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반일기 / 2017년 10월

음반 2018. 10. 20. 22:07


 작년 말부터 음반을 들을 때마다 적어나갔던 일기를 올리기로 했다.

 영 못 써먹을 글이지만, 너그럽게 봐주셨으면 합니다.




 2017.10.3 (화)


 리히테르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 / 차이콥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 (DG)


 나의 첫음반. 첫사랑의 법칙은 이 연주도 예외가 아니다. 물론, 라흐마니노프 2번에서는 바사리의 연주(DG)가 더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나도 그게 무슨 뜻인지 잘 안다. 그러나 리히테르의 연주에는 기묘한 불온함이 살아서 꿈틀댄다. 그 불온함은 빛과 어두움의 아름다운 직조로 이루어져 있다. 그것이 사라지지 않는 이상, 리히테르의 연주가 잊힐 일은 없으리라.



 2017.10.4 (수)


 발터 브람스 교향곡 4번 등 / 콜롬비아 심포니 오케스트라 (Sony)


 예전에는 참 좋아했지만, 이제는 올이 풀린 합주력과 거칠고 탁한 소리가 결점으로 다가온다. 발터를 좋아하신다면 뉴욕필 모노 녹음(Sony)을, 파괴력을 원한다면 클라이버 베를린 실황(Memories Excellence)을, 화려한 음향을 원한다면 카라얀을 권하고 싶다.



 2017.10.5 (목)


 카를로스 클라이버 베토벤 교향곡 5번, 7번 (DG)


 나는 이 유명한 연주를 좋아하는 편이지만, 5번 4악장에서 튀어나오는 갑작스럽고 거친 소리는 좋아하지 않는다. 7번은 그런 것이 덜하지만, 그렇다고 더 낫지도 않다.

 ※ 이제는 7번 3악장이 어떤 구조인지 전보다 더 잘 알지만, 여전히 이 악장을 좋아할 수가 없다. 나는 7번 3악장 스케르초의 획일적인 리듬이 싫다.



 2017.10.6 (금)


 칼 뵘 슈베르트 교향곡 9번 <그레이트> (1976년 8월 25일 실황)


 칼 뵘의 경이로운 연주! 진중한 1악장, 억센 2악장, 기가 막힌 분위기를 자아내는 3악장, 그리고 폭발하는 4악장까지! 1악장 주부의 템포가 좀 아쉽기는 하지만, 이 정도 연주도 못하는 경우가 워낙 수두룩하기에 내 마음속 순위에서는 이 잘츠부르크 실황이 항상 수위를 다툰다.



 2017.10.7 (토)


 에머슨 현악 4중주단의 바르톡 현악 4중주 CD 1 (1번/3번/5번) (DG)


 바르톡의 현악 4중주는 버릴 곡이 하나도 없다. 꿈틀대는 반음계가 무조를 향해 천천히 나아가는 1번, 전성기 특유의 난해함을 자랑하는 3번, 완벽한 4번을 넘어 궁형구조의 심화를 이뤄낸 유쾌한 5번을 들었다. 에머슨의 연주는 잘 정리한 경지마냥 깔끔하다. 바르톡을 입문하고 싶다면 이 연주를 반드시 거쳐야만 한다.

 ※ 5번이 4번에 비해 덜 들리는 이유는 더 규모가 크고, 발전이 교묘하며, 동기를 잊어버릴 즈음에야 다시 등장시키기 때문이다. 하지만 5번은 4번 못지않은 걸작이며, 어떤 측면에서는 4번을 뛰어넘었다.



 2017.10.8 (일)


 쿠벨릭/베를린 필 드보르작 교향곡 8번/9번 (DG)


 쿠벨릭을 들을 때마다 항상 느끼는 것은 진리를 추구하는 진지한 이미지(이것이 심하면 연주가 재미없어진다), 응집력이 부족해서 약간 퍼지는 음향, 그리고 체코 음악에서 발휘하는 호방함이다. 이 연주는 호방함 대신 진지함이 두드러져 듣는 재미는 덜마다. 쿠벨릭의 명연은 <장엄 미사> 77년 실황(Orfeo) 같이 진지함이 구도의 경지에 이르렀거나, <타라스 불바>(DG) 같이 한껏 호방해질 때 등장한다. 단, 베를린 필의 소리는 언제나 1급이며, 플루트(제임스 골웨이)의 긴 호흡은 언제 들어도 대단하다.



