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 소나타 8번 (Piano Sonata No.8 in B flat major, Op.84)

작곡 시기 : 1939년 착수, 1944년 완성

2차 세계대전이 터지면서, 소비에트 작곡가들은 특수한 형태의 자유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이것은 전쟁 몇 년 전에 소비에트로 귀국한 후 '창살 없는 감옥'을 만끽하던 프로코피예프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다. ‘피아노 소나타 3부작’이라 불리는 6번 A장조(1940년 완성), 7번 B♭장조(1942년 완성), 8번 B♭장조(1944년 완성)는 전쟁 전에 착수해 전쟁 중에 완성했지만, 곡의 비틀린 선율과 강렬한 리듬이 전쟁에 대한 예찬 또는 소비에트에 대한 찬양으로 여겨져 화를 면했다. 그러나 전쟁 후에 만들어진 작품들은 전쟁 때와 같은 행운을 얻지 못했다. 만년의 프로코피예프가 가는 길은 곳곳이 가시밭이었다.

프로코피예프는 단순한 멜로디를 좋아했다. 그의 불협화음과 거친 리듬은 단순한 멜로디와 좋은 대조를 이룬다. 1941년에 쓴 자서전에서, 그는 자신의 작품 특성을 고전적(Classical), 혁신적(Innovation), 토카타적(Toccatatic), 서정적(Lyric), 괴기함(Grotesque)의 다섯 가지로 구분했다. 그는 피아노 소나타라 이름 붙인 독주곡을 40년에 걸쳐 아홉 곡 작곡했는데, 1번 Op.1과 3번 Op.28에서만 단악장 구성이 나타나고 나머지 일곱 곡은 모두 3악장 또는 4악장제를 취했다. 프로코피예프가 직접 한 말, “나는 소나타 형식만큼 완벽하면서도 융통성 있고 내가 목표로 하는 음악구조가 필요한 모든 요소를 포함하고 있는 다른 어떤 형식도 찾을 수가 없다.”라는 말을 통해, 그가 소나타 형식에 얼마나 경도되어 있었는가를 확인할 수 있다.

 

* 1악장과 2악장은 나중에 다루겠습니다.

 

3악장 (3.Vivace 12/8 - Allegro ben marcato 3/4 - Andantino 4/4 - Vivace 12/8)

총 490마디. 론도-소나타 형식. 12/8박자를 취하고 있지만 변박이 매우 심한 피날레 악장. 제시부는 1마디부터 106마디까지. 아르페지오로 제시하는 첫 주제. 9마디부터는 4/4박자로 변하면서 왼손에서 특유의 스타카토 주제를 사용한다. 71마디부터는 다시 12/8박자로 돌아오며 양손이 모두 넓은 음역의 아르페지오를 구사한다. 연속적인 장3화음이 나타나며 조성은 C장조로 전조한다. 85마디부터 106마디까지는 제시부를 마무리 짓는 부분이다. 발전부는 107마디부터 359마디까지 해당하며 곡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 D♭장조, Allegro ben marcato. 앞에서 4박자 계열을 사용하던 것과는 달리 3박자 계열로 바뀌어 극단적인 대비를 보여준다. 두 개의 특징적인 선율을 사용하는데 이 선율이 반복이나 변주를 통해 나타나기도 하며 또 모든 성부에서 자유롭게 나타나기도 한다. 때로는 아무런 규칙도 없이 툭 튀어나와 악장을 자유롭게 만들어준다. D♭장조나 3박자 계열의 리듬은 2악장의 특징과 일치해, 작곡가가 2악장과 이 부분을 하나로 묶으면서 동시에 앞뒤 부분과 대비를 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85마디에서 188마디 사이에 8성부의 두터운 수직적 화성 진행이 보이며(이 부분의 기교는 잔인하게 어렵다), 수시로 딸림음인 A♭음을 두들겨 조성감을 확고히 하고 있다. 344마디부터는 발전부와 재현부를 연결하는 Andantino의 연결구가 나타난다. 조성은 자유로우며 59마디~70마디가 전조되어 진행하는 부분이다. 360마디부터는 재현부. 제시부와 아치형의 대칭을 이룬다. 442마디부터 곡은 ff의 절정으로 치닫는다. 강한 악상과 강세, 그리고 스타카티시모의 3박자가 어울려 최상급의 타격감을 만끽하게 만들어준다. 이 타악기적인 효과와 함께 곡은 원래 조성인 B♭으로 돌아간다. 487마디에서 마지막 구절이 나타나는데, B♭단조로 이조하다가 490마디에서 돌연 강하게 종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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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동규 시인의 시 제목 중 <혼 없는 자의 혼노래>라는 시가 있다. 리게티의 레퀴엠을 한 마디로 표현하라고 한다면, 난 이 시 제목을 들어 '혼 없는 자들의 혼노래'라고 말할 것이다.

 2차대전의 참혹한 포로 생활 속에서 죽음을 위기를 맞고, 대부분의 가족을 강제수용소에서 잃은 리게티의 삶과 음악에는 항상 '삶과 죽음 사이의 기막힌 우연'이 그림자처럼 따라붙었다. 그런 그가 진혼미사곡 작곡에 도전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마음을 먹은 시기에 비해 완성은 다소 늦었다.

 첫 번째로 착수한 것은 음악원 재학 중인 1949년, 두 번째는 음악원에 출강하면서 본격적으로 작곡에 착수한 1953년이었다. 그러나 두 차례의 시도는 모두 구상에 그쳤다. 어쩌면 그 당시의 그는 아이디어는 충만했지만 그 아이디어를 구체화할 '방법'이 아직 머릿속에 들어있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현악 4중주 1번과 <무지카 리체르카타>를 통해 알 수 있듯, 당시의 리게티는 아직 고전적인 형식에 기댄 후에야 작곡하는 것이 가능했다. 당시 그는 12음기법도 잘 몰랐다고 하니, 만약 이 시기에 레퀴엠을 완성했다면 그 형태는 지금 우리가 듣는 레퀴엠과는 완전히 달랐을 것이다.

 세 번째로 진혼미사곡을 착수한 해는 헝가리에 짧은 해빙이 찾아온 1956년. 이 해의 리게티는 한스 옐리넥의 <12음기법 입문>을 구해서 보고, 라디오로 스트라빈스키와 쇤베르크, 베르크 등의 20세기 음악을 접하면서 자신의 음악성을 키워나간다. 실제로 1956년의 음악적 해빙은 리게티가 서구 아방가르드 사조를 빠르게 흡수할 수 있는 기반을 이룬다. 그러나 이 세 번째 도전에서도 리게티는 레퀴엠을 완성하지 못한다. 대신 그가 쓴 곡이 바로 12음 기법 공부를 반영한 반음계적 환상곡이다.

 1956년 9월, 헝가리의 민중들은 억압에서 벗어나 자유의 가을을 쟁취하기 위해 일어난다. 그들은 실제로 짧은 가을을 쟁취했지만, 그 다음에 닥쳐온 겨울은 너무도 길고 엄혹했다. 소련군은 탱크를 끌고와 민중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했고, 짧은 해빙 기간 동안 정부의 수반이었던 임레 라지는 끌려가 처형당했다. 헝가리가 소련군의 탱크 아래 짓밟힌 후, 수많은 헝가리인이 살아남기 위해, 또는 자유를 얻기 위해 서방으로 탈출했다. 리게티 부부도 친구인 쿠르탁 부부와 함께 서방으로 피신할 계획을 세운다. 리게티 부부은 이를 실천해 마침내 빈으로 탈출했으나, 쿠르탁 부부는 불과 1주일이라는 기간 사이에 국경이 폐쇄되는 바람에 결국 탈출하지 못하고 헝가리로 돌아간다.

 서방에 도착한 리게티는 쾰른과 다름슈타트 등지에서 서구의 사조를 빠르게 흡수해나간다. 최초의 급진적인 곡 <비전>을 거쳐 전자음악 <분절>, 관현악곡 <환영>이 만들어지며, 마침내 1961년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아트모스페르>가 완성되기에 이른다. 연구자들은 그의 <아트모스페르>에서 장례식 음악 분위기 비슷한 것을 찾아낼 수 있다고 한다. 그 말이 맞다. 그는 의식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언젠가 진혼미사곡을 완성할 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1963년, 스웨덴의 스톡홀름 라디오 방송국이 리게티에게 성악곡 작품을 위촉하면서 마침내 작곡가는 첫 시도 이후 14년이 흘러서야 비로소 진혼미사곡 작곡을 시작한다. 어린시절 꿈꾸던 막연한 죽음에 대한 환상, 2차대전의 참혹한 악몽과 그 이후 공산 헝가리 정권 치하에서 겪었던 불안이 그의 입에서 '혼 없는 자들의 혼노래'가 흘러나오도록 도운 셈이다.

 리게티는 천천히, 신중하게, 복잡하게 작곡하는 사람이다. 2년의 작곡 기간 동안 그는 성부를 수없이 빼고 더하고, 음표를 빼고 고치고, 리듬을 분할했다가 다시 합치기를 반복하면서 자신이 원하는 형태(그의 곡을 '구조'라고 부르기는 힘들기에)가 나올 때까지 수정에 수정을 거듭했다. 작곡은 1965년 초에 끝났다. 그리고 그 해 3월, 미하일 길렌의 지휘 아래 스웨덴 교향악단과 방송 합창단의 연주로 이 성악곡은 초연을 치르기에 이른다.

 이 곡의 성악 성부는 무자비하기로 악명이 높다. 소프라노와 메조 소프라노인 두 독창자는 격렬함과 부드러움을 모두 자유자재로 소화할 수 있어야 하며, 최소 120명을 요구하는 20성부의 합창단 역시 아주 어렵고 까다로운 악보를 소화해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 <진노의 날> 악장의 급변하는 템포와 음역은 보통 실력이 아니고서는 무난하게 처리하기는 커녕 악보를 따라가는 것조차 힘이 들 것이다. 관현악은 현악기와 2관 편성에 다양한 타악기와 첼레스타, 쳄발로, 하프로 이루어져 있으며, 성악 성부보다는 비교적 간결하며 주로 성악 성부를 돕거나 더 복잡한 흐름을 만들어내는 역할을 맡는다. 특히 기악 성부는 항상 성악 성부와 함께 등장하며 성악 성부의 복잡한 인토네이션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버팀목 역할을 맡는다는 점에서 아주 중요하다.

 리게티는 진혼미사곡의 대본들 중 많은 부분을 쳐 버리고 <입당송>, <키리에>, 그리고 <부속가> 부분만 남겼다. <부속가> 부분 중에서도 <진노의 날>을 <De Die Judicii Sequentia(심판의 날에 대한 부속가)>로 고쳐 쓰고, 거기서 또 마지막 6개 행을 떼어 마지막 곡인 <라크리모사>에 붙였다. 리게티는 <라크리모사>를 통해 곡이 완결된다고 보았기에 다른 곡을 더 작곡하지 않았다. 

 성악의 최저음역에서 어둡고 깊은 슬픔을 표현하듯 시작하는 <입당송>은 아주 조용하지만 음울하고 비참한 모습으로 일관한다. 음역대가 천천히 상승하면서 곡도 서서히 밝아지며, 마지막에는 영원과 평온을 갈구하는 조용한 기도로 끝이 난다. 이 영원함을 갈구하는 평온은 이 곡의 다음 곡인 <영원한 빛(Lux aeterna)>의 아이디어와 연관성이 있다.  

 <키리에>는 다섯 파트의 합창단이 각기 맡은 성부에서 다성음악을 연주하는데, 개개의 성부는 점점 분화하면서 꼬이고 얽혀 나중에는 20성부까지 분화한다. 이 악장 또한 조용히 시작했다가 음계가 상승하면서 갑작스럽게 극단적으로 밝은 빛을 끌고 오는데, 이것이 <입당송>과 이 곡의 가장 큰 차이점이다. 하지만 이 곡에는 클라이맥스도 없고 악구도 없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음향면들이 존재할 뿐이다. 음량은 중간에 커졌다가 작아지기를 반복하지만 그것이 클라이맥스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유일하게 지속되는 것은 오직 하나, 반음 단위로 중첩된 3도 음정들이 변화하며 만들어내는 거대한 음향 덩어리다. 아마 <아트모스페르>를 성악곡화한다면 이 <키리에>와 같으리라.

 곡의 중심인 (편의상) <진노의 날>은 <키리에>와는 극단적인 대비를 이루는 거칠고 격렬한 곡이다. <키리에>에서 클라이맥스가 하나도 없었다면 <진노의 날>은 곡 전체가 클라이맥스를 이루고 있다. 세상을 멸망시킬 처절한 신의 분노 속에서 두려워하는 듯 떨고 있는 듯 조용히 중얼중얼거리다가 갑자기 소리를 질러대는 합창단, 가혹할 정도로 넓은 독창자의 도약 음정, 무템포(Senza Tempo)의 사용으로 급변하는 속도의 대비, 거칠게 돌진했다가 갑자기 부드럽게 쓰다듬는 음색의 대비 등으로 일관되게 극단적인 형태를 취한다. 특히 이 악장의 대 클라이막스에서는 합창단이 마치 바벨탑 직후의 세상처럼 정신없이 언어를 남발하는 광경을 들을 수 있다.

 <진노의 날>이 지나간 후 등장하는 마지막 곡 <라크리모사>에서 위협적이고 거친 물결은 모두 빠져나가고, 오직 두 명의 독창자와 소수의 관현악만이 남아 시간과 거리를 두고 <진노의 날>을 회고한다. 에필로그 격인 이 곡은 불협화음에서 협화음으로, 동적인 진행에서 정적인 진행으로, 심판에서 이별로 이어지는 또 하나의 대비를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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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향곡 9번 D단조 <합창> Op.125

영어 : Symphony No.9 in D minor, Op.125 "Choral"

 

작곡 시기 : 1790년대부터 '환희에 붙임' 작곡을 구상. 1818년에 초고를 쓴 후, 1822년에 본격적으로 시작해서 1824년 초 완성

작곡 장소 : 빈

초연 : 1824년 5월 7일, 빈의 케른트너토어 극장에서 베토벤 자신의 지휘, 실질적인 지휘는 미하일 움라우프가 했다. 독창은 헨리에테 존탁(소프라노), 카롤리네 웅거(알토), 안톤 하이칭거(테너), 자이베르트(베이스).

출판 : 1826년

헌정자 :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

악기 편성 : 피콜로(4악장), 플루트 2, 오보에 2, 클라리넷 2(B♭, C, A), 바순 2, 콘트라바순(4악장), 호른 4(D, B♭, B♭ Bass, E♭), 트럼펫 2(D, B♭), 트롬본 3(알토, 테너, 베이스. 2악장과 4악장), 팀파니, 트라이앵글(4악장), 심벌즈(4악장), 큰북(4악장), 현악 5부 / 4악장에서 소프라노, 알토, 테너, 바리톤 독창과 혼성 4부 합창 참여(테너는 1과 2로 나뉘는 부분 있음)

 

개설

이 곡에는 「실러의 송가 '환희에 부침'에 의한 끝 악장에 합창을 담고 있다」고 적혀 있다. 따라서 이 곡은 《합창》 또는 《합창 붙음》이라고 불리는 경우가 많다. 당시까지 고전적인 교향곡에는 성악을 전혀 갖지 않았는데 이 곡에서 처음으로 네 사람의 독창자와 혼성 합창단을 이용한 것이다. 또한 제4악장은 실러(1759~1805)의 「환희에 부친다」 송가의 구절을 가사로 사용하고 있다. 베토벤은 본래 이 실러의 송가 전체에 음악을 붙였던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에 드는 부분을 골라 사용하였다.

