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쿠엔차> (Sequenza)

(50년대 아방가르드 작곡가들은 하나같이 자신의 성채를 쌓아올리기에 바빴다. 변화하는 추세를 받아들이기에도 벅찬 대중들은 그들의 시야에 존재하지 않았다(결국 대중들은 그들에게서 등을 돌려 완전히 다른 음악을 선택한다). 베리오는 이러한 50년대 아방가르드 흐름에 불만을 가졌다. 그는 비록 ‘비웃음을 당할지언정’ 연주자들이 연주하면서 보람을 느낄 수 있는 일련의 작품집 작곡에 착수했다. 일견 그의 작품집은 힌데미트의 작품목록과 비슷하지만, 그의 곡에서는 힌데미트와는 달리 애정이 느껴진다. 작곡가는 주문 받은 작품을 불만 없이 써야 한다고 믿었던 힌데미트가 콘트라베이스 소나타나 튜바 소나타에서 애정을 담았다고는 상상하기 힘들지만, 베리오의 <세쿠엔차>는 악기에 진심어린 애정을 담아 연주하는 연주가들을 위한 경의라고 할 수 있다. 작곡은 1958년 플루트로 시작해 2002년 첼로를 위한 14번째 곡으로 끝날 때까지 무려 44년간 계속되었다. 여성의 목소리, 피아노, 트롬본, 비올라, 오보에, 바이올린, 클라리넷, 하프, 트럼펫, 기타, 바순, 아코디언, 알토 색소폰이 그 사이에 들어가 있다.

작곡가의 말에 의하면 <Sequenza>란 ‘Sequence of harmonic field'의 준말이라고 한다. ’화성적 형태의 순열‘이라는 뜻으로 보인다. 작곡가는 독주 악기를 위해 개발한 20세기의 거의 모든 기교를 쏟아 붓고 있다.)

 

세쿠엔차 1번 (플루트) (Sequenza No.1 for Solo Flute)

작곡 시기 : 1958년 완성

헌정자 : 세베리노 가첼로니

(플러터 텅잉을 비롯한 고도의 기교를 자유롭게 구사해야 하는 세쿠엔차 1번. 하행 12음 선율로 시작한다. 정해진 템포는 없으며, 연주자는 시간에 맞추어 악절을 집어넣기만 하면 된다. 음의 밀도가 떨어지는 트릴이나 트레몰로는 고저 없이 평온한 바다를, 강세와 억양, 음가에 의해 두드러지는 부분은 바다 사이에서 솟아오르는 섬을 떠올리게 한다.)

 

세쿠엔차 2번 (하프) (Sequenza No.2 for Harp)

작곡 시기 : 1963년 완성

헌정자 : 프랑수아 피에르

(프랑스 인상주의에 대한 직접적인 애정을 드러내는 하프를 위한 세쿠엔차. 숲을 흔들고 지나가는 바람처럼 상쾌하고 시원한 곡이다. 작곡가는 하프의 전통적인 주법을 확장하는 데 공을 들인다. 일반적인 글리산도나 아르페지오, 화음형 뿐 아니라 강한 스냅 피치카토와 기타를 생각나게 하는 피치카토를 사용하고, 일부러 거친 소리를 내기도 하며, 페달을 적극 활용하기도 하면서 하프에서 예상하기 힘든 강하고 단단한 소리를 만들어낸다.)

 

세쿠엔차 5번 (트롬본) (Sequenza No.5 for Solo Trombone)

작곡 시기 : 1965년 완성

헌정자 : 스튜어트 댐스터

(베리오는 다섯 번째로 완성한 이 곡을 전설적인 어릿광대이며 음악가였던 그록(Grock, 1880-1959. 본명은 샤를 아드리앵 베타시Charles Adrien Wettach)을 추모하는 의미에서 만들었다. 트롬본으로 낼 수 있는 모든 소리를 다 시험해 보는, 어떤 의미에서는 트롬본을 위한 전설적인 곡이다. 곡은 우스꽝스러운 소리로 시작하며 유쾌하지만 진실된 어릿광대의 모습을 묘사한다. 시벨리우스의 교향곡 7번 주요 주제가 트롬본을 위한 가장 순수한 주제라면, 이 곡은 트롬본의 기교에 경의를 표하는 대표적인 곡이라 할 수 있다. 14곡의 세쿠엔차 중 가장 해학적인 곡.)

 

세쿠엔차 6번 (비올라) (Sequenza No.6 for Solo Viola)

작곡 시기 : 1967년 완성

(독주 비올라를 위해 만든 세쿠엔차 6번은 길이도 길고 기교도 손꼽힐 정도로 어렵다. 그는 이 곡에서 위대한 현악기 연주자의 기교에 대한 경의를 표하고 있다. 바로 니콜로 파가니니다. 그에 걸맞게 활대로 브릿지 치기, 글리산도, 아르코와 피치카토의 재빠른 전환 등등 별의별 기교가 다 등장한다.)

 

세쿠엔차 7번 (오보에) (Sequenza No.7 for Solo Oboe)

작곡 시기 : 1969년 완성

헌정자 : 하인츠 홀리거

(이 곡에서는 완전 5도가 자주 등장한다. 작곡가는 오보에의 가장 큰 특징인 정확한 음정에 경탄하면서, 동시에 곡에서 조성적인 특질을 드러낸다(자주 등장하는 B음이 이 곡에 조성적인 성격을 부여한다). 또한 베리오는 오보에라는 악기를 통해 오보에족의 악기인 잉글리시 호른을 절묘하게 사용한 작곡가, 리하르트 바그너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드러낸 것 같다(바그너는 <트리스탄>의 3막 전주곡에서 잉글리시 호른을 위한 기막힌 패시지를 만든 바 있다).)

 

세쿠엔차 8번 (바이올린) (Sequenza No.8 for Solo Violin)

작곡 시기 : 1976년 완성

헌정자 : 카를로 치아라파

(베리오는 이 현악기를 통해 바흐의 D단조 파르티타, 유명한 샤콘느를 떠올리고 있다. 바이올린은 A음과 B음을 연속적으로 연주하며, 중음주법을 비롯한 현란한 기교를 동원하며 여기에 음을 채워 넣는다. 과거의 기교와 현재의 기교, 그리고 미래의 기교가 이 곡에서 뒤섞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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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악장 <지금 주 안에서 죽는 이들은> (7.Selig sind die Toten. Feierlich 4/4)

(텍스트 : 요한묵시록 13장 14절)

Selig sind die Toten

Selig sind die Toten, die in dem Herren sterben, von nun an, Ja, der Geist spricht, daß sie ruhen von ihrer Arbeit, denn ihre Werke folgen ihnen nach.

(Offenbarung Johannes xiv. 13)

지금 주 안에서 죽는 이들은

나는 또 “이제부터 주님 안에서 죽는 이들은 행복하다.‘고 기록하여라.” 하고 하늘에서 울려오는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러자 성령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 그들은 수고를 마치고 안식을 누릴 것이다. 그들이 한 일이 그들을 따라가기 때문이다.”

(요한묵시록 14장 13절)

다른 악장들, 즉 2악장과 6악장, 3악장과 5악장이 아치형으로 짝을 이루는 것처럼, 마지막 7악장 또한 첫 1악장과 대칭을 이루고 있다. 가장 좋은 예로 1악장과 7악장은 모두 ‘Selig(복된)’이라는 하나의 단어로 시작한다는 사실을 들 수 있겠다. 다만 '애통함'에 대해 다루고 있는 1악장과는 달리, 7악장의 기본 주제는 '안식'이다. 브람스는 자신의 한계를 넘어가는 이 곡을 통해 슬픔의 끝에는 안식이 있다는, 보편적이면서도 거대한 위로를 주고자 했다. 

이제 죽음의 공포는 F장조 상행 8분음표의 흐름에 휩쓸려가고, 영원한 안식에 대한 갈구만이 남는다. 따뜻함과 자애로움으로 가득한 첫 선율 F-D-C는 1악장의 상행 선율 F-A-B♭과는 정 반대 방향으로 내려간다. 하나님의 축복이 위에서 아래로 내려온다는 것을 선율로 표현하는 것이다. 소프라노가 선율을 마치면 베이스가 C-A-G의 하행 선율로 응답한다. 관현악의 반주 안에서 사람들은 푸가로 노래한다.

48마디부터는 A장조의 중간부가 이어진다. 첫 부분보다는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합창단이 “그렇다. 그들은 수고를 마치고 안식을 누릴 것이다”라고 부른다. 63마디부터 조성은 E장조로 변화하고, 그 조성에 따라 “그들이 한 일이 그들을 따라가기 때문이다”라는 가사가 나온다. 성악이 노래를 부르면 플루트와 오보에는 이 선율을 그대로 모방한다. 이 두 악구는 마치 다리처럼 이어진다. 앞의 수고(Arbeit)와 뒤의 안식(Ruhe)을 잇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수고함의 끝에는 안식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처럼.

