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놓고 한 달이 지나서야 글을 쓰게 되는군요.

 

끝판왕의 위엄.jpg

 

 보통 나는 음반에 대해 이야기할 때 공적인 입장과 사견은 다르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가령 나는 불레즈의 쇤베르크가 매우 뛰어난 연주들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내가 좋아하는 쇤베르크 순위에서 불레즈는 미트로풀로스(왠 밑이냐고 생각하실 분들도 있겠지만, 나는 밑이 연주한 쇤베르크 관현악을 위한 변주곡 Op.31보다 이 곡을 재미있게 요리한 연주를 들어본 일이 없다. 밑은 그 통제가 가능한가 싶은 속도에서도 세 번의 클라이맥스와 200마디가 넘는 코다를 전혀 지루하지 않게 연주한다. 세부적인 카논이 암시에만 그친다는 사소한 결점을 무시한다면, 기가 막히게 재미있는 쇤베르크를 들을 수 있다), 카라얀(단연 가장 과소평가받는 Op.31의 연주 중 하나. 다만 5변주가 조금 아쉽다), 그리고 시노폴리(시노폴리의 12음 음악은 전혀 정신분열적이지 않다)보다 밀린다. 불레즈의 쇤베르크가 뛰어나지 않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다만 쇤베르크라는 레퍼토리는 불레즈가 연주하기에는 너무 '낭만적'인 레퍼토리가 아닌가 하는 사견이 있기 때문이다(차라리 불레즈는 드뷔시나 베베른을 더 잘 하는 것 같다). 쇤베르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성부 간의 우선순위를 두는 것이지 모든 성부를 동등하게 다루는 것이 아니다. 불레즈는 후자에 더 능한 사람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다른 쇤베르크들을 불레즈의 쇤베르크보다 더 자주 듣는다.

 하지만 이 음반은 나의 공적인 입장과 사견이 정확하게 일치할 매우 드문 사례가 될 것이다. 나는 이 연주를 능가할 드뷔시 피아노곡집이 나올지에 대해 굉장히 회의적이며 실제로도 이 연주를 무척이나 좋아한다. 아니, 좋아하는 정도가 아니라 이런 연주는 단연코 바닷가의 모래알만큼이나 많은 드뷔시 피아노곡 연주사에서 제왕의 자리를 차지하는 데 전혀 부족함이 없다. 이런 연주를 듣지 않고 드뷔시를 평가하는 것은 부질 없는 짓이다.

 드뷔시의 피아노곡은 연주가들에게 두 가지 모순점을 부여한다. 하나는 터치와 루바토와 페달링을 활용해서 뛰어난 음색을 만들어야 한다는 점이고, 나머지 하나는 그러면서도 섬세하다 못해 지나칠 정도로 예민한 프레이즈 단위를 절도 있게 지켜야 한다는 점이다. 두 가지 모두 중요하지만, 두 가지의 배합을 조금만, 단 0.1%만 잘못 설정해도 그 연주는 망가져 버린다. 나는 이전 글에서 프랑수아를 높게 평가했지만 자주 듣지는 않는다. 그는 절도 있는 연주를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폴리니의 경우는 더 심각해서 음색이 다 죽어버렸을 뿐만 아니라 선명한 소리를 뽑지도 못한다. 이런 연주를 내놓느니 차라리 드뷔시에 손을 대지 말았어야 했다.

 이 연주는 그 두 가지를 동시에 성취한 몇 안 되는 연주다. 음색은 깊고 짙으며 팔레트의 색감을 드러내지만 터치는 그 누구보다 선명하다. 페달링으로 인해 음색이 터치에서 붕 뜨는 느낌을 주지도 않는다(많은 연주들이 이런 연주를 내놓고는 한다). 이 두 가지 모순을 결합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에리쿠르 이전의 수많은 연주들이 증명했고 에리쿠르 이후의 수많은 연주들이 지금껏 증명하고 있다(루비모프는 무수한 드뷔시 연주들이 거의 지나가지 않은 틈새를 적절히 노려서 성공한 것이지 에리쿠르처럼 압도적인 포스를 보여 성공한 연주가 아니다). 

 에리쿠르의 터치를 짚고 넘어가지 않으면 그의 연주를 평가하는 것은 별 소용이 없을 것이다. 에리쿠르의 저음 연주, 특히 왼손 극저음부에서 손 전체를 약간 비틀어 들어올렸다가 활시위 형태로 팔을 휘두르면서 손가락 옆면으로 건반을 내리찍는 타건은 호로비츠의 망치 타건과는 전혀 다른 음색을 만들어낸다. 보통 그런 타건은 클러스터와 별반 다를 것이 없기 때문에 지저분한 소리가 날 것이라고 생각이 드시겠지만 천만의 말씀. 에리쿠르는 강하면서도 청명한 소리의 전범을 만들어내고 있다.

