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9월 13일

 키릴 페트렌코 / 이고르 래빗 / 바이에른 슈타츠오퍼 오케스트라

 예술의 전당


 무슨 기이한 연이라도 닿은 것인지, 갑자기 연주 당일 지인의 주선(?)으로 연주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이 자리를 빌어 그 분께 감사드립니다.)

 1부 곡목은 라흐마니노프의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광시곡>. 라흐마니노프의 후기 수작이지만, 아쉽게도 난 이 곡을 많이 들어보지 않았다. 내가 완청한 이 곡의 유일한 연주는 카펠/라이너/필라델피아(RCA)인데, 연주자 이름만 들어도 도저히 비교 대상으로 삼을 수 없는 연주다. 곡을 익히기 위한 임시방편이라면 모를까…….

 1부 곡목에서 단연 두드러진 것은 피아니스트였다. 러시아 태생으로 독일에서 활동하는 이고르 래빗은 자신의 태생을 증명이라도 하듯, 같은 곡 안에서도 ‘정말 같은 피아니스트가 맞나?’ 싶을 정도로 카멜레온 같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다른 피아니스트에 비교를 해 본다면, 데무스나 바두라스코다 같은 소리로 곡을 진행하던 피아니스트가 갑자기 호로비츠나 리히터의 인상을 드러낸다는 편이 사실에 근사한 비유일 것이다.

 그의 장점은 독일 피아니즘과 러시아 피아니즘의 혼융에만 그치지 않았다. 동글동글 뭉치면서도 밝고 은은한 고유의 음색, 절제된 페달링, 과장 없이 충분히 대범한 해석도 마음에 들었다.

 다만 오케스트라는 피아노가 100% 활약할 수 있도록 도와주지 않았다. 오케스트라는 피아노의 소리가 들려야 할 타이밍에 피아노 소리를 묻어버리고, 피아노 소리가 자리 잡을 공간을 주지 않았다. 2부를 위한 악기 배치(잠시 후에 설명하겠다) 때문에 그런 결과가 나온 것 같지만, 래빗의 피아노 소리를 제대로 들을 수 없다는 점은 많이 아쉬웠다.

 래빗은 앵콜곡으로 쇼스타코비치의 발스-스케르초를 연주했다. 달지 않으면서도 맛있는 소르베 같은 곡이었고, 연주도 충분히 훌륭했다.


 1부에서 가장 빛난 이가 래빗이었다면, 2부에서 가장 빛난 이는 단연 페트렌코였다.

 나는 오늘 그의 비팅을 보면서 왜 베를린 필의 단원들이 그를 선택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기민하면서도 힘찬 지휘로 막대한 에너지를 오케스트라에 부여했고, 수시로 오케스트라에 지시를 내리면서 단원들을 통제했다.

 페트렌코의 연주 설계 중 가장 두드러진 부분은 현악기의 배치였다. 중앙에 첼로를 놓고, 1바이올린 뒤에 베이스를 두며 첼로-비올라-2바이올린 순으로 악기군을 배치한 그의 설계는 크게 두 부분에서 빛을 발했다. 

 첫 번째는 1악장. 현악기 배치는 후반에 진입하는 순간부터 위력을 발휘했다. 바로 제2트리오 부분, 1바이올린의 아르코와 베이스의 피치카토가 엇갈리는 부분에서 지휘자와 오케스트라는 대비가 무엇인지 잘 보여주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의 현악기 배치는, 현악기만으로 연주하는 4악장에서 가장 빛을 발했다. 지휘자의 설계는 오케스트라 특유의 퍽퍽한 소리마저 이겨내고 멋진 풍광을 선사했다.

 그러나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는 법. 페트렌코와 바이에른 슈타츠오퍼는 악기군 사이의 대비를 얻어낸 대신에 정묘한 밸런스를 어느 정도 희생해야 했다. 특히 악기군이 투티를 연주할 때마다 위태롭게 뒤엉키는 음색은 대비를 주기 위해 무엇을 대가로 치러야 했는가를 똑똑히 보여주었다.

 위에서도 말했듯 바이에른 슈타츠오퍼는 퍽퍽한 소리로 일관하는 경향이 강했다(특히 현악기). 더군다나 페트렌코의 기민한 지휘에 잘 따라오지 못하는 안습한 모습까지 보여주었다. 1악장을 연주하는 베이스에서 그것을 똑똑히 들을 수 있었는데, 연주자도 아쉬웠던 실수를 허공에 다시 해보는 깨알 같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관악기로 시선을 돌려보면, 오늘 가장 뛰어난 연주를 해주었던 호른 수석이 있었다. 3악장의 ‘호른 협주곡’을 위시해 곳곳에서 또렷하고 분명한 소리와 안정된 지속음으로 오케스트라를 받쳐주었을 뿐 아니라, 대놓고 어려운 약음 패시지에서 연이어 놀라운 연주를 해냈다(나는 개인적으로 호른의 어려운 약음 패시지들을 강주보다 더 귀기울여 듣는다. 그만큼 호른에게 잔인한 구간이기 때문이다).

 트럼펫 수석 또한 정말 잘했지만…… 안타깝게도 삑사리를 두 번 냈다는 점이 아쉬웠다. 5번의 1악장은 시작의 C#음을 비롯해 트럼페터의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음이 유독 많은데, 트럼펫 수석은 시작은 잘 풀어갔지만 1악장 막판에 삑사리를 냈다. 그리고 2악장 막바지 부분에서도 한 번 더…… 전체적으로 참 잘했지만, 운이 따라주지 않았던 두 번의 실수가 아쉬웠다.

 그밖에 기억나는 주자들은 소극적으로 일관했던 오보에 수석(자기도 답답했는지 1부 끝나자마자 리드 뽑아서 체크해보더라)과 잘못 치고 나서 가죽 상태 확인해보던 팀파니 주자.


 오늘 연주를 세 문장으로 압축하면 다음과 같다.

 1) ‘기재奇才’라는 표현이 잘 어울리는 이고르 래빗.

 2) 어떻게 베를린 필 상임이 될 수 있었던 것인지를 증명한 페트렌코.

 3) 그럭저럭 잘 하는데 죽어도 일류는 못 될 바이에른 슈타츠오퍼 오케스트라.


 더 압축해 볼까? ‘돈값은 하고도 남지만 7만원어치는 아니었던 연주.’

Posted by 여엉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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