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놓고 한 달이 지나서야 글을 쓰게 되는군요.

 

끝판왕의 위엄.jpg

 

 보통 나는 음반에 대해 이야기할 때 공적인 입장과 사견은 다르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가령 나는 불레즈의 쇤베르크가 매우 뛰어난 연주들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내가 좋아하는 쇤베르크 순위에서 불레즈는 미트로풀로스(왠 밑이냐고 생각하실 분들도 있겠지만, 나는 밑이 연주한 쇤베르크 관현악을 위한 변주곡 Op.31보다 이 곡을 재미있게 요리한 연주를 들어본 일이 없다. 밑은 그 통제가 가능한가 싶은 속도에서도 세 번의 클라이맥스와 200마디가 넘는 코다를 전혀 지루하지 않게 연주한다. 세부적인 카논이 암시에만 그친다는 사소한 결점을 무시한다면, 기가 막히게 재미있는 쇤베르크를 들을 수 있다), 카라얀(단연 가장 과소평가받는 Op.31의 연주 중 하나. 다만 5변주가 조금 아쉽다), 그리고 시노폴리(시노폴리의 12음 음악은 전혀 정신분열적이지 않다)보다 밀린다. 불레즈의 쇤베르크가 뛰어나지 않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다만 쇤베르크라는 레퍼토리는 불레즈가 연주하기에는 너무 '낭만적'인 레퍼토리가 아닌가 하는 사견이 있기 때문이다(차라리 불레즈는 드뷔시나 베베른을 더 잘 하는 것 같다). 쇤베르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성부 간의 우선순위를 두는 것이지 모든 성부를 동등하게 다루는 것이 아니다. 불레즈는 후자에 더 능한 사람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다른 쇤베르크들을 불레즈의 쇤베르크보다 더 자주 듣는다.

 하지만 이 음반은 나의 공적인 입장과 사견이 정확하게 일치할 매우 드문 사례가 될 것이다. 나는 이 연주를 능가할 드뷔시 피아노곡집이 나올지에 대해 굉장히 회의적이며 실제로도 이 연주를 무척이나 좋아한다. 아니, 좋아하는 정도가 아니라 이런 연주는 단연코 바닷가의 모래알만큼이나 많은 드뷔시 피아노곡 연주사에서 제왕의 자리를 차지하는 데 전혀 부족함이 없다. 이런 연주를 듣지 않고 드뷔시를 평가하는 것은 부질 없는 짓이다.

 드뷔시의 피아노곡은 연주가들에게 두 가지 모순점을 부여한다. 하나는 터치와 루바토와 페달링을 활용해서 뛰어난 음색을 만들어야 한다는 점이고, 나머지 하나는 그러면서도 섬세하다 못해 지나칠 정도로 예민한 프레이즈 단위를 절도 있게 지켜야 한다는 점이다. 두 가지 모두 중요하지만, 두 가지의 배합을 조금만, 단 0.1%만 잘못 설정해도 그 연주는 망가져 버린다. 나는 이전 글에서 프랑수아를 높게 평가했지만 자주 듣지는 않는다. 그는 절도 있는 연주를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폴리니의 경우는 더 심각해서 음색이 다 죽어버렸을 뿐만 아니라 선명한 소리를 뽑지도 못한다. 이런 연주를 내놓느니 차라리 드뷔시에 손을 대지 말았어야 했다.

 이 연주는 그 두 가지를 동시에 성취한 몇 안 되는 연주다. 음색은 깊고 짙으며 팔레트의 색감을 드러내지만 터치는 그 누구보다 선명하다. 페달링으로 인해 음색이 터치에서 붕 뜨는 느낌을 주지도 않는다(많은 연주들이 이런 연주를 내놓고는 한다). 이 두 가지 모순을 결합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에리쿠르 이전의 수많은 연주들이 증명했고 에리쿠르 이후의 수많은 연주들이 지금껏 증명하고 있다(루비모프는 무수한 드뷔시 연주들이 거의 지나가지 않은 틈새를 적절히 노려서 성공한 것이지 에리쿠르처럼 압도적인 포스를 보여 성공한 연주가 아니다). 

 에리쿠르의 터치를 짚고 넘어가지 않으면 그의 연주를 평가하는 것은 별 소용이 없을 것이다. 에리쿠르의 저음 연주, 특히 왼손 극저음부에서 손 전체를 약간 비틀어 들어올렸다가 활시위 형태로 팔을 휘두르면서 손가락 옆면으로 건반을 내리찍는 타건은 호로비츠의 망치 타건과는 전혀 다른 음색을 만들어낸다. 보통 그런 타건은 클러스터와 별반 다를 것이 없기 때문에 지저분한 소리가 날 것이라고 생각이 드시겠지만 천만의 말씀. 에리쿠르는 강하면서도 청명한 소리의 전범을 만들어내고 있다.