이 실러의 송가는 프랑스 혁명 직전인 1785년 드레스덴에서 만든 것으로 독창과 합창을 교대로 부르게 되어 있다. 당시 26세의 청년 실러는 독일의 봉건적 정치 형태와 전제적인 군주제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었다. 이 시에서 그는 인류애와 수백만 명의 단결에 의한 인강 해방의 이상을 소리 높여 노래하였다. 실러는 처음에는 이 시에 「자유에 부침」이라는 제목을 붙이려고 했지만, 엄격한 검열 때문에 '자유'를 '환희'로 고쳤다고 한다. 이 송가는 당시 청년이나 지식인 사이에서 널리 사랑받고 있었다.

이후 프랑스 혁명, 나폴레옹의 출현이라는 대사건이 일어나고, 베토벤도 나폴레옹이 옛 전제 군주제를 무너뜨리고 새롭고 민주적인 세계를 만들어나가는 것이라 생각했고, 그에게 호감을 갖기도 했다. 이런 성격의 베토벤이 실러의 송가를 마음에 들어 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베토벤이 이 송가에 관심을 갖게끔 한 사람은 당시 본 대학에서 강의를 했던 젊은 시인으로, 실러 부부와 친분이 있는 루트비히 피체니히(1768~1831)였다. 베토벤은 1792년 빈으로 옮겨오기 한 달 전쯤에 이 피체니히와 친해지게 된다. 그리고 1793년 1월 27일 실러의 아내 샬로테에게 보낸 편지에서, 피체니히는 베토벤이 실러의 「환희」의 각 장에 음악을 붙일 계획을 세웠다고 알리고 있다.

이에 앞서 《교향곡 제9번》과 매우 밀접한 연관을 지닌 것으로 1790년 9월부터 10월에 걸쳐 작곡한 《레오폴드 2세 대관식을 위한 칸타타》가 있다. 그 마지믹 제4악장의 합창에 「엎드려라, 수백만의 사람들이여」(Stürzet nieder Millionen) 부분이 등장한다. 이와 유사한 가사가 실러의 송가에도 나온다(Ihr stürzt nieder, Millionen?). 이 칸타타는 실러가 아니라 아벨동크의 시를 바탕으로 한 것이지만 이 부분에서의 성악과 관현악 처리에도 《교향곡 제9번》을 연상케 하는 측면이 있다.

《교향곡 제9번》 제4악장의 유명한 「환희의 주제」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근원을 찾는 문제는 간단하지 않다. 그러나 거기에는 1794년 또는 1795년 초에 씌어진 가곡 《사랑받지 못하는 이의 탄식》(Seufzer eines Ungeliebter)과 《서로 사랑함》(Gegenliebe)의 부분이 발견된다. 이 가사는 뷔르거(1749~1795)가 쓴 것으로, 사상적으로는 실러의 것과 관계가 없다. 또한 이 선율은 1808년 완성된 《합창 환상곡》 Op.80의 노래 주제로 다시 사용된다.

1812년이 되면 「환희의 주제」를 위한 또다른 스케치가 나타난다. 이것은 3/4박자의 것으로 첫째박에만 선율음을 두고, 둘째박과 셋째박을 쉼표 처리한 것이다. 또한, 1822년에는 4/4박자의 현재의 것과 동일한 선율이 스케치 노트에 등장한다. ’환희의 주제‘는 한 때 열광적인 환희 대신 비장한 느낌의 주제를 쓰려고 한 적이 있지만, 결국 우리가 잘 아는 ’환희의 주제‘가 채택되었고, 쓰려고 했던 주제는 대신 현악 4중주 Op.132 의 마지막 악장에 들어갔다. 이처럼 제4악장의 가사와 주제만 놓고 보더라도 《교향곡 제9번》이 완성되기까지 작곡에 걸린 기간은 매우 길다. 다른 악장의 경우 1809년의 스케치에서 처음으로 현재의 제1악장 첫머리의 복안이 씌어져 있는 것이 발견된다. 1811년과 1812년경에는 《D단조 교향곡》이라는 필적이 있으며, 1812년 5월 말의 편지에는 「지금 3곡의 교향곡을 작곡하고 있으며, 한 곡은 이미 완성하였다」고 적혀 있다. 이 3곡은 교향곡 제7번과 제8번, 그리고 제9번 D단조 교향곡이다.

1815년은 빈 회의가 열린 해이며, 베토벤 개인적으로도 영광의 해라고 할 수 있다. 스케치 노트에서는 현재의 《교향곡 제9번》 제2악장의 스케르초 주제가 발견된다. 또한 1817년 9월경부터 1818년 5월경까지의 스케치 노트에서는 현재의 제1악장의 대체적인 윤곽과 전체의 구상도 발견된다. 1818년에는 교향곡에 옛 조성을 지닌 종교적인 노래를 도입하는 것 때문에 고민하며, 마지막 악장이나 아다지오에 노래를 삽입하기로 한다. 즉, 아다지오에는 그리스의 종교적이며 신비한 가사(Cantique Ecclesiastique)를, 마지막 악장인 알레그로에는 바쿠스의 제전을 배치하려고 한다. 그 무렵 베토벤은 2곡의 교향곡을 쓰려고 계획하고 있었으므로 어느 곡에 성악을 도입하려 했는지 단정할 수는 없다.

이 1817년부터 1818년까지 베토벤은 개인적으로 행복하지 못한 상태였다. 귓병에 대해서는 완전히 체념 상태였으며, 몸도 좋지 않아 기관지와 장 때문에 고생하고 있었다. 더구나 베토벤을 둘러싼 빈의 음악계는 심원한 음악을 반기지 않는 분위기였으며, 정치적으로도 메테르니히의 철권보수 반동체제를 확립하여 자유주의가 승리하기를 기대하던 시민들을 억압하는 방향으로 나가고 있었다. 베토벤은 이런 상황을 참을 수 없었다. 또한 조카인 카를을 돌봐야 하는 문제도 있었다. 점점 불량해지는 카를에 대해 피붙이로서의 애정을 쏟으며, 품행이 좋지 않은 카를의 어머니와 카를의 양육을 둘러싸고 재판까지 벌이는 사태에 이르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베토벤의 창작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것은 당연하였으며, 작품 하나를 완성하는 데 의외로 시간이 많이 걸렸다. 그 가운데 남모르게 진척시키고 있었던 것이 《교향곡 제9번》의 1악장이었다. 이 악장의 커다란 스케일과 투쟁적 특성, 고투하는 모습은 당시 베토벤이 겪던 어려움을 이해할 때만 납득할 수 있을 것이다.

병마와 육체적 피로, 마음의 아픔과 같은 악조건에 둘러싸인 베토벤에게 1818년 영국으로부터 최신식 브로드우드 피아노가 기증되었고, 이를 계기로 베토벤의 피아노 음악에 대한 의욕이 다시 타오르게 된다. 또한 그해 가을에는 마음에 들지 않는 빈을 벗어나 이전부터 있었던 초청을 받아들여 런던의 필하모니 협회에서 교향곡을 초연하려는 계획도 진척시키고 있었다(그러나 이것은 실현되지 못했다). 또한 이 시기에는 《장엄 미사》(미사 솔렘니스)의 작곡에도 본격적으로 착수하였다. 이처럼 1818년 초여름에 베토벤은 창작의 힘을 되찾았다. 그리고 런던 필하모니 협회로부터 두 곡의 교향곡을 작곡해달라는 의뢰도 받는다. 앞서 말한 두 곡의 교향곡 작곡 계획은 이와 연관된 것이다. 베토벤은 한 곡은 기악만으로, 다른 한 곡은 성악을 함께 사용한 곡을 쓰려고 했다. 그러나 구체적인 사항은 알려져 있지 않다.

《장엄 미사》는 원래 루돌프 대공의 대주교 취임을 위한 곡이었으며, 예정보다 2년 정도 늦어진 1822년에 완성되었다. 베토벤은 자신의 마음을 충족시키는 평화와 세계의 안녕을 기원하면서 이 곡을 열심히 썼으며, 피아노 소나타로 기분을 전환하는 것 외에는 다른 대곡에 눈을 돌리지 않았다. 이렇게 대곡 미사가 완성되자 중단했던 교향곡 작곡에도 눈을 돌릴 수 있게 되었다. 런던에 있던 제자 리스에게 새로운 교향곡의 작곡료 등에 대해 필하모니 협회와 다시 이야기를 진척시키라는 편지를 쓰기도 했다. 그 결과 런던의 이 협회는 1822년 11월 작곡료를 결정하였고 베토벤도 이것을 받아들인다.

베토벤은 그때까지 구상하고 있던 《D단조 교향곡》을 협회를 위해 진행시키기로 하고 기악만 사용한 교향곡으로 작업하게 된다. 그러나 합창을 덧붙인다는 아이디어도 버린 것은 아니어서, 또다른 「독일 교향곡」이라는 작품에 합창을 삽입할 예정이었다. 이것은 당시 민족 의식의 고양이라는 흐름에서 독일인으로서의 자각에 입각하여 계획된 것으로, 그 마지막 악장에 실러의 「환희의 부침」에 토대를 두고 전체의 클라이맥스를 구축하려는 구상을 정리하고 있었다. D단조 교향곡 제3악장은 바덴의 자연 속에서 작곡되었다. 이 악장에 안정되고 따스한 분위기가 감도는 것은 바로 그런 환경 탓이었다.

베토벤은 이 두 교향곡을 함께 작곡할 예정이었으나 결국 아이디어를 하나로 합쳐 하나의 교향곡을 쓰기로 계획을 바꾸게 된다. 현재의 《교향곡 제9번》은 이렇게 탄생하게 되었다.

전곡은 1824년 2월에 완성되며, 역사적인 초연은 빈의 케른트너토어의 궁정극장에서 이루어졌다. 곡이 끝났을 때, 완전히 귀가 들리지 않았던 베토벤은 알토 독창자가 알려주어 간신히 청중의 박수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는 에피소드가 전해진다.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이 연주회에서 돌아온 수입은 예상 외로 적었다고 한다.

이 《교향곡 제9번》은 확실히 베토벤의 위대한 산물이다. 베토벤은 《장엄 미사》에서 자신의 내적인 평안과 외적인 평화를 기원하였고, 마지막 곡 <아뉴스 데이>에서는 내적인 평안은 확실하였지만 외적인 평화에 대해서는 스케치나 초고에 나타나 있지 않다. 그것을 보충하는, 또는 완결짓는 것이 바로 이 교향곡이다. 모든 인류가 함께 실현시켜야 할 평화를 이상주의적으로 노래한 것이다. 또한 베토벤의 신념이었던 「고뇌를 통한 환희」라는 말은 그대로 이 교향곡 작곡 과정에서도, 그리고 곡 자체의 진취적인 자세에서도 확실히 부각되어 있다. 오스트리아를 지배하고 있던 불온한 반동정치도 베토벤에 의해 불멸의 예술 작품으로 귀결되었다.

4악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고뇌를 통한 환희」라는 주제를 놓고 볼 때, 앞의 세 개의 악장은 제4악장의 전제로 놓여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마지막 악장에서 음악적으로나 내용적으로 앞의 세 개의 악장을 총괄하는 새로운 방법이 사용되고 있다. 아울러 제1악장의 기대감을 불러일으키는 공허한 시작 방법, 충실하고 장대한 코다, 제2악장 스케르초에서의 소나타 형식과 푸가토를 혼용하는 대규모의 구성법, 제3악장의 두 개의 주제를 지닌 변주곡이면서도 자유롭게 정돈된 방법, 그리고 마지막 악장에서의 변주에 기반을 둔 자유로운 형식, 이 모든 것은 그때까지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런 여러 가지 특징은 후대 작곡가들에게 끊임없이 큰 영향을 주었다. 악기 편성에서도 종래의 교향곡보다 수준이 높으며, 타악기 종류도 늘어나 있다.

9번 교향곡의 위대한 점 중 하나는, 이토록 오랫동안의 구상을 거쳐 만들어진 곡이 하나의 실로 짠 직물처럼 완벽한 자기완결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이 말은 1악장부터 3악장까지는 들어맞지만, 4악장까지 꼭 들어맞는 것은 아니다. 4악장에 구조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베르디도 4악장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었다. 반면 바그너는 4악장을 가장 위대한 음악으로 보았다. 4악장이 가장 위대한 음악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4악장의 축인 <환희의 주제>가 가장 위대한 주제인 것은 여심의 여지가 없다.

초연 이후, 곡은 빠르게 사람들의 기억에서 지워지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1830년대에 이 곡을 지속적으로 연주한 도시가 있었으니 바로 파리. 이윽고 18세기 중반에 이르러 바그너를 비롯한 지휘자들이 이 곡을 자주 연주하면서 이 곡은 오케스트라의 정규 레퍼토리로 자리 잡는다. 확실히 이 곡의 난이도는 그렇게 쉽지 않다. 그렇기에 레퍼토리로 자리 잡는데 오랜 세월이 걸린 것이다. 지휘자들은 이 곡이 강조하는 주제를 보강한다는 차원에서 편성을 계속 추가했다. 더블링은 필수적인 관례로 자리 잡았다. 20세기 중반에 들어 이 곡은 나치의 선전용 음악과 같은 수준으로 떨어지는 비극을 맞이했다. 그러나 이후의 사람들은 이 곡의 비극적인 오용을 지워내고 원래의 위치에 올려놓기 위해 애를 썼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을 때 번스타인이 이 곡의 가사를 <환희>에서 <자유>로 바꿔 연주한 것은 그 노력의 일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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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악장의 주제에 관한 논쟁은 학자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멜로디 위에 리듬을 새긴 이 주제는 전통적으로 메트로놈 소리에서 힌트를 얻은 것이라고 하는데, 밑의 사실들을 조합하다 보면 정말 그런 것인지조차 의심이 간다.

