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들어 르네상스 음악가들의 음반을 자주 듣고 있다.

 질 뱅슈아와 기욤 뒤페이의 세대, 요하네스 오케햄의 세대, 그리고 조스캥 드 프레의 세대는 각각 순수 대위법 음악의 위대한 이상을 구축하고 있으며, 동시에 교회가 문화의 중심이던 시대의 음악을 완성하고 있다.

 우선 기욤 뒤페이의 음악은 음악성과 동시에 텍스트의 운율을 기가 막히게 잘 살리고 있다.

 뛰어난 음악가였으며 동시에 재테크에도 음악 못지않게 뛰어난 재능을 지녀 만년을 부유하게 살았던 뒤페이는 15세기의 수많은 음악가들 중 음악의 선율 못지않게 시적 운율의 중요성을 강조한 가장 중요한 음악가로 보아야 한다. 운율의 중요성을 음악가가 파악하고 있다는 말은, 음악가가 인간의 구강 구조를 꿰뚫고 있다는 말과 같다. 양성 모음, 음성 모음, 원순 모음, 구개음, 파열음, 반치음, 유성음 등 구강 구조의 변화에 따라 목울대에서 솟아나는 인간의 음성은 무한히 달라지며 그 배열을 조합한 언어도 무한히 달라진다. 음악가, 특히 성악 음악가는 이 무한한 변화를 모두 꿰뚫고 있어야 한다. 뒤페이는 이 분야에서 가히 독보적이었다. 그것이 그를 이토록 오래 살아남게 한 첫째 이유로 볼 수 있지 않을까.

 뒤페이의 또 다른 위대함은 대조적인 양식을 스펀지처럼 흡수하는 대범함에 있다.

 현대 클래식 음악과는 달리, 당시 영국의 음악 양식은 다른 나라에 적지 않은 영향을 지속적으로 끼치고 있었다. 당시 존 던스터블의 주도로 풍성한 성과를 거두던 영국의 음악은 대륙의 음악가들에게 이전까지 불협화음으로 여겨지던 3도와 6도 화음의 폭넓은 수용을 가능케 했다. 또한 상성과 테노르(테너)가 짝을 이루는 3성부 수법도 이들의 유산이었다. 뒤페이 또한 영국 음악이 가져다주는 풍요로움을 몸소 체험한 세대였다. 전통적인 음악가들은 모두 전통의 고수자였다는 생각은 무지에서 비롯한 편견일 뿐이다.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절대로 살아남지 못한다. 뒤페이는 당시 주류로 받아들여지던 프랑스/플레미쉬 음악과 이탈리아 음악에 능통했을 뿐 아니라 영국과 부르고뉴 음악, 그리고 후배인 요하네스 오케햄의 음악까지 알고 있었다. 그의 음악은 다양한 음악 언어를 조합한 코스모폴리탄적 음악이며, 당시 영국 음악의 유유히 흐르는 부드러움, 프랑스 음악의 당당한 품격, 이탈리아 음악의 약동적인 흐름을 모두 거둬들인 후 자신만의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내고 있다.

 요하네스 오케햄의 음악을 들을 때마다 느낄 수 있는 가장 큰 특징은 그의 자신감이다.

 오케햄은 뛰어난 베이스 가수였으며, 스스로 가수 시절의 경험을 살려 성악가의 능력을 속속들이 파악한 곡을 작곡했다. 성악가로 활동한 작곡가가 직접 곡을 쓴다는 사실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싶다면, 쇼팽과 리스트를 머릿속에 떠올려보라. 악기에 대한 이디엄이 있다는 것은 거부할 수 없는 메리트임을 알게 될 것이다.

