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급하게 쓴 글이라 퀄리티는 낮습니다. 그 점을 감안하면서 읽어주세요.


 2016년 11월 24일

피에르 로랑 에마르 ‘쿠르탁&메시앙’

LG 아트센터

 

 긴 말 필요 없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도록 하겠다. LG 아트센터에 도착해서 프로그램을 확인하니 원래 쿠르탁을 연주하고 슈만을 나중에 연주하도록 짜여 있는 1부 프로그램이, 슈만과 쿠르탁이 자유로이 뒤섞은 프로그램으로 변해 있었다. 변경사항을 보고 가장 먼저 떠오른 게, 데얀 라지치가 스카를라티와 버르토크를 자유로이 섞어서 연주한 채널 클래식의 음반이었다.

 3층 자리에 앉아서 에마르를 기다리는데, 한 10분인가 기다리고 있노라니 연주자가 입장했다. 중키에 부리부리한 눈매가 인상적인 아저씨가 들어오는데, 나긋나긋한 몸짓과는 별개로 절도 있는 느낌이 나는 사내였다.


 페이지 터너를 옆에 둔 채 연주가 시작되었다. 1부는 슈만 소품을 하나 연주하면 쿠르탁 소품을 하나 연주하는 식으로 죽 이어졌는데, 들으면 들을수록 이 프로그램이 하나의 일관성을 가지고 꾸며졌다는 생각이 점점 강하게 들었다. 첫 짝을 이루는 슈만과 쿠르탁은 즐거운 느낌을, 중간의 슈만 알붐블라트 1번과 쿠르탁의 <메달>은 빛나는 느낌, 알붐블라트 3번과 쿠르탁 <평온한 위안>은 부드러운 민요풍 느낌을, 알붐블라트 2번과 <발린트 전시회 서문>에서는 비르투오소티 느낌이…… 이런 식으로 각각의 개성을 기가 막히게 잘 끼워 맞춰, 마치 슈만이 쿠르탁을 위해 작곡하고, 쿠르탁이 슈만을 위해 작곡한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멋진 프로그램이었다.

 이제 연주자의 능력치에 대해서 설명을 할 시간인데, 대개 에마르의 음반을 통해 느낄 수 있는 특징들은 ‘명료함’ ‘정확함’ ‘뛰어난 테크닉’ 정도로 압축할 수 있겠다. 어떤 상황에서도 기교적인 실수를 하지 않고 명징하고 차가우며 세련된 연주를 들려주는 것이 에마르의 가장 큰 특징인데, 내가 음반을 통해 들은 소리를 연주회장에서 그대로 느낄 수 있다는 점은 생각할 때마다 재미있는 점이다.

 그러나 실황에서의 에마르는 내가 연주회장의 어디에서 음악을 듣고 있던지 간에 자신의 (몇 번을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명료하고 절도 있으며 정확한 소리를 쏘아 보냈다. 3층에서 음악을 듣고 있음에도 내가 마치 1층에 와 있는 느낌은 덤이었다.

 프로그램은 지속적으로 슈만과 쿠르탁을 교차하다가 쿠르탁을 몇 곡 이어서 연주하더니 클라이맥스인 스벨링크의 반음계 환상곡에 도달했다. 소품들 사이에서 대곡처럼 느껴지는 스벨링크의 환상곡은 1부의 클라이맥스를 장식하기에 충분한 곡이었다. 이어지는 곡들은 차분히 가라앉는, 사색하는 느낌의 쿠르탁의 신곡 소품들로 마무리.


 2부는 프랑스의 로코코 스타일을 대변하는 작곡가 중 하나인 다캥의 모음곡 발췌로 시작했다. 쿠프랭보다는 조금 더 각진 느낌이고, 라모만큼의 인상적인 날카로움을 보여주지는 못하지만, 나름대로 화려하면서도 세련미 있는 그 시대 프랑스 클라브생 스타일을 잘 보여주는 작곡가인 다캥의 모음곡들에서도 에마르 특유의 명징함과 정확함은 어디 가지를 않았다. 정말 자신이 연주하는 모든 곡의 구조를 도식처럼 투명하게 보여주겠다는 그의 집념은 솔직히 듣는 사람의 기를 질리게 만들 정도였다.

 그리고 마침내 최종보스 등장. 오늘 제일 컬처 쇼크를 먹었던 메시앙의 새도감 중 <마도요>. 우와…… 1부에서 자제하고 있던 에마르의 다이내믹에 대한 무시무시한 능력이 밖으로 분출하는 순간이 이 때였다. 고음의 아르페지오 다이내믹을 조절하는 기계 같은 능력하며, 최강주에서 홀 전체를 뒤흔드는 깨끗하면서도 강력한 터치는 단지 차갑고 명료한 연주자로만 생각하고 있던 에마르에 대한 나의 편견에 기분 좋은 뒤통수를 치는 순간이었다. 몇 번을 다시 생각해도 프로그램 전 곡을 통틀어 이 <마도요>가 봉우리 꼭대기를 이루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충격적인 <마도요> 연주가 있고 난 후, 막간곡인 쇼팽의 녹턴 1번을 연주했다. 연주 자체는 깨끗하고 차갑고 좋았지만(루바토가 거의 없었다), 아무래도 메시앙을 사이에 두고 쇼팽을 들으려니 일부러 쇼팽을 끼워 넣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메시앙-메시앙이 계속 이어지다 보면 무슨 곡이 무슨 곡인지 알아먹지 못할 사람이 태반이니, ‘쇼팽 중간에 끼워줄 테니까 알아서 메시앙 두 곡 구분하라’는 의미로 녹턴을 한 곡 집어넣은 것 같다. 프로그램 전체의 균형과 맞는지는 의문이었지만 어쨌거나 연주는 참 좋았다.

