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그너 갈라 콘서트

 (<발퀴레> 1막과 <파르지팔> 3막)

 크리스토퍼 벤트리스(지크문트, 파르지팔), 에밀리 매기(지클린데), 연광철(훈딩, 구르네만츠), 양준모(암포르타스)

 로타 차그로섹(지휘) /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 / 국립합창단, CBS소년소녀합창단

 

 지인을 통해 우연히 알게 된 덕에 신속히 예매를 완료하고 보러 간 공연. 전곡이 아닌 갈라 콘서트라는 것이 조금 아쉽기는 하지만, 전곡 공연이라는 '이상'보다는 비용도 아끼고 간편하게 올릴 수 있으며 관객들도 부담없이 접할 수 있는 갈라 콘서트라는 '현실'을 택한 것도 나쁘지 않아 보인다. 무엇보다 차그로섹과 연광철을 한 무대에서 볼 수 있다는 엄청난 메리트가 나를 예당으로 이끌었다.

 일단 시작하기 전에는 지휘자와 연광철의 역량만 믿고 보는 공연이라는 생각을 했었고 그 생각은 공연이 끝날 때까지 딱히 크게 변하지는 않았다. 벤트리스는 소리 때깔은 나쁘지 않지만 지크문트를 하기에는 성량과 내지르는 파워가 조금 부족하지 않았나 싶다. 특히 울분과 고통에 차 내지르는 '뵐제! 뵐제!'는 소리가 너무 약해 좀 안타까웠다. 오케스트라를 뚫고 나와야 하는 마지막 'Braut und Schwester bist du dem Bruder-so blühe denn, Wälsungen-Blut!'도 오케스트라에 파묻히기는 마찬가지여서 더더욱 안타까웠다(주먹 꽉 쥐고 부르는데 정말 안타깝긴 하더라).

 매기가 21세기의 '핫한' 바그너 소프라노 중 한 명이라는 사실은 알지만, 역시 아쉬운 건 마찬가지였다. 전반의 또렷한 딕션이 후반으로 갈수록 '약간씩 코먹는 듯한' 모습을 보여준 점이 조금 아쉬웠다. 역동적인 모션을 보여준 점은 좋게 생각하지만 그것을 뒷받침하는 '노래'가 되지 않는다면, 그것도 바그너의 <발퀴레>에서 강렬하지 못한 모습을 보여준다면 존재감이 옅어질 수밖에 없다.

 역시 무대의 주역은 훈딩을 노래하는 연광철. 정말 '크라스가 다르다'는 것이 무엇인지 잘 보여주었다. 웬만한 소리가 다 묻혀버리는 3층까지 또렷하고 강렬하게 전달되는 기백있는 음성은 왜 그가 바이로이트를 비롯한 유수의 오페라 극장의 총애를 받는 가수인지 잘 보여주었다. 세세한 감정 변화나 디테일에는 신경쓰지 않고 묵직하게 훈딩이라는 캐릭터를 표현했는데, 애초에 훈딩이라는 캐릭터가 '세세한 감정 변화, 디테일'과는 백만 광년 떨어졌으니 아주 적확한 접근 방식이다. 가장 기억에 남는 대목은 '오늘 밤까지는 당신을 손님으로 대하겠지만 내일 해가 뜨면 당신을 직접 죽일 것'이라 경고하는 'Mein Haus hütet, Wölfing, dich heut'' 이하 부분.

 차그로섹은 오페라 극장에서 닳고 닳은 지휘자답게 능수능란한 완급조절을 보여주었다.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가 '손이 많이 가는' 오케스트라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사람답게 수시로 바쁘게 지시를 내려가며 합주력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배려했다. 다만 지크문트가 노퉁 뽑는 대목에서는 소리가 좀 김이 빠졌는데, 이 부분은 위에서 말한 '완급조절'과 관련되는 부분이므로 2부 <파르지팔>에서 설명하도록 하겠다.

 

 <발퀴레>를 그럭저럭 잘 끝내고 이어진 <파르지팔>.

 그런데 (사실 온라인 공연소개 보고 눈치챘지만) <파르지팔> 3막에 쿤드리가 없다.

 다시 한 번 말하는데 진짜 없었다.

 아니, 아무리 3막에서 쿤드리 대사가 'Dienen, Dienen!'밖에 없다지만 쿤드리를 없애버리면 어떻게 하냐고!

 쿤드리가 말은 안 하지만 파르지팔의 몸을 씻기는 등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는 사실은 <파르지팔>을 완청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데,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극을 완성시키는 존재가 없어져버리니 구르네만츠는 초반 20분 동안 혼잣말만 하는 독백형 캐릭터로 전락해버리고 파르지팔은 분명 머리는 구르네만츠가 씻겨주는데 발은 유령이 씻어주는 미스테리 심리극이 되어버렸다.

 '그냥 지클린데 한 매기를 2부에 갖다 쓰면 안 되는 거였나'라는 생각도 했었는데, 매기가 개런티를 높게 불러서 그냥 빼버렸나 보다. 매기한테 미안한 얘기지만 그렇게 생각을 안 하면 도저히 납득이 안 가. 

 이 대목에서 연광철에게 감탄할 수밖에 없는데, 실종되어버린 쿤드리의 존재감을 벌충이라도 하듯 자기가 1.5인분, 제대로 터뜨릴 때는 2인분의 존재감을 해주며 3막 초반을 자신의 무대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성 금요일의 음악이 울려 퍼지는 대목에서 '풀잎과 꽃잎에까지 미치는 평화의 자비'를 설파하는 연광철의 목소리를 듣고 있으면 '저 목소리로 설교했으면 나라도 지갑 열겠다'라는 이단심판받기 딱 좋을 생각이 무럭무럭 자라났다.