A장조의 중간부가 F장조의 주부로 돌아가는 부분. 그 전조 부분은 정말 황홀하리만치 아름답다. 가사는 테너 파트가 먼저 부르지만, 첫 부분과는 달리 한 파트의 낭창이 끝나면 모든 파트가 같이 노래를 부른다. 더 이상 어느 누구도 홀로 있지 않게 되는 셈이다. 158마디에 이르러 조성은 확고한 F장조의 으뜸화음에 안착하고, 하프의 아르페지오가 그들을 맞이한다. 하프는 1악장의 마지막 부분에서도 등장한 적이 있다. 브람스는 하프를 자주 사용한 작곡가는 아니지만, 하프의 특성을 잘 알고 이 악기가 얼마나 대단한 효과를 발휘할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하프는 VI-V-I-IV로 화음형을 연주한 후 아르페지오로 천천히 마지막 음계들을 수놓는다.

브람스는 1악장과 7악장의 대칭 구조를 놀라울 정도로 치밀하게 꿰어 맞추고 있다. 1악장 154마디-158마디의 “getröstet werden(위로를 받다)”와 7악장 162마디에서 165마디 “selig(복된)”은 동일한 선율을 사용하고 있다. 심지어 이 두 부분은 소프라노와 알토 파트가 선창하고 테너와 베이스 파트가 따라오는 순서마저 똑같다. 브람스는 음악적 표현 뿐 아니라 선율에 있어서도 곡이 대칭을 이루도록 한 것이다. 즉, 주에게 위로를 받는 것은 복되다(Es soll getröstet werden, ist selig)는 사실을 전달하기 위한 음악적 장치라 할 수 있다.

또한 이 두 부분은 모두 긴 지속음을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그 지속음 끝에는 페르마타가 있다. 브람스는 위로가 영원할 것이라는 소망을 음표를 통해 넌지시 암시한다.

 

참고문헌

김신정. <브람스의 ‘독일 레퀴엠’에 나타난 대칭적 구조에 관한 연구 : 1악장과 7악장을 중심으로>,

장로회신학대학교 교회음악대학원.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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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현악을 위한 협주곡 (Concerto for Orchestra, Sz.116)

작곡 시기 : 1943년 8월 15일 착수, 10월 8일 완성

헌정자 : 나탈리아 쿠세비츠키 (지휘자 세르게이 쿠세비츠키의 아내)

악기 편성 : 플루트 3(한 대는 피콜로 겸), 오보에 3(한 대는 잉글리쉬 호른 겸), 클라리넷 3(한 대는 베이스 클라리넷 겸), 바순 3(한 대는 콘트라바순 겸), 호른 4, 트럼펫 3, 트롬본 3, 튜바, 팀파니, 사이드 드럼, 베이스 드럼, 심벌즈, 트라이앵글, 탐탐, 하프 2, 현악 5부

(1940년 가을, 바르톡은 전쟁의 참화에 휩싸인 유럽을 떠나 미국으로 향했다. 1920년대와 30년대에 걸쳐 미국의 몇몇 연주자와 음악 애호가들이 바르톡의 재능을 인정해 주고 바르톡도 그들에게 자신의 가장 중요한 작품들을 헌정했지만, 미국 사회는 이 현대 작곡가를 매정하게 대했고 그는 쇤베르크처럼 강의로 생계를 이어야 했다. 그의 재능을 잘 알고 있으며, 그의 성격 - 까칠하고 남에게 신세 지는 것을 무엇보다 싫어하는 - 도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는 바이올리니스트 요제프 시게티와 지휘자 프리츠 라이너는 그를 간접적으로 도울 방법을 찾았다. 1943년, 바르톡은 보스턴 심포니의 음악감독 세르게이 쿠세비츠키로부터 1천 달러의 보수와 함께 관현악곡 의뢰를 받는다. 당시 바르톡은 백혈병을 앓고 있었으며, 고열이 시도 때도 없이 그의 몸을 기습했고, 체중이 감소했다가 다시 불어나는 현상을 겪는 등 최악의 몸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현대 관현악곡에서 빼놓을 수 없는 걸작을 완성했다(완성하는 데 걸린 시간은 고작 7주에 불과하다). 이 곡은 지금까지 만들어진 관현악의 패러다임을 뒤집어엎는 새로운 작품이었다. 악기가 오케스트라의 부속품으로 종사하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이고 민주적인 방식으로 오케스트라의 일원이 되었다. 개개의 악기들은 자기 기량을 마음껏 발휘하면서도 오케스트라의 통일성을 해치지 않는다. <관현악을 위한 협주곡>이라는 제목 자체가 모순되는 두 가지 체제를 상징한다.

1944년 12월, 쿠세비츠키에 의해 초연된 이 작품은 삽시간에 미국 전역으로 퍼져나갔고, 바르톡은 하룻밤 사이에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현대 작곡가가 되었다. 그에게는 작곡 요청이 쇄도했고, 바르톡은 병중에도 바쁜 나날을 보내며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와 <피아노 협주곡 3번>, <비올라 협주곡>, <현악 4중주 7번> 작곡에 착수했다. 그러나 이중에서 완성된 것은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 뿐이다. 그는 <피아노 협주곡 3번> 오케스트라 파트의 마지막 17마디를 완성시키지 못했으며(제자 티보르 셸리가 이를 완성했다), <비올라 협주곡>은 스케치 상태, <현악 4중주 7번>은 몇 마디의 메모만을 남겼을 뿐이다. 그는 고통을 인내한 끝에 보상을 받았지만, 그 보상을 누렸던 기간은 너무도 짧았다. 끝내 고국 헝가리에 돌아가지 못했던 작곡가는 1945년 9월 26일 뉴욕의 한 병원에서 생을 마쳤다.

바르톡에 대한 감동적인 저서 <바르톡의 생애와 음악>을 집필한 헐시 스티븐스는 이렇게 말했다.

"만약 창조자가 통렬한 그 무엇을 가능한 진지하게 말할 경우에는 현미경적 해부는 무의미하다. 바르톡의 <관현악을 위한 협주곡>은 걸작이며 금세기에 배출된 가장 위대한 작품의 하나인데, 이는 그 자료들의 독창성이나 처리 기법의 참신함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제기하는 문제들이 폭 넓고 중요하며 또 이들이 더할 나위 없는 논리와 확신으로 해결되기 때문이다. (...) 이들은 필연적인 작품들로서 너무나 강한 인상을 주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이 어떤 다른 방식으로 쓰여지는 것을 생각할 수 없다. 바르톡은 이와 같은 필연성을 현악 4중주곡 제4번에서 처음으로, 그리고 <관현악을 위한 협주곡>에서 마지막으로 획득했다.")

 

1악장 <서주> (1.Introduzione. Andante non troppo 3/4 - Allegro vivace 3/8)

(‘준엄함’ - 작곡가의 곡 해설 팜플렛 설명)

(1악장 <서주>. 파를란도 루바토(Parlando rubato)1)가 쓰이는 엄격하고 무거운 안단테에 서서히 속도가 붙는다. 아첼레란도 지시에 의해 알레그로 비바체의 주요부로 넘어가면 바르톡의 특성을 집약하고 있는 1주제를 맛볼 수 있다. 4도 진행, 5음음계 스케일, 도치 기법이 집약된 이 주제는 바르톡의 페르소나와 같은 것이며, 수십 년에 걸쳐 단련된 모티브 사용법의 원숙함을 능수능란하게 보여준다. 목관에 의해 제시되는 2주제는 단2도 모티브(E, F#)에 의해 구성되며 침착한 분위기로 긴장을 푼다. 여기서부터 바르톡 대위법의 주제 중 하나인 푸가토가 풀려나오며, 푸가토의 2제시부에서 주제의 도치형이 등장한다. 푸가토의 후반부는 금관악기가 이끌어나가는데, 곡 특유의 톡 쏘는 힘을 더한다.)

 

2악장 <짝들의 놀이> (2.Giuoco delle coppi. Allegretto scherzando 2/4)

(‘익살스러움’ - 작곡가의 설명)

(2악장 <짝들의 놀이>. 바르톡의 가장 유쾌한 스케르초. 작은북의 선도에 맞춰 개개의 악기들이 짝으로 등장한다. 바순이 6도, 플루트가 5도, (약음기를 낀) 트럼펫이 장2도, 클라리넷이 7도, 플루트가 5도로 움직이는데, 이 음정은 개개 악기의 특징에 딱 맞는 음정이며, 바르톡은 천부적인 감각으로 개개 악기가 표현할 수 있는 최고의 개성을 끄집어낸다. 트리오라 해도 좋을 부분은 금관의 단순한 코랄로, 난삽한 느낌이 나는 스케르초와 좋은 대조를 이룬다.)

 

3악장 <비가> (3.Elegia. Andante non troppo 3/4)

(‘음울한 죽음의 노래’ - 작곡가의 설명)

(3악장 <비가>. 어두운 '밤의 음악' 이 진지하고 음울한 분위기로 곡을 이끌고, 중간부에 1악장 서주에서 데려온 모티브가 재등장한다(사실상 서주부의 거의 모든 모티브가 토막토막 잘려서 악장의 절반동안 등장한다). 다섯 개 악장 중에서 가장 헝가리적인 분위기가 강하며 특히 몇 개 주제는 민요적 성격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4악장 <중단된 간주곡> (4.Intermezzo interrotto. Allegretto 2/4+5/8)

(4악장 <중단된 간주곡>. A-B-A-중단-B-A. 리트의 A-B-A-B-A에 '중단' 부분을 삽입한 변형 가곡 형식. 전악장과 마찬가지로 민요적인 성격을 띠며 불가리아 리듬(5, 7, 11 등의 홀수 리듬) 패턴을 가지고 있는데, 갑자기 예고도 없이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7번의 '전쟁' 주제에서 가져온 것이 분명한 경직된 8/8박자 음악이 간주곡을 끊어버린다. 우스꽝스럽고 경박하기 짝이 없는 음악적 조롱은 쇼스타코비치를 제대로 패러디 하는데, 중간에 베이스 트롬본과 테너 트롬본을 위한 아주 뛰어난 글리산도가 있다(여기서 바르톡은 트롬본 슬라이드의 1포지션부터 7포지션까지를 모두 사용한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간주곡으로 돌아오면 조용하게 마무리가 이루어진다.)

