의 주선(?)으로 연주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이 자리를 빌어 그 분께 감사드립니다.)

 1부 곡목은 라흐마니노프의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광시곡>. 라흐마니노프의 후기 수작이지만, 아쉽게도 난 이 곡을 많이 들어보지 않았다. 내가 완청한 이 곡의 유일한 연주는 카펠/라이너/필라델피아(RCA)인데, 연주자 이름만 들어도 도저히 비교 대상으로 삼을 수 없는 연주다. 곡을 익히기 위한 임시방편이라면 모를까…….

 1부 곡목에서 단연 두드러진 것은 피아니스트였다. 러시아 태생으로 독일에서 활동하는 이고르 래빗은 자신의 태생을 증명이라도 하듯, 같은 곡 안에서도 ‘정말 같은 피아니스트가 맞나?’ 싶을 정도로 카멜레온 같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다른 피아니스트에 비교를 해 본다면, 데무스나 바두라스코다 같은 소리로 곡을 진행하던 피아니스트가 갑자기 호로비츠나 리히터의 인상을 드러낸다는 편이 사실에 근사한 비유일 것이다.

 그의 장점은 독일 피아니즘과 러시아 피아니즘의 혼융에만 그치지 않았다. 동글동글 뭉치면서도 밝고 은은한 고유의 음색, 절제된 페달링, 과장 없이 충분히 대범한 해석도 마음에 들었다.

 다만 오케스트라는 피아노가 100% 활약할 수 있도록 도와주지 않았다. 오케스트라는 피아노의 소리가 들려야 할 타이밍에 피아노 소리를 묻어버리고, 피아노 소리가 자리 잡을 공간을 주지 않았다. 2부를 위한 악기 배치(잠시 후에 설명하겠다) 때문에 그런 결과가 나온 것 같지만, 래빗의 피아노 소리를 제대로 들을 수 없다는 점은 많이 아쉬웠다.

 래빗은 앵콜곡으로 쇼스타코비치의 발스-스케르초를 연주했다. 달지 않으면서도 맛있는 소르베 같은 곡이었고, 연주도 충분히 훌륭했다.


 1부에서 가장 빛난 이가 래빗이었다면, 2부에서 가장 빛난 이는 단연 페트렌코였다.

 나는 오늘 그의 비팅을 보면서 왜 베를린 필의 단원들이 그를 선택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기민하면서도 힘찬 지휘로 막대한 에너지를 오케스트라에 부여했고, 수시로 오케스트라에 지시를 내리면서 단원들을 통제했다.

 페트렌코의 연주 설계 중 가장 두드러진 부분은 현악기의 배치였다. 중앙에 첼로를 놓고, 1바이올린 뒤에 베이스를 두며 첼로-비올라-2바이올린 순으로 악기군을 배치한 그의 설계는 크게 두 부분에서 빛을 발했다. 

 첫 번째는 1악장. 현악기 배치는 후반에 진입하는 순간부터 위력을 발휘했다. 바로 제2트리오 부분, 1바이올린의 아르코와 베이스의 피치카토가 엇갈리는 부분에서 지휘자와 오케스트라는 대비가 무엇인지 잘 보여주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의 현악기 배치는, 현악기만으로 연주하는 4악장에서 가장 빛을 발했다. 지휘자의 설계는 오케스트라 특유의 퍽퍽한 소리마저 이겨내고 멋진 풍광을 선사했다.

 그러나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는 법. 페트렌코와 바이에른 슈타츠오퍼는 악기군 사이의 대비를 얻어낸 대신에 정묘한 밸런스를 어느 정도 희생해야 했다. 특히 악기군이 투티를 연주할 때마다 위태롭게 뒤엉키는 음색은 대비를 주기 위해 무엇을 대가로 치러야 했는가를 똑똑히 보여주었다.

 위에서도 말했듯 바이에른 슈타츠오퍼는 퍽퍽한 소리로 일관하는 경향이 강했다(특히 현악기). 더군다나 페트렌코의 기민한 지휘에 잘 따라오지 못하는 안습한 모습까지 보여주었다. 1악장을 연주하는 베이스에서 그것을 똑똑히 들을 수 있었는데, 연주자도 아쉬웠던 실수를 허공에 다시 해보는 깨알 같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관악기로 시선을 돌려보면, 오늘 가장 뛰어난 연주를 해주었던 호른 수석이 있었다. 3악장의 ‘호른 협주곡’을 위시해 곳곳에서 또렷하고 분명한 소리와 안정된 지속음으로 오케스트라를 받쳐주었을 뿐 아니라, 대놓고 어려운 약음 패시지에서 연이어 놀라운 연주를 해냈다(나는 개인적으로 호른의 어려운 약음 패시지들을 강주보다 더 귀기울여 듣는다. 그만큼 호른에게 잔인한 구간이기 때문이다).

 트럼펫 수석 또한 정말 잘했지만…… 안타깝게도 삑사리를 두 번 냈다는 점이 아쉬웠다. 5번의 1악장은 시작의 C#음을 비롯해 트럼페터의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음이 유독 많은데, 트럼펫 수석은 시작은 잘 풀어갔지만 1악장 막판에 삑사리를 냈다. 그리고 2악장 막바지 부분에서도 한 번 더…… 전체적으로 참 잘했지만, 운이 따라주지 않았던 두 번의 실수가 아쉬웠다.

 그밖에 기억나는 주자들은 소극적으로 일관했던 오보에 수석(자기도 답답했는지 1부 끝나자마자 리드 뽑아서 체크해보더라)과 잘못 치고 나서 가죽 상태 확인해보던 팀파니 주자.


 오늘 연주를 세 문장으로 압축하면 다음과 같다.

 1) ‘기재奇才’라는 표현이 잘 어울리는 이고르 래빗.

 2) 어떻게 베를린 필 상임이 될 수 있었던 것인지를 증명한 페트렌코.