 연광철의 원맨쇼를 돕기 위해 뒤늦게 어기적어기적 나타난 벤트리스는 나름 훌륭하게 파르지팔을 노래했다. 오케스트라를 뚫는 성량은 없지만 소리 자체는 괜찮은 벤트리스에게는 '위안받을 출구 없는 비극적 영웅' 지크문트보다는 '천로역정 끝에 자비심을 깨우친 순수한 바보' 파르지팔이 더 어울려 보인다.

 암포르타스 역할을 맡은 양준모는 훌륭한 암포르타스였다... 연광철만 없었다면. 분명 흠잡을 데 없이 잘 해 줬는데, 앞부분에서 연광철의 존재감이 너무 강력해 어쩔 수가 없었다.

 차그로섹의 진가는 <파르지팔> 마지막 20분에서 드러냈는데, '이런 오케스트라는 초장부터 힘 빼면 앙상블 무너진다'라고 설파하듯 성 금요일의 음악 대목부터 힘을 주어 곡을 고양시키다 티투렐의 장송 음악부터 엔딩까지 모았던 기를 제대로 터뜨렸다. 바그너라는 레퍼토리가 엄청난 체력을 소모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가 1부/2부 합쳐 140분이라는 시간 동안 빵빵 터뜨려 주기에는 체력이 안 된다는 사실도 냉정하게 판단한 후 내린 결과일 것이다. 역시 오페라 극장에서 오래 구른 짬밥은 어디 안 간다.

 

 총평 : 뭐 이렇게 쓰기는 했지만, 국내에서 이 정도 이상의 바그너 공연을 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기에 나름 만족했다. 무엇보다 연광철과 차그로섹을 한 무대에서 볼 수 있었다는 점에 고점을 주고 싶다.

 

 (추가 : 성 금요일 음악 끝나고 장면전환 시 종치는 음향이 뭔가 허전하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까 음이 하나 없었다. 제보를 받은 바에 따르면 토요일 공연 때도 없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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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절과 통합 : 루비모프 콘서트 (2018.5.12. 土) (Part 2)




 레퍼토리는 패르트의 파르티타, 하이든 피아노 소나타 32번, 시메온 텐 홀트의 <솔로 악마의 춤 IV>, 존 케이지의 프리페어드 피아노를 위한 소품 3개, 그리고 드뷔시의 전주곡 2권이다.

 이렇게 방대한 레퍼토리는 확신과 철저한 연습, 통찰력의 삼위일체가 갖춰지지 않으면 와르르 무너진다. 어쩌면 이 레퍼토리 자체가 루비모프의 거장성을 증명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패르트의 파르티타는 처음 듣는 곡인데 바흐식 대위법에 20세기 양식을 조합한 느낌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바흐, 초기 신빈악파, 초기 바르토크, 카푸스틴을 전부 합친 다음 넷으로 나눈 느낌. 패르트하면 사람들이 동유럽식 미니멀리즘만 생각하지만 원래는 이런 과정을 거쳐 무조음악을 쓰던 사람이다.

 20세기 작곡가의 곡이지만 어찌 보면 바흐 양식에 충실한 첫 곡. 루비모프는 리듬과 다이내믹을 계산하면서, 절제하면서 첫 곡을 풀었다. 처음부터 확 끌리지는 않지만 듣고 있으면 자연스레 몰입하게 된다.

 사실 이런 곡은 치는 사람도 통제력을 발휘하기 어렵다. 대부분의 작곡가가 그렇듯 패르트의 이 곡도 덜 여문 작곡가 특유의 치졸함이 있기 때문이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아직 음악을 어떻게 덜어내야 하는지 잘 모른다.’ 글이고 음악이고 처음 덤벼드는 사람이 저지르는 가장 큰 실수 중 하나가 좋으면 일단 넣어보려고 하는 치기인데 패르트의 곡에서도 그런 느낌이 묻어 나왔다. 하지만 루비모프의 연주는 그 치졸함은 최대한 지우고 풋사과 특유의 풋풋함과 색다름을 잡아냈다.


 두 번째 곡은 하이든의 피아노 소나타 32번. 하이든의 1770년대 작품으로 고전파 작곡가의 작품이지만 아직 바로크 건반 음악의 특징이 깊게 배어있다.

 건반 음악에서 바로크와 고전파 음악의 차이점이 무엇일까. 장식음과 지속음의 차이가 아닐까. 바로크 하프시코드 음악은 트릴을 비롯한 장식음의 시대이며 고전파 포르테피아노 음악은 음의 지속이 가능해지면서 화음의 무게감이 달라졌다. 이 소나타는 그 경계선에 서 있다.

 루비모프가 진가를 드러내는 부분은 여기서부터였다. 그는 개개의 음을 끊어서 이어지지 않게 하면서도(하프시코드식 분절), 그 사이사이에 놓인 화음은 페달을 써가며 뭉쳤다(포르테피아노의 특성). 음악은 이어지되 이어지지 않게 되었다. 분절과 통합이라는 두 가지 방식으로 하프시코드의 특성을 가지되 하프시코드 곡이 아닌 모순을 해결해버린 것이다. 고전파 음악은 포르테피아노로, 드뷔시는 1910년대 피아노로 치는 행보에서 나온 내공이었다.

 루비모프의 하이든에서 특기할 것이 페달링이다. 그는 트릴을 연주할 때마다 오른페달을 써가며 음을 절묘하게 이었다. 음을 끊어야 할 때는 중간 페달로 끊었고, 결정적인 순간마다 왼페달을 기가 막히게 사용했다. 그 페달 사용법을 보고 듣기만 했는데 하이든이 끝났다.


 세 번째 곡은 시메온 텐 홀트의 <솔로 악마의 춤 IV>. 서유럽식 미니멀리즘의 정수를 보여준 작곡가가 존 케이지, 모튼 펠드먼의 방법론을 받아들여 각 파트를 연주자 마음대로 빼고 재배치할 수 있도록 했다. 정교하게 짜인 재료들로 치르는 즉흥연주라 해도 되겠다.