 해석의 측면은 어떨까. 에리쿠르의 <피아노를 위하여> 사라방드는 무려 6분 46초라는 러닝타임을 자랑한다. 보통 대부분의 연주들이 4분 50초 대에서 5분 초반 대의 러닝타임을 보이는 것을 생각하면 무려 1분이나 더 늘어지는 연주다. 하지만 도저히 지루할 틈이 없다. 에리쿠르는 시간을 잊은 사람처럼 음표 하나하나의 색채를 조심스레 다듬어서 청자 앞에 내놓는다. 청자가 그것을 듣고 감탄하는 사이 곡은 클라이맥스에 도달하고, 어느새 끝나 있다. 

 에리쿠르의 해석이 나를 반하게 만든 또 다른 사례는 <영상> 2집의 2곡인 <황폐한 사원에 걸린 달>인데, 나는 이 곡을 지금까지 예의상 들어야만 하는 곡으로 생각했다. 이 곡이 담고 있는 오리엔탈리즘에 거부감을 느낀 것인지, 아니면 다른 곡과 달리 이 곡에서는 드뷔시 특유의 논리성이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것인지, 아니면 그냥 이 곡이 나와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에리쿠르를 들으면서 이 편견들은 전부 다 날아가버렸다. 곡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내가 들었던 연주들이 문제가 있었던 거였다. 에리쿠르는 '이 곡이 이런 곡이었나?' 싶을 정도로 이 곡의 다채로운 색채감과 짜릿한 순간들을 낱낱이 보여주었다. 곡이 끝날 때까지 들으면서도 감탄사도 생각이 안나 '하...' 만 반복하고 있었던 연주는 내가 지금까지 들은 20종 남짓한 <영상>의 연주들 중 이게 처음이었다.

 그러면 페달링은 어떨까? 밟는 순간, 밟았다가 떼는 순간, 겹쳐 밟는 순간의 구분이 무엇보다 중요한 페달링은 자칫 잘못하면 화장 처음 한 여고생이 그렇듯 가부키 배우같은 떡칠만 남게 된다. 아무리 연습을 한다고 해도 본질적으로는 지저분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 페달링이다. 그런데 에리쿠르는 생각만큼 페달을 많이 밟지 않는다. 그리고 페달을 밟았다는 것을 느끼기가 정말 힘들다. 터치만으로 충분히 음색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페달을 밟으면 음색이 배가 된다. 하지만 왼페달을 밟으면 밟을수록 뿌옇고 탁한 소리밖에 나오지 않는 연주들과 비교하기가 미안해질 정도로 에리쿠르의 터치는 선명함 그 자체다.

 이 음반에 담긴 연주들 중에 중요하지 않은 것이 무엇이 있겠느냐만은(지루한 곡이라고 생각하는 <렌트보다 느리게>마저도 기가 막힌 곡처럼 들리게 하는 연주다. 더 설명이 필요한가?), 딱 하나를 꼽는다면 <판화>의 첫 곡 <탑>을 추천하고 싶다. 음량적인 클라이맥스에 도달하는 순간 왼손이 만드는 그 트레몰로의 괴물 같은 음향을 듣고 있으면, 도대체 왜 이 피아니스트가 그토록 음반 만드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는지 물어보고 싶을 정도다. 만약 이 피아니스트가 조금만 더 외향적이었더라면 드뷔시 연주사 전체가 뒤집어졌을 것이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이 연주의 입수 난이도가 연주의 질에 비례한다는 점이다. 에리쿠르께서는 애시당초 메이저 레이블 같은 곳은 생각하지도 않았고, 황송하게도 듣보 레이블인 kapp record에서 이 보석같은 연주들을 녹음하셨다했다(그래서 이 연주는 60년대 초에 녹음했음에도 모노랄이다). 그 덕에 kapp record는 역사에 이름을 남기게 되었다 Ivory classics에서 에리쿠르 탄생 100주년 기념 한정판으로 CD 전곡반을 냈다(아이보리 본사에서는 아직도 음반을 팔고 있다. 어서 주문하시오.) 이외에도 낙소스 아카이브에서 전주곡집만 뽑아서 음원을 냈고, 드뷔시 유니버셜 에디션에 소품 몇 곡 정도가 들어가 있다. 현재 CD를 구할 수 있는 유일한 주문처는 아이보리 본사 뿐이다(아마존 중고매장에서는 이 음반 초반을 185달러에 판다......). 그야말로 기가 막힌 연주에 범상치 않은 입수 난이도를 자랑하고 있다. 나는 우연찮게도 이 음반을 중고매장에 내놓으신 누군가(그 분께 절이라도 드리고 싶다)와 재고를 알려주신 '누군가'의 도움 덕택에 지금 집에서 이 음반을 잘 듣고 있다(누구신지는 몰라도 정말 감사합니다).