 이 메트로놈은 요한 네포무크 멜첼(1772~1838)이 고안한 것이라고 한다. 멜첼과 그의 동생 레오나르트 멜첼(1783~1855)은 1812년 초쯤에 베토벤과 친하게 지내기 시작했을 것이다. 형 요한은 《전쟁 교향곡》을 베토벤에게 위촉하여 큰 돈을 벌었던 인물이다(베토벤을 위해 보청기를 만든 것은 동생 멜첼이었다). 그가 베토벤과 친하게 지내게 된 것은 크로노미터라는 장치를 만들면서부터이다. 1813년 10월 13일 빈의 한 신문에 이 크로노미터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멜첼 씨는 기계와 음악에 대한 풍부한 지식을 지닌 것으로 유명하다.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여행에서 유명한 작곡가나 음악학교에서 많은 사람들이 노력을 기울였지만 결함이 있는 것으로 판명된 기계를 개선하여 많은 사람이 쓸 수 있도록 자신의 재능을 발휘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멜첼 씨는 문제를 해결하기 시작했으며, 최근 전시되었던 견본으로 빈의 작곡가들을 만족시켰다. 이것은 곧 국내의 여러 작곡가들의 주의를 끌게 될 것이다. 이 견본은 작곡가 살리에리, 베토벤, 비글, 기로베츠, 훔멜이 다양한 테스트를 했다. 궁정 악장 살리에리는 우선 하이든의 《천지창조》에서 이 크로노미터를 사용해보았다. 그리고 악보의 다양한 단계에 따라 다양한 템포를 맞출 수 있었다. 베토벤은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템포가 자주 잘못 이해되고 있는 것에 대해 유감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이 발명품으로 인해 자신이 생각하는 템포로 화려한 악곡 연주를 할 수 있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했다.」

이때의 크로노미터는 아직 메트로놈이라고 불리지 않았으며, 기계적인 메트로놈과는 달랐다. 메트로놈의 실제 발명자는 네덜란드의 기사 빙켈이라고 한다. 멜첼은 1815년 암스테르담에서 빙켈의 제품을 알게 되었고 그 아이디어를 그대로 빌려 파리에서 그것을 모델로 한 장치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1816년 파리에서 메트로놈이라는 이름으로 이 제품에 대한 특허를 취득하였다. 멜첼이 빈에 돌아온 것은 이듬해인 1817년이다.

노테봄의 「제1베토베니아나」에 의하면, 멜첼은 1815년이라는 연대를 메트로놈에 새겨넣었다고 한다. 하지만 메트로놈에 대한 소식이 빈에 전해진 것은 1816년 가을로 추정된다. 멜첼은 파리에 메트로놈 공장을 세워 대량생산을 하게 되고, 1817년 초에 영국, 프랑스, 미국에서 널리 인기를 끌게 된다. 그러나 멜첼이 목표로 삼았던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는 그리 큰 실적을 올리지 못했다.

그런데 쉰틀러는 그의 저서 「베토벤」에서 크로노미터와 메트로놈을 혼동하는 실수를 저질러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1812년 봄 베토벤, 기계 제조업자 멜첼, 브룬스비크 백작, 슈테판 폰 브로이닝 등의 여러 사람이 송별 식사를 위해 모였다. 베토벤은 린츠에 있는 동생 요한을 방문하게 되었고, 거기에서 《교향곡 제8번》을 작곡한 후에 보헤미아의 휴양지로 가려했다. 멜첼은 그 유명한 자동식 메트로놈으로 돈을 벌기 위해 영국으로 갈 예정이었으나, 그 계획을 연기하였다. 이 기계 사업가가 발명한 박자 측정기 메트로놈은 이미 살리에리, 베토벤, 비글 등 유명한 음악가들이 그 효과를 인정하고 대중들에게 추천을 할 만큼 진보한 것이었다. 베토벤은 기지를 발휘하여, 풍자하듯이 그 기계를 "지휘자가 필요없는 물건"이라고 말하며 카논을 즉흥적으로 작곡, 연주하였다. 그것을 곧 친구들도 노래하였다.」 

쉰틀러는 이 책에 그 카논 악보를 실었는데, 이 카논에서 《교향곡 제8번》의 알레그레토 스케르찬도가 만들어졌다고 서술하고 있다. 이 카논은 킨스키—할름 작품 목록 WoO 162에 해당하며 《교향곡 제8번》의 제2악장을 해설할 때 자주 인용되는 유명한 것이다. 이것은 《타타타 카논》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이 카논에 「타타타 사랑하는 멜첼 씨, 안녕, 안녕히 가십시오. 시대의 마법사, 위대한 메트로놈……」이라는 가사가 붙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몇 가지 문제점이 있다. 우선 저녁모임이 1812년 봄이었는지 의심스럽다. 왜냐하면 1810년 3월부터 1813년 2월까지 브룬스비크 백작은 빈에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백작이 그 자리에 없었던 것은 그렇다고 해도 당시 멜첼의 메트로놈이 유명해졌다는 것도 이상하다. 그리고 1820년 베토벤의 회화장에 의하면, 쉰틀러가 《교향곡 제8번》 제2악장 동기에 의한 카논의 오리지널 악보를 발견하지 못했으니 그것을 자신을 위해 써달라고 베토벤에게 부탁했다고 한다. 또한 1824년에 《타타타 카논》을 노래했던 즐거운 저녁은 1817년 말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멜첼은 1817년 말이 되어서야 빈에 돌아와 메트로놈을 선전하였다. 식사를 한 것이 1812년 봄이라면 당시 노래한 카논가사는 현재 남아 있는 것과는 다른 것이며 메트로놈이라는 이름도 아니었을 것이다. 1817년 말에 노래한 카논은 현재의 가사와 같은 카논으로 보이지만 이 연도도 쉰틀러가 적은 것이기 때문에 확실치는 않다. 단, 쉰틀러가 자신은 소프라노를 노래하고, 멜첼이 베이스를 노래했다고 적고 있으므로 멜첼이 빈에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 또한 현재 남아있는 이 카논 악보에는 메트로놈 속도로 8분음표가 72라고 적혀 있다. 노테봄에 의하면, 이것은 쉰틀러가 《교향곡 제8번》 제2악장을 보고 적은 것으로 보이며 베토벤 자신이 기록한 것은 아니다.

노테봄은 이 카논이 1812년 여름에 즉흥적으로 작곡된 것이며 교향곡 제8번 제2악장의 스케치 연대와는 모순이 없다고 말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 카논이 제2악장에 이용된 것으로 생각할 수는 없다. 1812년 봄에 이 저녁모임이 실제로 있었는지 확실치 않으며, 그때 베토벤이 이미 이 악장을 갖고 있었지만 그것을 쓰는 것을 중단했을 수도 있다. 이렇게 해서 카논과 제2악장의 관계는 미궁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위의 사실에서 도출할 수 있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1812년에 이미 크로노미터라는 이름의 박자를 재는 기계가 있었다.

 2) 베토벤은 1812년에 교향곡 8번 2악장을 착상, 완성했다.

 3) 크로노미터가 멜첼에 의해 개량되어, 메트로놈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것은 1815년이다.

 4) 멜첼은 1817년 말에야 빈으로 돌아와 메트로놈을 선전했으나 많이 팔리지는 않았다.

 5) 쉰틀러는 1812년 저녁모임에서 베토벤이 메트로놈을 보고 카논을 작곡했으며, 이 카논에서 교향곡 8번 2악장이 유래했다고 말한다.

 6) 그러나 1812년에 위와 같은 저녁모임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히 알 수 없다. 카논을 노래한 것은 1817년이라고 하는데, 사실 이것조차 확실치 않다.

 7) 만약 1812년에 저녁모임이 있었다면, 지금 전해지는 형태의 카논과는 달랐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1812년에는 멜첼이 빈에 없었고, 또 그 당시에는 '메트로놈'이라는 단어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진실은 미궁 속에 만악의 근원인 쉰틀러를 죽여야 합니다 아 이미 죽었지

 

 노테봄의 주장을 전용한다면, 카논의 작곡은 교향곡 8번과 비슷한 시기에 이루어진 것이 맞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교향곡 8번 2악장과 카논이 연관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섣부른 행동이다. 물론 교향곡을 쓰다 중단하고 카논을 작곡한 후, 다시 마음을 바꾸어 교향곡을 완성했을 수도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카논과 메트로놈의 연관성은 너무 희박해서 제쳐놓지 않고서는 판단이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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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향곡 8번 F장조 Op.93

영어 : Symphony No.8 in F major, Op.93

 

작곡 시기 : 1812년 여름에서 10월 사이

작곡 장소 : 테플리츠

초연 : 비공개 초연은 1813년 4월 20일 루돌프 대공의 사택에서 이루어지며, 공개 초연은 1814년 2월 27일 빈 레두텐잘에서 베토벤의 지휘로 이루어짐.

출판/판본 : 1817년

악기 편성 : 플루트 2, 오보에 2, 클라리넷(B♭) 2, 파곳 2, 호른(F, B♭) 2, 트럼펫(F) 2, 팀파니, 현악 5부

 

개설

이 곡을 구상한 것은 1811년이지만 본격적으로 작곡을 시작한 것은 《교향곡 제7번》을 완성한 7월부터로, 테플리츠에 머무르면서 활기차게 작업을 진척시켰다. 당시 베토벤은 두 번째로 테플리츠에 체류하는 것이었기에 한층 그 곳에 친숙해 있었다. 이렇게 완성한 이 교향곡은 밝고 명랑하며 베토벤의 작품으로서는 드물게 장중하지 않으므로 낭만적인 경향을 띠고 있기도 하다. 곡을 완성한 것은 1812년 10월, 동생 요한의 결혼으로 린츠에 갔을 때의 일이다. 당시 여러 가지 불쾌한 일도 있었다고 하는데, 다행히 곡은 거의 마무리되어 있었다.1)

이 곡은 밝고 명랑하다는 점에서 《교향곡 제7번》과 비슷하지만, 그 곡과 같은 힘이나 열기, 심각함은 없다. 그 때문에 이 《교향곡 제8번》은 지금까지의 교향곡보다 창작력이 후퇴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베토벤은 이 작품에서 지금까지 없던 것을 추구하여, 교향곡의 새로운 형식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이것을 위해 단도직입적으로 간결하게 쓰는 방법을 선택했다.

베커는 교향곡 7번과 8번을 비교하면서 '교향곡 제7번은 높은 봉우리로 올라가는 등반을 나타내고, 교향곡 제8번은 그 봉우리로부터 내려오는 데서 생겨나는 행복한 기분을 나타낸다.'고 표현했다. 교향곡 7번의 외향성, 치밀하면서도 활력이 넘치는 리듬, 큰 형식과 교향곡 8번은 소소한 고전성, 미묘한 관현악법을 비교한다면 베커의 주장은 일견 타당해 보인다.

그러나 내가 보는 베토벤의 교향곡 8번은 귀스타브 플로베르가 집필한 《통상관념사전》의 교향곡 버전이다. 베토벤은 지금까지의 고전 교향곡을 대각선에서, 살짝 비뚤게 바라본다. 여기서 당연하게 다루어지는 것은 하나도 없다. 화성은 실험을 계속하며(1악장의 비올라 패시지), 악구들은 때로 초보적인 수준으로 되풀이되다가 갑자기 예상치도 못한 방식으로 돌변한다. 이전의 낡아빠진 음악 양식들을 비꼬고 있으며(때로는 자기 자신도 조롱의 대상이 된다), 오케스트레이션은 황당할 정도로 혁신적이다. 느린 악장은 하나도 없다. 놀라운 것은 이 모든 것이 아주 전통적인 악기 편성과 양식 속에서 진행된다는 점이다. 고전의 옷을 입고 있지만, 머리로는 혁신을 진행하는 것이다. 고전을 가장한 대담한 진보라 할 수 있다. 물론 겉으로는 유쾌한 음악적 농담으로 치장한 모습이지만 말이다.

베토벤 자신은 이 교향곡을 "작은 교향곡 F장조"라 불렀다. 초연은 1814년 2월 27일, 교향곡 7번 및 전쟁 교향곡 <웰링턴의 승리> Op.91와 함께 있었다. 앞의 두 곡이 반응이 좋아서였는지 모르지만, 8번 교향곡도 호평을 받았다. 뒤에 언급하겠지만, 통상적인 관현악 편성을 사용하면서도 악기 사용법이 참신하다. 특히 팀파니는 악장에 따라 달라지는 음정 때문에 통상적인 두 벌(F-C) 대신 F-C-F의 세 벌을 갖추는 경우가 많다. 

 

1악장 (1.Allegro vivace e con brio 3/4) (F major)

소나타 형식. 이 악장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포르티시시모(fff)라는 '무지막지한' 다이내믹이 두 번이나 등장하는 악장이다. 시작은 가볍고 즐거운 1주제를 바이올린이 갑자기 등장시키며 시작한다. 주제의 후반부는 우아하게 꾸며져 있으며, 점차 리듬이 세분화되면서 F, A♭, D의 화음으로 마친다. 효과적인 한 마디 반의 휴지(Generalpause) 후에 파곳 반주 위에서 2주제를 바이올린으로 연주한다. 흐르는 듯 들리는 이 주제는 1주제 후반부 동기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어 저현이 감7 분산화음을 연주하고, 관현악 전체로 힘을 얻으면서 제시부를 마무리한다. 발전부는 1주제를 사용하고 있으며 재치 있고 유머가 있는데, 감7화음을 매개로 자유로운 조바꿈을 보인다. 재현부에서는 목관악기가 재현하는 2주제가 C장조로 나온다는 점이 독특하며(제시부에서는 원조의 버금딸림조, 재현부에서는 딸림조), 이어지는 코다는 리듬과 휴지로 교묘한 클라이맥스를 이루어낸다. 원래 코다는 34마디가 더 짧았는데, 프로테시시모를 거쳐 마지막 정점에 이르는 부분이 빠져 있었다. 이 부분을 추가하면서 베토벤은 교향곡 특유의 느낌을 완성했다. 마지막으로 1주제의 동기를 제시할 때 강박에 지속적인 sf가 등장하는 부분이 있는데 전혀 불쾌한 느낌이 들지 않는다. 마지막 악구도 대가의 솜씨로 능숙하게 마무리하는데 아무렇지도 않은 듯 p로 마무리하는지라 오히려 청자들을 당황하게 만든다.

 

2악장 (2.Allegretto scherzando 2/4) (B♭ major)

발전부가 없는 소나타 형식. 시계추의 똑딱거리는 리듬으로 일관하는 소나타 형식의 스케츠로 풍 악장. 멜첼이 베토벤을 위해 발명한 크로노미터를 보고 작곡했다는 "타타타 카논(WoO 162)"과 2악장은 어느 정도의 연관성이 있는지 알 수 없다. 목관이 스타카토로 연주하는 이 리듬 위에서 1바이올린이 역시 스타카토로 1주제를 연주하며 바로 첼로가 잇는다. 부주제는 아주 빠른 움직임을 보이는 64분음표로 되어 있다. 2악장의 주제와 멜첼의 메트로놈, 그리고 "타타타 카논"에 관한 문제는 다른 포스팅에서 설명하도록 하겠다.

 

3악장 (3.Tempo di Menuetto 3/4) (F major)

3부 형식. 교향곡 1번과 2번, 4번의 미뉴엣 악장은 스케르초의 성격이 강한 데 반해, 이 악장은 미뉴엣이라 불려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아마 스케츠로풍인 2악장과의 대비를 위해 미뉴엣을 쓴 것으로 보인다. 매우 풍자적인 목적이 강한 악장이다. 옛 형식에 과장된 분위기를 집어넣어 고리타분한 음악가들을 비꼬려는 의도가 숨어 있다. 약박을 강조하는 박절, 엇리듬이 두드러진다. 약박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어떤 악절들은 위악적으로 들리기까지 한다. 트리오는 대조적으로 목가적인 호른의 2중주를 강조하며 현의 분산화음이 붙고, 클라리넷과 바순이 가세한다.