 곡을 들으면서 제목의 의미에 대해 생각했다. 춤은 원을 이루는 회전을 기본으로 한다. 미니멀리즘은 아무리 변화를 추구해도 원래 조립한 재료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결국 원을 이루며 도는 것이다. 하지만 미니멀리즘은 변화를 극단적으로 줄여 효과를 극대화하는 음악. 점 하나를 찍을 때마다 별 하나가 생기고 점 하나를 지울 때마다 별 하나가 사라진다.

 거기에 아주 크지만 우리가 결코 듣지 못하는 요인(즉 악마) 하나가 개입한다. 바로 연주자의 주관이다. 악보를 보지 않고는 연주자가 어떤 파트를 빼고 몇 번을 반복하는지, 어느 부분을 재배치했는지 알 수 없다. 메타연주라는 말을 써야 할까.

 루비모프의 손가락은 70먹은 노인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비슷한 나이대의 폴리니가 이미 추한 꼴 다 보인 걸 생각하면, 적어도 루비모프는 추한 꼴 안 보이고 은퇴할 수 있겠지라는 희망이 생긴다.


 1부가 끝나자마자 관계자들이 부리나케 프리페어드 피아노를 들여왔다. 이로써 의문 하나 해결. 프리페어드 피아노는 리즈Leads 브랜드였다. 처음 듣는 브랜드다. 비싸려나?

 솔직히 말하자면 난 존 케이지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군대 있을 때 후임이 영화를 비롯한 예술에 관심이 있어서 케이지 얘기를 했는데 <4분 33초>를 두고 ‘너무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곡’이라고 했었다. 난 그 말이 정곡을 찔렀다고 생각한다. 케이지는 너무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서 ‘음악은 음악이다(알반 베르크의 명언)’라는 기본 명제를 자주 흐린다. 다행히 이 곡은 질문보다는 음악이 우선인 곡이다. 케이지는 겉보기에 익숙한 매체를 통해 우리를 낯선 세계로 데려가 낯선 음악을 듣게 한다.

 난 처음에 이 곡이 들려주는 소리를 듣고 (공교롭게도) 베르크 <보체크>에서 들었던 그 피아노 소리를 연상했다. 사실 그것은 내 고정관념과 실제 음향이 충돌하는 과정이었다. 프리페어드 피아노는 피아노라는 매체에서 연상할 수 없는 소리를 연달아 내놓았다. 음향은 공, 탐탐을 거쳐 유사 가믈란의 세계로 들어갔다.

 우리가 피아노라는 매체에 대해 가지고 있는 집착은 무엇일까. 바로 ‘피아노에서는 피아노 소리가 나야 한다’ 아닐까. 이 곡은 그 집착을 산산히 부수는 것을 넘어, 그 집착을 버리게 만드는 곡이다. 하지만 고개가 숙여지는 깨우침은 아니다. 그런 파괴가 피아노에 이물질을 끼우는 행위나, 색다른 음향에 대한 과한 몰입이라는 새로운 집착을 낳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루비모프라는 위대한 전달자 얘기를 하자면, (동어반복해서 미안한데) 솔직히 곡에 너무 몰입해서 연주를 생각할 시간이 적었다는 변명 말고 할 말이 없다. 하지만 사실 그게 위대한 연주 아닐까. 너무 기가 막히게 잘 해서 딴 생각을 못하게 만드는 연기를 본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드디어 마지막, 드뷔시 전주곡 2권.

 드뷔시의 <영상>과 전주곡은 둘 다 1권과 2권으로 나뉜다. 1권이 좀 더 유명하지만 2권은 더 깊고 내밀한 방향으로 들어가며 더 그윽하고 완성도도 더 높다.

 그런 2권에서 루비모프가 어땠나면…… 하, 그냥 존나 쩔었다.

 무슨 말을 써도 표현이 안 된다.

 난 40분 동안 음에 함뿍 젖었다.

 반음계가 적시고, 화음이 적시고, 아르페지오가 적신다.

 아첼레란도로 홀리고, 테누토로 홀리고, 루바토로 홀린다.

 <안개>에서는 몽롱해지고, <고엽>에서는 참담해지다가, <브뤼예르>에서 뭉클했다.

 <라비느 장군>의 괴상망측함부터 <카노프>의 모호함까지, <달빛 받는 테라스>의 정묘한 모네식 대비부터 <불꽃놀이>의 찬연한 음향의 폭발까지.

 모든 게 거기 있는데 말로 설명을 못하게 만든다.

 완벽한 연주라는 말은 쓰면 쓸수록 비루해지지만 루비모프의 드뷔시는 완벽했다. 내가 이 이상의 드뷔시 연주를 콘서트에서 들을 수 있을지 의문이다.

 연주에 대한 얘기는 더 못하겠으니 페달링이나 첨언하겠다. 피아노의 역사에서 템포 루바토를 정점으로 올려놓은 이가 쇼팽이라면, 페달링을 정점에 세운 이들은 드뷔시와 라벨이다. 드뷔시의 곡을 연주하려면 그만큼 차원이 다른 페달링 스킬을 보여주어야 한다.

 전주곡에는 그런 스킬이 곡마다 깔려 있다. 한 프레이즈를 연주하면서 중간 페달로 한 음만 콕 집어서 끊어내는 스킬이 빈번하다는 얘기다. 이게 말이 쉽지 진짜 엄청나게 힘들다. 검으로 종이를 베어야 한다고 생각해보라. 더군다나 피아노는 음향이 엉키기 쉬운 악기다.

 루비모프의 드뷔시가 완벽하다고 극찬을 하는 이유의 80%가 바로 이 페달링 때문이다. 소름끼치는 순간은 <와인의 문>에서 나왔는데, 이 곡에는 급박한 하강 연음이 있다. 루비모프는 이걸 왼페달로 풍성하게 울리다가 가운데 페달로 칼같이 끊어냈다. 기민함에 놀라고 명쾌함에 놀라다가 마지막으로 음향에 놀라는 순간이었다.