 마침내 오늘의 프로그램 마지막 곡 <숲 종다리>에 도달했다. 메시앙의 피아노곡집 중 하나인 <아기예수를 위한 20개의 시선> 중 <성모의 첫 영성체>와 비슷한 느낌도 나지만, 그보다 좀 더 자연의 거친 풍광에 동조하는 느낌이 강한 이 <숲 종다리>에서 에마르는 하행하는 첫 아르페지오에는 풍성한 감각을, 중간부의 날카로운 풍광 묘사에서는 특유의 명료한 이성을 잃지 않고 연주한다. 그러고 보니 다캥의 곡들도 새와 자연을, 메시앙의 곡들도 새와 자연을 노래하고 있다. 결과물은 굉장히 다르지만.


 연주회가 끝나자마자 1부에서 참았던 환호성과 브라보를 터뜨렸다. 몇 번이나 관객의 박수갈채에 화답하던 연주자는 앙코르곡으로 노타시옹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배열은 5번에서 8번까지를 맨 먼저 연주하고, 그 다음 9번에서 12번까지를, 마지막으로 1번부터 4번까지를 연주하면서 이것만 임의대로 섞어 연주했다. 연주의 퀄리티? 지금까지 설명했던 것에서 딱 하나만 추가하자면, 토 나오게 어려운 패시지들을 기계같이 연주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저 환호할 수밖에 없었다.

 

 아직 올해 볼 공연 중 얀손스가 남아 있기는 하지만, 솔직히 이 정도 퀄리티의 연주를 저렴한 가격에 긴다는 것 자체가 나에게 있어서는 큰 행운이었다. 몇 년 전에 리게티를 연주할 때 안 간 것이 사무치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번 연주회를 보면서 어느 정도 보상받는 느낌이 들었다.


 한 줄 평 : 현음 피아노 = 에마르



 (2016.11.24)

Posted by 여엉감
,

말6

음반 2015. 11. 29. 19:43

예정된 파국을 통해 얻어낸 가장 독창적인 결론 : 카라얀의 말러 교향곡 6번

말러 교향곡 6번 <비극적> (A minor)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지휘)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파리, 샹젤리제 극장 (통칭 파리 실황)

1977년 6월 17일 실황 연주

말러의 교향곡 10곡은(미완성 교향곡인 10번까지 합하면 11곡) 제각기 다른 형태로 이루어진 비극의 씨앗을 잉태하고 있다. 아도르노가 제시한 개파durchburch, 곡의 진행방향을 흐리고 예측을 어렵게 만드는 음악적 흐름, 그리고 높은 음역에서 낮은 음역으로 뚝 떨어져버리는(주로 감7화음이 이 부분의 극적인 대비를 더한다) 추락Absturz은 말러의 모든 교향곡에 비극의 씨앗을 심는다. 이 씨앗들은 겨자씨의 형태가 같은 ‘겨자씨’의 범주의 묶이더라도 세부를 관찰하면 모두 다른 형상을 취하듯, 제각기 다른 형태를 취한 채 음악 속에 잠복해 발아와 폭발의 순간을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이 비극의 씨앗들은 대부분 결과적으로 열매를 맺거나 곡을 지배하지는 못한다. 5번이나 7번처럼 곡의 전반적인 흐름을 지배하고 최종적인 결말을 삼키기 직전까지 갈지라도 마지막 악장의 극적인 반전에 의해 이상한(그리고 가끔씩 어색하게 느껴지는) 항복을 선언하거나, 아예 8번의 경우처럼 압도적인 광명에 눌려 발아조차 하지 못한 채 사그라들기도 한다.