 

4악장 (4.Allegro vivace 2/2) (F major)

소나타 형식. 경우에 따라서는 자유로운 론도 형식(A-B-A'-A-B-A'-A'-B-A-코다)으로 보는 것도 가능하겠지만, 1주제가 주도권을 쥔 소나타 형식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Allegro vivace라고 되어 있지만, 거의 Presto에 가깝게 연주하는 것이 좋다. 발전부와 코다가 아주 충실하며, 오케스트레이션에서 바순과 팀파니의 독특한 활용법이 눈에 띄는 악장이다(특히 코다의 팀파니 사용법이 매우 독특하다). 주제 선율은 2악장의 주요 주제와 비슷한 느낌을 던진다. 이것이 ppp까지 작아진 후, 엉뚱한 C#음이 돌출되고는 곧바로 ff로 폭발한다. 셋잇단음의 적절한 사용과 복합 리듬에 의한 클라이맥스 효과도 아주 일품이다. 코다도 독특한데, 화성이 극도로 이완된 으뜸조 패시지를 계속 연주하며 '도대체 이 교향곡 언제 끝나는 거야?'라는 의문을 유발케 한다. 이 코다가 유치하게 들린다는 사실은 어린아이도 다 안다. 베토벤은 이로서 자기 자신을 패러디하고 있다. 

 

 

각주

1) 메이너드 솔로몬에 의하면, 베토벤은 요한이 결혼을 하지 못하게 방해했다고 한다. 하지만 결국 결혼식은 예정대로 치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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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 교향곡 7번 A장조 Op.92

영어 : Symphony No.7 in A major, Op.92

 

작곡 시기 : 1811년 가을 착수, 1812년 5월 13일 완성

작곡 장소 : 빈

초연 : 비공개 초연은 1813년 4월 20일에 루돌프 대공의 사택에서 이루어짐. 공개 초연은 1813년 12월 8일 빈 대학 강당에서 열린 전쟁 부상병을 위한 자선 연주회에서 베토벤 자신의 지휘로 이루어짐.

출판 : 1816년

헌정자 : 모리츠 폰 프리스 백작

악기 편성 : 플루트 2, 오보에 2, 클라리넷 2, 파곳 2, 호른 2, 트럼펫 2, 팀파니, 현악 5부

 

개설

이 곡의 단편적인 스케치는 1806년경의 노트에서 발견할 수 있다. 바로 현악4중주곡 《라주모프스키》나 《교향곡 제4번》과 같은 시기이다. 그러나 베토벤이 그 주제의 단편을 과연 교향곡에 사용하려 했는지는 알 수 없다. 어쨌든 본격적으로 작곡하기 시작한 것은 1811년 가을부터이며 이듬해 5월 13일 완성했다. 현재 베를린의 므로시아 국립 도서관에 있는 자필 악보의 표지에 <7 Symphonie 1812 … 13 ten>이라고 적혀있는데, 몇 월인지는 파손 때문에 알 수 없지만 5월 13일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어쨌든 교향곡 7번은 《교향곡 제6번》과 3년의 시간적 거리가 있다.

이 3년 사이에 베토벤은 여러 가지로 어려움을 겪게 된다. 먼저 가장 커다란 타격은 전쟁에 의한 난리였다. 1809년 4월 9일 오스트리아와 프랑스는 전쟁 상태에 들어가며 5월 12일 나폴레옹 군대가 빈을 침입한다. 이 때문에 베토벤의 후원자들은 빈에서 도피하며, 베토벤은 재정적인 후원도 받지 못한 채 정신적으로도 안정되지 못한 상태에서 창작도 생각만큼 순조롭게 이루어지지 못했다. 앓고 있던 귀를 포성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지하실에서 귀에 배게를 대고 있었던 적도 있었다. 1809년 10월에 전쟁이 끝나고, 11월에 프랑스군은 퇴각한다. 이 기간 동안 베토벤은 여러 가지 좋지 않은 일을 겪게 된다. 게다가 건강 상태도 좋지 않았다. 귀족들이 빈으로 돌아온 것은 이듬해 1월이었다. 얼마 후 이 시기의 심경을 반영한 피아노 소나타 《고별》이 작곡되었다.

이 피아노 소나타 작곡을 계기로, 아울러 전쟁이 끝나면서 베토벤의 창작력은 서서히 회복되면서 이전의 공백 기간을 메워나갔다. 그리고 기분도 차분해지고 건강 상태도 얼마간 좋아지며, 다시 연금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1)

1809년 무렵부터 베토벤은 테레제 마르파티라는 대지주의 딸과 알게 된다. 작곡가는 《고별》 직전에 쓴 Op.78의 소나타를 헌정한 브룬스비크 백작의 딸 테레제와는 다른 이 테레제에 대해 특별한 감정을 품게 되었다. 베토벤으로서는 테레제와의 결혼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 시기의 현악4중주곡 E♭장조 Op.74 《하프》에 나타나는 밝은 악상은 테레제라는 여인의 존재와 무관하지 않다. 1810년 4월에는 테레제를 위해 썼다는 소품 《엘리제를 위하여》를 작곡하며, 5월에는 테레제를 위한 Op.83의 두 가곡, 즉 첫 곡 <슬픔과 기쁨>과 둘째 곡 <그리움>이 작곡된다. 그 외에 군악대용 음악을 쓴 것을 보면 베토벤은 한편으로는 사회정서를 반영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테레제에 대한 기분을 어떻게든 음악으로 나타내고 싶어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6월의 《에그몬트》를 위한 음악은 이런 두 가지 측면을 연결하는 음악으로도 볼 수 있다. 그러나 18세의 테레제는 40세를 맞은 베토벤의 연정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으며, 거의 일방적인 테레제에 대한 베토벤의 사랑은 결국 1810년 여름을 지나면서 없었던 것이나 다름없게 되어버린다. 그 해 여름에 작곡한 현악4중주곡 Op.95 《세리오소》의 내면적이고 극적인 성격은 어쩌면 베토벤 내면의 반영일지도 모른다. 

1811년에 나폴레옹은 절정을 과시하고 있었으나 베토벤은 테레제 폰 브룬스비크로부터 그녀의 상반신 초상화를 선물받고 실연의 아픈 마음을 달래고 있었다. 베토벤은 그것을 보물처럼 여겨 방에 걸어놓고 평생 소중하게 여겼다. 이 해에는 건강도 좋지 않아 테레제와 그의 남동생이자 베토벤과도 친했던 프란츠와 함께 이탈리아를 여행할 예정이었다.

1811년 여름, 베토벤은 휴양을 위해 경치가 좋은 온천지 테플리츠에 간다. 그 곳에서 아말리에 제바르트라는 가수와 재회하여 친절한 대접을 받게 된다. 이 때문인지는 몰라도 이곳이 마음에 들어 이듬해에도 다시 방문하여 제바르트의 신세를 지게 된다.

실연 후 조금은 투쟁적으로 변모해 있던 베토벤의 기분은 테플리츠에서의 생활로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이런 즐겁고 밝은 기분이 작품에 반영되고 있다고 추측할 수 있다. 그는 이전의 스케치를 다시 끄집어내어 작곡을 시작한다. 《교향곡 제7번》도 예외는 아니었다. 실제로 1811~1812년에는 거의 밝은 장조 곡 위주의 작곡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이렇게 나온 곡은 또한 당연히 낭만적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교향곡 제7번》은 디오니소스적인 즐거움을 지니고 있다. 동시에 이 곡에는 강한 의지나 음악에 의한 주장의 관철이라는 요소도 존재한다.

실제로 베토벤은 이 교향곡의 4악장을 가리켜 "나는 인류를 위해 좋은 술을 빚는 바쿠스(디오니소스)이며, 그렇게 빚어진 술로 세상의 풍파에 시달린 사람들을 취하게 하고 싶다."고 했다. 이 교향곡의 특성을 설명하는 말로 이보다 나은 것은 없다. 베토벤은 이 교향곡을 통해 리듬의 모든 것을 남김없이 드러낸다. 리듬이 단순한 음악의 요소로 참여하지 않고, 교묘한 전개와 화려한 관현악법에 의해 몇 배나 위력이 증폭된다. 느린 악장은 하나도 없으며, 모든 악장이 리드미컬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큰 규모에 어울리는 광란의 축제는 특히 1악장과 4악장에서 빛을 발하는 데, 이 때문에 리스트는 '리듬의 화신', 바그너는 '무도의 성화'라는 말을 이 교향곡에 붙였다. 광란에 가까운 축전적 성향은 때로 로맹 롤랑이 지적한 '낭비의 즐거움'으로까지 이어지는데, 지나치게 즐거움을 강조한 몇몇 연주들에서 이 측면을 엿볼 수 있다. 다만 이 교향곡은 조성적인 측면에서는 이전의 교향곡들보다 보수적이며(교향곡 6번의 1악장 발전부가 일반적인 전조에서 얼마나 멀어지는지 생각해 보자), 네 개의 악장은 각기 원조를 확고한 구심점으로 삼고 있다. 1813년 12월 전쟁 교향곡 <웰링턴의 승리> Op.91와 함께 초연했을 때 환영받았으며, 특히 2악장은 앵콜 요청이 있었을 정도로 사랑받았다. 애국적인 연주회 레퍼토리와는 별개로, 2악장이 큰 환영을 받았다는 사실이 재미있다. 

 

1악장 (1.Poco sostenuto 4/4 - Vivace 6/8) (A major)

서주가 있는 소나타 형식. 단순한 주제에 강세와 다이내믹을 주어 생명력을 획득한 Poco sostenuto의 서주(1마디-62마디). 서주 주제는 본질적으로 주요부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f로 장려하게 시작하고, pp에 의한 음계의 상승이 있은 후 ff로 폭발한다. 첫 번째 폭발이 끝나고 오보에와 클라리넷, 바순의 삽입구가 찾아와 관현악 전체를 안정시킨다. 그리고 다시 ff로 폭발. 50마디가 지나면서 이 폭발마저 잦아들면 서주 전체가 잦아들고 주요부로 넘어갈 채비를 한다. 53마디부터는 단일음인 E음의 지속음 위에서 주요부 도입부를 불러들인다. 여기서부터 음형은 반으로 축소되고 또 다시 축소된다.

주요부인 비바체는 우선 플루트를 비롯한 목관이 악장의 기본 6박자 리듬을 제시하고, 이어 1주제를 제시한다. 1주제는 89마디에 이르러 폭발한다. 여기서 악기들은 대체로 리듬을 간직하는 부분, 16분음표의 경과구, 화성을 공급하는 목관악기로 나누어져 각자의 역할을 담당한다. 112마디부터는 짧은 경과구가 이루어져 있으며 119마디부터 시작하는 2주제는 1주제와 대비를 이룬다기보다는 오히려 종속적인 역을 맡고 있는 것처럼 들린다. 이는 130마디부터 시작하는 경과적 버금 주제와 143마디부터 시작하는 1주제 파생 경과구에 의해 점차 소종결구로 이어진다. 152마디부터 시작하는 소종결구는 딸림조 위에 1주제가 나타나고, 현악기가 E장조의 장음계를 ff로 상행하면서 제시부를 마친다.

발전부는 제시부의 소종결구와 같이 음형이 "E"에서 "G"까지의 반음계 사이에서 움직이는데, C장조로 조바꿈한 뒤 2마디씩 카논 형식을 취하고 있다(185마디). 이후 조성들 사이를 두루 거친 후 254마디에서 트럼펫이 주도하는 엄청난 클라이맥스가 있다. poco a poco cresc.와 ff로 장려하게 절정을 이루면서 발전부는 끝난다. 참고로 발전부에서 100마디가 넘게 리듬이 원형의 지배를 받는 교향곡은 이 곡이 유일하다.

재현부는 275마디의 현악기군 암시에 의해 278마디부터 1바이올린으로 재현하는데, 299~300마디의 늘임 부분에 의해 다시 1주제를 경쾌하게 재현한다. 331마디부터는 2주제의 재현으로 이는 제시부와 동일하다. 다만 소나타 형식의 전통에 의하여 A장조로 되돌고 있다. 코다는 391마디부터로 393마디부터는 1, 2바이올린이 번갈아서 연주하는 바소 오스티나토로 최후의 종점으로 곡을 이끌고 있다. 이후 401마디부터 현악기의 낮은 음과 바이올린의 표정 풍부한 가락이 크레셴도 되면서 ff의 투티를 이루고 끝을 맺는다. 이 악장에서 쓰인 코다 바소 오스티나토는 같은 교향곡의 피날레 악장과 9번 교향곡의 1악장에서 다시 쓰인다. 악장의 대부분을 동일한 리듬이 지배한다는 점에서, 이 악장을 리듬이 주도하는 교향곡으로 보는 것도 무리 없이 받아들일 수 있다.

 

2악장 (2.Allegretto 2/3) (A minor)

3부 형식. 교향곡 7번에는 느린 악장이 하나도 없다. 알레그레토 악장이 사실상 느린 악장 역할을 맡고 있는데, 엄밀히 말하자면 알레그레토는 '느린' 템포가 아니다. 그렇다면 알레그레토 지시는 과연 타당한 것일까? 대부분의 지휘자들은 지시에 상관하지 않고 연주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 작곡가의 뜻을 왜곡하는 것이 아니냐고 물을지 모르지만, 베토벤의 메트로놈 템포 지시에 관한 설득력 있는 일화가 하나 있다. 베토벤은 작곡을 하던 중 악보를 잃어버려 기억에 의존해 악보를 다시 작성했는데, 후일 잃어버렸던 악보를 되찾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두 악보의 메트로놈 템포가 일치하는 부분이 하나도 없는 것이 아닌가. 잠시 이 상황을 황당해 하던 베토벤은 곧 "제 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런 악보 따위는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다"고 독설을 내뱉었다 한다.

알레그레토 악장은 다른 악장에 비해 비교적 일찍 작곡했다. 연구자들은 <라주모프스키> 4중주와 비슷한 시기에 이 악장을 만들었을 것이라 추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교향곡 7번은 처음부터 일관된 계획 하에 만들어진 교향곡이 아닌 셈이다.

니체는 아폴론의 정연한 꿈이 디오니소스의 흐릿한 현실과 만나는 순간 비극이 태어났다는 말을 남겼다. 베토벤의 교향곡 중 유달리 디오니소스적 경향이 두드러지는 교향곡이 이 곡이지만, 그 밑바닥에는 아폴론적인 경향이 여전히 굳게 버티고 있다. 중간 악장은 다른 악장들과 확연한 대조를 이루고 있지만, 디오니소스적 경향이 두드러지는 가운데 아폴론적 경향이 스며드는 것은 여전하다. 다만 그 경향이 희극에서 비극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니체가 정의한 '비극의 탄생'은 의도한 바는 아니겠지만 이 악장에 아주 잘 들어맞는다.

현악기 위주로 연주하는 1주제는 대위선율을 수반해 리드미컬하지만 독특한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 이와 달리 A장조의 2주제는 (2/4박자) 목관악기가 주가 된다. 클라리넷이 온기를 불러오고, 패시지의 음역이 높아지는 순간 고음역 전문 목관악기인 플루트가 패시지를 이어나간다. 3부에서는 1부의 변주와 함께 푸가토도 두고 있다. 1주제로 마치는데, 마지막 현의 선율을 맨 처음에는 피치카토로 했다가 나중에 아르코(피치카토 상태에서 다시 활로 현을 그어야 할 때 쓰는 지시어)로 바꾸었다. 지휘자마자 아르코를 사용하느냐, 피치카토를 사용하느냐가 갈린다.  