 

 루비모프는 마음에 안 드는 구석이 있었는지, 아니면 더 보여주고 싶은 게 있었는지 앵콜을 무려 두 곡이나 했다. 첫 번째 곡은 쇼팽 뱃노래였는데, 가장 좋아하는 카펠(RCA)의 폭발하는 연주와는 거리가 멀지만 질퍽한 루바토를 남용하지 않으면서 서서히 끌어올리다가 마지막에 카타르시스를 주는 게 장난 아니었다. 다만 잔실수가 조금 있었던 게 아쉬웠다. 두 번째는 슈베르트 즉흥곡 D.899의 2번이었는데 이것도 드뷔시에 필적했다.


 다 쓰고 나니 하이든을 설명할 때 썼던 표현인 ‘분절과 통합’이라는 말을 총평에 덧붙이고 싶다. 루비모프는 시대를 달리할 때마다 매체를 바꿀 정도로 케이스 바이 케이스에 능한 연주자지만 자신의 미학은 타협하지도 양보하지도 않는다. 바로 명쾌한 음향이다.

 루비모프의 아름다움은 명쾌함에서 온다. 칼로 가르듯 끊어내고 풍성하게 부풀린다. 미련을 남기지도 않고 질질 끌지도 않는다. 하지만 폴리니나 아이마르처럼 거세된 아름다움은 아니다. 정묘한 형상 밑에는 따뜻한 피가 흐르는 혈맥이 있다. 만약 명쾌함과 음향 두 가지 중 하나를 희생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면, 루비모프는 명쾌함을 희생하고 음향을 택하리라.

 시대에 따라, 음악에 따라 다른 접근법을 선택하지만(분절), 그 모든 음악은 명쾌한 음향으로 통합되어 있다. 그것이 내가 들은 루비모프의 음악이다.

 끝으로, 감동적인 연주도 모자라 친절하게 사인까지 해주신 마에스트로께 감사를 드립니다.


 한줄 평 : 이보다 더 나은 연주회를 보게 된다면 그거야말로 내 인생의 행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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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절과 통합 : 루비모프 콘서트 (2018.5.12. 土) (Part 1)




 지금껏 연주회 평을 여러 번 썼지만, 첫 머리를 이렇게 고민하게 만든 연주회는 처음이다.

할 얘기가 없기 때문이 아니다. 할 얘기는 너무 많다. 다른 사람을 붙잡고 열 시간이고 백 시간이고 떠들 수 있다. 문제는 서두를 어떻게 풀어야 이 소름끼치는 연주에 누를 끼치지 않을지 그 방법이 쉽게 생각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연주회 후평을 둘로 나누기로 했다. 연주회 전에 있었던 일들은 1부, 연주회 자체는 2부로 나누었다. 1부와 2부의 어투도 다르니 참고할 것.


 일단 연주회를 보러 간 목적부터 솔직히 말하겠다. 이번 기회가 아니면 두 번 다시 루비모프를 못 볼 것 같았다. 그는 1944년생. 올해 74세다(검색해보고 나도 놀랐다). 기교의 쇠퇴는 둘째 치고 슬슬 은퇴를 하느냐 마느냐를 고민할 시기 아닌가.

 나는 레퍼토리를 확인하자마자 가는 쪽으로 마음을 굳혔다. 패르트, 하이든, 시메온 텐 홀트, 존 케이지, 드뷔시. 이건 12첩 반상 차려놓고 와서 안 먹으면 네 손해라고 말하는 거나 진배없다. 적금을 깨서라도 가야 하는 연주회건만 가격이 S석 5만원, A석 3만원. 세상에 교통비보다 싼 연주회는 처음 가 본다.

 가는 날 비 예보가 있어서 걱정이 되었지만 다행히 통영은 흐리기만 할뿐 비가 내리지는 않았다. 와 봐야 몇 방울 뿌리고 마는 수준. 통영은 관광하기 참 좋은 도시지만 여기 온 목적은 관광이 아니니 후딱 버스 잡아타고 음악홀로 향했다. 그래도 버스 안에서 주마간산으로나마 체감해서 다행이야.

 해안선을 따라 부드럽게 휘어진 도시를 뒤로 하고 음악홀 도착한 게 1시. 음악홀은 미륵도와 한산도 사이라는 천혜의 절경에 자리 잡았다. 사실 시간이 많이 남아서 기다리지 말고 관광이나 할 걸 하는 생각도 했지만, 아마 그랬으면 루비모프의 귀한 사인을 못 받았겠지.

 양 옆으로 해안선을 낀 카페에서 차 한 잔 마시면서 시간을 죽이고 있는데 관계자분과 함께 남은 귀밑머리가 허연 노인이 들어온다. 자세히 보니 바로 여러분이 생각하는 그 분 맞다. 연주회를 앞둔 연주자에게 사인을 받는 것이 무례한 행동일 수도 있어 고민하다가 어느 아주머니가 양해를 구한 후 사진을 찍고 차 대접을 하는 것을 보고 용기 내어 다가갔다.

 솔직히 무협지에서 눈빛만 마주쳐도 격의 차이를 느끼니 마니가 다 개소리인줄 알았는데 이번에 그게 사실인 줄 알겠드라. 눈을 정면으로 마주치는데 진짜 포스가 장난이 아니야. 포스에 눌린 탓인지 영어 울렁증이 도져서 하고 싶은 말의 반도 못 했다. 그래도 무사히 사인 받고 악수까지 했으니 다행. 마에스트로 죄송합니다.