6번은 말러 교향곡의 두 간극, 비극의 씨앗을 품고 있되 그것이 결실을 거두지 못하는 그의 음악적 괴리를 유일하게 일관된 방향으로 통합해버리는 곡이다. 곡은 가장 으뜸 리듬이라 해야 할 군홧발의 행진곡풍 리듬에 실려 예정된 비극(곧 파국)을 향해 전진한다. 스케르초 악장의 비뚤어진 리듬은 스케르초와 렌틀러를 기괴한 형태로 조합하는, 마치 인간의 육신에 기계 부품을 억지로 붙여버린 것 같은 괴이한 조합으로 더욱 그 으스스함을 극대화시킨다. 유일하게 부드럽고 평온한 세계관을 고수하는 안단테 악장은 광대한 풍경과 느긋한 워낭소리로 채워져 있지만, 그 워낭소리가 1악장에서도 등장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3악장의 분위기가 다른 악장과 대조적이라 할지라도 이 악장은 분명히 말러의 세계관 속에서만 나올 수 있는 산물이며, 4번의 3악장과 마찬가지로 말러가 순음악의 느린 악장에서 뽑아낼 수 있는 가장 좋은 것들을 전부 포함하고 있다(옌스 말테 피셔는 이 악장을 실질적인 간주곡으로 보았지만 나는 그러한 평가에 반대한다. 이 악장이 간주곡이라면, 말러가 이 악장을 이렇게 광대하고 풍성한 소재들로 채워넣고 정교하게 다듬었겠는가?) 마지막 악장의 살벌한 광기와 처참한 절규는 묵시록적인 음악의 전범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떠한 형태의 음악적 농담도 이 악장 앞에서는 멈춰서야만 한다. 말러는 음악적 예술이 얼마만큼의 비극을 감내할 수 있는지 그 극한을 시험해보는 것 같다. 두 번의 해머 타격은 그 사이에 채워진 비극으로 인해 더욱 강화되고, 비참한 단말마가 잦아들 즈음 마지막 타격이 ‘주인공’을 썩은 통나무처럼 쓰러뜨린다. 말러가 세 번의 타격, 특히 해머 타격으로 강조한 의미(금속성 음향을 배제하고 은은한 소리가 나야 한다), 즉 도끼로 이미 죽어가는 자를 무참하게 난도질하는 느낌이 나야한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 교향곡을 묵독하고 천착한 후 전혀 다른 결과물을 내놓는 무수한 지휘자들이 이 교향곡의 결론을 절멸로 생각했다는 점은 흥미로우면서도 섬뜩하다. 텐슈테트는 4악장의 결말이 나치의 홀로코스트와 연관이 있을 것이란 생각을 끝내 떨쳐버리지 못했다. 카라얀은 이 악장에서 완전한 파멸vollstandigen Katastrophe을 보고 느끼고 체험했다. 길렌은 이 악장에서 죽음이 승리하는 광경을 보았다. 하지만 예정된 결말에 대한 관점이 같음에도 불구하고 거기서 느껴지는 차이, 즉 결론의 세부적인 형태는 모두가 제각각이다. 나는 그 중에서도 카라얀의 관점을 살펴볼 것이고, 특히 그가 1977년 6월 17일 파리에서 치른 실황 연주를 오늘의 글로 소개할 것이다.

※ 참고한 악보에 문제가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악보에는 스케르초가 2악장이고 안단테가 3악장임에도 불구하고 리허설 번호는 스케르초가 뒷번호, 안단테가 앞번호이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아래의 글은 연주 순서에 따라 스케르초 2악장 / 안단테 3악장으로 써 놓았습니다.

1악장의 첫 머리부터 카라얀과 베를린 필은 곡의 지시사항 Heftig처럼 맹렬하게 달려간다. 11마디의 첫 ff 에서 폭발시키는 음향의 힘은 그가 얼마나 강력한 연주를 보여줄 것인지에 대한 일종의 전주로 볼 수 있다. 지금까지 이런 연주가 있었나 싶을 정도로 맹렬하게 돌진하는 힘 앞에서 저항은 아무런 쓸모가 없다. 리허설 번호 4 두 마디 전에서 깨끗하고 강하게 뻗어나가는 심벌즈의 음향은 정말 정곡을 찌르는 표현이다. 베를린 필의 현악기군은 이런 속도에서도 전혀 거친 소리를 들려주지 않는다. 트럼펫이 정확하게 장-단 3화음을 찔러넣으면 약간의 삽입구 이후 77마디부터 F장조의 2주제가 등장한다. 1악장에서 유일하게 밝고 화려한 이 주제는 통칭 ‘알마의 주제’라 불리지만, 오히려 그 과장된 밝음은 알마 본인이 의도한 여인상과는 어울려 보이지 않는다. 솔직히 말하자면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돈 후안>에서 추구한 성적인 느낌이 강하게 드러난다. 카라얀의 농밀한 현은 이 주제의 그런 느낌을 극대화한다. 이 교향곡에서 대부분의 음악적 주제들이 과장되어 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매우 적절한 통찰이다. 리허설 번호 10에서 2주제를 노래하던 현악기군이 빠져나가고 글로켄슈필과 팀파니가 주를 이루는 부분은 매우 특기할 만한데, 대기를 부옇게 만드는 것 같은 농밀한 현이 빠져나가고 음향이 투명하고 간결해지는 대비가 그대로 다가온다. 이 부분에 대한 카라얀의 음향은 참으로 탁월하다. 악보에 아무런 지시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템포의 변화를 주어서 그 대비를 더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덤이다.

도돌이표를 따라 제시부를 반복한 후 연주는 발전부로 넘어간다. 장-단 3화음과 연결되어 있던 팀파니와 작은북의 리듬이 본격적으로 활약하는 시기다. 말러는 그 단순한 주제를 바탕으로 정교한 건축물을 쌓아올린다. 카라얀은 놓치기 쉬운 세부, 특히 목관의 트릴을 선명하게 구사하면서 나아간다. 리허설 번호 16에서 터져나오는 거대한 fff 에서 카라얀은 뭉특하게 느껴질 가능성이 높은 팀파니 위에 날카롭게 들리는 트럼펫과 심벌즈를 쌓아 올리는 수를 사용한다. 상투적인 어법으로 설명하자면 이 수는 지극히 효과적이다. 리허설 번호 17을 앞두고 펼쳐지는 신경질적인 트럼펫의 옥타브나 목금의 새된 외침, 바이올린의 단호한 Nicht eilen 파트 모두 탁월한 음향을 제공해준다. 리허설 번호 21에서 격한 움직임은 잦아들고, 꿈결같은 첼레스타의 음향 속에 관현악은 소극적인 음울함으로 잦아든다. 이 여성적인 분위기를 노래하는 현악기군과 플루트, 특히 플루트의 또렷한 소리는 여타 연주에서는 듣기 힘든 것이다. 바이올린과 호른의 살 떨리는 2중주, 그리고 말러가 좋아하던 표현인 morendo에 이어 A장조로 뜬금없어 보이는 행진곡 리듬이 재등장한다. 이것은 급격히 잘려나가고 바로 2주제가 A단조로 다시 나타난다. 카라얀은 이 대비를 나누기 보다는 잇기로 선택한 것 같다.

