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토프 베르트랑

 

 

 

크리스토프 베르트랑. 1981424일 생, 2010917일 자살.

내가 크리스토프 베르트랑의 삶에 대해 아는 것은 이것이 전부다. 그리고 그의 생에 대해 할 얘기도 저것이 전부다. 내가 이 작곡가에 대해 하려는 말은 전부 음악에 관한 것이니까.

난 저번 달까지만 해도 그의 음악을 잘 몰랐다. 부끄럽지만, 얼마 전까지는 그의 존재 자체를 모르고 있었다. 이제 와서야 뒤늦게 그의 음악을 듣고 이런 글을 남기는 것은, 아방가르드 음악을 듣는 사람으로서 이런 글은 남겨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베르트랑은 짧은 생에 어울리게 과작했다. 물론 과작이 누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아쉽기도 하다. 내가 글을 쓰려는 그의 곡은, 그 중 세 개다.

 

첫 번째 곡 <스케일>. 제목 그대로 쉴 새 없이 이어지는 스케일의 연속이 귀를 훑고 지나가는 곡이다. 곡을 들으면서 제일 먼저 떠올린 문장은 본능이 소리를 육화시킨다는 것이었다. 베르트랑은 넘쳐흐르는, 아니 터져 나오는 음향의 세례를 영리하게 소리로 육화시킬 줄 알았다. 그는 젊은 작곡가가 재능과 감각으로 아방가르드 음악의 기교들을 휘저으면 얼마나 기가 막히게 청각을 자극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수시로 등장하는 엇갈리는 인토네이션은 음향의 교란을 극단으로 끌고 가고, 중반부 지속음 사이에서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스케일의 연속은 마치 바다 위에서 피어오르는 섬 같다. 클래식 음악을 듣는 이에게는 걸음마만큼이나 기초적인 스케일이라는 소재로 이런 대곡을 만든 재능이 놀랍다.

 

두 번째 곡 <현기증>. 11개의 섹션으로 이루어진 곡이다. 작곡가가 여기에 피보나치 수열을 도입했다고 하는데, 그건 일단 제쳐놓고 느낌 받은 대로 쓰겠다. 일단 귀에 들어오는 것은 온갖 형태의 지저분한 소리였다. 논 비브라토, 글리산도, 콜 레뇨, 불협화음으로 이루어진 스케일 등등…… 그러나 이것들은 기본 도구다. 베르트랑은 이 소재들을 꼬고 꼬고 또 꼰다. 온갖 지저분한 소리들의 협착이, 반대로 정묘한 형상을 일구어낸다. 12, 23으로, 35, 58, 813으로 꼬여 들어간다. 물론, 작곡가는 어디까지 꼬아야 아름다움이 극대화되는지 알고 있다. 다시 138, 85, 53으로, 32, 21로 풀려나간다. 그 꼬이고 풀려나가는 과정은, 물질계의 단순한 형상이 집합해 복잡한 형상을 이루고 역으로 살펴보면 다시 단순함을 획득하는 피보나치 수열과 같다.

 

마지막 곡 <마나>. 들은 순서대로 썼기 때문에 이게 가장 대단했다 그런 거 없이 그냥 이게 마지막이다. 이 곡은 앞에서 들었던 두 곡의 시원이다. 글을 쓰기 직전에 지인이 기교는 툴박스에 불과하다는 얘기를 해주었는데, 여기서 쓰이는 음악적 기교들은 베르트랑의 환각을 형상화하기 위한 공구에 불과하다. 베르트랑이 이 곡에서 사용하는 아르페지오와 오스티나토 용법이 완전히 새로운 것인가? 꼭 그렇지만은 않다. 그렇다면, 베르트랑의 아르페지오와 오스티나토 용법은 놀라운가? 그런 정도가 아니다. 그는 스물다섯 나이에 선배들의 업적을 완전히 소화했다.

그런데, 중반에 들리는 아코디언에서 그리제이 <파르티엘> 연상한 사람 혹시 있나?

 

한줄 평 : 놀랍다. 역시 세상은 넓고 들을 것은 많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는다.

그런데 드는 의문 : 왜 천재는 요절하지 않으면 요절하려 할까.

Posted by 여엉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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