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2월 4일

 마리스 얀손스 / 길 샤함 /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

 예술의 전당


 워낙 급하게 도착한지라 허겁지겁 연주회장에 들어갔다. 1부는 베토벤 바이올린 협주곡. 그 동안 나는 이 곡을 들을 때마다 쉽게 이해하지 못했는데, 다행인지 얼마 전 프란체스카티와 장 푸르네의 영상물을 들으면서 비로소 이 곡을 이해할 수 있었다.

 협주곡의 시작은 매우 좋았다. 팀파니는 정확했고 현은 한 치의 오차도 없었다. 그러나 이 연주에서 가장 할 말이 많은 것은 단연 독주자였다. 샤함은 연주를 시작한 직후부터 지속적으로 약간 거친 듯한 소리를 냈다. 기교상의 문제였나 싶었지만 샤함 특유의 톤은 큰 이상이 없었다. 그는 속도를 빠르게 잡지 않은 채, 호불호가 심하게 갈릴 스타일로 연주했다.

 자세히 설명하자면, 그는 통상적인 바이올리니스트라면 포지션 변경을 해야 할 악구에서 포지션 변경을 하지 않고 한 현 안에서 계속 오고가는, 지금은 거의 볼 수 없는 스타일로 연주를 했다. 물론 정확하고 깨끗한 소리, 쏘아붙이는 듯한 템포, 그리고 명쾌함을 좋아하는 요즘 사람들에게는 합리적인 포지션 변경이 더 설득력 있게 들릴 것이다. 그러나 이런 연주법을 유지하면서 연주하는 것은 정말로 고도의 기교를 요한다. 사실 이 연주법이 사장되다시피 한 것도 이것이 무척이나 어렵기 때문이다.

 또한 바이올린의 각도도 굉장히 대각선으로 기울여 연주를 했는데, 이것도 지금은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스타일이다. 샤함은 이 두 가지를 계속 유지하면서 연주를 했다. 이 두 가지 특징을 가진 연주법은 실제 콘서트홀보다는 음반을 통해 더 쉽게 접할 수 있을 것이다. 요하임으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옛 독일계 바이올리니스트들이 이런 연주법을 자주 선보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이 연주를 높이 평가한다는 것은 아니다. 이런 연주가 설득력을 얻으려면 그에 상응하는 고아한 '소리'를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샤함은 자신의 톤을 유지하는 부분과 그렇지 못한 부분의 갭이 매우 심했다(솔직히 말하자면, 거친 부분의 소리는 술 마신 소리 같았다). 옛 독일계 바이올리니스트들은 그런 연주법을 사용하면서도 더 설득력 있는 '소리'를, 연주를 지속하는 내내 일관되게 유지하는 기술을 갖추고 있었다. 게다가 자의적인 악구 내 템포 변경이 잦아서 독특하다고 할 수는 있을지언정, 매우 좋은 연주라고 할 수는 없었다.

 샤함의 연주를 한 문장으로 정의하자면, '이런 스타일을 색다른 시도로 보는 사람은 높은 평가를 내릴 수 있겠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단 1점도 주기 싫어할 연주'로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얀손스는 그런 샤함이 최대한 그 스타일을 밀고 나갈 수 있도록 판을 깔아주었다. 관현악의 목소리를 최대한 자제시키고, 좀처럼 강주를 크게 터뜨리지 않았다. 빠르게 잡은 첫 팀파니의 D음 연타 동기도 독주자가 느리게 템포를 잡아끌자 바로 맞춰주는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얀손스가 관현악을 자유롭게 분출시킨 것은 3악장 코다에 이르러서였다. 하지만 관현악을 자제시켜서 파곳이 너무 소극적으로 들린 것은 감점 요인이었다. 2부의 파곳을 생각하면, 파곳이 자기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분출시켜주는 것도 좋지 않았을까.

 1부의 앵콜 곡은 크라이슬러의 <아름다운 로즈마리>였다. 샤함은 협주곡에서 보여주었던 그 스타일로 연주를 했다. 관현악은 깔끔하게 반주를 맞춰주었다. 역시 협주곡과 마찬가지로 호불호가 크게 갈릴 스타일이었다.


 2부는 스트라빈스키의 <불새> 모음곡. 스트라빈스키를 일약 유명인사, 대작곡가의 반열에 올려놓은 이 출세작은 많은 개정판이 나왔는데 얀손스는 1945년판을 사용했다.