 

5악장 <피날레> (5.Pesante 2/4 - Presto)

(‘생명력 넘치는 활달한 주장’ - 작곡가의 설명)

(5악장 <피날레>. 짤막한 금관의 페잔테(무겁고 중후하게) 섹션이 끝나자마자 무궁동의 현이 광속으로 돌진하고, 관현악의 모든 악기들이 순차적으로 이 레이스에 동참한다. 프레스토의 빠른 움직임 속에서 모티브들이 튕겨나가듯이 생성된다. 레이스가 종료된 후 (페잔테 패시지에서 파생된 것이 분명한) 푸가 주제가 등장하는데, 온음계적인 성격에도 불구하고 수법이 복잡하고 증대와 감소가 교묘하게 일어나며, 도치가 곳곳에 포진하고 4중 스트레토까지 있다. 이 복잡한 푸가 작법을 거치고 나면 다시 프레스토의 레이스가 펼쳐지고 이번에는 의문스러운 분위기로 빠져든다. 현의 음송이 위에서 주제들이 모습을 보이고, 클라이맥스에 도달하며 곡은 끝을 맺는다. 바르톡은 피날레 악장의 엔딩을 두 개 썼는데, 원래 엔딩은 바르톡 고유의 분위기가 강하며, 새로 쓴 엔딩은 미국적인 분위기가 강하다. 새로 쓴 엔딩이 약간 더 길다.)

 

참고자료

- 헐시 스티븐스, <바르토크의 생애와 음악>. 경북대학교 출판부.

 

1) Parlando rubato : Parlando는 이탈리아어로 ‘말하다’라는 뜻. 한 마디 한 마디를 확실하게 액센트를 붙여서 이야기 하듯이 노래하는 형식. (<음악용어사전> p.599, 세광출판사,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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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균율 1권의 푸가들

음악 2013. 10. 28. 00:25

 평균율 1권에는 24개의 푸가가 있다. 24개의 조성에 맞추어 24개의 푸가를 썼다는 것 자체가 흥미롭지만(바흐와 동시대를 살았던 한 작곡가는 자랑스럽게 "나는 F#장조나 D♭장조로 곡을 써본 일이 단 한 번도 없다"라고 밝힌 적이 있다고 한다), 그것보다 더 재미있는 점은 그 푸가들이 하나같이 닮은 점이 거의 없다는 사실이다. 인벤션에 가까운 2성 푸가(10번 E단조)부터 고도의 대위법적 기교를 쌓아올린 5성 푸가(4번 C#단조와 22번 B♭단조 푸가. 공교롭게도 두 푸가 모두 수난곡 풍의 통절한 내용을 담고 있다)까지. 아주 짤막한 주제로 전개하는 17번 A♭장조 푸가부터 4마디에 달하는 긴 주제를 사용하는 22번 B♭장조 푸가까지(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푸가는 전혀 복잡하지 않다. 오히려 곡의 간결함 때문에 푸가라는 음악 형식을 익히는 데 쓰일 정도다). 복잡한 전개과정을 추구하는 1번 C장조 푸가부터 주제가 뚜렷이 두드러지는 2번 C단조 푸가까지. 쉴새없이 주문을 받고 정주 생활에 익숙하며(그는 평생 북독일 바깥으로 나가본 일이 없다) 정해진 일정에 맞추어 움직였던 '장인' 바흐가 평균율은 물론 수많은 곡에 한결같은 독창성을 불어넣었다는 것은 정말 수수께끼가 아닐 수 없다(라이프치히 시절, 그는 거의 1주일에 한 곡씩 새 칸타타를 써야 했다).

 평균율의 푸가들은 들으면 들을수록 무궁무진해 도무지 지루해질 틈을 주지 않는다. 9음의 반음계 주제로 되어 있는 12번 F단조 푸가는 어떠한가(굴드는 이 푸가를 두고 'Webernsque'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참으로 적절한 단어가 아닐 수 없다). 24번 B단조 푸가는 반음계 동형진행 주제를 이용해 평균율 1권의 거대한 코다를 구축하고 있다. 심지어 다른 푸가들에 비해 그다지 높은 평을 받지 못하는 16번 G단조 푸가조차 동시대 작곡가들의 숱한 푸가들과 비교하면 수준높은 처리 기술을 보여주고 있다. 전위와 확대 기술을 교묘하게 사용하는 4번 C#단조 푸가는 내용적으로도 기술적으로도 가히 최고라 할 만하다(이 푸가는 평균율 1권의 푸가들 중 가장 규모가 크다. 무려 115마디).

 평균율의 푸가들은 독창성 뿐 아니라 논쟁점도 제시한다. 예를 들어 20번 A단조 푸가에서 마지막 다섯 마디에 걸치는 베이스 오르겔풍크트 A음은 어떤가. 이 음은 바흐가 살던 시대의 하프시코드나 클라비코드로도, 그 이후에 나온 포르테피아노로도, 현대 피아노로도 연주가 불가능하다. 오르간의 어법을 그대로 옮겨온 것 같은 이 주법은 지금까지도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평균율 1권에서 바흐가 전주곡보다는 푸가에 더 많은 공을 들였다는 서술은 어렵지 않게 찾아 볼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푸가들이 모두 나름의 개성을 갖추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바흐는 그 일을 해내는 데 성공했고, 그가 의도한 대로 '음악을 배우고자 하는 젊은이들이 사용할 수 있음은 물론, 음악의 전문가들에게도 여가적 즐거움(물론 이 즐거움에는 '돈벌이'라는 단어도 포함되어 있다)을 제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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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의 불안감과 함께 이어지는 3막 1장이 끝나면, 보체크와 마리가 함께 걷는 2장으로 이어진다. 오케스트라는 각각의 옥타브에서 B음을 연주한다. 정묘한 12음 음악이 B음을 감추었다가 드러내기를 반복한다. 두 사람은 서로 달을 쳐다보면서 말한다. "달이 뜰 때는 붉은 색이네요(마리)." "피가 묻은 낫 같아(보체크)." 보체크는 그 말과 함께 무신경한 동작으로 칼을 꺼낸다. 팀파니의 불길한 리듬과 함께 보체크는 마리의 비명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를 찔러 죽인다. 오케스트라는 잠시 불길한 음표를 연주하는 듯 싶더니 이내 잠잠한 풍경을 연주하던 부드러운 음악으로 돌아간다. 보체크는 성급히 그 자리를 뜬다. 그러나 보체크가 자리를 뜨는 순간, 보체크의 광기, 죽은 마리의 원념, 온갖 고통, 집착, 그리고 인간성의 한계에 부딪친 안타까운 비명 소리 같이 부정적인 에너지들이 뭉치고 또 뭉쳐 B음을 중심으로 한 거대한 음향 덩어리를 만들어낸다. 이 음향은 도저히 참을 수 없을 정도로 크게 크레셴도하며 팀파니의 '죽음의 리듬'에 의해 중단, 아니, 더 커지는 계기를 통해 극한에 도달하면서 보체크를 뒤쫓아간다.

마치 영화에서 장면의 급속한 전환을 보는 것처럼, 장면은 호숫가에서 술집으로 넘어간다. 조율이 어긋난 업라이트 피아노의 폴카 소리에 맞추어 가난한 사람들이 술집에서 저녁의 짤막한 여흥을 즐기고 있다. 보체크는 손에 피가 묻은 줄도 모른 채 자리에 앉는다. 하지만 파멸은 이미 문 앞까지 와 있다. 팀파니의 '죽음의 리듬'이 폴카 사이에 끼어드는 것을 듣는 순간, 우리는 보체크의 사회적 생명이 이미 끝나 버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그것은 잦은 학대, 그리고 정신적 고통을 대가로 얻어낸 쥐꼬리만한 봉급일 뿐이지만.

마르가레트는 보체크의 손에 묻은 피를 발견한다. 사람들은 춤을 추다 말고 보체크의 손에 묻은 피를 발견하면서 그를 살인자라고 비난한다. 그에게서 사람고기 냄새가 난다며 그를 비난한다. 이제 보체크는 거대한 음향 덩어리가 자신을 쫓아갔던 그 장소, 자신이 마리를 죽인 그 장소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

호숫가로 돌아온 보체크는 이미 죽어 넘어진 마리를 다시 발견한다. 이 때부터 보체크의 모든 단어는 '칼'과 연관되어 있다. 마리가 대수롭지 않게 언급했을 때부터 그의 머릿속에 강박관념처럼 박혀 있던 '칼(Messer)!' 그는 마리의 목에서 흐르는 피를 보고 붉은 끈이라 말한다. 붉은 끈은 유죄판결을 받은 이의 증표. 보체크는 마리의 죄를 확신하고 있다. 그녀가 자신을 배신하고 간통했다고 확신한다. 미쳐버린 자에게 더 이상 물증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자신이 그렇게 믿고 있다는 것만이 가장 중요할 뿐이다. 아마 보체크는 마리가 간통을 저지르지 않았어도 그것을 확신했을 것이다.

