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보름도 더 지난 이야기지만) 2019년 4월 16일, 피아니스트 외르크 데무스가 세상을 떠났다. 향년 90세.

 이미 장례식도 예전에 끝나고, 추모하던 사람들도 전부 다 일상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항상 굼뜨고 늦는 일개 클래식 음악 덕후가 뒤늦게 그를 추모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한정되어 있다. 고작 그의 음반을 들으면서 글을 몇 자 끼적이는 정도가 그런 일에 해당된다.

 

 데무스에 대해 사람들이 알고 있는 지식은 대개 단편적이다. 명 피아니스트 에트빈 피셔의 제자, 빈의 3총사라 불렸던 데무스/바두라-스코다/굴다의 한 축을 이루는 인물, 정묘한 음색과 엄격한 해석을 고수하는 몇 안 남은 독일 피아니즘의 거장. 이 정도를 기억하면 그래도 데무스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내가 데무스를 추모하기 위해 소개하는 음반은 그가 60년대에 녹음한 드뷔시 전집이다.

 사람들은 데무스의 드뷔시 하면 스튜디오 레코딩이나 실황에서 끼워 녹음한 단편적인 소품 연주만을 기억할 것이다. 그러나 데무스는 이미 60년대 후반에 CD 다섯 장 분량의 드뷔시 전집을 완성한 바 있고, 이 전집의 완성도가 (내가 그토록 높게 평가해온) 30년대의 기제킹 연주나 에리쿠르와 맞먹을 정도로 높기 때문에 이 기회를 빌어 소개하려 한다.

 부디 이 글이, 국내에서 유독 한정된 평가만을 받는 그의 위상 재고에 조금이나마 역할을 하기를 빈다.

 

 수록 순서를 따라 전집을 완청하다 보면, 첫 레퍼토리인 <잊혀진 영상>부터 신선한 충격을 받게 된다.

 사실 드뷔시는 <영상>이라 이름 붙여진 작품집을 3개 만들었다. 1905년에 출판한, '물에 비친 그림자', '라모를 찬양하며', '움직임'이라는 부제가 붙은 3곡이 1집, 1907년에 출판한, '잎새를 스치는 종소리', '황폐한 절에 걸린 달', '황금 물고기'가 2집이다. 그런데 사실, 1894년에 만들고 출판하지 않은 드뷔시의 <영상>이 하나 더 있다.

 'Images Inedites'라 불리는 이 작품집은 번역하면 '출판되지 않은 영상'이며, '잊힌 영상'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각각 'Lent(느리게)', 'Souvenir du Louvre(루브르의 추억)', 'Quelques aspects de "Nous n'irons plus au bois" parce qu'il fait un temps insupportable(날씨가 나빠서 "숲에는 안 갈 거야"에 의한 몇 가지 아이디어)라는 제목을 단 이 곡들은, 드뷔시의 엄격한 자기 평가기준에 따라 출판되지 않고, 대신 2곡은 미세한 수정을 거쳐 <피아노를 위하여>의 2곡 '사라방드'로, 3곡은 전면적인 개정을 거쳐 <판화>의 3곡 '비 오는 정원'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내가 신선한 충격을 받은 부분은 희귀 레퍼토리여서가 아니라, 연주 때문이다. 보석을 가공하듯 섬세하게 직조하는 투명한 음색, 페달 포인트의 단단한 소리는 내가 알고 상상하던 데무스의 음색 그 이상의 것이었다. 특히 1곡에서 데무스의 오른손 고음부는 '혹시 다른 피아노로 연주하나?' 싶을 정도로 색다른 음색을 들려준다.

 <영상>은 동곡의 표준 레퍼토리인 미켈란젤리(DG)에 비하면 조금 더 조심스럽게, 조금 더 부드럽게 연주한다. 그런 점에서 이 연주는 이전의 기제킹이나 에리쿠르, 비슷한 시기의 미켈란젤리보다는 이후의 이스토민(Adda. 구하기 힘든 연주라 나도 유투브로만 들었다)과 비슷하다. '물에 비친 그림자'의 빛나는 E플랫장조 아르페지오, '라모를 찬양하며'의 좀처럼 들뜨지 않는 분위기 조성(적절하게 루바토를 넣어준다), '움직임'의 주요 동기를 유독 딱딱하게 연주하는 특이한 해석, '잎새를 스치는 종소리'의 곡 전체를 한 덩어리로 묶어주는 부드러운 레가토, '황금 물고기'의 전반부 차분한 분위기와 점점 고조되는 후반부의 대비가 모두 마음에 들었다. '황페한 절에 걸린 달'이 조금 아쉽기는 했지만, 어차피 이 곡에서 나를 만족시켰던 연주는 에리쿠르를 제외하면 없었기 때문에 논외.