 2017.10.9 (월)


 토마스 비첨 / 로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멘델스존 교향곡 4번 <이탈리아> (BBC)


 시원시원하게 뻗는 유쾌한 연주! 영국 지휘자 중 가장 탁월한 능력을 갖춘 지휘자답다.



 2017.10.10 (화)


 에밀 길렐스 <서정 소곡집> 20곡 발췌 (DG)


 길렐스 음색의 교본. 음색의 고유함이라는 측면에서 그는 호로비츠와 맞먹는 거장이다. 백 번 정련한 금속의 순수함과 고결함, 눈이 시린 광채와 강건함을 모두 지닌 피아니스트.



 2017.10.11 (수)


 호로비츠 스카를라티 소나타 18곡 발췌 (Sony)


 그는 터치와 페달링에 통달했다. 다만 몇몇 곡은 지루하고, 쳄발로 연주가 낫다는 생각도 든다. 그의 음악성은 차이콥스키의 <둠카>, 라흐마니노프, 스크리아빈 같은 레퍼토리에서 더 빛을 발한다.

 들으면서 항상 생기던 의문 하나 추가. 마지막 세 곡의 배치가 궁금하다. 16번째 곡은 D단조 곡이지만 마지막에 장조로 전환하며 희망을 주면서 끝나며, 17번째 G장조 곡은 밝고 화사하다. 하지만 마지막 18번째 곡은 C단조라는 작은 반전을 주면서 끝난다. 이게 호로비츠가 의도한 배치라면, 그럴 만도 하다.



 2017.10.12 (목)


 루빈슈타인 쇼팽 발라드/스케르초 (RCA)


 붉은 우단빛 음색을 가진 피아니스트 루빈슈타인. 그의 연주가 가진 생명력은 생각보다 훨씬 길다. 다만 이 스튜디오 음반은 이제 추천 1순위라고 하기에는 좀 아쉽다. 쇼팽의 광활한 시상을 거침없이 전개하는 발라드 연주와, 영혼의 빛과 어두움을 전개하는 스케르초 모두 좀더 달콤하면서도 어두운 연주를 찾게 된다. 특히 발라드 3번은 라흐마니노프의 1925년 연주를 들은 후로는 거기에 홀려버려서…….



 2017.10.13 (금)


 리히테르/라인스도르프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 2번 /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열정> (RCA)


 리히테르는 1960년 당시 자기 연주의 평균치 이하를 들려준다. 라인스도르프가 잡은 시카고 심포니의 연주는 솔직히 말해서 너무 구리다. 리히테르와의 합도 잘 맞지 않는다. 피아노는 템포를 죄였다 풀면서 가고 싶은데, 지휘는 쪼으기만 하는 게 대놓고 느껴질 정도다.

 커플링 곡인 <열정>은 옛날부터 고전으로 유명했다. 완성도는 실황이나 스튜디오나 크게 차이나지 않는다.

 ※ 우리를 삶으로부터 초탈하게 만들어주는 <열정> 2악장의 신성함과 심오함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갈기갈기 찢어 바치는 마음의 음악이라 해야 할까. 아니면 음침한 1악장과 격렬한 3악장 사이에 불안하게 자리잡은 먹먹하고 막막한 평화라고 해야 할까. 조용하고 고요하지만 앞뒤에 놓인 심연을 생각하면 코끝이 찡해진다.


 

 2017.10.15 (일)


 카라얀 시벨리우스 교향곡 4번~7번 (60년대 연주) (DG)


 깊은 잔향과 넓은 공간감, 세련된 해석이 일체를 이룬 수연. 힘과 추진력을 원한다면 50년대 연주(EMI)를 찾아야 하지만, 세련미에 있어서는 60년대 DG반을 뛰어넘는 연주를 찾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 시벨리우스 교향곡 4번에는 죽음과 함께 보냈던 시간이 축적되어 있다. 빽빽하게 뭉쳐진 음표들이 암덩어리같은 화음을 만들어 내면, 음울한 음악이 삶의 빛과 어두움을 성찰한다. 악장은 음-양-음-양의 구성을 취한다. 글로켄슈필이 대표하는 환상이 모두 허무였음을 깨닫는 4악장의 결말은 들으면 들을수록 기이하다.