 이제 대사는 셰익스피어의 잔혹한 비극 <맥베스>와 비슷해진다. 맥베스는 씻으면 씻을수록 자신의 손은 물론이고 온 세상의 물이 새빨간 피로 물드는 고통스러운 느낌에서 절대 벗어날 수 없다. 보체크도 마찬가지다. 그는 자신의 몸을 깨끗이 정화하기 위해 물로 뛰어든다. 오케스트라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단지 깨끗하고 조용한 풍경 묘사에 집중할 뿐이다. 의사와 대위가 그 주변을 지나간다. 두 사람은 보체크와 전혀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들 같다. 두 사람은 호수에서 이상한 것이 느껴진다, 호수에서 두려운 것이 느껴진다와 같이 시덥잖은 이야기만 하다가 지나갈 뿐이다. 의사와 대위의 세계, 그리고 보체크와 마리의 세계는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 

 이제 무대와 가수 대신 오케스트라가 활약할 차례가 나타난다. 3막을 이루는 여섯 개의 인벤션 중 다섯 번째 인벤션, 오직 관현악으로 이루어진 인벤션이 나타난다. 작곡가는 이 인벤션을 "이제 무대 위에서 벌어지는 연극적 행동의 바깥으로 나선 작가의 고백……대표자들, 청중들을 향한 인류에의 호소문"이라고 불렀다. 알반 베르크는 이 오페라가 보체크와 마리, 그리고 그 두 사람을 둘러싼 특수한 세계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인류 전체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보편적인 이야기임을 확신하면서 그 두 가지를 잇는 위대한 연결구를 만들었다. 권위에 의한 폭력에 노출된 '보통 사람'의 고통은 모두가 겪었고, 지금도 겪고 있으며, 나중에도 겪을 것이다. 그것을 하나로 묶는 이 D단조의 인벤션이 말러풍의 교향악적 아다지오라는 사실은 참으로 재미있다. 작곡가는 1908~9년에 썼던 소나타 스케치를 여기서 재활용했다.

 극은 여기서 끝나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그러나 극은 마지막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끝난다. 많은 사람들이 전혀 예상치 못했지만 반드시 언급하고 지나가야 할 이야기, 바로 보체크와 마리의 아이 이야기다. 보체크와 마리의 아이는 자기 엄마 아빠가 죽은 줄도 모르고 목마를 타면서 놀고 있다. 하지만 곧 아이들이 달려와 자기 엄마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아이는 순간적으로 굳어버리지만, 계속 말을 타고 있다. 아이들에게 아빠와 엄마는 자기 세계의 거의 전부나 다름 없다. 자기 세계가 무너져 버렸다는 사실을 어떤 아이가 그대로 받아들이고 싶어할까?

 아이들에게 마리의 죽음은 무섭지만 새롭고 흥미로운 '사건'일 뿐이다. 아이들은 그 '사건'을 구경하기 위해 뛰쳐나간다. 마리의 아이만이 여전히 말을 타고 있다. 하지만 아이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곧 다른 아이들을 따라나선다. 다른 아이들이 '사건'이라고만 생각하는 현실을 받아들이기 위해. 아이가 떠나고 흔들거리는 목마의 움직임에 맞추어 G장조의 윤곽이 드러나는 화음이 흔들거리다가 멈춘다. 목마도 움직임을 멈춘다.

 아이는 어떻게 될까? 베르크는 아이에 대한 잔인한 결론을 내렸다. 코다는 오페라의 시작 부분과 이어져 있다고. 아이는 보체크의 인생을 그대로 물려받게 될 것이다. 아니, 어쩌면 다른 결론을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보다 더 비참하게 죽어가거나, 아니면 아버지와 어머니의 기억이 없는 다른 공간으로 떠나거나.

 

 참고자료

- 게오르크 뷔히너 원작, 알반 베르크 편집. 오페라 <보체크> 대본 한국어 번역본.

- 알렉스 노스 <나머지는 소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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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여름부터 슈트라우스는 현악기 연주자를 위한 추도의 의미가 담긴 곡을 쓰기 시작했다. 슈트라우스는 이 곡에 <메타모르포젠Metamorphosen>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이 제목은 오비디우스의 유명한 <변신 이야기Metamorphoses>를 떠올리게 한다. 신화의 이야기는 그 껍데기를 벗겨놓고 보면 인간의 이야기, 곧 이름만 바꾸면 너 자신의 이야기Mutato nomine, de te fabula narratur가 된다. 티모시 잭슨이 이 곡에 관해 주장하듯 ‘부정적인 변신, 사물을 원초적인 상태로 돌려놓는 해체’인 셈이다. 시대에 초연한 듯, 시대에 영향 받지 않는 듯 보이는 이 영광과 오욕의 작곡가는 <카프리치오>를 쓸 때 그랬듯이 유럽 세계를 휩쓸고 있는 광기와 자신은 무관한 듯 펜을 놀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이 곡은 한 시대를 매장하고 있다. 1933년에서 1945년에 걸친 ‘진정한 20세기’를 매장하는 데 이 곡보다 적절한 곡은 없다. 이 곡은 한 시대의 껍데기를 벗겨내고 얻어낸 진정한 ‘해체’의 음악이다.

작곡가는 괴테의 유명한 문장에서 작곡의 힌트를 얻었다고 한다. 그는 그 문장을 베꼈다. ‘아무도 자신을 알 수 없다. 자신에게서 초연해지라.’ 슈트라우스는 젊었을 적 니체에 탐닉했던 것에서 알 수 있듯이 19세기 후반을 휩쓴 개인주의 철학에 평생 경도되었다. 이제 와서 그 흐름에서 발을 빼기에는 너무나 많은 날들이 지나갔다. 세상 사람들은 어느 누구든지 모든 것을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심지어 자기 자신조차도. 이 곡은 불가지不可知, 불식不識에 대한 음악이다.

슈트라우스가 곡을 쓰고 있는 동안 연합군은 독일의 도시들을 무차별 폭격했다. 마치 독일이 그동안 저지른 죄악에 대한 징벌인양, 폭격은 도시들을 이 세상에서 없던 것처럼 만들 기세였다. 가르미슈에 있는 슈트라우스는 그 사실에 초연할 수 없었다. 잿더미가 되어버린 드레스덴을 포함한 도시의 기억들이 이 곡에 녹아들어 있다. 그것은 슈트라우스가 한 때 독일 음악계를 더 좋게 만들어줄 것이라 생각하며 지지했던 인물, 아돌프 히틀러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히틀러는 항상 자신의 최후가 <신들의 황혼>의 장대한 피날레나 <파르지팔>의 초월적인 피날레가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지만, 그의 마지막 순간에 그를 따라간 것은 어쩌면 참혹한 폐허의 음악인 이 <메타모르포젠>인지도 모른다. 이 음악은 무너지는 바빌론 성읍을 휘감고 도는 마지막 비가, 폐허와 파괴를 상징하는 추도사다.

슈트라우스는 곡에 ‘스물 세 개의 현악기를 위한 습작’이라는 부제를 붙였다. 1945년 4월 12일, 곡을 완성한 날 바다 건너 미대륙에서는 프랭클랜 델러노 루즈벨트가 세상을 떠났다. 참 기묘한 일치지만 넘어가도록 하자.

곡은 처음부터 구불구불한 반음계를 지나간다.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짓뭉개진 반음계가 짙은 비애감을 더한다. 화성의 바탕은 슈트라우스 특유의 안정감 있는 화음을 취하지만 그 화음을 지나가는 선율은 이보다 더 불안정할 수 없다. 하강 음형과 대위 선율이 점점 얽히며 중간부를 향해 고통스럽게 나아간다. 중간부에서 곡은 계속해서 위안을 주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매 단계마다 지속적으로 위안의 감정은 스르르 빠져나가고 절망에 가득 찬 주제가 다시 밀려온다. 음악은 점점 고음으로 올라가고, 비올라와 첼로는 수많은 망령에게 붙잡힌 채 마지막 희망을 잡으려 몸부림친다. 마침내 두 악기는 다른 악기들을 떨쳐내고 고음의 G음에서 그 희망을 붙잡는 듯 보인다. 그러나 그 희망은 오히려 죽음의 조성인 C단조, 베토벤이 장송 행진곡에서 사용했던 그 조성으로 악기들을 무자비하게 끌고 들어간다. 사실 C단조는 이곡의 바탕이었으며, 우리는 처음부터 거기서 벗어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슈트라우스는 베토벤을 인용한다. 베토벤의 장송행진곡이 들려오는 것으로 보아 슈트라우스는 자신이 생각하는 위대한 인물을 관대 위에 올려놓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 인물은 누구일까? 그가 순진하게 믿어버린 히틀러일까? 아니면 슈트라우스 자신일까? 아니면 추상적인 인물형일까? 아니면 파괴된 독일의 도시들일까? 장송행진곡 선율은 도무지 해답을 던져주지 않는다. 우리는 제3제국이 오래 전에 끝나버린 신들의 망령을 붙잡고 있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 현장 한복판에서 슈트라우스는 관대 위에 안치된 인물을 보고 있다. 베토벤의 장송행진곡 선율이 점점 흩어지고 슈트라우스의 고통스러운 선율도 점점 흩어진다. 그 과정에서도 목을 조르는 듯한 고통스러운 음향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밑바닥에 도달해서도 곡은 계속 밑으로 떨어진다. 거짓 희망을 상징하던 G음, 그리고 곡의 근원인 C음이다. <짜라투스투라>를 시작하는 C음과 G음을 정반대로 내려가는 것이다. 슈트라우스는 <엘렉트라>를 포함한 많은 곡에서 <짜라투스투라>를 연상케 하는 화성과 멜로디를 사용했지만, 그 곡을 원초적인 상태로 되돌려놓은 적은 없었다. 사물을 원형으로 ‘해체’하면서 곡을 끝내는 것이다.