 3) 그럭저럭 잘 하는데 죽어도 일류는 못 될 바이에른 슈타츠오퍼 오케스트라.


 더 압축해 볼까? ‘돈값은 하고도 남지만 7만원어치는 아니었던 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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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년 12월 4일

 마리스 얀손스 / 길 샤함 /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

 예술의 전당


 워낙 급하게 도착한지라 허겁지겁 연주회장에 들어갔다. 1부는 베토벤 바이올린 협주곡. 그 동안 나는 이 곡을 들을 때마다 쉽게 이해하지 못했는데, 다행인지 얼마 전 프란체스카티와 장 푸르네의 영상물을 들으면서 비로소 이 곡을 이해할 수 있었다.

 협주곡의 시작은 매우 좋았다. 팀파니는 정확했고 현은 한 치의 오차도 없었다. 그러나 이 연주에서 가장 할 말이 많은 것은 단연 독주자였다. 샤함은 연주를 시작한 직후부터 지속적으로 약간 거친 듯한 소리를 냈다. 기교상의 문제였나 싶었지만 샤함 특유의 톤은 큰 이상이 없었다. 그는 속도를 빠르게 잡지 않은 채, 호불호가 심하게 갈릴 스타일로 연주했다.

 자세히 설명하자면, 그는 통상적인 바이올리니스트라면 포지션 변경을 해야 할 악구에서 포지션 변경을 하지 않고 한 현 안에서 계속 오고가는, 지금은 거의 볼 수 없는 스타일로 연주를 했다. 물론 정확하고 깨끗한 소리, 쏘아붙이는 듯한 템포, 그리고 명쾌함을 좋아하는 요즘 사람들에게는 합리적인 포지션 변경이 더 설득력 있게 들릴 것이다. 그러나 이런 연주법을 유지하면서 연주하는 것은 정말로 고도의 기교를 요한다. 사실 이 연주법이 사장되다시피 한 것도 이것이 무척이나 어렵기 때문이다.

 또한 바이올린의 각도도 굉장히 대각선으로 기울여 연주를 했는데, 이것도 지금은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스타일이다. 샤함은 이 두 가지를 계속 유지하면서 연주를 했다. 이 두 가지 특징을 가진 연주법은 실제 콘서트홀보다는 음반을 통해 더 쉽게 접할 수 있을 것이다. 요하임으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옛 독일계 바이올리니스트들이 이런 연주법을 자주 선보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이 연주를 높이 평가한다는 것은 아니다. 이런 연주가 설득력을 얻으려면 그에 상응하는 고아한 '소리'를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샤함은 자신의 톤을 유지하는 부분과 그렇지 못한 부분의 갭이 매우 심했다(솔직히 말하자면, 거친 부분의 소리는 술 마신 소리 같았다). 옛 독일계 바이올리니스트들은 그런 연주법을 사용하면서도 더 설득력 있는 '소리'를, 연주를 지속하는 내내 일관되게 유지하는 기술을 갖추고 있었다. 게다가 자의적인 악구 내 템포 변경이 잦아서 독특하다고 할 수는 있을지언정, 매우 좋은 연주라고 할 수는 없었다.

 샤함의 연주를 한 문장으로 정의하자면, '이런 스타일을 색다른 시도로 보는 사람은 높은 평가를 내릴 수 있겠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단 1점도 주기 싫어할 연주'로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얀손스는 그런 샤함이 최대한 그 스타일을 밀고 나갈 수 있도록 판을 깔아주었다. 관현악의 목소리를 최대한 자제시키고, 좀처럼 강주를 크게 터뜨리지 않았다. 빠르게 잡은 첫 팀파니의 D음 연타 동기도 독주자가 느리게 템포를 잡아끌자 바로 맞춰주는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얀손스가 관현악을 자유롭게 분출시킨 것은 3악장 코다에 이르러서였다. 하지만 관현악을 자제시켜서 파곳이 너무 소극적으로 들린 것은 감점 요인이었다. 2부의 파곳을 생각하면, 파곳이 자기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분출시켜주는 것도 좋지 않았을까.

 1부의 앵콜 곡은 크라이슬러의 <아름다운 로즈마리>였다. 샤함은 협주곡에서 보여주었던 그 스타일로 연주를 했다. 관현악은 깔끔하게 반주를 맞춰주었다. 역시 협주곡과 마찬가지로 호불호가 크게 갈릴 스타일이었다.


 2부는 스트라빈스키의 <불새> 모음곡. 스트라빈스키를 일약 유명인사, 대작곡가의 반열에 올려놓은 이 출세작은 많은 개정판이 나왔는데 얀손스는 1945년판을 사용했다.

 1부에서 자제하고 있었던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의 능력은 여기서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오보에, 클라리넷, 파곳, 호른, 첼로, 바이올린…… 어느 것 하나 지적할 새가 없이 칼같이 정확하면서도 옹골찬 소리를 들려주었다. 특히 정확함을 넘어 정밀함을 느끼게 하는 오보에와 능수능란한 클라리넷은 박수를 받아 마땅할 실력이었다.