이제부터는 재현부다. 그리고 아도르노가 지적한 개파를 향해 달려가는 이 연주의 긴박감은 여타의 연주가 따라붙을 수 없는 속도감을 보여준다. 곧이어 갈라진 느낌의 D장조로 행진곡풍 1주제가 터져나온다. 때로는 장조가 단조보다 더 끔찍하다. 당연히 이 연주는 그런 ‘갈라짐’이 의미하는 바를 놓치지 않는다. 폭풍같은 몰아침과 다시 장-단 3화음, 그리고 꿈결같은 sostenuto 파트로부터 딸려나오는 2주제 파트. 이 파트의 정점에 도달하는 팀파니 크레셴도는 정말 시원하고 장쾌한 음향을 선사한다.

코다로 진입하는 a tempo, aber gemessener에서 카라얀은 짐짓 느리게 음을 가져가며 기대감을 조금씩 모은다. 그리고 이어지는 Più mosso subito에서 템포는 급변한다. 재현부 첫 파트의 변형이 이어지는데, 여기서 트럼펫의 신랄하게 쏘는 소리가 아주 인상적이다. 그리고 악장은 최후의 성급하고 급박한 결론에 도달한다. 나는 항상 이 부분의 템포가 아주 빨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성급하게 내린 결론이라는 느낌을 최대한 불어넣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연주는 충분히 그 기대를 충족시켜주고 있다. 트럼펫의 급박한 움직임과 팀파니의 굉음과 함께 1악장은 마지막 폭발력을 가동시키며 막을 내린다.

카라얀은 멩엘베르흐가 제시한, 2악장 스케르초 / 3악장 안단테를 적용했다. 2악장 첫머리를 여는, 아주 단단하게 뭉친 팀파니의 음향부터 여전히 연주가 심상치 않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다. 정확하게 박자를 새기면서 나아가는 현악기나 짓궂은 실로폰 소리나 흠 잡을 데가 없다. 스케르초의 클라이맥스를 장식하는 하모닉스에서 카라얀의 현악 컨트롤은 특히 두드러지는데, 작게 디미누엔도하면서도 선명한 소리가 나야 하는(즉 다른 악기군에 묻히지 않아야 하는) 이 부분에서도 문제없다는 듯 발군의 연주력을 보여주고 있다. 리허설 번호 69 직후 심벌의 강력한 크레셴도 또한 특기할 만하다. 카라얀은 트리오고 들어가기 전, Flottes Tempo 파트부터 천천히 속도를 늦추며 트리오에 알맞은 템포를 이끌어낸다.

트리오에서 카라얀의 연주는 그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가정 교향곡>에서 보여주던 것과 아주 흡사하다. 그러면 그가 트리오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연주관이 <가정 교향곡>에서 보여주는 것과 일치할까? 일단 번스타인(DG)이 들려준, 템포의 변화가 다분한 트리오와 이 연주는 무척이나 다르다. 그리고 리허설 번호 80에서 나타나는 molto tenuto의 호른 독주 부분. 나는 호른이 이런 음향도 낼 수 있다는 사실에 상당히 놀랐다. 호른 특유의 배음을 활용한 부드러운 음향이 아니라, 아주 선명하고 깨끗한 음향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말러가 스케르초에서 쓰기 좋아하던 삽입 에피소드가 짤막하게 등장하고, 다시 곡은 스케츠로로 복귀한다.

스케르초와 트리오의 첫 반복에서는 실로폰 소리와 공 소리가 가장 먼저 느껴진다. 하지만 나는 역시 위협적인 저음과 호른의 악구 뒤에 나오는 바이올린 파트가 가장 마음에 든다. 카라얀의 현은 정말 후기 낭만에서 무시무시한 파괴력을 발휘하는데, 어떠한 어려운 과제가 주어져도 특유의 농밀하면서도 우아하게 떨리는 소리를 잃지 않는다는 점은 들으면서도 신기함을 느낀다. 트리오에서는 역시 예의 플루트가 가장 귀에 와 닿는다. 그리고 다시 삽입 에피소드를 제시한 후, 스케르초와 트리오는 마지막 반복으로 들어간다.

마지막 스케르초에게 가장 특기할 만한 부분은 리허설 번호 100 이후에 등장하는, 음량적인 정점에서 도달했다가 급격하게 추락하면서 모든 것이 무너져버리는 부분인데, 카라얀은 이 부분을 쏜살같이 빠르게 도망치도록 했다. 말이 쉽지 이 부분은 플루트가 무려 5옥타브를 떨어져 내려가고 현악기군이 아주 빠른 하행 글리산도를 구사해야 한다. 이 부분에서 이 연주는 흠 잡을 구석 없는 기교를 들려준다. 이어 등장하는 독주 바이올린의 가냘픈 고음은 점점 좁아져만 가는 트리오의 기형적인 위치를 잘 포착해낸다. 마지막 베이스와 팀파니의 A-C-A까지 연주는 깔끔하게 마무리를 짓는다.