 

3악장 (3.Presto 3/4 - Assai meno presto) (F major / D major)

스케츠로 악장인 3악장은 특이하게 F장조로 시작한다. 스케츠로 동기의 전반부는 앞꾸밈음이 붙어있고, 후반부는 4분음표 스타카토로 이루어져 있다. 트리오로 D장조를 채택해 굉장히 이례적인데, 엄격한 건축물의 위엄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치장해 놓은 꽃 장식을 연상케 한다. 밝고 따스하며 민요적인 분위기가 느껴진다고 하는데, 사실 트리오 선율은 오스트리아 지방의 순례의 노래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 스케츠로와 트리오가 번갈아 두 번씩 등장하는 것은 교향곡 4번과 같다. 전체적으로 강약의 대비나 휴지, 스타카토를 교묘하게 사용하고 있다.

 

4악장 (4.Allegro con brio 2/4) (A major)

fff의 폭발적인 코다를 자랑하는 마지막 악장. 1주제를 제시하기 전에 주요 리듬을 제시한 후 휴지를 가진다. 날뛰는 악장임을 감안해 호흡을 고르라는 작곡가의 배려인지도 모르겠다. A장조의 1주제는 빠르고 능동적인데, 러시아 민요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베토벤은 《라주모프스키》 현악 4중주를 작곡하기 이전에 러시아 민요집을 갖고 있었으니, 아마 그 민요집에 있던 곡을 사용한 것이리라. 2주제도 약동적이고 유머러스하다. 발전부는 주로 1주제의 전개로 이루어지고, 재현부는 B♭장조로 1주제를 재현하고 곧 F장조로 바뀌어 2주제를 첼로로 재현한다. 이어지는 코다는 바소 오스티나토, 동기의 종합 등에 의한 각종 효과들로 엄청나게 장대해지는데, 모아진 힘이 두 번의 fff로 폭발하고 ff로 마친다.

 

 

각주

1) 빈의 귀족들은 1809년 베토벤에게 종신 연금을 주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그 직후 전쟁이 일어나 베토벤은 제대로 연금을 받지 못했다. 연금을 제대로 다시 지급받기 시작한 것은 1811년이 되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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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토벤의 교향곡만큼 유명한 서양 고전음악 레퍼토리는 많지 않다. 작곡된 지 200년이 지났는데도 아직도 어디선가 아홉 곡을 모두 연주하고 있다. 이런 행운을 누릴 수 있는 작곡가가 생각보다 많지 않다는 것을 생각하면(당장 18~19세기만 생각해 보아도, 잊혀진 이후 지금까지도 연주조차 되지 않는 작곡가가 얼마나 많은가?), 정말 베토벤은 자신이 잃은 것 만큼 후세 사람들로부터 충분한 보상을 받은 작곡가라 할 수 있다.

 곡이 유명한 만큼, 그 곡에 바쳐진 글도 셀 수 없이 많다. 그 중의 두 편의 글을 추려보았다. 한 편은 베토벤보다 한 세대 뒤의 사람인 프랑스 작곡가 베를리오즈의 글, 또 한 편은 베토벤이 살던 지역과 반대편에 살고 있는 20세기 후반 한국 시인의 시다. 두 편은 제각기 다른 품격을 갖추고 있으며, 둘 다 위대한 음악에 어울리는 훌륭한 글이라 할 수 있다.

 

(1) 베토벤에 대한 베를리오즈의 빠심을 느낄 수 있는 글 베토벤 교향곡 6번 4악장에 대한 베를리오즈의 글

 

 "나는 이 놀라운 곡에 대한 개념을 전하려고 하는 것을 포기하였다. 당신은 이 곡을 들어보아야만 베토벤 같은 사람의 손에 의해 이룩될 수 있는 음악적인 회화의 진실성과 숭고성의 높이를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들어보라, 비와 함께 몰아치는 바람소리, 베이스의 귀가 먹을 것 같은 으르렁거림, 곧 닥쳐올 무서운 폭풍을 알리는 피콜로의 높은 휘파람소리를 들어보라. 폭풍은 다가와서, 퍼져간다. 거대한 반음계적 낙뢰가 제일 고음의 악기로부터 시작하여 오케스트라의 가장 바닥까지 샅샅이 훑어내리며, 베이스를 낚아채어 그것을 끌고 다시 올라가 앞을 가로막는 모든 것을 뒤집어버리는 회오리바람처럼 몸서리치고 있다. 그러자 트롬본이 튀어나오며, 팀파니의 뇌성은 두 배로 격렬해진다. 이제는 더 이상 비바람이 아니다. 이는 무시무시한 지각변동이며, 대홍수이며, 세상의 종말이다…

 얼굴을 가리우라, 불쌍한 고대의 대시인이여, 불쌍한 불멸의 사람들이여. 당신들의 너무도 순수하고, 너무도 조화로운 관습적인 언어는 소리의 예술과 경쟁이 되지 않는다. 당신들은 명예롭게 패배하기는 했지만, 정복당했다. 당신들은 오늘날 우리가 선율, 화성, 여러 음색의 결합, 악기의 음색, 전조, 처음에는 서로 싸우고 그 뒤에는 포옹하는 흉내낼 수 없는 음향의 계획된 갈등, 우리의 귀에 울리는 놀라움, 우리의 기묘한 악센트가 영혼의 가장 감추어져 있는 깊은 곳까지도 공명하게 하는 것들에 대해 몰랐었기 때문이다."

(베를리오즈, 「A travers chants」(Paris, 1898), pp. 42-43. C. 팰리스카 영역. 그라우트 『서양음악사』4판 수록)

 

(2) 김기택의 시 <전원 교향곡>

 

 베토벤은 제자 리스와 함께 숲길을 산책하고 있었다. 그때 베토벤은 거의 청각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래도 베토벤은 숲 속의 모든 소리에 즐겁게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새소리, 시냇물 소리, 바람 소리…… 베토벤에게 오는 모든 소리는 더 이상 그의 귀에 살지 않고 이젠 아주 가는 떨림만 남아 그의 몸 곳곳으로 스며들어 가고 있었다. 귀 기울일 때마다 실핏줄과 심장과 살가죽과 뼈마디들은 모두 청각이 되어 일제히 떨며 열렸다. 그 떨림 속에서 꽃이 피고 새가 우는 정원이, 비가 내리고 천둥이 치는 들판이 자라고 있었다. 스스로의 힘으로 숲속 가득 울리는 소리를, 나뭇잎 흔들림에서 시냇물 흐름에서 고요하게 일어나는 모든 소리를 온몸이 떨며 열어줄 때마다, 그는 귀가 먹었다는 사실을 잊었다. 오래오래 소리에 귀 기울이고 있다가, 소리가 깊어지면 귀찮은 귀를 버리고, 귀에 달라붙은 말과 소음을 버리고, 귀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소리 속으로 한 없이 들어갔다. 산책 도중에 어디선가 한가로운 목동의 피리 소리가 들려왔다. 리스가 탄성을 질렀다. 아! 너무…… 너무나, 아름다워요. 선생님, 들리시죠? 베토벤은, 그때, 가슴을 후려치며 불어닥친 폭풍우에 휘말려 온몸으로 그 거대한 힘을 견디어내느라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었다. 베토벤이 피리 소리를 듣지 못하자 리스는 스승이 완전히 청각을 잃었다는 걸 알았다. 리스가 슬픈 표정으로 스승과 같이 집에 돌아왔을 때 베토벤은 오히려 밝고 활기차게 말했다. 리스야, 이제부터 새로운 음악을 들려주마. 곧이어 베토벤이 건반을 누르자, 귀보다 행복한 곳에서 사는 소리들이, 핏줄을 지나 손가락과 건반을 지나, 일시에 방안 가득 솟구쳐나왔다.

(김기택, 시집 『바늘구멍 속의 폭풍』, 1994, 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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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향곡 6번 F장조 <전원> Op.68

영어 : Symphony No.6 in F major, Op.68 "Pastorale"

 

작곡 시기 : 1808년 여름 완성

작곡 장소 : 하일리겐슈타트와 빈

초연 연도와 장소 : 1808년 12월 22일, 빈의 안 데어 극장에서 베토벤 자신의 지휘로 이루어짐. 이 연주회에서는 교향곡 5번과 6번 뿐 아니라 피아노 협주곡 4번의 초연도 같이 치러짐.

출판 : 1809년

헌정자 : 로프코비츠 후작과 라주모프스키 백작

악기 편성 : 피콜로(4악장), 플루트 2, 오보에 2, 클라리넷 2, 파곳 2, 호른 2, 트럼펫 2(4악장, 5악장), 트롬본 2(4악장, 5악장), 팀파니(4악장), 현악 5부

 

개설

우선 곡의 부제인 Pastorale에 대한 설명부터 시작하겠다. Pastorale은 전원적인 분위기를 극적이며 문학적인 연극과 시와 같은 작품에서 사용하며 음악적인 표현은 기악 또는 성악 작품에서 표현한 양식이라 할 수 있다. 이 음악은 이탈리아 시칠리아 지방 양치기들의 피리 소리를 모방한 곡으로, 6/8, 9/8, 또는 12/8박자로 자장가 분위기를 지니며, 유유히 흐르는 멜로디와 길게 지속하는 드로운 베이스(drone bass) 음이 특징이다. Pastorale은 명사형으로 쓰이는 것으로 전원곡, 목가곡, 그리고 전원극을 지칭할 때 사용하며, Pastoral은 형용사로 쓰이는 것으로 목가적인 분위기의 장면이나 시를 표현할 때 사용한다.

이 곡의 주제 몇 개는 1806년의 스케치 노트에 적혀 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이 곡을 스케치하기 시작한 것은 1807 7월 전후로 보인다. 그리고 1808년 6월 경 그가 마음에 들어하던 하일리겐슈타트에서 전체를 완성했다. 공교롭게도 이 곳은 그가 6년 전인 1802년에 요양 왔을 때 유서를 작성했던 장소였다. 

초연 때는 각 악장의 표제들이 오늘날의 그것들과 본질적으로 큰 차이는 없었으나, 다만 곡 자체에 《전원생활의 회상》이라는 제목이 붙여져 있었다. 그리고 사본과 초판 악보에는 단순히 《전원 교향곡》(신포니아 파스토랄레. Sinfonia Pastorale)이라고 적혀 나왔다.

여기서 우리는, 베토벤이 왜 자연을 대상으로 《교향곡 제6번》을 썼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는 같은 시기에 날카롭게 대비되는 대조적인 성격의 작품을 자주 썼다. 즉 자신의 내면을 불태웠던 격렬한 《교향곡 제5번》을 작곡하고 나서 바깥으로 눈을 돌려 밝은 《교향곡 제6번》을 썼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견해는 비교론적으로 흥미를 끌 수 있겠으나, 곡의 특성을 전혀 설명하지 못한다. 또 다른 이유는 이 곡을 작곡하던 전후에 자연의 즐거움을 묘사한 음악이 유행하고 있었으며, 베토벤도 거기에 다소 영향을 받은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J. H. 크네히트(1752~1817)의 5악장 구성의 《자연의 음악 묘사》나 프라이슈테틀러(1768~1841), 클레멘티(1752~1832)의 작품이 베토벤에게 영향을 주었음이 분명하다.

아울러 개인적인 사랑과 자연에 대한 애착도 빼놓을 수 없다. 요제피네에 대한 열정은 이 작품을 쓸 무렵에는 식어 있었다. 이 사랑의 종말로부터 전원으로 도피하려 했던 것이 《전원 교향곡》을 낳게 했을지도 모른다. 아울러 바깥 세계로 눈을 돌리려 했을 때 《교향곡 3번》을 쓸 때처럼 나폴레옹 같은 인물도 없었으며, 유쾌하지 못한 빈의 정치적, 사회적 상황은 실망만을 안겨줄 뿐이었다. 베토벤은 이런 모습보다는 차라리 자신이 좋아하던 조용한 자연을 대상으로 삼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실제로 베토벤은 이 전후에 자연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가곡이나 피아노 소나타도 쓴다.

베토벤은 잘 알려진 대로 "사람은 속일 때가 있지만 자연은 그렇지 않다", 혹은 "숲 안에 있으면 기쁘고 행복하다"는 말을 비롯하여 자연을 사랑하는 말을 많이 남겼다. 테레제 마르파티에게 쓴 편지에서는 "덤불과 숲을 빠져나와 수목과 풀과 바위 사이를 산책할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나처럼 전원을 사랑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라고 썼다. 세속적인 문제에서 벗어나 좋아하는 자연 속으로 침잠해 들어가 위안을 얻었던 것은 당연했다. 더구나 이 곡을 작곡한 곳은 한적안 하일리겐슈타트였다. 종교적이라 해야 할 정도로 강한 자연 예찬이 나타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분명 이 교향곡은 《전원》이라는 제목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각 악장에 붙은 (시골 생활을 예찬하는) 부제에도 불구하고, 베토벤은 이 교향곡이 단순한 자연의 묘사로 그치는 표제음악이나 감상적인 음풍농월이 되어버리는 것을 경계했다. 베토벤은 자신이 직접 말한 것처럼 「묘사라기보다는 감정의 표현」이라는 태도를 취했으며 자연에 대해 자신이 느낀 감정, 경이롭고 신비로우며 근원적인 힘에 대해 자신이 받은 감동을 그대로 드러내고자 했다. 물론 여기서 자연에 대한 회화적인 묘사가 전혀 없었다고는 할 수 없다. 제4악장은 전형적인 묘사적 수법을 사용하여 폭풍우 장면을 효과적으로 구사하고 있으며, 그밖에 다른 악장에서도 시냇물 흐르는 소리나 새의 울음소리들이 들어가 있다. 물론 이들은 필연성을 지니고 효과적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그것 자체가 목적이 되는 일은 거의 없다.

또한 이 곡은 보통 교향곡이 3, 4악장으로 이루어지는 것과는 달리 5악장으로 이루어진다(다만 4악장을 5악장으로 들어가는 간주적인 역할에 억지로 끼워 넣으면 전통적인 4악장제에 아예 들어맞지 않는 것은 아니다). 더구나 제3악장부터 제5악장까지는 악장 간 단절 없이 계속 연주하도록 되어 있으며, 제4악장부터는 연속해서 일어난 일을 표제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이처럼 표제에 맞춰 연주하게끔 한 것이다. 악장 사이를 쉼 없이 연주하도록 연주하는 것은 음악을 중단하는 느낌을 주지 않으면서 흐름을 자연스럽고 원활하게 하는 것이어서 후대의 슈만(특히 교향곡 4번), 멘델스존, 리스트를 비롯한 낭만파 작곡가의 교향곡 처리 방법에 강한 영향을 주었다. 또한 이 교향곡 자체도 낭만파의 표제 교향곡이나 교향시의 발달에 커다란 도화선이 되었다.