 또한 나는 연주를 직접 보면서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이라는 오케스트라의 수준에도 연신 감탄을 금치 못했다. 물론 빈 필이나 슈타츠카펠레 드레스덴 같은 경이적인 소리를 갖춘 악단, 현대 오케스트라의 정점인 베를린 필과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을 일대일 대응시키는 것은 무리라고 보지만, 오케스트라는 지휘자가 세부까지 일일이 지시하지 않아도, 즉 굵은 밑그림만 그려주면 알아서 칼같이 화답하는 경이적인 합주력으로 대답했다. 고현, 저현, 목관, 금관, 타악기 모두 정확하고 치밀하고 깔끔하면서도 새되지 않은 소리로 대답해서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연주의 대부분을 채우는 것은 오케스트라의 몫이지만, 연주가 무너지지 않도록 연주의 큰 틀을 잡아주는 것은 당연히 지휘자의 몫이다. 얀손스는 정확한 강약 조절, 정확한 비팅, 그리고 스트라빈스키의 변박이 심한 리듬 구조를 외골격처럼 드러내는 스타일로 지휘를 해 나갔다. 같이 연주를 들었던 지인분께서는 '키츠제이 왕의 죽음의 춤'이 나오기 전까지 얀손스의 지휘가 좀 부산스럽게 들린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난 그 말이 맞다고 본다. 얀손스는 일부러 그렇게 했을 가능성이 있다. 스트라빈스키의 악보는 그대로 연주하려고 들수록 '난잡하게 들릴 수밖에 없는' 드러나고 돌출되는 리듬 구조를 갖고 있다는 것이 내 개인적인 생각이다.

 본인은 스트라빈스키 연주사의 초기를 장식한 두 명의 지휘자로 피에르 몽퇴와 (좋아하는 지휘자는 아니지만) 에르네스트 앙세르메를 들고 싶다. 두 명의 스타일은 판이하게 달랐다. 몽퇴의 스트라빈스키는 그 상충하는 변박들이 두드러지는 연주를 들려주고 있다. 반대로 앙세르메의 스트라빈스키는 그 변박들이 모두 깔끔하게 정리되어, 어떨 때는 스트라빈스키의 리듬적 다양성을 거세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재미있는 것은 스트라빈스키가 앙세르메보다는 몽퇴의 스타일을 더 호의적으로 여겼다는 점이다. 물론 두 사람의 스트라빈스키 스타일은 오늘날 어느 쪽도 주류를 점하지 못하고 있지만, 오늘 들은 얀손스의 스트라빈스키는 단연 몽퇴 쪽에 가까워 보였다.

 '키츠제이 왕의 죽음의 춤' 파트는 당연히 놀라웠지만, 오늘 <불새> 연주에서 가장 좋았던 파트는 그 다음에 나온 '자장가' 파트였다. 그 파트가 나오는 순간, 모든 퍼즐이 끼워맞춰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곡은 숭고한 피날레로 이어졌다. 현의 유니즌 강주를 스타카티시모로 연주했다는 특이한 사항을 제외한다면, 완벽하게 마음에 드는 연주였다. 이런 연주가 끝나고 나면 당연히 환호성과 박수가 필요한 법이다.

 2부의 앵콜 곡으로는 그리그의 <두 개의 슬픈 선율> 중 한 곡, 그리고 엘가의 <야생곰>을 연주했다. 모두 본 프로그램과 잘 어울리는, 아련하면서도 흥겨운 곡들이었다. 당연히 이 곡들이 끝나고서도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주었다.


 연주회가 끝나자마자 바로 프로그램북을 사서 길고도 긴 사인 줄을 기다렸다. 샤함은 생글생글해 보이는 인상이었고, 얀손스는 웃고 있었지만 어딘지 모르는 냉철함이 감돌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긴 줄에도 불평하지 않고 웃음으로 사람들을 맞아주면서 사인을 해 주었다.


 한 줄 평 : 1부는 생각할 거리는 많지만 사적으로 좋아하지 않는 연주. 2부는 경이로움 그 자체.


 (2016.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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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급하게 쓴 글이라 퀄리티는 낮습니다. 그 점을 감안하면서 읽어주세요.


 2016년 11월 24일

피에르 로랑 에마르 ‘쿠르탁&메시앙’

LG 아트센터

 

 긴 말 필요 없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도록 하겠다. LG 아트센터에 도착해서 프로그램을 확인하니 원래 쿠르탁을 연주하고 슈만을 나중에 연주하도록 짜여 있는 1부 프로그램이, 슈만과 쿠르탁이 자유로이 뒤섞은 프로그램으로 변해 있었다. 변경사항을 보고 가장 먼저 떠오른 게, 데얀 라지치가 스카를라티와 버르토크를 자유로이 섞어서 연주한 채널 클래식의 음반이었다.

 3층 자리에 앉아서 에마르를 기다리는데, 한 10분인가 기다리고 있노라니 연주자가 입장했다. 중키에 부리부리한 눈매가 인상적인 아저씨가 들어오는데, 나긋나긋한 몸짓과는 별개로 절도 있는 느낌이 나는 사내였다.


 페이지 터너를 옆에 둔 채 연주가 시작되었다. 1부는 슈만 소품을 하나 연주하면 쿠르탁 소품을 하나 연주하는 식으로 죽 이어졌는데, 들으면 들을수록 이 프로그램이 하나의 일관성을 가지고 꾸며졌다는 생각이 점점 강하게 들었다. 첫 짝을 이루는 슈만과 쿠르탁은 즐거운 느낌을, 중간의 슈만 알붐블라트 1번과 쿠르탁의 <메달>은 빛나는 느낌, 알붐블라트 3번과 쿠르탁 <평온한 위안>은 부드러운 민요풍 느낌을, 알붐블라트 2번과 <발린트 전시회 서문>에서는 비르투오소티 느낌이…… 이런 식으로 각각의 개성을 기가 막히게 잘 끼워 맞춰, 마치 슈만이 쿠르탁을 위해 작곡하고, 쿠르탁이 슈만을 위해 작곡한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멋진 프로그램이었다.

 이제 연주자의 능력치에 대해서 설명을 할 시간인데, 대개 에마르의 음반을 통해 느낄 수 있는 특징들은 ‘명료함’ ‘정확함’ ‘뛰어난 테크닉’ 정도로 압축할 수 있겠다. 어떤 상황에서도 기교적인 실수를 하지 않고 명징하고 차가우며 세련된 연주를 들려주는 것이 에마르의 가장 큰 특징인데, 내가 음반을 통해 들은 소리를 연주회장에서 그대로 느낄 수 있다는 점은 생각할 때마다 재미있는 점이다.