 <보헤미아의 춤>, <슬라브 발라드>, <스티리아 타란텔라>, <낭만적인 왈츠>, <마주르카>, <앨범 페이지>는 꿈 꾸는 듯, 비에 젖은 정원을 감상하는 듯 이 세상에서 조금 이격된 느낌을 주는 소품들. 연주는 짤막하게 잘라 말하겠다. 완벽하다. 부연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쓸데없는 부연을 덧다는 것만큼 이 연주들에게 누가 되는 짓도 없다.

 

 <베르가마스크 모음곡>은 워낙 많은 피아니스트들이 쳐서 경쟁 상대도 많은데, 데무스는 '전주곡'의 압도적인 첫 연타부터 다른 연주들의 반발을 잠재운다. 에트빈 피셔를 위시한 독일 피아니스트들의 강점인 '단단한 포르테'는 데무스도 예외가 아닌데, 신기한 점은 그런 '단단한 포르테'가 감성과 음향의 예술인 드뷔시와 적절하게 잘 어울린다는 점이다. 이 연주는 데무스가 얼마나 음색, 루바토, 페달링에 관심이 많고 다채로운 스킬을 개발해왔는지에 대한 좋은 실례다. '미뉴엣'은 살짝 느릿하면서도 선명하지만, '달빛'은 뛰어난 연주임에도 완벽하다고 하기에는 2% 아쉽다. 그래도 '파스피에'는 마지막을 멋지게 마무리짓는다. 아쉬운 부분도 없지 않지만 네 손가락 안에 들어갈 연주다(에리쿠르, 카펠(!), 기제킹 다음 자리ㅋ).

 <장난감 상자>는 관현악 버전만 알고 있었는데 사실은 피아노 버전이 원곡이다. 데무스는 전주곡과 에필로그를 뺀 4곡을 발췌해 연주했는데 귀엽고 흥겨우면서도 신비로운 만년 드뷔시의 특유의 감성을 놓치지 않는다. 곡 중에서는 2곡 '바타유'가 제일 마음에 들었다.

 <녹턴>과 <가면>은 곡의 완성도와 긴장감이 조금 떨어지는 곡들이라 연주가가 커버해야 하는 부분이 많은데, 데무스는 곡의 단점을 가릴 정도로 훌륭한 음색을 가지고 있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내 연주 취향은 <녹턴>보다는 <가면>의 은근한 연주가 더 마음에 들었다.

 <기쁨의 섬>은 연주시간이 5분을 넘기 힘든 짧은 곡이지만 단독으로 설명해야 할 정도로 중요한 곡인데, 드뷔시의 피아노 음악 형식이 집약된 곡이기 때문이다. 데무스는 처음에는 덤덤하게 치는 것 같지만 다른 곡에서 그렇듯 점점 온도를 올려가며 비등점에 근접해간다. 하지만 조금 더 자신의 감정을 풀어놓았으면 어땠을까 싶다. 참고로 마지막 처리가 독특하니 일청을 권한다(들을 수 있다면ㅋ).

 

 <어린이의 세계>는 교본인 미켈란젤리(DG)와 어쩔 수 없는 비교를 당하게 되는데, 첫 곡 '그라두스 아드 파르나숨 박사'는 <기쁨의 섬>처럼 마지막 처리가 독특하다. '어린 양치기'는 판본이 궁금해지는 연주이며, 마지막 '골리워크의 케이크워크'는 말 그대로 '확 깬다.'

 <피아노를 위하여>의 '전주곡'은 친구 굴다를 생각나게 하는 연주. 굴다가 드뷔시에서 전주곡 말고도 자기 이름을 내게 깊게 각인시킨 레퍼토리가 <피아노를 위하여>였는데, 데무스는 그 굴다와 비교해도 모자라지 않는 연주였다. '사라방드'는 뛰어난 연주지만, '7분에 육박한 느린 연주임에도 존재감이 압도적인' 에리쿠르가 너무 대단하다. 그래서 더 아쉬웠다. '토카타'는 여타 연주와는 드물게, 속도감이 아닌 색채감으로 승부를 보는 연주였다.

 지금까지 에리쿠르와 비교하면서 데무스를 비교 열위로 보는 경우가 많았는데, <판화>는 다르다. 첫 곡 '탑'의 기묘한 색배합은 에리쿠르와 동급, 어쩌면 그 이상이며, 이렇게 화려한 음의 팔레트를 보유한 피아니스트가 있었나 싶을 정도로 다채롭게 곡을 채색한다. '어떻게 사람이 이런 소리를 내지'라는 생각이 들 정도. '그라나다의 밤'은 첫 곡에서 끌어올린 긴장감과 정서를 하나도 놓치지 않고 그대로 색다른 것으로 만들어 듣는 사람을 마지막 곡 '비 오는 정원'으로 이끈다.