 그는 자신이 일류 가수였다는 경험을 살려 사람 목소리에 대한 탁월한 이해도와 발성의 영역을 확장한 성악곡들을 남겼다. 그의 레퀴엠은 서양 음악사상 최초의 레퀴엠으로 알려져 있다(뒤페이 또한 레퀴엠을 작곡했다고 하나 현재 악보를 확인할 수 없다). 북프랑스에서 태어났고, 상업과 공업으로 번영하던 플랑드르와 접한 지역에서 평생을 살았던(그는 이탈리아에 가본 적이 없다) 오케햄은 '회중이 회당에 모여 부르는 음악'이 아닌, '전문 가수가 회당에서 부르는 음악'을 만들었다. 그가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그의 뛰어난 성악 기교는 그런 음악을 쓰도록 만들었다. 또는 시대가 그것을 원했을 수도 있다. 오케햄의 음악은 전문 성악 훈련을 받지 않은 사람들이 부르기에 결코 쉽지 않다. 오케햄은 자신의 음악을 통해 훈련받은 가수들이 불러야 하는 전문적인 음악의 등장을 알렸다. 그리고 그것을 표현하는 오케햄의 근원에는 그의 강한 자신감이 머무르고 있다.

 오케햄의 시대가 지나고 조스캥 드 프레의 시대가 왔을 때 권력자들은 자신의 위선을 자랑하기 위해, 또는 마지못해 예술가들에게 경의를 표해야 할(또는 그러는 척 해야 할) 정도로 예술가들의 입지가 단단해져 있었다. 이것은 회화에서는 조토 이후로, 음악에서는 마쇼 이후로, 문학에서는 단테 이후로 지속적으로 자신들의 입지를 보장할 것을 요구한 예술가들의 유무형의 행동이 서서히 사회 전반으로 퍼져나갔음을 증명하는 예시가 될 것이다. 음악사상 가장 위대한 음악가들의 반열에 놓여야 할 조스캥 드 프레는 이러한 사회적 변화와 예술가들의 굳건해진 입지를 활용해 자신의 음악이 전 유럽으로 퍼질 수 있도록 했으며, 동시대의 어떤 음악가도 자신의 위치를 위협할 수 없도록 자신의 위치를 굳건히 했다. 그러나 조스캥이 만든 음악은 그러한 일화를 초월할 정도로 위대한 것이었다.

 그의 음악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옛 프레스코화처럼 강렬한 원색을 사용하는 초기 모테트들이 그의 진정한 음악일까? 아니면 모방과 변형 기법을 숨쉬듯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후기 미사들에서 그의 진정한 음악을 찾아야 할까? 조스캥은 르네상스 시대에 살았던 음악가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다양하고 풍부하며 역동적인 음악들을, 그것도 쉬지 않고 지속적으로 만들어냈다. 이런 천재성을 우리가 다시 찾으려면 적어도 2~300년은 더 기다려야 한다. 

 조스캥은 거기에 그치지 않고 아예 새로운 형식을 창조하는 데 성공한다. 조스캥 최후의 걸작 중 하나로 꼽히는 <미사 혀야 말하라(미사 빵제 링구아. Missa Pange lingua)>는 정선율이 고정되어 있는 일반적인 미사에서 벗어나 선율을 네 성부 전체에 걸쳐 자유로이 사용하고 있다. 선율은 전체적으로, 또는 부분적으로 사용하기도 하며, 선율에서 파생한 악구들이 모방적 처리의 동기가 되기도 하고, 호모포니를 통한 강조로 나타나기도 한다. 일명 패러프레이즈 미사의 시발점인 셈이다.

 그러나 조스캥의 음악을 말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역시 소탈하면서도 그의 기발한 착상이 빛나는 샹송일 것이다. 조스캥의 샹송에서 모든 성부는 동등하게 다루어진다. 이전의 음악과는 달리 한 성부를 빼놓을 경우 음악 전체가 무너져 내린다. 그리고 모방과 호모포니가 그 성부들을 끈끈하게 잇는다. 이토록 유기적인 음악을 만든 음악가는 결코 흔치 않았다.

Posted by 여엉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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