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반일기 / 2017년 11월

음반 2018. 10. 20. 22:35


 2017.11.1 (수)


 칼 뵘 / 브루크너 교향곡 4번 (Decca)


 약간 느릿한 템포. 유려하고 풍성한 소리. 노박판 특유의 검박한 화성. 나쁘지 않은 출발점이나 더 많은 연주를 들어야 한다. 여기에 함몰되지 말라.

 ※ 브루크너 음악에서 방향성을 결정하는 것은 동기발전이 아닌 화성이다. 화성은 차근차근 쌓여가다 정점에서 웅장한 클라이맥스를 이룬다. 하지만 모르고 듣는 입장에서는 지루한 동기 반복과 갑자기 튀어나오는 (물론 아니지만) 주제들로 혼란을 느끼게 될 것이다.



 2017.11.3 (금)


 브릴리언트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에디션 CD 8 (Brilliant)


 한 번 듣고 봉인했던 연주. 페터 담의 드레스덴 호른 연주가 좋다. 켐페는 평범. 오보에 협주곡의 탁월함은 알겠는데, 난 이 곡이 지루하게 느껴진다(2018년 현재는 그렇지 않음). 2008년 어느 날 교향악축제 때 겪었던 끔찍한 기억 때문일까? 코흐/카라얀(DG)으로 들으면 좀 더 나아질까?(실제로 그래서 코흐/카라얀으로 치유함) 클라리넷/파곳의 듀엣 콘체르티노는 이상하리만치 곡이 기억나지 않는다.



 2017.11.5 (일)


 칼 뵘 <발퀴레> 67년 바이로이트 실황 (Philips)


 뵘 반지의 가장 뛰어난 성취. 뵘의 반지를 최고의 반지라 할 수는 없겠으나, 앙상한 가운데 빛나는 강인한 박력은 이 반지 최고의 미덕이다. 배역들은 전성기 끄트머리에 위치한 가수들과 아직 제 역량을 다 발휘하지 못하는 가수들이 섞여 있는데, 다행이 지휘자와 어긋나는 일도, 혼자 튀는 일도 없다. 다만 보탄 역이 테오 아담이 로게를 부르는 순간의 그 허한 가창은 참…….

 ※ 논쟁을 일으키지 않는 바그너는 바그너가 아니다. 바그너를 좋아하는 사람이건 싫어하는 사람이건, 클래식 음악을 듣는 사람은 바그너를 우회할 수 없다. 사이먼 래틀의 말을 빌리자면, '피할 수 없는 괴물'이기 때문이다.



 2017.11.8 (수)


 칼 뵘 <살로메> 70년 함부르크 실황 (Brilliant)


 이 연주는 솔직히 말해 쓰레기다. 뵘의 알슈 연주 중에서도 최하급이다. 왜 뵘을 듣는 이들이 주화입마에 걸리는지 이해가 간다. 이런 형편 없는 연주들을 뵘의 명연이라고 추천하니 안 그럴 수가 있나. 귀네스 존스의 형편없는 가창은 덤이다.



 2017.11.9 (목)


 카잘스 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 1번~3번 (EMI)


 로스트로포비치가 "Rhapsodic"이라 부른 연주. 생각보다 적은 비브라토, 옛 운궁법이 두드러지는 역사적인 연주. 다만 에트빈 피셔의 평균율(EMI)을 들을 때와 같은 애정이 생기지는 않는다. 나의 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의 이상은 슈타커(Mercury)와 장드롱(Philips), 또는 그 두 지점 사이에 위치한 어딘가다.



 2017.11.12 (일)


 카잘스 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 4번~6번 (EMI) / 스토코프스키 스테레오 컬렉션 CD 1, 2, 8 (Sony)


 카잘스의 4번 전주곡 템포는 내가 생각하고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느렸다. 기억이 잘못된 탓일까.