 해석의 측면은 어떨까. 에리쿠르의 <피아노를 위하여> 사라방드는 무려 6분 46초라는 러닝타임을 자랑한다. 보통 대부분의 연주들이 4분 50초 대에서 5분 초반 대의 러닝타임을 보이는 것을 생각하면 무려 1분이나 더 늘어지는 연주다. 하지만 도저히 지루할 틈이 없다. 에리쿠르는 시간을 잊은 사람처럼 음표 하나하나의 색채를 조심스레 다듬어서 청자 앞에 내놓는다. 청자가 그것을 듣고 감탄하는 사이 곡은 클라이맥스에 도달하고, 어느새 끝나 있다. 

 에리쿠르의 해석이 나를 반하게 만든 또 다른 사례는 <영상> 2집의 2곡인 <황폐한 사원에 걸린 달>인데, 나는 이 곡을 지금까지 예의상 들어야만 하는 곡으로 생각했다. 이 곡이 담고 있는 오리엔탈리즘에 거부감을 느낀 것인지, 아니면 다른 곡과 달리 이 곡에서는 드뷔시 특유의 논리성이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것인지, 아니면 그냥 이 곡이 나와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에리쿠르를 들으면서 이 편견들은 전부 다 날아가버렸다. 곡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내가 들었던 연주들이 문제가 있었던 거였다. 에리쿠르는 '이 곡이 이런 곡이었나?' 싶을 정도로 이 곡의 다채로운 색채감과 짜릿한 순간들을 낱낱이 보여주었다. 곡이 끝날 때까지 들으면서도 감탄사도 생각이 안나 '하...' 만 반복하고 있었던 연주는 내가 지금까지 들은 20종 남짓한 <영상>의 연주들 중 이게 처음이었다.

 그러면 페달링은 어떨까? 밟는 순간, 밟았다가 떼는 순간, 겹쳐 밟는 순간의 구분이 무엇보다 중요한 페달링은 자칫 잘못하면 화장 처음 한 여고생이 그렇듯 가부키 배우같은 떡칠만 남게 된다. 아무리 연습을 한다고 해도 본질적으로는 지저분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 페달링이다. 그런데 에리쿠르는 생각만큼 페달을 많이 밟지 않는다. 그리고 페달을 밟았다는 것을 느끼기가 정말 힘들다. 터치만으로 충분히 음색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페달을 밟으면 음색이 배가 된다. 하지만 왼페달을 밟으면 밟을수록 뿌옇고 탁한 소리밖에 나오지 않는 연주들과 비교하기가 미안해질 정도로 에리쿠르의 터치는 선명함 그 자체다.

 이 음반에 담긴 연주들 중에 중요하지 않은 것이 무엇이 있겠느냐만은(지루한 곡이라고 생각하는 <렌트보다 느리게>마저도 기가 막힌 곡처럼 들리게 하는 연주다. 더 설명이 필요한가?), 딱 하나를 꼽는다면 <판화>의 첫 곡 <탑>을 추천하고 싶다. 음량적인 클라이맥스에 도달하는 순간 왼손이 만드는 그 트레몰로의 괴물 같은 음향을 듣고 있으면, 도대체 왜 이 피아니스트가 그토록 음반 만드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는지 물어보고 싶을 정도다. 만약 이 피아니스트가 조금만 더 외향적이었더라면 드뷔시 연주사 전체가 뒤집어졌을 것이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이 연주의 입수 난이도가 연주의 질에 비례한다는 점이다. 에리쿠르께서는 애시당초 메이저 레이블 같은 곳은 생각하지도 않았고, 황송하게도 듣보 레이블인 kapp record에서 이 보석같은 연주들을 녹음하셨다했다(그래서 이 연주는 60년대 초에 녹음했음에도 모노랄이다). 그 덕에 kapp record는 역사에 이름을 남기게 되었다 Ivory classics에서 에리쿠르 탄생 100주년 기념 한정판으로 CD 전곡반을 냈다(아이보리 본사에서는 아직도 음반을 팔고 있다. 어서 주문하시오.) 이외에도 낙소스 아카이브에서 전주곡집만 뽑아서 음원을 냈고, 드뷔시 유니버셜 에디션에 소품 몇 곡 정도가 들어가 있다. 현재 CD를 구할 수 있는 유일한 주문처는 아이보리 본사 뿐이다(아마존 중고매장에서는 이 음반 초반을 185달러에 판다......). 그야말로 기가 막힌 연주에 범상치 않은 입수 난이도를 자랑하고 있다. 나는 우연찮게도 이 음반을 중고매장에 내놓으신 누군가(그 분께 절이라도 드리고 싶다)와 재고를 알려주신 '누군가'의 도움 덕택에 지금 집에서 이 음반을 잘 듣고 있다(누구신지는 몰라도 정말 감사합니다).

 

 정말 내가 이렇게 자신있게, 아니 간절하게 추천하는 음반이 다시 나올지 의문이다. 보이면 당장 사라. 낙소스 아카이브건 유투브건 보이면 무조건 들어봐라. 듣고 싶으신 분들은 내가 립을 떠서라도 보내드릴 테니 제발 들어라. 그리고 이거 안 듣고서 어디 가서 드뷔시 듣는다고 얘기하지 마라.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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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여엉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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