베토벤이 《교향곡 제5번》의 반대항으로 이 교향곡을 작곡했다고 보기는 힘들지만, 작곡가가 짝을 지어 출판한 것은 두 교향곡의 특성을 비교해 보라는 의도를 분명 내포하고 있다. 《교향곡 제5번》이 강렬하고 단단하다면 《교향곡 제6번》은 유연하고 온화하다. 《교향곡 제5번》이 분석적이고 체계적이라면 《교향곡 제6번》은 생동감 있고 환희에 가득 차 있다. 이로정연한 《교향곡 제5번》의 관점으로 보면 《교향곡 제6번》은 낭만주의적이다. 피날레 악장을 대표하는 악기가 《교향곡 제5번》은 승리를 상징하는 트럼펫인데 반해, 《교향곡 제6번》은 목가적인 악기로 흔히 거론하는 호른이다.   

아울러 베토벤의 남겨진 스케치에 따르면, 처음에는 제5악장에서 성악을 사용하려 한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만약 그것이 실현되었더라면 《교향곡 제9번》에 앞서 성악을 사용한 교향곡이 나왔을 것이다. 그리고 베토벤이 곡에 부제를 붙인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지만, 각 악장의 성격을 구분 짓는 부제를 기입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며, 그런 특성이 이 곡을 제외하면 <고별> 소나타밖에 없다는 점도 매우 흥미롭다.

 

1악장 <시골에 도착했을 때 일어나는 유쾌한 기분> 

(1.<Erwachen heiterer Empfindungen bei der Aukunft dem Lande> Allegro ma non troppo 4/4) (F major)

소나타 형식. 밝고 명랑하며 한가로운 악장이다. 베토벤 교향곡에서는 첫 악장에서 효과를 내기 위해 알레그로 콘 브리오(Allegro con brio)라는 빠르기말을 많이 사용했지만, 알레그로 마 논 트로포(Allegro ma non troppo)라는 지시어는 이 곡이 처음이다. 이 지시만으로도 이 악장에서는 힘이 들어가 있지 않은 느긋함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긴장을 확 주는 것이 아니라, 느긋하게 긴장을 푸는 것이다. 1바이올린이 민요적이면서도 매우 전원적인 1주제를 제시하면서 시작한다. 이 주제는 오스트리아의 전원지대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이지만 슬로베니아나 모라비아의 농촌에서도 전해지고 있다. 이 주제만으로도 「시골에 도착했을 때의 즐거운 감정」이라는 표제가 타당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시작 부분에서는 F음의 페달 포인트가 있으며, 16마디 이후부터는 C음의 페달 포인트가 지속적으로 반복된다. 주제 마지막 음(G)에서 페르마타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것은 당시 베토벤이 즐기던 수법으로, 《교향곡 제5번》 4음 모티브 마지막에서도 찾을 수 있다. 46마디에서는 플루트가 고음의 아포지아투라로 새로리를 모방한다. 제2주제는 C장조로, 그다지 두드러지지는 않지만 역시 즐거운 분위기로 먼저 현이 연주하고 목관이 그것을 받는다. 8분음표의 단순한 리듬이지만 물처럼 흐르는 펼침화음(Broken chord)의 형태를 취하며 하강 음형에서 한번 상승시켜 다시 하강하는 형태를 취하는데 아주 부드럽다. 대위선율이 같이 진행하며, 다소 리듬적인 특성이 두드러지는 1주제와는 달리 민요풍의 멜로디를 좀 더 강조하는 것이 특징이다.

발전부는 주로 1주제를 다루고 있다. 베토벤의 일반적인 발전부처럼 극적인 성격이나 강렬한 기복은 없으나 온화하며 다양하게 색채를 바꾸어 한가로움과 아름다움을 자아낸다. 특히 발전부에서 같은 동기를 72번이나 반복하는 부분은 고전음악에 익숙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지겨운 부분일 테지만, 교묘하게 악기의 조합을 바꾸며 반복하는 과정에서 점진적으로 변하는 화성 색채의 참맛을 느낄 수 있다. 어떤 이는 이를 두고 '고전주의 음악 속의 낭만적 환상곡'이라 부르기도 한다. 실제로 발전부의 조성은 B♭장조에서 3도 관계인 D장조로 옮겨간 후, 잠시 쉰 후 G장조로 옮겨갔다가 E장조로 바뀌며 고전적인 전조에서 점차 멀어져간다. 1주제가 다시 완전한 모습을 드러내면 곡은 재현부로 들어간다. 곧이어 2주제도 다시 모습을 드러낸다. 이어지는 코다는 전원의 느낌을 더욱 강하게 나타내며, 1주제를 반복적으로 제시하며 피어올랐던 감정들을 정리하듯 조용하고 따스하게 마무리한다. 468마디에서 B♭음과 B음의 대조를 보이는 새로운 반복이 나타난다. 483마디부터 491마디까지의 9마디는 목적 지향적 화음으로 예기치 않는 종지와 음악적 흐름을 유도하며, 클라리넷과 바순은 반복된 종지를 갖는 목가적인 음악을 연주한다. 이 주제는 앞의 레가토 부분에서 가져온 것이지만 확대된 목관악기의 사용법과 단순한 종지는 3악장을 예고한다.

 

2악장 <시냇가의 정경> (2.<Szene am Bach> Andante molto mosso 12/8) (B♭ major)

소나타 형식. 「시냇가의 정경」이라는 표제와 완전히 일치하며, 박자도 길고 유연하다. 시냇물이 조용히 흘러가는 것을 암시하는 미세한 움직임이 첼로를 비롯한 저음 현악기에서 거의 일관되게 주어진다. 1바이올린이 제시하는 사랑스러운 1주제를 반주하는 저음현은 8분음표의 펼침화음과 16분음표의 펼침화음 두 가지가 있다. 이런 지속적인 반주 위에서 전개되는 선율은 18세기 기악곡과 성악곡 느린 악장에서 흔하게 쓰였고, 기원은 17세기까지 거슬러 오른다. 전통적으로도 유유히 흐르는 시냇물의 정경을 표현하는 데 있어 가장 적합한 음악적 형태라는 공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악장에서는 플루트의 고음으로 표현되던 새소리가 2악장에서는 바이올린의 트릴로 나타나는 것도 특징이다. 33마디부터 등장하는 2주제는 훨씬 밝게 바이올린으로 연주된다. 바순의 솔로가 넘치는 기쁨을 솔직하게 표현한다. 흐르는 듯 평화로운 발전부 후에 91마디부터 재현부가 시작되는데, 플루트가 1주제를 재현한다. 저현은 제시부와 같이 시냇물의 반주를 맡으며, 바순, 클라리넷, 바이올린의 아르페지오가 추가되어 있다. 재현부가 끝나면 곡은 짤막한 코다로 들어가며 새소리를 모방한 악구가 등장한다. 물론 20세기 음악의 구체적인 새소리가 아닌 '듣기 좋은' 새소리다. 나이팅게일(꾀꼬리) 역할을 맡은 플루트가 F음과 G음을 불다가 F음의 트릴을 연주하고, 메추리 역할을 맡은 오보에는 D음의 부점 리듬을, 뻐꾸기 역할을 맡은 클라리넷은 D음과 B♭음을 연주한다. 새소리 묘사 이후 베토벤은 갑작스레 짧은 침묵을 내놓는데, 침묵은 황홀하면서도 경이로운 순간을 절묘하게 표현한다. 새소리가 주화음에서 다시 등장하면서 막을 내린다.

 

3악장 <시골 사람들의 단란함>

(3.<Lustiges Zusammensein der Landleute> Scherzo. Allegro 3/4 - Trio 2/4) (F major)

스케르초와 트리오. 3악장부터 5악장까지는 아타카로 쉬지 않고 연주한다. 「시골 사람들의 단란함」은 스케르초에 해당하는 악당이지만, 농민들이 즐겁게 추는 음악을 연상시킨다. 연주하는 사이 술에 취해 잠든 악사도 있으며, 소박한 악기를 갖고 서투르게 연주하는 악사도 있다. 바순은 지속적으로 도(F)와 솔(C) 음을 연주한다. 트리오(a Tempo Allegro. ♩=132)는 실제 농민들의 춤곡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이며 믹소도리안 조가 두드러진다. 역시 농부의 서투른 춤을 연상케 하기 위해 바순과 더블베이스가 기민하게 움직이는데, 바순은 무려 13마디 동안 C 옥타브만을 연주한다. 트리오의 반복이 끝나면 스케르초 1부의 코데타를 확대한 코다를 통해 4악장으로 들어간다.

 

4악장 <천둥. 폭풍우> (4.<Gewitter. Sturm> Allegro 4/4) (F minor)

특별한 형식이 정해지지 않은 (굳이 규정짓자면 자유로운 2부 형식에 가깝다) 간주곡. 전통적인 4악장 제에 간주곡이라 할 폭풍우 악장을 추가한다는 생각은 어디에서 비롯한 것일까? 폭풍우 악장은 나머지 악장들과 기가 막히게 잘 어울리며, 논리적으로도 매끄럽게 이어진다. 4악장은 3악장과 5악장을 이어주면서, 동시에 충격적인 내용으로 우리의 뇌리에 남는다. 오케스트레이션 측면에서도 전 악장을 통틀어 피콜로와 팀파니는 오직 4악장에서만 등장하며, 트럼펫과 트롬본도 여기서 처음 등장한다. 전 악장의 흥겨운 분위기는 삽시간에 자취를 감추고, 저음 현이 멀리서 들리는 천둥소리를 들려준다. 농민들은 춤을 멈추고 놀라 대피한다. 곧 투티에 의한 폭풍우가 감상자를 강타한다. 단지 음악적인 효과 뿐 아니라, 작곡가의 감정까지 강하게 개입해 정말로 소름끼치는 폭풍우 장면이 몰아친다. 묘사음악에서 이토록 박력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작곡가는 베토벤 이전에는 그리 흔치 않았다. 관현악 측면에서는 피콜로와 트롬본을 아주 효과적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특히 급박함을 알리는 피콜로의 고음이 인상적이다. 마지막에 폭풍우가 걷히고 햇살이 구름 사이로 고개를 내밀면, 플루트의 상승 음계가 클라리넷의 목가를 불러온다.

 

5악장 <목가. 폭풍우 뒤의 즐거운 감사의 마음>

(5. <Hirtengesang. Frohe und dankbare Gefuhle dem Sturm> Allegretto 6/8) (F major)

론도 소나타 형식. 클라리넷이 제시하는 목가 주제는 곧 호른으로 퍼져나간다. 그리고 바이올린이 목가 주제에서 비롯한 1주제를 연주하면 그 주제가 곧 현악기로, 전 관현악으로 퍼져 나간다. 곧 바이올린이 2주제를 연주한다. 이어 1주제가 모습을 드러내며 전개되는데, 새로운 선율도 가세한다. 재현부에 이어지는 코다에서는 1주제를 따스하게 연주한다. 그 사이 1악장 1주제를 연상시키는 악구도 모습을 드러낸다. 마지막 악장다운 화려함이나 강력함은 없으나 그런 만큼 이 전원적인 교향곡을 밝고 평화로운 목가적 분위기로 마무리하는 역할을 맡는다 할 수 있고, 정서적으로 곡을 편안히 마친다는 느낌을 주어 전 악장의 긴장감을 다분히 풀어주는 느낌을 던져준다. 끝부분에서 호른은 약음기를 사용해 멀리서 울리는 느낌을 던지며 편안히 악장을 마무리한다.

그런데 이 악장에서는 트럼펫이 연주할 수 없는 음정을 피하려고 다음과 같은 아주 이상한 성부진행을 한다. 219마디에서 223마디를 보면, 화음이 219-220마디의 F장조 화음에서 221-222마디의 D단조 화음을 경유하여 223마디의 G장조 화음으로 진행한다. C 트럼펫이 D단조 화음에서 넷째 줄의 D음 외의 어떤 음도 연주할 수도, 그리고 중복할 수도 없기 때문에 이러한 일상적 어법에서 벗어난 장9도의 도약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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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케르초의 작곡 과정은 굉장히 흥미롭다. 초연을 치르던 1808년 당시 베토벤이 완성한 스케르초는 총 324마디였다. 우리가 들으면서 감탄하는, 피날레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스케르초 끝 부분이 만들어진 것은 초연 이후 총보를 정리하는 과정에서였다. 이 과정에서 베토벤은 323마디에서 373마디에 걸친 50마디를 새로 추가했다. 장기적으로 볼 때, 작곡가의 통찰은 매우 현명한 것이었다.

스케르초 반복 문제에 대한 논의도 작곡 과정만큼이나 흥미롭다. 베토벤은 처음에 스케르초를 반복하라는 지시사항을 적어두었다(자필 악보에는 스케르초에 도돌이표가 붙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음표 하나하나를 일일이 다 기보하고 있다). 그러다가 초연 이후 베토벤은 반복 지시 사항을 악보에서 삭제했다. 그러나 베토벤은 출판에 들어가기 직전 최종 교정 악보에서 도돌이표 앞의 두 마디를 삭제해야 한다는 사실을 잊어버렸다. 출판사에서 이것을 의아해하자 베토벤은 1809년 3월 28일,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당신이 교향곡 C단조 3악장에서 한 가지 잘못을 발견하신 것 같습니다. 저는 어떤 형식이었는지 기억할 수 없습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당신이 가지고 계신 표본이 되는 총보에 교정한 것을 함께 보내주신다면 며칠 안에 모든 것을 돌려받으실 수 있겠습니다……"

베토벤은 악보를 받아 든 결과, 3악장에서 의문스러운 점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리고 베토벤은 1810년 3월 20일에 보낸 편지를 통해 이 부분에 대해 명백한 답을 주고 있다. 그러나 출판사가 반응을 보이지 않은 것인지, 아니면 베토벤이 이것을 잊어버린 것인지, 인쇄된 파트보에는 의문스러운 점들이 많으며, 반복을 하지 않도록 지정된 악보에도 필요하지 않은 두 마디가 계속 남아있다. 베토벤 자신은 1810년 8월 21일의 편지에서 이에 관해 반응을 보이고 있으며, 1810년 10월 15일 다시 편지를 썼다.

"……교향곡에 관하여 3악장에서 2마디가 필요 이상으로 많이 바뀌어졌다. 내가 기억이 희미하지만, 답장하는 것을 잊은 것 같다. 그래서 우리가 그 2마디에 대해서 고치지 않고 가만히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베토벤과 출판사 사이에서는 이 문제에 대한 어떠한 진전도 없었다. 1826년에 출판된 총보에서도 이 문제점은 다시 나타난다. 1846년, 멘델스존은 이 의문점에 대한 문제제기를 공식적으로 발의했고, 출판사는 이 수정을 1846년 7월 8일의 <Allgemeinen Musikalischen Zeitung>에 공표했다. 그 이후로 이 두 마디는 사라지게 되었으며, 스케르초는 오늘날까지 수정된 형태를 취하고 있다.