 

 정말 내가 이렇게 자신있게, 아니 간절하게 추천하는 음반이 다시 나올지 의문이다. 보이면 당장 사라. 낙소스 아카이브건 유투브건 보이면 무조건 들어봐라. 듣고 싶으신 분들은 내가 립을 떠서라도 보내드릴 테니 제발 들어라. 그리고 이거 안 듣고서 어디 가서 드뷔시 듣는다고 얘기하지 마라.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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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여엉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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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반을 사면서 생각하던 것이, 단일 곡의 연주가 10종이 넘으면 그 연주들을 비교감상하고 그 결과를 글로 남기겠다는 것이었다. 음반을 워낙 중구난방식으로 사기 때문에 단일 곡이 10종이 넘는 경우는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는데, 이번에 알베르 페르버 드뷔시를 사면서 드뷔시 전주곡 1집이 9.99종10종이 되었기 때문에 비교감상을 시작하게 되었다.

 (전곡 연주가 10종이 아니라 각 곡당 연주가 10종이라는 것은 함정. 두 종의 발췌 연주가 각각 10곡 발췌, 4곡 발췌인데 희한하게 각 곡 당 연주를 세어보면 10종이 된다)

 

 스테인드글라스의 색채를 연상시키는 다채로운 음색의 소유자 발터 기제킹의 드뷔시 연주는 언제나 정평이 나있고 높은 평가를 받아왔다. 음색 계발에 있어서는 코르토, 오보린과 버금간다고 할 수 있는 그의 드뷔시는 선명하고 명쾌하면서도 이런 연주들이 흔히 빠지기 쉬운 딱딱함이나 매너리즘이 없다. 그는 자신의 음색을 최대한으로 선보이기 위해 페달(특히 왼페달)을 절제하고 터치와 핑거링에 심혈을 기울인다. 이해가 가지 않는다면 스테레오 시대 드뷔시 연주를 무작위로 하나 뽑아서 기제킹과 비교해보라. 기제킹에 비해 후대의 연주자들이 얼마나 페달 떡칠이라고 해도 될 만큼 페달을 남용하는지 알게 될 것이다.

 기제킹의 해석은 항상 본질에 충실하다. 2곡 <돛>의 클라이맥스에서 기제킹은 악구가 살짝 엉킬 정도로 성급한 연주를 들려주는데, 실제로 그 부분의 지시어는 Rapide(빠르게)이다. 후대의 연주에서 템포의 왜곡이 가해지는 1곡 <델피의 무희들>이나 10곡 <가라앉은 성당>에서 기제킹은 템포 왜곡 없이 정면승부를 고집하고 보기좋게 성공하는 것을 들을 수 있다. 자신의 해석에 자신이 있었던 기제킹은 어떤 음악학자가 <가라앉은 성당>의 연주가 드뷔시의 피아노 롤 연주와 다르다는 것을 지적하자 "내가 맞고 드뷔시가 틀렸다"고 주장한 것은 물론, 제자들에게 교육을 할 때도 "드뷔시가 이 부분을 잘못 연주했다"고 지적하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

 기제킹의 전주곡 연주는 여러 종이 있지만 가장 뛰어난 것으로는 30년대의 것을 추천하고 싶다. 50년대는 환갑이 다 된 기제킹이 치는 연주라 해석이 점점 굳어간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점은 월터 레그의 개념없는 레코딩으로, 50년대 초 EMI의 음향 장비가 얼마나 막장이었는지를 단적으로 알 수 있는 지표이기도 하다. 솔직히 말해서 50년대 연주는 음질을 포함한 모든 면에서 30년대 연주에 비해 뒤진다. 5번 <아나카프리의 언덕> 마지막 고음부 소리를 난도질해놓은 녹음을 듣고 있자면 어처구니가 없다(50년대 녹음을 SACD로 사 들었는 데도 이 모양. 다른 음반들은 얼마나 막장이기에......).

 

 50년대를 풍미한 스위스 피아니스트 알베르 페르버의 드뷔시의 가장 큰 장점은 '물 흐르는 듯한 자연스러움'이다. 그러면서도 모노 시대 피아니스트들의 특징인 '고유의 음색'은 어느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기제킹이 강렬한 원색의 대비를 추구하고, 에리쿠르가 일렁이는 안개와 섞여 점묘법처럼 유동하는 음색을 추구한다면 페르버의 음색은 고요하면서도 단단하다. 성향은 많이 다르지만 에트빈 피셔의 소리와 비슷하다고 해야 할까. 