카라얀은 이 곡의 공식 스튜디오 녹음을 세 개 남겼다. 빈 필과 함께한 47년 EMI 녹음은 패전 직후 카라얀의 절박한 심경을 그대로 반영한 음반이지만, 역시 베를린 필과 녹음한 DG의 69년 음반을 빼놓고는 이 곡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 몽롱한 음향 속에서 연주자는 무너져버린 45년의 폐허를 생각하는 것처럼 보인다. 카라얀은 곡에서 해체나 철학에 대해서는 별반 생각하지 않는다. 그가 이 곡을 통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바빌론의 폐허, “무너졌다! 바빌론 성읍이 무너졌다! 자기 음행 때문에 분노의 포도주를 모든 민족에게 마시게 한 바빌론이 무너졌다!(묵시록 14:8)”라고 외치는, 고통스러운 묵시록적 기억이다. 우리는 연주에 대해 도덕적인 판단을 내리기 힘듦을 잘 알고 있다. 카라얀의 목표는 바빌론의 폐허를 우리 눈앞에 생생하게 보여주는 것, 그리고 그 색채를 뼈저리게 재현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이상한 아름다움이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순수한 음향만으로 타인을 압도할 수 있는 유일한 지휘자가 들려주는 이 레코딩에서는 신성한 광기마저 느껴진다.

시노폴리와 드레스덴의 94년 DG 레코딩은 카라얀에 비해 무겁고 둔중해 보인다. 무게추를 저현인 첼로에 두어 색채가 좀 더 칙칙하고 어둡다. 곡에 대해 보편적으로 가질 수 있는 인상을 짚어내는 카라얀과는 달리 시노폴리는 주관적이고 내면적이다. 내면은 격정적으로 요동치고 있는데 외면은 별반 움직임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갑작스러운 외면의 변화는 처음 듣는 사람에게는 뜬금없이 들릴 수 있겠지만 그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납득이 간다. 하지만 그것은 주관적이기에 공통적인 결론을 내릴 수 없다. 결국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셈이다. 시노폴리는 우리에게 그 어떤 것으로도 이해할 수 없는 불가지가 있음을 넌지시 암시한다.

사물을 ‘해체’한다는 관점에서 볼 때 파비오 루이지와 드레스덴의 07년 소니 레코딩과 비교할 대상은 찾기 힘들다. 루이지는 무거운 느낌의 시노폴리에 비해 훨씬 가볍고 산뜻한 음향을 들려주며, 악기의 음향을 넓게 퍼뜨려 몽롱한 상태로 끌고 가는 카라얀과는 달리 개개의 악기군이 하나처럼 들리는 선명한 음향으로 일관한다. 그런데 그 선명하고 산뜻한 음향은 아름다움이 아니라 오히려 해체의 미학을 설파하는 것 같다. 포정해우庖丁解牛라는 말이 있다. 포정이라는 도축업자가 소를 해체하는 것이 아주 자연스러워 살점을 전혀 상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루이지는 이 곡을 너무도 자연스럽게 해체해 듣는 사람이 저절로 감탄하게 된다. 그러나 곡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필수적인 비감은 조금 부족하다는 비판도 성립할 수 있다. 감동을 받기 위한 연주가 아니라 감탄하기 위한 연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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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뷔시 / 판화

음악 2013. 7. 23. 21:31

<판화> (Estamps pour piano, L.100)

작곡 시기 : 1903년 7월 완성

초연 : 1904년 1월 9일 파리 국립음악홀에서 리카르도 비네스의 연주로 초연

<피아노를 위하여> 모음곡을 1901년에 완성한 후, 드뷔시는 좀 더 깊은 방향으로 나아가기로 작정했다. 그는 자신에게 형식적인 구체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을 이미 간파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방향을 바꾸려 하지 않았다. 지금까지의 형식이 자신의 몸에 맞지 않는다면, 자신의 몸에 맞는 새로운 옷(형식)을 짜면 된다. 그는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는 바로크 모음곡 형식으로 눈을 돌려 <피아노를 위하여>를 완성했다. 이 모음곡은 나름대로 가치가 있지만 드뷔시의 음악적 성향은 역시 구체적인 형식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렇다면 그에게는 무엇이 필요했을까. 바로 음색과 선율을 자유로이 변환하는 도구가 되어줄 영상이었다. 음악은 전통적인 화성법이나 대위법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작곡가의 상상력에 의해 움직인다.

 그러나 드뷔시가 충동적인 작곡가라는 오해는 하지 말아주길 바란다. 선법적인 색채의 사용과 리듬상의 대위법 사용에서 드뷔시보다 더 섬세한 기술을 제시할 수 있는 작곡가는 없었다. 드뷔시가 자신의 음악적 기술을 활용하게 위해 불러들인 영상은 동양 사원의 불탑, 그라나다의 예측 불가능한 저녁, 그리고 비가 내리는 정원이었다. 이것들은 최소 1~2년에서 최대 10년 전에 작곡가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영상이었다. 그가 오랜 시간 고민한 까닭은 수많은 과거와 현재의 영상 중 어떤 것이 가장 적절한 것인지를 머릿속으로 추려내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1곡 <탑> (1.Pagodes)

 음향의 순수한 공명이라는 점에서 <판화>의 <탑>보다 더 앞서나간 곡은 없다. 이 곡과 비교할만한 이후의 곡들, 가령 <영상> 1집의 <물에 비친 그림자>나 2집의 <잎새를 스치는 종소리>는 이 곡보다 더 노련하기는 할지언정 이처럼 순수한 음향을 확고하게 드러내지는 못한다.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드뷔시의 귀와 눈을 사로잡았던 가믈란 음악은 비로소 여기서 그 진가를 발휘한다. 그러나 이 음악은 가믈란 음계를 차용한 오리엔탈리즘 음악에서 이탈한다. 이 곡은 공과 종과 사람들이 몰려 있는 시정市井의 소리가 어울려 만들어낸 대위법적 음악이다. 작곡가의 주장은 이 사실에 못을 박는다. "팔레스트리나의 대위법조차 자바 음악에서 발견되는 것과 비교하면 어린애 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이 주장은 또 다른 한 가지 사실도 암시하는데, 드뷔시는 자바 음악에서 발견할 수 있는 비평균율적이고 비선율적인 음악을 통해 종래의 선율적 대위법과는 다른, 리듬상의 대위법을 구상했다는 사실이다.

 드뷔시가 서구의 작곡가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한 가지 사실은 그가 이 곡에서 긴장감의 고조와 클라이맥스를 구축했다는 것이리라. 하지만 B와 F#의 드로운 베이스로 시작하는 이 곡에서 종래의 소나타 형식은 자취를 감춘다. 드뷔시가 "똘똘한 어린애들을 위한 것"이라며 경멸한 으뜸화음이나 딸림화음 같은 화성적 구조도 찾아볼 수 없다. 서구인들에게 낯선 정취를 불러들이겠지만, 우리에게는 전혀 낯설지 않은 주제(G-C-D)의 반복에서 첫 번째 5음음계가 나타난다. C-D-F-G-A다. 곧이어 두 번째 5음 음계가 나타난다. D-C-B-A-G의 하행 5음음계다. 11마디부터 아르페지오의 부분적 리듬이 점차 증가하며 세 번째 5음 음계가 나타난다. B-G-F-D-C다. 5음 음계에 의한 주제가 발전하는가 싶더니 어느새 두 성부가 반진행한다. 선율적인 반진행뿐 아니라 리듬적으로도 반진행을 이룬다. 31마디에서 마침내 마지막 5음음계가 나타난다. G-B-C-D-E다. 이어 두 개의 5음음계 주제가 동시에 진행한다. 첫 주제가 꺾이며 반주에 머무는 동안 두 번째 주제는 그 음향을 극대화한다. 이어 주제들을 재현하면서 곡은 포르테의 정점에 이른다. 하지만 도무지 진행 방향을 확인할 수 없다. 드뷔시가 이 곡을 하는 일은 탑을 보여주는 것이지 탑의 어느 부분이 위대하고 어느 부분이 장엄한지를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색채는 눈이 부실 듯 일렁이지만 형태는 흐릿하고 뭉개져 있다. 곡을 처음부터 끝까지 일정한 위치에 멈춰세우는 고정된 주제는 음악적 방향성을 해체해버린다.

드뷔시는 이 곡에서 주저함 없이 포르테를 사용하고 있으며, 중간 페달과 오른 페달의 사용은 거의 필수적이라고 해야 한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 곡에서 크게 요구하는 것은 바로 선명한 음향과 정확한 리듬이다.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과는 달리, 불투명한 음향과 루바토는 오히려 이 곡을 크게 해칠 것이다. 선명한 음향을 위한 충분한 음량도 필요하다.