 페달링 많이 쓰는 드뷔시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데무스의 <꿈>은 몇 안 되는 예외다. <작은 흑인>은 신선하며, <하이든 예찬>은 톡톡 튀는 터치가 일품이다. <렌트보다 느리게>는 어떤 연주로 들어도 재미가 없어서 데무스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영웅의 자장가>는 '아 이 곡은 원래 음울한 곡이지'라는 생각 말고는 드는 게 없었다ㅋ. <스케치북에서>는 좋은 연주지만 이미 에리쿠르의 섬뜩한 연주를 들은 후라 다른 어떤 연주를 들어도 성에 차지 않는 것 같다.

 

 앞의 연주들이 음의 색채감에 치우치는 연주가 많다면, <전주곡> 1권부터는 분석적인 연주가 두드러진다. 데무스는 첫 곡 '델피의 무희들'부터 특유의 시간이 멈춘 듯한 분위기를 잘 잡아나간다. '돛'은 클라이막스 이후 화음 처리가 독특하며, '들을 스치는 바람'은 반대로 클라이막스 화음이 두드러진다. '아나카프리의 언덕'은 미켈란젤리(DG) 이후 경향이 보이지 않아 마음에 드는데, 끝부분 템포가 기이할 정도로 느리다. '눈 위의 발자국'은 페달링이 두드러지며, '서풍이 불 때'의 속도감과 루바토는 곡의 성격과 잘 맞아떨어진다. 스타일은 기제킹과 리히터, 미켈란젤리의 세 극단의 중간점에 위치해 있다. 반대로 '아마빛 머리의 소녀'는 순수하게 음의 아름다움에 탐닉하는 연주다. 1권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가라앉은 성당'은 프레이즈의 분절을 아주 적절하게 이용하며, 페달링을 적절하게 이용한 거대한 울림이 인상적이다(다른 어떤 연주도 데무스같은 울림을 못 만들었다). '민스트렐'은 안정적인 마무리를 들려준다.

 

 <전주곡> 2권 연주도 1권과 크게 다르지 않다. '안개'와 '고엽'은 다소 차분하고 특징없는 연주를 들려주나, 데무스의 개성은 '비노의 문'부터 발휘가 된다. 첫 동기 리듬 처리가 정말 독특하다. '요정은 뛰어난 무용수'의 두 번째 동기는 아주 느릿하게 나오는데, 이게 의외로 잘 어울린다. '히스가 무성한 황야' 특유의 낙천적인 아름다움이나 '달빛이 비치는 테라스'의 신비로운 사색은 잘 살려내지만, '괴짜 라빈 장군'이나 '옹딘' 특유의 날카로운 리듬은 좀 뭉특하게 들린다. 하지만 '피크위크 경에 대한 경의'는 데무스의 뚝심이 잘 어울리는 특이사례. '카노프'는 여타 연주와는 색다른 소리를 들려주며, 마지막 '불꽃놀이'는 중반 곳곳에서 등장하는 루바토가 인상적이다.

 

 두 곡의 아라베스크는 멋진 소품에 어울리는 멋진 연주다.

 

 <연습곡>은 1권과 2권을 나누어 배치했다. 여타 뛰어난 연주들이 그렇듯, 데무스도 '소리'와 '해석' 그리고 '기교'를 잡기 위해 노력하는 연주를 들려준다. '다섯 손가락을 위하여'는 에리쿠르의 '소리'와는 달리 '리듬'이 두드러진다. '3도'는 만족스러운 연주이며, '4도'는 템포가 아주 변화무쌍하다(주요 동기를 처음에 느리게, 나중에 빠르게 제시한다). '옥타브'는 연습곡 연주를 통틀어 다이내믹이 가장 큰 연주를 들려주며, '여덟 손가락'은 매끄럽게 쏙 빠져나가는 느낌을 잘 살린다.

 

 <연습곡> 2권의 연주들은 1권보다 더 뛰어나다(개인적으로 <전주곡>과 <연습곡>을 통틀어 <연습곡> 2권이 가장 마음에 든다). 첫 타석을 장식하는 '반음계'의 연주는 최상급이다. 데무스는 '낡아빠진 반음계적 진행의 연출을 통해 새 시대를 예고하는 신선하고 자극적인 연습곡(슈미츠)'이라 일컬어지는 이 곡의 특성을 잘 이해하고 있다. '꾸밈음'의 연주도 뛰어나며, '반복음' 특유의, 마치 자크 타티의 <플레이타임> 같은 묘하게 차갑고 퉁명스러운 느낌도 잘 살려낸다. '대비음'의 급진적인 정중동에 대한 데무스의 해석은 정말 특이하다. '아르페지오'의 극에 달한 아름다움을 거쳐 리듬의 활기가 가득한 '화음'으로 끝마치는 여정을 듣고 있으면, 데무스가 우리에게 남긴 유산이 절대 적지 않음을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Requiescat In Pace, Maestro Demus (1928.12.2~2019.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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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여엉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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