 페르버의 드뷔시는 템포 측면에서 서두르는 법이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늦거나 뒤처진다는 느낌은 전혀 주지 않는다. 어떻게 하면 최대한 느긋하게 몸을 움직이면서도 원하는 순간에 정확한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는가를 줄곧 생각하는 사람 같다. 보통 내공이 아니다. 목소리를 크게 높이는 법도 없이 조곤조곤히 이야기하지만 그의 음반을 플레이어에 건 청자는 자기도 모르게 그의 연주에 집중하게 된다. 그의 음색에는 차분히 집중하고 경청하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 그렇다고 해서 심지가 약한 연주는 아니다. 자기 목소리를 분명히 내야 할 부분에서는 분명하게 소리를 내고 있다. 그 예가 6번 <눈 위의 발자국>. 6번에서 그의 연주는 압도적인 존재감을 발산하지는 않지만 아주 단호하다. 페르버는 자신의 연주를 통해 중용, 중도의 매력을 설파하고 있는 것 같다. 템포가 평균치라고 중용, 중도가 아니다 그런 연주는 대개 이도 저도 아닌 연주이기가 쉽다

 한 마디 덧붙이자면, 페르버가 사용한 피아노는 스타인웨이다. 폴리니도 스타인웨이다 비교체험 극과 극

 

 필립스 듀오 시리즈로 나온 연주들은 몇몇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무난하거나 수준 이하의 연주를 들려주며, 기제킹의 제자 베르너 하스의 60년대 연주도 이 법칙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연주는 한 마디로 '기제킹의 마이너 카피'라는 말이 딱 어울린다. 하스는 스테레오라는 엄청난 강점도 제대로 살리지 못하며, 해석은 기제킹의 노선을 따라가지만 결과물은 기제킹만 못하다. 다이내믹 처리도 대충, f와 p 구분도 대충 하다 보니 물에 물탄듯 술에 술탄듯한 연주가 나온다. 특히 페달의 사용에서 기제킹과 가장 다른 점은, 기제킹이 페달의 사용과 관계없이 특유의 음색을 100% 발휘한다면, 하스는 페달을 사용할 때 소리가 판이하게 달라진다. 그만큼 음색 계발에 무성의했다는 얘기가 된다. 루바토의 사용이 중요한 4번 <소리와 향기는 저녁 대기 속을 떠돌고>는 무뚝뚝하기 짝이 없으며, 5번 <아나카프리의 언덕>의 변덕스러움은 실종된 상태다. 폴리니같은 개막장까지는 아니지만 참 재미없는 연주다.

 

 프랑수아의 연주는 68년의 전곡 레코딩과 61년의 발췌 연주가 있고 둘 다 스튜디오 레코딩이다. 그 외에도 숱한 실황 연주를 남겼지만 일단 가지고 있는 이 두 가지의 연주로 평가를 하도록 하겠다.

 프랑수아의 드뷔시는 '의외로' 왜곡이 거의 없다. 리스트-디에메-코르토로 이어지는 프랑스 피아니즘의 적통을 승계한 마지막 피아니스트답게 프랑수아는 피아노 음악을 터치와 루바토의 예술로 받아들이고 그에 충실한 도취적인 연주들을 남겼다. 하지만 프랑수아는 적어도 '드뷔시에서만큼은' 지나친 루바토가 없어야 한다는 사실을 직관적으로 깨달은 것 같다. 그 덕분인지 61년의 발췌 연주는 아주 마음에 들었다. '신선함 그 자체'라고 평가할 수 있겠다.

 68년의 전곡 연주는 조금 더 변덕스럽지만 절제하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 술 한 잔 걸치고 치는지 악구를 잘못 기억하거나 지나치게 연주에 몰입해 음표를 잘못 누르는(참고로 이 연주 스튜디오 레코딩이다) 경우가 왕왕 보이지만 해석에 있어서 막 나가는 경우는 거의 없다. 무엇보다 두드러지는 것은 페달링의 절제인데, 순수한 터치와 간을 하듯 적당한 루바토의 사용만으로도 포커스를 준 것 마냥 진하게 흐려지는 특유의 음색을 만들어내는 것을 보면 참 신기하다. 특히 4번 <소리와 향기는 저녁 대기 속을 떠돌고>는 정말 유니크한 연주인데 Rubato라는 지시가 붙은 7음 하행 아르페지오 악구를 프랑수아가 어떻게 처리하는지 한 번 들어보라. 진짜 루바토는 이렇게 쳐야 한다고 말하는 것 같다. 5번 <아나카프리의 언덕>을 시작하는 5음음계는 오로지 피아니스트의 음색만 가지고 처리해야 하는 악구인데 프랑수아는 정말 근사한 음색을 들려준다. 리스트 스타일의 7번 <서풍이 본 것>과 기타 속주를 연상케하는 9번 <끊어진 세레나데> 에서 프랑수아는 본인의 똘끼를 억누르지 못하고 분출을 시도하는데, 사실 그렇게 심하지는 않을뿐더러 두 곡 모두 스타일이 그런 해석을 용납하는 곡이라 이해가 간다. 사실 프랑수아의 해석과 제일 엇나가는 곡은 마지막 곡 <민스트렐>. 직접 들어보면 안다(애초에 이 곡은 리듬이 기계적이어야 하는데 프랑수아가 그렇게 칠 리가 없잖아?).