 그러나 실황에서의 에마르는 내가 연주회장의 어디에서 음악을 듣고 있던지 간에 자신의 (몇 번을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명료하고 절도 있으며 정확한 소리를 쏘아 보냈다. 3층에서 음악을 듣고 있음에도 내가 마치 1층에 와 있는 느낌은 덤이었다.

 프로그램은 지속적으로 슈만과 쿠르탁을 교차하다가 쿠르탁을 몇 곡 이어서 연주하더니 클라이맥스인 스벨링크의 반음계 환상곡에 도달했다. 소품들 사이에서 대곡처럼 느껴지는 스벨링크의 환상곡은 1부의 클라이맥스를 장식하기에 충분한 곡이었다. 이어지는 곡들은 차분히 가라앉는, 사색하는 느낌의 쿠르탁의 신곡 소품들로 마무리.


 2부는 프랑스의 로코코 스타일을 대변하는 작곡가 중 하나인 다캥의 모음곡 발췌로 시작했다. 쿠프랭보다는 조금 더 각진 느낌이고, 라모만큼의 인상적인 날카로움을 보여주지는 못하지만, 나름대로 화려하면서도 세련미 있는 그 시대 프랑스 클라브생 스타일을 잘 보여주는 작곡가인 다캥의 모음곡들에서도 에마르 특유의 명징함과 정확함은 어디 가지를 않았다. 정말 자신이 연주하는 모든 곡의 구조를 도식처럼 투명하게 보여주겠다는 그의 집념은 솔직히 듣는 사람의 기를 질리게 만들 정도였다.

 그리고 마침내 최종보스 등장. 오늘 제일 컬처 쇼크를 먹었던 메시앙의 새도감 중 <마도요>. 우와…… 1부에서 자제하고 있던 에마르의 다이내믹에 대한 무시무시한 능력이 밖으로 분출하는 순간이 이 때였다. 고음의 아르페지오 다이내믹을 조절하는 기계 같은 능력하며, 최강주에서 홀 전체를 뒤흔드는 깨끗하면서도 강력한 터치는 단지 차갑고 명료한 연주자로만 생각하고 있던 에마르에 대한 나의 편견에 기분 좋은 뒤통수를 치는 순간이었다. 몇 번을 다시 생각해도 프로그램 전 곡을 통틀어 이 <마도요>가 봉우리 꼭대기를 이루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충격적인 <마도요> 연주가 있고 난 후, 막간곡인 쇼팽의 녹턴 1번을 연주했다. 연주 자체는 깨끗하고 차갑고 좋았지만(루바토가 거의 없었다), 아무래도 메시앙을 사이에 두고 쇼팽을 들으려니 일부러 쇼팽을 끼워 넣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메시앙-메시앙이 계속 이어지다 보면 무슨 곡이 무슨 곡인지 알아먹지 못할 사람이 태반이니, ‘쇼팽 중간에 끼워줄 테니까 알아서 메시앙 두 곡 구분하라’는 의미로 녹턴을 한 곡 집어넣은 것 같다. 프로그램 전체의 균형과 맞는지는 의문이었지만 어쨌거나 연주는 참 좋았다.

 마침내 오늘의 프로그램 마지막 곡 <숲 종다리>에 도달했다. 메시앙의 피아노곡집 중 하나인 <아기예수를 위한 20개의 시선> 중 <성모의 첫 영성체>와 비슷한 느낌도 나지만, 그보다 좀 더 자연의 거친 풍광에 동조하는 느낌이 강한 이 <숲 종다리>에서 에마르는 하행하는 첫 아르페지오에는 풍성한 감각을, 중간부의 날카로운 풍광 묘사에서는 특유의 명료한 이성을 잃지 않고 연주한다. 그러고 보니 다캥의 곡들도 새와 자연을, 메시앙의 곡들도 새와 자연을 노래하고 있다. 결과물은 굉장히 다르지만.


 연주회가 끝나자마자 1부에서 참았던 환호성과 브라보를 터뜨렸다. 몇 번이나 관객의 박수갈채에 화답하던 연주자는 앙코르곡으로 노타시옹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배열은 5번에서 8번까지를 맨 먼저 연주하고, 그 다음 9번에서 12번까지를, 마지막으로 1번부터 4번까지를 연주하면서 이것만 임의대로 섞어 연주했다. 연주의 퀄리티? 지금까지 설명했던 것에서 딱 하나만 추가하자면, 토 나오게 어려운 패시지들을 기계같이 연주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저 환호할 수밖에 없었다.

 

 아직 올해 볼 공연 중 얀손스가 남아 있기는 하지만, 솔직히 이 정도 퀄리티의 연주를 저렴한 가격에 긴다는 것 자체가 나에게 있어서는 큰 행운이었다. 몇 년 전에 리게티를 연주할 때 안 간 것이 사무치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번 연주회를 보면서 어느 정도 보상받는 느낌이 들었다.


 한 줄 평 : 현음 피아노 = 에마르



 (2016.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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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6

음반 2015. 11. 29. 19:43

예정된 파국을 통해 얻어낸 가장 독창적인 결론 : 카라얀의 말러 교향곡 6번

말러 교향곡 6번 <비극적> (A minor)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지휘)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파리, 샹젤리제 극장 (통칭 파리 실황)

1977년 6월 17일 실황 연주

말러의 교향곡 10곡은(미완성 교향곡인 10번까지 합하면 11곡) 제각기 다른 형태로 이루어진 비극의 씨앗을 잉태하고 있다. 아도르노가 제시한 개파durchburch, 곡의 진행방향을 흐리고 예측을 어렵게 만드는 음악적 흐름, 그리고 높은 음역에서 낮은 음역으로 뚝 떨어져버리는(주로 감7화음이 이 부분의 극적인 대비를 더한다) 추락Absturz은 말러의 모든 교향곡에 비극의 씨앗을 심는다. 이 씨앗들은 겨자씨의 형태가 같은 ‘겨자씨’의 범주의 묶이더라도 세부를 관찰하면 모두 다른 형상을 취하듯, 제각기 다른 형태를 취한 채 음악 속에 잠복해 발아와 폭발의 순간을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이 비극의 씨앗들은 대부분 결과적으로 열매를 맺거나 곡을 지배하지는 못한다. 5번이나 7번처럼 곡의 전반적인 흐름을 지배하고 최종적인 결말을 삼키기 직전까지 갈지라도 마지막 악장의 극적인 반전에 의해 이상한(그리고 가끔씩 어색하게 느껴지는) 항복을 선언하거나, 아예 8번의 경우처럼 압도적인 광명에 눌려 발아조차 하지 못한 채 사그라들기도 한다.