 루비모프는 카페에 앉아 앞으로 있을 연주를 복기하는지 아니면 보는 사람까지 차분해지는 바다를 관망하는지 그저 관조만 하더라. 정신 차려보니 시간은 다가오고 난 30분 전부터 객석에 앉아 기다렸다. 레퍼토리 중에 프리페어드 피아노를 사용하는 존 케이지 곡이 있던데 덩그러니 스타인웨이만 놓여 있어서 어떻게 해결하나 의문이 들긴 했다.

 드디어 5시. 노인이 무대 위로 걸어 나왔다.


 일단 1부 끝. 인증 겸 자랑으로 사인 올려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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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년 9월 13일

 키릴 페트렌코 / 이고르 래빗 / 바이에른 슈타츠오퍼 오케스트라

 예술의 전당


 무슨 기이한 연이라도 닿은 것인지, 갑자기 연주 당일 지인의 주선(?)으로 연주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이 자리를 빌어 그 분께 감사드립니다.)

 1부 곡목은 라흐마니노프의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광시곡>. 라흐마니노프의 후기 수작이지만, 아쉽게도 난 이 곡을 많이 들어보지 않았다. 내가 완청한 이 곡의 유일한 연주는 카펠/라이너/필라델피아(RCA)인데, 연주자 이름만 들어도 도저히 비교 대상으로 삼을 수 없는 연주다. 곡을 익히기 위한 임시방편이라면 모를까…….

 1부 곡목에서 단연 두드러진 것은 피아니스트였다. 러시아 태생으로 독일에서 활동하는 이고르 래빗은 자신의 태생을 증명이라도 하듯, 같은 곡 안에서도 ‘정말 같은 피아니스트가 맞나?’ 싶을 정도로 카멜레온 같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다른 피아니스트에 비교를 해 본다면, 데무스나 바두라스코다 같은 소리로 곡을 진행하던 피아니스트가 갑자기 호로비츠나 리히터의 인상을 드러낸다는 편이 사실에 근사한 비유일 것이다.

 그의 장점은 독일 피아니즘과 러시아 피아니즘의 혼융에만 그치지 않았다. 동글동글 뭉치면서도 밝고 은은한 고유의 음색, 절제된 페달링, 과장 없이 충분히 대범한 해석도 마음에 들었다.

 다만 오케스트라는 피아노가 100% 활약할 수 있도록 도와주지 않았다. 오케스트라는 피아노의 소리가 들려야 할 타이밍에 피아노 소리를 묻어버리고, 피아노 소리가 자리 잡을 공간을 주지 않았다. 2부를 위한 악기 배치(잠시 후에 설명하겠다) 때문에 그런 결과가 나온 것 같지만, 래빗의 피아노 소리를 제대로 들을 수 없다는 점은 많이 아쉬웠다.

 래빗은 앵콜곡으로 쇼스타코비치의 발스-스케르초를 연주했다. 달지 않으면서도 맛있는 소르베 같은 곡이었고, 연주도 충분히 훌륭했다.


 1부에서 가장 빛난 이가 래빗이었다면, 2부에서 가장 빛난 이는 단연 페트렌코였다.

 나는 오늘 그의 비팅을 보면서 왜 베를린 필의 단원들이 그를 선택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기민하면서도 힘찬 지휘로 막대한 에너지를 오케스트라에 부여했고, 수시로 오케스트라에 지시를 내리면서 단원들을 통제했다.

 페트렌코의 연주 설계 중 가장 두드러진 부분은 현악기의 배치였다. 중앙에 첼로를 놓고, 1바이올린 뒤에 베이스를 두며 첼로-비올라-2바이올린 순으로 악기군을 배치한 그의 설계는 크게 두 부분에서 빛을 발했다. 

 첫 번째는 1악장. 현악기 배치는 후반에 진입하는 순간부터 위력을 발휘했다. 바로 제2트리오 부분, 1바이올린의 아르코와 베이스의 피치카토가 엇갈리는 부분에서 지휘자와 오케스트라는 대비가 무엇인지 잘 보여주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의 현악기 배치는, 현악기만으로 연주하는 4악장에서 가장 빛을 발했다. 지휘자의 설계는 오케스트라 특유의 퍽퍽한 소리마저 이겨내고 멋진 풍광을 선사했다.

 그러나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는 법. 페트렌코와 바이에른 슈타츠오퍼는 악기군 사이의 대비를 얻어낸 대신에 정묘한 밸런스를 어느 정도 희생해야 했다. 특히 악기군이 투티를 연주할 때마다 위태롭게 뒤엉키는 음색은 대비를 주기 위해 무엇을 대가로 치러야 했는가를 똑똑히 보여주었다.

 위에서도 말했듯 바이에른 슈타츠오퍼는 퍽퍽한 소리로 일관하는 경향이 강했다(특히 현악기). 더군다나 페트렌코의 기민한 지휘에 잘 따라오지 못하는 안습한 모습까지 보여주었다. 1악장을 연주하는 베이스에서 그것을 똑똑히 들을 수 있었는데, 연주자도 아쉬웠던 실수를 허공에 다시 해보는 깨알 같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관악기로 시선을 돌려보면, 오늘 가장 뛰어난 연주를 해주었던 호른 수석이 있었다. 3악장의 ‘호른 협주곡’을 위시해 곳곳에서 또렷하고 분명한 소리와 안정된 지속음으로 오케스트라를 받쳐주었을 뿐 아니라, 대놓고 어려운 약음 패시지에서 연이어 놀라운 연주를 해냈다(나는 개인적으로 호른의 어려운 약음 패시지들을 강주보다 더 귀기울여 듣는다. 그만큼 호른에게 잔인한 구간이기 때문이다).

 트럼펫 수석 또한 정말 잘했지만…… 안타깝게도 삑사리를 두 번 냈다는 점이 아쉬웠다. 5번의 1악장은 시작의 C#음을 비롯해 트럼페터의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음이 유독 많은데, 트럼펫 수석은 시작은 잘 풀어갔지만 1악장 막판에 삑사리를 냈다. 그리고 2악장 막바지 부분에서도 한 번 더…… 전체적으로 참 잘했지만, 운이 따라주지 않았던 두 번의 실수가 아쉬웠다.