 2017.10.18 (수)


 미트로풀로스의 모차르트 <돈 조반니> (Sony)


 완벽한 연주! 돈 조반니 역의 시에피도 위대하지만, 극명한 차이를 보이는 세 명의 여자 배역이 이 연주의 키포인트다. 복수를 꿈꾸는 고귀한 돈나 안나 역의 그륌머, 애증을 품고 돈 조반니를 추적하는 돈나 엘비라 역의 델라 카사, 그리고 순진하고 앙증맞은 체를리나 역의 슈트라이히까지. 거기에 기민해야 할 때와 관망해야 할 때를 귀신같이 아는 미트로풀로스의 지휘까지. 그야말로 신이 내린 타이밍에 나온 기가 막힌 연주다.



 2017.10.21 (토)


 칼 뵘의 슈트라우스 <엘렉트라> (DG)


 가수들도 뛰어나지만, 이 연주를 이끌고 구원하는 이는 다름아닌 지휘자다. 칼 뵘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연주사상 가장 거대한 두 이름이다(나머지 하나는 카라얀). 물론 이 연주가 칼 뵘 최고의 알슈 연주는 아니지만, 본능에 따라 두들기는 팀파니 연타만으로도 이 연주는 충분히 위대하다.



 2017.10.22 (일)


 스토코프스키 소니 스테레오 컬렉션 CD 3번과 6번 (Sony)


 음과 색채의 마술사 스토코프스키의 놀라운 소품집. 그리고 굴드와 함께한 베토벤 <황제>. 소품집은 마지막 쇼팽 전주곡 연주의 페르마타가 아주 인상 깊었다. 굴드와 함께한 <황제>는 도입구를 빼면 평범한 편이다.



 2017.10.23 (월)


 프리차이/안다 바르톡 피아노 협주곡 전곡 (DG)


 프리차이는 바르톡을 연주할 때 집중력 200% 향상 버프가 걸린다. 늘 미덥지 못한 결과물만 내놓는 베를린 라디오 심포니 오케스트라는 적어도 이 연주에서만큼은 프리차이의 의도를 정확하게 간파하고 나쁘지 않은 연주를 들려준다. 안다의 피아노는 안정감 있게, 무난히 바르톡의 음악을 연주한다. 다만 피아노와 지휘자, 오케스트라 모두 정해진 허들을 넘을 생각은 별로 없어 보인다. 유달리 얌전떠는 구석이 많다는 얘기다.



 2017.10.24 (화)


 칼 뵘 / 빈 필 베토벤 <전원>, 슈베르트 교향곡 5번 (DG)


 고현의 비브라토를 거의 없애다시피해서 많이 거칠다. 들으면 들을수록 장점은 줄어들고, 단점은 크게 느껴지는 그런 연주. 커플링 된 슈베르트 5번은 차라리 베를린 필 전집(DG)이나 실황 연주를 찾는 게 낫다. 소년의 싱싱한 생동감을 자랑하는 슈베르트 교향곡 2번 실황(Orfeo) 같은 모습을 애초에 스튜디오에서 기대하는 게 무리지만……….



 2017.10.27 (금)


 하스킬/마르케비치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0/24번 (Philips)


 하스킬의 피아노 소리는 여전히 매력 있다. 마르케비치의 지휘는 그냥 거칠다. 피아니스트와 지휘자가 완전히 다른 템포 개념을 가지고 연주를 하는 것 같다. 참고로 이 연주에는 웃기게 들리는 실수가 하나 있는데, 20번 1악장 카덴차가 끝나고 관현악이 복귀할 때 바이올린 주자의 음이탈이 그것이다.



 2017.10.29 (일)


 리히테르/로스트로포비치 베토벤 첼로 소나타 전곡(Philips), 칼 뵘 모차르트 교향곡 35-41번(DG)


 둘 다 이제는 너무나 지겨운 연주다. 틀에 박힌 베첼소 연주, 그리고 환장할 정도로 고리타분한 뵘 모교는 이제 몇 년 동안 들을 일이 없다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낄 정도다. 다만, 장드롱의 첼로 변주곡에는 약간의 흥미가 생겼다.



 2017.10.31 (화)


 칼 뵘 모차르트 목관 협주곡집 (DG)


 아주 길고, 아주아주아주 지루한 연주. 뵘이 지휘하는 현은 좀 앙상하게 들린다. 느린 템포에서도 전혀 흐트러짐 없이 꼿꼿하게 연주하는 관악기 연주자들(물론 스튜디오라서 그렇겠지만)의 실력만큼은 참으로 훌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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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여엉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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