6번은 말러 교향곡의 두 간극, 비극의 씨앗을 품고 있되 그것이 결실을 거두지 못하는 그의 음악적 괴리를 유일하게 일관된 방향으로 통합해버리는 곡이다. 곡은 가장 으뜸 리듬이라 해야 할 군홧발의 행진곡풍 리듬에 실려 예정된 비극(곧 파국)을 향해 전진한다. 스케르초 악장의 비뚤어진 리듬은 스케르초와 렌틀러를 기괴한 형태로 조합하는, 마치 인간의 육신에 기계 부품을 억지로 붙여버린 것 같은 괴이한 조합으로 더욱 그 으스스함을 극대화시킨다. 유일하게 부드럽고 평온한 세계관을 고수하는 안단테 악장은 광대한 풍경과 느긋한 워낭소리로 채워져 있지만, 그 워낭소리가 1악장에서도 등장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3악장의 분위기가 다른 악장과 대조적이라 할지라도 이 악장은 분명히 말러의 세계관 속에서만 나올 수 있는 산물이며, 4번의 3악장과 마찬가지로 말러가 순음악의 느린 악장에서 뽑아낼 수 있는 가장 좋은 것들을 전부 포함하고 있다(옌스 말테 피셔는 이 악장을 실질적인 간주곡으로 보았지만 나는 그러한 평가에 반대한다. 이 악장이 간주곡이라면, 말러가 이 악장을 이렇게 광대하고 풍성한 소재들로 채워넣고 정교하게 다듬었겠는가?) 마지막 악장의 살벌한 광기와 처참한 절규는 묵시록적인 음악의 전범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떠한 형태의 음악적 농담도 이 악장 앞에서는 멈춰서야만 한다. 말러는 음악적 예술이 얼마만큼의 비극을 감내할 수 있는지 그 극한을 시험해보는 것 같다. 두 번의 해머 타격은 그 사이에 채워진 비극으로 인해 더욱 강화되고, 비참한 단말마가 잦아들 즈음 마지막 타격이 ‘주인공’을 썩은 통나무처럼 쓰러뜨린다. 말러가 세 번의 타격, 특히 해머 타격으로 강조한 의미(금속성 음향을 배제하고 은은한 소리가 나야 한다), 즉 도끼로 이미 죽어가는 자를 무참하게 난도질하는 느낌이 나야한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 교향곡을 묵독하고 천착한 후 전혀 다른 결과물을 내놓는 무수한 지휘자들이 이 교향곡의 결론을 절멸로 생각했다는 점은 흥미로우면서도 섬뜩하다. 텐슈테트는 4악장의 결말이 나치의 홀로코스트와 연관이 있을 것이란 생각을 끝내 떨쳐버리지 못했다. 카라얀은 이 악장에서 완전한 파멸vollstandigen Katastrophe을 보고 느끼고 체험했다. 길렌은 이 악장에서 죽음이 승리하는 광경을 보았다. 하지만 예정된 결말에 대한 관점이 같음에도 불구하고 거기서 느껴지는 차이, 즉 결론의 세부적인 형태는 모두가 제각각이다. 나는 그 중에서도 카라얀의 관점을 살펴볼 것이고, 특히 그가 1977년 6월 17일 파리에서 치른 실황 연주를 오늘의 글로 소개할 것이다.

※ 참고한 악보에 문제가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악보에는 스케르초가 2악장이고 안단테가 3악장임에도 불구하고 리허설 번호는 스케르초가 뒷번호, 안단테가 앞번호이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아래의 글은 연주 순서에 따라 스케르초 2악장 / 안단테 3악장으로 써 놓았습니다.

1악장의 첫 머리부터 카라얀과 베를린 필은 곡의 지시사항 Heftig처럼 맹렬하게 달려간다. 11마디의 첫 ff 에서 폭발시키는 음향의 힘은 그가 얼마나 강력한 연주를 보여줄 것인지에 대한 일종의 전주로 볼 수 있다. 지금까지 이런 연주가 있었나 싶을 정도로 맹렬하게 돌진하는 힘 앞에서 저항은 아무런 쓸모가 없다. 리허설 번호 4 두 마디 전에서 깨끗하고 강하게 뻗어나가는 심벌즈의 음향은 정말 정곡을 찌르는 표현이다. 베를린 필의 현악기군은 이런 속도에서도 전혀 거친 소리를 들려주지 않는다. 트럼펫이 정확하게 장-단 3화음을 찔러넣으면 약간의 삽입구 이후 77마디부터 F장조의 2주제가 등장한다. 1악장에서 유일하게 밝고 화려한 이 주제는 통칭 ‘알마의 주제’라 불리지만, 오히려 그 과장된 밝음은 알마 본인이 의도한 여인상과는 어울려 보이지 않는다. 솔직히 말하자면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돈 후안>에서 추구한 성적인 느낌이 강하게 드러난다. 카라얀의 농밀한 현은 이 주제의 그런 느낌을 극대화한다. 이 교향곡에서 대부분의 음악적 주제들이 과장되어 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매우 적절한 통찰이다. 리허설 번호 10에서 2주제를 노래하던 현악기군이 빠져나가고 글로켄슈필과 팀파니가 주를 이루는 부분은 매우 특기할 만한데, 대기를 부옇게 만드는 것 같은 농밀한 현이 빠져나가고 음향이 투명하고 간결해지는 대비가 그대로 다가온다. 이 부분에 대한 카라얀의 음향은 참으로 탁월하다. 악보에 아무런 지시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템포의 변화를 주어서 그 대비를 더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덤이다.