 5~60년대 미국 오케스트라 지휘자들의 파야 애호는 참 독특한 현상이다. 내 취향은 곡도, 연주도 바그너 쪽으로 좀 더 기운다. <잠자는 숲 속의 공주>는 쓰레기같은 피스투라리(Philips)보다는 낫다.



 2017.11.13 (월)


 윌리엄 카펠 RCA 콜렉션 CD 1 (쇼팽 마주르카 발췌) (RCA)


 쇼팽을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마주르카만큼은 좋아한다. 가장 자주 듣는 마주르카 연주가 이것인데, 선곡, 해석, 음색, 루바토 어느 것 하나 모자람이 없다. 카펠은 수식어가 필요치 않은 천재였다.

 ※ 쇼팽은 마주르카를 쓸 때 폴란드 민속음악뿐만 아니라 스카를라티의 자유분방한 건반악기 소나타에도 영향을 받았음이 틀림없다. 자유분방한 마주르카 중 몇 곡을 꼽자면, 우선 Op.7-5 C장조는 언제 들어도 즐겁다. 무슨 일을 해도 즐거웠던 내 20세 무렵의 기억을 되살려주는 곡이다. Op.33-4 B단조는 내가 생각하는 쇼팽 최고의 마주르카다. Op.68-3 F장조에서는 바르톡의 냄새가 난다. 이런 음악을 더 발전시켰더라면 좋았을 텐데…….



 2017.11.14 (화)


 스토코프스키 소니 콜렉션 CD 5 (Sony)


 <카르멘> 모음곡은 프리차이(DG)보다 더 좋다. 스토코프스키는 구린 오케스트라를 맡을수록 능력치가 상승하는 기이한 지휘자였다.



 2017.11.18 (토)


 에셴바흐 쇼팽 전주곡 (DG)


 에셴바흐를 아주 좋아하지만, 이 연주는 너무 소극저기라 호감이 덜하다. 살금살금 다가와 듣는 사람을 설레게 하는 터치와 음색은 그대로지만, 쇼팽 전주곡에는 좀 더 과감한 해석이 필요하다. 그래도 세세한 기호를 세심하게 재현하는 9번은 마음에 들었다.

 ※ 원래 좋아하는 전주곡은 9번과 12번이었는데, 요즘은 2번과 23번에 더 마음이 간다.



 2017.11.19 (일)


 스토코프스키 소니 스테레오 콜렉션 CD 4, 7, 9, 10 (Sony)


 스토코프스키 소니 스테레오 콜렉션 완청. 일단 가장 먼저 거명할 녹음은, 아이브스 연주사에 한 획을 그은 교향곡 4번 연주다. 하지만 들으실 때는 틸슨 토마스/시카고 심포니(Sony)로. 이 연주는 아직 정립이 덜 되었다(특히 3악장).

 시벨리우스는 트럼펫이 마음에 안 드는 것만 빼면 좋은 연주다.

 멘델스존 교향곡 4번/비제 중에서는 비제 교향곡 C장조 쪽이 더 마음에 들었다.

 브람스는 안타깝게도 평범한 연주.



 2017.11.22 (수)


 칼 뵘 <라인의 황금> (Philips)


 한 호흡에 곡을 다 듣게 만드는 뵘의 탁월한 능력은 여전하다. 그러나 좀 더 유장한 흐름이 그립다. 가수들의 수준은 <발퀴레>에서 이미 설명했으니 넘기지만, 미메 역의 볼파르트는 너무 과장된 모습이라 오히려 꺼려진다는 점을 적어둔다.



 2017.11.23 (목)


 브릴리언트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에디션 CD 1 (Brilliant)


 (켐페/드레스덴의 관현악곡)

 <짜라투스투라>는 별로다. 악보를 무시하는 고리타분한 관행이 너무 많다. 13년 전에 녹음한 뵘(DG)보다도 더 고리타분하게 들리면 어쩌라는 말인가.

 <죽음과 변용>은…… 그냥 뵘의 72년 실황(DG)이 그립다.