 

 프로코피예프와 스트라빈스키에서 좋은 연주를 들려주던 베로프는 전주곡에서도 재미있는 연주를 들려주고 있다. 생동감 있는 해석, 포인트를 정확히 짚어내는 터치, 좋은 음질로 다른 사람에게 추천하기도 좋은 연주다. 곡마다 본인의 독특한 해석을 첨가하지만 또라이짓은 하지 않는다. 질질 끄는 부분 없이 소리를 잘 만진다는 점도 플러스 요인이다. 플레옐 피아노를 고집하는 베로프의 음색은 프로코피예프에서 들려줬던 신선함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분 최소 프랑스 사람 소리는 들을만하다. 적어도 무늬만 프랑스 사람인 로제나 티보데보다는 훨씬 낫다(둘 다 되도 않는 자기 소리 들려주겠다고 곡을 질질 끌면서 듣는 사람 인내심만 자극하는 연주만 하다가 끝난다). 특이한 점을 찾자면 5곡 <아나카프리의 언덕>. Tres modere로 지정된 첫 5음음계의 템포를 무척 빠르게 가져가며, 첫 f를 ff처럼 연주한다는 것이 여타의 피아니스트들과 다르다. 

 다만 이 연주가 최고냐? 라는 질문에는 선뜻 대답을 하기가 힘들다. 분명히 잘 하는 연주이며 정말 재미있는 연주지만...... 딱 거기까지가 베로프의 한계인 것 같다. 젊은 열정으로 곡을 밀고 나가는 것이 단점은 아니지만, 이 곡에 필요한 기품은 그에 반비례하여 줄어든다는 점은 아쉽다. 지나치게 촐싹댄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10곡 <가라앉은 성당> 초반에 소극적인 연주를 들려주는 것은 분명한 결점이다. 드뷔시가 요구하는 것은 섬세함이지 소극적인 연주가 아니다. 음량이 베로프와 비슷한 루비모프는 베로프보다 훨씬 또렷하고 선명하게 들린다.

 참고로 이 전주곡을 녹음할 때 베로프의 나이는 20세였다.

 

 70년대 이후 모든 드뷔시 연주에 지속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는 미켈란젤리의 연주는 DG의 78년 스튜디오 레코딩과 82년 BBC 실황연주 두 가지를 가지고 있는데, 두 가지 연주의 해석은 크게 차이가 없으므로 같이 묶어서 설명하도록 하겠다. 

 미켈란젤리는 몇몇 예외를 제외하면 고도로 통제된 스튜디오 레코딩에서 자신의 크리스탈같은 음색을 만들어낸 피아니스트로, 그만큼 새장 속의 새처럼 완벽하게 통제된 환경에서만 제 역량을 100% 이상으로 발휘할 수 있었던 피아니스트였다. 대표적인 경우로 나는 71년의 <영상>을 꼽고 싶은데, 특히 1집의 첫 곡 <물에 비친 그림자>를 시작하는 5도는 밑바닥에서부터 천천히 퍼져나가는 일렁임을 소름끼칠 정도로 잘 표현했다. 하지만 78년의 전주곡 녹음은 71년 <영상>의 녹음에서 들려주었던 그 초월적인 음색이 거의 다 날아가버렸다(82년 실황도 마찬가지). 사실 이 정도도 나쁘지는 않지만 <영상>에 비하면 평범하게 들리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미켈란젤리의 해석을 두고 누가 '작곡가는 싫어하지만, 청자는 만족하는 해석'이라는 평을 내렸는데, 나는 거기에 절반만 동의한다. 1번 <델피의 무희들>에서 미켈란젤리는 첫 악구와 두 번째 악구(4마디 가운데 부분이 두 악구의 분기점이다)의 템포를 다르게 잡는데, 악보에는 템포 변경에 관한 지시가 없을뿐더러 caesura(악구를 구분하기 위한 지시기호. // 로 표기한다)나 페르마타 기호도 없다. 이런 해석은 10번 <가라앉은 성당>에서도 나타나는데, 22마디, 물에서 떠오른 성당이 햇빛을 받아 찬란한 색채감을 발산하며 반짝이는 부분에서 미켈란젤리는 돌연 속도를 빠르게 가져간다(프랑수아도 이렇게 연주한다). 그러나 악보에는 역시 아무 것도 없다. 참고로 악보를 그대로 연주한 사람은 기제킹을 포함해 몇 되지 않는다. 그래도 악보에 적힌 섬세한 뉘앙스만으로도 충분히 커버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든다.