 그밖에 기억나는 주자들은 소극적으로 일관했던 오보에 수석(자기도 답답했는지 1부 끝나자마자 리드 뽑아서 체크해보더라)과 잘못 치고 나서 가죽 상태 확인해보던 팀파니 주자.


 오늘 연주를 세 문장으로 압축하면 다음과 같다.

 1) ‘기재奇才’라는 표현이 잘 어울리는 이고르 래빗.

 2) 어떻게 베를린 필 상임이 될 수 있었던 것인지를 증명한 페트렌코.

 3) 그럭저럭 잘 하는데 죽어도 일류는 못 될 바이에른 슈타츠오퍼 오케스트라.


 더 압축해 볼까? ‘돈값은 하고도 남지만 7만원어치는 아니었던 연주.’

Posted by 여엉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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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년 12월 4일

 마리스 얀손스 / 길 샤함 /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

 예술의 전당


 워낙 급하게 도착한지라 허겁지겁 연주회장에 들어갔다. 1부는 베토벤 바이올린 협주곡. 그 동안 나는 이 곡을 들을 때마다 쉽게 이해하지 못했는데, 다행인지 얼마 전 프란체스카티와 장 푸르네의 영상물을 들으면서 비로소 이 곡을 이해할 수 있었다.

 협주곡의 시작은 매우 좋았다. 팀파니는 정확했고 현은 한 치의 오차도 없었다. 그러나 이 연주에서 가장 할 말이 많은 것은 단연 독주자였다. 샤함은 연주를 시작한 직후부터 지속적으로 약간 거친 듯한 소리를 냈다. 기교상의 문제였나 싶었지만 샤함 특유의 톤은 큰 이상이 없었다. 그는 속도를 빠르게 잡지 않은 채, 호불호가 심하게 갈릴 스타일로 연주했다.

 자세히 설명하자면, 그는 통상적인 바이올리니스트라면 포지션 변경을 해야 할 악구에서 포지션 변경을 하지 않고 한 현 안에서 계속 오고가는, 지금은 거의 볼 수 없는 스타일로 연주를 했다. 물론 정확하고 깨끗한 소리, 쏘아붙이는 듯한 템포, 그리고 명쾌함을 좋아하는 요즘 사람들에게는 합리적인 포지션 변경이 더 설득력 있게 들릴 것이다. 그러나 이런 연주법을 유지하면서 연주하는 것은 정말로 고도의 기교를 요한다. 사실 이 연주법이 사장되다시피 한 것도 이것이 무척이나 어렵기 때문이다.

 또한 바이올린의 각도도 굉장히 대각선으로 기울여 연주를 했는데, 이것도 지금은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스타일이다. 샤함은 이 두 가지를 계속 유지하면서 연주를 했다. 이 두 가지 특징을 가진 연주법은 실제 콘서트홀보다는 음반을 통해 더 쉽게 접할 수 있을 것이다. 요하임으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옛 독일계 바이올리니스트들이 이런 연주법을 자주 선보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이 연주를 높이 평가한다는 것은 아니다. 이런 연주가 설득력을 얻으려면 그에 상응하는 고아한 '소리'를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샤함은 자신의 톤을 유지하는 부분과 그렇지 못한 부분의 갭이 매우 심했다(솔직히 말하자면, 거친 부분의 소리는 술 마신 소리 같았다). 옛 독일계 바이올리니스트들은 그런 연주법을 사용하면서도 더 설득력 있는 '소리'를, 연주를 지속하는 내내 일관되게 유지하는 기술을 갖추고 있었다. 게다가 자의적인 악구 내 템포 변경이 잦아서 독특하다고 할 수는 있을지언정, 매우 좋은 연주라고 할 수는 없었다.

 샤함의 연주를 한 문장으로 정의하자면, '이런 스타일을 색다른 시도로 보는 사람은 높은 평가를 내릴 수 있겠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단 1점도 주기 싫어할 연주'로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얀손스는 그런 샤함이 최대한 그 스타일을 밀고 나갈 수 있도록 판을 깔아주었다. 관현악의 목소리를 최대한 자제시키고, 좀처럼 강주를 크게 터뜨리지 않았다. 빠르게 잡은 첫 팀파니의 D음 연타 동기도 독주자가 느리게 템포를 잡아끌자 바로 맞춰주는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얀손스가 관현악을 자유롭게 분출시킨 것은 3악장 코다에 이르러서였다. 하지만 관현악을 자제시켜서 파곳이 너무 소극적으로 들린 것은 감점 요인이었다. 2부의 파곳을 생각하면, 파곳이 자기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분출시켜주는 것도 좋지 않았을까.

 1부의 앵콜 곡은 크라이슬러의 <아름다운 로즈마리>였다. 샤함은 협주곡에서 보여주었던 그 스타일로 연주를 했다. 관현악은 깔끔하게 반주를 맞춰주었다. 역시 협주곡과 마찬가지로 호불호가 크게 갈릴 스타일이었다.


 2부는 스트라빈스키의 <불새> 모음곡. 스트라빈스키를 일약 유명인사, 대작곡가의 반열에 올려놓은 이 출세작은 많은 개정판이 나왔는데 얀손스는 1945년판을 사용했다.

 1부에서 자제하고 있었던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의 능력은 여기서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오보에, 클라리넷, 파곳, 호른, 첼로, 바이올린…… 어느 것 하나 지적할 새가 없이 칼같이 정확하면서도 옹골찬 소리를 들려주었다. 특히 정확함을 넘어 정밀함을 느끼게 하는 오보에와 능수능란한 클라리넷은 박수를 받아 마땅할 실력이었다.