 <장미의 기사> 모음곡 또한 앞의 둘과 비슷한 수준이다. 켐페는 실황으로만 들어야겠다는 생각이 강해지는 하루였다.


 

 2017.11.25 (토)


 라이너 <세헤라자데> (RCA)


 1악장의 거친 바이올린 고음을 제외하면 모든 것이 완벽한 <세헤라자데>.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랴. (유투브에 올라온 LP 버전을 듣고 생각을 고친다. CD로 리마스터링하면서 본래 색감과 음향을 잃어버리고 왜곡된 중요한 사례 중 하나가 바로 이 연주다.)

 스트라빈스키 <나이팅게일>은 이 곡을 듣게 해준 고마운 연주지만, 좀 더 정교한 새 연주가 필요하다. 이건 너무 낡고 뚱뚱하다.



 2017.11.26 (일)


 브릴리언트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에디션 CD 2 (Brilliant) / 레바인 말러 교향곡 9번 (RCA)


 <틸 오일렌슈피겔>은 그냥저냥. 그런데 성직자 비꼬기 직전에 쉼표 페르마타가 있었던가?

 <돈 후안>도 평범 그 자체.

 <영웅의 생애>에서는 초반에 다른 연주에서 들을 수 없었던, 트럼펫의 낮은 빰빠라 밤- 소리가 들린다. 그런데 그게 전부다.

 말러로 넘어가도록 하자. 레바인은 재능 있는 지휘자다. 박자 내의 강약을 정확하게 딱딱 맞아 떨어지게 하면서 경쾌한 질서를 만들어낸다. 번스타인의 9번(DG)이 왜 무질서하게 들렸는지 이제야 이해가 간다. 박자 내의 강약을 무질서하게 휘저어놓으니 어디가 첫 박이고 어디가 약박인지 알 수가 있나. 레바인의 말러 9번은 연주의 좋고 나쁨을 떠나, 나에게 박자 내 강약 개념의 중요성을 알려준 연주였다.

 (한 마디 더 추가하자면, 레바인은 나에게 깨끗하고 정확한 음정의 중요성도 가르쳐 준 지휘자다. 유투브에서 코플랜드의 <보통 사람들을 위한 팡파르>를 레바인 영상물로 들은 적이 있었는데, 난 그렇게 깨끗하고 정확한 음정을 이전에도 이후에도 들어본 일이 없다.)



 2017.11.27 (월)


 브릴리언트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에디션 CD 18 (Brilliant)


 알슈의 덜 알려진 신비한 음악들. 낭송자가 서사를 진행하는 동안 악기가 음악을 진행하는 멜로드라마는 쇤베르크가 유명하지만, 사실 슈트라우스가 먼저 시도했다. 특히 <이녹 아덴>은 기묘한 얼룩처럼 기억에 남는다.



 2017.11.29 (수)


 브릴리언트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에디션 CD 3 (Brilliant)


 (켐페/드레스덴 관현악곡집)

 <메타모르포젠>은 살 떨리게 소름돈는 카라얀(DG) 말고는 도저히 다른 대안을 생각해 낼 수가 없다.

 <알프스 교향곡>은 반대로 대안이 너무 많다. 어째서 드레스덴이 녹음한 <알프스>는 최고의 결과물이 나오지 않는지 참 궁금하다. 뵘(DG), 켐페, 시노폴리(DG), 루이지(Sony) 모두…….



 2017.11.30 (목)


 브릴리언트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에디션 CD 4 (Brilliant)


 (켐페/드레스덴 관현악곡집)

 <돈 키호테>는 토르틀리에 말고 기억나는 게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 토르틀리에가 생각보다 대단하다. 쿠프랭 편곡은 처음 듣는데, 알슈식 관현악 편곡의 교본으로 보아도 될 듯 하다. 알슈는 쿠프랭을 편곡하면서 속으로 얼마나 즐거워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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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여엉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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