 미켈란젤리가 후대의 연주에 끼친 가장 큰 악영향은 바로 템포와 리듬으로, 본인의 음색을 자랑하고자 모든 연주의 템포를 느리게 잡고 연주를 했다. 그 옹고집은 모든 곡에서 변함이 없어서 울렁거리는 느낌을 만들어내야 하는 2번 <돛>이나 타란텔라 리듬의 생동감을 위해 '반드시' 템포를 빠르게 가져가야 하는 5번 <아나카프리의 언덕>도 느려터진 연주로 일관한다. 템포만 느리면 모르겠지만 리듬도 덩달아서 딱딱해져 버렸으니 들으면서 답답함이 느껴질 정도다. 그리고 이 결정은 후대에 심각한 악영향을 끼치게 된다. 미켈란젤리는 개성적인 음색으로 느려진 템포와 왜곡을 어느 정도 커버할 수 있다지만, 역량이 그에 못 미치는 후대 피아니스트들이 미켈란젤리의 해석을 거의 맹목적으로 따라간다는 것이 비극의 단초를 제공한다. 80년대 이후 드뷔시 연주들은 불어터진 라면 면발같은 연주들로 빼곡히 채워지기에 이르며, 기름덩어리가 덕지덕지 붙은 지메르만의 연주에서 정점을 찍은 후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드뷔시가 생동감과 신선함을 추구하고 템포의 왜곡을 어느 누구보다 끔찍히 싫어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지하에서 통곡할 일이다.

 

 피아니스트로서의 리히테르를 높이 평가하고 영감으로 가득한 그의 도전적인 해석을 존경하는 본인이지만 그의 드뷔시 해석만큼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 유명한 헝가리의 리히테르 시리즈에 들어있는 85년의 전주곡 연주는 아집과 독선으로 레퍼토리를 말아먹는 위대한 연주자의 안타까운 모습을 감상할 수 있는데, 모든 곡이 여타 연주에 비해 1분씩 느려져 원래 템포에서 느낄 수 있는 특유의 긴장감이 싹 다 날아가버린다. 음색? 리히테르의 무채색 음색은 팔레트의 색채감을 요구하는 드뷔시와는 상극이다. 리히테르는 자신의 특이한 해석과 강려크한 타건으로 그 단점들을 벌충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 모르지만 악구가 뚝뚝 끊어질 정도로 템포가 느린데 논리적인 전개와 집중성이 남아날 리가 없고 곳곳에서 출몰하는 뜬금없는 해석(9번 <끊어진 세레나데>의 첫 스타카토는 테누토인줄 알았다)은 실소를 자아낸다. 그나마 11번 <푸크의 춤>이 가장 낫다. 개성적인 해석이라는 데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었지만 좋은 드뷔시 연주라는 평가는 빈말이라도 해주기가 힘들다.

 

 단테의 <신곡>이 <지옥편>이 가장 높은 평가를 받고 <천국편>이 가장 낮은 평가를 받는다는 점을 생각하면 음반에 대해 말할 때도 나쁜 연주를 평하는 것은 쉽고 좋은 연주를 평하는 것은 어렵다는 결론이 나와야 하는데 이 연주는 그런 견해에 대한 반론이 될 수 있겠다. 폴리니의 98년 DG 연주는 가히 내가 들은 최악의 드뷔시 전주곡 1집의 연주이며 이런 연주는 두 번 다시 나와서는 안 되겠지만 나는 도저히 이 연주를 정확히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는다. 그러니 일단 두서없이 설명해보도록 하겠다.

 개성없는 음색으로 타고난 기교에 의존해 먹고 살아가던 폴리니는 <페트루슈카>, 프피소 7번(솔직히 두 곡 모두 바이센과 리히테르한테 떡실신 당하는데 왜 높은 평가를 받는지 이해가 안 된다)과 쇼팽 연습곡(그냥 아쉬케나지 사라. 그게 훨씬 낫다)이 연이어 폭발적인 인기를 얻으면서 DG의 간판 피아니스트로 자리매김했고 그 덕에 지금까지 죽지도 않고 음반이나 내시면서 연명하고 계신다(그래서 틸레만과......?). 그러나 냉정히 평가할 때 폴리니는 20세기 후반을 상징하는 '몰개성'의 아이콘이며 기교가 떨어지기 시작하는 80년대부터 자신의 떨어지는 기교를 페달링으로 만회하려는 수작이나 부리다가 이 드뷔시를 녹음해야 하는 98년에 와서는 아예 곡의 모든 부분에 페달을 떡칠하는 만행을 저지르기에 이른다. 창백하기 짝이 없는 스타인웨이 특유의 음색에(폴리니의 음색이 아니다. 분명히 말하지만 폴리니는 음색이 '없다') 쉬지도 않고 지속적으로 눌러대는 왼페달 덕에 음향은 다 섞여서 지저분하기 짝이 없고 그나마 거의 유일한 장점이던 깔끔한 터치는 집 나가신 지 오래. 이러한 망조의 삼위일체가 모였으니 어떤 연주가 나올지는 안 봐도 비디오 아닌가? 솔직히 위에 있는 연주들 중 호평은 많지 않지만 그래도 위에 있는 모든 연주들이 폴리니보다는 낫다. 포장 뜯고 딱 한 번 들은 후 바로 봉인했지만 이 글은 써야 하기에 다시 꺼내들었고 그 결과 이런 글이 나오고 있다. 솔직한 총평은 '왜 전주곡 2집을 녹음 안 했는지 알겠다'.