 또한 나는 연주를 직접 보면서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이라는 오케스트라의 수준에도 연신 감탄을 금치 못했다. 물론 빈 필이나 슈타츠카펠레 드레스덴 같은 경이적인 소리를 갖춘 악단, 현대 오케스트라의 정점인 베를린 필과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을 일대일 대응시키는 것은 무리라고 보지만, 오케스트라는 지휘자가 세부까지 일일이 지시하지 않아도, 즉 굵은 밑그림만 그려주면 알아서 칼같이 화답하는 경이적인 합주력으로 대답했다. 고현, 저현, 목관, 금관, 타악기 모두 정확하고 치밀하고 깔끔하면서도 새되지 않은 소리로 대답해서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연주의 대부분을 채우는 것은 오케스트라의 몫이지만, 연주가 무너지지 않도록 연주의 큰 틀을 잡아주는 것은 당연히 지휘자의 몫이다. 얀손스는 정확한 강약 조절, 정확한 비팅, 그리고 스트라빈스키의 변박이 심한 리듬 구조를 외골격처럼 드러내는 스타일로 지휘를 해 나갔다. 같이 연주를 들었던 지인분께서는 '키츠제이 왕의 죽음의 춤'이 나오기 전까지 얀손스의 지휘가 좀 부산스럽게 들린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난 그 말이 맞다고 본다. 얀손스는 일부러 그렇게 했을 가능성이 있다. 스트라빈스키의 악보는 그대로 연주하려고 들수록 '난잡하게 들릴 수밖에 없는' 드러나고 돌출되는 리듬 구조를 갖고 있다는 것이 내 개인적인 생각이다.

 본인은 스트라빈스키 연주사의 초기를 장식한 두 명의 지휘자로 피에르 몽퇴와 (좋아하는 지휘자는 아니지만) 에르네스트 앙세르메를 들고 싶다. 두 명의 스타일은 판이하게 달랐다. 몽퇴의 스트라빈스키는 그 상충하는 변박들이 두드러지는 연주를 들려주고 있다. 반대로 앙세르메의 스트라빈스키는 그 변박들이 모두 깔끔하게 정리되어, 어떨 때는 스트라빈스키의 리듬적 다양성을 거세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재미있는 것은 스트라빈스키가 앙세르메보다는 몽퇴의 스타일을 더 호의적으로 여겼다는 점이다. 물론 두 사람의 스트라빈스키 스타일은 오늘날 어느 쪽도 주류를 점하지 못하고 있지만, 오늘 들은 얀손스의 스트라빈스키는 단연 몽퇴 쪽에 가까워 보였다.

 '키츠제이 왕의 죽음의 춤' 파트는 당연히 놀라웠지만, 오늘 <불새> 연주에서 가장 좋았던 파트는 그 다음에 나온 '자장가' 파트였다. 그 파트가 나오는 순간, 모든 퍼즐이 끼워맞춰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곡은 숭고한 피날레로 이어졌다. 현의 유니즌 강주를 스타카티시모로 연주했다는 특이한 사항을 제외한다면, 완벽하게 마음에 드는 연주였다. 이런 연주가 끝나고 나면 당연히 환호성과 박수가 필요한 법이다.

 2부의 앵콜 곡으로는 그리그의 <두 개의 슬픈 선율> 중 한 곡, 그리고 엘가의 <야생곰>을 연주했다. 모두 본 프로그램과 잘 어울리는, 아련하면서도 흥겨운 곡들이었다. 당연히 이 곡들이 끝나고서도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주었다.


 연주회가 끝나자마자 바로 프로그램북을 사서 길고도 긴 사인 줄을 기다렸다. 샤함은 생글생글해 보이는 인상이었고, 얀손스는 웃고 있었지만 어딘지 모르는 냉철함이 감돌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긴 줄에도 불평하지 않고 웃음으로 사람들을 맞아주면서 사인을 해 주었다.


 한 줄 평 : 1부는 생각할 거리는 많지만 사적으로 좋아하지 않는 연주. 2부는 경이로움 그 자체.


 (2016.12.5)

Posted by 여엉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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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급하게 쓴 글이라 퀄리티는 낮습니다. 그 점을 감안하면서 읽어주세요.


 2016년 11월 24일

피에르 로랑 에마르 ‘쿠르탁&메시앙’

LG 아트센터

 

 긴 말 필요 없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도록 하겠다. LG 아트센터에 도착해서 프로그램을 확인하니 원래 쿠르탁을 연주하고 슈만을 나중에 연주하도록 짜여 있는 1부 프로그램이, 슈만과 쿠르탁이 자유로이 뒤섞은 프로그램으로 변해 있었다. 변경사항을 보고 가장 먼저 떠오른 게, 데얀 라지치가 스카를라티와 버르토크를 자유로이 섞어서 연주한 채널 클래식의 음반이었다.

 3층 자리에 앉아서 에마르를 기다리는데, 한 10분인가 기다리고 있노라니 연주자가 입장했다. 중키에 부리부리한 눈매가 인상적인 아저씨가 들어오는데, 나긋나긋한 몸짓과는 별개로 절도 있는 느낌이 나는 사내였다.


 페이지 터너를 옆에 둔 채 연주가 시작되었다. 1부는 슈만 소품을 하나 연주하면 쿠르탁 소품을 하나 연주하는 식으로 죽 이어졌는데, 들으면 들을수록 이 프로그램이 하나의 일관성을 가지고 꾸며졌다는 생각이 점점 강하게 들었다. 첫 짝을 이루는 슈만과 쿠르탁은 즐거운 느낌을, 중간의 슈만 알붐블라트 1번과 쿠르탁의 <메달>은 빛나는 느낌, 알붐블라트 3번과 쿠르탁 <평온한 위안>은 부드러운 민요풍 느낌을, 알붐블라트 2번과 <발린트 전시회 서문>에서는 비르투오소티 느낌이…… 이런 식으로 각각의 개성을 기가 막히게 잘 끼워 맞춰, 마치 슈만이 쿠르탁을 위해 작곡하고, 쿠르탁이 슈만을 위해 작곡한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멋진 프로그램이었다.

