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 연습곡> 1권 (Piano Etude, Livre I)

작곡 시기 : 1985년 완성

"나는 감옥에 있다. 한쪽 벽은 아방가르드, 다른쪽 벽은 과거다. 나는 달아나고 싶다." - 죄르지 리게티. 1993년

(아방가르드는 60년대와 70년대를 거치면서 그 폐쇄성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 폐쇄성에 질식할 것만 같은 기분을 느낀 것이 비단 리게티 혼자였던 것은 아니지만, 그가 이것에 대해 다른 이들보다 심각하게 고민했던 것만은 사실이다. 70년대의 ‘샛길’을 거쳐, 마침내 80년대에 이르러 그는 다시 버르토크를 비롯한 이전의 음악들과 마주한다. 그러나 그가 80년대에 보는 버르토크는 헝가리를 떠나기 이전에 생각했던 버르토크로의 ‘회귀’가 아니었고, 라헨만이 비난한 ‘퇴조’는 더더욱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원하던 음악, 미래를 위해 열려 있는 동시에 동시대인에게도 열려 있는 음악을 쓰기 위해 노력했고, 그 성과물은 피아노 협주곡과 3권의 <피아노 연습곡>으로 나타난다. 리게티는 이 새로운 음악을 쓰기 위해 모든 음악적 가능성에 문을 활짝 열었다. 중세 14세기 아르스 수브틸료아 시대의 음악으로부터 현대 비밥과 로큰롤까지, 죠스깽 드 프레의 엄격한 대위법에서부터 남부 아프리카의 복잡한 폴리리듬 음악까지 모든 것을 끌어들인 작곡가는 70년대와 80년대의 가장 중요한 두 만남, 찰스 아이브스와 콘론 낸캐로우의 음악까지 끌어들이는데 성공한다. 수많은 조우를 통해 리게티가 발전시켜 나간 것은 다차원적인 폴리포니, 즉 폴리리듬과 폴리메터였다. 여섯 곡으로 이루어진 <피아노 연습곡> 1권에서는 위의 두 가지 양식형성방식이 두드러진다.

리게티의 피아노 연습곡은 장르 간의 엄격한 구분이 조금씩 무너져 내리고 있다는 증거다. 아방가르드와 재즈, 모던 록을 구분하려는 시도는 이제 조금씩 힘을 잃고 무의미해질 것이다. 혁명과 분열로 점철된 20세기 음악은 이제 다시 구심점을 찾고 통합을 위한 거대한 시도를 앞두고 있다.)

1곡 <무질서> (1.Désorde. Molto vivace)

(단순하게 시작한 패턴이 원형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게 변화하는 첫 곡. 제목인 <무질서>는 곡의 구성원리를 표현한 것으로 보이며, 프랙탈 기하학의 방식을 사용해 점점 복잡해진다. 한 손은 검은 건반만을 연주하고, 다른 한 손은 흰 건반만을 연주하면서 5음 음계와 7음 음계가 공존하는 상황이 펼쳐진다. 이 과정에서 오른손은 8분음표 단위가 하나씩 줄어드는데, 결국 이 과정을 통해 본래의 패턴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곡이 변한다. 곡의 중간에서는 이 방향이 반대로 바뀐다. 연주의 난이도에 비해 화성적인 변화는 적은 편이다.)

2곡 <개방현> (2.Cordes à vide. Andantino con moto)

(첫 곡과는 달리 완전 5도의 연속으로 이루어지는 두 번째 곡. 마치 바이올린이나 첼로가 개방현을 켜듯 현악기의 이디엄을 건반악기로 그대로 옮겨온 곡이다. 연주의 어려움보다는 음색에 대한 연구가 필요한 곡으로, 특히 5도로 하행하는 아르페지오 위에서 움직이는 반음계적 변화는 이 곡의 화성적 변화에 주의를 기울어야 함을 일깨우고 있다. 곡이 진행됨에 따라 8분음표의 느린 움직임은 점차 세분화되고 빨라지고 강세도 커지면서 고음역에서 정점에 이른 후, 곧바로 저음역의 조용한 소리로 급변한다. 그리고 ‘마치 멀리서 호른이 울려나오는 것처럼’ 노래하는 선율이 등장하며 끝을 맺는다.)

3곡 <막힌 건반> (3.Touches bloquées. Presto)

(테리 라일리, 스티브 라이시 등 미니멀리즘 음악가들과 접촉한 이후인 70년대 중반부터 사용했던 ‘건반 차단 기법’을 사용한 음악. 한 손이 미리 건반을 눌러놓기 때문에 손가락이 끊임없이 규칙적으로 움직이지만 실제로는 전혀 고르지 않은, 절뚝거리는 소리가 난다. 중간부에서는 양손이 함께 옥타브로 빠르게 진행하는 부분이 등장한다.)

4곡 <팡파레> (4.Fanfares. Vivacissimo)

(3-2-2의 악삭 리듬 패턴이 가장 뚜렷하게 드러나는 4곡. 비슷한 리듬을 사용한 호른 3중주 2악장을 생각나게 하는 곡이다. 증4도 관계에 있는 두 가지의 4음 음계(각각 C-D-E-F, F#-G#-A#-B)로 이루어진 오스티나토가 옥타브만 바꾸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 나타나는 가운데, 네 개의 화음이 하나의 악구를 이룬 이중 선율인 화음들이 나오다가 뒤로 갈수록 점차 얽히면서 불협화적인 복조성의 지배를 받는다. 뿐만 아니라 양손에서 함께 움직이던 리듬 또한 점점 오스티나토와 변덕스러운 이중 선율 사이에서 얽히면서 복잡해진다.)

5곡 <무지개> (5.Arc-en-ciel. Andante molto rebato)

(4번과 6번 사이에서 쉬어가는 느낌의 5번 곡. 작곡가는 이 곡이 셀로니어스 몽크와 빌 에반스의 재즈 음악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밝힌 바 있다. 재즈 음악은 12음을 한꺼번에 사용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몇 안 되는 음악이니, 곡의 제목 ‘무지개’가 모든 색채의 스펙트럼을 의미하는 단어라고 생각한다면 과연 리게티 다운 제목 붙이기라고 할 수 있겠다. 당연히 곡은 모든 음계로 펼치는 스펙트럼을 기가 막히게 잘 보여준다. 양 손의 박절이 점차 분화하고 강세가 상이하게 붙여진 폴리리듬 위에서 느릿한 선율이 흘러간다. 화성적인 색조는 점점 풍요로워지며 점점 다채로워진다.)

6곡 <바르샤바의 가을> (6.Automme à Varsovie. Presto)

(표제의 제목은 쇼팽을 염두에 두고 쓴 것이 아니라, 1956년부터 개최되던 폴란드의 현대음악 축제를 기념하기 위해 쓴 것이라 한다. 정치적 탄압 속에서 새로운 음악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는 동료들에게 바치는 헌사로 볼 수 있다(리게티가 고국인 헝가리에서 어떤 일을 겪었는지 생각하면 더욱 공감이 간다). 전체적으로 퍼셀 풍의 라멘토 베이스가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곡이다. 독주자는 두 개 또는 세 개에서 최대 네 개의 다른 속도의 성부를 연주해야 하며, 그 비율은 3:4:5:7로 벌어진다. 폴리리듬에 대한 작곡가의 타고난 재능이 그대로 드러나는 곡이다.)

 

Posted by 여엉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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