도돌이표를 따라 제시부를 반복한 후 연주는 발전부로 넘어간다. 장-단 3화음과 연결되어 있던 팀파니와 작은북의 리듬이 본격적으로 활약하는 시기다. 말러는 그 단순한 주제를 바탕으로 정교한 건축물을 쌓아올린다. 카라얀은 놓치기 쉬운 세부, 특히 목관의 트릴을 선명하게 구사하면서 나아간다. 리허설 번호 16에서 터져나오는 거대한 fff 에서 카라얀은 뭉특하게 느껴질 가능성이 높은 팀파니 위에 날카롭게 들리는 트럼펫과 심벌즈를 쌓아 올리는 수를 사용한다. 상투적인 어법으로 설명하자면 이 수는 지극히 효과적이다. 리허설 번호 17을 앞두고 펼쳐지는 신경질적인 트럼펫의 옥타브나 목금의 새된 외침, 바이올린의 단호한 Nicht eilen 파트 모두 탁월한 음향을 제공해준다. 리허설 번호 21에서 격한 움직임은 잦아들고, 꿈결같은 첼레스타의 음향 속에 관현악은 소극적인 음울함으로 잦아든다. 이 여성적인 분위기를 노래하는 현악기군과 플루트, 특히 플루트의 또렷한 소리는 여타 연주에서는 듣기 힘든 것이다. 바이올린과 호른의 살 떨리는 2중주, 그리고 말러가 좋아하던 표현인 morendo에 이어 A장조로 뜬금없어 보이는 행진곡 리듬이 재등장한다. 이것은 급격히 잘려나가고 바로 2주제가 A단조로 다시 나타난다. 카라얀은 이 대비를 나누기 보다는 잇기로 선택한 것 같다.

이제부터는 재현부다. 그리고 아도르노가 지적한 개파를 향해 달려가는 이 연주의 긴박감은 여타의 연주가 따라붙을 수 없는 속도감을 보여준다. 곧이어 갈라진 느낌의 D장조로 행진곡풍 1주제가 터져나온다. 때로는 장조가 단조보다 더 끔찍하다. 당연히 이 연주는 그런 ‘갈라짐’이 의미하는 바를 놓치지 않는다. 폭풍같은 몰아침과 다시 장-단 3화음, 그리고 꿈결같은 sostenuto 파트로부터 딸려나오는 2주제 파트. 이 파트의 정점에 도달하는 팀파니 크레셴도는 정말 시원하고 장쾌한 음향을 선사한다.

코다로 진입하는 a tempo, aber gemessener에서 카라얀은 짐짓 느리게 음을 가져가며 기대감을 조금씩 모은다. 그리고 이어지는 Più mosso subito에서 템포는 급변한다. 재현부 첫 파트의 변형이 이어지는데, 여기서 트럼펫의 신랄하게 쏘는 소리가 아주 인상적이다. 그리고 악장은 최후의 성급하고 급박한 결론에 도달한다. 나는 항상 이 부분의 템포가 아주 빨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성급하게 내린 결론이라는 느낌을 최대한 불어넣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연주는 충분히 그 기대를 충족시켜주고 있다. 트럼펫의 급박한 움직임과 팀파니의 굉음과 함께 1악장은 마지막 폭발력을 가동시키며 막을 내린다.

카라얀은 멩엘베르흐가 제시한, 2악장 스케르초 / 3악장 안단테를 적용했다. 2악장 첫머리를 여는, 아주 단단하게 뭉친 팀파니의 음향부터 여전히 연주가 심상치 않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다. 정확하게 박자를 새기면서 나아가는 현악기나 짓궂은 실로폰 소리나 흠 잡을 데가 없다. 스케르초의 클라이맥스를 장식하는 하모닉스에서 카라얀의 현악 컨트롤은 특히 두드러지는데, 작게 디미누엔도하면서도 선명한 소리가 나야 하는(즉 다른 악기군에 묻히지 않아야 하는) 이 부분에서도 문제없다는 듯 발군의 연주력을 보여주고 있다. 리허설 번호 69 직후 심벌의 강력한 크레셴도 또한 특기할 만하다. 카라얀은 트리오고 들어가기 전, Flottes Tempo 파트부터 천천히 속도를 늦추며 트리오에 알맞은 템포를 이끌어낸다.

트리오에서 카라얀의 연주는 그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가정 교향곡>에서 보여주던 것과 아주 흡사하다. 그러면 그가 트리오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연주관이 <가정 교향곡>에서 보여주는 것과 일치할까? 일단 번스타인(DG)이 들려준, 템포의 변화가 다분한 트리오와 이 연주는 무척이나 다르다. 그리고 리허설 번호 80에서 나타나는 molto tenuto의 호른 독주 부분. 나는 호른이 이런 음향도 낼 수 있다는 사실에 상당히 놀랐다. 호른 특유의 배음을 활용한 부드러운 음향이 아니라, 아주 선명하고 깨끗한 음향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말러가 스케르초에서 쓰기 좋아하던 삽입 에피소드가 짤막하게 등장하고, 다시 곡은 스케츠로로 복귀한다.