 이제 연주자의 능력치에 대해서 설명을 할 시간인데, 대개 에마르의 음반을 통해 느낄 수 있는 특징들은 ‘명료함’ ‘정확함’ ‘뛰어난 테크닉’ 정도로 압축할 수 있겠다. 어떤 상황에서도 기교적인 실수를 하지 않고 명징하고 차가우며 세련된 연주를 들려주는 것이 에마르의 가장 큰 특징인데, 내가 음반을 통해 들은 소리를 연주회장에서 그대로 느낄 수 있다는 점은 생각할 때마다 재미있는 점이다.

 그러나 실황에서의 에마르는 내가 연주회장의 어디에서 음악을 듣고 있던지 간에 자신의 (몇 번을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명료하고 절도 있으며 정확한 소리를 쏘아 보냈다. 3층에서 음악을 듣고 있음에도 내가 마치 1층에 와 있는 느낌은 덤이었다.

 프로그램은 지속적으로 슈만과 쿠르탁을 교차하다가 쿠르탁을 몇 곡 이어서 연주하더니 클라이맥스인 스벨링크의 반음계 환상곡에 도달했다. 소품들 사이에서 대곡처럼 느껴지는 스벨링크의 환상곡은 1부의 클라이맥스를 장식하기에 충분한 곡이었다. 이어지는 곡들은 차분히 가라앉는, 사색하는 느낌의 쿠르탁의 신곡 소품들로 마무리.


 2부는 프랑스의 로코코 스타일을 대변하는 작곡가 중 하나인 다캥의 모음곡 발췌로 시작했다. 쿠프랭보다는 조금 더 각진 느낌이고, 라모만큼의 인상적인 날카로움을 보여주지는 못하지만, 나름대로 화려하면서도 세련미 있는 그 시대 프랑스 클라브생 스타일을 잘 보여주는 작곡가인 다캥의 모음곡들에서도 에마르 특유의 명징함과 정확함은 어디 가지를 않았다. 정말 자신이 연주하는 모든 곡의 구조를 도식처럼 투명하게 보여주겠다는 그의 집념은 솔직히 듣는 사람의 기를 질리게 만들 정도였다.

 그리고 마침내 최종보스 등장. 오늘 제일 컬처 쇼크를 먹었던 메시앙의 새도감 중 <마도요>. 우와…… 1부에서 자제하고 있던 에마르의 다이내믹에 대한 무시무시한 능력이 밖으로 분출하는 순간이 이 때였다. 고음의 아르페지오 다이내믹을 조절하는 기계 같은 능력하며, 최강주에서 홀 전체를 뒤흔드는 깨끗하면서도 강력한 터치는 단지 차갑고 명료한 연주자로만 생각하고 있던 에마르에 대한 나의 편견에 기분 좋은 뒤통수를 치는 순간이었다. 몇 번을 다시 생각해도 프로그램 전 곡을 통틀어 이 <마도요>가 봉우리 꼭대기를 이루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충격적인 <마도요> 연주가 있고 난 후, 막간곡인 쇼팽의 녹턴 1번을 연주했다. 연주 자체는 깨끗하고 차갑고 좋았지만(루바토가 거의 없었다), 아무래도 메시앙을 사이에 두고 쇼팽을 들으려니 일부러 쇼팽을 끼워 넣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메시앙-메시앙이 계속 이어지다 보면 무슨 곡이 무슨 곡인지 알아먹지 못할 사람이 태반이니, ‘쇼팽 중간에 끼워줄 테니까 알아서 메시앙 두 곡 구분하라’는 의미로 녹턴을 한 곡 집어넣은 것 같다. 프로그램 전체의 균형과 맞는지는 의문이었지만 어쨌거나 연주는 참 좋았다.

 마침내 오늘의 프로그램 마지막 곡 <숲 종다리>에 도달했다. 메시앙의 피아노곡집 중 하나인 <아기예수를 위한 20개의 시선> 중 <성모의 첫 영성체>와 비슷한 느낌도 나지만, 그보다 좀 더 자연의 거친 풍광에 동조하는 느낌이 강한 이 <숲 종다리>에서 에마르는 하행하는 첫 아르페지오에는 풍성한 감각을, 중간부의 날카로운 풍광 묘사에서는 특유의 명료한 이성을 잃지 않고 연주한다. 그러고 보니 다캥의 곡들도 새와 자연을, 메시앙의 곡들도 새와 자연을 노래하고 있다. 결과물은 굉장히 다르지만.


 연주회가 끝나자마자 1부에서 참았던 환호성과 브라보를 터뜨렸다. 몇 번이나 관객의 박수갈채에 화답하던 연주자는 앙코르곡으로 노타시옹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배열은 5번에서 8번까지를 맨 먼저 연주하고, 그 다음 9번에서 12번까지를, 마지막으로 1번부터 4번까지를 연주하면서 이것만 임의대로 섞어 연주했다. 연주의 퀄리티? 지금까지 설명했던 것에서 딱 하나만 추가하자면, 토 나오게 어려운 패시지들을 기계같이 연주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저 환호할 수밖에 없었다.

 

 아직 올해 볼 공연 중 얀손스가 남아 있기는 하지만, 솔직히 이 정도 퀄리티의 연주를 저렴한 가격에 긴다는 것 자체가 나에게 있어서는 큰 행운이었다. 몇 년 전에 리게티를 연주할 때 안 간 것이 사무치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번 연주회를 보면서 어느 정도 보상받는 느낌이 들었다.


 한 줄 평 : 현음 피아노 = 에마르



 (2016.11.24)

Posted by 여엉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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