3악장은 그야말로 카라얀과 베를린 필의 독무대라도 해도 될 만큼 자신감 그 자체인 연주를 들려주는데, 현악 합주에 어울리는 양념을 얹어주는 목관악기군이야말로 숨겨진 주역이라 할 만하다. 그리고 리허설 번호 48에서 호른과 하프가 서로 만나는 목가적인 연주는 그의 느린 악장 연주들이 왜 그토록 뛰어난지에 대한 좋은 실례가 될 것이다. 리허설 번호 49에서 네 마디 후 처음으로 등장하는 현악기의 G-E♭-G-C-B♭ 선율은 카라얀의 현악기군이 특히 빛나던 다른 연주들, <메타모르포젠>이나 <정화된 밤>에서 듣던 바로 그 소리다. 그리고 리허설 번호 51 직전의 극도로 작은 ppp 하모닉스는 소리 자체로 큰 감동을 선사하고 있다.

곡은 E단조의 2주제로 넘어가고, 이어 E장조로 밝아진다. 그 밝음의 순간을 표현하는 하프와 목관, 그리고 현악기의 트릴은 그 사이사이의 미세한 음향의 변화를 감지할 때마다 경이를 느끼게 한다.

다시 원래의 E♭장조 주제로 돌아와, C장조의 Misterioso 파트를 지나면 이제부터는 플루트의 독무대다. 플루트는 결코 선명하되 가느다란 소리를 들려주지 않는다. 이어지는 리허설 번호 57부터의 부분들은 악기군의 또렷한 분할을 느낄 수 있는데, 바이올린이 첼로와 겹치지 않으며 첼레스타가 중앙에서 신비스러움을 배가해야 하고 목관이 흩어져서는 안 된다. 이 연주는 여기서도 흐트러짐이 없다.

그리고 E장조의 클라이맥스. 총천연색으로 다져진 모든 악기들이 정점을 향해 다가가고, 지휘자와 연주자들은 어느 성부 하나 과포화상태에 이르는 법 없이 음향을 꽉 채워서 관객들에게 전달한다. 음량이 정점을 찍을 때마다 한 발 물러선 채로도 자신의 존재감을 빠짐없이 드러내는 팀파니도 빼놓고 설명할 수는 없다.

그리고 원래 주제인 E♭의 극점에 도달한 상태에서 다시 한 번 현악기군에 주목하게 된다. 리허설 번호 62 세 마디 전에 바이올린이 크레셴도했다가 p 로 줄어들어서는 다시 크레셴도하면서 sf 에 도달하는 부분이 있는데, 이 부분을 잘 들어야 한다. 한 옥타브가 넘는 도약을 하면서 다이내믹을 섬세하고 미묘하게 조절해야 하는 부분이다. 당연히 무지막지하게 어렵다. 대략 15:13에서 15:19에 걸치는 구간인데, 꼭 자세히 들어보기 바란다. 기가 막힌 바이올린의 음색 변화를 접할 수 있다.

이제 앞의 세 가지 악장에 대한 기억을 모두 덮어버릴 마지막 악장에 도달했다. 카라얀은 처음의 피치카토와 첼레스타의 상승음계부터 텐슈테트(EMI)처럼 찍어누르려는 의도는 없다. 폭발은 9마디에서 처음 터져나온다. 말러는 서주 부분부터 베이스 튜바를 아주 효과적으로 사용하는데, 사실 이 교향곡의 오케스트레이션이 매우 현대적임에도 불구하고, 말러가 의도한 음향은 스트라빈스키가 의도한 음향과는 정반대의 결과를 얻어내야만 한다. 4악장 베이스 튜바의 그 원시적이고 섬뜩한 음향은 글에 의존한 묘사만으로는 아마 <봄의 제전>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말러의 결과물은 전혀 다른 방향을 바라보고 있다. 카라얀의 말러가 성공적일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봄의 제전>과는 반대로, 카라얀은 말러의 소리가 어떻게 나야 할지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리허설 번호 105 직후에서 카라얀은 하프보다 첼레스타를 앞세워 감상자의 의표를 찌른다. 당연히 이 달콤한 첼레스타 소리는 곧이어 터져나올 무자비한 호른과 베이스 튜바 소리와 아주 좋은 대조를 이룬다. 두 번째 호른의 무자비한 소리도 처음부터 격하게 터져나오는 것이 아니라, 프레이즈 중간에 다이내믹을 키우면서 극적인 효과를 더하고 있다. 리허설 번호 107의 굉음에 가까운 타격은 이제 최후의 처절한 투쟁이 막을 올리는 것을 예시한다. 그리고 참혹한 기상나팔 소리와 함께 곡은 투쟁의 현장으로 몰입한다.

카라얀은 처음부터 서두르지 않는다. Allegro moderato라는 지시에 따라, 그는 천천히 악기군을 분리시켰다가 조합한다. 번스타인이나 텐슈테트의 연주에서 뭉친 덩어리로만 들렸던 목관과 금관의 성부들의 전체적인 윤곽이 보다 뚜렷하게 드러난다. 그리고 Allegro energico에서 들을 수 있는 것은 칼같은 합주력이다. 하지만 그 가운데서도 뭔가 폭발한 것만 같은 불안감이, 오히려 그 불안감이 곡을 듣는 청자의 집중력을 높이고 있다. 그리고 현악기군의 첫 추락(2악장을 통해 이미 예언했던 그 추락)이 있은 후, 곡은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들고 2주제로 넘어간다.