 1부에서 자제하고 있었던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의 능력은 여기서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오보에, 클라리넷, 파곳, 호른, 첼로, 바이올린…… 어느 것 하나 지적할 새가 없이 칼같이 정확하면서도 옹골찬 소리를 들려주었다. 특히 정확함을 넘어 정밀함을 느끼게 하는 오보에와 능수능란한 클라리넷은 박수를 받아 마땅할 실력이었다.

 또한 나는 연주를 직접 보면서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이라는 오케스트라의 수준에도 연신 감탄을 금치 못했다. 물론 빈 필이나 슈타츠카펠레 드레스덴 같은 경이적인 소리를 갖춘 악단, 현대 오케스트라의 정점인 베를린 필과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을 일대일 대응시키는 것은 무리라고 보지만, 오케스트라는 지휘자가 세부까지 일일이 지시하지 않아도, 즉 굵은 밑그림만 그려주면 알아서 칼같이 화답하는 경이적인 합주력으로 대답했다. 고현, 저현, 목관, 금관, 타악기 모두 정확하고 치밀하고 깔끔하면서도 새되지 않은 소리로 대답해서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연주의 대부분을 채우는 것은 오케스트라의 몫이지만, 연주가 무너지지 않도록 연주의 큰 틀을 잡아주는 것은 당연히 지휘자의 몫이다. 얀손스는 정확한 강약 조절, 정확한 비팅, 그리고 스트라빈스키의 변박이 심한 리듬 구조를 외골격처럼 드러내는 스타일로 지휘를 해 나갔다. 같이 연주를 들었던 지인분께서는 '키츠제이 왕의 죽음의 춤'이 나오기 전까지 얀손스의 지휘가 좀 부산스럽게 들린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난 그 말이 맞다고 본다. 얀손스는 일부러 그렇게 했을 가능성이 있다. 스트라빈스키의 악보는 그대로 연주하려고 들수록 '난잡하게 들릴 수밖에 없는' 드러나고 돌출되는 리듬 구조를 갖고 있다는 것이 내 개인적인 생각이다.

 본인은 스트라빈스키 연주사의 초기를 장식한 두 명의 지휘자로 피에르 몽퇴와 (좋아하는 지휘자는 아니지만) 에르네스트 앙세르메를 들고 싶다. 두 명의 스타일은 판이하게 달랐다. 몽퇴의 스트라빈스키는 그 상충하는 변박들이 두드러지는 연주를 들려주고 있다. 반대로 앙세르메의 스트라빈스키는 그 변박들이 모두 깔끔하게 정리되어, 어떨 때는 스트라빈스키의 리듬적 다양성을 거세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재미있는 것은 스트라빈스키가 앙세르메보다는 몽퇴의 스타일을 더 호의적으로 여겼다는 점이다. 물론 두 사람의 스트라빈스키 스타일은 오늘날 어느 쪽도 주류를 점하지 못하고 있지만, 오늘 들은 얀손스의 스트라빈스키는 단연 몽퇴 쪽에 가까워 보였다.

 '키츠제이 왕의 죽음의 춤' 파트는 당연히 놀라웠지만, 오늘 <불새> 연주에서 가장 좋았던 파트는 그 다음에 나온 '자장가' 파트였다. 그 파트가 나오는 순간, 모든 퍼즐이 끼워맞춰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곡은 숭고한 피날레로 이어졌다. 현의 유니즌 강주를 스타카티시모로 연주했다는 특이한 사항을 제외한다면, 완벽하게 마음에 드는 연주였다. 이런 연주가 끝나고 나면 당연히 환호성과 박수가 필요한 법이다.

 2부의 앵콜 곡으로는 그리그의 <두 개의 슬픈 선율> 중 한 곡, 그리고 엘가의 <야생곰>을 연주했다. 모두 본 프로그램과 잘 어울리는, 아련하면서도 흥겨운 곡들이었다. 당연히 이 곡들이 끝나고서도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주었다.


 연주회가 끝나자마자 바로 프로그램북을 사서 길고도 긴 사인 줄을 기다렸다. 샤함은 생글생글해 보이는 인상이었고, 얀손스는 웃고 있었지만 어딘지 모르는 냉철함이 감돌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긴 줄에도 불평하지 않고 웃음으로 사람들을 맞아주면서 사인을 해 주었다.


 한 줄 평 : 1부는 생각할 거리는 많지만 사적으로 좋아하지 않는 연주. 2부는 경이로움 그 자체.


 (2016.12.5)

Posted by 여엉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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