스케르초와 트리오의 첫 반복에서는 실로폰 소리와 공 소리가 가장 먼저 느껴진다. 하지만 나는 역시 위협적인 저음과 호른의 악구 뒤에 나오는 바이올린 파트가 가장 마음에 든다. 카라얀의 현은 정말 후기 낭만에서 무시무시한 파괴력을 발휘하는데, 어떠한 어려운 과제가 주어져도 특유의 농밀하면서도 우아하게 떨리는 소리를 잃지 않는다는 점은 들으면서도 신기함을 느낀다. 트리오에서는 역시 예의 플루트가 가장 귀에 와 닿는다. 그리고 다시 삽입 에피소드를 제시한 후, 스케르초와 트리오는 마지막 반복으로 들어간다.

마지막 스케르초에게 가장 특기할 만한 부분은 리허설 번호 100 이후에 등장하는, 음량적인 정점에서 도달했다가 급격하게 추락하면서 모든 것이 무너져버리는 부분인데, 카라얀은 이 부분을 쏜살같이 빠르게 도망치도록 했다. 말이 쉽지 이 부분은 플루트가 무려 5옥타브를 떨어져 내려가고 현악기군이 아주 빠른 하행 글리산도를 구사해야 한다. 이 부분에서 이 연주는 흠 잡을 구석 없는 기교를 들려준다. 이어 등장하는 독주 바이올린의 가냘픈 고음은 점점 좁아져만 가는 트리오의 기형적인 위치를 잘 포착해낸다. 마지막 베이스와 팀파니의 A-C-A까지 연주는 깔끔하게 마무리를 짓는다.

3악장은 그야말로 카라얀과 베를린 필의 독무대라도 해도 될 만큼 자신감 그 자체인 연주를 들려주는데, 현악 합주에 어울리는 양념을 얹어주는 목관악기군이야말로 숨겨진 주역이라 할 만하다. 그리고 리허설 번호 48에서 호른과 하프가 서로 만나는 목가적인 연주는 그의 느린 악장 연주들이 왜 그토록 뛰어난지에 대한 좋은 실례가 될 것이다. 리허설 번호 49에서 네 마디 후 처음으로 등장하는 현악기의 G-E♭-G-C-B♭ 선율은 카라얀의 현악기군이 특히 빛나던 다른 연주들, <메타모르포젠>이나 <정화된 밤>에서 듣던 바로 그 소리다. 그리고 리허설 번호 51 직전의 극도로 작은 ppp 하모닉스는 소리 자체로 큰 감동을 선사하고 있다.

곡은 E단조의 2주제로 넘어가고, 이어 E장조로 밝아진다. 그 밝음의 순간을 표현하는 하프와 목관, 그리고 현악기의 트릴은 그 사이사이의 미세한 음향의 변화를 감지할 때마다 경이를 느끼게 한다.

다시 원래의 E♭장조 주제로 돌아와, C장조의 Misterioso 파트를 지나면 이제부터는 플루트의 독무대다. 플루트는 결코 선명하되 가느다란 소리를 들려주지 않는다. 이어지는 리허설 번호 57부터의 부분들은 악기군의 또렷한 분할을 느낄 수 있는데, 바이올린이 첼로와 겹치지 않으며 첼레스타가 중앙에서 신비스러움을 배가해야 하고 목관이 흩어져서는 안 된다. 이 연주는 여기서도 흐트러짐이 없다.

그리고 E장조의 클라이맥스. 총천연색으로 다져진 모든 악기들이 정점을 향해 다가가고, 지휘자와 연주자들은 어느 성부 하나 과포화상태에 이르는 법 없이 음향을 꽉 채워서 관객들에게 전달한다. 음량이 정점을 찍을 때마다 한 발 물러선 채로도 자신의 존재감을 빠짐없이 드러내는 팀파니도 빼놓고 설명할 수는 없다.

그리고 원래 주제인 E♭의 극점에 도달한 상태에서 다시 한 번 현악기군에 주목하게 된다. 리허설 번호 62 세 마디 전에 바이올린이 크레셴도했다가 p 로 줄어들어서는 다시 크레셴도하면서 sf 에 도달하는 부분이 있는데, 이 부분을 잘 들어야 한다. 한 옥타브가 넘는 도약을 하면서 다이내믹을 섬세하고 미묘하게 조절해야 하는 부분이다. 당연히 무지막지하게 어렵다. 대략 15:13에서 15:19에 걸치는 구간인데, 꼭 자세히 들어보기 바란다. 기가 막힌 바이올린의 음색 변화를 접할 수 있다.

이제 앞의 세 가지 악장에 대한 기억을 모두 덮어버릴 마지막 악장에 도달했다. 카라얀은 처음의 피치카토와 첼레스타의 상승음계부터 텐슈테트(EMI)처럼 찍어누르려는 의도는 없다. 폭발은 9마디에서 처음 터져나온다. 말러는 서주 부분부터 베이스 튜바를 아주 효과적으로 사용하는데, 사실 이 교향곡의 오케스트레이션이 매우 현대적임에도 불구하고, 말러가 의도한 음향은 스트라빈스키가 의도한 음향과는 정반대의 결과를 얻어내야만 한다. 4악장 베이스 튜바의 그 원시적이고 섬뜩한 음향은 글에 의존한 묘사만으로는 아마 <봄의 제전>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말러의 결과물은 전혀 다른 방향을 바라보고 있다. 카라얀의 말러가 성공적일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봄의 제전>과는 반대로, 카라얀은 말러의 소리가 어떻게 나야 할지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리허설 번호 105 직후에서 카라얀은 하프보다 첼레스타를 앞세워 감상자의 의표를 찌른다. 당연히 이 달콤한 첼레스타 소리는 곧이어 터져나올 무자비한 호른과 베이스 튜바 소리와 아주 좋은 대조를 이룬다. 두 번째 호른의 무자비한 소리도 처음부터 격하게 터져나오는 것이 아니라, 프레이즈 중간에 다이내믹을 키우면서 극적인 효과를 더하고 있다. 리허설 번호 107의 굉음에 가까운 타격은 이제 최후의 처절한 투쟁이 막을 올리는 것을 예시한다. 그리고 참혹한 기상나팔 소리와 함께 곡은 투쟁의 현장으로 몰입한다.