 

 미켈란젤리 이후로 드뷔시 전주곡의 해석은 거의 획일화가 완료되었고 새로운 해석이 등장할 가능성은 요원해보인다. 당대 피아노를 들고 나온 쁠라네, 역량도 안 되는 주제에 명함만 거창한 파스칼 로제, 자기 주력 레퍼토리인 Contemporary Music을 제외하면 항상 덜 떨어지는 연주만 들려주는 에마르를 비롯한 몇몇이 음반을 찍었지만 모두 기준 미달이었고 실망만 안겨주었다.

 알렉세이 루비모프의 ECM 연주를 기제킹, 에리쿠르, 굴다와 비교하는 것은 힘들다. 루비모프는 기제킹의 화려한 색채감이나 에리쿠르의 몽환적인 음색, 굴다의 명쾌함을 가지고 있지 않다. 대신 루비모프는 기존의 연주들과 확연한 차이점을 두는 것으로 기대 이상의 대성공을 거두었고 드뷔시 해석의 새로운 활로를 열었다.

 드뷔시는 전주곡에 편집증적일 정도로 섬세한 다이내믹을 부여했다. 10곡 <가라앉은 성당>의 42마디에서 46마디에 작곡가는 p - piu p - pp - piu pp 라는 거지같은 다이내믹을 지정했는데 이를 실제 연주에서 듣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 뿐 아니라 전주곡에서는 ppp가 심심치 않게 등장하며, 7곡 <서풍이 본 것>의 종지는 f < ff > f < sff sec라는 괴랄한 다이내믹을 보여주신다. 대부분의 연주들은 이 다이내믹의 완벽한 재현을 포기하고 대신 음색이나 해석에 심혈을 기울였다. 루비모프는 이 미지의 영역을 개척해 나갔고 멋진 성과를 거두었다.

 루비모프는 전주곡의 이 기상천외한 다이내믹을 놀랍도록 선명하게 재현한다. 누군가 이 연주를 놓고 'ppp와 pp를 구분할 수 있는 연주'라고 했는데, 이 말이야말로 이 연주를 한 마디로 압축한 평이 아닐 수 없다. 특히 루비모프 연주의 이런 강점이 가장 두드러지는 부분은 6번 <눈 위의 발자국>의 종지 부분과 10번 <가라앉은 성당>의 도입부. 정말 음향기기로 피아노의 음량을 조절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섬세한 다이내믹 구분을 들려주고 있다.

 내가 앞에서 쁠라네 얘기를 했는데, 루비모프도 1925년 베흐스타인 피아노를 들고 와서 드뷔시를 연주하고 있다. 하지만 루비모프는 드뷔시 당대의 피아노와 현대 피아노 음색은 별 차이가 없다는 말을 했으며, 피아노는 단지 '그 시대의 분위기를 떠올리게 하기 위한 도구'라는 취지의 말을 남겼다. 실제로 피아노를 제외하면 그의 연주에서 드뷔시의 시대를 생각나게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오히려 이 연주는 템포나 아고긱의 측면에서 '현대'를 자처하는 연주들보다 더 현대적이다. 기존의 연주들을 섬세하게 심사숙고한 후 자신의 취지에 맞는 것들을 골라냈다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하겠지만.

 

 

 에리쿠르와 굴다는 아직 구매하지 않아 감상평을 쓰지 않았다. 듣자마자 반한 연주들이고 언젠가는 꼭 사야겠다고 마음먹고 있으니 머지 않아 감상평을 쓰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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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여엉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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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든에 대한 단상