1악장과는 달리, 피날레의 2주제(D장조)는 꾸며낸 밝음의 흔적조차 느낄 수 없다. 시작 부분의 다이내믹이 pp 인 것처럼 이 부분은 미약함이 느껴져야 한다. 그리고 첫 ff 에서 불현듯 솟아나오는 하프의 아르페지오는 성부를 끌어내고 조절하는 지휘자의 역량을 느끼게 하는 부분이다. 리허설 번호 120 다섯 마디 전부터 거세게 등장하는 현악기군의 fff 는 사실 암시에 그칠 정도로 파악이 힘든 부분인데, 카라얀은 이 부분을 또렷하게 드러내며 또다시 독창적인 면모를 드러내고 있다.

두 번째 추락 이후 다시 곡이 소강상태에 접어들면 2악장과 3악장의 편린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리허설 번호 124번 이후의 음악이 곡을 억지로 장조로 끌고 가나 그 곳이 도달하는 목적지는 첫 번째 해머 타격이다. 그리고 리허설 번호 129에서 첫 번째 해머 타격이 터진다. 이제 곡은 참았던 광기를 터뜨리듯 극한의 속도로 달려간다. 카라얀이 의도한 바가 이것이었다. 단계적으로 속도를 제어해 가면서 계기가 되면 터뜨리는 것. 이것보다 더 효과적인 전략이 있을까?

현악기가 전면에 드러나는 리허설 번호 131의 밝은 파트에 이어 132에서는 하프가 아르페지오를 그으며 갑작스러운 빛을 보여준다. 비극을 강화하기 위한 이 음악적 장치를 통해서도 유려한 현과 하프의 음향은 여전히 탐미적이다. 당연히 이 빛은 이어지는 폭풍우 속에 자취를 감추고, 리허설 번호 134의 신랄함으로 곡은 나아간다. 여기서 빛을 발하는 나무채 소리는 신경이 거슬릴 정도로 또렷하게 들린다. 곡은 잠시 잦아들었다가, 결국 139와 140 사이에서 두 번째 해머 타격이 폭발한다. 카라얀은 이 두 번째 해머 타격을 첫 타격보다 더욱 거세게 몰아부친다(참고로 두 번째 타격의 다이내믹 지시는 ff ). 그리고 조성을 거의 가늠할 수 없는 연결구와 함께 발전부가 막을 내린다.

재현부의 첫 구절을 열면서 카라얀은 아주 독특한 해석을 제시했다. 서스펜디드 심벌이 전면에 등장하면서 심벌의 음향이 아주 길게 이어지도록 지시한 것이다. 그리고 이 심벌은 아주 신경질적인 ff 의 타격을 예비하는 도구로 유용하게 쓰인다. 147에서 Grazioso로 2주제가 더 힘없는 모습으로 등장하고, 149 직전에서 타격감은 정점에 이른다. 그리고 억척스럽게도 153에서 1주제가 정말 똑같은 재현을 선보인다. 카라얀은 이 낡아 빠진 고전 양식의 완벽한 재현과 그 양식을 흔드는 무수한 급진적 화성 사이에서 절묘한 균형을 잡아 나간다. 물론 폭력적인 양태를 한껏 드러내는 관현악의 압도적 위엄을 동반하고 있는 것은 여전하다.

164에 이르러 움직임은 멈춘다. 사멸을 앞둔 생명의 마지막 꿈틀거림만이 들려올 뿐이다. 베이스의 움직임을 베이스 클라리넷이 받은 직후 최후의 타격이 직격으로 내리꽂힌다. 지축을 흔드는 최후의 충격이 가해진 후 남는 것은 파편적으로 울려퍼지는 팀파니의 행진곡 리듬과 짧은 피치카토. 그리고 침묵뿐이다.

마지막으로, 나는 카라얀이 애당초 이 곡의 전범을 제시할 생각이 없었음을 분명히 밝히고자 한다. 그는 말러 교향곡 6번에서 가장 독창적인 연주를 실천하는 것으로 최고의 위치를 차지했다. 그가 이 곡을 통해 제시하고자 한 것은 자신의 미학과 독창적인 해석과 오케스트라의 정교함, 그리고 무엇보다도 ‘음향’ 그 자체다. 그가 말러에 쏟은 애정이 얼마이건 간에, 그는 말러 6번의 연주사를 통틀어 가장 기이하면서도 감동적인 해석을 일구어 냈다. 현악기 위주의 악구에 대한 탐미적인 해석, 성부 조절을 통한 색다른 인상의 부여, 녹아들 것만 같은 3악장, 그리고 지휘자로서의 통찰이 빛나는 4악장의 전개는 감정주의적인 해석으로도, 분석적 해석으로도 치우지지 않는 고유한 말러를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적지 않으나마 이 해석은 독창적인 해석이 그 곡의 가장 빛나는 해석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실례가 될 것이다.