베토벤의 이 최종 결정에 의해, 오랜 세월동안 스케르초는 반복하지 않는 것이 관례로 굳어졌다. 그러나 반복에 대한 문제제기는 오랜 시간이 지나 되살아났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았을 때 <영웅> 교향곡의 1악장도 반복 지시를 내렸는데, 그것보다 짧은 스케르초가 '길다'는 이유로 반복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W.리츨러는 그의 저서 <베토벤>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몇 년 후에 베토벤은 이중 반복을 삭제하고 피날레로 이끄는 경과부를 유지시킴으로써 장조 부분이 지난 뒤에 반복되는 첫 부분을 본래의 윤곽 정도만 감지될 수 있도록 했다. 이리하여 악장의 독립성은 크게 약화되었고, 나아가 악장 전체는 다른 스케르초나 미뉴에트 악장들과는 달리 균형을 잃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피아니시모로 끝나는 트리오에서 시작해 끝으로 갈수록 더욱 더 그 중요성을 상실하게 되었다(이 트리오 역시 처음에는 포르테로 확실하게 종결되는 형태를 취했었다)."

알 수 없는 것은 작곡가의 태도다. 베토벤은 반복에 관한 출판사의 질문에도 불구하고 빈의 연주회에서 스케르초를 반복해 연주했다. 이러한 사실을 증명하는, 손으로 사보한 악보들이 빈 악우회에도 소장되어 있다. 베토벤의 친구인 프란츠 올리파(Franz Oliva)와의 1820년 대화 목록에도 이와 관련된 이야기가 나온다. 그는 4월 9일의 연주회에서 반복이 없어졌다고 지적하고 있다.

'나는 당신에게 말 할 것을 잊었습니다. 연주가들이 어제 당신의 교향곡을 줄였답니다. 3악장에서 거의 반이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푸가 형식의 중간 악곡에서 단 한 번, 그리고 바이올린이 피치카토로 이어져 피날레로 넘어가는 부분에 있어서 정말 좋지 않은 영향을 보여 주었어요.' 물론 이것이 스케르초 문제에 관한 일반적인 주장은 아니지만, 문제를 제기하기에는 충분한 주장이다.

베토벤은 악보에서 스케르초 반복을 삭제하고, 이것을 수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까지 고치지 않은 도돌이표 앞의 두 마디, 악보 수정에 관한 일관성 없는 태도, 무엇보다 그 자신이 스케르초를 반복해 연주한 사실 등은 반복에 관한 논쟁을 벌일 여지를 마련해주었다. 많은 학자들은 반복이 없어질 경우 스케르초의 균형이 무너진다는 점과 위의 사실을 들어 반복을 해야 한다는 주장을 폈고, 마침내 반복을 되살린 Peter Gülke의 악보가 나왔다. 오트마르 주이트너는 이 악보를 사용했다. 이와는 별도로, 1960년대에 피에르 불레즈는 '베토벤이 스케르초 반복을 지시했을 것'이라며 스케르초를 반복한 음반을 내놓았다.

그러나 스케르초를 반복하지 말 것을 주장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대표적인 사람이 영국의 음악학자 D. F. 토비인데, 그는 3악장에 도돌이표가 생기면 연주시간이 길어져 곡의 긴장감이 떨어지며, 무엇보다 4악장 발전부 말미에서 3악장 스케르초 주제가 환영처럼 다시 등장하는 부분의 효과가 반감된다는 지적을 남겼다. 문제는 이 사람의 주장을 지지하는 세력도 적지 않다는 것. 사실 위의 리츨러도 반복을 해야 한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다만 3악장의 불균형과 무게중심이 4악장을 향해 쏠리는 점을 지적한 것 뿐이다.

내 생각은 이렇다. 3악장에서 반복 지시를 충실히 지키자는 쪽은 3악장을 하나의 개별적인 악장으로 보고, 3악장이 완전한 형태의 스케르초여야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일 것이다. 반대로 3악장에서 반복 지시를 지키지 않는 지휘자는 3악장이 곡의 결론인 4악장과 유기적으로 연관성을 지닌다고 생각하는 사람과(실제로 음반에서 3악장과 4악장을 묶어 한 트랙으로 넣는 경우도 많지 않은가), 스케르초 반복이 없다고 해서 3악장의 독자성이 훼손되지는 않는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로 이루어진 것 같다. 무엇보다 리츨러가 지적한 ‘피아니시모로 끝나는 트리오’를 생각하면, 베토벤은 트리오 끝의 피아니시모가 3악장의 코다와 자연스럽게 이어져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 아닐까? 물론 내 개인적인 생각이므로 반론의 여지도 적지 않다.

현대의 많은 지휘자들도 스케르초를 반복해야 한다는 사람과 반복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람이 나뉘고 있다. 80년대 이후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는 지휘자들 중 스케르초를 반복하는 지휘자는 주이트너를 포함해 블롬슈테트, 로이 굿맨, 노링턴, 호그우드, 아바도(베를린 필. 아바도는 "반복구를 삭제하는 것은 소나타 형식의 팔다리를 자르는 것이다"라는 말을 한 사람이니 이 노선을 지지하는 것이 어찌 보면 당연하다) 등이 있으며, 반복하지 않는 지휘자 중에는 브루노 바일, 엠마뉘엘 크리빈, 요스 판 임머젤, 프란스 브뤼헨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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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 교향곡 5번

 

영어 : Symphony No.5 in C minor, Op.67

독일어 : Symphonie Nr.5 c-moll, Op.67

프랑스어 : Symphonie no 5 en ut mineur, Op.67

이태리어 : Sinfonia n. 5 in do minore, Op.67

 

작곡 시기 : 1804년 착수, 1808년 완성

작곡 장소 : 빈

초연 연도와 장소 : 1808년 12월 22일, 빈의 안 데어 극장에서 베토벤 자신의 지휘로 이루어짐. 이 연주회에서는 교향곡 5번과 6번 <전원>뿐 아니라 피아노 협주곡 4번의 초연도 이루어짐.

출판 : 1809년 4월

헌정자 : F. J. 로프코비츠 후작과 안드레이 키릴로비치 라주모프스키 백작

악기 편성 : 피콜로(4악장), 플루트 2, 오보에 2, 클라리넷(B♭, C) 2, 파곳 2, 콘트라파곳(4악장), 호른(E♭, C) 2, 트럼펫 2, 트롬본 3(알토, 테너, 베이스 / 4악장), 팀파니(C, G), 현악 5부

 

개설

우리가 흔히 인용하는 베토벤에 대한 가십거리의 대부분은 만년의 그와 많은 시간을 보낸 쉰틀러(Anton Felix Schindler. 1795-1864)가 남긴 기록에서 의거한 것인데, 사실 쉰틀러의 기록은 오류와 거짓말이 너무 많아 인용의 가치를 의심받지만 4음 모티브에 대한 베토벤의 유명한 설명, "운명은 문을 이렇게 두드린다."면서 격한 손짓을 했다는 그 설명만큼은 신빙성을 제쳐놓고 교향곡의 특성을 잘 집어낸 말로 대부분 인정하고 있다. 《교향곡 5번》은 일명 《운명 교향곡》이라고도 하며, 독일의 음악 해설서에서도 'Schicksalsymphonie'(운명 교향곡)라고 부르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음악을 표제음악으로 볼 수는 없다. 그러나 거기에는 베토벤이 중기 이후부터 좋아하던 음악적 방향, 즉 '투쟁으로부터 승리'라는 방향을 설정하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교향곡 3번을 완성한 직후인 1804년부터 작곡에 착수했으나, 1악장과 2악장을 완성한 1805년 즈음 작곡가는 요제피네 폰 다임 백작 미망인과 사랑에 빠졌다. 열렬한 사랑은 그의 관심사를 좀 더 부드러운 곡들(교향곡 4번 Op.60과 바이올린 협주곡 Op.61)로 돌려놓았다. - 일각에서는 베토벤과 사랑에 빠진 상대가 요제피네의 언니 테레제라고 하지만, 테레제는 편지에서 베토벤과 요제피네의 관계를 적고 있다. - 연애는 1805년과 1806년 내내 이어졌다. 1806년 말부터 요제피네와의 관계가 하강 곡선을 그리자, 베토벤은 강렬한 표현을 요구하는 곡으로 다시 발걸음을 옮긴다. 1806년 가을에 32개의 C단조 변주곡이 우선 완성되고, 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에 기초한 극음악 <코리올란>의 작곡이 1807년 초에 마무리된다. 교향곡이 완성된 것은 작곡을 재개한 지 1년여가 지난 1807년 말에서 1808년 초에 이르러서였다.

1805년부터 1808년은 베토벤 창작 중기 가운데 가장 중요한 시기이자 여러 개의 걸작이 나온 시기이다. 또한 그 무렵은 귓병이 악화하여 다른 사람들과 대화하는 것이 부자유스러워진다. 그러나 작곡가로서의 명성은 확고해지며 경제적으로도 안정을 이루게 되고 창작력도 더욱 강렬해지고 있었다. 그때 베토벤은 《교향곡 3번》의 방향으로 더욱 밀고나가 본래의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는 격렬한 긴장감을 지닌 작품을 쓰게 되며, 이 《교향곡 5번》을 계속 써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교향곡 5번은 아홉 곡의 교향곡 중 가장 건축적이고 긴축성이 높다는 평가를 받는다. 곡은 유례없는 긴장을 보여주며 조금의 틈도 허용치 않는다. 빈의 공원에서 들은 새소리에서 영감을 얻었다는 「운명의 동기」는 모든 악장에서 모습을 바꾸어 나타나며 전체를 통일한다. 이처럼 응축되고 필요한 것만을 통합해 놓은 작품은 베토벤도 그때까지 쓴 적이 없다. 그런 이유 때문에 완성할 때까지 오랜 시간이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1808년 12월 22일 빈의 안 데어 빈 극장에서 교향곡 6번과 함께 작곡가 자신의 지휘로 초연했는데, 초연 당시에는 C단조가 6번이고 <전원>이 5번이었으나 출판 때 작곡가가 초연과는 반대의 번호를 붙였다. 아마 3번 교향곡인 <영웅>이 강인하고 남성적인 성격인데 반해 4번 교향곡이 부드럽고 여성적인 성향을 띠기 때문에, 이와 짝을 맞추기 위한 의도적인 번호 배치였을 것이다. 규모는 다른 교향곡과 크게 차이나지 않지만, 오케스트레이션 측면에서는 전통적인 현악기, 목관악기, 트럼펫, 호른, 팀파니 뿐 아니라 피콜로와 트롬본, 콘트라바순을 4악장에 처음으로 추가한다. 특히 피콜로는 베토벤이 교향곡에 처음 편입시킨 것은 아니지만 관현악의 일원으로 안착시켰다는 데 큰 의의가 있다. 스케츠로의 콘트라베이스 사용법도 독특하다.

교향곡 5번은 순음악인 동시에 프로그램 음악이다. 이 곡의 음악적 주인공을 베토벤 자신으로 보는 해석도 가능하며, '고난을 거쳐 승리로'라는 모토와 완벽하게 부합하는 것 또한 사실이지만, 간결하고 집중력이 높으며 군더더기가 없다는 점에서 이 곡을 순음악적으로 해석하고 연주하는 것도 가능하다. 교향곡 3번과 정반대의 방식으로 베토벤의 본질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이 교향곡은 베토벤의 가장 중요한 곡 하나로 꼽을 수 있다.

또한 우리는 C단조라는 조성에도 주목해야 한다. 이 조성은 베토벤이 특히 선호하던 조성이다. C단조로 된 베토벤의 작품은 '운명'이나 '비창'과 연관된 성격을 지니며 그 외에도 열정적, 정력적, 투쟁적인 특징을 보인다. 그는 자신의 투쟁적을 성향을 교향곡 5번에 대입했고 그 때문에 C단조라는 조성을 택했다고 추측하는 것도 가능하다.

2차 대전 후 만하임 악파에 대한 연구가 진척되면서 이 악파와 베토벤과의 연관성이 크게 부각되었다. 특히 만하임 악파의 대표자 요한 슈타미츠(Johann Wenzel Anton Stamiz. 1717~1757)와 베토벤과의 관계는 집중적인 논의를 거친 상태다. 슈타미츠의 Op.4 중 제3곡 C단조 3중주곡과 베토벤의 《교향곡 5번》과의 유사성도 한 때 화제가 된 적이 있다. 베토벤의 스케르초에서 보이는 단편적인 진행이 슈타미츠의 작품에서도 발견된다. 「운명의 동기」도 슈타미츠의 작품에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음악사에서 돌처럼 흔한 「운명의 동기」를 자신의 연금술을 통해 금으로 바꾸어버린 베토벤의 동기발전 수법을 생각해 보게 된다.

마지막으로, 연주에 관해서는 수많은 해석이 존재했기 때문에 그것을 여기에 다 싣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발터 리츨러의 말이 설명을 대신할 수 있을 것 같다.

"많은 지휘자와 연주가들이 이 작품의 생명력을 표현하기보다는, 그 구조를 표현하는 데서 그치고 있다."

사족. <운명>이라는 표제를 떼어놓으면 이 곡을 연상하지 못하는 동양권과는 달리, 유럽에서 이 곡은 그냥 '교향곡 5번'이다. 그들에게 '교향곡 5번'은 하나의 상징이다(움베르토 에코는 <공산당 선언>의 첫 문장 ―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 ― 의 위력이 베토벤의 4음 모티브와 맞먹는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러고 보니 이런 일화가 있다. 2차대전 당시 연합군에서 적국인 독일의 음악은 연주가 금지되는 것이 관례였지만, 유독 교향곡 5번만은 자주 무대에 올랐다. 그리고 BBC 월드 서비스, 세칭 <라디오 런던>은 1941년 1월부터 승리의 상징인 V자를 모스 부호로 나타낸(• • • ―) 음을 뉴스의 인터벌 시그널(막간 신호)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 4음은 모티브에서 온 것이다. 아마 BBC의 배경음 담당자들은, 4음 모티브의 리듬이 모스 부호로 V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 유명한 주제를 채택했을 것이다.

 

1악장 (1.Allegro con brio 2/4) (c minor)

서주 없이 단도직입적인 4음 모티브의 제시로 시작한다. 다섯 마디에 걸쳐 제시되는 4음 모티브 동기(G-G-G-E♭/F-F-F-D. 제시하는 악기는 클라리넷과 현악기)는 서양 음악사에서 가장 유명한 모티브이며, 이 곡을 이해하는 키워드다. 1악장에서는 4음 모티브에서 출발하지 않는 동기가 없다. 2악장에서도 4음 모티브의 리듬이 변형된 채 들어있으며, 3악장 스케르초 주제는 4음 모티브의 변형이다. 심지어 승리를 선포하는 4악장 발전부 말미에서도 4음 모티브는 스케츠로의 모습으로 다시 등장한다.

알프레드 브렌델이 지적한 베토벤의 "건축가" 기질을 보여주는 모티브로 이 만 한 것이 또 있을까? 그는 모티브 하나를 놓고 발전 가능성을 주도면밀하게 탐구했고, 주제의 모든 구성 원리를 탐구할 수 있는 가장 좋은 형식인 변주곡을 되풀이해 쓰면서 주제의 변형 과정에 대해 연구했다. 그 결과 베토벤은 간결하고 단순하면서도 강한 인상을 줄 수 있는 주제를 찾아냈고, 이것은 새롭고 강렬한 음악을 원하는 빈의 청중들에게 잘 먹혀 들어갔다. 4음 모티브의 정말 대단한 점은, 어떤 형태로든 금방 알아볼 수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음악 전문가든 아마추어 관객이든 똑같이 적용할 수 있는 사항이다.