음악 2014. 5. 31. 23:51

 하이든의 천재성(스비아토슬라프 리히테르가 이에 대해 자주 지적하고는 했다)에 대해 우리가 자주 간과하는 이유는 많다. 그 중 가장 큰 이유는 그가 만들어낸 독창적인 음악 언어가 이미 우리의 기본적인 음악 언어로 편입되었다는 데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고, 두 번째는 그가 예술성과 대중성을 모두 겸비한 얼마 되지 않는 위대한 음악가라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첫 번째 이유 때문에 하이든은 '18세기 고전 형식을 만든 작곡가'라는 형식적이고 교과서적이며 바지사장의 냄새가 나는 자리에 앉아 있을 뿐이며, 두 번째 이유는 더 심각한 악영향을 끼쳐 거대하고 심각하고 장엄하고 권위적이며 압도적인 음악을 즐겨 찾는 이들이 그가 하찮은 작곡가(실제로 그는 전혀 하찮은 작곡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라는 편견을 가지도록 만드는 동시에 그를 '고전음악을 처음 들을 때나 거쳐가는 관문' 정도로 하대하도록 만들고 있다. 그런 편견과 몰이해, 그리고 하대는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우선 두 번째 이유에서 발생한 오해부터 뒤집어 보자. 하이든은 대중성과 예술성을 모두 추구한 작곡가가 맞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고전음악을 처음 듣는 초심자부터 고전음악에 능통한 전문가까지 모두들 그의 음악이 뛰어나다는 점을 인지할 수 있다. 그의 주제들은 귀에 익숙해지기 쉬운 만큼 정교한 솜씨로 재단이 이루어져 음악학자들도 그 경이적인 재단 솜씨와 위트에 놀라고는 한다. 특히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끼워 넣는 재치는 그의 트레이드마크였다. 86번 교향곡 마지막 악장에서 드러나는 기가 막힌 전조, 마지막 교향곡 <런던>의 마지막 악장에서 보여주는 고도의 대위법적 기교(첫 악장의 주제를 역행으로 뒤집어 사용하고 있다. 이런 작곡 방식은 버르토크도 사용한 바가 있다), 화성적 전개와는 전혀 상관 없는 C♭음을 전면에 돌출시키는, 감상자의 뒤통수를 후려치는 99번 교향곡 첫 악장(베토벤이 나중에 이런 방법을 자신의 교향곡 8번 마지막 악장에 적용한다), 하나의 주제를 놓고 형태를 계속 바꾸어가며 마치 주제가 주제의 꼬리를 무는 것 마냥 다음 변화를 기대하게 만드는 88번 교향곡 첫 악장 등...... 유명한 교향곡들만 대충 살펴봐도 이 정도다. 그는 독특한 리듬, 기괴한 화성, 심각하고 무거운 정서를 삽입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위대한 음악을 만들 수 있었다. 그런 개방성과 유연함이 오히려 지금에 와서는 마이너스 요인이 되고 있다는 점은 참으로 이상하다.

 이제 첫 번째 이유에서 발생한 오해에 대한 반론도 제기해야 할 것이다. 하이든의 형식이 18세기 고전 음악과 이후의 음악에 대한 기본적인 음악 언어가 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그의 음악 언어가 보편적인 음악 언어라는 가장 확실한 증거일 것이다. 보편적인 언어는 무엇보다 기본 형태가 쉽고 단순하지만 수많은 형식으로 변화가 가능할 만큼 유연하고 창조적이어야 한다. 하이든의 음악 언어, 특히 소나타 형식은 이 조건을 훌륭하게 만족시키고 있다. 고무찱흙처럼 다른 모양으로 변형이 가능한 단순하고 작은 형태의 주제, 주요부와의 정서 대비를 주는 서주, 발전부를 배제한 소나타 형식을 주로 사용하는 느린 악장, 긴장을 풀고 편안함을 유도하지만 톡톡 튀는 구석이 꼭 한 군데씩은 숨어 있는 미뉴엣, 그리고 듣기만 해도 시원스러운 마지막 악장들. 이 형식은 교향곡과 현악4중주뿐 아니라, 피아노 소나타와 3중주, 협주곡을 포함한 거의 모든 기악곡 양식에 도입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만큼 그 기본 양식은 비록 수많은 작곡가들이 각자 자신의 방식으로 그 양식을 도입하고 적용하면서 모습이 바뀌어 갔지만 어쨌거나 몇 가지 기본 틀만은 절대 변하지 않았다. 이렇게 신축성과 내구성이 좋은 형식을 오래도록 구축하는 것이 성공했기 때문에 프로코피예프가 하이든을 그토록 좋아했는지도 모른다(그는 체레프닌 클래스에 머무르던 시절, 하이든의 음악을 연구한 성과를 바탕으로 자신의 교향곡 1번을 작곡했다).

 하이든의 음악은 단순하고 간결하고 명쾌한 만큼 위대하다. 그의 악보 위에는 꼭 필요한 구성 요소들만 놓여 있기 때문에, 도무지 그의 음악에서 음표 하나를 더하거나 뺀다는 것을 생각할 수 없다. 리게티도 하이든 음악의 그러한 특징을 통찰했는지는 몰라도, 자신의 음악에서 덜어내야 할 부분을 고심할 때마다 옆에 하이든의 음악을 놓고 그 단순성과 간결성을 참고했다고 하지 않은가. 

 

 "이 위대한 천재는 단 하나의 주제를 풍부한 변화로 발전시켜 끌어나갈 수 있다. 그렇기에 한 악상에서 다른 악상으로 계속해서 옮겨 다니는 창작력 빈곤한 여느 작곡가들과는 진정 다르다."

 - 1787년. 6개의 <파리> 교향곡을 들은 한 평론가가 기록한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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