'음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음반일기 / 2017년 11월  (0) 2018.10.20
음반일기 / 2017년 10월  (0) 2018.10.20
다니엘 에리쿠르의 드뷔시  (8) 2015.03.16
드뷔시 전주곡 1집 L.117 - 9.99종 비교감상  (5) 2014.08.23
2014.5.14~15. 르네상스 음악가들  (0) 2014.05.15
Posted by 여엉감
,

 

사놓고 한 달이 지나서야 글을 쓰게 되는군요.

 

끝판왕의 위엄.jpg

 

 보통 나는 음반에 대해 이야기할 때 공적인 입장과 사견은 다르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가령 나는 불레즈의 쇤베르크가 매우 뛰어난 연주들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내가 좋아하는 쇤베르크 순위에서 불레즈는 미트로풀로스(왠 밑이냐고 생각하실 분들도 있겠지만, 나는 밑이 연주한 쇤베르크 관현악을 위한 변주곡 Op.31보다 이 곡을 재미있게 요리한 연주를 들어본 일이 없다. 밑은 그 통제가 가능한가 싶은 속도에서도 세 번의 클라이맥스와 200마디가 넘는 코다를 전혀 지루하지 않게 연주한다. 세부적인 카논이 암시에만 그친다는 사소한 결점을 무시한다면, 기가 막히게 재미있는 쇤베르크를 들을 수 있다), 카라얀(단연 가장 과소평가받는 Op.31의 연주 중 하나. 다만 5변주가 조금 아쉽다), 그리고 시노폴리(시노폴리의 12음 음악은 전혀 정신분열적이지 않다)보다 밀린다. 불레즈의 쇤베르크가 뛰어나지 않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다만 쇤베르크라는 레퍼토리는 불레즈가 연주하기에는 너무 '낭만적'인 레퍼토리가 아닌가 하는 사견이 있기 때문이다(차라리 불레즈는 드뷔시나 베베른을 더 잘 하는 것 같다). 쇤베르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성부 간의 우선순위를 두는 것이지 모든 성부를 동등하게 다루는 것이 아니다. 불레즈는 후자에 더 능한 사람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다른 쇤베르크들을 불레즈의 쇤베르크보다 더 자주 듣는다.

 하지만 이 음반은 나의 공적인 입장과 사견이 정확하게 일치할 매우 드문 사례가 될 것이다. 나는 이 연주를 능가할 드뷔시 피아노곡집이 나올지에 대해 굉장히 회의적이며 실제로도 이 연주를 무척이나 좋아한다. 아니, 좋아하는 정도가 아니라 이런 연주는 단연코 바닷가의 모래알만큼이나 많은 드뷔시 피아노곡 연주사에서 제왕의 자리를 차지하는 데 전혀 부족함이 없다. 이런 연주를 듣지 않고 드뷔시를 평가하는 것은 부질 없는 짓이다.

 드뷔시의 피아노곡은 연주가들에게 두 가지 모순점을 부여한다. 하나는 터치와 루바토와 페달링을 활용해서 뛰어난 음색을 만들어야 한다는 점이고, 나머지 하나는 그러면서도 섬세하다 못해 지나칠 정도로 예민한 프레이즈 단위를 절도 있게 지켜야 한다는 점이다. 두 가지 모두 중요하지만, 두 가지의 배합을 조금만, 단 0.1%만 잘못 설정해도 그 연주는 망가져 버린다. 나는 이전 글에서 프랑수아를 높게 평가했지만 자주 듣지는 않는다. 그는 절도 있는 연주를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폴리니의 경우는 더 심각해서 음색이 다 죽어버렸을 뿐만 아니라 선명한 소리를 뽑지도 못한다. 이런 연주를 내놓느니 차라리 드뷔시에 손을 대지 말았어야 했다.

 이 연주는 그 두 가지를 동시에 성취한 몇 안 되는 연주다. 음색은 깊고 짙으며 팔레트의 색감을 드러내지만 터치는 그 누구보다 선명하다. 페달링으로 인해 음색이 터치에서 붕 뜨는 느낌을 주지도 않는다(많은 연주들이 이런 연주를 내놓고는 한다). 이 두 가지 모순을 결합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에리쿠르 이전의 수많은 연주들이 증명했고 에리쿠르 이후의 수많은 연주들이 지금껏 증명하고 있다(루비모프는 무수한 드뷔시 연주들이 거의 지나가지 않은 틈새를 적절히 노려서 성공한 것이지 에리쿠르처럼 압도적인 포스를 보여 성공한 연주가 아니다). 

 에리쿠르의 터치를 짚고 넘어가지 않으면 그의 연주를 평가하는 것은 별 소용이 없을 것이다. 에리쿠르의 저음 연주, 특히 왼손 극저음부에서 손 전체를 약간 비틀어 들어올렸다가 활시위 형태로 팔을 휘두르면서 손가락 옆면으로 건반을 내리찍는 타건은 호로비츠의 망치 타건과는 전혀 다른 음색을 만들어낸다. 보통 그런 타건은 클러스터와 별반 다를 것이 없기 때문에 지저분한 소리가 날 것이라고 생각이 드시겠지만 천만의 말씀. 에리쿠르는 강하면서도 청명한 소리의 전범을 만들어내고 있다.

