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반지>와 관련해 재미있는 논문을 읽은 적이 있다. 논문 중 가장 흥미있었던 부분은 <반지>를 4원소설과 결부시킨 내용인데, <라인의 황금>은 라인강 속에서 노래하는 라인의 처녀들로 시작해(물) 한탄하는 라인의 처녀들로 끝나고 있다(역시 물). <발퀴레>는 폭풍우 속에서 쫓기는 지그문트를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해(공기) 보탄이 로게를 시켜 만들어 낸 불 속에서 영원히 잠드는 브륀힐데를 보여주는 것으로 끝난다(불). <지크프리트>는 니벨룽족이 거처하는 지하 니벨하임에 거처하는 난쟁이 미메의 대장간에서 시작해(흙과 불) 브륀힐데를 둘러싼 화염을 지크프리트가 뚫고 들어가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하는 장면으로 끝난다(불). <신들의 황혼>은 세계수 앞에서 운명의 실을 꼬는 3명의 노른이 하는 지혜의 샘 이야기로 시작해(물) 불타는 발할성과 황금의 반지를 되찾은 라인의 처녀를 보여주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불과 물).

 

 (2) 많은 사람들이 간과하는 부분이지만, <라인의 황금> 전주곡은 동기발전의 측면에서 바그너가 1850년대에 작곡한 음악 중 가장 뛰어난 부분이다(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이 곡의 중요성은 <트리스탄> 전주곡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바그너는 이 곡에서 '동기의 발전' 자체에 초연하다. 악곡은 화성적 조직의 가장 기본적인 틀인 저음의 공허 5도로 시작해 E♭ 호른을 8분할 시킨 상승 음계로 이어진다. 화성적인 뼈대는 E♭의 주3화음(E♭-G-B♭)에서 한 발자국도 떠나지 않는다. 아마 이렇게 화성적 변화가 없는 곡도 드물 것이다. 그러나 저음이 지속적으로 연주하는 두 음, 즉 E♭음과 B♭음을 토대로 하나씩 차곡차곡 쌓아 올라가는 풍성한 배음렬의 향연은 보기 드문 견고함을 낳는다. 바그너는 이 전주곡을 통해 베토벤이 '공허 5도'로 제시한 '음악으로 낯설게 하기'를 뛰어넘는 무언가를 제시했다.

 

 (3) 보물도 뺏기고 타른헬름도 뺏기고, '목숨만큼이나 소중한' 반지까지 빼앗긴 알베리히가 퍼붓는 저주를 들으면서 느낀 감정은 섬뜩함이 아니라 불쌍함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알베리히는 셰익스피어의 반유대주의적인 희곡 <베니스의 상인>에 나오는 샤일록만큼이나 불쌍하다. 샤일록은 주위 사람들이 모두 그를 별다른 이유없이 혐오하고, 가까운 지친들마저 자신을 배신하려 하며, 자신의 정당한 권리마저 행사하지 못하는 불운과 안타까움의 아이콘이다. 알베리히도 마찬가지다. 저주가 끝나고 알베리히가 사라지자마자 로게가 내뱉는 비야낭거림은 눈쌀이 찌푸려질 정도다. 생각해보면 바그너가 <라인의 황금> 피날레에 그토록 과장되고 허세 가득한 음악을 배치한 것도 이해가 간다. 강탈과 속임수와 협박을 동원해 재물을 빼앗고, 그것을 영구히 자신들의 소유로 만들고 싶어하며, 정당한 자들의 간청을 일거에 무시하는(<라인의 황금> 피날레에서 라인 처녀들의 한탄을 보탄이 어떻게 대하는지 생각해 보라) 신들의 작태에 가장 잘 어울리는 음악은 바로 허세와 과장으로 가득한 행진곡풍 음악일 것이다.

 

 (4) 현악기 연주자들이 가장 연주하기 싫어하는 곡에 반드시 들어갈 - 하지만 이 음악을 뛰어넘는 R.슈트라우스의 <돈 후안>이 나올 줄은 현악기 연주자들도 미처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 <발퀴레> 3막 피날레 <마법의 불 음악>은 바그너의 가장 감동적인 엔딩 음악으로 손꼽히기에 모자람이 없다. 보탄도 브륀힐데도 이것이 영원한 이별이 될 것임을 알고 있다. 보탄은 주신主神의 위엄과 아버지의 자애로움을 겸비한 모습을, 브륀힐데는 특유의 통찰력과 기백을 가진(내가 생각하기에 바그너 오페라 역사상 가장 '지혜로운' 여성은 브륀힐데이며, 가장 '지적인' 여성은 이졸데다), 그러나 한 명의 '여인'으로 그 엔딩에 임한다. 로게는 보탄을 비롯한 신들의 운명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나, '불'의 형태로 최후의 순간까지 보탄의 권력 밑에 남아 있게 된다. 허나 '닫힌 이야기'인 지그문트와 지클린데의 이야기기 아니라, '열린 이야기'인 브륀힐데를 엔딩 장면에서 다룬다는 점에서 <발퀴레>의 끝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다.