 

 2곡 <그라나다의 밤> (2.La soiree dans Grenade)

 본인도 스페인의 위대한 작곡가였던 마누엘 데 파야가 스페인을 표현한 가장 뛰어난 피아노곡으로 바로 이 <그라나다의 밤>을 꼽았다는 사실은 재미있다. 파야는 '안달루시아의 분위기를 이 곡보다 더 잘 표현한 것은 없다'며 이 독특한 분위기의 피아노곡을 격찬했다. 그러나 정작 드뷔시는 스페인에 가본 적이 한 번도 없으며, 다만 삽화를 통해 스페인의 풍경을 접했을 뿐이다. 게다가 그는 곡에 스페인 음악을 하나도 쓰지 않았다. 그는 분위기와 미세한 음의 조직으로 스페인의 본질을 잡아냈다.

 어떻게 잡아냈을까? 드뷔시는 스페인 음악가들의 복잡하면서도 느릿한 선율과 하바네라 리듬 사용, 그리고 둘째 박의 독특한 리듬 처리를 간파했다. 그는 스페인 음악을 차용하는 대신 스페인 음악가가 되어 스페인 음악보다 더 스페인 음악다운 음악을 만들어낸 것이다. 이 곡에서 수시로 등장하는 하바네라 음악을 사용하는 데 있어서도 그는 한결같이 변덕스럽다. 갑자기 빨라졌다가 느려진다. 이것도 스페인 음악의 본질을 정확하게 간파한 드뷔시의 통찰력이 빛을 발한 부분이다.

 C페달 포인트가 지중해 너머 탕헤르를 바라보는 그라나다의 전경과 거친 주위 풍경을 그리고, 오른손 옥타브는 한 옥타브씩 올라가며 관능적인 바다 너머의 음계를 불러들인다. 이것이 첫 주제다. 느릿한 하바네라 리듬 너머로 악사의 기타 연주가 들린다. 음계는 7음음계에서 온음음계로 변하며 루바토 지시에 따라 새로운 동기가 나타난다. 곧 하바네라 리듬의 열기와 함께 곡은 A장조의 두 번째 주제로 들어간다. 경과구에 이어 다시 하바네라 리듬에 따라 두 번째 주제군이 등장한다. 음악은 점점 복잡해진다. 이어 곡은 경과구를 재현하고, 하바네라 리듬은 점점 멀어진다. 그런데 갑자기 캐스터네츠의 빠른 리듬이 곡을 흔들어 놓는다. 이어 북아프리카 풍의 첫 주제를 다시 재현하며 곡은 밤의 흐릿한 풍경과 관능적인 향기 속으로 서서히 사라진다.

 

3곡 <비 오는 정원> (3.Jardins sous la pluie)

 아시아와 스페인이라는 부루마블 음악적 지도의 탐색을 끝마친 드뷔시의 최종 목적지는 자신의 나라인 프랑스다. 드뷔시는 마지막 곡의 소재로 프랑스의 유명한 돌림노래를 선택했다. 아이들은 놀이를 방해하는 폭풍우를 피해 집으로 들어가 어머니의 자장가를 듣는다. 하지만 폭풍우는 아이들이 잠들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그리고 어머니의 노래는 아이들에게 평온함을 가져다준다. 마침내 폭풍우가 그치고 햇살이 나뭇잎 위의 물방울을 비출 때, 아이들은 다시 해방되어 마음껏 뛰어놀기 위해 밖으로 나간다.

 시작 부분의 단조 선법과 급박한 리듬은 폭우가 쏟아지는 바깥 풍경을 묘사한다. 단조의 경과구가 나타나기도 하지만 주된 음계는 단조 선법이다. 56마디의 경과구부터 온음음계가 나타나고 곧이어 반음계도 나타나 극적인 대비를 이룬다. G음의 트릴이 따라붙는다. 경과구를 지나 곡은 부드러운 두 번째 주제에 돌입한다. 하지만 이 주제도 첫 번째 주제의 복귀에 의해 방해를 받는다. 이어 경과구가 다시 등장하고, 다시 첫 번째 주제가 B단조로 나타난다. 이어 경과구가 폭발하며 감7화음으로 하강하는데, 이 하강 음계는 5음음계와 매우 유사하다. 다시 두 번째 주제가 단편으로, 곧 주제 전체로 나타나다가 베이스에서 첫째 주제가 나타난다. 서로 평행선을 달리던 두 주제의 길고 복잡한 흐름은 B장조의 트릴로 시작하는 코다 속으로 빨려들어간다. 비가 그치고, 햇살은 밝게 빛나고, 정원의 풀들은 싱그러운 물방울을 머리에 얹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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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뷔시에게 처음으로 죽음의 선고가 내려진 해는, 기묘하게도 현대 유럽 세계가 죽음의 선고를 최초로 통고받은 해와 일치한다. 벨 에포크 시대를 감싸고 있던 신사적인 분위기는 1차 세계대전의 참호 속에서 비참하게 죽어 썩어갔다. "비행기의 시대에는 그에 어울리는 음악이 필요하다. 아무도 그것을 쓰지 않으니 내가 그것을 써야겠다"라고 시종일관 자신만만해 했던 드뷔시도, 대장 속의 용종이 하루가 다르게 자신을 갉아먹는 것을 느끼면서 비로소 죽음에 대해 깊게 생각한 것은 아닐까.

 1912년의 드뷔시는 현대음악의 첨단을 달리고 있었다. 1권에 비해 더욱 농밀하고 미묘한 전주곡 2권을 출판하고, 동성애적인 함의가 숨겨져 있기는 하지만(물론 이것은 대본을 쓴 단눈치오에게 혐의를 물어야 한다) 충분히 작곡가의 이름값에 걸맞는 신비극 <성 세바스티아누스의 순교>를 완성했으며, 음세포를 극단적으로 쪼개 마치 쉼없이 형식이 유동하는 것 같은 발레용 관현악곡 <유희>를 쓰고 있었다. <유희>는 오랜 세월 자신의 가치를 알아볼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다가 1950년대에 이르러 비로소 드뷔시의 가장 뛰어난 업적 중 하나로 인정받았다. 1912년의 드뷔시는 음악적으로 성취할 수 있는 것을 거의 다 성취한 상태였다.

 그리고 <유희>의 완성 이후로 드뷔시의 작품활동은 침체기에 접어든다. 느리게 작곡하지만 큰 침체기 없이 꾸준히 성취를 거둔 작곡가치고는 이상할 정도의 침체였다. 독주 플루트를 위한 <시링크스>와 우울한 독주곡 <영웅의 자장가>, 그리고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몇 개의 소품을 제외하면, 1912년 이후의 그는 이렇다 할 작품을 남기지 못했다. 낯빛은 점점 검게 변해갔다.

 대장암 수술을 마치고 의사로부터 작곡 활동을 재개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은 드뷔시는 1년 간의 침묵 끝에 작곡을 재개했다. 그 전인 1914년 여름에 유럽은 전화에 휘말렸다. 드뷔시의 가까운 지인들도 전쟁에 참가했고, 대부분이 참호에서 살아돌아오지 못했다. 드뷔시와 절친한 관계였던 출판업자 뒤랑의 조카인 자크 샤를로도 전장에서 불귀의 객이 되었다. 드뷔시는 참혹한 전쟁에 눈을 뜨면서 프랑스 민족주의자가 되었다. 그는 자신의 작품에 '프랑스 작곡가 클로드 드뷔시'라고 서명했다. 그가 작곡을 재개한 후 처음으로 완성한,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백과 흑으로>는 엄숙한 감정이 시종 차가운 분노를 감싸고 있는 걸작이다. 툭툭 튀어나오는 거칠고 날카로운 동기를 부드러운 온음음계가 감싸고 있다. 샤를로에게 헌정한 중간 악장에서 드뷔시는 드물게 루터 코랄을 인용했다. <내 주는 강한 성이요>. 평생 종교에 초연한 입장을 보였던 그로서는 드물게 종교적인 숭고함이 느껴지는 이 곡에서 그는 죽은 자에 대한 진심어린 기도를 올리고 있다. 중간부에서 감정은 회오리치며 산 자의 가슴을 강하게 찌른다. 그러나 곧 부드러운 온음음계가 나타나 그 분노의 감정을 감싸안는다. 마침내 죽은 자의 혼은 평온을 얻고 애도 속에서 빛을 따라간다.

 그러나 드뷔시는 동시에 <백과 흑으로>와는 전혀 다른, 이전에는 한번도 생각하지 않았던 음악을 쓰고 있었다. 그가 평생을 바쳐 애정을 표현했지만 동시에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었던 프랑스의 고전, 라모와 쿠프랭이라는 프랑스 바로크의 거장들을 다시 살펴보기 시작한 것이다. 두 거장의 화려하면서도 유연한 프랑스 기악곡 전통을 통해 드뷔시는 자신이 그렇게도 무시했던 소나타로의 귀환을 시도한다. 물론 드뷔시의 실내악 소나타는 프랑스 바로크적이지도 않고, 독일적이지도 않으며, 소나타 악장이라 불릴만한 것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소나타'라는 이름을 붙인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는 드뷔시가 만년에 계획한 여섯 곡의 실내악곡 중 첫 곡이다. 프롤로그에서 피아노가 느릿하게 딸림화음으로 첼로의 등장을 유도하면, 첼로는 유연하게 피아노와 대화를 주고받는다. 드뷔시 특유의 유연함은 여전하지만 프랑스 기악 전통이 단단하게 뿌리를 박도록 돕는다. 프롤로그의 느릿한 슬픔은 첼로가 기타 주법을 차용한 세레나데에서 죽음의 무곡으로 변한다. 피날레에서 두 악기는 빠른 속도로 끝을 향해 미끄러지듯 달려가는데, 스타카토와 피치카토로 끝맺는 코다는 텅 빈 느낌을 던져준다. 마지막 음이 사라지는 느낌을 그보다 더 강렬하게 전달하는 것은 힘들다.