 해석의 측면은 어떨까. 에리쿠르의 <피아노를 위하여> 사라방드는 무려 6분 46초라는 러닝타임을 자랑한다. 보통 대부분의 연주들이 4분 50초 대에서 5분 초반 대의 러닝타임을 보이는 것을 생각하면 무려 1분이나 더 늘어지는 연주다. 하지만 도저히 지루할 틈이 없다. 에리쿠르는 시간을 잊은 사람처럼 음표 하나하나의 색채를 조심스레 다듬어서 청자 앞에 내놓는다. 청자가 그것을 듣고 감탄하는 사이 곡은 클라이맥스에 도달하고, 어느새 끝나 있다. 

 에리쿠르의 해석이 나를 반하게 만든 또 다른 사례는 <영상> 2집의 2곡인 <황폐한 사원에 걸린 달>인데, 나는 이 곡을 지금까지 예의상 들어야만 하는 곡으로 생각했다. 이 곡이 담고 있는 오리엔탈리즘에 거부감을 느낀 것인지, 아니면 다른 곡과 달리 이 곡에서는 드뷔시 특유의 논리성이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것인지, 아니면 그냥 이 곡이 나와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에리쿠르를 들으면서 이 편견들은 전부 다 날아가버렸다. 곡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내가 들었던 연주들이 문제가 있었던 거였다. 에리쿠르는 '이 곡이 이런 곡이었나?' 싶을 정도로 이 곡의 다채로운 색채감과 짜릿한 순간들을 낱낱이 보여주었다. 곡이 끝날 때까지 들으면서도 감탄사도 생각이 안나 '하...' 만 반복하고 있었던 연주는 내가 지금까지 들은 20종 남짓한 <영상>의 연주들 중 이게 처음이었다.

 그러면 페달링은 어떨까? 밟는 순간, 밟았다가 떼는 순간, 겹쳐 밟는 순간의 구분이 무엇보다 중요한 페달링은 자칫 잘못하면 화장 처음 한 여고생이 그렇듯 가부키 배우같은 떡칠만 남게 된다. 아무리 연습을 한다고 해도 본질적으로는 지저분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 페달링이다. 그런데 에리쿠르는 생각만큼 페달을 많이 밟지 않는다. 그리고 페달을 밟았다는 것을 느끼기가 정말 힘들다. 터치만으로 충분히 음색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페달을 밟으면 음색이 배가 된다. 하지만 왼페달을 밟으면 밟을수록 뿌옇고 탁한 소리밖에 나오지 않는 연주들과 비교하기가 미안해질 정도로 에리쿠르의 터치는 선명함 그 자체다.

 이 음반에 담긴 연주들 중에 중요하지 않은 것이 무엇이 있겠느냐만은(지루한 곡이라고 생각하는 <렌트보다 느리게>마저도 기가 막힌 곡처럼 들리게 하는 연주다. 더 설명이 필요한가?), 딱 하나를 꼽는다면 <판화>의 첫 곡 <탑>을 추천하고 싶다. 음량적인 클라이맥스에 도달하는 순간 왼손이 만드는 그 트레몰로의 괴물 같은 음향을 듣고 있으면, 도대체 왜 이 피아니스트가 그토록 음반 만드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는지 물어보고 싶을 정도다. 만약 이 피아니스트가 조금만 더 외향적이었더라면 드뷔시 연주사 전체가 뒤집어졌을 것이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이 연주의 입수 난이도가 연주의 질에 비례한다는 점이다. 에리쿠르께서는 애시당초 메이저 레이블 같은 곳은 생각하지도 않았고, 황송하게도 듣보 레이블인 kapp record에서 이 보석같은 연주들을 녹음하셨다했다(그래서 이 연주는 60년대 초에 녹음했음에도 모노랄이다). 그 덕에 kapp record는 역사에 이름을 남기게 되었다 Ivory classics에서 에리쿠르 탄생 100주년 기념 한정판으로 CD 전곡반을 냈다(아이보리 본사에서는 아직도 음반을 팔고 있다. 어서 주문하시오.) 이외에도 낙소스 아카이브에서 전주곡집만 뽑아서 음원을 냈고, 드뷔시 유니버셜 에디션에 소품 몇 곡 정도가 들어가 있다. 현재 CD를 구할 수 있는 유일한 주문처는 아이보리 본사 뿐이다(아마존 중고매장에서는 이 음반 초반을 185달러에 판다......). 그야말로 기가 막힌 연주에 범상치 않은 입수 난이도를 자랑하고 있다. 나는 우연찮게도 이 음반을 중고매장에 내놓으신 누군가(그 분께 절이라도 드리고 싶다)와 재고를 알려주신 '누군가'의 도움 덕택에 지금 집에서 이 음반을 잘 듣고 있다(누구신지는 몰라도 정말 감사합니다).

 

 정말 내가 이렇게 자신있게, 아니 간절하게 추천하는 음반이 다시 나올지 의문이다. 보이면 당장 사라. 낙소스 아카이브건 유투브건 보이면 무조건 들어봐라. 듣고 싶으신 분들은 내가 립을 떠서라도 보내드릴 테니 제발 들어라. 그리고 이거 안 듣고서 어디 가서 드뷔시 듣는다고 얘기하지 마라. 제발.

'음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음반일기 / 2017년 10월  (0) 2018.10.20
말6  (0) 2015.11.29
드뷔시 전주곡 1집 L.117 - 9.99종 비교감상  (5) 2014.08.23
2014.5.14~15. 르네상스 음악가들  (0) 2014.05.15
좋아하는 연주에 대한 개인적인 관점  (6) 2014.03.26
Posted by 여엉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