 

 (5) 지크프리트가 새의 인도를 받아 숲을 빠져나가는 장면을 끝으로 <지크프리트>의 2막은 막을 내리고, 바로 <지크프리트> 3막 전주곡이 흐른다. 2분 가량에 지나지 않는 이 전주곡은 사실 바그너 작곡 과정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한 부분을 차지한다. 바그너는 <지크프리트> 2막을 작곡하고 난 후 무려 12년 동안 <반지>에 손을 대지 않았다. 그 '단절'의 기간을 거치고 난 뒤 바그너가 <지크프리트> 3막에 손을 대기 시작했을 때, 그는 자신이 일관되게 지켜오던 원칙 하나를 밀어냈다. 원래 바그너는 서곡을 통해 극의 중요한 내용을 미리 음악으로 전달하는 것을 매우 싫어했다. 우리가 <라인의 황금> 전주곡을 통해 접할 수 있는 것은 쉼없이 굽이치는 라인의 물결뿐이다. <발퀴레> 전주곡도 마찬가지다. <트리스탄> 전주곡은 잘 알려져 있듯 극이 시작하기 전 이야기를 음악을 통해 전달할 뿐,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운명이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해서는 그림자도 비치지 않는다. 그러나 <지크프리트> 3막 전주곡을 듣고 있으면 3막이 어떻게 진행될 지 눈 앞에 훤히 보인다. 보탄의 정교한 시나리오대로 움직이는 지크프리트. 방랑자의 모습을 한 보탄과 지크프리트의 대결. 그리고 불을 뚫고 브륀힐데 앞에 선 지크프리트. 이 모든 것이 그 짧은 전주곡 속에 응축되어 있다.

 

 (6) 보탄이 항상 들고 있는 창 궁니르는 그 위협적인 모습과 권위를 보장하는 신화(<신들의 황혼> 초입에서 노른이 말하기를, 보탄이 세계수 가지를 꺾어 그 창을 만들었다 하더라)와는 달리, 실제로 사용하는 장면을 보기가 힘들다. 그 창으로 누군가를 죽인 적은 오직 한 번, <발퀴레>에서 지그문트를 죽였을 때다. 그것도 보탄이 그것을 원했기 때문이 아니라 프리카가 그것을 강하게 지시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크프리트>에서 궁니르는 지크프리트와 붙자마자 무참하게 두 동강이 나버린다. 당연한 결과다. 보탄의 궁니르는 실제 사용하는 무기가 아니라 고대 로마 집정관 호위자들이 들고 다니던 권표, 즉 파스키스(Fascis. 단어의 모습에서 알 수 있듯 파시즘의 어원이다)와 비슷한 권위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7) '라그나뢰크Ragnarøkkr.' 원래 '신들의 운명', '신들의 몰락'이라는 의미로 통용되던 고대 노르드어를 '신들의 황혼'이라는 의미로 사용한 가장 중요한 인물은 바로 바그너다. '신들의 황혼'이라는 시적인 표현은 이전부터 있었던 것이 확실해 보이나, 바그너는 이것을 온전히 자신의 표현으로 만들었다.

 

 (8) <신들의 황혼>에서 지크프리트, 군터, 구트루네, 하겐, 그리고 브륀힐데가 등장하는 이야기는 원전을 찾아보면 그 재배치 때문에 골치가 아프다. 게르만 고유의 전설인 벨숭 사가에서 브륀힐트(브륀힐데)는 오딘의 명을 어겨 타오르는 불길에 둘러싸인 채 영원히 잠들어 있지만, 불의 벽을 돌파한(또는 뛰어넘은) 지크프리트가 그녀에게 키스에 깨어나고, 그의 연인이 된다. 지크프리트는 그녀를 잠시 떠나 여행하다가 기우키왕의 궁전에 머물게 되는데, 그곳의 왕녀인 구드룬의 구애를 받지만 거절한다. 구드룬의 어머니인 그림힐트의 마법약으로 지크프리트는 기억을 잃고 구드룬의 오빠인 군나르의 신하가 된다. 그리고 구드룬은 그와 약혼한다.