 첼로 소나타에 이어 드뷔시가 완성한 열두 개의 피아노 연습곡은 후기의 다른 작품보다는 오히려 두 권의 전주곡에서 연관성을 찾아야 할 것이다. 드뷔시가 피아노 음악을 쓰면서 가장 많이 영향을 받았다고 알려진 두 사람, 프랑수아 쿠프랭과 프레데리크 쇼팽 중 누구에게 헌정할까 하고 고민한 이 연습곡은 결국 쇼팽에게 바치는 헌정사가 적힌 채로 출판이 이루어졌다. 드뷔시는 피아노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을 분할해서 크게 두 가지로 나누었다. 기교적인 문제들을 주로 다루는 여섯 곡은 첫 번째 파트에 실렸고, 음악적인 문제들을 주로 다루는 다른 여섯 곡은 두 번째 파트에 실렸다. 체르니의 지리한 어린이용 손가락 연습곡으로 출발하는 첫 번째 곡 <다섯 손가락을 위한>은 <어린이의 세계> 속 <그라두스 아드 파르나숨 박사>를 떠올리게 한다. <3도를 위한>은 전주곡의 <교차하는 3도>를 보충하고 있다. <4도를 위한>은 드뷔시가 화성적 금기를 깨는 데 자주 사용한 4도의 진행을 다루고 있다. <6도를 위한>은 작곡가 본인이 직접 언급했듯이 '전혀 추하지 않다.' <옥타브를 위한>은 왈츠 양식으로 장식한, 화성을 위한 곡이다. <여덟 개의 손가락을 위한>은 첫 곡을 확대해 재구성한 곡이다. <반음계를 위한>은 낡아빠진 반음계를 풍자하면서 거기서 새로운 흐름을 도출한다. 가장 늦게 완성한 <꾸밈음을 위한>은 뱃노래 풍을 취하고 있지만 C.P.E. 바흐가 설정한 꾸밈음에 대한 원칙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만드는 곡이다. <반복음을 위한>은 프랑스 클라브생 음악을 20세기로 옮겨놓은 것 같으면서도 조성적 질서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져 있다. <대비음을 위한>은 색채에 대한 드뷔시의 집념에 가까운 연구가 집약된 곡으로, 전곡을 통틀어 가장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작곡된) 아르페지오를 위한>은 달콤한 선율 속에서 음의 색채를 발산하고 있다. 마지막 <화음을 위한>은 순발력과 탄력이 넘치며 폭넓은 다이나믹을 요구한다.   

 이 작곡가에게 이런 곡을 작곡할 수 있는 힘이 아직 남아 있었단 말인가? 그는 병고에 시달리는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생동감 넘치는 곡을 썼다. 12개의 연습곡이야말로 드뷔시의 만년 음악 중 가장 이질적인 음악인 동시에, 가장 큰 성과라고 해야 할 것이다.

 연습곡을 완성한 후, 드뷔시는 바로크 작곡가가 아니라면 추구하지 않을 기묘한 편성의 실내악곡을 완성했다. 그 중 두 악기는 드뷔시가 편애하던 악기였지만, 비올라를 넣은 것은 기이한 일이다. 플루트와 비올라와 하프를 위해 작곡한 트리오 소나타는 그렇게 만년의 드뷔시가 작곡한 두 번째 실내악곡이 되었다. 익숙한 편성은 아니지만, 곡을 들으면 작곡가가 무엇을 추구했는지 이해할 수 있다. 플루트의 맑고 청량한 소리에 비올라의 퉁명스러운 유니슨이 끼어든다. 회고적인 느낌을 자아내는 하프는 자신의 가장 큰 장점인 아르페지오를 가지고 농밀한 색채로 가득한 그림에 마지막 방점을 찍는다. 첫 악장인 전원곡(제목 자체가 프랑스 바로크의 기악곡과 성악곡을 통틀어 단골손님인 전원곡 또는 전원극을 환기시킨다)에서 이 특징이 강하게 드러난다면, 간주곡은 좀 더 미묘하고 피날레는 색다른 주법을 요구한다.

 전쟁이 막바지로 치달으면서 참호전은 점점 더 끔찍한 양상을 띄기 시작했다. 탱크가 전략적인 목적으로 처음 등장하고 독가스가 살포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프랑스 젊은이들 셋 중 하나를 소멸시킨 전장은 이제 드뷔시가 사는 파리에서 불과 150km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전쟁이 4년째로 접어든 1917년, 드뷔시는 또다시 실내악곡에 손을 댔다. 이번에는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였다. 이것이 완성되면 그가 계획한 여섯 곡의 실내악곡 중 세 번째 실내악곡이 될 터였다. 원래 드뷔시는 오보에와 호른, 클라브생을 위한 소나타를 쓸 계획이었으나 도중에 계획을 바꾸어 이 바이올린 소나타를 완성했다. 그가 계획을 바꾼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다. 작곡은 1917년 2월에 끝이 났지만, 3악장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손질을 단행하여 4월 14일에 최종적으로 정서를 마쳤다.

 알레그로 비보의 첫 악장은 세 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첫 부분은 피아노가 두 개의 화음을 연주한 후 바이올린이 G단조 화성을 풀어 제시하면서 시작한다. 여전히 우아한 몸짓을 취하지만 그 몸짓에는 힘이 빠져 있다. 아니, 힘은 들어가 있지만 몸이 그 힘을 받쳐주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 환상곡풍의 간주곡 악장은 바이올린의 16분음표가 곧 오스티나토가 되어 곡을 끌고 간다. 두 악기가 하나의 리듬에 매달려 같이 춤을 춘다. 마지막 악장은 앞의 두 악장의 분위기를 쇄신하듯 쾌활함과 약간의 짓궃음을 동원하여 막을 내린다. 이 실내악곡을 쓰고 있을 당시, 드뷔시는 스트라빈스키에게 이런 말을 했다. "정전正典이 침묵하면 새로운 아름다움이 대기를 채워야 한다." 드뷔시가 쓴 것은 아마 옛 전통의 표피를 입은 새로운 아름다움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작곡가의 계획에 따르면, 그는 아직 세 곡의 실내악곡을 더 작곡해야 했다. 그러나 그것을 완성하는 것은 더 이상 작곡가의 몫이 아니었다. 1917년 5월에 바이올린 소나타를 초연한 것은 작곡가의 마지막 불꽃이었다. 

 1918년 3월, 독일군은 대공세를 취하여 파리 근교 100km까지 치고 들어왔다. 독일군의 대포는 파리 시내를 맹폭격했다. 폭격기들이 하늘에서 파리에 폭탄을 퍼부었다. 아수라장 속에서 어떤 사람들은 경고를 외쳤고, 어떤 사람들은 폭탄의 희생자들을 운구하거나 후송했고, 어떤 사람들은 애국적인 노래를 불러제꼈다. 폭격이 소강상태에 접어들 때마다 사람들은 창문 밖으로 "프랑스 만세!"를 외쳤다. 드뷔시는 자신의 고향 파리에 폭탄이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56세의 생애를 마쳤고, 그의 죽음은 전쟁에 휘말려 거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드뷔시의 죽음은 일견 자신의 고향 히포레기우스가 함락되는 가운데 숨을 거둔 아우구스티누스의 죽음과 비슷해 보인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의 유해는 비록 피난민들에게 운구되었을지언정 많은 사람들이 함께한 반면, 포탄이 떨어지는 파리 시내에서 드뷔시의 관을 운구해 장례식장까지 따라간 조문객은 불과 20여명에 지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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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바그너 이전의 음악과 바그너의 음악이 어떻게 다른가에 대해 거의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바그너가 음악에 어떤 혁신을 가져왔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이해한다고 말할지라도 거의 피상적인 것만을 읊조릴 뿐이다. 바그너가 음악에 혁신을 가져왔다는 사실을 망각하게 만드는 첫 번째 이유는 그가 그 혁신의 결과물을 충분히 누리고 살다 갈 정도로 오래 살았기 때문이다. 두 번째 이유는 그의 음악체계가 하나의 스타일로 자리 잡을 정도로 확고한 동시에 무수한 추종자들을 낳을 정도로 흡인력이 강했기 때문이다(그 추종자 중에 아돌프 히틀러가 있었다는 사실은 바그너의 비극인 동시에 음악 전체에 있어 크나큰 비극이다). 분명 만년의 영광과 추종자들의 숲은 그의 음악성을 바로 보는 데 있어 큰 장애가 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바그너의 음악이 치명적인 상처를 입은 것은 아니었다. 바그너의 음악에 가장 치명적인 상처를 입힌 일은 1933년 이후에 찾아왔으며, 12년 동안 그의 음악에는 지울 수 없는 낙인이 찍혔다. 생전의 그는 그런 일이 벌어질 것을 예상하고 자신의 음악이 그런 식으로 악용되는 것에 대해 경계했지만, 죽은 후의 일을 막을 수 있는 능력은 없었다.