카라얀은 처음부터 서두르지 않는다. Allegro moderato라는 지시에 따라, 그는 천천히 악기군을 분리시켰다가 조합한다. 번스타인이나 텐슈테트의 연주에서 뭉친 덩어리로만 들렸던 목관과 금관의 성부들의 전체적인 윤곽이 보다 뚜렷하게 드러난다. 그리고 Allegro energico에서 들을 수 있는 것은 칼같은 합주력이다. 하지만 그 가운데서도 뭔가 폭발한 것만 같은 불안감이, 오히려 그 불안감이 곡을 듣는 청자의 집중력을 높이고 있다. 그리고 현악기군의 첫 추락(2악장을 통해 이미 예언했던 그 추락)이 있은 후, 곡은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들고 2주제로 넘어간다.

1악장과는 달리, 피날레의 2주제(D장조)는 꾸며낸 밝음의 흔적조차 느낄 수 없다. 시작 부분의 다이내믹이 pp 인 것처럼 이 부분은 미약함이 느껴져야 한다. 그리고 첫 ff 에서 불현듯 솟아나오는 하프의 아르페지오는 성부를 끌어내고 조절하는 지휘자의 역량을 느끼게 하는 부분이다. 리허설 번호 120 다섯 마디 전부터 거세게 등장하는 현악기군의 fff 는 사실 암시에 그칠 정도로 파악이 힘든 부분인데, 카라얀은 이 부분을 또렷하게 드러내며 또다시 독창적인 면모를 드러내고 있다.

두 번째 추락 이후 다시 곡이 소강상태에 접어들면 2악장과 3악장의 편린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리허설 번호 124번 이후의 음악이 곡을 억지로 장조로 끌고 가나 그 곳이 도달하는 목적지는 첫 번째 해머 타격이다. 그리고 리허설 번호 129에서 첫 번째 해머 타격이 터진다. 이제 곡은 참았던 광기를 터뜨리듯 극한의 속도로 달려간다. 카라얀이 의도한 바가 이것이었다. 단계적으로 속도를 제어해 가면서 계기가 되면 터뜨리는 것. 이것보다 더 효과적인 전략이 있을까?

현악기가 전면에 드러나는 리허설 번호 131의 밝은 파트에 이어 132에서는 하프가 아르페지오를 그으며 갑작스러운 빛을 보여준다. 비극을 강화하기 위한 이 음악적 장치를 통해서도 유려한 현과 하프의 음향은 여전히 탐미적이다. 당연히 이 빛은 이어지는 폭풍우 속에 자취를 감추고, 리허설 번호 134의 신랄함으로 곡은 나아간다. 여기서 빛을 발하는 나무채 소리는 신경이 거슬릴 정도로 또렷하게 들린다. 곡은 잠시 잦아들었다가, 결국 139와 140 사이에서 두 번째 해머 타격이 폭발한다. 카라얀은 이 두 번째 해머 타격을 첫 타격보다 더욱 거세게 몰아부친다(참고로 두 번째 타격의 다이내믹 지시는 ff ). 그리고 조성을 거의 가늠할 수 없는 연결구와 함께 발전부가 막을 내린다.

재현부의 첫 구절을 열면서 카라얀은 아주 독특한 해석을 제시했다. 서스펜디드 심벌이 전면에 등장하면서 심벌의 음향이 아주 길게 이어지도록 지시한 것이다. 그리고 이 심벌은 아주 신경질적인 ff 의 타격을 예비하는 도구로 유용하게 쓰인다. 147에서 Grazioso로 2주제가 더 힘없는 모습으로 등장하고, 149 직전에서 타격감은 정점에 이른다. 그리고 억척스럽게도 153에서 1주제가 정말 똑같은 재현을 선보인다. 카라얀은 이 낡아 빠진 고전 양식의 완벽한 재현과 그 양식을 흔드는 무수한 급진적 화성 사이에서 절묘한 균형을 잡아 나간다. 물론 폭력적인 양태를 한껏 드러내는 관현악의 압도적 위엄을 동반하고 있는 것은 여전하다.

164에 이르러 움직임은 멈춘다. 사멸을 앞둔 생명의 마지막 꿈틀거림만이 들려올 뿐이다. 베이스의 움직임을 베이스 클라리넷이 받은 직후 최후의 타격이 직격으로 내리꽂힌다. 지축을 흔드는 최후의 충격이 가해진 후 남는 것은 파편적으로 울려퍼지는 팀파니의 행진곡 리듬과 짧은 피치카토. 그리고 침묵뿐이다.

마지막으로, 나는 카라얀이 애당초 이 곡의 전범을 제시할 생각이 없었음을 분명히 밝히고자 한다. 그는 말러 교향곡 6번에서 가장 독창적인 연주를 실천하는 것으로 최고의 위치를 차지했다. 그가 이 곡을 통해 제시하고자 한 것은 자신의 미학과 독창적인 해석과 오케스트라의 정교함, 그리고 무엇보다도 ‘음향’ 그 자체다. 그가 말러에 쏟은 애정이 얼마이건 간에, 그는 말러 6번의 연주사를 통틀어 가장 기이하면서도 감동적인 해석을 일구어 냈다. 현악기 위주의 악구에 대한 탐미적인 해석, 성부 조절을 통한 색다른 인상의 부여, 녹아들 것만 같은 3악장, 그리고 지휘자로서의 통찰이 빛나는 4악장의 전개는 감정주의적인 해석으로도, 분석적 해석으로도 치우지지 않는 고유한 말러를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적지 않으나마 이 해석은 독창적인 해석이 그 곡의 가장 빛나는 해석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실례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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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여엉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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