 군나르는 브륀힐트를 아내로 맞이하고 싶어하기 때문에, 지크프리트는 군나르로 변장하고 불의 벽을 넘어 브륀힐트에게 청혼하며, 이로 인해 지크프리트-구드룬과 군나르-브륀힐트의 결혼식이 치러지기에 이른다.

 하지만 브륀힐트는 지크프리트가 자신에 대한 기억을 잃은 것에 대해 의심을 가지며, 남편 군나르와의 합방을 거부한다. 의심은 질투와 증오로 변하고, 결국 브륀힐트는 구드룬과 말다툼을 하던 중 분노한 구드룬에게 모든 것을 다 듣게 된다. 브륀힐트는 군나르의 밑에 있던 호그니를 끌어들여 지크프리트의 약점을 캐내고, 그를 죽이기에 이른다. 그리고 그녀는 지크프리트의 장례식 날, 불 속에 뛰어들어 지크프리트와 함께 죽음을 맞는다.

 중세 서사시 <니벨룽의 노래>에서 인물들의 성향은 약간씩 바뀐다. 지크프리트는 크림힐트(여기서는 벨숭 사가의 구드룬에 해당한다)와의 결혼을 위해 자신의 주인인 군터왕을 도와 여왕 브륀힐트의 난제들을 해결하고, 브륀힐트는 군터가 영웅이라고 생각하여 그와 결혼한다. 그리고 지크프리트는 크림힐트와 결혼한다.

 이후 브륀힐트는 크림힐트와 말다툼을 하던 중 지크프리트가 군터를 도와 그녀의 난제들을 해결했다는 폭로를 듣게 된다. 분노한 브륀힐트는 용사 하겐(사가의 호그니에 해당)을 부추겨 지크프리트를 죽인다. 니벨룽의 노래에서 브륀힐트의 이후 이야기는 전하지 않는다.

 간단히 말해서 벨숭 사가에서의 브륀힐트는 불행하고 비극적인 여인이며, 중세 서사시에서의 브륀힐트는 카리스마적인 악녀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 바그너는 이 두 원전을 참고해 <신들의 황혼>의 스토리를 만들었다. 물론 알베리히와 하겐의 연관성은 바그너의 창작이다. 애당초 선악의 구분이라고 할 것이 없는 호그니(또는 하겐)가 바그너의 손에 의해 악역이 되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재미있다. 그리고 앞의 두 원전에서도 브륀힐트(브륀힐데)가 판본에 따라 주인공이 되었다가 악역이 된다는 것도 재미있다. 바그너는 두 원전을 혼합해 <신들의 황혼>의 브륀힐데를 만들었을 것이다.

 

 (9) <신들의 황혼>의 대피날레가 히틀러를 자극했다는 것은 유명한 역사적 사실이지만, 바그너는 피날레를 통해 신과 영웅들의 시대가 끝나고 인간들이 스스로 일어서는 시대를 넌지시 암시한다. 바그너의 악극에서 너무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반유대주의적 모티브들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그 바그너 음악의 한 쪽 얼굴 때문에 이제 완전히 가려질 지경에 놓인 또다른 바그너 음악의 모습, 예술을 통해 이상에 도달하고 불평등한 사회적 모순을 지적하는 바그너의 모습이다. 바그너 음악의 잘못된 점을 지적하는 것은 너무도 쉽기 때문에 이제 바그너 음악을 단 1초도 듣지 않은 사람들도 바그너 음악의 잘못된 점을 기계처럼 술술 외는 것이 가능하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바그너 음악의 다른 면을 지적하는 사람들, 또다른 바그너 음악의 모습을 보는 사람들은 비난받기 일쑤다. 그러나 예술가의 얼굴은 결코 평면적이지 않다. 우리는 바그너 음악의 한쪽 얼굴만을 집중해서 바라보느라, 그 얼굴이 다른 각도에서 어떻게 보이는지에 대해서는 미처 생각하지 않는 것은 아닐까?

 

 (10) 사족 : 항상 들을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반지>는 너무 길다. 전체 길이가 두 시간 정도만 짧았더라도 집중력이 두 배로 뛰었을 것이다. 물론 그렇지 않았다 해도 다 들었을 테지만.

Posted by 여엉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