많은 작곡가들이 한 번 이상은 바그너를 참고하고 그의 음악의 영향을 받았지만, 바그너 자신의 음악은 자신을 흡수한 작곡가들과 완벽한 차이를 보인다. 똑같은 반음계법을 사용하고 똑같은 이명동음정을 사용해도 바그너의 음악은 항상 다른 음악과 다른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는 무엇보다 음악적 동기의 발전에서 여타의 작곡가들을 능가하는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한정된 라이트모티프와 운용이 좁은 세계관을 가지고도 하나의 거대한 세계를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바그너가 가져온 혁신은 무엇일까? 물론 트리스탄 코드로 대표되는 반음계법과 라이트모티프에 의한 전개를 들 수 있다. 하지만 슈베르트와 쇼팽의 음악도 충분히 조성의 기초를 뒤흔들 정도로 대담한 반음계법을 구사하고 있으며, 주제의 유기적인 전개라는 관점에서 베토벤의 후기 음악은 놀라울 정도의 성취를 구축했다. 그렇다면 바그너가 이전의 음악가들과 다른 혁신은 어떻게 구축된 것일까?

바그너의 음악에서 화성은 더 이상 조속한 해결을 요구하지 않는다. 딸림화음은 또 다른 딸림화음으로 대체되고, 그 딸림화음을 또 다른 딸림화음이 대체한다. 해결은 이루어지지만, 아주 늦게 등장한다. 과거에는 비상사태로 여겨졌던 것을 바그너는 정상 상태로 간주한 것이다. 과격하다고 여겨졌던 흐름이 오래도록 지속되면 어느 누구도 그것을 과격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법이다. 작곡가는 그 사이에 화성의 법칙들을 충분히 망가뜨려 놓는다. 해결은 상대적인 시간의 차이지만, 아주 늦게 이루어지는 해결은 ‘영원히 해결이 이루어지지 않아도 된다’라는 사고방식을 불러왔다. 바그너가 죽은 지 불과 6년 후에 말러와 슈트라우스는 교향곡 1번과 <돈 후안>으로 이 경향을 개인적인 음악의 공간으로 불러왔으며, 이것은 머지않아 찾아올 쇤베르크의 화성 혁명을 예고하고 있었다.

바그너의 동기 발전 수법은 대담한 동시에 섬세하다. 우리는 주로 바그너의 대담성과 무자비한 금관의 포효에 대해 생각하지만, 바그너는 동시에 섬세한 세밀화가로서의 재능을 갖추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토록 장면 하나하나를 생생하게 살려내고, 인물들에게 뚜렷한 성격의 차이를 부여하는 작곡가는 매우 드물었다. 그는 과거를 바라보는 인물부터 맹목에 사로잡힌 인물까지 모든 인물을 그려낼 줄 알았고, 한 인물에게 여러 속성을 부여하는 것을 즐겼다. 한 사람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대조적인 두 성격을 머릿속에 집어넣는 작업은 결코 쉽지 않지만 그는 그 일을 나름대로 멋지게 해냈다. 우리는 쿤드리의 내면에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 자라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한 세기 전의 라모가 그랬던 것처럼, 바그너 또한 진보주의자와 반동주의자의 속성을 모두 갖추고 있었다. 그는 스스로 베토벤을 존경한다고 했으며 동시에 그것을 글로 표현했지만, 그는 그가 생각하는 것보다 베토벤에게서 훨씬 멀리 떨어져 있다. 그는 자신의 모순된 인격을 음악에 전혀 반영하지 않았고, 그렇기 때문에 그의 음악극은 자신의 성향과 동떨어진 도덕을 노래한다. 그러나 음악의 구조만으로도 그의 음악극은 충분히 혁신적이다. 스크리아빈 정도만이 그와 비교가 가능할 것이다.

바그너가 바라보았던 ‘기능화성의 황혼’은 이제 시대에 뒤처지는가? 그럴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대답하기 전에, 모든 시대의 음악은 언제나 한 번씩 낡은 것으로 치부된 적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음악이 한 번씩 망각의 모래톱 속에 파묻혔다가 누군가의 손에 의해 다시 구원을 받을 때, 시간의 흐름에 상관없이 그 음악은 빛을 발한다. 비록 거기에 이끼가 끼고 테두리가 닳아 둥글어졌다 할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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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 (Sonata for Solo Violin, Sz.117)

작곡 시기 : 1944년 완성

바르토크는 바이올리니스트 예후디 메뉴인의 위촉에 답할 작품으로 바이올린 독주곡을 썼다. 피아노가 딸린 바이올린 소나타가 아니라, 바흐의 음악을 생각나게 하는 독주 바이올린 소나타였다.

사실 바이올린 독주곡은 만들기 여간 까다로운 곡이 아니다. 바이올린은 저음역이 없고, 그 때문에 폭넓은 음역을 활용할 수 없다. 잘못 만들어진 바이올린 곡은 깽깽이마냥 끽끽거리는 소리밖에 내지 못한다(일부러 그런 음향을 활용한 작곡가도 적지 않지만 그 음향을 남용하는 작곡가는 아직까지 보지 못했다). 4개 현의 특성을 잘 살리는 음악 만들기도 어렵다. 피치카토를 빼면 동시에 두 개의 이상의 음을 연주할 수 없기 때문에 3중/4중 스톱에서 음들을 분리시켜야 하므로 다성음악도 화성음악도 표현하기가 쉽지 않다. 이 난제들을 뚫고 바이올린 독주곡을 만든 작곡가는 그리 많지 않으며, 바흐의 여섯 곡을 비롯해 바르토크와 힌데미트, 루토스와프스키 정도가 유명할 뿐이다(파가니니의 카프리스는 음악을 떠나 순수하게 기교적인 곡이므로 넘어가도록 하자).

바르토크는 그 난점들을 넘어 새로운 것도 시도했다. 그는 미분음을 딱 세 곡의 음악에서 실험했는데, 작곡 순서대로 나열하자면 바이올린 협주곡 2번(Sz.112), 현악 4중주 6번(Sz.114), 그리고 이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다. 물론 바흐에 대한 경의로 이 작품을 만들었을 것이며 소재에서도 바흐의 냄새가 나지만, 곡은 온전히 바르토크의 작품이다. 곡을 완성했을 때, 바르토크에게는 18개월의 생이 남아 있었다. 그는 1944년 11월 26일에 뉴욕에서 메뉴인이 이 곡을 초연하는 것을 들을 수 있었지만, 이 곡은 그의 처음이자 마지막 현악 독주곡이 되었다.

 

1악장 <샤콘느 템포> (1.Tempo di ciaccona)

헐시 스티븐스는 이 곡이 샤콘느 악장이 아니라 샤콘느 성격의 소나타 악장으로 보고 있다. 이것은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 Op.83의 첫 악장을 보고 사람들이 범하는 실수와 비슷한데, 브람스의 곡은 리트로넬로 형식을 취한 소나타 형식이지 리트로넬로 형식이 아니다. 전체 150마디 중 52마디가 제시부, 38마디가 발전부, 47마디가 재현부, 나머지 14마디가 코다이다. 중심음은 G이며, 처음에 곡은 단조로 시작했다가 마지막에 장조로 바뀌는데, 작곡가는 이 악장에서 반음계법을 자유롭게 구사한다. 음정적으로는 2도, 4도, 7도에 크게 의존하는데, 이것은 마자르 민속음악의 성질과 연관이 있다.

 

2악장 <푸가> (2.Fuga)

푸가 주제는 좁은 반음계(B에서 F# 사이)의 음정들을 사용하며, 매우 자유롭다. 제시부는 4성이며 C-G-C-G 순으로 도입이 이루어지지만, 푸가는 3성이며 변주적 원리는 물론 각종 대위법을 구사한다. 첫 번째 응답을 제외하면 주제의 형태가 변형을 시작하므로 점점 엄격한 대위적인 원칙에서 벗어나는데, 그 때문에 이 곡은 푸가적 환상곡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3악장 <멜로디아> (3.Melodia)

멜로디아는 반음계적인 진행이 주조음을 이룬다. 형식은 단순한 A-B-A 형을 취하지만, 세 번째 부분을 교묘하게 변형시켜 원래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변한다. 악보를 보지 않고서는 첫 부분과 마지막 부분 사이의 연관성을 알기 힘들다. A부분의 주제는 2도와 4도를 많이 사용하며 이 주제를 반음계적으로 굴절시켜 사용한다. 중간 부분에서 현악기는 시종 약음기를 달고 연주한다. 사실 바르토크는 이 악장에 관해 메뉴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악장 전체를 약음기를 달고 연주할 것을 권하기도 했다. 물론 약음기를 달지 않고 연주하는 것에 대해서도 질문했지만.

 

4악장 프레스토 (4.Presto)

첫 부분은 현악 4중주 4번의 2악장과 연관이 있다. 두 번째 부분은 프리지아 선법의 민요적 선율로 헤미올라의 느낌을 갖는데, 교대로 나오는 3/4-3/8박자 패턴을 작곡가는 3/8 박자 기보로 써 두었다. 나머지 부분은 주로 멜로디인데, 이 세 부분은 코다에서 결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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