사실 4음 모티브 자체는 전혀 대단한 것이 아니다. 이런 형태의 모티브는 사실 어느 작곡가의 곡에서나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것이며, 베토벤 자신도 교향곡을 완성하기 전 <열정> 소나타의 1악장에서 4음 모티브를 사용한 전례가 있다. 그러나 이 곡의 4음 모티브가 유독 강한 인상을 던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너무 절묘하게 쓰였기 때문이다. 특히 모티브 끝에 붙어 있는 페르마타. 바그너는 이 페르마타를 두고 '배가 표류하지 않도록 붙잡아두는 닻' 역할을 한다고 지적했다. 곡이 시작되는 순간 포르티시모의 강력한 힘이 몰아닥치지만, 그 힘은 곧 페르마타에 의해 고삐가 잡힌다. 마지막 마디의 레가토는 그 역할을 더욱 크게 만든다. 사실 베토벤의 자필 악보에 의하면, 「운명의 동기」는 처음 단계에는 4마디로 되어 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앞과 뒤가 대칭 구조를 이루어 단순하게 들릴 염려가 있다. 동기 뒷부분에 레가토를 배치해 길이를 늘인 것은 현명한 선택이었다.

연주자들에게 4음 모티브의 8분음표 세 개는 아주 까탈스러운 부분이다. 앞에 8분 쉼표 하나가 들어 있기 때문에, 두 번째 8분음표부터 바로 약박으로 넘어가기 때문이다. ff(포르티시모) 8분음표 하나를 연주하자마자 바로 약박을 표현해야 하는 셈이니, 일류 지휘자라도 베토벤의 지시는 까다롭게 느껴질 것이다. 4음 모티브의 템포를 어떻게 지정할 것이냐의 문제도 지휘자들에게 숙제다. 구스타프 말러는 빈에서 이 곡을 러허설 할 때 4음 모티브를 몇 시간 동안 계속 연습하는 바람에 단원들이 폭동 직전까지 간 적이 있었다. 그러자 말러는 이렇게 말했다는 소문이 있다. "오늘밤까지 분노를 억제하세요. 그러면 우리는 올바른 연주를 하게 될 것입니다."

베토벤은 메트로놈 템포를 사용한 최초의 작곡가였지만, 그가 지시한 메트로놈 템포대로 연주를 하면 곡이 어색하게 들릴 여지가 있다. 베토벤은 2분음표=108의 속도로 연주할 것을 지시했지만, 펠리스 바인가르트너(1863-1942)는 2분음표=100의 빠르기를 권했으며, 노먼 델 마는 그보다 느린 2분음표=96의 빠르기를 권했다. 지휘자들의 템포도 그에 맞추어 점점 빨라지는데, 번스타인은 80, 발터는 92를 택해 상대적으로 느리지만, 아바도는 노먼 델 마, 카를로스 클라이버는 바인가르트너가 지정한 빠르기대로 연주고 있다. 카라얀은 이례적으로 베토벤의 메트로놈 템포를 사용했다.

모티브의 제시가 끝나면 6마디부터 카논형의 동형진행을 토대로 주제를 전개해나간다. 여기서는 4마디 단위의 못갖춘마디로 이루어지며 19마디의 이태리 6도를 거쳐 22마디에서 금관을 제외한 투티로 다시 한 번 동기를 제시한다. 38마디부터 43마디까지는 불규칙적인 6마디가 자연스럽게 하나의 악구로 이루어져 있는데, 특히 이 악구의 스포르찬도는 2주제 도입구에 나타는 59마디 호른의 포르티시모 독주에 다가가기 위하여 힘을 더하는 수단처럼 보이며 화성 또한 불안정한 상태에서 안정을 요구하고 있다. 이후 59마디에서는 2주제의 도입구(4음 동기 확대)가 호른에 의해 제시되며 곡은 부드러운 2주제로 넘어간다. 3도 진행이 주체인 1주제와는 달리 2도와 4도 진행이 주체이다. 코데타는 94마디부터 시작해 122마디에서 종결하고 반복한다.

125마디부터는 발전부. 발전부의 전조를 간략하게 압축하면 130마디 F단조 → 142마디 C단조 → 150마디 G단조 (1주제 소재 사용) / 180마디~195마디 G단조 → C단조 / 195마디 F단조 → 205 B♭단조 → 211마디 F#단조 → 221마디 G장조로 특히 205마디부터 격심하게 변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 부분은 2분음표의 새로운 동기가 나타나는 부분이기도 하다.

248마디부터 재현부를 시작하는데, 현악기 위주로 제시하는 제시부 4음 모티브와는 달리, 재현부 4음 모티브는 전관현악의 투티로 제시하기 때문에 훨씬 강력하게 들리며, 그렇게 들려야 한다. 1주제가 반마침하는 268마디에 배치된 오보에의 아다지오 카덴차는 열렬한 운동을 잠시 멈추게 하고, 곡의 호흡을 고르도록 배려한다. 303마디에서 2주제 도입구는 바순이 연주하는데, 소재의 반복성을 회피하고 연주상을 난점을 타개하기 위한 베토벤의 지시사항이다. 재현부의 2주제는 C장조로 연주하지만, C장조로 끝나지 않고 확대, C단조의 코다로 넘어간다.

코다에서는 389마디까지 4마디 단위로 나누다가 389마디에서 모든 악기들을 중지, 1마디 쉬게 한다. 423마디부터는 코다의 2부분으로, 발전부의 2주제가 나타나며 441마디에서 ff에 도달한다. 그 직전 440마디부터는 423마디를 역으로 뒤집는다. 마침내 곡은 마지막 부분에 도달해 지금까지 가지고 온 힘을 477마디에 쏟아붓는다. 이후 502마디까지는 발전부 새로운 악상의 변형과 동기의 화음형을 통해 곡을 끝맺는 부분이다.

 

2악장 (2.Andante con moto 3/8) (A♭ major)

두 개의 주제로 이루어진 변주곡. 변주곡 형식과 소나타 형식이 공존한다. 메트로놈 템포는 Andante보다는 Allegretto에 가깝기 때문에 학자들은 적당한 메트로놈 템포를 8분음표=84 정도로 보고 있으나 이론도 적지 않다.

교향곡 5번은 1악장의 1주제와 2주제만이 대비를 가지는 것은 아니다. 역동적이며 주제의 전개와 발전을 극단적으로 실험하는 1악장과 달리, 2악장은 다소 평온하며 주제의 원형을 크게 변형하지 않는다. 1악장과 2악장의 대비를 통해 교향곡은 균형을 맞춘다. 2악장이 1악장 못지않게 주제의 발전 가능성이 풍부하고 변화가 심했다면 관객들은 피곤해 할 가능성이 높다. 2악장의 단순성으로 인해 1악장의 치밀한 전개가 더욱 돋보일 수 있었다. 이것은 생각하는 것만큼 쉽게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1주제는 비올라와 첼로의 유니즌에 베이스의 피치카토가 더해진다. 14마디부터 셋잇단음표 지시가 나타난다. 22마디부터 나타나는 2주제는 클라리넷, 바순, 바이올린에 비올라와 베이스의 셋잇단음 아르페지오가 더해져 있고, 포르티시모 투티가 있은 후 관악기에 의해 힘차게 셋잇단음 주제가 제시된다. 주부를 포함한 각 부분에서 A♭장조의 조성은 C장조로 이동하는데, 밝은 C장조에서 무엇인가가 등장할 것 같지만 곧 흐트러지며 7화음과 반음계적 진행을 거쳐 원래의 조성으로 되돌아간다. 이것은 무슨 의미일까? 지나치게 성급한 태도로 희망(또는 최종적인 결론)에 도달하지 않겠다는 것일까? 아니면 결정적인 순간을 앞두고 흩어지는 희망을 의미할까? 2악장의 초안과 현재의 형태를 비교해서 보면, 초안에서는 A♭장조의 두 번째 선율은 c단조의 종지로 반복하는 미뉴엣풍의 '트리오'였으며, 트리오의 두 번째 부분은 지금은 C장조로 제시하려던 것을 A♭장조로 끝내고, 반복하도록 만들어졌다. 만약 이렇게 악장을 완성했다면, 곡은 정말 단순하고 재미없었을 것이다.

각설하고, 크게 3개로 나눌 수 있는 변주부는 1주제 위주로 이루어지는데, 1주제의 리듬은 세분화되기도 하고, 단조로도 나타나기도 하지만 어디서나 크게 힘들이지 않고 주제의 원형을 확인할 수 있다. 템포도 205마디에서 218마디까지만 Piu moto로 변하고, 나머지 부분은 모두 원래의 템포를 유지한다. 변주부 구성을 간단하게 도해해 보면 제1주제 변주, 제2주제 변주, 다시 제1주제의 변주를 연주하며, 클라이맥스를 이루는 경과부 후에 제1주제의 변주 2회, 마지막으로 코다가 나타난다. 1변주부에서 주제는 16분음표의 균일한 리듬으로 나타나며, 2변주부에서는 32분음표로 더욱 세분한다. 현악기가 이 32분음표를 연주한다. 147마디부터는 1주제는 A♭단조로 제시한다. 185마디에서 시작하는 3변주부는 원래의 리듬을 찾지만 저음의 트레몰로 및 레가토와 얽혀 리듬이 복잡해진다. 1변주까지는 나름대로 주제부의 원형을 지키려고 하지만 점점 주제부의 원형이 모습을 바꾸는 과정을 지켜볼 수 있다. Piu moto 부분을 거쳐 코다로 진입하며, 여기서는 연속하는 크레셴도가 이어진 후 주제를 제시하는 것으로 곡을 마친다. 1악장과 같은 격렬함은 없으며, 커다란 위안을 주는 느낌이나 어두운 부분이 없지 않다.

 

3악장 (3.Allegro 3/4) (c minor)

3악장의 작곡 과정과 반복에 관한 논쟁은 매우 흥미롭지만 워낙 길게 때문에 다른 포스팅으로 옮겨놓았다.

(스케르초의 작곡 과정과 반복 문제 포스팅 참조)

첼로와 베이스가 피아니시모로 제시하는 첫 동기는 4음 모티브의 변형이다. 로켓 주제이며, 노테봄의 지적대로 모차르트 교향곡 40번 KV.550의 피날레 악장 주제와 무척 닮았다. 음정 간격이나 증4도(F#)가 끼어있는 것까지 똑같아 누구나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이어 4음 모티브의 리듬을 거의 그대로 사용하는 스케르초 주제가 호른에 의해 묵직하게 울려퍼진다. 첫 동기와 스케르초 주제는 계속 교차하면서 나타나다가 결국 133마디에서 마지막으로 ff로 울린 후 p로 흩어진다. 

C장조의 트리오는 푸가토 형식으로, 베이스에서부터 시작해 현으로, 전체 관현악으로 퍼져 나간다. 베를리오즈는 베이스가 두드러지는 이 트리오를 "코끼리의 춤"이라 불렀다. 트리오 주제는 동형진행으로 펼쳐지고, 주제가 분해되기도 하는데, 기존 판본에서는 유일하게 트리오 첫 부분에만 반복 지시가 있다. 트리오에서 스케르초로 다시 복귀하는 부분을 보면, 트리오의 마지막 음이 멎은 후 찾아오는 공허함을 스케르초가 작지만 음산한 목소리로 다시 채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스케르초가 돌아오고 나면 시종 약주로 진행하다가, 관현악법에 큰 변화가 생기면서 악상은 무섭게 꿈틀거린다. 스케르초 밑에서 팀파니가 4음 모티브의 리듬을 새기며 힘을 축적하고, 증대된 힘이 폭발할 즈음 아타카로 쉬지 않고 피날레 악장으로 넘어간다.

스케르초에서 피날레로의 '중단 없는 전진'은 전곡을 통틀어 가장 짜릿한 순간이다. 스케르초가 스케르초만으로는 온전하지 못하듯이, 피날레 악장 또한 앞의 스케르초와 연결되지 않는다는 그 의미가 반감되고 만다. 의심으로부터 확신으로, 고난을 거쳐 승리로. 베토벤의 기본적인 이데올로기를 압축해서 보여주는 악구가 바로 3악장과 4악장이 연결되는 부분, C단조에서 C장조로 전환하는 부분이다. 거대한 힘이 몰려드는 이 악절은 주요 리듬의 반복을 통해 더욱 강화되고, 이음새가 매우 자연스럽기 때문에 듣는 사람들은 거부감 없이 4악장으로 넘어갈 수 있다.

 

4악장 (4.Allegro 4/4) (C major)

베커가 지적한 대로, 곡은 '투쟁'의 1악장, '희망'의 2악장', '의심'의 3악장을 거쳐 '승리'의 4악장으로 나아간다. C단조에서 C장조로의 전환은 하이든이 <천지창조>에서 태초 이전의 혼돈(Chaos)에서 빛(Lux)으로의 이행을 표현하기 위해 쓴 적이 있는데, 베토벤은 이것을 웅장하게 확대했다. 트럼펫의 힘찬 C장조 화음을 포함한 오케스트라의 등장은 승리의 기쁨을 체현한다. 오케스트레이션 측면에서는 피콜로, 콘트라파곳, 트롬본 3대가 추가되어 1~3악장의 음향과 크게 차이가 난다. 이 모든 것들이 피날레 악장은 1악장의 긴축성과는 대조적인, 폭발적 발산을 나타내 준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셈이다. 1주제 첫 머리는 으뜸화음(I)을 음으로 풀어 제시하며, 시종일관 당당한 모습이다. 레가토가 붙은 경과부에서 조성은 C장조에서 G장조로 바뀌고, 그대로 2주제로 넘어간다. 바이올린이 춤추듯 쾌활하게 연주하며, 셋잇단음의 상승과 화음 위주의 진행을 보여준다. 코데타는 2/2박자로 바뀌고, 바이올린과 클라리넷이 새로운 동기를 연주한다. 제시부의 반복은 필연적인 것이지만, 지휘자는 반복 시 처음 등장하는 강한 트럼펫을 신중하게 연주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3악장에서 4악장으로 넘어가는 첫 제시에 비해, 반복은 조금 뜬금없게 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발전부로 넘어가면 2주제에 의한 자유로운 전개를 펼치다가 153마디부터 스케츠로의 재현을 선보인다(당연히 박자도 3/4박자로 바뀐다). 환영처럼 다시 등장하는 스케츠로 주제는 집요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곡은 다시 힘을 모아 재현부로 돌아오며, 코다는 제시부 코데타 동기로 시작한다. 여기서 트롬본은 수십 마디 동안 나타나지 않다가 다시 등장하는데, 베토벤이 비록 트롬본을 추가 편성했지만 사용에 있어서는 신중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53마디에서 sempre piu Allegro로 가속이 붙기 시작하며 362마디에서는 Presto 템포(온음표=112. 박자는 2/2)로 폭주한다. 코다는 앞에서 제시했던 동기들을 마지막으로 확립하며 마친다. 마지막 화음에 리타르단도를 넣던 옛 관례가 있었는데, 70년대 이전 연주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Posted by 여엉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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